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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쿠데타
당조직 지도부 비서 직책을 겸하고 있는 오만규는 근대리아에 머물면서 실질적인 제 일인자가 되어 있었다. 명목으로 서일 대표를 내세웠으나 그는 감찰대는 물론 이금철의 조직과 자금담당 장호성까지 장악한 것이다. 당조직 지도부 비서는 군은 물론 보위부, 사회안전부 등 국가 주요기관에 대한 감시, 통제, 인사업무를 수행하는 직책이다. 당서열도 오만규가 서일보다 높았으므로 근대리아의 북한 조직을 그가 통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저녁 무렵, 대표부 안에 있는 오만규의 집무실에 불려간 최태호는 턱을 들고 있었지만 긴장했다. 오만규는 해사한 용모의 사내였는데 흰 얼굴에 입술이 붉다.
그는 테이블 앞에 선 최태호를 바라보며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동무는 이금철 동무와 함께 근대리아의 개척 당시부터 일해 왔다고 들었소,」
「예, 비서 동지, 그렇습니다.」
최태호의 조심스러운 대답을 들은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동무는 창립공신이나 마찬가지요. 우리 공화국의 기반이 이곳에서 이만큼이라도 닦여져 있는 것은 모두 동무 같은 애국자의 덕분입니다.」
「아니올시다, 비서 동지, 모두 경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가르침으로‥‥」
「우리 그런 형식적인 말은 하지 맙시다.」
웃는 얼굴로 오만규가 손을 저었다.
「거기 앉으시오, 최 동무.」
최태호는 테이블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으나 아직 긴장을 푼 것이 아니다.
변화가 무쌍해서 내일 일을 예측할 수 없는 권력의 세계였는데다 이쪽은 뒤까지 구린 것이다. 오만규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동무가 사업장 관리를 맡아줘야겠소. 이금철 동무를 대신해서 말이오. 동무는 이제부터 근대리아의 모든 사업장을 관리하게 됩니다.」
놀란 표정으로 눈만 껌벅이는 최태호를 향해 그가 다시 웃었다.
「이금철 동무는 당의 조직을 맡게 될 거요. 조직관리는 모두 이동무의 책임이지.」
그야말로 바라던 자리였으므로 최태호는 침을 삼켰다. 이금철이 조직, 자신은 관리, 장호성은 자금을 맡는 이상적인 인사조처인 것이다.
「어떻소? 맡아주겠소?」
「감사합니다, 비서 동지.」
「당연한 인사요.」
오만규가 테이블 위의 서류를 들추더니 머리를 들었다.
「곧 지도자 동지로부터 격려문이 올 거요. 기대하시오.」
격려문을 받는다는 것은 훈장 이상의 가치가 있었고 그것은 곧 신임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고급 당원은 사무실에 격려문을 액자에 걸어놓는 것으로 신임을 과시하는 것이다.
들뜬 마음으로 오만규의 방을 나온 최태호가 타운의 코즈모프 클럽에 들어섰을 때는 오후 7시가 되어 있었다. 클럽의 지배인 권동호가 사무실로 따라 들어서며 말했다.
「사장 동지, 조금 전에 시내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권동호는 그의 심복이다. 해주 출신의 그는 최태호와 근대리아 개척 당시부터 함께 지내온 사이로 이미 타운의 고려인 명의로 식당과 꽤 큰 잡화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모두 최태호가 떼어준 몫이다.
최태호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시내에서 전화가 왔다는 것은 변순태로부터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권동호가 그에게 바짝 다가섰다.
「급하다고 하는데요, 사장 동지.」
같은 배를 탄 입장이라 권동호의 목소리는 은밀했다. 머리를 끄덕인 최태호는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어두워지면 나갈 작정인 것이다.
타운 외각의 무허가 주택들은 대개 1년 안에 철거되고, 살고 있던 불법 체류자들도 제각기 이주민 아파트를 얻어 나간다. 하지만 10개월의 겨울 동안 추위를 견디려면 무허가 주택이라고 어설프게 지어서는 안 된다. 무허가 주택 전문 건설업체들이 지은 조립식 시멘트 건물들은 단단했고 영하 40도의 추위도 너끈하게 견딜 수가 있었다.
최태호는 무허가 주택지역의 골목을 한참이나 걷더니 이윽고 허름한 시멘트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보안등도 켜 있지 않은 골목 안은 어두웠지만 벽에 붙어 서 있는 사내 두 명이 보였다. 머리 쪽의 흰 면이 이쪽을 향하고 있는 걸 보면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통나무 대문을 두어 번 두드리자 곧 안에서 문이 열렸고 희미한 천장의 전구 아래 있는 두 사내가 드러났다. 문을 열어준 사내가 곧 밖으로 나갔으므로 방 안에는 그들 셋뿐이었다.
「어서 오시오.」
자리에서 엉거주춤 엉덩이를 드는 시늉을 했다가 내린 사내는 변순태이다. 그 옆에 앉았던 사내는 예의바르게 일어났는데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서로 인사하시지. 이쪽은 우리 사장님의 비서실장인 김봉만씨요.」
사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머리만 끄덕였으므로 최태호는 그냥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이오?」
그의 연락이 왔다는 말을 듣고 나서 좋았던 분위기가 깨져버린 최태호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최사장 부하로 박동기라는 자가 있지요?」
변순태가 묻자 그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그렇소. 하지만‥‥」
박동기는 일주일 전에 색시집의 금고를 털어 도망친 것이다
그는 조선족으로 연변에 노모가 있다고 했으니 아마 그쪽으로 갔을 것이었다.
「그놈이 국경에서 경비대에 잡혔소. 불심검문에서 주머니에 돈이 삼만 달러 가깝게 들어 있는 것이 발견되자 경비본부로 압송이 되었소.」
「그놈은 그 돈을 사업장에서 모은 돈이라고 했는데 어느 사업장이냐고 추궁했더니 당신의 사업장이라고 자백한 거요.」
이미 굳어져 가고 있던 최태호의 얼굴에 핏기마저 가셔졌다.
변순태가 탁자 위로 상반신을 기울였다.
「경비본부의 정보원을 통해서 우리도 조금 전에야 알게 된 거요. 경비본부는 사실확인을 한다고 북한 대표부에 연락을 했소. 북한 대표부 직원이 그놈을 만났고.」
「당신의 사업장이 탄로난 것 같소.」
「이것 야단났는데.」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최태호는 이미 자제할 힘을 잃고 있었다.
