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일본판 「환단고기」를 번역소개한 가시마 노보루는 일본사의 혁명적인 대륙사와 문명서래설을 보여준다.
다음의 「환단고기」 서문 내용 중 "북왜, 남왜설"에 대한 내용과 "<단군세기(檀君世紀)>-단군조선의 실크로드,
인도지배" 내용 및 "단군세기(檀君世紀) -협야후배폐명(陝野侯裵幣命:니기하야히)과 산와(山窩)"에 대한 내용, "
「단군세기」-왜한(倭韓) 양족과 솔로몬의 선단", "<북부여기(北夫餘紀)>-단군조선과 시황제(始皇帝)"에 대한
대륙사관적 견해를 들어본다. 중요한 것은 이 학설이 옳다 그르다를 논하기 전에 가시마는 일본인 학자로서
「환단고기」를 100% 인정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일본사를 북왜설과 서래설의 대륙사로 끌어올리는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반도사관에 쭈구리고 앉아있는 국내 식민지 노예 사학자들에게 좋은 경종을 울려 줄 것
이다. 참고로 그간 강단 식민사학자군과 재야 민족사학계 사이에 「환단고기」의 진위논쟁이 격렬하게 진행되어
왔음에도 막상 일역판 환단고기의 역자 가시마가 쓴 다음의 내용은 필자가 국내에 처음 소개하는 것이다.
북왜(北倭)와 남왜(南倭)
-「일본서기」가 감추려 한 것은 천황가-정확히는 환무(桓武)가 백제 망명자였다는 사실이지만, 이 역사위조의
원점에 만주에 있던 왜인(北倭)라는 문제가 있었다. 「산해경」<해내북경>은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사무산(蛇巫山) 위에는 어떤 사람이 몽둥이를 잡고 동쪽을 향해 서 있다. 혹은 구산(龜山)이라고도 한다.…
능문산(凌門山)도 황하가 그 가운데서 흘러나온다. 왕자야(王子夜)의 시(尸)는 두 손, 두 다리, 가슴, 머리가 모두
끊어져 따로 있다. 순(舜)의 부인 등비(登比)씨가 소명(宵明)과 촉광(燭光)을 낳았다. (이들은) 황하의 대택(大澤)에
살았는데, 두 여인은 신통력으로 이곳 사방 100리를 비출 수 있었다. 혹은 등북(登北)씨라고도 한다. 개국(蓋國)이
거연(鋸燕)의 남쪽, 왜(倭)의 북쪽에 있다. 왜(倭)는 연(燕)에 속한다. 조선(朝鮮)이 열양(列陽)의 동쪽에 있는데,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이다. 열양(列陽)은 연(燕)에 속한다. 열고야(列姑射)가 바다 가운데의 섬 속에 있다.
야고국(射姑國)이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데 열고야(列姑射)에 속하며 서남쪽을 산이 에워싸고 있다. 큰 게(大蟹)가
바다 한가운데에 산다. 능어(陵魚)는 사람의 얼굴에 팔 다리가 있고 몸둥이는 물고기인데 바다 한가운데에 산다.
큰 방어( 魚)는 바다 한가운데에 산다. 명조읍(明組邑)이 바다 한가운데에 있다. 봉래산(蓬萊山)이 바다 한가운데
에 있다. 대인(大人)들의 저자(市場)가 바다 한가운데에 있다.-
또한 「산해경」<해내동경>에는 거연(鉅燕)은 동북의 변두리에 있다고 했다. 이것을 백기소일랑(白崎昭一郞)은
다음 그림과 같이 비정(比定)했다.
연(燕)의 동북에 거연(鉅燕), 거연의 남쪽에 개국(蓋國), 다시 그 남쪽에 왜(倭)
그러나, 이 문장에는 실은 문제가 있다. 즉, <蓋國在鉅燕南倭北倭屬燕>이라는 문장을 강호(江戶) 시대까지는
<개국은 거연에 있다. 남왜와 북왜는 연에 속한다>고 읽지만, 명치이후 '남왜와 북왜'로는 곤란해서 <개국은
거연의 남, 왜의 북에 있다. 왜는 연에 속한다>고 고쳐 읽은 것이다. 이 부분이 한문의 중요부분으로 문장을 고쳐
읽기도 하고, 심한 것은 「일본서기」 등의 흠이 있는 글자 보정(補正)시, 한자를 2-3자 바꾸면 내용이 완전히
달라져, 실로 태양이 서에서 떠오르는 것이 된다.
한편, 여기서 거연(鉅燕)과 연(燕)의 관계인데, 「왜인흥망사」 제 24장은 진운은(辰 殷:箕氏朝鮮)을 지회씨
(智淮氏) 연(燕)으로 하고, 소연(邵燕)과 별도의 것으로 하기 때문에, 거연(鉅燕)은 기씨 조선의 지회씨(智淮氏)
연(燕)으로, 개국(蓋國)은 기씨조선의 영역, 즉 대능하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된다. 다음에 동서 제 31장은
'이것보다 앞서 완(宛)의 서(徐), 바다를 건너 박진(舶臻)씨, 은(殷:辰 殷:箕氏朝鮮)에 의지하여 완난(宛難:塔子河)
에 머물고 땅을 격한 것이 수 천리, 현모달(弦牟達:摩天嶺)에 성을 쌓고, 곤막성(昆莫城)을 칭하고, 나라를 서가은
(徐珂殷)이라 부른다'고 되어있고, 또한 서가은은 후에 부여(夫餘)에 합친 것으로 되어, 개국(蓋國)이 거연(기씨
조선)에 있다는 것은, 개국이 서하은 후의 부여인 것을 말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역시 '개국은 거연에 있다'고 읽어야 하고 '거연의 남에 있다'는 해석이 틀린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남왜, 북왜란 도대체 무엇일까. 평야방웅(平野邦雄)은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규슈(九州)에 있어서의 고대호족과 대륙」「고대 아시아와 규슈(九州)」에 수록)
-송촌무웅(松村武雄)씨는 규슈의 아담(阿曇)씨는 남양계 민족으로 준인족( 人族)과 함께 인도네시아 계일 것
으로 보고,
-우원우길(羽原又吉)씨는 찌꾸젠(築前)을 본거로 하는 안담(安曇)족 계통의 해인족(海人族)을 야마또(大和)족
으로 구별하여, 이 양 족을 매개로 한 것이 안담기량(安曇磯良)으로 상징되는 인물로, 해인족(海人族)의 본원지는
인도네시아 섬들이고, 그들은 복건, 광동의 민월( 越:전통적 동이족 거주지) 지방으로 이주하여 단민(蛋民)이
되고, 북상하여 남서 여러 섬에서 규슈에 걸쳐 있고,
-금관장부(金關丈夫)씨는, 아마도 일본에 미생(彌生)문화를 옮긴 것은 그들 해인족(海人族)의 조상으로,
-수전가일랑(藪田嘉一郞)씨는, 아담(阿曇)족 즉, 일본의 월족(越族)은 남지나에서 우리 서남 지방으로 도항한 족속
으로, 해인(海人)을 백수랑(白水郞)으로도 쓰는 것은 남지나 천주(泉州)의 수인(水人)이라는 의미의 샘 천(泉)의
의미를 백(白)과 수(水)로 나눈 것으로 생각되고, 그들은 원래 물속으로 잠수하여 진주를 캐던 백성으로, 월(越)
족의 용사(龍蛇) 토템(복희씨 토템)을 갖고, 이들 남방 민족은 무수히 조선반도를 거쳐 일본열도로 도래했지만,
후에 소수집단의 북방민족(조선족)에게 압도되어, 농천정차랑(瀧川政次郞)씨는 준인족( 人族), 아담족(阿曇族)
이 그 원주지인 화남(華南)에서 초래한 집돼지, 즉, 돼지를 기르는 것이 저감부(猪甘部)로, 이 양 종족은 원래 동일
종족으로, 공히 문신의 풍속이 있고, 용사(龍蛇)의 토템을 갖고, 단민(蛋民), 결국 민월( 越)족과 같다.
아마 기원 전 1, 2 세기에 백월(百越:임혜상에 의하면 동이족이다) 백성은 한무제에 의한 한(漢) 족 남진에 의해
해상으로 도망가, 흑조(黑潮)를 타고 북규슈에 도착한 아담(阿曇)족과 남규슈에 도착한 준인족( 人族)으로 나뉜
것으로, 삼품창영(三品彰英)씨는, 해인족(海人族)의 고기잡이법이나 문신의 습속은 직접적으로는 남조선에서
도래한 것으로, 한족(韓族) 가운데에서도 진한(辰韓)과 변진(弁辰)의 부족간에는, 남방 해양 제 민족에 계통한
문화요소를 전승하고 있는 면이 적지않지만, 이것은 해류 기타 지리적 조건으로 볼때 이살한 것은 아니라고 서술
하고 있다.-
여기서 농천정차랑은 화남(華南)에서 왔다는 <저감부(猪甘部)>가 한무제를 피해 일본으로 이동했다고 하는데,
이들을 이끈 것이 진(秦) 왕조의 일족으로 우리 나라의 원전언(猿田彦)이다. 한무제때 창오(蒼梧)의 진왕(秦王)이
이끈 남월(南越)의 백성이 한반도와 일본열도로 도망간 것에 대해서는 필자도 「반첸·왜인의 뿌리」에서 상세히
서술했다. 여기서 삼품창영(三品彰英)이 한반도로부터 왜인이 왔다는 것은 <북왜>를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북왜인 것과 함께 부여(夫餘)의 저가( 加)로, 우리나라의 저가부(猪加部), 안담수군(安曇水軍)으로, 왜의
수군과는 원래 니기하야히의 예국(濊國)-부여에 속해 있던 아마쯔마라의 수군으로 생각된다.
곽박의 「산해경」<대황동경> 대인지국(大人之國)의 조주(條注)에, '고회(高會)는 말하길, 왜국 사람이 모두가
바람을 만나, 바람에 불려 대해 밖으로 건너, 일국을 봤지만, 모두 키가 크고 형상은 호(胡)와 닮았다고 되어있다.
적송문삼우(赤松文三祐)는 이것을 인용하여, '고회(高會)는 평주(平州)의 양평(襄平)에서 왜인으로부터 이것을
듣고, 건강(建康)에 도착해 곽박에게 말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쓰고 있다.
「후한서」<동이열전>은 '단석외(檀石 ), 왜망포(倭網捕)를 도와준다고 듣고, 동쪽 사람이 왜인국을 공격하여
천여가(千餘家)를 얻다. 따라서 진수(秦水)의 위에 놓고 고기를 잡다'라고 쓰여있다. 그런데, 「해동제국기(海東
諸國記)」에는 '일본이 가장 오래고 또한 크다. 그 땅 흑룡강의 북에서 시작되고, 제주의 남에 도달하여 오끼나와와
서로 접한다.'고 쓰여있다. 따라서 <북왜>의 영토는 흑룡강의 북에 이른다.
력도원( 道元) 「수경주(水經注)」대요수고평천(大遼水高平川)의 조(條)에, '물은 서북 평천(平川)으로 나오고,
동류하여 왜성(倭城)의 북을 지난다. 단 왜지의 사람은 이것에 따른다' 고 되어있고, 「원경(元經)」진(晋) 태원
7년의 조는 '왕통(王通)이 9월 동이 5국에 와 조공하다'고 기록하고 그 설목(薛牧)의 전(傳)은 '동이 5국이란 부여,
3한, 숙신(肅愼), 왜인, 비리(裨離)이다. 현토(玄 )의 동북에 있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발해의 시대 흑룡강의
유역에는, 흑수물길부(黑水勿吉部)가 있고, 물길 7부족 가운데 가장 정예롭고 강하다(精强)고 한다.
흑수부는 후에 고려의 망명자를 왕으로 하여 거란(요)을 멸하고 금(金)국을 세웠다.
「산해경」이 쓴 북왜는 이 흑수부나 백산부(白山部)에 섞여 들어간 것(混入)이 아닌가. 이 백산부가 우리 예다
(穢多:えた)의 뿌리인 것 같다.
거란의 사서 「왜인흥망사」는 기씨(箕氏) 조선사가 바탕이 되지만, 부여, 고구려, 왜국의 건국사가 첨부되어
있는 것으로, 이것에 의해 봐도, 거란의 가운데에 <북왜>가 있었던 것은 인정된다. 더욱이 「고려기」대명홍무
(大明洪武) 21년조에, 수척(水尺:무자리), 재인(才人), 姸�(耕種:농사)을 일로 하지 않고 산 계곡(山谷)에 모여
왜적이라 칭하다. 그 힘이 무섭다. 운운' 되어있다. 또한 거란군이 고려에 침입하면, 백정들이 우리는 왜인이라
하고 호응했다 한다. <백정(白丁)>은 백정준인(白丁 人)과 같고, 조선의 예다(穢多:えた)이고, 수척재인(水尺
才人)은 조선의 산와(山窩:움집)이지만, 함께 반도잔류의 <북왜>이다.-
<단군세기(檀君世紀)>- 단군조선의 실크로드, 인도지배
<단군세기> 제 35대 단군 사벌(沙伐)의 무오 50년 조는 '제(帝), 장수, 언파불합(彦波弗哈)을 파견하여, 해상의
웅습(熊襲:꾸마소, 구마모또)을 평정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언파불합이란 우리나라(일본)의 우가야 "우가야
후끼아에즈"로, 정확히는 우가야 1대왕 "일자파렴무언합명(日子波 武言合命)"이다. 우가야 후끼아에즈가
「일본서기」에는 "언파렴무로자초집불합존(彦波 武 草葺不合尊)」이 되고, 「고사기(古事記)에는 "천진일
고일자파한건제집초집불합존(天津日高日子波限建 葺草葺不合尊)」이 되는 것은 유아라도 알 수 있다.
