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6장 1~19절/열매를 맺는 삶(438/591)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사과나무를 심든, 감나무를 심든 기대하는 것은 열매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신 것은 하나님 자녀다운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함이다.
1.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실 것이다. 아직 광야에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은 이미 주신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다(1~3).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이끌어 가실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사의 절기를 지켜야 한다. 토지의 소산을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에 가서 드리라고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토지의 소산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성전에서 제물을 드리도록 정하셨는데, 그것은 감사의 절기이다. 이것이 확증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거두어 들인 열매를 드려야 한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왜 감사의 절기를 지키라고 하신 것일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육체를 던져버리고 성령을 따라서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아가면서 마땅한 수확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나는 죄짓지 않고 살았다.’는 정도의 증거가 아니라, 나는 죄를 짓지 않고 육체를 따라서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서 살아가는 가운데 열매를 맺게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면 그 안에는 열매 맺을 것이 있을 수밖에 없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은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함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갔다는 것이 우리의 자랑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열매를 맺어야 한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서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의의 병기로 열매 맺는 성도가 되자.
2.여기에 보면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였다(12~15). 십일조를 드리는 문제에 있어서 그런데 셋째 해에 드리라고 하였다. 원래 십일조는 매년 추수를 하고 드렸는데, 셋째 해에 또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고 있다. 이것은 구제의 십일조를 말한다. 그래서 그렇게 드린 십일조로 기업이 없는 레위인들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드릴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땅에 들어가면 그 땅에서 우리는 풍성함을 함께 나누며 살아가야 한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헌금을 드림으로서 더 많은 것을 받기 위해서 드리는 것이 아니다. 이미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그 받은 것으로 주님의 뜻에 따라서 사용하는 것이 헌금이다. 이러한 면에서 헌금은 신앙고백이다. 구제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뭐에 대한 명령인가? 그것은 내가 가진 모든 소유는 하나님의 주신 것이라는 신앙고백이다. 그래서 ‘내가 벌어서 가진 것 중에 저 불쌍한 사람들을 위하여 이것을 내놓았습니다’가 아니라, 구제함으로써 ‘나는 하나님 앞에 은혜를 입고, 복을 받아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라는 것을 고백하고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헌금은 복받는 조건이 아니다. 하나님만이 복의 근원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것을 소유하게 된 줄 알고 그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고 하나님의 보호아래 있음을 신앙고백하는 것이 헌금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잘 사용하는 것이 교회의 의무이며, 책임이다. 교회는 헌금을 가지고 교회의 필요에 의해서도 사용을 해야 하지만, 또한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사용을 할 수 있어야 한다.
3.하나님의 말씀을 마음과 뜻을 다하여 지켜야 한다(16~19). 기독교 신앙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의 계시가 있다는 것이다. 다른 모든 종교에는 계시가 없다. 사람이 만든 종교는 모두 다 득도하는 것이 최고의 경지이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선한 성품, 윤리, 도덕적인 깨달음을 얻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득도를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고행을 한다. 그래서 이러한 종교에는 신이 없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도 깨달음의 연속일 뿐이지, 어떤 신의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와 같지 않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말씀이 있다. 계시의 말씀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 주신 것과 더불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취급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보여 주심으로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이며, 어떤 존재가 되어서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 계시이다. 성경의 계시가 이렇게 긴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과 구원의 역사를 받았으면서도 계속해서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죄악의 구렁텅이로 다시 들어가서 자신을 더럽히려고 한다. 그러한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인내하시며, 자신의 자비와 긍휼로 우리를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신다. 성경에서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 이것이다. 결코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포기하고 버리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깨닫고 바라보아야 할 부분이 이 부분이다. 나의 무능함과 하나님의 신실함과 인내와 이루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