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흥선 대원군의 호포제 실시 답①
첫 번째 자료의 '다섯 살에 기병에 등록되고 작은 놈도 세 살에 군적에 올랐다.'는 어린아이도 군적에 올린 사실(황구첨정), 두 번째 자료는 죽은 사람(백골징포)과 갓난아이도 군적에 올린 사실이 나타나 있습니다.
군역 대상자는 16~60세까지의 양인 남자인데, 어린아이나 죽은 사람까지도 군적에 올려 군포를 부과하였다는 것은 군정의 문란을 의미합니다. 흥선 대원군은 군정을 바로 잡고 군포 납부층을 늘리기 위해 호포제를 실시하였어요.
고종이 즉위할 시기 국내에서는 삼정의 문란으로 생활이 어려워진 백성들이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였습니다(임술 농민 봉기, 1862). 고종의 즉위로 어린 고종을 대신해 집권한 국왕의 생부 흥선 대원군은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아 민생을 안정시킴으로써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왕권도 강화하고자 하였습니다.
전정에서는 양전 사업을 실시하고 토지 대장에서 누락된 땅을 찾아내 재정 수입을 늘렸습니다.
군정에서는 군포 부과 기준을 사람이 아니라 호 단위로, 그리고 상민은 물론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는 호포제를 실시하여 군포 납부층을 늘리고 조세 부담을 공평히 하였습니다.
조선 후기 들어 신분제의 동요로 군포를 부담할 상민의 수가 줄어들고 군역을 면제 받던 양반의 수가 급증하였어요. 당시 정부에서는 안정적인 군포 수입을 위해 군정에도 군역 단위로 군총제(군현에서 거둬야 할 군포 총액이 정해져 있는 제도)를 운영하였습니다. 이는 군현 내에 양인이 감소하면 다른 양인들의 부담이 그만큼 늘어날 수박에 없는 운영 방식이었어요. 여기에 지방관의 탐학까지 겹쳐 양인 농민들은 군포 부담을 이기지 못해 유망하거나 봉기를 일으키게 되었던 것이죠. 이러한 상황이 호포제 실시의 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
삼정 중 가장 폐단이 심했던 환곡제는 사창제로 바꾸었습니다. 즉 국가에서 면을 단위로 운영하던 환곡을 바꾸어 리(里)를 단위로 백성들이 스스로 사창을 설치하여 운용하도록 하였어요. 사창제 실시로 지방관의 횡포가 줄고 농민의 부담도 다소 줄었습니다.
① 흥선 대원군은 군포 부과 기준을 사람이 아니라 호 단위로, 그리고 상민뿐만 아니라 양반에게도 부과하는 호포제를
실시하여 군정의 문란을 바로 잡고 조세 부담을 공평하게 하였습니다.
② 조선은 개항 후 개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국방력 강화를 위해 기존 5군영을 무위영과 장어영의 2영으로 개편하고,
신식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 별기군을 창설하였습니다(1881).
③ 대한 제국은 1898년부터 양전 사업을 추진하고 토지 소유자에게는 토지 소유권을 인정하는 지계를 발급하였어요.
이를 통해 토지 소유권을 법적으로 확인하고, 실제 농지를 파악하여 국가의 재정 수입을 늘리려고 하였습니다.
