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진주 농민 봉기의 배경 답②
제시된 가상 뉴스에는 '경상 우병사 백낙신의 탐학에 반발해 진주 농민들이 유계춘을 중심으로 관아를 습격하였다.'라고와 있네요. 이는 진주 민란(1862)입니다.
세도 정치 시기에는 정치 기강이 무너져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벼슬을 산 이들이 지방관으로 나아가 농민을 수탈하면서국가 재정의 근간인 삼정이 문란해져 나라 살림은 어려워지고 백성의 고통은 커졌습니다.
농촌 사회가 피폐해지는 가운데 농민들의 사회의식은 높아져 사회 문제를 깨닫고 지배층에 맞서 적극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하였어요.
평안도 지역에서 지역 차별과 세도 정치에 저항하여 몰락 양반 홍경래를 중심으로 일어난 농민 봉기는 19세기에 일어난 대규모 농민 봉기의 시작이었습니다.
홍경래의 난 이후에도 전국에서 크고 작은 봉기가 끊임없이 일어났어요. 철종 말년인 1862년에는 진주에서 몰락 양반 유계춘을 중심으로 경상 우병사 백낙신의 부정부패에 항의하는 농민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이들은 진주성을 점령하고 관아를 습격하여 조세 대장을 불태우고, 아전과 양반 지주의 집을 불살랐습니다. 진주 농민 봉기를 시작으로 삼남 지방의 70여 곳에서 농민들이 봉기하였고, 곧이어 북쪽의 함흥 지역에서부터 남쪽의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임술 농민 봉기, 1862).
① 청의 군대에 의해 진압된 사건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입니다.
② 진주 농민 봉기는 세도 정치하에서 경상 우병사 백낙신이 전세와 환곡 등을 집집마다 배정하여 억지로 더 거둬들이려
한 것이 원인이 되어 일어났습니다.
③ 홍경래의 난(1811)에 대한 설명으로, 이는 진주 농민 봉기(1862) 이전의 일입니다.
④ 보안회가 전개한 황무지 개간권 반대 운동에 대한 설명이네요(1904).
⑤ 보수적인 양반 유생들이 전개한 위정척사 운동에 대한 설명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세도 정치 농민 봉기
배경 | • 세도 정치와 삼정 문란 : 탐관오리의 수탈 → 농민 피해 극심 • 농민 의식 성장 : 소극적 저항(소청․벽서․거세․항조) → 적극적 저항(민란) |
홍경래의 난 (1811) | • 배경 : 서북민에 대한 차별과 수탈 • 지역 : 청천강 이북 평안도 지역 • 구성원 : 몰락 양반 + 영세 농민, 중소 상인, 광산 노동자 • 전개 : 청천강 이북 장악 → 정주성 패배 → 5개월 만에 진압 |
임술 농민 봉기(1862) | • 배경 : 경상병사 백낙신의 학정 • 지역 : 진주 민란을 시작으로 전국 확대 • 전개 : 잔반 출신 유계춘의 농민 봉기 → 진주성 점령 → 향리와 부호 습격 • 결과 : 정부의 삼정이정청 설치, 전국적 민란 발생 |
유사 기출문제
23회 중급 28번 문제
28. 세도 정치기의 사회 모습 답③
3점 배점의 문제지만 제시된 자료를 통해 (가)에 들어갈 사실이 세도 정치라는 것을 파악하는 것은 쉽네요.
답지에서 세도 정치기에 있었던 사실로 홍경래의 난을 찾는 것도 쉽죠?
19세기의 세도 정치하에서 세도 정권의 권력 독점과 관직 매매로 국가 기강이 해이해졌습니다.
지방관들의 부당한 조세 수탈로 삼정(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이 극도에 달했는데, 수령의 부정은 중앙 권력과도 연계되어 있어 암행어사의 파견만으로 막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 각종 자연 재해가 잇따라 기근과 질병이 널리 퍼지고 인구가 급속히 감소하였으나, 농민의 조세 부담은 더욱 무거워져 농촌 사회의 불만은 극에 달하게 됩니다.
이 시기 농민의 사회 의식은 오히려 더욱 강해지고 있었기에 부당한 수탈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도 급격하게 늘어납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일어난 저항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은 1811년에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과 1862년에 일어난 임술 농민 봉기입니다.