「그렇다면 놈은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
일목요연하게 오만규의 갑작스런 호출과 격려, 그리고 승진과 격려문의 내용이 드러난 것이다. 놈은 이쪽의 눈치를 보려고 부른 것이고 지금 증거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을 것이다. 최태호가 초점 없는 시선으로 변순태와 김봉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망명해야겠소.」
「우리가 조금 손을 썼습니다.」
그렇게 말한 것은 김봉만이다.
「이제 더 이상 북한 대표부는 그놈을 면담하지 못할 거요. 경비본부에서 막을 테니까.」
「하지만.」
「오만규가 어디까지 알고 있느냐가 문제요.」
「그놈은 이미 날 처형시키려고 작정을 했소. 난 압니다.」
최태호가 머리를 흔들었다.
「이미 늦었소.」
「포기는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아요.」
김봉만이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내가 그런 배짱도 없소? 뒤에서 우리가 받쳐준다는데. 이제까지 이룬 사업장들이 아깝지도 않소?」
오만규가 근대시 외곽의 을밀대식당을 나왔을 때는 밤 10시 반이 되어 있었다. 짙은 어둠 속을 흐르는 바람을 타고 한두 점씩 눈발이 날리는 날씨였다. 술기운으로 달아오른 피부가 기분좋게 식혀졌으므로 그는 현관 앞에 서서 좌우를 둘러보았다. 식당은 북한의 조직에서 관리하는 사업장 중의 하나로 종업원은 물론 경비원도 조직원이다. 칠팔 명의 경호원이 주춤거리며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으므로 그는 느린 걸음으로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랐다. 을밀대식당은 대표부에서 가깝기도 했지만 음식맛이 좋았으므로 특별한 약속이 없는 한 그는 이곳에서 식사를 한다. 운전석 옆자리로 경호원이 오르자 승용차는 곧 출발했다. 뒤를 경호차량이 따르고 있다. 차가 대로를 달려가기 시작했을 때 그는 수화기를 들었다
「별일 없나?」
「이상 없습니다, 동지.」
이상(異常)을 기다리고 있던 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난 감찰대 본부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그쪽으로 연락하도록.」
「예, 비서 동지.」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는 힐끗 앞자리의 부하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동무, 감찰대 이 개조를 비상대기 시켜라. 도망자 수색작전이라고 해.」
누가 최태호와 한통속인지 아직 알 수 없었으므로 작전은 극비리에 수행되어야만 했다. 경비본부에 잡혀 있는 사내가 최태호의 개인영업장 고용원이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최태호는 20명 가까운 여자를 고용한 색시집 사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정보는 얻지 못했는데 경비본부가 갑자기 면담을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오만규는 어금니를 물었다. 서일을 제외한 간부급 전원에게 감시를 붙인 한편으로 그들의 뒷조사를 하고 있는 중이다. 비밀합의서의 유출에도 의혹이 있었는데다 간부급들이 호사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근대리아의 북한 조직 내부에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벌일 작정이었다. 신호에 걸린 차가 멈췄으므로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근대시의 중심부로 향하는 사거리였다. 그는 문득 앞쪽의 경호원을 바라보았다. 감찰대의 대위급 간부로 그의 경호책임자였다.
「지난번 감찰대장을 해친 것이 김상철이 아닐지도 모른다.」
몸을 돌린 대위가 그를 바라보았다. 30대 초반으로 육중한 체격의 사내였다.
「그렇다면 누구란 말씀입니까?」
「최태호가 제 비리를 은폐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신호가 풀리자 승용차는 속력을 내었다. 대위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그럴 가능성도 있겠습니다, 비서 동지.」
「평양에서 곧 감찰대가 대폭 증원될 것이다. 지난번 호위대는 너무 소문만 요란하게 내었어. 송무용, 그 사람이 본래 허세가 심한 사람이야.」
그는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허세만 부리다가 근대리아 정부의 표적이 되어서 쫓겨난 거야.」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오만규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왜 이 길로 가는 거야?」
그 순간 대위가 상반신을 와락 돌리더니 권총의 총구로 오만규의 얼굴을 겨누었다.
「이젠 닥치고 있으라우.」
「아니, 이놈이.」
얼굴이 하얗게 질리도록 놀랐으나 오만규는 눈을 부릅떴다.
「이놈이 감히.」
「이 새끼, 한 번만 더 입을 놀렸다가는 골로 보내버리겠어.」
「운전사 쳐다볼 것 없다, 내 동료니까. 그리고 경호차는 내가 대표부로 돌려보냈어. 네가 오입 한다고 했다.」
「이 놈이.」
「이 새끼, 닥치라니까.」
사내가 권총을 휘둘러 손잡이로 관자놀이를 쳤으므로 오만규는 옆으로 쓰러졌다. 차가 속력을 내며 달리는 것이 진동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선 김상철을 본 오만규는 눈을 치켜떴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손발이 묶이지도 않았다. 김상철은 그의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근대시 외곽에 위치한 창고 건물의 사무실 안이었다. 스무 평쯤 되는 사무실에 대여섯 개의 책상과 의자는 모두 한쪽으로 치워졌고 그들 주위에는 이한과 변순태, 최태호, 김봉만 등이 서 있었다.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넌 내가 누군지 아는가?」
「김상철이, 네 사진을 보았다.」
대뜸 대답한 오만규가 붉은 입술을 부풀리며 웃었다.
「난 살아 돌아가긴 틀린 모양이군.」
「네가 순순히 입을 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낸 김상철이 그에게로 내밀었다.
「그저 없앨 계획이었는데 내가 조금 시간을 낸 것이지.」
그는 오만규가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네가 내 처의 살해를 지시한 장본인인가?」
그러나 담배연기를 길게 내뽑은 오만규는 쓴웃음만 지었다. 김상철이 빼들었던 담배를 다시 갑 속에 집어넣었다.
「어떠냐, 흥정을 하는 것이? 먼저 내 조건을 말할 테니 우선 듣기나 하고 결정을 해라.」
「‥‥‥‥‥」
「북한 이주민 30만 명을 받게 해주지. 아마 내일 당장이라도 총독 보좌관과 합의서를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퍼뜩 시선을 든 오만규가 코웃음을 쳤으나 대꾸는 않는다.