④ 영조 때에 경국대전 이후에 공포된 법령 중에서 시행할 법령만을 추려서 속대전(1746)을 편찬하였어요(1746)
⑤ 정조는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중에서 유능한 인재를 재교육하는 초계문신제를 실시하여 자신을 뒷받침할
개혁 세력을 육성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책과 양요
(1) 개혁 정책
① 왕권 강화 정책 :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 경복궁 중건(원납전 접수, 당백전 발행), 비변사 폐지,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 회복, 대전회통 편찬
② 민생 안정
◦ 서원 철폐 : 서원들이 면세, 면역으로 재정 지원으로 국가 재정을 좀먹고 백성들을 수탈하는 역기능 → 전국에 47개만
남기고 만동묘를 비롯한 600여 개 서원을 철폐 → 양반 유생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강행
◦ 삼정 개혁 : 전정(양전 실시해 은결 색출, 양반 토호의 토지 겸병 금지), 군정(호포제 실시해 양반에게도 군포 부과 →
양반을 대신해 양번집 노비 이름으로 납부토록 해 양반 위신은 유지시켜 줌), 환곡(마을 단위로 자체 운영하는 사창제
실시)
(2) 통상 수교 거부 정책과 양요
① 배경
◦ 서양 세력에 대한 경계심 고조 : 이양선의 잦은 출몰과 통상 요구, 국내 천주교의 확산, 서양 열강의 베이징 점령 소식,
러시아의 연해주 획득과 접근 등이 위기의식을 고조
◦ 통상 수교 거부 정책 : 서양세력이 통상과 천주교 전파를 통해 침략한다는 의기의식 속에 열강의 통상 요구를 거부하는
정책을 취하고 국방 강화에 힘을 기울여 무기를 개량하고 강화도에 포대를 설치하여 해안 경비를 강화
②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 과정 : 병인박해(1866. 1) ⇨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 7) ⇨ 병인양요(1866. 10) ⇨ 오페르트 도굴 사건(1868) ⇨
신미양요(1871) ⇨ 척화비 건립
구분 | 배경 | 과정 |
병인양요 (1866) | 대원군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국내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선교사를 만나 프랑스와의 원조 교섭 중재를 요구 ⇨ 선교사들의 거부 ⇨ 천주교 반대 여론 속에 9명의 프랑스 신부와 수천 명의 천주교도를 처형(병인박해)⇨ 이를 빌미로 프랑스가 침입 |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가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 ⇨ 문수산성(한성근 부대)과 정족산성(양헌수 부대)에서 이들을 격퇴 ⇨ 프랑스군이 철수하면서 강화도의 외규장각에 보관 중이던 각종 서적들을 약탈 |
신미양요 (1871) |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다가 평양 군민의 화공으로 격침당한 사건 발생(1866) ⇨ 후에 미국이 이 사실을 알게 됨 |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 제독이 이끄는 미국의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 ⇨ 초지진과 덕진진을 점령, 광성보 공격 ⇨ 어재연 부대가 분전(어재연 수자기 약탈) ⇨ 미군이 철수 |
③ 척화비 건립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申未立(서양 오랑캐가 침범했을 때 싸우지 않음은 곧 화의하는 것이요, 화의를 주장하는 것은 곧 나라를 파는 것이다. 이를 자손만대에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
유사 기출문제
흥선 대원군의 내정 개혁
24회 고급 31번 문제
31.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책 답②
흥선 대원군 집권 시기와 관련하여서는 양요와 관련한 문제가 주로 출제되며, 개혁 정책인 호포제, 서원 철폐, 당백전 발행도 출제되었습니다.
주어진 자료에 '척양(서양 세력을 배척)', '천주교도 박해(병인박해)', '12자(洋夷侵犯 非戰卽和 主和賣國)', '위정척사묵'이라는 개념에서 '그'는 흥선 대원군임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고종의 즉위(1863)를 계기로 정치적 실권을 잡은 흥선 대원군은 세도 정치로 누적된 왕조의 위기를 극복하고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 경복궁 중건, 비변사 폐지,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 회복, 대전회통 편찬 등으로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습니다.
또, 붕당의 근거지로 인식되어 온 서원을 유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47개소만 남기고 철폐하였으며, 농민 봉기의 원인인 삼정을 개혁하여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려 노력하였습니다. 즉, 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전정을 바로잡고, 군역 제도를 개혁하여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를 시행하였으며, 삼정 중 가장 농민을 힘들게 한 환곡제를 개혁하여 사창제를 실시하였습니다.
이 시기 동학과 천주교가 민중들 사이에 급속하게 전파되고 있었어요.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를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하였고, 천주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단행하였습니다. 천주교도 박해와 프랑스 신부 처형 소식이 알려지자 프랑스가 강화도에 침입한 병인양요(1866),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계기로 미국이 침입한 신미양요(1871)를 극복하면서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확고하게 유지하였습니다.
