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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무소에 인사드린 후 법진 스님의 안내로 금당선원으로 향했다. 대웅전 건너편 계곡 너머에 위치한 금당선원은 동화사 수행 공간이다. 옷깃을 여미며 들어가는 초입 만추의 서경을 가득 머금은 이름없는 부도가 먼저 반긴다.
이곳에 옮기기 전에는 동화사 아랫마을에 있었다고 한다. 고려초기 부도로 알려진 팔각원당형으로 방형의 지대석 위에 안상을 새기고 기단부를 올리고 기단 상대석에는 앙련이 피어있다. 받침을 갖춘 팔각몸돌위에는 골이 깊은 지붕돌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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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쪽문의 안과밖에 불과하지만 금당선원은 한국불교의 선맥을 지켜오는 도량으로 원래 금당암이 있던 곳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때 진표 율사로부터 팔간자를 전해받은 심지(心地) 왕사가 이를 팔공산에 던져 떨어진 자리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그곳이 바로 금당선원 자리이다.
금당암을 거쳐간 선사는 이루 헤아일수 없으며 1900년 경허스님이 금당선원을 개원한 후에도 동광 남옹 고암 인곡 석우 승찬 효봉 구산 향곡 서옹 스님 등 수많은 고승들이 이곳을 거쳐갔으며 성철 스님이 29세 때인 1940년 겨울 동안거 때 조주 선사의 '無(무)자' 화두를 타파해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던 곳도 금당선원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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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건 당시에는 당간지주의 위치와 ‘금당(金堂)’이라는 명칭으로 미루어 보아 금당선원 영역이 사찰의 중심영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답사 매니아들에게는 많은 소설의 소재가 현존하는 가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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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전 중정 배례석
대웅전 중정에도 배례석이 있었지만, 극락전 중정에도 보인다. 일반적으로 배례석은 석탑, 석등 전면에 위치하여 공양물을 올리거나 올라서서 예를 갖추는 기능이다. 하지만 이 배례석은 극락전 중정에 있어 나만의 근거없는 픽션의 소재거리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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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로 지정된 극락전 내부에는 1700년대에 조성한 목조아미타여래좌상, 관세음보살입상, 대세지보살입상을 봉안하였다. 탱화없는 후벽이 오늘따라 허전하게 다가온다. 모든 문화재는 제자리를 지킬때가 가장 귀하고 성스러우며 아름다운 것이기에 국립박물관에 소장중인 후불탱도 안태 고향으로 귀향했으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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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전 기단
평면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극락전이 보물로 지정된 까닭은 조선중기 목조건물의 형태도 간직하고 있지만 소위 가구식 기단이라 불리는 고식을 지녔기 때문이다. 사진에 보이듯이 맨아래 한벌 지대석을 깔고 위에 면석을 세웠으며 탑 기단처럼 우주와 탱주를 새기고 갑석으로 마무리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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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석의 모퉁이는 탑 지대석이나 옥개석 모서리와 같이 면과 면이 만나는 곳을ㄱ자형으로 만들고 꺾이는 곳에 물매를 주었다. 책에서만 읽었던 고건축의 향기가 솔솔 풍기는 듯 하여 발길이 쉬 떨어지지 않는다.
신라시대 건축 흔적이라고 하는 가구식 기단은 극락전 외에 문경 대승사, 월출산 도갑사 해탈문에서 본 듯 하다. 이곳에서 가까운 가창 남지장사 대웅전 기단에도 기단에 탱주가 보였었는데 작년 복원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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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아래 초석, 바로 옆 나무주초 신방목를 받쳤던 신방석, 주초와 주초사이에는 문얼굴 하인방을 지탱하였던 고맥이돌까지 뚜렷하게 남 아 있어 살펴보는 재미가 여간 즐거운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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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보경사 적광전에는 신방목 사자가 있지만. 단순한 태극 문양이 많다. 극락전 신방목은 연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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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탑
동서탑은 사찰창건 당시, 즉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허훈(許薰, 1836-1907)의 『금당탑기(金堂塔記)』에서는 ‘863년 세웠으며 875년 금당으로 옮겨 세웠다.’는 내용이 있다고 한다.
쌍탑 위치는 불변하였다는 가정하에 극락전과 비교하여 근거 없는 이야기를 전개해 보자. 주전각을 중심에 두고 탑이 좌우에 조성된 사례가 있었던가? 만약에 현재 극락전과 뒤편 수마제전 사이에 빈 공간에 극락전이 있었다고 가정하면 현재 공간배치 의문점이 쉽게 풀리지 않을까?
정확하게 신라전형 1금당 쌍탑의 충실한 가람배치가 된다. 금당, 쌍탑 사이의 거리는 물론 극락전 중정 배례석도 현재 동탑 옆에 모호하게 자리한 석등의 배례석 자리가 확실해 보인다. 또한 창건당시에는 극락전이 아니라 다른 전각이었다면 수마제전으로 인하여 한 가람터에서 아마타불을 두 곳에 봉안한 미스테리가 풀릴 실마리가 된다. 실제로 극락전의 아미타 삼존불도 신라 불상은 아니지 않는가?
