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나부터 먼저 편안한 마음을 가지려고 해요
함형복 당호(仁誠堂, 인성당) 춘천교구
홍천군 서면 오유포 출생,
1933년 11월 24일 생 (음)
춘천 지부회장
살면서 당하는 모든 일은 다 한울님 덕이고 간섭이지요.
어려운 일이 있어야 좋은 일도 있는 법이에요.
어려운 일이 주어질 때는 또 하나의 가르침을 주시려 그런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바꿔요.
가르침을 배우고 또 깨닫는 거죠. ‘일용행사가 다 도 아님이 없다’고 하시잖아요.
항상 부족해서 한울님께 부끄러워요.
110년 12월 21일 날에 입교식을 했어요. 전교인은 박경남(시누이) 씨고요. 춘천의 제일 어른이신 양하일, 황원중 선생님 앞에서 입교식을 했어요. 시일날 빠지지 않고 잘 댕겼어요. 알고 보니 시어머니께서도 천도교를 하셨더라고요. 우리 큰시할아버지가 동면에 사시는데 천도교 할 때 돼지 잡고 크게 했어요. 우리 시어머니도 친정 외할아버지가 3.1 독립운동시절에 서울 총부로 중요한 서류를 밤에 가지고 다니셨대요. 밤에 호랑이하고 다니셔서 형무소에 안 잡혀갔대요. 다행히 시외할아버지께서 옥고를 치르지 않아 시외가집은 무사했어요. 시외할아버지 사촌 되시는 분은 독립만세 부르다가 형무소에 6개월 사셨대요.
우리 시외할아버지 댁은 허씨 집안이에요. 시어머니가 허윤희 씨세요. 우리 시외할아버님은 허기훈 씨시고요. 우리 시어머니, 작은 시어머니도 다 독실한 천도교 집안이에요. 나는 독실한 천도교 집안에서 천도교 집안으로 결혼했어요. 이렇게 천도교 역사가 있는 집안이었는데 자손이 잘 잇지를 못해서 다 끊어졌던 거예요. 그래서 저라도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시어머니와 우리 작은 시어머니, 친척 어머니들을 다 모셔서 천도교를 다시 하게 했어요. 맏동서, 시누이, 사촌동서들까지 집안을 쫓아다니면서 다 입교시켰어요. 이 분들이 지금은 다 환원하셨는데 그러고 나니 자손들이 대를 잇지 않아서 안타까워요. 다 내가 부족해서 그렇다 싶어요. 부모들이 어릴 적부터 이어줘야 깊이 하겠더라고요.
처음 입교한지 얼마 안 되서 최시형 씨가 본부 여성회장을 하실 때 춘천에 순회를 오셨어요. 우리 집에서 주무시게 해드렸어요. 떡도 하고 해서 저녁에 춘천 회원들 거의 다 오셔서 저녁 기도식을 했어요. 우리 집에 최시형 여성회장님과 몇 분이 주무시고 가셨어요. 화악산 수도원 지을 때 얘기에요. 권 할머니가 수도원을 지으려고 하셨대요. 그때 우리 시누이(박경남)가 이필순과 친했어요. 부영산이라는 곳에 우리 시누이가 다녔어요. 부영산 그곳에 교인이 수도하며 지내던 집이 있었거든요. 저도 그곳에서 좋은 이야기 많이 듣다가 입교했잖아요. 권 할머니가 부영산에 수도원을 지으려는 뜻이 있었어요. 그런데 권 할머니가 부영산을 보고 오셨는데 잘 안 됐어요.
그때 부영산에 댐을 건설한다고 공사를 해서 가는 길이 없어졌어요. 권 할머니, 정부애(노채봉 시어머니), 김정숙 사모님 등 여러분이 서울에서 오셨어요. 부영산에 다녀오신 후 성창화, 이필순, 우리 시어머님, 우리 시누이(박경남) 이분들과 권 할머니를 비롯한 서울 분들하고 우리 집에 오셔서 시어머니 방에서 밤새 얘기를 나누셨어요.