「한 달 안에 30만 명을 이주시킬 수도 있어. 이쪽의 숙사가 준비된다면 말이야.」
「내 원한을 잊겠다. 이미 지난 일, 피값은 충분히 받았고 주모자를 찾는다는 것도 이젠 별로 의미가 없다.」
「‥‥‥‥‥」
「네 당면 목표가 이주민 문제일 텐데. 네 조국을 위해서도 말이야, 어때? 이제 내 요구사항을 말해 줄까?」
오만규가 입에 물었던 담배를 떼더니 재를 털었다. 김상철이 내처 말했다.
「지난 9월 15일에 남북한이 합의한 내역을 말해라. 네가 말한다고 북한이 망하지는 않을 테니까, 남한이야 물론 혼란스럽겠지만. 넌 시치미를 떼고 있으면 되고. 근대리아에 이주민이 대량으로 넘어올 텐데 그 와중에 북한이 남쪽까지 신경 쓴다면 분수도 모르는 짓이야.」
「이주민 30만이라.」
입을 연 오만규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마치 총독이나 되는 것처럼 말하는군.」
「내가 한국의 K공작을 막도록 되어 있어.」
퍼뜩 시선을 든 오만규를 향해 그가 말을 이었다.
「K공작의 목적이 근대리아의 한국화라는 건 너도 알 것이다. 엄청난 자금과 인력이 단기간에 쏟아지는 사이로 공작이 급진전 되고 있지. 그 책임자까지 대표 자격으로 근대리아에 와 있어.」
「그 K공작을 저지시키기에 북한의 인력이 적당하다는 생각이야. 균형을 맞추겠다는 뜻이다.」
「내가 추진하면 받는다. 하지만 행정청에서는 받을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K공작의 조직원들이 도처에 박혀 있어서 방해를 할 테니까. 며칠 전에는 어느 놈이 날 저격해서 내 부하둘이 죽었다. 너희 짓이 아니라면 뻔한 일이지.」
「도대체 북남간의 합의사항을 알아서 뭘 하려는 거냐?」
오만규가 한걸음 나간 발언을 하자 이한이 답답한 듯 긴 숨소리를 냈다.
「그걸 터뜨려서 정권을 뒤집겠다는 거냐?」
「그건 말할 수 없어.」
의자에 등을 기댄 김상철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가 국가 차원으로 계산을 하건 어쩌건 네 자유다. 말하고 내일부터 영웅이 되어 미래를 생각하며 살든지 아니면 이 자리에서 죽어 시체로 끌려 나가든지 택해라.」
그러자 이한이 테이블 위에 걸쳤던 엉덩이를 떼더니 손바닥을 여러 번 마주치며 오만규를 바라보았다. 처리는 내가 하겠다는 표시였다.
「준비기간이 길수록 위험도가 높아진다는 사실을 알아야지.」
한기영이 지휘봉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타이밍이라는 건 우리 스스로 만들어야 리듬이 붙는다. 외세의 바람만 무작정하고 기다릴 순 없단 말이야.」
「사령관님, 우린 정권을 탈취하려고 거사하려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부드러운 목소리로 최무섭이 말하자 한기영이 기가 막히다는 듯 입을 벌렸다.
「허, 이 사람 보게. 이 사람 정신연령이 왜 이 모양이야? 제 아무리 의도가 순수하더라도 쿠데타는 쿠데타야. 그리고 실패하면 역적으로 역사에 남는단 말이야.」
「역사 생각을 하시다니, 저보다는 멀리 보시는군요.」
한기영이 다시 지휘봉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농담하지 마라!」
서울 근교의 야외 갈비집이었다. 오후 4시로 어중간한 시간이어서 바깥에 나와 앉은 손님은 그들 둘뿐이다. 서늘한 바람이 정자 안을 스치고 지나면서 두어 잎의 나뭇잎이 떨어졌다. 최무섭이 입을 열었다.
「이제 시기가 되었습니다. 거사일을 정해야 할 일만 남았습니다.」
「준비는 그만하면 되었어. 미군과 일부 야전군에 대한 대응책도 몇 단계씩 마련해 놓았고. 짧은 동안이겠지만 일어나서 모으는 전략이 차라리 낫다.」
제2군 사령관인 한기영 대장을 지휘관으로 한 거사군은 수도권 지역의 수도방위사령부 휘하 전 부대와 지원부대를 합해 3개 보병사단과 2개 기갑사단, 그리고 3개 공수특전단 및 1개 포병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기영은 취하의 10여 개 사단 중에서 2개 사단만 거사에 동원시킬 계획이었고 나머지 사단에는 비밀로 했다. 계획이 새나가면 그날로 끝장인 것이다.
안채 바깥에서 자동차의 엔진소리가 들려왔으므로 한기영이 정색을 했다.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안채의 홀에는 그들의 부관이 지키고 앉아 있을 터인데 그곳이 잠시 어수선해지더니 곧 바깥 쪽 문이 열리며 함종일이 나타났다. 그의 뒤를 따르는 사내는 기무사 참모장 현창복이다.
「여기들 계시구만.」
오후의 가을햇살을 받으며 다가오던 그가 흰 이를 드러내면서 웃었다.
「쿠데타 모의하시느라 식사도 안 하시고.」
얼굴을 하얗게 굳힌 한기영이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문득 최무섭에게로 시선을 주었다가 악물었던 어금니를 풀었다. 최무섭이 싱글싱글 웃고 있었던 것이다. 정자 밑에 선 함종일이 보기 좋게 경례를 했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현창복도 절도 있게 경례를 하고는 군화끈을 푼다.
「이봐, 어떻게 된 거야?」
이제 얼굴이 상기된 한기영이 최무섭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기무사령관도 합류했습니다.」
소주잔을 든 최무섭이 턱으로 군화끈을 풀고 있는 함종일의 등을 가리켰다.
「그래서 제가 조금 여유가 있는 것처럼 보이셨을 겁니다.」
「그럼 나한테도 말해야지.」
한기영이 목소리를 높였으나 화난 것 같지는 않았다. 함종일과 현창복이 탁자 앞으로 다가앉았다.
「모르고 계셨던 것이 나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거사일까지 우리는 비밀로 해주십시오.」
정색을 한 함종일이 말했다.