① 예송 논쟁은 현종 때 서인과 남인이 펼쳤던 논쟁이었습니다.
기해예송(1659)는 효종이 서거하였을 때 일어났습니다. 당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은 효종이 적장자가
아님을 내세우며 주자가례에 따라 왕과 사대부에 동일한 예법이 적용하여 자의 대비가 1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였어요. 반면 남인은 왕과 사대부는 다른 예법이 적용되어야 한다며 국조오례의에 의거해 3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죠. 결국 서인의 기년설이 받아들여져 서인이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② 경신환국(1680)은 숙종 때 나타났어요.
환국은 정국을 주도하는 붕당과 견제하는 붕당이 서로 교체되면서 정국이 급격하게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큰 환국은 숙종 때 세 번(1680년 경신환국, 1689년 기사환국, 1694년 갑술환국) 나타났어요.
③ 홍경래의 난은 세도 정치 당시 서북인에 대한 차별과 수탈에 저항하여 일어났어요.
④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 정권은 친명배금 정책을 폈어요.
이는 후금을 자극하여 두 차례(정묘, 병자)의 호란을 초래하였습니다.
⑤ 동서 분당은 선조 때 이루어졌어요.
중앙 정치의 주도권을 잡은 사림 세력은 척신 정치의 잔재 청산을 놓고 기성 사림과 신진 사림으로 나뉘어 대립하였
습니다. 이 갈등은 이조 전랑의 임명 문제를 둘러싸고 더욱 심해져 신진 사림을 중심으로 한 동인과 기성 사림을 중심
으로 한 서인으로 붕당이 형성되는 배경이 되었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22회 중급 23번 문제
23. 임술 농민 봉기의 배경 답①
'임술년 진주 백성들이 일으킨 민란', '우병사(우병마사) 백낙신의 탐욕과 수탈'이라는 내용을 통해 진주 민란(임술 농민 봉기, 1862)을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이 시기 민란의 가장 큰 원인은 '삼정의 문란에 따른 농민들의 생존 위협'입니다.
세도 정치 시기 들어 정치 기강이 파탄에 이릅니다.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벼슬을 산 이들이 지방관으로 나아가 농민을 수탈하면서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하고 사회 전체가 깊은 병에 들어갑니다.
이 시기 농민의 사회 의식은 강해져 탐관오리의 수탈에 벽서, 괘서 등의 소극적인 저항에서 벗어나 보다 농민 봉기 등 적극적으로 저항해 갔어요. 항거 중에 가장 규모가 큰 것은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1811)과 임술 농민 봉기(1862)입니다.
철종 때 일어난 임술 농민 봉기는 진주 민란을 시발로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해서 함흥까지 휩쓸었던 전국적 봉기였습니다. 경상 우병사 백낙신의 학정과 토호의 탐학에 고통받던 진주민들은 처음에는 관청에 호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양반 출신인 유계춘 등이 중심이 되어 봉기해 진주성을 점령하였습니다. 이에 정부에서 농민들의 요구 조건을 들어보고 봉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안핵사를 파견하였습니다. 이때 안핵사로 파견된 박규수는 민란의 원인이 삼정의 문란에 있다고 보고 그것을 개혁하기 위해 삼정이정청을 설립합니다. 삼정이정청은 여러 의견을 검토한 뒤 삼정 문란을 해결하기 위한 개혁 방안을 담은<삼정이정절목>을 만듭니다.
① 임술 농민 봉기가 발생한 철종 시기는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해 크고 작은 민란이 자주 발생하였습니다.
② 동학 농민 운동에 대한 설명입니다.
농민군은 전주 점령 후 정부와 화약을 맺고 전라도 각지에 집강소를 설치해 폐정 개혁을 실천해 갔어요.
③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징수한 것입니다.
흥선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 비용이 부족하자 원납전을 징수하고 당백전을 발행하여 해결하고자 하였어요.
④ 시전 상인들의 금난전권을 폐지한 신해통공(1791)은 정조 때의 일입니다.
