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渤海〕마을을 찾아서 /정승복
발해 대조영 후손이 살아가는 발해마을
KBS가 제작한 사극 ‘대조영’이 방영된지도 많은 세월이 흘렀다. 우연한 모임에서 경산시 남천면 송백리에 ‘발해 마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번 현장을 방문한다는 마음을 몇 번 변경하고 나서야 찾아보게 되었다.
발해마을은 발해 고황제 대조영 후손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다. 서기 696년~926년까지 231년간 15대를 이어 황위를 계승한 황족의 후예들이 서기 934년 고려에 정착, 서기1592년경 바로 이곳 송백리에 정착하였다.
발해(渤海) 마을의 유래
태씨는 해동성국 발해 대제국 대조영 고황제의 후손이다. 서기 696년부터 231년간 발해 15대 황제국으로서 위용을 떨치시다 내란과 거란의 침공으로
그때 하늘도 노하시어 백두산 대폭발로 해동성국이었던 발해국이 역사속에 뭍이고 말았다.
서기934년 대광현 황태자께서 민중 수만을 거느리고 고려로 내려오니 고려 태조께서 중후하게 예우하여 태자에겐 원보라는 벼슬을, 신료들에게도 골고루 벼슬을 내려주고 민중들에게도 전답과 주택을 차등있게 내려주어 배주(지금의 북한 배천)에서 조상을 모시며 편히 살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서기1228년 서북병마사로서 몽고군을 격퇴한 공으로 협계현에 봉군되신 18세 태집성 대장군 후를 협계 태씨로 전국에 살고 있으며, 서기1253년 후군
장으로서 몽고군을 물리친 공으로 영순현(지금의 상주, 문경, 예천, 의성)에 봉군되신 18세 태금취 대장군 후를 영순태씨로 전국에 살고 있다.
서기1592년 태순금 통정대부께서 경산으로 내려 오셔서 수백년을 대를 이어
모셔오던 위폐를 서기1920년 이곳 발해 마을에 사당을 중건하였다.
서기1963년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여 모셔오다.
서기2005년 경남 진해 해군 대조영함 진수식에 초대장을 받고 회장단 10여
명이 참석하여 큰 예우를 받고 함대에 게시할 태조 대조영 황제님의 영정을 요구함에 당시 태석배 회장님께서 영정 제작 추진위원장을 맡아 1억이 넘는 거금을 들여 약 5년동안 9회에 걸친 국가 심의과정을 거쳐 서기2012년 10월 19일 국가표준 영정 제86호로 지정되어 서기2013년부터 발해 마을 고 왕전에
서 춘분 대제를 올리고 있다.
대씨에서 태씨로 된 연유는 고려사에 대와 태는 통용되어 기록되어 있고, 동
사통감에 대조영을 태조영으로 기록되어 있어 고려초 태씨로 쓰고 있으며 현
재 대씨로 쓰고 있는 사람도 있다.
제28세 태두남 통훈대부 사헌부 집의를 지내신 서암선조께서 서기1569년 춘추관 편수관으로 계실 때 태씨 세계족보를 편찬하시어 다른 족보와는 달리 역사, 지리, 강역까지 기술된 것을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고 있 으며, 현재 전국 약 8천가구 9천 여명이 살고 있으며, 이곳 발해마을을 집성촌
으로 하여 분수를 지키며 선비집 가풍을 이어가며 살고 있는 곳이다.
발해 마을의 유래는 발해마을 입간판의 내용이다.
매년 춘분날을 기해 오늘날까지 전국의 후손들이 모여 향사를 올리고 있으며 유일하게 태씨 집성촌으로 살고 있기에 후손들이 발해마을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난 3월 20일 이곳 남천면 송백길31(발해마을 고황전)에서 발해왕조보존회 주관으로 ‘대조영황제 1305주기 춘분대제’가 있었다.
이곳 발해마을은 대한민국 유일한 태씨 집성촌으로 현재 송백리에는 20여가구
가 남아있다고 한다. 송백리마을에는 대조영의 흉상과 사당, 말을 타고 만주
벌판을 달리는 대조영의 벽화 등이 게시되어 있다.
대조영의 후손들이 발해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정승복 ⦁⟪공무원문학⟫으로 2005년 등단 ⦁한국공무원문인협회대구지회장
⦁수필집『사랑이 꽃피는 마음(2007)』『한 명의 고객을 찾아서(2013)』
⦁공무원문학상 ⦁전 대구수성중 교장 ⦁전 한국스카우트대구연맹 부연맹장 ⦁한국스카우트연맹 훈련교수 ⦁경산중앙교회 원로장로
⦁전 대구광역시교육삼락회 회장 ⦁이메일:chungsbok@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