「구사기( 事紀)(3중판))에는, 「로자초집불합존( 草葺不合尊)」이 되는데, 삼서(三書)는, 우가야 왕조의
전대(全代)를 1대에 압축하여, 신무(神武)의 부(父)를 1인의 우가야 왕으로서, 소위 "키세르 계도(系圖)" 를 위조한
것이다.
-잠시 보완설명 인용-정일영은 「고대사 동방대제국」에서 언파불합의 꾸마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은나라가 망한 후 은의 덕망 있는 신료가 주나라에 항복해서 봉작을 받은 사람은 거의 없다. 은나라의 당시 선진의
도덕성은 그와 같았으며 은나라 사람들이 그 당시 부른 시에도 오랑캐(周나라)가 침입하여 물리칠 수 없는 터에
유왕이 色情에 침적하여 충신의 간하는 말을 듣지 아니 한다고 한탄하였다. 기자를 朝鮮王에 봉했다는 변조는 당시
무제가 힌 4군을 설치했다는 역사 날조를 하기 위하여 안사고에게 강요했음이랴! 아니면 후기에 당태종이 한 짓인지.
안사고는 문제가 역사를 변조하면서 {시전} {서전} 등에 기록을 모조리 없애는 작업을 소홀했다. 이러한 고서 기록
이 남아 있음으로서 역사를 바르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중국은 무왕이 조선왕을 봉했다는 것과 무제가 한사
군을 설치했다는 두 가지 허위 사실을 모든 후세 역사 기록에 강조하여 古代 東夷 군자국의 문화 사회에 뒤떨어진
국민의 열등감을 씻고자 이를 항상 앞세워 기술하는 역사 서적의 기본으로 삼았으며 일제 식민 교과서는 이를 근거
로 한층 조선 고대사를 말살하여 일본사를 위조하고 이것을 근거로 삼아 식민 사관을 보급하였다.
여기서 부동한 식민 사관이 생겨 신중한 古代史 記錄을 참고 없이 국민의 역사관을 오도한 것이다. 공자는 주나라
사람이면서도 기자나 伯夷 叔齊같은 주나라에 불복하고 봉작도 받지 아니하는 인사들을 충절 지사라고 찬양하는
철학자로서 충효 사상의 윤리 도덕을 망峠求� 성인이였다. 당시 주나라 사람들이 무왕을 성군이라 하였으나
공자는 무왕이 무력으로 통일을 했다고 왕도가 아니라고 하였다. 무왕은 각부 추장들을 그대로 두어 조선 제국
제도를 본따 제후에 봉하고 주나라를 섬기는 제후국이 되게 하고 종주국으로서 관할권을 가졌으며 제후 추장들의
반란을 막기 위하여 주왕의 딸들을 시집보내여 사돈을 삼았다.
비빈이 많았으니 딸도 많았을 것이다. 주왕의 딸은 姓이 姬氏니 王姬라고 불렀다. 그리고 타고 다니는 수레와 입고
다니는 옷은 화려한 성장이였다. (周王之女姬姓故曰姬下嫁於諸侯車腹之盛 {侍典})
주왕은 제후 추장들에 가혹한 조공을 받지 아니하고 종주국으로 인정케하는 것으로 그치고 은나라 국민도 반항자
를 학살하지 아니하고 노예로 포섭하여 차츰 주나라에 동화하는 기틀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후세 사가들은 그를
역시 성군이라고 호칭하였다. 공자는 물론 올바른 인군이 아니라고 평하였다. 이 때 주나라가 천하를 통일했다고
해서 그 영토를 중원의 중심 지역뿐이고 지금의 하북 하남 산동성과 황하 일대는 모두 대단군 영토였다.
단군세기({환단고기})에 BC 909년 제30대 단군 나휼(나휴) 천왕이 청구(靑丘, 수도)의 정사를 살피고 치우천왕의
공덕을 돌에 세기고 서쪽으로 엄록홀에서 列國汗들이 모여 열병하고 하늘에 제사를 올렸으며 흉노가 조공을 받쳤
다고 하였다. BC 723년에는 웅습(熊襲)이 반란을 일으켜 대장 언파불합을 海上의 熊襲에게 보내 평정하였다.
여기에 대하여는 後記할 것이나 해상이라 함은 倭國에 위치한 큐슈(九洲) 쓰시마(對馬島) 이키(臺岐) 시곡(四國) 등
4개 섬을 말하며 거기 강력한 추장 구마소(熊襲)가 반란을 일으켜 이를 토벌한 것이다. 근래에 와서 일본의 역사책
은 이것을 일본의 고대사에 편입하여 일본 역사로 기술하고 있다. 倭國의 고대 인명에 무슨 마로(磨呂), 무슨 미고도
(尊), 무슨 히꼬(彦)라는 것들은 당시 그곳의 통치 계급인 조선인이다.
日本史에 熊襲을 구마소라고 하는 것은 熊襲 즉 곰습을 일본 발음으로 구마소라 부른 것이다. 일본 고대사에 웅습에
관한 기록은 물론 후세에 와서 삽입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조선 반도에 인적이 드물고 남부 해안 지역에
약간의 사람들이 살고 거기서 가까운 일본 열도의 서남단에 있는 구주 지방과 교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대단군
제국의 월주지역 (上海 부근)과 행상으로 통하여 단군 제국 광역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진국본기(大震國本紀)」는 반여언(磐余彦:神武)을 이도국(伊都國) 왕(王)으로 하는데, 「세기(世紀)」의
언파불합(彦波弗哈)은, 단군 사벌(前(B.C.) 711-643)의 시(時), "해상의 웅습(熊襲)을 평정한" 왕이므로, 멀리 후세,
왜의 대란당시의 이도국왕(伊都國王)·신무(神武)의 부(父)일리가 없다. 따라서 「세기(世紀)」의 기술은 우가야
후끼아에즈를 한 명의 왕이 아닌 일계(一系)의 왕조로 하는 『상기(上記)』『궁하(宮下)』 등이 옳은 것을 입증하고
있다. 「세기(世紀)」는 언파불합(彦波弗哈)을 신무시대가 아니라, 전(前) 8-7세기의 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우선 이 왕은 우가야조(朝) 초두(初頭)의 왕이다.
그런데, 『궁하문서(宮下文書)』는 제 1대 우가야 왕을 "일자파렴무언합명(日子波 武言合命)"으로 기록하고,
이 왕명(王名)은 3서에 비교하면 가장 언파불합(彦波弗哈)과 유사하다. 즉, 1)언(彦)이 일자(日子) 2)파(波)가
파(波: ) 3)불(弗)이 무(武) 4)합(哈)이 (言) 합(合)과 도일하고, 2)에서는 파(波)와 염( ), 4)에는 언(言)과 합(合)
이 동어(同語) 중복되어 있다.
전부터 나는, 본서(환단고기)를 인식하기 전에, 졸저 「실크로드의 왜인」에서 우가야 제 왕의 왕대를 고증했지만,
거기서 추리한 우가야 1대 왕과 이의 언파불합(彦波弗哈)과는, 거의 거의 같은 시대였다.
이와같은 「세기(世紀)」와 『궁하문서(宮下文書)』에 있어서의 우가야 1대왕의 연대 및 왕명(王名)의 유사는,
전혀 별개로 전해진 양서(兩書)의 신뢰성이, 함께 극히 높은 것을 보여준다. 시험삼아 왕명(王名) 만을 들어도,
후의 후의 3서(書)의 왕명(王名)은, 언어학적으로는 『궁하문서(宮下文書)』의 왕명(王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한편, 저는 졸저 「실크로드의 왜인」에서, 우가야 1대왕이 우랄토의 영주(英主) "아르기슈
팃슈"라고 지적했다. 대저 언파(彦波)는 겐하도, "하(아르)기"의 역기(逆記)이고, 불합(弗哈)은 훗사흐-휫슈여서
이 네 글자를 합계하면, 아르기슈팃슈가 된다.
그 위에, 『궁하문서(宮下文書)』는 우가야 1대왕의 어린시절 이름(幼名)을 「아조남명(阿祖男命)」으로 하여,
아르기슈팃슈의 "아르"를 나타내고, 그 왕명(王名) 을 「가기도왕명(家基都王命)」으로 하여, 아(카)르기(키)
슈·릿(츠)슈라고 표음(表音)했다고 생각된다. 더욱�, 이의 한자(漢字)의 선택방법은 표음적일 뿐 아니라, 표의
(表意)적이기도 하여, 어의(語義)상으로도 아르기슈팃슈를 가리키고 있다.
1)언(彦)은 재덕(才德)이 뛰어난 남자 또는 그 미칭이다.
2)파(波)는 존자(尊者)의 경칭(敬稱)이다. 「오선록(吳船錄)」에 "촉중(蜀中), 존노(尊老)의 자
(者)를 칭하여 파(波)가 된다. 조(祖) 및 외조(外祖)는 모두 파(波)라고 부른다. 또한, 소위 천파(天波)·일파(日波)·
월파(月波)인 자(者) 있다"고 되어있다.
1)·2)를 총합하면, <언파(彦波)>는 재덕(才德)있는 조왕(祖王)이라는 게 된다.
3)불(弗)은, 「만성통보(萬姓統譜)」에, "불기(弗忌)는 희성(姬姓)이다. 진(晋)의 대부(大夫) 난불기(欒弗忌)의
후(後)가 된다고 하여, 함께 불성(弗姓)이 진계(晋系)의 성(姓)인 것을 보여주고 있다.
별도로, 「만성통보(萬姓統譜)」에는, "불롱(弗 ), 인속(印 )을 보다"로 되어있고, 「위서(魏書)·관씨지(官氏志)」
에는, "후에, 위(魏)의 출불(黜弗)씨, 철불(鐵弗)씨, 연불(燕弗)씨, 모두, 다시 불(弗)씨가 되다"라고 되어있다.
4)합(哈)은 「정자통(正子通)」이, 「합(哈)은 외국 성(姓)이다. 범서(梵書)에, 합(哈)은 알와번( )이라 읽는
다고 쓰여있다. 나는 졸저 「한반도의 우가야사」에서 우랄토 왕 아르기슈팃슈가 단군왕조의 왕과 함께, 3진
(三晋)의 조(趙)의 왕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이것을 알고 있던 옛날의 한자(漢字) 사용자가, 아르기슈팃슈를
언파불합(彦波弗哈)으로서 한자(漢字) 표현 한 것은, 어의(語義)에 따른 것이 아닌가.
그 후, 『궁하문서(宮下文書)』의 "일자파렴무언합(日子波 武言合)"이, 「기기(記紀:고사기,일본서기)」나
「구사기( 事紀)」의 왕명(王名)으로 변화한 과정에 대해서는, 장래 당연히 누군가에 의해 연구되겠기에, 여기서
는 다루지 않는다. 부언하면, 언(彦)을 히꼬로 읽고, 일자(日子)로 쓴 것은, 히꼬가 원래 병아리의 의미로, 봉(鳳)을
의미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열자(列子) 천서편(天瑞篇)」에, '변하여 새가 된다. 그 이름을 건여골(乾餘骨: 키요꼬·
히요꼬)이라고 했다로 되어있고, 병명관우(浜名寬祐)는, '제어(齊語)에는 "키요꼬"라 하고, 국어(國語)에서 "히요꼬"
가 된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한편, 이 "언파불합(彦波弗哈)"에 관계된 기록은, 「왜인흥망사」제 25, 6장에도 나와있다.
-제25장;무백산군기(武伯山軍冀)에, 규합하여, 남으로 도파(跳破)할 때, 때때로 영의추기(寧義 其)의 주사(舟師)
및 노족(弩族:쇠뇌족)을 투림( 淋)에서 만나다. 고령(高令), 나라를 들어 전주(前走:앞으로 나가)하고, 노래하길,
단납번(鄲納番), 달모맹(達謨孟). 가찬금(珂讚 ), 운질맹(隕 孟). 이삭솔진모검돌(伊朔率秦牟黔突). 압나남왕명맹
(壓娜 旺鳴孟).-
무백(武伯)의 산군(山軍)이 병사를 정비하여 남하할 때, 때때로 니기씨가 그의 군선(軍船)과 궁병(弓兵)을 갖고
해변에 도착했다. 고령(高令)이 나라를 들어 선진(先陣)을 모아 노래했다. '옥의비녀(玉依比女)가 원수를 무찌르다.
일자파렴무언합명(日子波 武言合命)은 원수를 쫓다'
-제 26장; 무백(武伯)이 쫓아 하막차(夏莫且)를 얻고, 영의추(寧義 )를 베어 묻다. 제족(諸族) 희약향(喜躍響)
응(應)하다. 전(傳)하여 유우입(兪宇入)의 주살(誅殺)이라 한다.-
「환단고기·세기(桓檀古記·世紀)」와의 조합(照合)의 결과, 이소스스의 명(命)이 언파불합(彦波弗哈)인 것을
확실히 했다. 앞서서 서술한 것처럼, 언파불합(彦波弗哈)은 우랄토 왕 아르기슈팃슈여서, 약음(略音)한 "기스티스"
가 사투리로 "이소스스"가 되었다. 아르기슈팃슈 1세는 전(前) 780년경, 즉위하여 반 호안(湖岸)에 새겨진 「호루
호루 연대기」에 의하면, 메누아슈 뒤를 이어 디아우에히로 원정(遠征)하여, 코르키스 남부국경을 거쳐, 치르도일
호(湖)와 쿠르 하(河) 상류로 나아가, 아라가츠 산을 돌아 아라쿠스 하곡(河谷)을 거쳐 귀환했다.