① 경희궁은 광해군 때인 1617년에 정원군(인조의 아버지)의 옛 집자리에 창건되었어요.
창건 당시에는 경덕궁으로 불렸다가 영조 때인 1760년에 경희궁으로 개명되었어요.
동궐인 창덕궁에 대비해 서궐로 불렸으며, 북궐은 경복궁이죠.
② 흥선 대원군은 군포 징수 제도를 개혁하여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를 시행하였어요.
③ 호조의 기능을 정리한 탁지지는 정조 때 편찬되었어요.
④ 삼정이정청은 철종 때 일어난 임술 농민 봉기를 계기로 설치되었습니다(1862).
⑤ 고종 즉위 후 집권한 흥선 대원군은 비변사가 담당하던 정치 업무는 의정부, 군사 업무는 삼군부로 이관시키고
비변사를 폐지하였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21회 고급 38번 문제
38. 흥선 대원군의 사창(社倉)제 실시 답①
제시된 자료는 시험에 자주 제시되는 것이죠?
다산 정약용이 지은 하일대주(夏日對酒)라는 시입니다.
시의 내용에 '봄철에 벌레 먹은 쌀 한 말 받고서 가을에 온전한 쌀 두 말 바치고'라는 내용을 통해 봄에 곡식을 빌리고 가을에 이자를 보태 갚는 제도(춘대추납)임을 파악할 수 있어요. 이는 환곡제입니다.
그런데 이 제도가 당사자가 원해서가 아니라 강제로 집행되고, 이자도 원곡의 두 배를 받는 엄청난 고리로 운영되는 폐단이 나타나 있죠?
딸서 흥선 대원군이 환곡제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시행한 제도를 파악하면 됩니다.
고증의 즉위 전 조선은 60여 년간 계속되어 온 세도 정치로 왕권이 약화되고 정치 기강이 무너졌으며 삼정의 문란으로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고 있었어요. 밖으로는 서양의 선박(이양선이라 부름)이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고 있었죠.
이러한 배경 속에서 고종의 즉위(1863)를 계기로 어린 고종을 대신해 정치적 실권을 잡은 흥선 대원군은 왕조의 위기를 극복하고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는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 경복궁 중건, 비변사 폐지,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 회복, 대전회통 편찬 등으로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습니다.
또, 붕당의 근거지로 인식되어 온 서원을 유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47개소만 남기고 철폐하였으며, 농민 봉기의 원인인 삼정을 개혁하여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려 노력하였습니다.
즉, 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은결(세금을 내지 않는 숨은 토지)을 색출하여 전정을 바로잡고, 군역 제도를 개혁하여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를 시행하였어요. 그리고 삼정 중 가장 농민을 힘들게 한 환곡제를 개혁하여 군현 단위로 자치적으로 운영하도록 한 사창제를 실시토록 하였습니다.
① 흥선 대원군은 관 중심으로 운영되던 환곡제가 고리대와 유사하게 운영되어 폐단이 심해지자, 이를 폐지하고
군현민의 공동 출자로 운영하는 사창제로 개혁하여 농민의 부담을 줄여 주었어요.
② 호포제는 상민에게만 부과하던 군포를 양반에게도 징수하도록 한 제도입니다.
③ 만동묘는 서원 철폐 과정에서 함께 철폐되었습니다.
노론의 정신적 지주였던 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보낸 명나라 신종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을 제사 지내기 위해
세운 사당이었습니다.
④ 당백전은 경복궁 중건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발행하였던 특별 화폐입니다.
명목가치가 실질 가치의 20배에 이르는 화폐였기 때문에 물가 폭등 등 부작용을 가져와 곧바로 발행이 중단되었어요.
⑤ 양전 사업은 은결을 색출하여 전세를 확충하기 위해 단행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20회 고급 28번 문제
30. 비변사 답④
17회 30번 문제와 자료나 답지가 유사하게 출제되었네요.
