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려고 돼지 쳤던가!
김 선 구
추석을 앞두고 상가의 거리풍경을 취재한 신문기사가 달갑지 않은 소식을 전한다. 대구시내 최대상권인 동성로에는 ‘폐업’ 또는 ‘임대’를 알리는 현수막들만 선명하고, 서문시장에도 장바구니 들고 나온 손님들보다 “명철특수가 옛말이 되었다”고 탄식하는 상인들의 한숨소리만 크게 들릴 뿐이라는 보도다. 오래 동안 이어진 코로나 사태로 곳곳에 낙담하는 분위기가 만연한 것 같다.
달포 전에 동해안을 둘러보았을 때도 분위기는 마찬가지였다. 더위가 한창인 피서 철인데도 해수욕장주변은 한적하기만 했다. 영덕 삼사공원을 가 보았다. 강구항 남쪽 동해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한 해변공원이었다. 평소에는 가족단위 휴양지로 인기 있는 곳이라는 소문을 듣고 갔었다. 그러나 피서 온 객들은 보이지 않고 나무 그늘에 앉아 휴식하고 있는 노인들 몇 사람뿐이었다.
경상북도 개도100주년을 기념하여 만들었다는 ‘경북대종’만이 높고우람하게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종각에 올라가 보니대게의 고향 강구를 위시하여 북쪽으로 펼쳐진 해안가 정경이 그림처럼 평화롭고 시원함을 선사했다. 그러나 공원 주차장은 텅비어 있었고, 공원 내 설치된 각종 편이시설들은 주인 없는 빈집처럼 공허하기만 하였다. 공원 입구에서부터 늘어서 있는 호텔과 나이트, 카페, 가요방, 웨딩뷔페 등 간판들이 낮잠에 취한 듯 조용하였고, 행여 손님이라도 올라나 조바심을 담은 네온사인 표정만이 안타까움을 더 해 주었다.
삼사(三思)라는 공원이름이 ‘들어오면서 한 번, 머물면서 또 한 번, 떠나면서 다시 한 번’ 도합 세 번을 생각하라는 뜻이라 했다.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모르나 공원에서 좋은 추억거리를 마음에 담고가라는 것 같았다. 이 황량한 상황에서 무었을 느껴보란 것인가! 그래도방문했으니 그 무엇인가를 찾아주위를 두리번거려 보았다.
마침 숯불갈비 식당 앞에 설치 해 놓은 돼지 두 마리 모형이 눈길을 끌었다. 손님을 환대하여 웃는 모습이 아니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오히려 눈길이 더 갔다. 자신을 희생물로 장사하는 주인을 원망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주인의 아픈 심중을 이해하고 위로라도 한다는 뜻일까? 풀이 죽어 있는 것 같은 돼지의 표정을 보니 지난 날돼지를 잘 키워놓고 팔지 못해 울상 짓던 농민들 모습이 떠올랐다.
1980년대 석유파동을 겪었을 때 일이었다. 갑작스런 사료가격의 폭등으로 축산 농가들이 아우성을 쳤다. 갓 부화한 병아리들을 강물에 띄워 보내고, 새끼 돼지들은 야외에 풀어 놓아 버렸다. 갈 곳 없는 새끼돼지들이 시냇가를 배회하던 모습이 아련히 떠올랐다. 사료를 공급 할 여력이 없는 농장들은 모든 돼지들을 처분하려고 시장에 내 놓았다.많은 농장들이일시에 방매하니 돼지가격의폭락은 자명한 일이었다. 말 그대로 ○값이었다. 그때 하소연 할 곳을 찾지 못한 농민들이 서글픈 심정을 실어 흘려보내던 노래가 있었다.
울려고 돼지 쳤던가. 웃으려고 쳤던가.
피비린내 나는 도살장엔 왕창 섞는 고기냄새.
그대와 둘이서 우리를 치던 그 날은
지금은 어디로 갔나. 돼지여 말 해다오.
‘선창’이라는 노래 가락에 가사만 바꿔 놓았었다. 비 오는 날 선창가를 거닐며 행복했던 지난날을 되새겨 본다는 내용이 돼지에 희망을 걸었던 농민들의 아픈 심정과 일치했다. 지금저 식당의 주인이나 돼지모형들도 같은 심정이 아닐까?