전(前) 774년, 왕은 디야라 하곡(河谷)에서 앗시리아군과 충돌하고, 더욱이 자카후카스, 우르미아 호안(湖岸) 지방,
앗시리아 변경 속주(屬州)에, 재삼 원정하여, 그때, 1년간 3만인의 노예를 노획했다. 여기서 "쿠만"은 무엇일까.
우랄토 왕 아르기슈팃슈 1세가 앗시리아 왕 샤르마네사르 4세(前782-773)를 격파한 것은 주사(周史)에서 '견융
(犬戎)이 유(幽)왕을 죽였다'고 되어있어, "쿠만"이란 유왕(幽王), 즉 "샤르마네사르→카르마네소루"이다.
이것이 '해상(海上)의 쿠만이 된 것은, 전장이 반 호(湖), 또는 우르미야 호(湖)였기때문이 아닐까.
-호(湖)에서 수군이 싸우고, 페니키아인(니기氏)이 우랄토에 참가했다는 추리이다. 앞에서 서술했지만, 주(周)의
책명금문(冊命金文)의 관습(習)이 유왕(幽王) 후에 끊어져 없게 된 것은, 앗시리아(周)가 우랄토(견융)에 패배했기
때문이다.
다음에, 「倂볼선戍뮈� 「마한세가」는, 전(前) 7세기경 '협야후배폐명(陝野侯裵幣命)이 전선(戰船) 500을 데리고
왜인의 반란을 평정(定)했다'고 했다. 협야후(陝野侯)가 「왜인흥망사」의 "니기시"이고, "완(宛)의 서(徐)"이고,
중국사의 예왕(濊王)이고, 「구사기( 事紀)」의 니기하야히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때의 "왜인의 반란"이란 것은
갠지스 유역의 사건이 아닐까. 인도 최대의 왕조는 반도족(바라따족,쿠르·판차라족)의 왕, 파시쿠시토로 전(前)
9세기 경의 쿠르국의 왕였다. 이 왕조가 쇠퇴하자, 전(前) 7세기경, 비데하 8국의 자나카 왕이 유력하게 되었다.
그들은 왕중의 왕을 의미하는 사무라이(統王)로 불렸지만, 이것은 일본어의 사무라이의 어원이 되었다.
(저자는 백제의 싸움아비에서 나온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일본의 역사를 서래설에 꿰어 맞추다 보니 이러한
얼토당토 아닌 사실까지 유츄해 내고 있다. 다음을 계속 읽어보면 알겠지만 아이누족에 한반도 계와 남방해양족이
섞인 하이브리드 튀기족인 그로서 그저 역사가 오래만 된다면 이곳 저곳에 끌어부치려는 의도에 오히려 환단고기
의 정통성에 누가 될까 걱정이다:안원전)
비데하 8국의 주변에는 쿠르국, 판차라국, 카시국, 코사라국 등이 있고, 마가다국은 아직 유력하지 않았다.
이중에 우선 강대해진 것은, 바라나시(베나레스)를 수도로 하는 카시국이었다. 이 나라는 원래 바라타족의 왕가
였지만, 비데하 8왕가에서 분리된 브라흐마닷다 왕조가 되고, 아자타샤토르가 왕이 되었다. 또한 코사라는
아우도를 도읍으로, 그 왕은 이크슈바크 왕의 말예(末裔)라고 칭했다. 그러나 자이나교에 의하면, '카시국은
맛라키족(마라족)의 9인의 왕이 통치하고, 코사라국은 릿차비족(밧지족의 상류계급으로 카시국의 왕비의 후예
이다)의 9인의 왕이 통치했다'고 되어있다.
「본생담(本生譚)에는 '카시왕 브라흐마닷다가 코사라 왕을 죽이고, 그 비(妃)를 빼앗고, 앙가국의 도읍 포타리를
뺏고, 또 바라나시의 왕(카시왕)마이자가, 코사라, 앙가, 마가다 왕을 정복했다'고 한다. 카시국은 장기적으로
서로 패권을 유지했지만, 후에 코사라 왕 카무사에 병합되었다. 한편, 코사라의 수도 아우도는 페니키아인의 일파
아르와도 인을 어원(語源)으로 한다. 또한 카시의 지배자 맛라키족(마라족)은, 니기하야히의 선장 "아마츠마라"의
일족이지만, 국명(國名)의 카시는 문다어족 계 카시족의 땅을 의미한다. "협야후배폐명(陝野侯裵幣命)" 또는
"니기하야히"를 페니키아 왕으로 읽고, 코사라왕이 되면, 니기하야히의 선장이 마라족였다는 것은, 카시국의
수군이 되고, 그의 인민인 왜인은 카시족 등의 문다계 제 족이 되는 게 아닐까.
프라나에 의하면, 코사라 왕을 의미하는 "이크슈바크의 계보"는, 브라도바라, 브라크사야,우르크사야, 프라이비
오마로 읽지만, 이 Pra tiv yoma를 배폐명(裵幣命) 또는 니기하야히로 하고, 아자타샤토르를 아시스키타카히
꼬네로 하면, 나의 반설( 說)은 전부 완성되는데 어떠신지.
단군세기(檀君世紀) -협야후배폐명(陝野侯裵幣命:니기하야히)과 산와(山窩)
「환단고기」<단군세기>에 등장하는 언파불합(彦波弗哈)이 우가야 왕조의 시조인것과, 또 한 사람, <단군세기>와
<마한세가>에 협야후배폐명(陝野侯裵幣命)이라는 왕이 등장하는 것은 이미 서술했다.
이 협야후는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도 쓰여있다. 또한 <북부여기>에는, 협야후(陝野侯) 의 자손인 듯한
협보(陜父)라는 왕(또는 왕족)이, 고구려의 시조 주몽과 덕우(德友)가 되고, 후에 남하하여 웅본(熊本)에서 다파
라국(多婆羅國)을 세우고, 이것이 「고사기(古事記)」의 니기하야히에 상당한다고 생각된다.
<북부여기>는 상하 2권으로 나뉘어,
상권은 단군조선을 계승하는 해모수(解慕漱) 왕조로, 후에 동부여의 해부루(解夫婁) 왕조가 된다.
하권은 동명왕(東明王) 왕조로, 고구려의 주몽(朱蒙)에 이어져 있다.
그리고 하권의 말기에 "협보(陜父)가 등장하는데, 「왜인흥망사」의 기록과 병행하면, 이 왕조는 "배폐명(裵幣命)"
또는 "완의서(宛의 徐)"씨를 시조로 하는 예국(濊國) 즉 서가은(徐珂殷) 왕조의 자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배폐명(裵幣命)이 우리들의 니기하야히의 시조라는게 되는데, 이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실마리로써 산와
(山窩:움집,굴)를 들어보자.
산와의 뿌리는 극히 흥미로운 문제이다. 그것은 곤란하지만, 전혀 실마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먼저 산와중에
석천청(石川淸)이라든가, 우전천일랑(隅田川一郞) 등, 내 천(川)의 이름을 성씨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수서(隋書)」<실위전(室韋傳)>에, '심말달실위(深末 室韋)는 천(川)의 이름에 이어 부족명을 붙인다'고
되어있고, 또한 보루네오의 다와야크족 중에서도 내 천의 이름을 부족의 성(姓)으로 하는 게 있다.
더욱이, 데칸諮� 북동부의 쵸타나구풀 고원의 문다족 가운데, 보도어(語)족은 내 천(川)을 "테" 또는 "데"라 하여,
천(川)의 이름을 데블, 데크,데힌, 데혼, 데본, 데샤,데판, 데무라, 테·라오, 테스타 등으로 말하고, 이것을 부족명
으로 한 것 같다. 산와(山窩) 중의 오랜 유예부족(遊藝部族)에 "테코나"라는 여예인(女藝人)이 있지만, 이것은
"천(川)의 여자(女)"의 뜻이 아닐까.
또 고구려에 "수척(水尺), 재인(才人), 백정(白丁)"이라는 비 농경부족이 있어, 각각 우리나라의 산와(山窩), 유예
(遊藝), 백정준인(白丁 人)(에타)에 상당한다. 재인(才人)은 「일본서기」에도 쓰여져 있지만 천(川)의 사람의
의미이다. "상카"라는 말도 힌두어의 "상가"로, 원래는 이해를 같이하는 동료의 의미로, 후에 불교도, 공화제(共和
制)라는 말로 변했다.
쵸타·나구풀 고원의 문다 족은 도루멘을 선조숭배의 장(場)으로 하여 와까모노야토(若者宿:동네 젊은이들이 밤에
모여 일도 하고 이야기하는 숙소, 사랑방)를 갖는 것도 있고, "신·봉가"라는 최고신을 갖는다. 또한 세습에 의한
제사적 추장과 세속적 추장을 갖고, 후자를 "문다"라고 한다. "신·봉가"는 화명신(火明神:홍아신)이고, "문다"는
산와(山窩)의 아문다 무리(衆)이다. 이와같이 생각하면, 산와(山窩)의 뿌리는 문다족으로 봐도 좋다. 문다어(語)는
오스트로·아시아어족의 하나로, 몬 크멜어, 카시어,니코발어, 등과 같은 계통이다.
현재 문다족은 쵸타·나구풀 고원을 중심으로, 웃탈·부라데슈 주(州)의 일부의 마하데오 구릉, 히말라야 산지,
벵갈 등에 약 70만인 정도 있는데, 예전에는 인도 전역을 덮고 있었다. 밀림과 죽수(竹藪:대나무 덤불 늪) 가운
데서 생활하고, 현재도 수렵과 야생식물에 의해 생활하고 있다. 이 곳도 산와(山窩)와 매우 닮아 있다.
문다족 중의 콜 족이라는 이름은 돈(豚) 족이라는 의미로, 아리아인이 붙인 경멸스런 명칭이지만, 부여(扶余) 6축
(畜)의 저가(猪家:돼지 저)나, 우리나라의 저감부(猪甘部)(安曇海人)와 관계가 있는 듯 하다.
또한 원시불교에는 "크샤트리아, 바라몬, 바이샤, 바이샤, 슈드라, 챤다라, 부츠쿠사"라는 6개의 카스트(계급)가
있는데, 이 중 챤다라는 도살, 부츠쿠사는 오물 청소자였다. 챤다라는 앗삼족이 있던 쵸타·나구풀의 주민을 의미
하고, 고오베(神戶) 시 등의 미해방부락의 장전족(長田族)의 뿌리는 아닐까. 장전족은 산이현(山梨縣)을 거쳐
회진(會津) 지방으로 이동했는데, 이것은 졸저 「왜(倭)와 진국(辰國)」에서 서술했다.
그런데, 산와(山窩)에는 제철에 관한 전승이 있지만, 문다족은 원래 철의 문화를 이루고, 인도에 철을 들여 온
것은 아리아인이었다.
전(前) 13세기 이후, 철제 무기를 갖고, 기마전(騎馬戰)을 특기로 하는 아리아인이 몇 갠가의 그룹이 되어 인도에
침입했다. 아리아 어 최고의 문헌 「리그베다」에 의하면, 아리아인은 우선, 오하(五河) 지대의 펀잡에 침입하여,
선주민을 정복했는데, 이 선주민의 언어는 드라비다어 혹은 문다 어였다.
처음에 있던 오스트로·아시아어족을 지중해 방면에서 침입한 드라비다 어족이 쫓아내(驅逐) 인더스 문화를
만들었기 때문에, 문다족과 같은 오스트로·아시아어 계 제 족은 히말라야 산계(山系)에서 갠지스하(河) 유역에
분산되고, 더욱이 그 후 침입한 아리아 어족 때문에 양(兩) 언어(語)가 동방과 서방 인도로 쫓겨나게(驅逐) 되었다.
「고사기(古事記)」의 와니 조작 신화에서도, 이 아리아 족의 침입과 드라비다 수군(水軍)의 관계를 전하고 있다.
(참고:와니(窩泥:움집와, 진흙니)는 漢족에게 동화된 양자강 유역의 동이 9족 계열인 묘(苗)와 요( )계의 분파인
라라면전(羅羅緬甸)계에서 다시 분파된 라라(羅羅)족이 본 줄기를 제외하고 곁가지 분파로 율속(栗粟), 라무(羅
:별이름 무), 와니(窩泥:움집와, 진흙니) 등의 부족으로 나뉜 3부족 중 하나다.:안원전) 4국의 "금비라(金毘羅)"
신은, 실은 갠지스 하(河)의 와니의 "콘피라"로, 염포수군(鹽飽水軍) 등의 신앙였지만, 앞으로도 알 수 있듯이,
와니는 사신(蛇神) 신앙(동이족 복희씨의 인두사신과 확실한 연계를 상징. 임 혜상은 양자강 유역의 사천성,
절강성 등의 동이 묘요계, 형오계, 백월계가 인도, 인도챠이나로 내려갔음을 고고학적, 문화인류학적으로 밝히고
있음을 참고하라)을 갖는 드라비다족의 수군이었다.
와니 조작 설화의 원형은, 말레 반도에 있어 '사슴이 솔로몬 왕의 명에 의해 와니를 일렬로 줄을 세워 정렬시켰다'
로 되는데, 「리그베다」에서는 사슴을 아리아인의 왕권으로, 와니(드라비다 수군)를 속인 사슴이란 아리아인을
가리킨다. 정확히 말하면, 혼혈 아리아인의 수군 에브스인 또는 페니키아인이다.