눈발이 많이 날리던 때에요. 뒷날 아침에 화악산에 가신다고 하셨는데, 부영산에 수도원을 지을 수 없으니 다시 화악산 자리를 보러 가신 거죠. 그러니까 화악산 수도원 짓기로 뜻을 모은 곳이 바로 우리 집이에요. 그리고 화악산 지을 때, 성미 뜬 쌀을 우리 시어머니, 시누에게 드리면 그곳에 가서 목수들 식사를 해드렸습니다. 우리 시어머니랑 시누이는 화악산에 오래 계셨어요. 거기서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집을 다 짓고 비 때문에 고생이 많았어요. 도배하는데 풀이 안 붙어 애먹었다는 말도 들었어요.
첫 수련은 포덕 118년에 서울 천도교 여성회 연성수련회에 참가했어요. 수련하는데 삼일 동안 비가 그렇게 오더라고요. 주문만 읽었어요. 이순종씨가 옆에 오셔서 강령 모시라고 하는데 잘 안 되더라고요. 그러다가 수련 중 제 몸이 고무풍선처럼 터지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그때 한울님의 느낌을 받았어요. 한울님 감응이겠죠. 그리고 첫 수련하고 나서 집에 오니 경외지심이 생겼어요. 행동하는 게 조심스럽고 바깥으로 못 나가겠어요. 시장도 못 가겠고 물건도 못 사겠어요.
그러다 춘천교구에서 자체수련을 했어요. 새벽 수련하려고 춘천교구로 가는데 몸이 너무 떨리고 춥더라고요. 그래서 이불을 둘러쓰고 갔어요. 아침 수련을 하는데 가리산 원장님이 오셨어요. 수련기간이라 이필순 씨도 오시고 그 외 몇 분이 많이 오셨어요. 그때 원장님과 여러분들이 경주 용담으로 수련 가자는 의논을 하셨어요. 나는 아이들 키우느라 집이 엉망인데도 간다니까 아무 생각 없이 몇 분이랑 같이 기차를 타고 갔어요. 청평까지 갔는데 우리 외삼촌 아주머니가 몸이 아파서 도저히 못 간대요. 그래서 가다가 내려서 화악산으로 갔어요.
장마라서 비가 많이 왔어요. 개울을 건너다가 고무신 한 짝을 빠뜨려서 한쪽 발은 맨발로 올라갔어요. 원장님(조동원)께서 수련을 참 열심히 했어요. 일주일이 되자, 집이 걱정이 되서 내려왔어요. 집에 오니 참 피곤한데 갑자기 내가 사람들을 불러요. 그때 우리 집엔 아무도 없어서 내 소리를 듣고 옆집 사람이 쫓아 왔어요. 근데 내가 옆집 사람에게 무턱대고 명령을 하는 거예요. 청수 모시라고. 그리고는 정신을 잃고 드러누웠어요.
내가 깨서 궁을기를 가슴에 덮으라고 했더니 동생(함형숙)이 옆에 있다 궁을기를 덮더군요. 그리고 “내가 일 다 하고 왔다”고 하면서 “떴다! 떴다! 하늘에 궁을기가 떴다!”라고 말했어요. “이필순을 불러오라!”고 명령을 하니 우리 아들이 모시고 왔어요. 이필순 사모님은 주문을 많이 해 아는 게 많았어요. 내 상황을 보시더니 심고를 드리고 청수 모셔야 한대요. 가리산 원장님도 그때 집에 오셔서 그런 증상이 나서 청수 모시고 심고했다고 그래요. 난 뭐가 뭔지 모르고 깨어났는데, 그 후로 가리산, 화악산에 수련하러 많이 쫓아다녔죠.
포덕 122년 5월 13일 춘천에서 포덕대회를 했어요. 소양극장을 세내고 중앙 총부에서 와서 했어요. 소양 극장이 거기서 제일로 큰 곳이었어요. 일반 사람들 오라고 해서 포덕대회을 하는 건데 주최는 춘천교구에서 했죠. 유붕선 교구장이 계실 때에요. 이삼례 사모님 등이 애를 많이 쓰셨죠. 그때 교장 선생님들부터 춘천 유지 분들이 교회에 많이 나오셨어요. 지금은 어쩌다가 다 안 나오시니 안타깝죠.
