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의 바다 >
*10개국 언어의 음반
1991년 사람의 목소리와 가장 많이 닮아 있다는 악기 비욜(Viol)의 선율이 영화 내내 흐르는 <세상의 모든 아침 : Tous les matins du monde>이라는 명작이 있었다. 여기서 처음 알려진 비욜 연주자이자 지휘자인 조르디 사발(Jordi Savall)은 지금까지 대략 100여 장에 이르는 음반을 냈다. 그리고 98년 이후의 모든 음반은 'ALIAVOX'라는 자신이 만든 레이블을 훈장처럼 달아서 내보낸다. 미리부터 조금 김 빼는 이야기지만 <세상의 모든 아침>에서의 사운드보다는 'ALIAVOX'가 조금 건조한 편의 음색을 지니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레코딩 과정이 지나치게 디지털화된데 원인이 있지 않나 싶다. 때문에 비욜의 따스하고 정감 어린 연주가 다소 반감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는 한국에 두어 차례 왔었는데 2007년 두 번째 방문했을 때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 해 여름 독주 연주회는 여의도 국민일보 지하 영산아트홀에서 있었다. 당시 연주에는 마이크나 앰플리파이어, 스피커 등 증폭 장비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악기 소리 그대로를 들려주는 연주였기에 놀랄 만큼 아름다운 비욜의 음색을 가감 없이 곁에서 들을 수가 있었다. 실제로 17세기 음악을 17세기 악기로, 17세기 연주로 즐길 수 있었던 훌륭한 연주회였다.
조르디 사발과 그의 부인 몽세라 피게라스
그 후 여러 장의 음반을 접하던 중 2010년부터 2011년도까지 제작되어 2012년도에 발매된 <MARE NOSTRUM>이라는 음반을 만나게 됐다. 놀라운 것은 우선 비싸다는 것이다. 국내에 잠시 수입되어 들어왔을 때 2장 한 세트의 CD 음반이 10만 원을 넘었다. 아무리 비싼 CD도 그렇게 까지 비싼 CD를 본 적이 없는 필자로는 놀라서 ‘이것은 칼만 안 들었지 강도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이리저리 발품 손품을 팔다가 해외 직구를 통해서 약 70% 가격에 음반을 구했다. 데굴데굴 구를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솔직히 아까워서 속이 쓰리고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러나 일단 음반을 받아 든 순간 “아! 그럴 만 하구나” 하고 끄덕여졌다. 이 음반은 단지 음반만 있는 것이 아니라 458쪽 전체가 칼라 인쇄에 양장 커버로 포장된 책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런 음반과 책을 동시에 낸 것을 이른바 CD-BOOK이라고 한다. 또한 이 책은 프랑스어, 영어, 스페인어, 까탈루니아어(스페인 북쪽 이베리아 반도 언어), 독일어, 이태리어, 터키어, 그리스어, 아랍어, 히브리어 등 10 개 국어로 번역되어 있는 독특한 책이다. 말하자면 지중해 연안 국가들의 언어로 번역해놓은 것이다. 물론 아쉽게도 이 가운데 힘없고 돈 없는 몰타, 슬로베니아, 세르보-크로아티아, 알바니아 같은 나라의 언어는 없다. 원래 세상인심이 그런 것이니까. 또 요즘은 신자유주의 같은 이상한 자본주의가 팽배해 있는 세상이기도 하니까.
아울러 읽을 만한 것들이 비교적 적지 않게 들어있다. 그런데 음반을 사서 들어볼 만한 것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읽을 만한 것이 들어있다고 하니까 조금 이상하기도 하다. 또 고대와 중세의 지중해와 연관된 작품들 사진도 간간히 들어 있어서 눈요기도 할 만하다.
로마가 지중해 전역을 장악하고 나서 지중해를 <우리의 바다 마레 노스트럼>이라고 칭하게 된다.