'중외의 군국 기무를 모두 관장한다.', 그리고 공조 판서를 제외한 판서, 군영 대장, 유수, 대제학 등이 모두 참여한다는 내용을 통해 (가)에 들어갈 기구가 비변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비변사는 16세기 중종 초에 일어난 삼포왜란(1510)을 계기로 여진족과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병조 아래의 임시 기구로 설치되었습니다. 이때의 비변사는 국방 문제에 정통한 재상을 중심으로 운영되던 임시 회의 기구였습니다.
이후 국방 문제가 중요시되면서 16세기 중엽에 일어난 을묘왜변(명종 1555)을 계기로 상설 기구화되었습니다.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자 효과적인 대응을 위해 정책 수립과 집행을 맡은 고위 관원들이 합의하는 기구의 필요성이 증대되자, 비변사의 구성원을 확대하면서 그 기능이 더욱 강화됩니다.
이에 따라 비변사의 구성원이 3정승을 비롯한 고위 관원으로 확대되었고(전·현직 정승, 공조를 제외한 5조 판서와 참판, 5군영 대장, 대제학, 강화 유수 등), 그 기능도 군사 문제뿐 아니라 외교, 재정, 사회, 인사 문제 등 거의 모든 정무를 총괄하였습니다.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고 대부분의 정무를 소수의 당상들이 회의하여 결정하자 의정부와 6조 중심의 행정 체계는 유명무실해지고 왕권의 약화를 가져왔습니다. 특히 세도 정치기에는 비변사가 핵심적인 정치 기구로 자리잡았으며, 유력한 가문 출신의 몇몇이 실제 권력을 행사하면서 많은 폐단이 나타납니다.
흥선 대원군은 집정하면서 비변사의 권한을 대폭 약화시킵니다. 일반 정무는 의정부로 이관하였고, 삼군부 제도를 부활시켜 군무를 처리하게 함으로써 비변사는 혁파되었어요(1865).
ㄱ - 자료에 나타나 있듯 비변사 구성원들은 겸직을 많이 하였기 때문에 상피제를 엄격히 적용하지는 않았습니다.
ㄴ - 고종 즉위 후 집권한 흥선 대원군은 비변사가 담당하던 정치 업무는 의정부로, 군사 업무는 삼군부로 이관시켜
결국 비변사를 폐지하였어요.
ㄷ - 임진왜란을 계기로 처음 설치된 것으로는 훈련도감을 들 수 있습니다.
비변사는 중종 때 삼포왜란을 계기로 임시 기구로 설치되었다가 명종 때 을묘왜변을 계기로 상설 기구가 되었어요.
그리고 임진왜란을 계기로 그 기능이 강화되어 국가의 모든 업무를 회의를 통해 결정하였습니다.
ㄹ- 세도 정치기에는 비변사가 핵심적인 정치 기구로 자리잡았으며, 유력한 가문(세도가) 출신 몇몇이 고위직을 독점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ㄴ, ㄹ로 묶인 ④번입니다.
비변사의 변천
시 기 | 배경 | 특징 |
중종 | 여진․왜구 침입 대비 | 삼포왜란(1510)를 계기로 왜와 여진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하여 임시로 설치 |
명종 | 을묘왜변 | 왜변이 자주 발생하자 을묘왜변(1555)을 계기로 상설 기구로 발전시킴 |
선조 | 임진왜란 | 최고 의결 및 집행 기구가 됨(효과적 대응을 위한 문무 관리 합의) |
순조~철종 | 세도 정치 | 고관들의 합의로 대부분의 정책 결정, 집행 → 의정부와 6조의 유명무실화, 왕권 약화 |
고종 | 왕권 강화 | 비변사 기능을 의정부(정치)와 삼군부(군사)로 분산시킴 → 폐지시킴(1865) |
19회 고급 10번 문제
10.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책(1863~1873) 답⑤
흥선 대원군 집권 시기와 관련하여서는 양요와 관련한 문제가 주로 출제되며, 호포제, 서원 철폐, 당백전 발행도 출제되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그동안 출제되었던 문제들을 풀면서 잘 공부해 두세요.