⑤ 홍경래의 난(1811)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는 세도 정치에 시달리던 농민들과 서북 지역민들에 대한 차별이 원인이 평안도에서 일어났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21회 중급 24번 문제
24. 세도 정치기의 사회 모습 답②
제시된 자료에 나타난 상황을 통해 시기를 파악해야하니 살펴보죠.
먼저, "큰아이는 다섯살에 기마병에 등록, 작은애도 세 살에 군적에 올라"라는 내용을 통해 군정의 문란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 군역은 16~60세를 대상으로 하였는데, 그 나이가 안된 어린아이들을 군적에 올렸다는 것은 군적이 문란했다는 것을 보여주죠.
그리고 다음으로 먹을 것이 없어 술을 담그고 버리는 지게미(일종의 술을 담근 후 버리는 찌거기)를 먹고 '환곡'의 부담에 대한 내용이 나와 있으니, 환곡이 문제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어요.
따라서 군정과 환곡의 문란상을 보여주는 시가이니, 이 시기는 삼정이 극히 문란했던 세도 정치기임을 알 수 있어요.
19세기의 세도 정치하에서 세도 정권의 권력 독점과 관직 매매로 국가 기강이 해이해졌습니다.
지방관들의 부당한 조세 수탈로 삼정(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이 극도에 달했는데, 수령의 부정은 중앙 권력과도 연계되어 있어 암행어사의 파견만으로 막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 각종 자연 재해가 잇따라 기근과 질병이 널리 퍼지고 인구가 급속히 감소하였으나, 농민의 조세 부담은 더욱 무거워져 농촌 사회의 불만은 극에 달하게 됩니다.
이 시기 농민의 사회 의식은 오히려 더욱 강해지고 있었기에 부당한 수탈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도 급격하게 늘어납니다
이러한 배경속에 1862년에는 임술 농민 봉기라는 대규모 농민 봉기가 일어납니다.
① 신분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된 것은 갑오개혁(1894) 때입니다.
② 수령과 향리의 수탈 강화로 삼정이 문란해진 것은 세도 정치기의 특징이죠.
조선 후기 향촌 사회에서는 수령을 중심으로 한 관권이 강화되고 관권을 맡아 보고 있던 향리의 역할이 커졌습니다.
관권의 강화는 세도 정치 시기에 정치 기강이 무너지는 상황 속에서 수령과 향리의 자의적인 농민 수탈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어요. 이 때문에 삼정의 문란은 극에 달했습니다.
③ 진대법 실시(194)는 고구려 고국천왕 때의 일입니다.
이는 먹을거리가 모자란 봄에 곡식을 빌려 주었다가 가을에 추수한 것으로 갚게 하는 빈민 구제책이었어요.
즉, 가난한 농민을 구제하여 국가 재정과 국방력을 유지하고, 귀족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한 정책이었어요.
④ 고려~조선 전기의 사실입니다. 조선 후기에는 아들부터 호적에 올렸어요.
이 시기에는 부모의 유산은 자녀에게 골고루 분배되었으며, 태어난 차례대로 호적에 기재하여 남녀 차별을 하지 않
았습니다. 아들이 없을 때에는 양자를 들이지 않고 딸이 제사를 지냈으며, 상복 제도에서도 친가와 외가의 차이가 크지
않았어요.
⑤ 팔관회는 고려 시대까지 유행하였으며, 조선 시대 들어서는 잠시 실시되기도 하였으나 폐지되었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20회 중급 26번 문제
26. 홍경래의 난과 임술 농민 봉기의 공통적 배경 답③
이 문제는 지도의 범례에 홍경래 난, 임술 농민 봉기가 표시되어 있으니, 두 봉기가 일어난 공통적인 배경을 파악하면 되겠네요.
홍경래의 난(1811), 임술 농민 봉기(1862)의 공통 배경은 세도 정치기+삼정의 문란이라는 것을 공식처럼 알아두세요.
19세기 전반기는 세도 정치기로, 이때는 왕실의 외척인 세도 가문이 권력을 독점합니다.