「지휘관급에서 벌써 밀고자가 둘이나 나왔습니다. 다행히 우리에게 왔으니 망정이지 우리가 가담해 있다는 것을 알면 다른 곳으로 갈 테니까요.」
「둘이나 나왔다고?」
한기영이 눈을 치켜뜨자 최무섭이 입맛을 다셨다.
「모두 안가에 감금시켜 두었습니다.」
「안기부가 CIA와 자주 접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군의 동향에 대해서 예민해져 있어요.」
함종일이 말을 이었다.
「수경사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각하께 보고했을 겁니다. 나도 미리 수경사의 동향을 슬쩍 짚고 갔지만 곧 인사조치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결행이다.」
한기영이 결연하게 말하자 함종일이 머리를 끄덕였다.
「마침 근대리아에서도 고급 정보가 와 있습니다. 결행해야 됩니다.」
10월 하순이어서 대선이 두 달도 남지 않은 시기였으므로 세상은 선거열풍에 휩싸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부가 내놓는 갖가지 조치와 공약, 통계발표가 모두 급조된 것에다 신빙성이 부족하고, 선거가 끝나면 대부분이 없어지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신문과 방송을 보고 들으며 가슴을 두근대는 게 서민이다. 선거 전에 속고 속이는 것에 서로 이골들이 난 까닭에 이제는 선거 때면 으레 그러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다.
여당의 대선후보 정동민은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법정 선거 기일이 아직 한 달이나 남아 있었지만 이미 피를 말리는 싸움이 시작되어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정사상 처음으로 야당에 정권이 넘어갈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작용했는지 여권도 똘똘 뭉쳐 있었다. 오늘도 당사에 일찍 출근한 정동민은 우선 선대본부장을 비롯한 각 시도별 위원장과의 대책회의를 마치고 집무실로 돌아왔다. 이틀마다 실시하는 다섯 개의 여론조사 결과는 이제 네 곳이 5포인트 가량 우세를 보였고 한 곳은 1포인트 우세였다. 열흘 전보다 3포인트 이상 나아진 판세였다.
자리에 앉은 그에게 비서실장 박세호가 다가와 섰다.
「대표님, 안기부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어, 내가 기다리게 했군 그래.」
정동민이 놀란 시늉을 했다. 박세호가 나간 지 얼마 안 되어 안기부장 이근복이 들어섰다.
「바쁘시군요.」
「회의가 늦게 끝나서 미안해요, 이 부장.」
「아닙니다.」
자리를 잡고 않자 이근복이 정색을 했다.
「대표님, 군인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특히 수경사 지휘관들을 중심으로.」
「나도 각하께 갔다가 얼핏 들었는데.」
정동민의 얼굴도 찌푸려졌다.
「기무사에서 대충 보고를 받으셨다고 합디다. 그래서 곧 인사조치가 있을 거요.」
「그렇습니까?」
「증거도 없이 소문만으로 지휘관들을 경질하는 마당이라 조금 신경이 쓰이는가 봅니다. 곧 국방 장관과 방법을 찾겠지요.」
머리를 끄덕인 이근복이 입을 열었다.
「CIA에서 군부의 쿠데타 가능성을 통보해 와서 말입니다. 물론 그들도 증거를 잡고 있지 않지만.」
「나도 비서실장한테서 그 내용을 들었어요. 그 사람들 가끔 하는 짓이지.」
정동민이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지금 세상에 쿠데타라니, 솔직히 현실감이 없어요. 비밀합의서가 새나가서 일부 군인들이 흥분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오.」
「그렇긴 합니다.」
「하지만 매사에 대비해야 하니까 의심가고 불안한 구석은 미리 청소를 해놓는 게 낫지. 내일 아침에 각하께 서두르라고 다시 건의하겠소.」
「그렇게 하시는 것이 ‥‥」
「기무사가 철저히 감시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이부장이 걱정하시지 않아도 될 겁니다.」
이제 정동민의 권위는 대통령과 필적할 만큼 상승되어 있었다.
자연스러운 권력의 이동이다. 대통령이 지는 해라면 정동민은 떠오르는 태양이었다. 정부 각료들은 솔선해서 업무와 상황보고를 해왔는데 하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모두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되어 있는 것이다.
10월 27일 밤 10시 50분, 상황실에 들어선 최무섭 중장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선 참모들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참모장 안병석과 마주쳤다. 넓은 상황실에서는 기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출동준비.」
「예, 출동준비.」
안병석이 복창을 하자 방 안은 금방 갖가지의 소음으로 뒤덮였다. 예하 부대에 출동준비 명령을 내리는 고함소리와 누군가를 꾸짖는 소리, 문이 열리고 닫히면서 참모와 부관들이 서둘러 오고 갔다.
기무사의 파견대장 백석호 대령이 최무섭에게로 다가왔다. 긴장으로 굳어진 얼굴이다.
「사령관님, 이제 노출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막아도 십 분 안에 정보가 올라갈 겁니다.」
「알고 있어.」
「한 시간 동안에 이미 방어라인이 형성됩니다.」
「그건 예상하고 있던 일이야.」
때려붙이듯이 말한 최무섭이 백석호를 노려보았다.
「앞으로의 한 시간은 너희들에게 달려 있어.」
안병석이 서둘러 다가왔다. 눈을 치켜뜨고 있었으므로 얼굴에서 눈만 보인다.
「현재까지 이상 없습니다.」
제2군 사령관 한기영 대장은 상황실에 둘러앉은 참모들을 바라보았다.
「2군 예하의 제 팔, 십이 두 개의 기갑사단과 삼십사 보병사단에 출동준비 지시를 내렸다. 2군에서는 이 세 개 사단만 거사군에 투입된다.」
십여 명의 참모들은 대부분이 장성이었는데 그중 반수 가량이 거사계획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긴장으로 굳어져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상황실에 그의 말소리가 다시 울렸다.
「기밀을 지키기 위해서 일부 참모하고만 작전계획을 세웠다. 이 난국(難局)을 무력으로 해결한다는 것에 반대하는 자는 구태여 가담시키지 않겠다. 다만‥‥」
그는 말석에 앉은 기무사의 2군 사령부 파견대장 정인철 대령을 힐끗 바라보았다.