*지중해는 우리의 바다
우선 음악의 이야기에 앞서 지중해의 일반적인 이해와 함께 이 음반의 제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중해는 면적 296만 9,000㎢, 길이 약 4,000km, 최대 너비 약 1,600km, 평균 수심 1,458m, 최대 수심 4,404m이다. 지중해는 아프리카·아시아·유럽의 3개 대륙에 둘러싸여 있고, 연안에 접해있는 나라만 22개국에 달한다(주 1 참조). 또 서쪽은 지브롤터 해협으로 대서양과 통하고, 동쪽은 수에즈 운하를 거쳐 홍해 및 인도양과 연결된다. 또 북쪽은 다르다넬스·보스포루스 해협으로 흑해와 이어진다. 뭐 복잡하다 싶으면 그냥 유럽과 아프리카 중간에 있는 엄청나게 큰 호수 같은 바다라고 생각하면 된다.
한편 음반 제목인 ‘마레 노스트럼’은 라틴어로 ‘우리의 바다’라는 의미이다. 맨 처음 시작된 것은 로마시대 때부터라고 한다. 본래 지중해는 이집트인들이 가장 먼저 활동하였고, BC 2000년경 동(東) 지중해의 크레타 섬과 에게 해를 중심으로 에게 문명을 꽃피웠다. BC 13세기경 페니키아인이, BC 8세기∼BC 6세기에는 그리스인이 해상 무역을 장악하였고 곳곳에 식민도시를 세웠다. 또 서(西) 지중해를 지배하고 있던 카르타고는 로마와 3차례에 걸친 대 전쟁(포에니 전쟁)에서 패하여 결국 로마가 지중해를 지배하게 된다. 바로 이때 지중해는 로마의 ‘내해(Mare Internum)’가 되었다(사진 참조). 그래서 지중해가 자기네들 바다라는 것이다. 때문에 마레 노스트럼(우리의 바다)이 되었다. 그리고 지중해라는 말의 어원도 라틴어로 지구의 중심을 뜻하는 'mediterraneus'에서 비롯된 것이다. 원래 세상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까 그것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종교와 삶과 음악과 문화의 교류
지중해는 앞서 간단히 말한 바와 같이 수많은 나라와 인종과 종교와 역사가 얽히고설킨 곳이다. 뿐만 아니라 수 천 년에 걸쳐 동서양의 문명이 충돌과 충돌을 거듭한 대표적인 지역이기도 하다. 따라서 음악도 엄청나게 다양하고 또 민족적 인종적 특징과 전통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융합되고 문화가 서로 녹아들어 있기도 하다. 사실 이와 같은 다양성과 복합성을 지닌 문화의 하나인 음악을 모으고 연주하고 자료로 남기는 일은 참으로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비싼 음반과 책일지라도 그만큼의 가치와 의미가 있는 것이다. 배는 조금 아프지만.
이 CD-BOOK에 들어 있는 음악은 총 28곡이다. 악기도 지중해 연안 국가들의 음악에서 사용되는 악기들이 망라되어 나온다. 뿐만 아니라 음악 자체부터가 지중해 주변국 음악 가운데 가장 전통성이 있고 의미 있는 곡들을 선별해서 연주하고 노래했다. 연주자들은 조르디 사발이 이끄는 에스페리옹(Hesperion) 악단이 고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비롯해서, 아르메니아 출신 연주자들은 Nay(네이 또는 나이로 4500년 ~ 5000년 전부터 현재까지 연주되고 있는 아랍어 권, 이란, 중앙아시아 지역의 목관악기), Duduk (두둑 : 아르메니아 전통악기로 오보에와 유사), Kemence(케멘체 : 터키 식 첼로)를 연주한다.
터키 연주자들은 Oud(우드 : 아랍, 터키, 중앙아시아 등 이 지역의 발현 악기), Kemence, Tanbur(류트계의 발현악기와 가죽을 친 북류의 2가지), Kanun(아랍의 거문고 같은 악기), 타악기 등을 연주하고, 불가리아 연주자는 피리 일종인 카발, 그리고 이스라엘 연주자들은 우드와 타악기, 그리스 연주자들은 Santur(고대 페르시아에서 생겨난 악기로 상자에 붙인 줄을 채로 연주하는 타현 악기. 동서양에 전파되어 피아노의 원조가 됨), Morisca(기타와 유사한 악기)를 연주한다. 모로코 연주자들은 Oud를, 팔레스타인 연주자들은 Qanun(Kanun과 유사)을 연주한다. 이렇게 다양한 악기들이 어우러져서 내는 음악은 지중해의 역사만큼이나 깊이 있게 다가와 가슴을 바닥부터 흔들어 놓는다.