세도 정치하에서는 매관매직이 성행하는 등 국가 기강이 해이해진 틈을 타 지방에서는 탐관오리의 부정과 탐학이 기승을 부렸어요. 정부에서는 암행어사를 파견해 이를 해결하고자 했지만, 삼정의 문란으로 극도에 달한 수령의 부정은 중앙 권력과도 연계되어 있어 암행어사 파견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농민의 사회 의식은 오히려 더욱 강해져 갔습니다. 삼정의 문란속에 농민들의 저항은 처음에는 벽서, 괘서, 관청에의 호소 등의 소극적 형태로 전개되었으나, 이것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점차 농민 봉기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이 시기 농민의 항거 중에 가장 규모가 큰 것은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1811)과 단성에서 시작되고 곧이어 진주로 파급되어 전국으로 확산된 임술 농민 봉기였습니다(1862).
ㄱ - 동학은 경주에서 최제우가 1860년에 창시하였습니다.
따라서 홍경래의 난(1811)과는 시기적으로 차이가 나니 아무런 관련이 없어요.
그리고 동학이 확산된 것은 이후의 일이므로 임술 농민 봉기 때도 영향을 주지는 못했어요.
ㄴ - 세도 정치기에 극심해진 삼정의 문란은 두 봉기의 공통족인 배경이 되었습니다.
ㄷ - 세도 정치기에 매관매직 등으로 관직을 얻은 관리들은 농민들을 수탈하는 탐관오리가 되었죠.
이들의 수탈 강화는 결국 농민 봉기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ㄹ - 서양 열강과 최초의 수교는 조·미 수호 통상 조약(1882)이니, 두 봉기와는 관련이 없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ㄴ, ㄷ으로 묶인 ③번입니다.
20회 중급 30번 문제
30. 세도 정치기의 모습 답③
순(조)-헌(종)-철(종), 3대 60여 년 간 세도 정치 전개....는 공식처럼 외웠죠?
즉, 정조가 죽은 후 고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60여 년 동안 왕의 외척인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 등 몇몇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였던 세도 정치가 전개되었습니다.
세도 정치가 나타난 배경은 영조와 정조의 탕평 정치로 왕에게 권력이 집중되었는데, 정조가 죽고 순조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이 집중된 권력이 대비의 외척 가문에게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외척의 세도 정치로 왕권은 매우 약해졌고, 소수의 외척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여 정치 기강이 극도로 문란해져 지배 체제도 무너져 갔습니다.
이 시기에는 비변사가 핵심적인 정치 기구였을 뿐 나머지 정치 기구들은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어요. 외척 가문은 비변사의 요직을 독점하고 국정을 마음대로 주무르면서 이권과 부를 챙겼습니다.
과거 시험의 부정이나 관직 매매와 같은 비리가 만연하였으며, 이에 따라 수령과 아전들의 농민 수탈이 극심해지면서 삼정의 문란 현상이 극심해져 농촌 경제가 파탄됩니다. 이러한 탐관오리들의 횡포를 막기 위해 정부에서 암행어사를 파견했지만 미봉책에 불과하였습니다.
결국 농촌 사회의 불만은 극에 달해 농민들의 저항도 급격하게 늘어나 홍경래의 난(1811)이 일어나고 1862년에는 임술 농민 봉기를 시작으로 전국적인 농민 봉기가 이어지죠.
① 예송 논쟁은 세도 정치 이전인 현종(1659~1674)의 재위 기간에 일어났습니다.
이는 효종의 왕위 계승에 대한 정통성과 관련하여 상복을 몇년 간 입을 것인가를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 간에 일어난
두 차례의 논쟁(기해예송(1659)과 갑인예송(1674))입니다.
② 세도 정치 이전인 영조와 정조 시기의 사실입니다.
③ 세도 정치기에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 소수의 외척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고 정치를 주도하였습니다.
④ 6조 직계제는 강력한 왕권을 추구한 태종(1400~1418)과 세조(1455~1468) 때 실시되었습니다.
이는 6조에서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사안을 국왕에게 올려 재가를 받아 시행하는 제도였어요.
⑤ 세도 정치를 끝낸 흥선 대원군이 실시한 정책입니다.
흥선 대원군은 세도 정치로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회복시켰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17회 중급 28번 문제
28. 세도 정치기 농민 봉기의 배경 답②
제시된 첫번째 자료에는 홍경래가 나타나 있으니 홍경래의 난(1811), 두번째 자료에는 유계춘이 주도한 진주 민란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확산된 민란이라고 나와 있으니 임술농민봉기(1862)임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는 세도 정치기로 이 두 민란이 일어난 공통적인 원인은 세도 정치기 삼정의 문란이었습니다.