「거사의 방해가 되지 않도록 기무사의 보호를 받도록 해라. 우리가 실패하면 충분히 변명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자 정인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24시간 안에 승부가 납니다. 반대하시는 분은 일어서 주십시오. 저희가 24시간 동안 책임지고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승부가 어떻게 나건 내일 밤 이 시간에는 돌아가게 해드리겠습니다.」
방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일어나는 사람은 없다. 이윽고 한기영이 조그맣게 머리를 끄덕였다.
「고맙다, 그럼 참모장.」
「예, 사령관님.」
참모장 이영복 중장이 어깨를 펴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진행하겠습니다.」
참모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2군은 4개 군단의 15개 사단을 지휘하는 막강한 야전군이다. 거사군에 3개 사단을 투입시켰지만 나머지 군단장과 사단장들은 아직 영문을 모르고 있다. 그들은 이제 국방부와 합참으로부터 강력한 지시와 회유 또는 위협을 받게 될 것이었다.
한기영에게로 전속부관 이길재 대령이 서둘러 다가왔다. 그의 뒤를 정인철이 따르고 있다.
「사령관님, 참모총장의 전화입니다.」
그는 이길재가 내민 무선전화기를 받아 쥐었다.
「한기영입니다.」
「사령관, 거긴 별일 없습니까?」
참모총장 박동현 대장은 한기영과 육사 동기생이다. 그는 온건한 성격에 대인관계가 뛰어났고 대통령과 동향이었다. 현 정권이 집권한 5년 동안 그는 승승장구하여 참모총장이 된 지 1년째가 되었다.
「별일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수경사가 출동준비를 하고 있어요. 이놈들, 쿠데타를 일으킬 모양이오.」
「헌병대에서 제보가 왔습니다. 기무사는 모르고 있었다는데 이건 도무지.」
「총장,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난 지금 합참본부로 가는 중입니다.」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거긴 별일 없지요?」
「별일 없습니다.」
전화기를 건네준 한기영이 이길재와 정인철을 바라보았다.
「참모총장이 수경사가 움직인다는 것을 알았다. 헌병대에서 제보한 모양이다.」
「헌병대가?」
정인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참모총장은 어디 있습니까?」
「합참본부로 가는 증이야.」
「저희들 예상보다 조금 빠르군요. 비상연락망이 잘 짜여져 있습니다.」
손목시계를 내려다본 정인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참모들을 감시해야만 하는 것이다.
「직원들을 비상소집 해. 나도 곧 나간다.」
버럭 고함을 친 안기부장 이근복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옆에 앉아 있던 아내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실탄까지 지급하고 있다면 이건 분명하다. 열한 시 정각이라고 했나?」
「예, 그렇습니다.」
서태영의 목소리도 다급했다.
「사령부 안에는 참모 전원이 모여 있는데다 예하 각 부대에 한 시간 안에 출동준비를 끝내라고 했습니다.」
「알았다. 우선 청와대에 보고를‥‥」
수화기를 내려놓은 이근복은 다시 아내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어요?」
아내가 기다렸다는 듯 묻자 그는 머리를 젓고는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다행히 비서실장 신형목은 집에 있었다.
「실장님, 야단났습니다. 각하께 보고를 드려야겠는데, 아무래도 쿠데타인 것 같습니다.」
신형목은 놀란 듯 대답조차 하지 않았으므로 그가 말을 이었다
「수경사가 출동준비를 하고 있어요. 이건 수경사 내부에 침투시킨 확실한 정보원이 알려준 정봅니다.」
「수경사가?」
신형목이 목이 잠긴 듯 헛기침을 하더니 내처 물었다.
「분명히 쿠데타 같습니까?」
「계획에도 없는 출동이오. 실탄을 지급하고, 예하 각 부대가 열한 시에 출동준비를 시켜 열두 시에 출동할 예정입니다.」
「이것, 야단났군.」
「각하께 보고해 주시오. 서둘러야 합니다. 나는 지금 본부로 갑니다.」
수화기를 던지듯 내려놓은 이근복이 무언가를 자꾸 묻는 아내에게 신경질을 내며 차에 올랐을 때는 11시 20분이었다. 운전사와 경호원 한 명이 항상 대기하고 있었으므로 뒷좌석에 오른 그는 소리치듯 말했다.
「본부로 가자, 서둘러!」
그의 차가 마악 골목길을 빠져나오려는 순간 승용차 한 대가 골목길의 앞쪽을 지나다가 멈춰 섰으므로 운전사는 전조등을 번쩍이며 신호를 보냈다. 비켜나라는 표시였다. 평시에는 차 두 대가 비켜 지날 수 있는 길이 밤에는 길가에 차들을 주차시키는 바람에 좁아진 것이다. 운전사가 다시 불을 번쩍였을 때 이근복은 멈춰선 승용차의 옆쪽으로 다가선 사내들을 보았다. 놀란 그가 몸을 굳힌 순간 운전석의 문이 바깥쪽에서 열리면서 한 사내가 손에 든 물체로 운전사의 얼굴을 내려쳤다. 그 순간 운전사가 가속기를 밟았는지 차는 옆쪽에 주차된 차량을 들이받고는 멈춰 섰다. 어둠 속에서 차의 양 옆으로 다가온 사내들은 모두 네 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권총을 쥐고 있었으므로 경호원은 손을 쓸 엄두도 내지 못하고 차 안에서 손부터 들었다.
「너희들 누구야?」
이근복이 커다랗게 소리치자 사내 하나가 그의 멱살을 움켜쥐더니 차에서 끌어내렸다.
「그건 알아서 뭐해, 이 자식아.」
대통령이 상황을 보고받은 것은 11시 20분이 조금 넘었을 때였다. 비서실장 신형목이 당황한 듯한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했는데 꼭 대안을 갖추고 보고하던 그가 이번에는 횡설수설을 했다.
「기무사령관은?」
대통령의 첫 물음이다. 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면 당연히 기무사령관이 먼저 보고를 해야 하는데 안기부장이 비서실장을 통해 보고해 온 것이다. 대통령이 다그치듯 다시 물었다.
「기무사령관은 도대체 뭘 하는 거야?」
「각하, 아직 연락이 없습니다.」
「연락해 보았나?」
「예. 하지만 연락도 안 됩니다.」
「이런 답답한.」
수화기를 던지듯이 내려놓자마자 요란하게 벨이 울렸으므로 그는 다시 들었다.