일찍이 우리나라는 경재개발 5개년 계획을 성공으로 이끌면서, 70년대 들어서는 식량문제가 해결되었다. 춘궁기(春窮期)라는 어려웠던 시절을 졸업하자, 초목근피로 장식하던 밥상 위에 고기반찬이 오르기 시작했다.덩달아 축산업도 신이 났다. 닭들이 홰치는 소리에도 힘이 실렸고, 꿀꿀 거리는 돼지들의 모습은 희망의 메시지였다. 돼지우리를 치는 젊은 부부의 마음속에는 미래에 대한 꿈이 영글었었다. 이러한 희망을 산산이 조각 낸 것이 석유파동이라는 재앙이었다. 당시 중동의 산유국가 이란에 혁명이 일어났고 그 영향으로 석유생산을 감축하면서 세계무역질서에 파장을 일으켰다. 맑은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우리나라의 축산업은 주로 수입 사료에 의존해야했기 때문에 세계 곡물시장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러시아가 흉년이 들어도, 미국이나 멕시코의 옥수수 농사가 흉작이어도 엉뚱하게도 죄 없는 한국 축산 인들이 고통으로 이어졌다. 지금도 그렇지만 콩 옥수수 등 사료곡물들의 시세가 국제정세에 큰 영향을 받았다. 석유파동이 세계 곡물시장을 출렁 거리게 했고, 그 여파로 사료 가격의 상승을 불러왔다. 그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 우리나라 축산 농가들의 몫이었다.
‘미국이 제치기하면 일본의 경제가 감기에 걸리고, 한국은 독감을 앓는다.’는 말이 유행하던 시대였다. 그 시절 우리나라의 경제는 미국에 얽매어 있다고 했다. 그러한 난관을 뚫고 홀로서기 한 것이 현재의 우리들 모습이 아닐까한다.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때의 역경도 한때의 아픔으로 치부되었다.요새는 돼지농장에도 닭 농장에도 화기가 도는 것 같다. 돼지고기와 닭고기 그리고 계란은국민들일상의 식품으로 정착되어 꾸준히 소비가 이어지고 있다. 개선된 사육환경, 자동화된 생산시설로 안정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것 같다. 지난날의 아픔이 영약이 되어 깊게 뿌리를 내리게 해 준 결과가 아닐까?
모든 일에는 음과 양이 있고 시대의 변천에 따라 변화가 있는 법이다. 역사의 흐름으로 볼 때 증기기관의 발명이 근로자들의 일거리를 빼앗아 간다는 우려가 있었고,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의 창궐은 노동력 감소로 농촌을 피폐하게 만들었었다. 그래도 산업은 발전하고 삶은 윤택하게 이어지고 있다. 요새 세계가 겪고 있는 코로나 문제도 사회변화의 한 단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언젠가는 해결 될 문제이다. 이 사태를 지혜롭게 극복하고 서문시장 상인들의 얼굴에 다시 웃음꽃이 필 날을 기대해 본다. 그 때 삼사공원 숯불갈비 집 돼지동상도 웃는 모습으로 손님을 맞게 되지 않을까!
명당의 조건
김 선 구
부화기에 하루나 이틀 늦게 알을 넣어도 같은 날에 병아리가 부화되어 나온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연구팀이 조사한 내용이다. 발육을 일찍 시작한 병아리들이 더딘 병아리들을 재촉하여 발육을 촉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험실에서 세포를 배양해 보아도 세포들이 팔을 뻗듯 돌기를 내어 이웃 세포와 서로 접촉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세포들도 성장 분열하기 위해서 이웃들과 협력하고 있다는 뜻이다. 알 속에 있는 병아리들도 따로 따로 분리해 놓은 세포들도 이웃 간에 서로 소통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의 눈에는 얼른 보이지 않지만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생명체들이 서로 돕고 살아가는 모습들이 감지된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하나의 교훈처럼 닥아 온다. 인지가 발달하기 전에는 인간들도 세포조직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애초에 사람들은 먹을 것을 찾아 사냥과 채집이 주 업무였던 시절이 있었다. 먹이 감을 찾아 사냥할 때면 서로 간에 협조가 잘 이루어졌다. 생존을 위하여서는 협동이 필요함을 스스로 채득했을 것이다. 자연적으로 이웃이 생기고 더 나아가 집단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인류가 농경생활로 정착하면서 사람들은 여분의 음식물을 비축하고 저장하는 기술을 터득하였다. 이때부터 물자를 더 많이 획득하려는 욕심이 생겼다. 남들과 경쟁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진화하여 전쟁이라는 재앙으로까지 발전하였다. 그렇지만 경쟁하면서도 협력하는 것이 공존하는 길임을 깨닫게 되었다. 선의의 경쟁관계를 적절히 유지할 수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임을 알게 되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했다. 이웃과 교류 없이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좋은 이웃이 있기 때문에 나아가 좋은 사회가 이루어진다. 그것이 인간생활의 특성이며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이다.