전(前) 18세기-17세기에, 우가릿드, 알와드, 비브로스, 베이루트, 시돈, 틸스, 아츠코 등에 아리아·후츠리 계 제족과
크레타·미케네 족이 침입하여, 선주족 야페테 제 족과 혼혈했다. 그래서 이 자손인 에브스인이나 페니키아 인은
혼혈 아리아인였다.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는, '비데가·마타바는 입 안에 성화(聖火)를 갖고 있다. 성화(聖火)가 입에서 나와
동방으로 향하고, 대지를 태우면서 나아가 결국 사다니라 하(河)에 다다랐다. 그리고 불(火)은 아타바로, "너의
주소는 더욱 더 동방이라"고 했다. 이 하(河)는 지금도 아타바의 자손인 코사라인과 비데하인의 경계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코사라와 비데하는 인도 16왕조의 국가로, 앞에 서술했듯이, 코사라란 문다어(語)이고, 코사라의 수도 아요디아
(아우도)는, 페니키아인의 정(町:밭) 알와드여서, 이 신화는 펀잡 아리아인과 페니키아계 알와드인이 문다족이
사는 코사라에 침입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산와(山窩)는 성화(聖火) 신앙을 전하고, 그 조상은 천화명신
(天火明神)이다.
앞서 문다족의 "신·봉가"가 화명신(火明神)이라 했지만, 문다족은 수우(水牛:신농 도등의 영향임을 알 수 있다)
신앙을 갖고, 한편 거란족은 "키키타에"라는 우신(牛神)신앙을 갖고 있다. 게다가 그것은 우리나라의 소민장래
(蘇民將來) 신앙과 동일한데, 그 뿌리는 카난의 지나간 축제이다. 천화명신(天火明神)이라는 신명(神名)에서도
성화(聖火)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천화명신(天火明神)은 "니기하야히"라고도 하고, 「기기(記紀):고사기, 일본서기」에는 이계(異系)의 신화지만,
「구사기( 事紀)」에서는 중심적인 신이었다. 「구사기( 事紀)」는 천황가 이전에 니기하야히의 일족이 야마다
이국(邪馬臺國)을 세운 때의 사서였지만, 후에 백제인의 환무(桓武)가 만든 「서기(書紀):일본서기」에 맞춰 개찬
되었다. 그 원형은 개찬 후의 10권본이 아니라, 「30권본 구사기」에 남아있고, 삼중정량(三重貞亮)이 뛰어난
연구를 남기고 있다.
그 천신본기(天神本紀)는, 니기하야히의 선단(船團)에 대하여, '읍취(揖取)·하도조(河刀造)의 조천마량신(祖天麻
良神), 선자(船子)·단야씨(鍛冶氏:쇠불릴 단, 야금할 야)의 조천진진신(祖天津眞神), 천진마량신(天津麻良神),
천진적마량신(天津赤麻良神)'이라고 쓰고 있지만, "단야씨(鍛冶氏)의 아마츠마라"란 제철부족인 마라족을 나타
내고 있다. 단야 인이란 아리아인 이외에는 없기 때문에, 단야씨의 선조를 이끈 "니기하야히"는 아리아인이어야만
하지만, 메르츠하 인(人)은 카르데아 또는 페니키아 계의 혼혈 아리아였다.
한편, 산와(山窩) 문자는 브라흐미·카로시티 문자의 계통였지만, 전자는 페니키아인의 문자이고, 후자는 아케메
네스·페르시아가 마가다에게 전한 문자였다. 문다족의 땅 코사라에 페니키아인이 침입했다고 가정하면, 그때
문다족은 페니키아 문자를 배웠을 것이다.
한국의 원리운동(통일교를 말하는 듯. 이는 결코 올바른 민족정사가 아님을 알고 이해하기 바란다:안원전)은
한민족의 뿌리를 유대인으로 생각한다. 일본에서도 진광교(眞光敎)는 진(秦)의 시황제를 유대인으로 생각한다.
이것을 인정하면, 일본의 진(秦) 씨는 진(秦)의 망명자이기 때문에, 일본인의 뿌리도 유대인이라는 것이 된다.
이들의 주장은 모두 옳지만, 정확히는 앞에 서술했듯이, 진(秦) 왕조는 박트리아의 유대인이다.
그 외, 전(前) 7세기 경부터 규슈(九州)의 우좌(宇佐)에 동표국(東表國)이라는 에비스 인의 국가가 있었지만, 이
에비스 인은 카난의 에브스 인으로, 솔로몬 왕의 타루시시 선(船)을 움직인 사람들이다. 또한, 와니 조작신화의
록(鹿:兎)이 솔로몬의 명을 받았다면, 대물주명(大物主命) 즉, 요동의 공손도(公孫度)와 그 왕녀 비미호(卑彌呼)는,
원래 솔로몬 왕의 수군였다는 것이 되는데, 잠시 이것을 생각해 보자.
「환단고기」는 '전(前) 2천 년경의 우수주(牛首州)의 예읍(濊邑)의 추장 소시모리의 자손을, 전(前) 8세기 경
협야후(陝野侯) 배폐명(裵幣命)이라는 왕이 나와, 삼도(三島:의 왜인)을 평정했다고 쓰고 있지만, 이 "협야후
배폐명"은 "니기하야히"의 선조이다. 2 개의 왕명(王名)은 페니키아 왕으로 읽을 수 있는데 어떨까.
또한 슈메르 어로 소를 우르라고 읽기 때문에, 우수주(牛首州)는 우르국(國)이 아닌가. 그렇다면 "소시모리"는
어쩐지 우르 왕 슈르기인 것 같다. 우르의 해인(海人)은 카르데아 인으로, 페니키아인의 조상으로 불리니까,
니기하야히의 조상 선조가 우르 왕이라도 이상하지 않다.
한편, 전(前) 2000년의 우르의 카르데아인의 자손이, 전(前) 1000년 이후의 페니키아인이 되고, 코사라에 침입
하여 문다족을 추종하여, 일파는 말레이 반도에서 북상했지만, 다음에 그들이 나타난 것은 하남성(河南省)이다.
「사기」<진(秦)본기> 소양왕(昭襄王)의 조(條)에 '33년, 진(秦)의 객향(客鄕)의 호상(胡傷)이 위(魏)의 권(券),
채양(蔡陽), 표두(表杜)(모두 하남성)를 공격하여 이를 뺏었다. 또한, 위(魏)의 장(�)·망묘(芒卯)를 화양(華陽)
에서 쳐부수고 목을 참수한 것이 15만이었다. 위(魏)는 진(秦)에 남양(南陽)을 바치고 화목했다.
34년, 진(秦)은 위(魏)에 한(韓)의 상용(上庸)의 땅을 주어 일군(一郡)으로 하고, 남양에서 관(官)을 빼앗긴 신
(臣)을 이주시켰다. 35년에, 한(韓), 위(魏), 초(楚)를 구하여 연(燕)을 정벌하고, 처음으로 남양군(南陽郡)을
두었다.'
「사기」의 기년은 정확치는 않으나 전(前) 4 세기의 말에서 전(前) 3세기 초두(初頭)이다.
그런데, 만주에 있었던 북왜인의 자손의 거란민족의 사서인 「왜인흥망사」 제 31장에는, '완(宛)의 서(徐), 바다
를 건너, 박진(舶臻)하고, 은(殷:箕氏朝鮮)에 의해, 완난(宛難)에 거(居)해, 땅을 열기를 수천리, 현모달(弦牟達)에
세우고, 곤막성(昆莫城)이라 칭하고, 나라를 서가은(徐珂殷)이라 하다' 했다. 여기서 "완(宛)"이라는 것은 남양(南
陽)의 제철기지여서, 「사기」와 합치면 완(宛)의 서(徐)는 위(魏)의 제철부족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서가은(徐珂殷)이란, 서(徐)씨의 예국(濊國)인데, 「왜인흥망사」는 예국(濊國)은 후에 부여(夫餘)가 되었
다고 쓰여있다.
따라서, 부여(夫餘)가 북방 기마민족이란 것은 새빨간 조작이고, 소련의 모략적인 반설( 說) 이다. 「환단고기」
<삼신오제본기>에는 '옛부터 부여(夫餘)에 말이 있어도 타지 않고'라 되어있고, 「위지(魏志)」에는, '마한(馬韓)
은 말 타지 않고' 또한 '왜는 소, 말이…없다'고 되어있다.
따라서 부여를 시작으로 마한도 왜도, 결코 기마민족이 아니다. 말을 타기때문에 기마민족이라 한다면, 아메리카
인디안도 기마민족이 되겠지. 여기서, 마지막에 서(徐)의 의미지만, 카르데아인의 "지아"는 아닐까. 그렇다면, 역시
니기하야히는 카르데아인의 자손인 페니키아왕으로, 이 일족은 말레이 반도에서 하남성(河南省)에 들어가고,
진(秦)에 져서 후에 만주로 이주하고, 거기서 예국(濊國)-북부여를 세운 후, 남하하여 왜왕이 선 것이다.
「환단고기」에 의하면, 북부여의 왕족 협보(陜父)가 남하하여 웅본(熊本:구마모토)에 웅습성(熊襲城)을 만들고,
다파라국(多婆羅國)을 세워 일향(日向)의 안라국(安羅國)과 연합하여, 야마다이(邪馬臺)국이 되었다. 이의 협보가
신무(神武:부여왕 尉仇台)를 구한 "니기하야히"이다.
「구약성서」는 누누이 우르의 카르데아(갈대아) 인을 유대인의 선조라 말한다. 또한 카르데아인은 페니키아인의
선조였다. 따라서 우리들의 니기하야히가 페니키아인이라면, 그것은 유대인의 수군(水軍)였다고 생각해도 좋다.
이세(伊勢) 지방에서는 오늘날도 소민장래(蘇民將來)의 예의범절을 믿고 있지만, 일본각지에 전해지는 소민장래
(蘇民將來)의 신앙은 원래는, 유대인의 축제가 그 뿌리였다. 「왜인흥망사」 제 15장에 의하면, 거란의 샤만은,
소민장래의 신앙을 갖고, 우두신(牛頭神)으로 분장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우두(牛頭)의 바알 신이지만, 동시에
우두천황(牛頭天皇) 스사노오노 존(尊)이었다. 이세신궁(伊勢神宮)의 천조라도, 바알의 처(妻)의 아나토우랄토
왕 아라메의 복합신였다. 또한 기이(紀伊) 반도를 "귀국(鬼國)"이라 쓴 것은, 우두(牛頭)신앙의 우각(牛角)때문
으로, 이 땅은 원래 페니키아인의 기지였다.
단군환인이 다곤, 환웅이 바알인 것도 이미 서술했지만, 「왜인흥망사」에서는 환웅을 "시우스사카" 즉,"스사노오"
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세(伊勢)음두(音頭)가 유대어이고, 신궁에 "다비데의 성(星)-다윗의 별"
이 있던 것도 결코 이상하지는 않다. 비밀리에 속삭여지고, 게다가 모든 대중들이 아는 사실이기도 하지만 메이지
(明治) 천황이 외궁의 신체(神體)를 조사했더니 유대의 유품이 있었다고 하고, 또한 삼유예(森有 )가 내궁(內宮)
을 조사하니까, 유대문자가 있었다. 전(前) 1천년경의 멕시코에 유대문자와 타루시시 선(船)의 유물이 있는 정도
여서,일본열도에 그것이 있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것은 아니다.
헤로도투스는 전(前) 6세기에 페니키아의 수부(水夫)가 파라오·네코의 명(命)에 의해 항해한 것을 서술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홍해에서 나와 인도양에 들어가, 2년 후에 라큐레스의 주(柱) 즉, 지브랄탈 해협에서 지중해로 돌아왔다.
그래서 항해 중 태양을 우측으로 봤다고 하고 또한 대륙을 환항(環航)한 것이다. 이것은 동방으로 나아가 태평양을
건너, 미 대륙을 환항(環航)하고, 대서양을 건너, 지중해로 돌아온 것을 표시하고 있다.
고대 오리엔트와 인도의 관계에 대해서는, 앗시리아 여왕 세미라미스, 페르시아왕 다리우스, 마케도니아 왕 알렉
산더 등이 기록되어 있지만, 더욱이 옛적, 기원전 2500년 이후, 라가슈나 앗카도의 상인은 회전인장(回轉印章)을
갖고 인더스나 반첸에 진출하고 있다. 중국의 은(殷)도 이들 문화와 민족의 이동에 의한 토코로덴 현상(우무(토코
로덴)가 틀에서 줄줄줄 자연스럽게 힘안들이고 뽑여져 나오는 현상)이지만, 이것은 졸저 「반첸·왜인의 뿌리」
에서 상세히 서술했다.
<북부여기(北夫餘紀)>-단군조선과 시황제(始皇帝)
앞에 서술했듯이, <북부여기>는, 단군조선의 말기에 '5가(加)의 백성이 (秦王) 정(政:진시황 이름)에 따랐다'고
서술하고 있다. 진(秦)의 지배는 일관되게 장성(만리장성) 밖에 못미처, 단군조선의 5가(加)가 진(秦)에 흡수
되었다면, 그것은 장성의 내측에 있던 것이다. 이 부분의 중국사는 전혀 엉터리로 신용할 수 없다.