고종의 즉위를 계기로 흥선 대원군이 섭정하기 전 1860년을 전후한 시기, 안으로는 60여 년간 계속되어 온 세도 정치로 왕권이 약화되고 정치 기강이 무너지고 삼정의 문란으로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계속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에 동학과 천주교도 국가의 금지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밖으로는 서양의 선박(이양선이라 부름)이 연해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며 위협하고 있었죠.
당시 중국은 서양의 침략을 받아 베이징이 함락되었으며, 러시아는 연해주를 차지하여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국경을 접하게 되어 조선은 서양의 침략에 대하여 두려움이 커졌어요.
이러한 배경 속에서 고종의 즉위(1863)를 계기로 정치적 실권을 잡은 흥선 대원군은 왕조의 위기를 극복하고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 경복궁 중건, 비변사 폐지,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 회복, 대전회통 편찬 등으로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습니다.
또, 붕당의 근거지로 인식되어 온 서원을 유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47개소만 남기고 철폐하였으며, 농민 봉기의 원인인 삼정을 개혁하여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려 노력하였습니다.
즉, 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전정을 바로잡고, 군역 제도를 개혁하여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를 시행하였으며, 삼정 중 가장 농민을 힘들게 한 환곡제를 개혁하여 사창제를 실시하였습니다.
그리고 천주교도 박해와 프랑스 신부 처형을 계기로 프랑스가 침입한 병인양요(1866),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계기로 미국이 침입한 신미양요(1871)를 극복하면서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확고하게 유지하였습니다.
① 흥선 대원군이 물러난 이후 실시된 정부의 개화 정책입니다.
강화도 조약(1876) 이후 고종은 동도서기론의 입장에서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개화 정책을 총괄하는 기구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1880) 그 아래에 12사를 두어 외교, 통상, 재정, 군사 등의
업무를 맡게 하였습니다.
② 정조(1776~1780)의 정책입니다.
정조는 노론들이 장악한 5군영 대신,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여 왕권을 뒷받침하는 군사적 기반을 삼았습니다.
③ 숙종(1674~1720)은 금위영을 설치해 기존의 훈련도감,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과 함께 5군영 체제를 갖추었어요.
④ 영조(1724~1776)는 경국대전 이후 새로이 공포된 법령만을 간추려 “속대전”을 편찬하였어요(1746).
⑤ 흥선 대원군은 군역 제도를 개혁해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를 시행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신분 구별 없이 호당 2냥씩을 호포세를 거두었는데, 이는 양반들의 거센 반발을 샀습니다(결국 양반에게는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자기 노비의 이름으로 이를 납부할 수 있게 해주어 양반들의 위신을 세울 수 있게 배려했죠.).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18회 고급 29번 문제
29. 조선 시대의 서원 답①
흥선 대원군이 (가)를 허물어 버리고 (여기에 있던) 유생들을 쫓아 버리도록 명령을 내리자
사족들은 크게 반발하고 백성들은 기뻐했다는 내용이네요.
이는 흥선 대원군이 내린 서원 철폐령에 대한 내용으로, (가)에 들어갈 것은 서원입니다.
1543년 경북 풍기에 주세붕이 백운동 서원(후에 풍기 군수가 된 이황의 건의로 국가로부터 소수 서원으로 사액되어 최초의 사액 서원이 됨)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하여 16세기 이후 각 지방에서 서원이 세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서원은 이름난 선비나 공신을 숭배하고 그 덕행을 추모하였으며, 봄·가을에 향음 주례를 지냈고, 유생이 한 자리에 모여 학문을 닦고 연구하였습니다.
서원은 향촌 사림을 결집, 강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여 향약과 함께 사림의 지위를 강화시켜 주었습니다.
서원은 유교 윤리를 보급하고 향촌 사회의 교화에 공헌하였기 때문에 국가에서는 서원의 설립을 장려하여 전국 각처에 많은 서원이 세워졌습니다.
조선 시대 서원의 수는 약 600여 개에 이르게 되었고 그 중 사액 서원도 264개에 이르렀습니다.