백만매택(百萬買宅) 천만매인(千萬買隣)이란 고사성어가 있다. 중국남북조시대 송계아라는 고급관리가 백만 량짜리 집을 천백만 량을주고 샀다. 여승진이라는 이웃사람이 그 연유를 묻자 “백만금은 집값이요, 천만금은 당신처럼 좋은 사람과 이웃이 되기 위함”이라 했다. 이웃이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얘기이다.
좋은 이웃과 함께하는 삶은 아름답고 행복한 것이다. 옛말에 “소나무가 무성하니 잣나무도 기뻐한다.”고 했으니 좋은 이웃을 두고 살아간다는 것은 기쁨이 아닐 수 없다.
한 때 나는 경기도 수원에 살았었다. 그 곳에 나의 첫 직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서민 아파트촌에 직장 동료가 여러 명 되었다. 매일 같은 장소에서 통근버스를 함께 타고 내리다 보니 남다른 관심과 친밀감이 생겼다. 봉급날이면 일정금액을 거출 하여 퇴근길에 포장마차에서 한잔 하고 집으로 들어가곤 하였다.
직장 내 근무 부서는 달랐지만 모두가 지위도 직급도 비슷했다. 이러한 관계 때문인지 서로 간에 뜻이 맞았고 가족들 간에도 교류가 이어졌다. 훗날 내가 직장을 옮겨 떠날 때 근무처를 상징하는 사진과 함께 각자 이름들을 넣은 기념패를 만들어 주었다. 그 명패를 들여다 볼 때면 좋았던 시절, 좋은 이웃들을 떠 올려보게 된다.
나의 부모님도 좋은 이웃을 두고 있었다. 울타리를 공유한 이웃집에 인심 좋은 부부가 살았다. 스스럼없이 왕래하였으니 소위 이웃사촌이이라 할 만 하였다. 경조사는 물론 농사일도 서로 거들었다. 나의 어머니가 연세가 많아 기억력이 가물가물 할 때였다. 이웃집 아주머니가 아침마다 와서 어머니의 약을 챙겨주고 벗이 되어 주었다. 부모님은 자녀들과 따로 떨어져 살아야 했지만 좋은 이웃을 둔 관계로 외롭지 않게 살다 가셨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 갖추어야 할 조건을 첫째 산수, 둘째 생리, 셋째 인심이라 했다. 산수가 좋아서 호연지기를 키울 수 있어야 하고, 땅이 기름져서 소출이 많아야 하고, 인심이 좋아서 서로 돕고 교류할 이웃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현대에 와서도 이러한 조건을 다 갖출 수는 없다. 그러나 인심만은 언제나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한다. 산수와 생리는 자연의 힘에 의하여 좌우 되지만 인심은 이웃 간에교류하며만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요새 우리사회는 이웃 간 인심이 더 사나워지는 추세임을 느끼게 한다. 아파트 생활이 많아지다 보니 층간 소음문제나 주차 공간 다툼 등으로 심한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그러한 보도를 볼 때마다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몸은 가까이 있으면서 마음은 더 멀어지고 있는 것이 도시인들의 습성인 것 같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같은 코너에 다섯 가구가 모여 ‘화목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이웃 간에 정을 나누며 인심을 가꾸기 위해서다. 주기적으로 만나서 살아가는 소식들을 서로 전하기도 하고, 텃밭을 가꾸며 생산한 채소를 나누어 주기도 한다. 장기간 집을 비울 때면 우편물을 대신 받아주고 신문도 챙겨준다. 사소한 일 같지만 메마른 땅을 적셔주는 단비라 해도 좋을 것 같다. 좋은 이웃들을 두고 있는 셈이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좋은 인연을 맺은 곳, 그리고 그 인연을 오래오래 이어가고 싶은 곳, 땅의 기운이 아니고 인정이 넘치는 곳. 그곳이 사람이 살만한 곳이다. 명당이란만들어 진 것이라기보다 좋은 이웃들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신 할아버지의 눈물
김 선 구
“할머니! 이 그림에 색칠을 좀 해보세요.”
“나는 눈이 침침하여 아무 것도 안보여.”
“할아버지!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모습을 생각하며 글을 좀 써보세요.”
“내가 늙은이 인데 새삼스레 부모에 대하여 생각할게 뭐 있노?”