<삼성기전(三聖紀全)>은 한인(韓人)이 정(政)을 저격했다고 쓰고 있지만, 이것은 「사기(史記)」의 연(燕)의
암살자 형가(荊軻)의 모델인지도 모른다. 이른바 주(周) 전국(戰國)의 시대에 조(趙), 위(魏), 한(韓)이라는 세
국가가 있어, 이것을 3진(晋)이라 하는데, 이 중 한(韓)은 낙양을 중심으로 하고, 위는 남양(南陽) 완(宛)의 제철
부족의 서(徐)씨를 지배하고, 조(趙)는 중산국(中山國)의 제철부족의 탁씨(卓氏)를 지배하고 있다가 후에 3진
(晋)은 모두 진(秦)의 공격에 굴복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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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진) 태행(太行) 산맥을 중심으로 서는 산서(山西) 동은 산동(山東)이다. 산서성(山西省)은 춘추시대의 진(晋) 왕조의
발흥지로 뒤에 전국시절, 한(韓), 위(魏), 조(趙) 3국으로 나뉘어 소위 3진(晋)의 시대를 연다. 산동이 전통적 동이족의
근거지로 동이족 은(殷)의 영향권에 속하고 주의 제후국 백금의 노나라가 있던 곳이라면 산서 역시 동이족에 뿌리를
대고 있는 요(堯), 순(舜),우(禹)가 근거한 동이족의 근거지였다. 장량과 한신이 바로 이 3진(晋) 가운데 한(韓)의 후예니
한(韓)은 환단의 동이겨레 고유의 명칭이었으니 한신이 처음 초패왕 항우에게 간 것은 초(楚)나라가 전통적인 동이족
국가였기 때문이었다. 또 <삼성기전>이 서술하고 있듯이 진시환 정(政)을 친 것은 장자방(장 량)이 개입된 동이족 한(韓)
족으로, 정(政)이 그 황실(瀛씨 성)과 혈통(신농씨 姜씨 성의 후예 呂씨 성) 모두 동이족이었으나 장성을 쌓아 중원대륙을
석권하고 있던 동이 제 족을 압박하고 동족인 모든 동이 제 족을 흩어 민호(民戶)로 삼아 한족(漢族)화 해 나아가는 과정
에서 동이 제 족의 반발을 샀다. 뿐만 아니라 「북사(北史)」에 포함되어 있는 북주(北周)왕조 역시 우문(宇文)씨에 의해
개국되었는데,「북사(北史)」는 우문(宇文)씨를 염제의 후예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능히 우리 핏줄 국가임을 알 수 있으며 ,
모용(慕容)씨 또한 동이족의 하나인 선비족 출신으로 중국에 들어가 5호16국의 하나인 연(燕) 왕조를 열었으니 연(燕)
또한 우리 핏줄 국가가 아니라고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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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의 「삼진세가(三晋世家)」를 읽으면, 조사(趙史)는 우랄토 박트리아史, 위사(魏史)는 킨메리아
史지만, 한(韓) 史는 어딘지 명료하지 않다. 그러나 주(周)대의 금문(金文)과 낙양(洛陽) 금촌(金村)에서 출토된
한(韓)의 히요우(原)씨의 종을 해독하면, 이들은 바하렌 도(島)의 해인(海人), 쉽게 얘기하면, 아라비아해(海)의
해적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전(前) 7세기에 갠지스 유역을 제패한 카시국의 맛라키(마라)족의 동류(同類)
로, 전에 서술했듯이 카시국은 "협야후 배폐명" 또는 "니기하야히"의 코사라국과 동맹한 것이다. 나는 ( 안에
3개:일본에만 있는 성 씨)氏는 페니키아 인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한편, <북부여기 상> 시조 해모수 19년 조에, '기(箕)가 훙(薨:제후의 죽음)하지 않고, 자준(子準)을 공격하다.
봉(封)하여 번조선(番朝鮮)의 왕이 되다'로 되어있고, 기씨조선(箕氏朝鮮)이 번한(番韓)을 계승한 것으로 되는데,
기씨조선도 원래는 (동이족) 은인(殷人)이 세운 국가였다. 졸저 「반첸·왜인의 뿌리」에서 서술했지만 은(殷)이란
국가는 이신에 종속된 해인(海人)의 카르데아인이 말레이 반도를 중계기지로 하여 중국을 침략한 때의 식민지여서,
은(殷)도 기씨조선도 카르데아인 후의 페니키아인였다. 나는 "기자(箕子)"라고 얘기하고 싶은 페니키아 왕의 한역
(漢譯)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기왕 여기까지 소개하다보니 일본사의 뿌리와 한민족사의 뿌리를 아울러 드러내고 있는 가시마의 일역판
「환단고기」 서문을 좀 더 들어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환단고기의 소 타이틀을 걸고 대륙사 및 서래설의
차원에서 추적하고 있는 가시마의 일본사 추적을 잠시 더 살펴보기로 하자.
<북부여기>-3의 왕조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왜 부여사(夫餘史)의 대부분을 말살했을까. 본서 「환단고기」의 <북부여기 상,하>와
<가섭원(迦葉原) 부여기>를 읽으면, 계속 그렇게 중얼거리지 않을 수 없다. <북부여기 상>은 해모수(解慕 ) 왕조
의 역사이지만, 편의상 이것을 북부여 전왕조로 하면,
1) 해모수 재위 45년,
2)모수리(慕 離) 재위 25년,
3) 고해사(高奚斯) 재위 49년,
4)고(高) (解) 우루(于婁) 재위 34년이다.
이 왕가는 가섭원 부여에 이어지지만, <북부여기 하>에 의하면, 북부여에는 동명왕(東明王)에 의한 별도의 왕조가
가능하다. 이것을 북부여 중기왕조로 하면,
5)고두막(高豆莫) (豆莫婁, 東明이라 칭한다) 재위 22년, 재제위(在帝位) 27년,
6)고무서(高無胥) 재위 2년이다.
<가섭원부여기>에 의하면, 북부여 전기왕조의 말왕 해우루(解于婁)의 왕제 해부루(解夫婁)는 북부여 중기 왕조에
쫓겨 가섭원(迦葉原)으로 옮겼다. 그 왕은,
1)해부루 재위 39년,
2)금와(金蛙) 재위 41년,
3) 대소(帶素) 재위 28년이다.
단 금와는 부루의 자식은 아니다. 여기서 제 1의 문제는, 북부여 중기 왕조의 실체이지만, 「왜인흥망사」제 34장,
제 35장은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34장 위만조선(衛滿朝鮮)
연(燕)의 만(瞞), 은(殷)에 설득하여 왈, 청컨대 물(水)를 등져(背) 나라를 세우고, 한구(漢寇)를 방어할 것.
은(殷) 납득하여 이를 코시우(姑 宇)에 봉(封)하다. 만(瞞) 또한 한(漢)을 설득하여 왈, 호(胡), 진(秦)의 화주
(華胄)를 감추다. 청컨대 이것을 멸하여 군(郡)으로 하고, 후환을 없애소서. 한(漢) 기뻐하여 이에 병장(兵仗:무기)
을 보내다. 만(瞞) 공격하여, 은(殷)을 뺏고, 한(漢), 군(郡)을 나아가(進) 서가(徐珂)를 노리다.
은(殷)왕 진(辰:단군조선 3한 중 단군이 직접 통치한 진한, 마한·변한은 부단군 2명이 각기 맡아 통치)에 달려가,
진(秦) 씨를 따라(隨) 옮기다. 은(殷) 망하다.
만(瞞) 즉 지회(智淮)씨, 연(燕)의 고사(故事)를 연구하여, 이것으로 나라를 세우고, 조선(朝鮮)이라 부르다.
처음으로 주무(周武)의 뜻을 이루다.
위만(衛滿)은 은(殷)을 설득하다.
'대능하(大凌河)를 등져(背) 건국하고, 한(漢)의 침입을 막고 싶다.' 여기서 은(殷)은 이것을 대능하와 요하(遼河)
사이의 땅에 봉하고, 만(滿)은 또 한(漢)을 설득하다. '은(殷)은 진(秦)의 망명자를 숨겨주고 있다.
나는 이것을 멸하고 한(漢)의 군(郡)을 두고, 후환을 끊고싶다.-' 한(漢)은 기뻐하여 군병을 주다.
만(滿)은 급습하여 은(殷)의 영토를 뺏고, 한(漢)은 창해군(蒼海郡)을 두어 사카은(殷)을 저지했다.
은(殷) 왕은 진(辰)에 망명하고 진(秦)족은 이에 따라 도망가고, 은(殷) 나라는 망했다.
만(滿)은 진운은(辰 殷)의 고사(故事)를 생각하여, 국명을 바꿔 조선이라 하고, 처음으로 주(周)
무왕(武王:앗슈르니라리 4세)의 뜻(志)을 달성했다.'
제 35장 예군(穢君) 남려치(南閭峙)
이에 따라, 만(滿), 한(漢)에 반역하지 않기를 요구하다. 한(漢), 타후시(但巫志)를 떠나, 가슴속 깊이 품다.
서가(徐珂)왕 아크리나로토(淮骨令南閭峙) 은(殷)을 위하여 복수하고 싶어, 이를 한(漢)과 도모하다.
한군(漢郡)이 아닌 것을 맹세하고, 왕인(王印)으로 증명하다. 낙토(洛兎)로 나아감에, 나로토(南閭峙), 분에
(憤 :분노)하여 스스로 목을 베다. 자(子) 아크리이사토(淮骨令蔚祥)를 습격하여 요동을 부수고, 수팽오(守彭吾)를
베고, 나라를 이끌어 훈나(潘耶)에 합치다. 훈나(潘耶) 이에 곧 크게 되다.
이렇게 되자 만(滿)은 한(漢)에게 약속의 취소를 요구했다. 한(漢)은 탑자하(塔子河)를 떠났지만, 마음속에 한(恨)을
품다. 서가왕(徐珂王) 아크리나로토(濊君南閭峙)는 은(殷)을 위해 적을 토벌하여, 한(漢)과 도모했다. 한(漢)은 군
(郡)을 두지 않는다고 약속하고, 왕인(王印)을 주어 맹세했다. 그러나 한(漢)은 낙랑(樂浪), 현토(玄 )의 2 군(郡)을
두어 나로토(남려치)는 분노하여 자살했다. 자(子) 아크리이사토는 습격하여 요동을 부수고, 군수(郡守) 팽오고
(彭吾賈)를 베어 나라를 이끌고 부여(夫餘)에 합쳤다. 부여는 성대해졌다.
여기서 서가왕(徐珂王) 아그리나로토는 「사기(史記)」에는 '예군(濊君) 남려치(南閭峙), 조선왕 우거(右渠)에
따라, 28만 구(口)를 이끌고 요동에 청하여 내속(內屬)하다'고 되어있고, 「한서(漢書)」에는 '동이예군남려등
(東夷濊君南閭等) 구이십팔만인(口二十八萬人) 항복하다. 창해군(蒼海郡)이 되다.'고 되어있다.
따라서 아그리나로토의 서가은(徐珂殷)이라는 국가는 예국(濊國)이다.
그런데 <북부여기 상> 3세 고해사(高奚斯) 42년 조에, '위적(衛賊)을 남려(南閭)의 성(城)에서 쳐부수다'로 되어
있고, 4세 고우루(高于婁) 6년 조에, '군(軍)을 남려(南閭)에 두다'라고 되어있다. 따라서 북부여 전기 왕조는,
아그리나로토의 일족과는 별개지만, 북부여 중기왕조의 "두막루(頭莫婁)"를 즈바쿠리(Zubakuri)라고 읽으면,
왕명(王名)의 후반부는 "아크리"라고도 읽을 수 있다.
한편 <북부여기 하> 6세 고무서(高無胥) 2년 조에는 협�(陜父)라는 이름이 나온다. 이 왕은 <고구려국본기>에도
등장하여, 웅본(熊本)에서 다파라국(多波羅國)을 세운 것으로 되어있는데, 「고사기(古事記)」와 서로 비추어
합하면, 협보는 그 "니기하야히"에 상당한다. 또한 <단군세기>는 왜인의 왕이 된 "협야후배폐명(陝野侯裵幣命)"의
이름을 쓰고 있지만, 이 왕과 「왜인흥망사」의 서가은(徐珂殷)의 왕, 및 「구사기( 事紀)」에 쓰여있는 아마쯔
마라의 선단을 이끈 "니기하야히"와는 동계(同系)이다.
따라서 협보를 배폐명의 자손으로 하고, 니기하야히를 그 세습명으로 생각하면 이들의 관계는 모두 명료해진다.
이런 이유에 의해, 나는 북부여 중기 왕조를 예국(濊國)의 왕가로 하고 싶다. 제 2의 문제는 부여 후기왕조이다.
「위서(魏書)」 부여 조는, 부여왕으로서 "위구대(尉仇台), 간위거(簡位居), 마여(麻余), 의려(依慮)"라는 왕명을
들고 있지만, 「삼국사기」에 의하면 "위구대"는 "부대(夫台)"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대진국본기(大震國本紀)」
에는 '의려(依慮)의 아들 의라(依羅)가 남하하여 왜왕이 됐다고 되어있고, 이 왕이 우리들의 "미마끼이리히코" 즉
숭신(崇神)인 것 같다. 따라서 이 왕조를 후기 왕조로 하면, 도대체 이들은 중기왕조, 또는 그 계승자인 고구려
왕조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의문이 제 2의 문제가 된다.
<가섭원(迦葉原)부여기> 3세 대소(帶素)의 조에, '태조왕 16년, 동부여의 도두왕(都頭王)을 명명하여 우대(于台
대 또는 이)라 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을 부대(夫台:부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우선,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삼국사기」는, 무언가의 이유로 그것을 말살해버렸다는 것이다.(「삼국사기」는 존주 사대주의자이자 반도사적
신라계 종파주의자 김부식이 인종에게 사직서를 바치고 인종의 보고라인을 벗어난 다음, 당시 서슬 퍼런 금
희종의 비위에 맡게 특별 팀을 구성해 과잉충성으로 편찬해 바친 사대사서이다: 안원전)
<태백일사(太白逸史)·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
<태백일사> 제 1 "삼신오제본기"의 모두(冒頭)는 「표훈천사(表訓天詞)」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대시(大始), 상하사방 曾이 아직 암흑으로 안보인다. 옛날은 가고 지금은 오고, 단 하나의 광명이 있다.