*고음악 성악가 몽세라 피게라스
그리고 남녀 두 명이 보컬을 맡는다. 그중 여자 보컬 한 명은 지휘자인 조르디 사발의 부인인 몽세라 피게라스(Montserrat Figueras)이다. 그녀는 이 음반을 내고 바로 그해 2011년 11월 23일 투병 중이던 암으로 사망했다. 향년 69세. 성악가였던 몽세라 피게라스가 처음 음반에 등장했던 것은 앞서 이야기했던 <세상의 모든 아침>에서 주인공 딸의 성악 더빙이었다. 당시 목소리는 대단히 청아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자신의 독집 음반을 내기 시작한 그녀는 투명하고 아름다운 목소리, 신비하고 나른한 음색으로 중세에서부터 르네상스, 바로크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레퍼토리로 남편 조르디 사발과 함께 20세기 고음악의 부흥을 이끌어왔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녀의 또 다른 특징은 소프라노일지라도 비브라토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담백한 목소리를 꼽는다. 이 음반에는 또 조르디 사발의 아들 페란 사발도 기타 연주를 하며 컬래버레이션으로 참여했다고 하는데, 생각건대 컬래버레이션 정도는 아니고 그냥 한발 넣은 것 아닌가 싶다. 사실 아버지인 조르디 사발이 아들을 띄워주려고 거창한 단어를 쓴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마레 노스트럼 공연 사진>
수록곡으로는 지중해 연안에 사는 유태인의 노래, 스페인의 알폰소 10세의 노래, 헤브라이 성가, 발칸 반도의 터키 전통음악, 모로코 베르베르족 전통음악, 우스크 달라, 알렉산드리아 및 사라에보, 모로코, 튀니지의 유태인 음악, 튀니지 출신 테너 가수의 노래, 그리스 천사의 노래, 헤브라이 자장가, 14세기 이태리 음악, 까탈루니아 및 그리스 전통 성가, 이스탄불의 17세기 음악가 칸테미르의 곡, 불가리아 전통 음악 등이다. 그리고 조르디 사발의 아들인 페란 사발의 즉흥곡이 마지막 곡으로 들어 있다. 이 곡들 모두 각 지역의 전통적인 독특한 곡들이기 때문에, 듣고 있노라면 다양성의 즐거움과 낯선 아름다움이 공존한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이 지역의 전통악기들은 삶의 애환이 깊이 배어있는 소리를 전해주는 듯 느껴진다.
지중해의 어느 해변
*지중해의 비극
그러나 이렇게 의미 있고 아름다운 음악이 깃들어 있는 지중해의 오늘은 우울한 뉴스로 가득하다. 특히 지중해는 이제 '우리의 바다'가 아니라 '죽음의 바다'가 되어 버렸다. 1993년 이후 지금까지 약 2만여 명의 난민이 유럽으로 가는 지중해에서 선박 침몰로 사망했다. 북아프리카의 기아와 내전, 그리고 중동의 리비아 전쟁이 바로 지중해를 죽음의 바다로 만든 것이다.
이 음반을 처음부터 듣다 보면 몇몇 곡은 마치 지중해 저 깊은 심해에 잠든 영혼을 위로하는 진혼곡처럼 가슴을 저리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
(주 1) : 스페인, 프랑스, 모나코, 이탈리아, 몰타 ,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알바니아, 그리스, 터키, 키프로스,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이집트, 리비아,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세계음악 컬럼니스트 김선호>
우스크다라에서 바라본 이스탄불의 낙조. 멀리 갈라타타워가 보인다.
Jordi Savall Üsküdara With Montserrat Figueras
(조르디 사발 & 몬세라트 피게라스우스쿠다라)
▼
https://youtu.be/FRcGJnd0zI0
본문은 Chrome 과 글자 크기 110%에 최적화 돼 있음을 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