사액 서원은 국가로부터 편액(扁額)을 받고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았으며 면세의 특권을 누렸던 서원입니다.
조선의 정치는 사림의 여론 정치였으므로 서원의 발언권은 대단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서원은 시간이 지날수록 붕당의 근거지가 되었으며, 면세와 면역(서원에 입학한 양반 자제들은 각종 역을 면제받았음)의 혜택을 누려 국가 재정을 악화시키고 제사 비용의 명목 등으로 백성을 수탈하여 원성을 샀습니다.
이러한 폐단으로 사액 서원 제도는 숙종 때 일시 폐지했고(1713), 영조는 300여 개의 서원을 대폭 정리하는 정책을 펴면서 일체 중단(1741)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에도 서원의 폐단은 계속 되었기 때문에 흥선 대원군은 전국에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만동묘를 비롯한 600여 개의 서원을 철폐하였습니다.
① 서원은 향촌 사림을 결집, 강화시키는 구심점 역할을 하여 향약과 함께 사림의 지위를 강화시켜 주었습니다.
② 사창제에 대한 설명입니다.
흥선 대원군은 삼정의 문란 중 가장 큰 문제가 큰 환곡제의 폐단을 시정키 위해 지역 주민들이 공동 출자해 운영하는
사창제를 실시하였습니다.
③ 모든 군현에 설치된 교육 기관은 향교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유교를 정치 기반 이념으로 활용하려는 의도에서 성현에 대한 제사와
유생의 교육,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 부·목·군·현에 향교를 각각 하나씩 설립하였습니다.
④ 성균관, 4부 학당, 향교에 대한 설명입니다.
조선은 유학을 공부하는 관학 교육 기관으로 서울에 국립 교육 기관인 성균관을 두었습니다. 이는 최고 학부의 구실을
하였고, 중등 교육 기관으로는 중앙에 세운 4학과 지방의 향교가 있었습니다.
⑤ 유향소에 대한 설명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조선 시대의 유교 교육 기관
교육 기관 | 설치 | 교육 내용 | 기타 | |
초등 교육 | 서당 | 마을 | 천자문, 명심보감, 동몽선습 등 | |
중등 교육 | 서원 | 군·현 | 소학, 4서, 5경, 가례 등 | • 학파 별로 배향 인물과 교재 차이 • 사액 서원(국가가 토지, 서적 등을 지급) |
향교 | 모든 군·현 | 소학, 4서, 5경 등 | • 교수․훈도 파견 • 학전(學田) 지급해 경비 지원 • 성적 우수자 소과(생진과) 초시 면제 | |
4부 학당 | 서울 | |||
최고 학부 | 성균관 | 서울 | 4서, 5경, 근사록, 성리대전, 통감, 좌전, 경국대전, 동국정운 등 | 성적 우수자 문과 초시 면제 |
17회 고급 30번 문제
30. 비변사의 변천 답⑤
비변사에 대한 문제는 어쩌다 한 문제씩 나오네요.
'중앙과 지방의 군국기무를 도맡아 관리하는 기구', 그리고 '변경 사정에 밝은 자' 등의 내용을 통해 비변사임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비변사는 16세기 중종 초에 일어난 삼포왜란(1510)을 계기로 여진족과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병조 아래의 임시 기구로 설치되었습니다. 이때의 비변사는 국방 문제에 정통한 재상을 중심으로 운영되던 임시 회의 기구였습니다.
이후 국방 문제가 중요시되면서 16세기 중엽에 일어난 을묘왜변(명종 1555)을 계기로 상설 기구화되었습니다.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자 효과적인 대응을 위해 정책 수립과 집행을 맡은 고위 관원들이 합의하는 기구의 필요성이 증대되자, 비변사의 구성원을 확대하면서 그 기능이 더욱 강화됩니다.