상계(上界)에서 온 삼신(三神)이 있다. 즉 1 상제가 된다. 주체는 즉, 일신(一神)이 되어 각각 신(神)이 있다.
작용은 즉 3신(神)이 된다. 3신은 만물을 이끌어내고, 전 세계를 통치하는 무량의 지능이 있다. 그 형체를 보여
최상의 상천(上天)에 앉다.-
그런데, 이 교의(敎義)는 실은 힌두교와 동일하다. 전중어토미(田中於 彌)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인도신화전설」)
-힌두교에서는 브라흐마-(창조신), 뷔슈누(유지신), 시바(파괴신)의 3신을 주신으로 하고, 베다 신화에 있어서
위력(偉力)을 받은 인도라는, 그의 아래 바람(風)의 신이 된다. 이 3 신은 별개의 신이지만, 이것을 일신이 다른
현현(顯現)으로 보는 3신일체(토리무르티)설도 있다.
「우파니샤드」의 철인에 아르나의 자(子) 웃다라카 또는 웃다라카·아루니라는 바라몬이 있었다.
「샤타파타·프라흐마나」2·4·1에서는 쿠르·판차라의 바라몬이 되지만, 웃다라카는 「챤도구야」 제 6편에서, '태초
만유는 유일무이의 유(有)였다. 이 유(有)라는 신격이, 열(熱) 과 수(水)와 식(食)의 세 가지 신격에, 사는 나(我:
生命)를 갖고 침입하여, 명(名)과 색(色)<형태>을 전개하여 그 하나 하나를 3가지 형태로 하려했다. 화(火), 태양
(太陽), 월(月), 전광(電光) 등의 적색은 열(熱)의 색, 백색은 수(水), 흑색은 식(食)의 색, 명료하게 모르는 것은
3신격(神格)의 총화(總和)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다음에 <삼신오제본기>는 '오제(五帝)는 흑제, 적제, 청제, 백제, 황제이고, 그것은 수, 화, 목, 금, 토이고, 또한
북, 남, 동, 서, 중앙이다'라고 논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타레야·아라누야카」는 5대 원소에 대하여, '일체가
발생하는 5종의 찬송이고 자아를 아는 것은 지자(知者)이다. 지(地), 풍(風), 공(空), 수(水), 화(火)는 5종의
자아의 찬송이다. 만유는 이것에서 발생하고, 이에 환귀(還歸)한다'고 쓰고 있다. 후에 이 5원소의 순서는 공(空),
풍(風), 화(火),수(水), 지(地)가 되고, 멀리 인도에 있어서의 원소관의 표준이 된다.
다음에 <태백일사(太白逸史)> 제 5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 중의 3.1신고(神誥), 제 1장 허공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제(帝) 왈(曰) '그대, 5가(加)의 중생들아, 창창(蒼蒼)한 것은 하늘이 아니며, 현현(玄玄)한
것은 하늘이 아니다. 하늘은 형질(形質)없고, 단예(端倪:가, 끝 예 즉, 처음과 끝)없다. 상하사방 없이 밖도 허하고
안도 비어있어, 어디나 존재하지 않는데 없고 무엇하나 포용하지 않는데가 없다'
이 사상도 「우파니샤드」 가르침과 같고, 「차도기야·우파니샤드」는 '허공에 일월전성화(日月電星火)가 있다.
허공에 의해 사람은 부르짖고, 허공으로부터 사람은 듣고, 허공에 의해 사람은 답한다. 허공에 있어서 사람은
기뻐하고, 슬퍼하고, 허공에 있어서 태어나고, 허공 중에 재생한다. 사람은 허공을 숭배해야 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태백교(太白敎)의 3 신(神)(3極) 5제(帝)라는 사상은 「우파니샤드」나 힌두교의 교의(敎義)
를 뿌리로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태백교 사람들은, 태백교가 일본 신도(神道)의 뿌리라고 주장하고, 후에 서술
하듯이 이것은 옳지만, 태백교 자신의 뿌리가 인도철학에 있는 것을 인정하기에는 저항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태양은 동에서 뜬다'는 말처럼,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한편, 「구사기대성경( 事紀大成經)」 서(序) 권 1장 천조(天祖)의 조(條) 8공리(空理)에, '1 신(神)은 연(緣)
없고, 묘하게 앉는 곳도 없다. 그 넓기가 끝이 없고, 그 경계 끝이 없다. 이것을 신허(神虛)라 한다. 하늘(天)도
아직 없다. 땅(地)도 아직 없다. 윤(倫)도 없고, 의(儀)도 없다'고 한다. 또한 십원리(十圓理)에, '이 신(神)은
홀로 앉고…청혼(靑魂)은 동에 있고, 풍기(風氣)의 생리에 화(和)하고…적혼(赤魂)은 남에 있고, 열기(熱氣)의
극리(極理)에 화(和)하고…백혼(白魂)은 서에 있고, 조기(燥氣)의 역리(易理)에 화(和)하고, 현혼(玄魂)은 북에
있고, 한기(寒氣)의 상리(像理)에 화(和)하고, 황혼(黃魂)은 가운데에 있고, 습기(濕氣)의 정리(定理)에 화(和)
한다고 되어있다. 또한 「구사기( 事紀) 30권본」의 <천신본기(天神本紀)>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삼중정량(三重貞亮) 「구사기훈해( 事紀訓解)」
-정재오승승속일천인혜이존(正哉吾勝勝速日天忍禾惠耳尊)......황태자존(尊)의 신기(神氣)는 잘 갖고 줄지 않고
새지 않고 태어나면서 8해(海)의 용(龍)을 이끈다. 천조(天祖) 불러, 천지수화(天地水火)의 주(主)를 정하다.
천화(天火)는 즉 이 신이 주재하는 곳에 있다. 지수(地水)는 즉 이 용이 주재하는 곳에 있다. 건윤택(乾潤澤)은
서로 이로움(利)을 도모한다. 천조대신(天照大神)과 황태자존과는, 즉 그 덕화(德化)를 통령(統領)한다.
그런 고로 즉, 천지신룡은 서로 대등하다. 따라서 천조대신과 황태자존과는 이것을 서로 통령(統領)하여 중간에
사람이 있다. 능히 도를 행하고, 덕을 수양하여 하늘을 제사지내고 신을 제사지내면 즉 3극(極)이 서로 응하여,
천지가 무사하다. 이들 3극의 도를 설득하는 근원이 된다.-
그렇다면, 「구사기( 事紀)」가 서술하는 신도(神道)의 이데올로기도 완전히 태백교의 3신(神) 5제(帝) 사상과
동일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상은 실은, 인도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중간에, 중국대륙에도 파급되어,
「중산오궤경(中山五櫃經)」에는 '그 태일(太一)의 진군(眞君)은 이 북극대화(北極大和)의 원신(元神)으로 하여,
신통의 변화로 된다. 북극의 자미궁(紫微宮)에서 천지 사이에 경과하여 만물을 자육(滋育:힘써 길름)한다. 하늘에
있어서는 5상(象)이 명확히 있다.'는 기술이 보인다. 「사기」의 3황 5제도 같다. 게다가 놀랍게도, 이 3극 사상은
멕시코까지 도달해 있다. 미겔·네리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아틀란티스 대륙과 심볼마크」-「역사와 현대」Vol.3-1所收)
여기서 "공(空)"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아스테카(또는 나우아톨Nauhatl), 그들이 나타내는 공(空)은 모두 같은
심볼로 표시되는데 그의 단계와 레벨에 의해 성질이 변화한다. 아스테카인은, 오메이오칸(Omeiocan)과
오메테크우토리(Ometecuhtli)라는 두 개의 창조적인 "공(空)"의 결합에서, 제 3의 "공(空)"이 태어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테오토라우코(Teotlauco)라는 화(火)의 지역이다. 이 세 가지 공(空)은, 결국은 통합된 하나의 것이 되지만,
그곳에서 다음 세 가지 공(空)이 형성된다.
즉 암암(暗闇)의 공(空)=이차판니나츠카얀(ItzapanNanatzcayan), 예민한 빛(光)의 공(空)=테오코사우코(Teocozauco), 그리고 이 양자에서 생긴 중간의 황혼의 공(空), 후에 별(星)이 하얀 관(館)=테오이스타크
(Teoixtac)로 불리는 것이다. 이것은 대공(大空)의 최후의 허공(空)으로, 후에 계속되는 7가지 허공(空)과 인간과를
통합한다. 여기에 이르러, 인간은 단순한 물질적 생물이 아니라, 신성한 광선이 되어 탄생전과 사후에, 이들 7가지
허공(空)을 떠돌아다니는 것이다.
그들의 허공(空)을 열거해 보자. 테루타리코(Teltalico)라는 별들의 허공, 소세우코(Xoxuhco)라는 낮의 파란 허공,
야야우코(Yayauhco)라는 밤의 어두운 허공, 마마로아코(Mamaloaco)라는 혜성들의 허공, 윗트란(Huitztlan)
이라는 금성의 허공, 토나티우(Tonatiuh)라는 태양의 허공, 그리고 토라로카티판메토리(Tlalocatipanmetztli) 달과
구름의 허공이다.
이들 공(空)을 지나면, 지구의 오메테크우토리, 즉 우리들이 살고 있는 장소에 다다르고 드디어 토나카테크우토리(Tonacatecuhtli)라는 우리들의 육체의 주(主)에 다다른다. 토나카테크우토리는 원시시대 최초의 양성인간을
표현하고 있고, 고문서 중에는 황색 손으로 표시되고, 2번째의 단성 인간은 흰 손으로 표현되어 있다.
앞서 서술했듯이, 이집트의 파라오 네코에게 명(命)받은 페니키아 인은, 마레 반도를 넘어 멕시코에 도달하여,
남아메리카를 돌아, 대서양을 돌아왔다. 나는 고대 갠지스 문화가 마레 반도에서 출발하여, 일파는 북상하여 중국,
한반도, 일본열도에 다다르고, 일파는 동행(東行) 하여 인도네시아에서 멕시코에 다다른 것을 서술했다.
아스테카인은 스스로 왕을 내지 않고 토루테카의 귀족을 왕으로 했지만, 이 토루테카 인이 실은 인도계 이주민인
것도 논했다. 이들 문제에 대해서는 졸저 「비미호(卑彌呼)와 왜인의 뿌리」(「역사와 현대」 Vol.2-2 所收)를
참조하시길. 한편 본서(「환단고기」)의 권말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살((殺)과 생(生)에 법(法)이 있다. 위로는 국왕으로부터, 아래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때(時)와 물
(物)을 선택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것을 행함에 1)로서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 옛날부터 부여에 말(馬)이 있어도
타지 않는다. 살상을 금지하고 산 것(生)을 방목하는 것은 역시 의로운 일이다.-
일부의 학자는 부여를 북방 기마민족이라 하지만, 본서에 의하면, 부여는 원래 말을 타지 않고, 아마 경작 및
거마(車馬)로 이용했다고 생각된다. 또한 고구려는 말을 탔다고 하는데, 고구려와 부여는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다. 「왜인흥망사」에 의하면, 고구려는 고령(高令) 으로 마한(馬韓)의 초대에 의해 고비사막에서 왔다고
하는데, 고령(高令)은 흉노의 제철부족이다. 또한 「위서(魏書)」는 '마한은 말을 타는 것을 모르고.....왜에 우마
(牛馬)가 없다'고 서술하고 있지만, 이것도 이미 앞에서 서술했다. 부여가 말기에 말을 타게 되었어도, 이른바
북방 기마민족론이라는 극적인 반설( 說)은, 전에도 서술했듯이 이것이야말로 소련이라는 북방인이 억류자를
통해 일본에 퍼뜨린 모략 반설에 불과하다.
「태백일사(太白逸史)」.「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
「태백일사(太白逸史)」 제 5는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이다. 그 가운데 3.1신고(神誥)가, 원동중(元董仲)
「삼성기(三聖紀)」 주(注)의 '왜(倭), 진(辰), 여국(餘國), 혹은 횡서하고, 혹은 결승(結繩)하고, 혹은 계목( 木)
하다.'라는 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여기서 결승(結繩)이라는 것은 키프라는 것으로, 원래가 모이 족, 챰 족, 토번
(吐蕃) 등의 문자였다. 그 범위는 넓게 태평양 전역에 이르고, 예전부터 충승( 繩), 진경(津輕), 잉카 등에서 행해
지지만, 본서에 의해, 왜인, 진국(辰國), 부여(夫餘)도 키프(결승문자)를 갖고있는 것이 판명되었다. 키프가 참파,
충승( 繩), 왜(倭), 진경(津輕), 잉카라는 해인계(海人系)의 문자인 것은 졸저 「반첸·왜인의 뿌리」에서 서술했
지만 그것을 인정한다면, 모이 족, 토번, 진국(辰國:濊國), 부여(夫餘) 등은, 이들 해인(海人)에서 문자를 수용하게
된다.(이 부분은 환단고기를 100% 인정한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지만 가시마의 사료 이해 부족과 서래설의
대륙사관을 통한 북왜설의 견강부회적인 측면이 감지되고 있다:안원전)
윗트포겔과 휑크는 ''거란 치하에서는 주조된 황금제 어패(魚佩)의 신임장은, 모든 점에서 판단하면, 쌍어패( 魚佩)
가 되고, 황제 권력의 심볼로써 전쟁 작전의 동원을 위한 부첩(符牒)으로써 사용됐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행해졌다.