「뭔가?」
「각하, 국방 장관 장석호입니다.」
「그래, 도대체 어떻게 된 거요? 수경사 전 부대가 출동준비를 하고 있다는데 기무사는 모르고 있었나?」
쏘아붙이듯이 말하자 장석호는 당황한 듯 더듬거렸다.
「그, 그것이, 각하, 지금 파악 중입니다.」
「수경사의 쿠데타는 확실한가?」
「예, 각하. 서울 북방의 제 팔, 십이 이 개 기갑사단과 삼십사 보병사단까지 합류가 된 것 같습니다.」
대통령의 얼굴이 나무토막처럼 굳어졌다.
「그놈들은 어디 소속이오?」
「예, 그 부대는 한기영 대장이 사령관으로 있는 제 2군 소속입니다.」
「한기영 대장?」
「예, 각하. 한기영이 수경사의 최무섭과 공모한 것 같습니다.」
「카튼 대장과는 연락을 했소? 미군도 알고 있을 것 아니오?」
「예, 각하. 물론 알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즉시 비상 국무회의를 소집시키시오. 그리고 쿠데타가 확실하다면 장관이 주관하여 군을 장악하시오.」
「예, 각하. 그래서 지금 합참본부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카튼 대장과 긴밀히 협조하도록 하고.」
「예. 이미 각 군사령관을 비상소집 시켰습니다. 우선 합참본부를 임시사령부로 삼고 비상체제로 돌입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당장 그렇게 하시오.」
수화기를 내려놓자 앞에 서 있던 총무수석실의 비서관이 다른 수화기를 내밀었다.
「각하, 당대표의 전화가‥‥」
「누구?」
눈을 치켜 뜬 대통령이 묻자 비서관이 손을 조금 움츠렸다.
「예, 정동민 대표의 전화가 왔습니다.」
「나중에 하라고 해.」
뱉듯이 말한 대통령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선 옷부터 갈아입을 생각이 난 것이다.
국방 장관 장석호와 참모총장 박동현은 거의 동시에 합참본부의 지하 벙커에 들어섰다. 11시 35분이었다. 상황실에는 이미 20여 명의 장군들이 모여 있었는데 합참의장 고창규 대장과 1군 사령관 정익훈 대장, 참모차장 서윤섭 대장의 얼굴도 보였다. 서울 지역에 있는 주요 지휘관들이 거의 모인 셈이었다.
「이군 휘하의 제 팔, 십이 기갑사단과 제 삼십사 보병사단이 쿠데타군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그자들은 지금 출동준비 중입니다.」
참모차장 서윤섭이 소리치듯 말하자 장석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무사령관은 어디 있소?」
그러자 잠깐 동안 상황실이 조용해졌다.
「아무래도 쿠데타에 가담한 것 같습니다.」
입을 연 것은 합참의장 고창규였다.
「연락이 안 됩니다.」
「함종일, 이놈이.」
「수경사 예하 전 부대가 출동준비를 갖추고 있어요. 대응책이 시급합니다.」
그들은 상황실의 원탁에 둘러않았다. 국방 장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카튼 대장은 어디에 있소?」
「미 8군사령부에 있습니다.」
합참의장이 원탁 위의 지도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수경사의 제 51, 52 공수여단 측방에 미 제 2사단의 2개 연대가 있습니다. 그 중 1개 연대는 기갑연대입니다. 이들을 움직이면 수경사의 서울 진입이 좌절됩니다.」
「카튼한테 연락을 했어요?」
「했습니다. 한미 연합군에 비상대기 지시를 내리긴 했지만 아직 ‥‥」
짧게 숨을 내쉰 국방 장관이 지도에 시선을 주었다.
「시간이 촉박해요. 기다릴 순 없소. 작전명령을 내리시오. 이건 대통령 각하의 지시요.」
그러자 참모차장이 지휘봉 끝으로 지도 위를 짚었다.
「반란군의 예상 진로는 이쪽 네 곳입니다. 참모들이 검토한 결과 전방의 2개 사단을 뒤로 돌려 수경사군의 배후를 압박하고 파주와 의정부의 제 21, 26사단으로 진로를 봉쇄하는 것이 최선책입니다.」
시간을 다투는 일이다. 국방 장관 장석호가 머리를 끄덕이자 장군들은 일제히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참모총장 박동현이 장석호에게로 다가와 섰다.
「북한군의 동향을 경계해야 합니다. 전방은 움직이지 말아야 할 텐데요.」
「철책선을 비우는 건 아니니까, 각하께선 북한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글쎄, 낸들 압니까?」
상황실은 소란스러웠다. 몇 사람은 전화통을 쥐고 악을 쓰듯 지시를 했고 누군가는 상대방을 애타게 부르고 있다. 이제는 합참의장 고창규가 다가왔다.
「장관님, 제 2군의 한기영이 주모자인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군.」
「진압군이 제 시간에 움직여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그래서 말씀인데 지휘부를 옮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곳을 말이오?」
「그렇습니다. 대통령 각하를 모시고 수원쯤으로. 연합사 측에서도 그것이 낫다고 합니다만.」
「카튼이 말이오?」
「그렇습니다.」
「연합사 부사령관 오성문 대장이 지금 그와 함께 있습니다.」
올리버 카튼 대장은 수화기를 내려놓고는 테이블 건너편의 오성문 대장을 바라보았다.
「우선 한국군으로 그자들을 막읍시다.」
「장군, 그렇다면 합동참모본부로 자리를 옮깁시다. 아니면 이곳으로 지휘부를 삼든지. 저쪽에는 국방 장관까지 한국군 지휘부가 모두 모여 있어요.」
「난 코프란의 전화를 기다려야 됩니다.」
월터 코프란 대장은 미국의 합참의장이다.
카튼이 테이블 위에 두 다리를 올려놓자 군화바닥이 온통 드러났다.