나는 127년도부터 회장이 되어 6년간 활동했어요. 입교해서 올 때 이옥희 춘천지부장이 계셨고 뒤에 이삼례, 최종채 같은 분들이 애를 많이 쓰셨죠. 나는 초보자였는데 어쩌다 여성회장을 맡게 됐어요. 갑자기 환원을 많이 하셔서 여성회원들이 줄고 회비도 줄었죠. 그나마 내가 맡을 때는 여성회 돈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교구 커튼하고 이래저래 뭐하면서 다 지출을 했대요. 여성회장을 하면서 여성회에 돈 100만 원은 해 놓아야지 마음을 먹었어요. 순회방문을 하거나 병문안을 하거나 노사모님 점심을 사드리려면 돈을 모아야 겠더라고요. 알뜰하게 했어요. 식사를 하거나 어디 여행을 가더라도 남은 것은 여성회로 귀속시키면서 돈을 모았죠.
내가 여성회장 때 교회에서 금강포를 새로 만들었어요. 야외시일 같은 행사가 많았는데 우리 여성회에서 준비를 많이 했죠. 총부에서 의암성사 묘소, 해월신사묘소를 했을 때 행사도 참여했죠. 많은 행사에 참여하느라 나름대로 참 바쁘더라고요. 결혼식도 많고 장례식도 많아 바쁘게 활동했죠. 회장 6년을 마치는 날, 여성회본부에서 주는 공로상을 받았어요. 그때가 박공주 회장 때에요. 그리고 147년도엔 여성회본부에서 포덕교화상을 받았어요. 춘천교회에서도 공로상을 주셨어요. 내가 여성회장 때 모은 돈 500만원을 우리 회원들과 상의해서 148년 춘천교구 성화실을 지으면서 종자돈으로 내놓았어요. 그 성화실을 다 짓고 공로상을 주신 거예요.
주 사모님을 몇 번 뵌 기억이 나네요. 맨 처음 입교하고 천일기념식에 참여했는데 그때 이필순, 시누이(박경남), 성창화 사모님 하고 갔어요. 한복을 깔끔하게 입으시고 정갈한 모습이었어요. 나중에 우이동 수련할 때도 뵈었는데 그때는 아프신 모습이었어요.
내가 동생 함형숙이를 포덕을 했어요. 동생네가 사업을 하느라 아주 바빴는데 처음엔 동생 남편이 잘 나오다가 또 나중에는 동생이 잘 나오는 거예요. 서로 교대로 나왔어요. 얼마나 수련을 열심히 하는지 가리산에 수련하러 자주 갔죠. 조카 주희는 내가 처음 수련에 데리고 갔죠. 공부도 잘하고 수련도 잘하고 정말 예쁜 아이에요. 작은 조카 정희도 언니처럼 열심히 했죠. 동생(함형숙) 가족 모두다 신앙생활을 잘해 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난 중매로 결혼했어요. 친정은 종교가 없었죠. 그런데 한울님 덕으로 신앙생활하게 되고 아들딸 건강하고 아들며느리 딸이 다 잘 살아주니 감사해요. 한울님이 정해 주신 자식 항상 고맙게 생각해요. 며느리 맞이할 때, 종교를 가지면 갈등을 하니까 종교 없는 며느리를 들이는 것이 첫째조건이었어요. 그래서 세 며느리가 다 종교가 없었어요. 딸도 마찬가지로 종교 없는 사위를 맞이했어요. 다 심고 덕으로 된 것 같아요. 아이들 모두 천도교를 잘 하고 있어요.
내가 시집오기 전부터 우리 할머니께서 말씀하시기를 “남한테 손가락 인사는 받지 말고 살아라” 하셨어요. 정직하게 살라는 말씀인데 내가 교회를 다니다 보니 할머니가 바로 한울님이에요. 할머니 말씀을 늘 머릿속에 넣고 있어요. 한번 한울님께 맹세한 마음이 변하지 않게 잘 해야 해요. 우리 자식들이 헛되지 않고 손자들까지 대를 이어서 집안 포덕이 되기를 바라요. 사실 우리 교인들 보면 집안 포덕이 참 힘듭니다. 우리 식구 모두가 한울님 자식이에요. 그 자식 하나도 어긋남이 없이 대도의 길을 갔으면 좋겠어요. 마음으로 항상 선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합니다. 나는 내가 살아 있을 때 확실한 천도교 자손 하나 남기고 싶어요.