이에 따라 비변사의 구성원이 3정승을 비롯한 고위 관원으로 확대되었고(전·현직 정승, 공조를 제외한 5조 판서와 참판, 5군영 대장, 대제학, 강화 유수 등), 그 기능도 군사 문제뿐 아니라 외교, 재정, 사회, 인사 문제 등 거의 모든 정무를 총괄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도 폐허의 복구와 사회 경제적 변동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고, 붕당 간의 이해 관계를 조정하기 위하여 비변사의 구성과 기능은 그대로 유지됩니다.
이렇듯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고 대부분의 정무를 소수의 당상들이 회의하여 결정하자 의정부와 6조 중심의 행정 체계는 유명무실해지고 왕권의 약화를 가져왔습니다. 특히 세도 정치기에는 비변사가 핵심적인 정치 기구로 자리잡았으며, 유력한 가문 출신의 몇몇이 실제 권력을 행사하면서 많은 폐단이 나타납니다.
이에 흥선 대원군은 집정하면서 비변사의 권한을 대폭 약화시킵니다.
일반 정무는 의정부로 이관하였고, 삼군부(三軍府) 제도를 부활시켜 군무를 처리하게 함으로써 비변사는 혁파되었습니다(1865).
① 고종 때 흥선 대원군이 비변사가 담당하던 정치 업무는 의정부, 군사 업무는 삼군부로 이관시킴으로로써 마침내
비변는 폐지되었습니다.
② 중종 때 삼포왜란을 계기로 임시 기구로 설치되었다가 명종 때 을묘왜변을 계기로 상설 기구화되었습니다.
③ 임진왜란을 계기로 그 기능이 강화되어 국가의 모든 업무를 회의를 통해 결정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의정부와 6조의 기능은 유명무실화되었습니다.
④ 세도 정치기에는 비변사가 핵심적인 정치 기구로 자리잡았으며, 여기에서는 유력한 가문(세도가) 출신의 몇몇이
실제 권력을 행사하였습니다.
⑤ 정조가 설치한 규장각에 대한 설명입니다.
정조가 왕권을 뒷받침하는 문한 기구로 규장각을 두었으며, 군사적으로는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두었죠.
정조는 노론이 장악한 5군영 대신 장용영을 설치하여(1785) 왕권을 뒷받침하는 군사적 기반을 삼았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11회 고급 31번 문제
31.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의 발행 답⑤
경복궁 중수할 때 주조한 화폐, 물가 앙등을 유발....을 통해 볼 때
(가)에 들어갈 내용은 당백전입니다.
그럼 당백전에 대한 내용을 알아보면 되겠지요?
왕실의 위엄을 회복하기 위해 흥선 대원군이 추진한 경복궁 중건을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국가의 재정으로는 이를 부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이를 마련하기 위해 1866년부터 당백전이라는 고가 화폐를 발행합니다. 그리고 동전 원료가 부족하였기 때문에 전국에서 구리와 쇠붙이를 징발하여 만들게 되지요.
당백전은 상평통보에 비해 명목 가치(액면 가치)는 100배였으나, 실질 가치는 5~6배밖에 되지 않아 물가 폭등(인플레이션)을 가져오는 폐단을 불러왔어요.
이후 당백전은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어 주조는 중지되고 1867~68년 청나라 화폐의 수입으로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ㄱ - 전황은 화폐가 부족해지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조선 후기에 본격적으로 발행, 사용되기 시작한 동전은 교환 수단일 뿐 아니라 재산 축적의 수단이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지주나 대상인들이 화폐를 고리대나 재산 축적에 이용함으로써, 동전의 발행량이 상당히 늘어났는데도
제대로 유통되지 않아 시중에서 동전 부족 현상, 즉 전황이 나타났습니다.
이에 반해 당백전은 전황이 아니라 물가 폭등인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였지요.
ㄴ - 일본이 파견한 재정고문 메가타에 의해 실시된 화폐 정리 사업으로 발행이 중단된 화폐는 백동화입니다.
당백전은 발행 후 1~2년 만에 발행, 사용이 중단되고 대신 청의 화폐를 수입해 사용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ㄷ, ㄹ로 묶인 ⑤번입니다.