「우선 맥스웰을 참모본부에 보냈으니 긴밀하게 연락이 될 거요.」
「장군, 상황이 발생했는데 본국의 지시를 받아야 할 이유는 뭐요? 한미 방위조약에 의하면 전시나 유사시에는 연합군 사령관이 즉시 한미 양국군을 지휘해서 대처하기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당신과 마찬가지로 나도 우리 합중국의 대통령 지시를 받아야 돼요. 한 시간만 기다립시다. 각하께서는 지금 회의 중이시니까.」
「‥‥‥‥‥」
「조금 전에 맥스웰이 알려왔는데 제 21, 26 이 개 사단으로 서울의 진입로 두 곳을 봉쇄할 작정인 것 같소. 전방의 9, 13사단을 뒤로 물려서 수경사군의 배후를 치고, 좋은 작전이오.」
「미 2사단의 2개 연대가 수경사의 측면에 있습니다, 거리도 가장 가깝고. 그들을 움직여 주시오.」
「불가능한 일이오.」
「아니, 왜?」
「전투병력 반 이상이 휴가나 외박을 나가 있어요. 내일 오전쯤에야 준비가 될 것 같소.」
「코프란은 북한에도 메시지를 보낼 거요. 준동하지 말라고 말이오. 장군, 무슨 뜻인지 아시겠소?」
오성문이 다시 짧고 굵은 숨을 뱉었다. 미군의 존재가치를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것만으로 북한의 침공에 대한 저지 효과가 있어 왔다 그리고 현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결과가 그것인 것이다.
「춘천의 제 사십 일, 사십오 사단을 서울로 진입시키는 것도 반란군의 제어 효과가 있을 텐데. 반란군 측 제12기갑사단의 측방을 위협할 수가 있소.」
생각난 듯 카튼이 말하자 오성문이 어금니를 물었다. 제12기갑사단의 지근거리에는 미 제51기갑연대가 배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21사단장 유철 소장은 제3사관학교 출신으로 유일하게 사단장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야전군의 꽃인 사단장에 오르기까지 한 번도 전방근무를 벗어난 적이 없었으므로 서울 지리도 잘 모른다.
제1군사령관 정익훈 대장으로부터 직통전화가 걸려왔을 때, 그는 파주의 술집에서 부하들하고 술을 마시던 중이었다. 부관이 건네준 무전기를 귀에 대자 사령관이 대뜸 말했다.
「쿠데타가 발생했다. 수경사 병력과 제 팔, 십이 기갑사단, 그리고 삼십사사단이다.」
유철이 무전기를 움켜쥔 채 숨을 죽였고 앞자리에 앉아 있던 부하들이 그의 기색을 보고는 몸을 굳혔다.
「명령이다. 제 21사단은 지금 즉시 출동하여 B와 C지점의 서울 진입로를 막아라.」
「예, 사령관님.」
「내 명령 외에는 들을 것 없다. 난 지금 장관과 합참의장, 총장과 함께 합참본부에 있다.」
「알겠습니다.」
유철이 술상을 박차고 일어서자 술상이 기울면서 상 위의 집기들이 쓰러졌다.
「즉시 부대로 간다.」
그가 소리치듯 말하자 부하들이 몸을 솟구쳐 일어섰다.
「비상이다, 부대 전원 출동준비!」
「21사단이 B와 C 진입로를 봉쇄할 것입니다.」
방에 들어선 기무사 참모장 현창복이 말하자 방 안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모아졌다.
「26사단은 D지점의 진입로를 막으라는 지시를 받았으니 잘못하면 기갑사단들은 움직이질 못하겠군.」
최무섭이 함종일을 바라보았다. 수경사의 사령관실 안이었다.
출동준비를 갖춰가고 있는 밖의 소음이 방 안에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사령부 직속의 전차중대가 캐터필러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면서 연병장에 집결하는 중이었고 병사들이 발맞추어 구보로 달리고 있다. 기무사령관 함종일은 상황이 시작되자 간부들과 함께 수경사로 옮겨와 있었는데 이미 대비를 해놓은 터여서 정보는 빈틈없이 전달되는 중이다.
「글쎄, 두고 봅시다.」
함종일이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11시 40분이 되어가고 있었다. 상황이 시작된 지 정확히 40분이다.
「이만하면 한국군의 위기대처 능력도 수준급이오. 벌써 1군사령관이 합참본부에 들어가 진압군의 출동명령을 내렸으니.」
그가 말하자 최무섭이 머리를 끄덕였다.
「국방 장관은 벌써 대통령의 승인을 받았어. 진압군을 지휘하라는.」
「미군도 비상소집을 시켰지만 아직 움직일 기색을 보이지 않습니다.」
현창복의 말에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미군이 움직이면 상황이 어렵게 되는 것이다.
11시 50분, 이태원의 합동참모본부 정문 초소 앞에 경찰 순찰차와 호송버스 세 대가 멈춰 서자 곧 쪽문을 열고 헌병 두 명이 다가왔다. 철문은 굳게 닫혀져 있는 데다 안쪽에서는 10여 명의 헌병이 완전무장을 한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경감 계급장을 단 경찰 간부와 두 명의 경찰이 차에서 내리자 헌병 상사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연락 못 받았소?」
경감이 대뜸 그렇게 되묻자 상사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무슨 연락 말이오.」
「난 용산경찰서 경비과장이오. 경찰청장의 지시로 합동참모본부를 경비하러 온 거요.」
「경찰이 왜?」
「이 양반이 아직 뭘 모르시는데, 당신 상급자는 어디 있소?」
그때 대위 계급장을 단 장교가 쪽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왜 그러십니까?」
「경찰청장의 지시로 이곳을 경비하러 온 거요. 아마 안에 계신 분들은 알고 계실 테니 연락을 해주시오.」
잠깐 동안 경감을 바라보던 대위가 머리를 끄덕였다.
바로 그 순간이다.
정문과 거의 가로로 세워져 있던 호송차의 한쪽 방석망이 일제히 젖혀지면서 총구가 드러났고 요란한 총성이 밤하늘을 울렸다. 철문 안팎에 서 있던 10여 명의 헌병들이 거의 응사 한번 하지 못하고 쓰러지자 호송차에서 병사들이 쏟아지듯 뛰어내렸다. 그들은 쪽문을 통해 안으로 뛰어 들어갔고 일부는 철문을 열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합동참모본부의 건물은 정문에서 백 미터쯤 안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건물의 3층 옥상에는 두 정의 기관포가 배치되어 있었다. 기관포 사수들이 정문의 소란에 놀라 총구를 겨눈 순간 흰 섬광이 빛처럼 다가오더니 폭발했다. 그것은 옆쪽의 담장에서 발사된 로켓포였다. 다른 한쪽의 기관포 사수는 옆쪽 포좌의 폭발에도 동요하지 않고 돌진해 오는 버스를 향해 기관포를 쏘았다. 버스 한 대가 옆쪽으로 기울더니 이윽고 배를 보이며 엎어졌을 때 그도 폭발음과 함께 몸이 하늘로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생포하라!」
K-1기관총을 두 손으로 움켜쥔 채 달리며 최석동이 악을 쓰듯 소리쳤다. 이미 사전에 충분한 예행연습까지 마쳐 두었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일러둔 소리였다. 살상을 최소한으로 한다. 국군끼리의 교전은 될 수 있는 한 피하고 지휘관급은 생포해야만 하는 것이다.