“그래도 어렸을 때의 추억이 있을 게 아닙니까. 한두 줄이라도 적어보세요.”
“그래. 하고 싶은 얘기는 많지. 그런데 글로 쓰려면 생각이 막혀버려.”
우리가 노인기억학교에 처음 도착 했을 때 노인들의 보인 반응이었다. 글쓰기를 어떻게 지도해야 하나? 앞길이 막연했다. 원장선생님의 뜻은 “구청장님께 편지 한 장 쓸 정도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허지만 그때 같아서는 편지는 고사하고 글을 써 보려는 마음을 갖도록 유도하는 것조차도 힘들 것 같았다.
노인기억학교는 노인들의 치매예방과 관리를 위하여 대구시가 시범적으로 운영하는 노인복지시설이었다. ‘치매 걱정이 없는 대구’를 실현하고, 이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킬 목적으로 십 수개의 기억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중 ○○노인기억학교에서 대경상록자원봉사단으로 글쓰기 지도지원 요청이 왔다.
이에 대해 수필반 문우 6명이 팀을 구성하여 봉사활동에 나섰다. 그 때 우리들은 상록자원봉사단 아카데미에서 수필을 공부하는 중이었다. 퇴직 후에 글쓰기 공부를 시작하여 모두가 수필가로 등단하였기 때문에 글쓰기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또한 전직이 교육계 또는 행정 공무원으로 근무하며 많은 사람들을 접해 본 경험이 있어서 쉽게 해 낼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렇지만 노인들을 대상으로 글쓰기 지도에 나서기는 처음이어서 내심 걱정도 되었다.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앞으로의 글쓰기교육을 어떻게 진행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에 들어갔다. 교육대상자들은 본인 스스로 원해서라기보다는 가족들의 요청에 의하여 기억학교에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고령층이고 치매초기에 이른 노인들이 많았다. 또한 정신이나 건강상태가 좋아 보이다가도 어느 날에는 전혀 다른 모습과 반응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러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어떻게 글쓰기에 임하도록 관심을 이끌어 낼 것인가에 초점이 모아졌다.
우선 학습수준을 초등학교 저학년에 맞추고, 교육용 자료는 일상생활에서 찾아보기로 했다. 글쓰기 제목에 맞는 그림을 준비하여 색칠을 하게 한 다음 그림을 바탕으로 글쓰기를 유도해 보자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무엇보다도 지나간 일에 대한 추억을 환기 시키는 일이 주효하다고 보고, 거기에 맞추어 교육프로그램을 짰다.
먼저 봉사활동 팀과 노인들 간에 벽을 허무는 일이 주요했다. 교육에 들어가기 전에 팀 전원이 할머니 할아버지들 앞에 나가서 각자 이름과 전직소속을 소개하고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수시로 되풀이했다. 이것은 문우 M이 주도했다. 공무원 시절 주민들을 이끌었던 경험을 살려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잘 다독 거렸다. 차차 믿음과 친밀감을 갖고 우리를 맞이하게 되었다.
다음단계로 백지 위에 스케치된 그림을 주고 색칠을 시켰다. 그림 소재는 산과 들, 바다와 하늘 등 자연의 모습, 과일과 곡식 등 농촌의 풍경, 가족과 집 등 가정의 생활모습 등 등. 계절이나 일상생활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모습들이었다.
색칠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한 가지 색만을 가지고 그림 전면을 칠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색칠하기를 진행해 가는 동안 하늘은 파란색, 들판은 초록색, 흙은 황토색 등 대상과 사물에 따라 색깔이 바뀌기 시작했다. 사람의 모습도 머리는 까만색, 얼굴은 분홍색, 리본은 빨간 색 등, 색의 용도를 분간했다.
개성에 따라 어두운색을 선호하는 분도 있고 밝은 색을 좋아하는 분도 있었다. 빨강, 파랑, 노랑, 초록 등 특정한 색을 좋아하는 모습도 보였다. 색깔을 구분하여 색칠 한다는 것은 그림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들 중에는 저고리와 치마, 양복과 바지 등을 자기가 좋아하는 색들로 칠해서 예쁘게 단장시키기도 했다. 같은 그림이어도 개성에 따라 각각 다르게 표현했다. 예쁘게 색칠한 그림은 선별하여 벽에 붙여 표본으로 삼았다.
다음은 글쓰기 지도이다. 그림색칠에 열심이었던 노인들도 글쓰기에는 온갖 핑계를 대어 피하려 했다. “눈이 침침하다.” “연필을 잡을 힘이 없다.” “글씨가 작아 안 보인다.” “아무런 생각도 안 난다” 등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대었다. 글쓰기를 정 못하겠다고 하는 분들에게는 준비 된 글을 노트에 베껴 쓰도록 했다. 그것도 힘들다면 연필로 글자 위를 한 번 더 덧칠하게 했다.