고려~한말의 화폐
1 고려 시대
① 건원중보: 성종 때 발행된 철전
② 활구, 해동통보(해동중보), 동국통보, 삼한통보: 숙종 때 발행(의천의 건의가 영향을 줌)
③ 저화: 공양왕 때(1391) 발행된 종이 화폐
2. 조선 시대
① 저화: 태종1년(1401)에 발행된 조선 최초의 지폐
② 조선통보: 세종 5년(1423)에 저화를 대신하기 위해 발행, 저화와 함께 사용되다 구리 부족으로 발행 중단
③ 전폐: 세조 10년(1464)에 만든 유엽전으로 전시에는 화살촉으로도 이용
④ 대동통보: 광해군 때 발행
⑤ 상평통보: 인조 때 처음 발행되다가 효종 때 재발행, 이후 숙종 4년(1678)에 다시 발행되어 조선 말까지 사용
중앙 관청의 각 부서, 각 도 감영, 한성부 및 각 지방에서도 발행해 그 종류가 35종이나 되어 혼란을 가져옴
⑥ 당백전: 고종 3년(1866) 경복궁 중건 비용 마련을 위해 발행, 명목가치 100배의 화폐 발행으로 물가 폭등을 가져와
1~2년 만에 폐지됨, 대신 청의 화폐를 수입해 사용
⑦ 당오전: 고종 20년(1883) 발행해 1895년까지 통용, 강화도, 의주에서 발행, 상평통보의 5배로 통용케 해 물가 앙등을 가져옴
⑧ 백동화: 대한제국 시기에 발행, 화폐 정리 사업(1905~09) 때 폐기 처분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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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 2급 41번 문제
41. 근세조선정감, 해국도지 답①
이 문제는 그냥 알아두세요.
"근세조선정감"은 조선 고종 때 박제형이 흥선 대원군의 집권기에 있었던 여러 내용들을 중심으로 기술한 일종의 야사서(野史書)입니다.
흥선 대원군과 관련된 사료가 제시된 문제들을 보면, 이 책에서 많이 인용되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해국도지"는 서양의 여러 서적들을 참고하여 한문으로 번역한 책으로, 세계 각국의 지리와 역사를 소개하고, 서양과 동양의 역법, 군함·대포·망원경 제조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실었습니다. 당시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이 “영환지략”과 함께 서양의 정세를 적극적으로 이해하고자 읽었던 대표적 근대 서적입니다. 조선은 청에 파견되는 연행사절을 통해 이 책을 들여왔고 흥선 대원군도 이 책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② "대한계년사"는 1864년(고종 1)부터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할 때까지의 역사를 강목체(綱目體)로 기술한 책입니다.
"영환지략"은 청의 서계여가 저술한 세계 지리책입니다. 역관으로 초기 개화 사상가였던 오경석이 "해국도지"와 함께
국내에 들여와 개화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던 책입니다.
③ "한미 관계 50년사"는 문일평이 1934년에 저술한 외교 관계사입니다.
"사고전서"는 청의 건륭제 때 완성한 대규모 총서입니다.
④ "오하기문" 황현이 지은 야사로, 동학 농민 운동, 일제 침략과 항일 의병 활동 등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선책략"은 청의 외교관 황쭌셴이 저술한 것으로, 2차 수신사로 파견된 김홍집이 국내에 들여왔습니다. 이 책에는
조선이 러시아를 막기 위해 중국, 일본, 미국과 연합해야 함을 강조하여 조선이 미국과 수교하는데 영향을 주었어요.
⑤ "고금도서집성" 중국 청 강희제 때 집성된 백과서입니다.
"근대 한미 교섭사"는 1852년부터 약 20여년 간의 조선과 미국과 관련한 내용을 기술한 책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효율적인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공부법
카페에서 추천하는 부담 없는 [한권으로 끝내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교재로 중요내용을 공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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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 자격증의 길은 아직 멀어보이네요. ㅜㅠ
공부 열심히 해야겠네요
봐도봐도...늘 헷갈리네요....
감사합니다.
유사문제 풀이로 이해하는게 도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