내가 씁쓸했던 건 그들이 독재자를 옹호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같이 너무나 성
실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화장뿐 아니라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
후로 마주친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었다. 아저씨들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고용주나 직원이나 마찬가지였다. 휴식시간도 상관없이 일하고 퇴
근 시간도 없다시피 일하고 일주일에 하루쯤 쉴 만한데 놀면 뭐하냐며 일했다. 그
리고 (적어도 내가 보기엔) 일한 것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보상을 받았다. 그런데
도 그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그리 대단할 것 없는 풍요가 다른 누군가의 덕택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폭력적인 역사가 사람들에게 남긴 가장 큰 해악은 우리 삶의 변화가 한두 사람의
지도자 덕분이라고 믿게끔 만든 데 있다. 그렇게 해서 오늘날의 성공을 두 손으로
일군 당사자들은 역사의 들러리로 물러나 버렸다. ... 메마른 강을 다시 흐르게 하
는 것은 소나기가 아니라 길고 지루한 장마다. 바짝 말라붙었던 한강 역시, 한 줌의
‘위인들’이 뿌린 소나기가 아니라 이름 없이 살다간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모
이고 쌓여 다시 흐르게 됐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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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육 규모를 늘리면 늘릴수록 공급 과잉으로 이어져 양계 산물의 가격은 떨
어지고 만다. 양계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농산물이 비슷한 상황이다. 이를 농업의
트레드밀 효과라 부르는데 기술의 발달로 농업 생산성이 증가해도 공급 과잉 탓에
가격이 하락해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것처럼 다시 제자리 상황이 된다는 것이다.
... 농가들은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규모를 더욱 늘리거나 신기술을 활용해 생
산성을 더욱 높이려 하지만 그럴수록 공급 과잉 상황이 가중되면서 중농 및 소농은
사라지고 대형 농장만 살아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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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전문 용어가 가지고 있는 마법 같은 힘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병아리들
을 ‘처리’한다고 할 때는 죽인다, 잡는다고 하는 대신 불량품을 도태시킨다고 중얼
거린다. 하자가 생긴 물건을 처리하는 거다. 이건 도태다. 도태, 도태, 도태. 어느 순
간엔 정말 닭을 죽이는 것이 문서를 파쇄하거나 삼각 김밥을 폐기하는 것처럼 사무
적으로 와닿을 때가 있다. 도태 대신 B52나 비활성화라는 말을 썼다면 사무적인 순
간이 더 늘어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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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도 내가 직접 했거든. 그때는 회사에서 다 알아서 해주고 그런 거 전혀 없었지.
병아리 좋은 데 없나 알아보러 다니고 사료도 좋은 거 찾아다니고 상인들 불러서
값도 내가 매기고. 지금이 편키야 편치. 그래도 그때는 일하는 게 참 재미가 있었
다. 그냥 봉급쟁이 같지는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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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차별은 혐오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완성된다. ‘다른’ 존재에 대한 혐오와 ‘우리
편’에 대한 사랑. 농장장이 어떤 식으로 남에게 비춰지든 간에 그가 나에 대한 호의
에서 그렇게 행동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는 겨우 3일 전에 알게
됐을 뿐이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같은’ 한국 사람에 대한 도리였다.
차별에 구체적인 형태를 제공하는 것은 혐오지만 그것에 끈질긴 생명력을 부여하
는 것은 사랑이다. 게다가 그런 사랑을 통해 얻은 이익을 거절하겠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등의 원칙에 공감하지만 자신이 혜
택을 누릴 가능성이 명백한 경우엔 노골적으로 차별을 요구하기도 한다. 문제를 어
찌해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만드는 것도 이런 지점이다.
사람들에게 그들의 혐오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입을 삐죽거리고 속으로 딴소리
를 할지언정 고개를 끄덕이는 시중이라도 하지 않을 수 없다. 반면에 그들의 사랑
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감당할 수 없을만큼 거센 항의가 터져 나온다. 뒤틀리고
날이 서 있긴 하지만 그것 역시 사랑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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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천사도 짐승도 아니다.
불행하게도 언제나 천사가 되려던 자들이
짐승이 되고 만다.
파스칼, 팡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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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하나만 특별히 여기는 것은 위선 아니냐는 말을 들었어요. 하지만 모든 일에
관여하는 것은 불가능하죠. 모든 비극에 참여하려 했다간 역으로 손가락 하나 움직
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한 가지만이라도 관여할 수 있으면 되는 겁니다. <이
치열한 무력을, 사사키 아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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