원정(遠征)에 들어가기 전에 황금제 어패(魚佩)의 신임장을 주조하고, 이의 반분(半分)은 군대에 송부했다. 군대가
원정을 떠나는 날, 거란(契丹) 왕은 황금제 쌍 어패(魚佩)의 신임장의 하나를 직접적으로 사령관에게 배포했다.
어패(魚佩)의 신임장에 의해 위임된 군대의 진영에 사령관이 도착하여, 사령관은 반분의 신임장을 제시(呈示)하여, (前揭書)
12세기 말부터 13세기 초에 여진(女眞)국가의 거대한 무역·수공업의 중심지의 하나인 연해주의, 샤이긴 성지(城址)
만약 그것이 이미 군대가 갖고있는 다른 반분(半分)과 일치하면, 병사들은 곧 도착한 지휘자를 장(長)으로 하여
원정에 출발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시베리아 극동의 고고학」2) 또한 에·베·샤프크노프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의 발굴 때, 우리들은 주조된 청동 어패(魚佩)와 녹각(鹿角)을 발견했다. 중형(中形)의 늘어진 녹각의 조상(彫像)은
(도표 A·1), 3호 금속 가공지(加工址)의 흔적인 단상(段狀)을 이루는 광장의 경사면에서 발견되었다. 뿔의 기저부에
아래로 드리워 장식하는(垂飾用) 작은 쥐는 부분이 있다. 대각(袋角)에 표현된 상황에 의해, 예전부터 우리들은 이
골기(骨器)를 각종의 중병(重病)의 몸(身)을 전치(全治)시키는 호부(護符)에 결부시켰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사이긴 성지(城址) 출토의 고고자료를 검토하고 있던 게·게·스트라타노비치는, 그것에 동의할 수 없어 별도의
견해를 서술했다. 게·게·스트라타노비치의 의견에 의하면, 이 뿔(角)은 해독봉(解讀棒)이고, 이것에 의해 결승문자의
해독때 이음매를 푸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여진의 결승문자의 존재에 대하여 직접 결정적 확증을 갖는 것은 아니다.
동시에 다음 사항이 증명되고 있다. 12세기까지 여진은 결국 음절(音節) 문자의 발명까지,
'마치 문자와 같이 작은 목판을 쪼개 나무에 새긴 흔적이 많이 있었다. 계약의 결정(決定) 때 나무에 새긴 결정(決定)
은 파기하기 어려운 것으로써 존속하고, 그것을 누구도 범할 수 없다. 어디에서도 모두 명령의 계약에 종속되어있다.
기호는(그것은) 신성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보로죠프)
필요한 경우에, 어떤 중요한 일을 명기하거나 혹은 상세한 기술을 했다. 특히 근린제국(近隣諸國) 사자(使者)의
문통(文通) 때에, 여진은 나무로 만들어진 표(表)나, 혹은 그것에 각각의 일의 상황을 새긴 계산목(計算木)을
사용했다.(Ma Touan Lin, 1876,p.427∼446) 확실히 상형문자가 이러한 목적을 갖고 쓰이고, 비교적 최근까지,
시베리아, 극동의 많은 제 족 간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연락을 전하는 경우에는 (여진-에·베·샤프크노프)
비각(飛脚)을 사용하여, 암창(暗唱)하면서 명령서를 암기한다.…군사적인 것에 관해서 말하면, 비밀을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모두 구술로 신임된 인물에 전해졌다.
저(彼)가 지령을 전할 때, 개개의 군사적인 것은, 명령으로서 연락을 암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지령은
수천 어(語)로 되어있고, 결코 작은 착오도 용납되지 않는다.(보로죠프)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결승문자에 의해
달성된 것에 틀림없다. 사이긴 성지(城址)의 해독봉(解讀棒) 발견의 덕으로, 여진의 아래(下)에서 결승문자가
존재하는 것은, 지금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들의 관계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결승문자가 고대 중국 12세기,
13세기 초에, 여진의 근린(이웃) 몽골(란제젠)의 치하에서도 널리 분포되어있다. 결승문자의 흔적은 금일, 니부히
치하에서도 인정된다.(크레이노비치)
이와같은 키프의 분포영역에 대하여 생각해 보면, 그것은 반첸 흑도(黑陶)를 뿌리로 하는 성자애(城子崖), 서울,
두만강, 구강(龜岡)이라는 흑도 문화권과 거의 일치하는 것이다. 그것은 양자(兩者)가 원래 해인계(海人系)의
문화라는 것을 의미한다.
<태백일사(太白逸史)·고구려국본기>
<태백일사> 제 6은 "고구려국본기"지만, 체재(體裁)에서 보면 완본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을 읽으면, 고구려
시대의 「삼국사기(三國史記)」가 얼마나 완전했던가를 이해할 수 있다. 우선 모두(冒頭)에 「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하여 '단군 해모수(解慕漱) 최초로 강재(降在)한 것은 진왕(秦王) 정(政:진시왕) 8년이다. 고리군( 離郡)의
왕·고진(高辰)은 해모수의 2자(子)로, 옥저후(沃沮侯) 불리지(弗離支)는 고진(高辰)의 손자이다.…그리고 서쪽
압록을 건너, 하백(河伯)의 여(女) 유화(柳花)를 만나, 취하여 고주몽(高朱蒙)을 낳았다.'고 한다.
여기서 고진(高辰)이 해모수의 2자(子)인데, 성이 다른 것을 생각하면 양자가 아닐까. 「왜인흥망사」제 38장과
조합(照合)하면 고진(高辰)은 흉노(匈奴) 고령부(高令部)의 왕이라는 얘기가 된다. 다음에, '유화 아들 주몽을
이끌고 웅심산(熊心山)에 돌아가다. 목마(牧馬)를 이뤄 아직 몇 마리 안될 때 관가(官家)가 꺼리는 장소가 되고,
오이(烏伊)와 마리(摩離)와 협보(陜父)와 함께 도망가 졸본(卒本)에 이르다'로 되어 있다.
여기서 협보(陜父)란 것은 앞서 나온 "협야후배폐명(陝野侯裵幣命)"의 자손이지만, 후에 남하하여 다파라국(多婆
羅國)을 세웠기 때문에, 그것이 「고사기(古事記)」의 "니기하야히"로 여겨지는 것은 이미 서술했다. 다음에,
광개토왕의 조(條)에, '한번 스스로 바다를 건너, 이른 곳 왜인을 격파하다. 왜인은 백제의 개(介)가 되다.
백제, 먼저 왜와 밀통하고, 이것으로 신라의 국경을 연합해 침략하다'고 되어있다. 이 부분은 광개토왕 비(碑)
에서 이미 익숙하지만, 문제는 '왜인은 백제의 개(介)가 되고, 백제, 먼저 왜와 밀통하다'라는 부분이다.
이 경우, 개(介)란 개첨(介添)이라는 것이겠죠. 다음에 '백제가 왜와 밀통했다'라는 것은 무슨 일일까. 「대진국
본기(大震國本紀)」에서 말하는 부여왕 의라(依羅)가 남하하여 왜왕이 됐다. 이것이 숭신(崇神)이지만, 그의 아들
수인(垂仁)이 백제왕이 되어 경행(景行)이라고 칭했다. 이것이 밀통(密通)이라는 것이겠죠.
"칠지도(七支刀)"에는 이것이 '백제왕의 세자 연고가 있어 왜왕이 되다'라고 새겨져 있지만, 졸저 「환무분서
(桓武焚書)와 천(天)의 왕조」(「역사와 현대」Vol. 3-1 所收)에서 이미 서술했다. 「구사기( 事紀) 대성경
(大成經)」30권 본에, '진사왕(辰斯王) 흠례(欠禮:예가 부족해)하여 죽임을 당하다'로 되어있어, 광개토왕에게
내응(內應)한 왜인에 의해 살해된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후, 본서는 '앞서 협보(陜父) 남한을 달려가 마한 산중에
있다.…협보, 장(將)·혁(革)을 알고, 배로 패수(浿水)를 따라 내려가…되돌아 아소산(阿蘇山:규슈 구마모토 인근의
유명한 활화산)으로 옮겨(徙) ...여기에 머물다. 이것을 다파라국(多婆羅國)의 시조로 하다. 후에 임나(任那:대마도)
를 병합하여 연정(聯政)하여 다스리다. 3국은 바다에 있고 7국은 육지에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야마다이국(邪馬臺國) 연합인데, "장(將)·혁(革)"이란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일로, 그의 자(子)인
남해(南解) 차차웅(次次雄)이 우리들의 장수언(長髓彦)이다. 또한 임나 (任那)란 대마도지만 「왜인흥망사」는
'비미호(卑彌呼)의 종녀(宗女) 일여(壹與)가 임나를 세웠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들에 대해서는, 이미 「역사와 현대」Vol.1-1 『「환단고기」와 야마다이국(邪馬臺國)』Vol.1-2 『「환단고기」는 말한다』Vol.2-1 <비미자(卑彌子)-
임나(任那)-마자(馬子:백제계 蘇我씨)의 계보>에서 상세히 서술했다.
이 외, 본서의 내용은 여러 갈래로 퍼지지만, '고려진(高麗鎭)은 북경의 안정문(安定門) 외 60리 정도에 있다.
안시성(安市城)은 개평부(開平府)의 동북 70리에 있다. 고려성(高麗城)은 하간현(河間縣)의 서북 12리에 있다.
모두 태조 무열제(武烈帝)가 세운 곳이다.'라는 부분을 지적해두고 싶다.
같은 것을 「왜인흥망사」 제 16장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제 16장
서정송소(西征頌疏)에 이르기를, 신조장(神祖將)에게 서(西)를 정복케 하다. 진아희(辰阿 )로 개맹나돈(介盟奈敦)
의 성(城)을 공격케 하고, 찰하가희(察賀珂 )로 안사나돈(晏泗奈敦)의 성(城)을 공격케 하고, 유기아희(悠麒阿 )
로 갈제예말(葛齊汭沫)의 성(城)을 공격케 하다. 이에 따라 노렬앙태(怒洌央太)를 평정하고, 비이구왜(斐伊 倭)의
강(岡:언덕)에 다다라, 도읍을 정하다. 틀림없이 노렬앙태(怒洌央太)는 서해의 이름이 되다. 비이구왜(斐伊 倭)는
서륙새일(西陸塞日)의 거처가 되다.
서정송소(西征頌疏)에 이르기를, '신조(神祖)·신대왕(新大王)은 정말로 서정(西征)하려 했다. "우시아케"로 금주만
(金州灣)에, "사카아케"를 안시(安市)에, "유키아케"를 진황도(秦皇島)에, 각각 성을 쌓도록 시켰다.
그리고 니레와타(직예해협(直隸海峽)) 건너, 산동반도의 히이쿠와(龍口)에 이르러 도읍을 정했다. 생각해 보니
니레와타는 서해의 이름이고, 히이쿠와는 서륙(西陸)에 태양이 저무는 곳이다.
병명조광(浜名祖光:명은 물가 빈으로도 훈독)은 여기서 "카메나토"를 금주만(金州灣), "아시나토"를 안시(安市),
"케시세마"를 진황도(秦皇島), "니레와타"를 직예해협(直隸海峽), 히이쿠와를 용구(龍口)로 해석했다. 그렇다면,
이 신조(神祖)는 태조왕(太祖王)였다. 또한 비이구왜(斐伊 倭)는 용구(龍口)지만, 본서에 '광개토왕…거란,
평량(平 ) 모두(皆) 평복(平服:엎드려 복종)시키다. 임나와 이왜(伊倭)의 속(屬), 신(臣)이라 칭하지 않을 수 없다'
고 되어 있고, 이왜(伊倭)라는 민족이 등장한다. 생각해 보니 이왜(伊倭)는 원래 용구(龍口)에 있던 왜인을 북구주,
아마 이도국(伊都國)을 거쳐 이세(伊勢)에 이주한 것이 된다.
「태백일사(太白逸史)·대진국본기(大震國本紀)」
「태백일사」 제 7은 <대진국본기>지만, 대진국은 후고구려 또는 발해(渤海)라고도 했다. 그런데, 본서(환단고기)는
왜국의 성립에 관해서도 중요한 사료를 제공하고 있다. 우선 「속일본기(續日本記)」 권 10 성무(聖武) 천황 신구
(神龜) 5년의 조를 읽어보자. '17일, 발해국사(渤海國使) 고제덕(高齊德)은 그 왕의 서병(書幷)에 방물(方物)을
헌상하다. 그 가사에 말하기를, 무예(武藝)를 계발하다. 산하역(山河域)이 다르고, 국토가 같지 않다. 엎드려 생각
하니, 대왕(성무)의 천조(天朝)는 (하늘의) 명을 받아, 일본은 터(基)를 열다. 혁엽광(奕葉光)을 거듭하고, 본지(本枝)
100세(世) 되다 운운'으로 되어있다.