글짓기는 연필을 든다고 써지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움직여야 한다. 쓰고 싶은 얘깃거리가 떠올라야 한다. 우리는 그날의 주제에 대하여 미리 동요나 동시를 준비했다. 동요를 부르거나 동시를 낭독하게 하여 그 정경을 그려보게 한 다음 글을 써 보도록 유도 했다.
처음에는 주저했지만 시일이 지나면서 무엇을 써 보려는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차츰 글쓰기에 열중하고 애쓰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할아버지들 보다는 할머니들이 열의가 더 높아 보였다. 글쓰기가 끝나면 그날의 작품들 중 잘 쓴 글을 선정하여 낭독토록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한 할아버지의 글짓기가 우수작으로 선정 되었다. 신○○ 할아버지였다. 나이가 연로하고, 언제나 조용한 모습이었다. 그날의 글쓰기 제목은 “어머니”였다. 어버이 날을 맞아 어머니에 대한 추억을 상기시켜 볼 요량으로 선정했던 제목이다. 앞으로 나와서 쓴 글을 낭독토록 하였다. 한참 글을 읽어가던 할아버지가 잠시 낭독을 멈추더니 눈물을 흘렸다. 나름 데로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과 그리움을 피력했었다. 글을 읽다보니 감정이 복 바쳤던 모양이었다. 교실 안이 숙연해졌다. 한참 후 힘찬 박수로 할아버지를 고무해드렸다.
눈물을 흘렸다는 것은 감정의 샘이 솟아오른다는 의미이다. 매 말랐던 샘이 다시 솟아 오른 것처럼 감정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삶에 대한 희열을 의미한다. 하고 싶은 말이 있고 글로 표현 해 보고 싶은 의욕이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글쓰기 훈련을 시킨 보람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신 할아버지의 눈물 속에서 보람과 희망을 느꼈다.
우리의 봉사활동을 계속 되었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글쓰기에 탄력이 붙었다. 글쓰기 후 자신의 쓴 글을 낭독 할 때면 글 속에 감정과 리듬이 섞여 있었다. 어느 날 대구지역의 기억학교 연합회에서 노인학생들을 대상으로 시 낭송대회를 열었다. 거기에서 우리가 지도했던 할머니 두 분이 학교대표로 참석하여 대상과 우수상을 모두 차지했다. 이 모두가 열심히 하면 결실이 있음을 알려주는 메시지로 들렸다.
한번은 글쓰기 시간에 ‘선생님에게’란 제목으로 편지를 써 보도록 했다. 한 할아버지가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선생님들께.
저의 이름은 ◯◯◯라 합니다. 저는 자랄 때 형제도 많고 친구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은 것을 좋아 합니다. 집에 있으면 적적하여 매일 기억학교에 나오고 있습니다. 와서 얘기도 나누고 그림 색칠도 하니 정말 좋습니다.
그렇지만 글을 써보려면 잘 안됩니다. 하고 싶은 얘기는 많지만 머리가 안 돌아갑니다. 선생님들이 도와주시니 너무 고맙습니다.
저는 학생 때 친구들을 대신하여 여러 번 연애편지를 써주었습니다. 그때 생각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는 여자반 급장이었습니다. ◯◯◯는 공부는 못했지만 멋쟁이였습니다. ◯◯◯은 성격이 착한 얌전이였습니다. ◯◯◯은 남자반 급장인데 나하고 무척 친했습니다.
이 친구들이 지금은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편지라도 써 보고 싶은데 잘 안됩니다. 선생님들 많이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글을 쓰다가 말이 이어지지 않는다고 한숨짓던 할아버지였다. 편지를 쓴 것도 대견 했지만 어렸던 시절의 기억을 떠 올린다는 것이 놀라웠다. 비록 노인들일지라도 노력 한 만큼 성과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그런 면에서 노인들을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더욱 느끼게 했다.
이제 구청장님께 편지를 쓸 수 있도록 지도하는 일이 숙제로 남았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로 우리의 봉사활동이 중단 되고 말았다.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이제 되돌아보니 우리들을 즐겨 맞아주던 할머니 할아버지들 모습이 눈앞에 삼삼 거린다. 지금 노인기억하교 어른들은 어떻게 처신하고 있는지? 다시 그런 날이 돌아오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