19세기의 세도 정치하에서 국가 기강이 해이해진 틈을 타 탐관오리의 부정과 탐학은 끝이 없었습니다. 삼정(전정, 군정, 환곡의 3가지 세금 행정)의 문란으로 극도에 달한 수령의 부정은 중앙권력과도 연계되어 있어 암행어사의 파견만으로 막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어요.
이 시기 농민은 지배층의 압제에 대하여 종래의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보다 적극적으로 그들과 대결하기 시작하였어요. 처음에는 벽서, 괘서 등의 형태로 나타나던 농민의 항거는 점차 농민 봉기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농민의 항거 중에 가장 규모가 큰 것은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의 난(1811)과 단성에서 시작되고 곧이어 진주로 파급되어 전국으로 확산된 농민 항쟁이었습니다(임술 농민 봉기, 1862).
홍경래의 난은 몰락한 양반인 홍경래의 지휘하에 영세 농민, 중소 상인, 광산 노동자 등이 합세하여 일으킨 봉기였어요. 이들은 처음 가산에서 난을 일으킨 후 파죽지세로 선천, 정주 등을 비롯해 한때는 청천강 이북 지역을 거의 장악하기도 하였으나 5개월 만에 평정되었습니다.
임술 농민 봉기는 진주를 중심으로 확산되었는데(유계춘 주도), 농민들은 탐관오리와 토호의 탐학에 저항하여 한때 진주성을 점령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농민의 항거는 북쪽의 함흥으로부터 남쪽의 제주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퍼졌습니다. 이러한 저항 속에 농민들의 사회 의식은 성장하였고, 농민들의 항쟁으로 말미암아 양반 중심의 통치 체제도 점차 무너져 갔어요.
① 왜란과는 시기적으로 맞지 않죠.
② 세도 정치기에는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해 크고 작은 농민 봉기가 끊임 없이 일어났는데, 그 중에서 홍경래의 난과
임술 농민 봉기가 가장 대표작입니다.
③ 경복궁 중건은 고종 즉위 후 흥선 대원군의 주도로 1865~1867년에 걸쳐 완성되었어요.
④ 신라 말의 모습입니다.
⑤ 고려 무신 집권기에 일어난 대표적인 농민과 천민의 봉기로는 망이와 망소이의 난, 김사미와 효심의 난, 만적의 난
등을 들 수 있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효율적인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공부법
카페에서 추천하는 부담 없는 [한권으로 끝내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교재로 중요내용을 공부하고
마지막으로 카페에 올려진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기출문제해설을 꼼꼼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24회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국사사랑방/한국사능력검정시험합격률/한국사능력검정시험기출문제/한국사기출문제해설/
한국사능력검정시험난이도/한국사능력검정시험합격률/한권으로끝내는한국사능력검정시험
첫댓글 와~ 이제 시작하려고 봤는데... 만만하지 않네요 ㅠ.ㅠ
자세한 해설 감사합니다.
세도정치 하면 삼정의 문란-농민 봉기죠^^
댓글은
감사합니다....라는 글은 달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문제에 대한 난이도, 자료 등에 대한 느낌이나
개인적인 문제풀이 접근법 등을 달아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유의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댓글 단 분은 등업 안됩니다.
2번 답에 대한 설명 뿐만 아니라 각각의 보기에 있는 문항의 설명 덕분에 이해하기가 쉬웠습니다! ㅠㅠ해설을 보지못하면 답을 고를 수 없는 제가 한심하네요ㅠㅠ
제가 근대사에 약한데, 특히 임오군란, 동학농민운동 이 시기가 저한텐 복잡해서.. 하지만 설명이 잘 되어서 조금씩 정리가 되어 가는 것 같아요.
홍경래의 난과 임술 농민봉기는 삼정의 문란과 세도 정치기라는 것을 '공식'처럼 외워두라는 것이 머릿속에 각인되는군요.
전체적으로 꼼꼼하게 해설해 주셔서 헷갈렸던 부분들이 이해가 잘 되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