성무(聖武)의 왕조가 명을 받아 일본이 건국(開基)했다는 것은, 전부터, 신라 문무왕의 손(孫) 김양림(金良琳)이
구주(九州)에서 나니와(難波:오오사카)로 옮겨, 국호를 일본(日本)으로 하고, 신라 문무(文武)왕의 이름을 세습하여
문무(文武) 천황이라 칭하고, 독립을 지향한 것을 말한다. 이것은 졸저 「환무분서(桓武焚書)와 천(天)의 왕조」
(「역사와 현대」Vol.3-1 所收)에서 서술했지만, 여기서 "본지(本枝) 100세(世)"라는 것이 문제이다. 왜 발해가 본국
이고 일본이 지국(枝國)이라는 것인가. 그런데 그 의문이 본서(「환단고기」)에 의해 풀린 것이다. 본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정주(正州)는 의려(依慮)국(國)이 도읍한 곳이다. 선비(鮮卑)·모용외(慕容 ) 때문에 패하한 후, 우박(憂迫:근심해
가슴이 막힘)하여, 자재(自裁:自決)하려다 못하고 문득 생각하기를, '내 혼이 아직 꺼지지 않았으니, 어디에 간들
이루지 못하랴.'하여, 몰래 아들 부라(扶羅)에게 부탁하여 백랑산(白狼山)을 넘어 밤에 대능하(海口)를 넘으니,
따르는 자 수 천. 마침내 건너가서 왜인들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는데, 스스로 3신(三神)의 부명(符命)에 응한다
하고,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축하의식을 올리게 하였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의려(依慮)왕이 선비(鮮卑) 때문에
패배하여, 도망하여 바다로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아들들(子弟)이 도망하여 북옥저를 지키다가, 이듬해에 아들
의라(依羅)가 즉위하였다. 이 뒤로부터 모용외(慕容 )가 재차 나라사람들을 침략하므로, 의라(依羅)가 무리 수
천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마침내 왜인들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
옛적 일본에 있던 이국(伊國)을 이세(伊勢)라고도 말하는데 왜와 더불어 이웃이었다. 이도국(伊都國)은 쭈꾸시
(筑紫)에 있어 이 또한 곧 일향국(日向國)이었다. 이때부터 이동(印)은 왜에 속하고 그 남동은 안라(安羅)에 속
했는데, 안라에는 원래 졸본(忽本) 사람들이 살았다. 북쪽에는 아소산(阿蘇山:규슈 구마모토 인근 활화산)이 있고,
안라(安羅)는 후에 임나(任那:대마도)로 편입되었는데, 고구려와 더불어 이전부터 이미 화친을 맺었다.
말로국(末盧國)의 남쪽을 대우국(大隅國)이라 하는데, 시라군(始羅郡)이 있으며, 원래 남옥저인이 모인 곳이다.
남만(南蠻), 도침미(屠★�), 환하(晥夏), 비자목(比自 )의 붙이가 모두 조공했다. 남만(南蠻)은 구려(九黎)의
후손(遺種)들로, 산월(山越)에서 온 자들이다. 비자목은 변진(弁辰) 비사벌(比斯伐) 사람들의 취락이다.
환하(晥夏)는 고구려에 속한 노예들이다. 때때로 왜인들이 나뉘어 산과 섬에 분거(分據)하여 각기 백 여국이
있었으며, 그 가운데 구야한국(狗邪韓國)이 가장 컸는데, 원래 구야(狗邪) 본국인이 다스리는 곳이다.
바다의 상선 선박이 모두 종도(種島)에 모여 교역했는데, 오(吳)·위(魏)·만(蠻)·월(越)에 속한 자들이 모두 통교했다.
비로소 천 여리나 되는 바닷길을 한 차례 건너 대마국에 이르니 사방이 가히 4 백 여 리쯤 되었다. 또 천 여 리의
바닷길을 한 차례 건너 일기국(一 國)에 이르니 사방이 3백 리쯤 되다. 원래 사이기(斯爾 )국인데, 자다(子多)의
여러 섬사람들이 모두 조공을 바치다. 또 천 여리의 바닷길을 한 차례 건너서 말로국(末盧國)에 이르니 원래 읍루
( 婁)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동남의 육지로 5백리를 지나 이도국(伊都國)에 이르니, 곧 반여언(盤余彦:이와레
히코)의 고읍이다.
여기서, 발해사의 후반부에 왜 부여(夫餘)왕 의려(依慮)가 나오는가 하면, '의려왕이 도망가 바다에 들어가고…
아들들(子弟)이 도망하여 북옥저를 지키다가, 이듬해에 아들 의라(依羅)가 바다를 건너, 결국 왜인을 평정하여
왕(崇神)이 되다.'와 같이, 이때 부여의 후기왕조는 2분(分)하여, 북옥저를 보존하는 것과 왜왕이 된 것으로 나뉘
었다. 그리고 전자가 후에 발해국이 되고 후자가 일본국이 되었다. 이것을 발해국사(渤海國使)는 "본지백세(本枝
百世)"라고 했다. 발해는 이와 같이 하여, 성무(聖武)때 일본에 접촉하여, 후에 누누이 일본에 반(反) 신라정책을
요청했다. 그리고, 등원광사(藤原廣嗣)의 난, 혜미압승(惠美押勝)의 난을 거쳐, 마침내 백제왕 준철(俊哲)이
쿠데타를 성공시켜, 준철은 즉위하여 환무(桓武)가 되었다.
더욱 본서(「환단고기」)는 '아소산(阿蘇山)의 남(日向)에 안라국(安羅國)이 있고, 후에 임나가 되었다'고 쓰고
있다. 이것은 야마다이(邪馬臺)국이 일향(日向)-웅본(熊本) 연합인 것을 명확히 하고 있지만, 이들의 문제는 이미
전게(前揭) 「역사와 현대」의 제 논문(Vol.1-1,1-2,2-1)에서 상세히 서술해 두었다.-
(안원전 이강승 공역)
가시마 노보루의 일역 환단고기 간행사를 쓴 오향청언(吾鄕淸彦)-일본 고대문자의 하나인 아히루
문자의 원형인 프로트 한글(원시언문)이 「환단고기(桓檀古記)」에 기록되어 있다.
일본 사학자가 환단고기를 통해 자신들의 뿌리를 한민족을 넘어서서 메소포타미아의 다곤신과 바알 신으로
달려나아가는 것은 마치 주인이 혈통을 잃어버린 사이 종놈이 주인의 혈통 그것도 상고 시조에 연원을 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심지어 인도 봄베이 대학의 한 학술 세미나에서 타밀어가 일본어와 같다는 논문 발표를 한 것을 근거로 일본
아이누족이 인도 까지 그 세력을 뻗었다고 주장하는데는 놀라운 학문의 자유를 구가하고 있는 일본인에 대해
그저 입이 막히고 말뿐이다.
그 아이누가 한 반도에서 건너간 것도 아닌데 오히려 오늘날의 한민족이 옛날의 야요이 문화의 주인공들과
전혀 상관없으며 오히려 죠오몽이 한반도에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은 도대체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아무튼 오향청언이나 가시마가 일본 상고사를 견강부회하기 위한 동상이몽의 목적으로 놀라자빠진 나머지
아시아의 비밀역사네 지보네 했더라도 결과론적으로 「환단고기」는 일본이나 한국에게 충격적인 사서가 아닐
수 없다.
그럼 오향청언(吾鄕淸彦)의 일본판 「환단고기(桓檀古記)」의 간행사를 한번 음미해 보자.
-돌이켜 보면 1980(昭和 55)년 건국의 날, 대물주가(大物主家)의 역사서 「호츠마츠타에(秀眞傳)」를 신국민사
에서 간행했다. 이때 부제는 <일본건국사>였다.
그에 앞서 1989년의 가을, 한국의 이 유립, 박 창암 두 사람이 가시마(鹿島)씨에게 「환단고기」 1권을 기탁
하였다. 일본 학도로서는 처음의 일이다.
그는 은밀하게 숙독한 다음 앞에서 언급한 책에 <수진전(秀進傳)의 시대>라는 논문을 첨가해서 그 개요를 소개
했다.
논문의 골자는 요동(遼東)의 공손도(公孫度)가 그의 딸을 부여왕(夫余王) 위구대(尉仇台)에게 시집보내고 요서
(遼西)의 땅을 할양했다는 사실이, 대물주신이 그의 딸 이수케요리히메를 신무(神武)에게 시집보내고 다케미카
츠치에게 나라를 물려주었다는 고지키(古事記)의 모델이며 신무와 다케미카츠치는 일인이역이었다는 점이다.
구대의 신무는 남하해서 이토구니(伊都國)의 왕 이와레히코가 되었는데 후에 백제사에서는 이 왕을 구수(仇首)
라고 기록하고, 니혼쇼기(日本書紀)는 신무라고 기록한 것이다.
그 후에도 가시마 씨는 연구를 계속했다. 1981년 2월 12일 후지미야 하문서(富士宮下文書)로 세상에 알려진
우가야 왕조사의 현대어역으로 높은 평을 받고 있는 미츠린(三輪義凞)편 「신황기(神皇紀)」를 신국민사에서
복각(復刻)할 때, <한반도 우가야 왕조사>라는 제목으로 252쪽에 달하는 논문을 본서의 해석으로 첨가했다.
여담이기는 하지만, 기기(고사기와 일본서기)는 신무의 아버지를 한사람의 우가야후키아에즈노미코토로 설정
하고 있는데 이것은 완전한 역사 위조이다.
『상기(上記, 우에츠후미)』나 『후지미야 하문서』 등에서는 여러 세대의 우가야(가야국을 말하는 듯:필자)
왕조로 명기되어 있다.
그런데 이 책에는 기원전 7세기경 '언파불합(彦波弗哈)'과 '협야후배반명(陝野侯裵 命)'이라는 왕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가시마씨는 이것이 '우가야후키아에즈 1대왕'과 니기하야히노미코토'라고 간파하고 앞의
논문에서 이 사실을 상세하게 고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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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파불합)) 단군조선 35세(신시 환웅개천 3175) 사벌 단군 50년 무오에 제(帝)가 장수 언파불합(彦波弗哈)을
보내어 바다의 웅습(熊襲:규슈 구마모토)을 평정했다는 <단군세기>의 기사, 36세 매륵 단군 38년(신시 환웅
개천 3231) 갑인에 협(섬)야후 배반명(陝野侯 裵 命)을 보내어 해상을 토벌하니 그 해 12월에 세 섬(규슈,
시코쿠, 혼슈)이 모두 평정되었다는 동서(同書)의 기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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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가시마씨는 이 책의 완역을 시도하고 복사제본을 나에게 보내왔다. 따라서 나는 『역사와 현대 Vol. 1-1』
에 <아시아의 비사(秘史)-지보(至寶) 환단고기>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약간의 비판을 가했다.
가시마씨는 이 책을 연구해서
1) 단군환인과 환웅의 모델이 오리엔트의 다곤 신과 바알 신이라는 점,
2) 단군 조선의 실체는 가츠시토(갓시트), 우라루토우(우랄튜), 박트리아, 조(趙)의 역사이고, 더욱이 일본의
우가야 왕조사이기도 하다는 점,
3) 북부여사(北夫餘史)의 전기는 단군 조선을 계승하는 역사이고, 중기는 니기하야히(陝野侯配幣命)의 예국
(濊國, 사카殷)사이고 그 마지막 해에 협보가 구마모토(熊本)에 이동해서 다파라국(多婆羅國)을 세웠는데
그 협보가 일본사의 니기하야히이라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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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보) <북부여기 하>편에 하부여인(下夫餘人)이 고주몽을 죽이려 하자 고주몽이 어머니의 명을 받들어 오이
(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등 3 인과 함께 길을 떠났는데 차릉수( 陵水)에 이르러 물고기 자라를 만나
강을 건넌 기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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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사의 말기에 의려왕(依慮王)이 선비(鮮卑)에게 멸망당했기 때문에 자손인 의라(依羅)가 도망쳐 왜왕 숭신
(崇神)이 되었다는 점이 해명되었다.
이 책에 미마키이리히코(부여왕 의라)가 왜국으로 도망쳤을 때 일부가 북옥저에 남았다고 하는데, 이 사람들은
후에 태조영(太祚榮,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高德武)라고 한다)이 발해(후의 고구려)를 세우고, 무왕 때 성무
(聖武) 천왕에게 국서를 보내어 "(발해와 일본은) 본지(本支)의 관계가 100년에 이른다."고 말하고 있다.
이 국서를 인정한다면 부여왕 의라(숭신)때 조선에 남은 사람이 발해가 되었으므로 본(本)이고 규슈(九州)에
이동한 숭신의 자손이 왜왕이 되었으므로 지(支)라는 것이다.
그 외에 이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가시마씨가 연구성과를 발표하고 있으므로 더 이상 논할 바는 없지만, 나로서는
일본 고대문자의 하나인 아히루 문자의 원형인 프로트 한글(원시언문)이 「환단고기(桓檀古記)」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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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라)
「환단고기」<대진국 본기>에 일본의 기원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정주(正州)는 의려국(依廬國)이 도읍한 곳
인데 선비(鮮卑) 모용외(慕容 )에게 패배한 후 핍박받을 것을 근심하여 자살하려다가 문득 생각하기를 '내 혼이
아직 꺼지지 않았으니 어디에 간들 이루지 못하랴' 하여 몰래 아들 부라(扶羅)에게 부탁하고 백랑산(白狼山)을
넘어 밤에 대능하 어귀를 건너는데(夜渡海口從者數千) 따르는 사람이 수천이었다. 드디어 건너가서 왜인을 평정
하고 임금이 되었는데(遂渡定倭人爲王) 스스로 3신의 부명(符命)에 응한다 하고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축하의식
을 올리게 하였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의려(依廬)왕이 선비에게 패배하여 바다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고 아들
들이 도망하여 북옥저를 지키다가 이듬해에 아들 의라(依羅)가 즉위하였는데 이 뒤로부터 모용외(慕容 )가 또
다시 나라사람들을 노략질하므로 의라가 무리 수천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드디어 왜인들을 평정하고 임금이
되었다고 한다. (「환단고기」단학회 연구부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