총성이 울리자 상황실 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그 순간 폭발음이 났고 천장의 형광등이 흔들거리면서 벽에 걸린 지도의 한쪽이 떨어졌다.
「무슨 일이야?」
누군가가 소리치 듯 물었으나 대답하는 사람은 없다. 다시 총성이 요란하게 났고 폭음이 들리면서 형광등 한 개가 상황실 바닥으로 떨어져 박살이 났다. 그 순간 장교 한 명이 상황실로 뛰어 들어왔다.
「반란군의 습격입니다!」
「벌써 이곳까지.」
얼굴을 하얗게 굳힌 참모총장 박동현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병력은 얼마나 돼?」
합참의장 고창규가 소리쳐 묻자 소령 계급장을 붙인 장교가 초점 없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버스를 물고 들어왔습니다. 정확한 숫자는‥‥」
참모본부의 경비대는 헌병 1개 중대였는데 3개 조로 나뉘어 근무하므로 경비병력은 4,50명 정도일 것이다. 밖에서 총성이 요란하게 들리더니 곧 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공수부대 복장의 병사들이 뛰쳐 들어왔다. 모두 K-1 기관총을 겨눈 살벌한 기세였다.
「이놈, 최무섭이.」
국방 장관 장석호가 이를 갈았다.
「손을 들라는 말은 안 하겠습니다.」
앞장선 사내는 대령 계급장을 붙인 장교였다. 그는 총탄에 스쳤는지 한쪽 팔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으나 다른 손으로 K-1기관총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의 굵은 음성이 다시 상황실을 울렸다.
「무장해제 하겠습니다. 반항하시면 사살합니다.」
병사들이 소장과 중장, 대장들의 혁대에 찬 권총을 거칠게 뽑아내는 동안 반항하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너, 최석동이 아니냐?」
1군사령관 정익훈 대장이 대령에게로 몸을 돌렸다.
「너 이놈, 감히 네가.」
「자, 모두 자리에 앉으시오. 지금 이 순간부터 이곳은 육군 대령 최석동이 지휘합니다.」
힐끗 정익훈에게 시선을 준 최석동이 버럭 소리쳤다.
「추태를 보이지 마시고 지시에 따르시오!」
「무엇이? 모두 포로가 되었어?」
대통령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가 주춤거리더니 다시 앉았다. 벽시계는 12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각하, 아무래도 이곳을 피하시는 것이 ‥‥」
그의 앞에 선 신형목은 넥타이도 매지 않은 데다 머리도 헝클어진 어수선한 차림이었다.
「시간이 급합니다. 각하께선 오산의 미군 기지로 거처를 옮기시는 것이 낫겠다고 카튼이 전해왔습니다.」
「카튼은 뭘 하고 있어?」
「아직도 8군사령부 안에 있습니다.」
군 지휘부와 연락이 끊겨 반란군의 동향도 모르고 있는 상황이다.
「각하, 준비하십시오.」
신형목의 옆에 서 있던 정동민이 한 걸음 다가섰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있었는데 초점이 일정치가 않았다.
「우선 각하께서 건재하셔야만 합니다. 미군기지 안에서 진압군을 지휘할 지휘관을 임명하셔야 할 것이고.」
「각하, 헬기를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잇달아서 신형목이 말하자 대통령이 이윽고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집사람하고, 식구들만 데리고.」
신형목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20분쯤 후에 헬기가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방을 나온 그들은 곧장 본관 건물로 뛰듯이 들어섰다.
「철수한다, 오산의 미군기지로.」
회의실에 들어서자마자 신형목이 소리쳤다.
「짐을 꾸릴 시간이 없어! 모두 차량 편으로 지금 즉시 출발해, 어서!」
초조하게 그를 기다리고 있던 수석비서관들이 튕기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둘러 방을 나서는 수석들을 헤치고 경호실장이 다가왔다. 그는 50대 중반으로 경호실에서 뼈를 굳힌 사내였다. 이맛살을 찌푸린 그가 신형목의 앞에 섰다.
「오산엔 뭐 하러 갑니까?」
「무슨 말씀이오?」
신형목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산에 뭐 하러 가다니?」
「오산에서 뭘 하실 거냐고 물은 거요?」
「군을 다시 재정비하기 위해서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거요.」
「미군기지가 안전하단 말씀이오?」
「그렇소. 연합군 사령관도 그렇게 제의했고, 각하께서도 동의하셨소.」
몸을 돌린 신형목이 금고를 열고 서류뭉치를 꺼내었다. 잠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경호실장 장태규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각하의 신변경호 일 개 팀을 보내지요. 난 청와대를 지키겠소.」
「알아서 하시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신형목이 말하자 그는 몸을 돌렸다. 서류를 가방에 담은 신형목이 몸을 돌렸을 때 장태규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그 시간에 정동민은 비서실장실의 옆방인 보좌관실에서 수화기를 귀에 대고 있었다.
「그래, 지금 당장, 통장하고 도장만 가지고. 그래, 금고에 있는 것들만 챙겨. 애들한테도 연락을 해.」
그는 힐끗 빈 방 안을 둘러보았다.
「기사한테는 절대 이야기하면 안 돼. 라디오도 켜지 말고 가란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가방 한 개만 들고 가. 서둘러, 어서!」
그가 마악 수화기를 내려놓았을 때 가방을 든 신형목이 들어섰다.
「댁에 전화하신 거요?」
그렇게 묻는 신형목의 태도는 바로 어제 오후의 그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무슨 소리. 야전 지휘관들과 연락이라도 해보려고 했던 거요.」
이맛살을 찌푸린 정동민이 말하자 그는 입술 끝을 올리며 웃었다.
「말이 먹힐까요? 이 상황에서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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