살면서 당하는 모든 일은 다 한울님 덕이고 간섭이지요. 어려운 일이 있어야 좋은 일도 있는 법이에요. 어려운 일이 주어질 때는 또 하나의 가르침을 주시려 그런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바꿔요. 가르침을 배우고 또 깨닫는 거죠. ‘일용행사가 다 도 아님이 없다’고 하시잖아요. 항상 부족해서 한울님께 부끄러워요. 청수 모시고 심고하는 것은 제 생활입니다.
나는 남편과 여행을 많이 갑니다. 한울님께서 세상 구경시켜 주시려고 그러신다고 생각하고 다녀요. 꼭 청수기와 염주는 챙겨서 다니지요. 짐 가방에도 안 넣어요. 들고 다니는 가방에 넣고 다녀요. 내가 나이도 많은데 무슨 힘으로 다니겠어요. 한울님의 힘으로 다니죠. 남편이 정년퇴직을 했을 때, 아직 아이들이 어려서 걱정이 많았어요. 정성으로 기도식을 하고 새벽 수련을 했죠. 그때 재래식 집이었는데 추웠어요. 새벽 청수 모실 때 추워서 이불 뒤집어써야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때 손이 얼어 동상이 생겼어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니 언제 다 나았는지 다 나았어요. 남편도 신우건설에 다시 취직을 해서 전무로도 계시고 이사로도 계시고 했어요. 남편 몸도 아팠는데 다 나았고요. 심고를 항상 했어요. 남편은 내가 청수 모실 시간을 놓치면 꼭 시간을 일러줘요. 내가 어디라도 가면 대신 청수 모시고 해요. 나이가 들수록 남편이 잘하니 참 고마워요. 아마도 ‘부인이 도통하면 낮잠을 자다가도 도통한다’는 말씀이 맞나 봐요.
나는 한울님 뜻에 벗어나지 않게 살려고 노력해요. 흐르는 물도 함부로 쓰지 않아요. 산에 나무도 함부로 하지 않아요. 아껴요. 이런 가르침은 우리 할머니가 하신 말씀이에요. 할머니가 한울님 말씀을 다 해주셔서 어릴 적부터 배운 거예요. 할머니는 잡상인이라도 우리 집에 오면 그 사람이 우리 집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는데 하시며 그냥 안 보내세요. 물건을 사주시고 식사대접을 하시는 거예요. 오는 손님마다 밥해서 드려요. 하루 밤에 세 번을 일어나 밥하시는 것도 봤어요. 손녀사랑도 지극했죠. 언 손발 녹여주시고 화로로 고구마 구워주시고요.
우리 어머니도 할머니 거역하지 않고 따라하세요. 그래서 우리 형제들은 욕한 번 안 듣고 자랐어요.
남편 직장 동료 중에 서울에 사시던 분이 계셨는데, 내가 천도교 한다고 하니 그 부인이 “아이구, 천도교는 맨 날 싸움만 해요”하는 거예요. 아마도 중앙총부 근처에 사셨던가 봐요. 옛날 신파 구파 싸움이 났잖아요. 그런 모습을 보여 주는 게 안타까워요. 서로 싸우면 안돼요. 서로 화합해야 세상 사람들도 알아주고 한울님도 감응해 주시고 천도교 발전도 할 수 있어요.
나는 염주를 항상 손에 쥐고 다녀요. 염주가 내손에 없으면 놀라요. 외국에 가든 어디 가든 염주가 없으면 허전해서 길 나설 땐 호주머니에 염주부터 넣어요. 주문을 하면 언제나 편안해요. 편안한 그 마음속에 한울님이 함께 하시는 것 같아요. 언젠가는 세상 사람들도 모두가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갈 날이 올 거예요. 한울님의 뜻이니까요. 나는 지금은 나이가 들어 크게 일은 못하지만 항상 나 하나부터 편안한 마음을 가지려고 해요. 그리고 심고를 해요. 한울님 뜻과 같이 이 세상도 만사여의 되시라고. 그런 날이 반드시 올 거라 믿습니다.
(구술일: 포덕 150(2009)년 2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