이런 가정이 성립하려면 극락전이 화재, 자연 재해등으로 본래 위치에서 앞으로 이건되었다는 사실과 석등도 옮겼다는 기록이 있어야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한 편 탈고 안 될 소설에 불과하다.
법진스님 말슴에 의하면 기울어진 극락전을 조만간 보수한다고 했다. 옛기단을 활용하라는 말씀은 전했지만 이번 기회에 각계 전문가의 토론과 검증 고증을 거쳐 충분한 심의 후에 극락전을 이건 복원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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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을 넘어 금당암과 영욕을 공유했을 서탑은 말이 없고 늦은 가을의 단풍과 철 이르게 찾아 온 겨우살이와 오손도손 정겹게 이야기 나누며 짧은 만추의 햍볕을 즐기고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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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탑은 이중기단으로 상기단에는 탱주를 새겼다. 왠지 깔끔한 도회적인 느낌은 나만의 생각일까? 상륜부에는 노반과 찰주가 보이며 1957년 해체 보수할 때 1층 탑신석 윗면의 사리공에서 99개의 소탑을 비롯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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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탑
동탑도 이중기단에 상기단,하기단, 몸돌에는 우주와 탱주를 새겼다. 옥개석 받침은 4단이며 노반, 복발, 보륜, 보주가 남아있지만 20세기초 보수로 인해 원형을 잃고 기형이 되어 버렸다. 석등은 왜 저기 서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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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탑 상기단 면석. 우주와 탱주를 터무니없게 대나무 마디처럼 모각하였다. 서탑을 복원 모델로 하였다면 원형을 간직했을 것이다. 동화사는 봉황의 자리이며 봉황은 오동나무에 둥지를 틀고 대나무 열매만 먹기 때문에 그래서 이렇게 복원했는가? 금당암 동탑 보수기가 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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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탑 배례석. 높게 조성하였으며 면석에는 석탑 기단 갑석처럼 대나무 모양의 탱주를 모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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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단 면석 역시 보수하면서 폭을 줄여 복원했다. 신라탑의 안정감을 송두리째 앗아간 테러이며 최초 조성한 선인에게 폭력을 자행한 것과 진배없는 만행이다.
동탑에서 발견된 사리 1440과를 서탑에 나누어 모셨더니 밤중에 서탑 사리가 동탑으로 옮겨 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며 재미지게 너털웃음 지으며 말씀하시던 스님께서 동탑에 사시마지 예를 올리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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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탑 옆 석등. 화사석만 없다면 신라 전형 팔각원당형 석등이다. 역시 복원하면서 화창을 지나치게 비대하게 조성 복부가 비만하여 바지춤 밖으로 삐쳐나온 뱃살처럼 보인다.
위치 또한 애매하여 금당 앞도 아니요 석탑 사이도 아니며 석탑 전후에도 자리하지 않았다. 위에서 언급한 것 처럼 처음에는 극락전 배례석 앞에 자리했었다는 믿음이 강하게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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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마제전
1702년에 창건된 건물로 전해지는 단아한 새색시 분위기를 품은 수마제전이다. ‘수마제(須摩提)’는 서방극락을 칭하는 별명(別名)으로 ‘묘의(妙意)· 호의(好意)’로 번역하며기에 수마제전 또한 극락전이라고 한다. 동화사 금당선원 영역 짧은 거리에 두 개의 극락전이 조성된 사실도 위에서 언급한 상상의 나래에 힘을 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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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마제전 아미타불. 처음 본 순간 볼록하게 솟은 유두가 눈에 들어 왔다. 불경죄를 범하는지 모르지만 어쩜 나의..., 둥글고 통통통한 백호,나발,계주가 표현되고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고 법의는 통견이다. 가슴 아래에는 매듭된 내의가 보이고 수인은 중품중생(?)의 아미타 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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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자리 허락해주신 법진스님께 거듭 감사올리며
동행한 옛님 여러분! 짧은 가을날 긴 여운을 남긴 답사로 오래 기억될 것 같습니다.
2007.11.10 |
첫댓글 덕분에 동화사를 둘러보게 해주심 감사드려요. 원수 꼭 갚을께요. 나만 아는 특별한 곳을 2월말,복수초와 변산바람꽃필무렵에 꼭 한번 뫼시지요.
이렇게 푸짐하게 둘러보는 자리였다니... 아~! 내만 지지리 복도 없는긴가... 우야꼬, 우야꼬...
그날 동화사 금당암 같이 갔다가 오라고 했건만....
아직 내 답사계획에 대구 쪽이 없는 것이,대구라는 고장이 어쩐지 낯설어서...한번 용기내서 실행해 보아야 겠습니다...빠른시일에...ㅎ
진허스님이 계실 때 한 번 들러보았는데 몇 해전이라서 기억이 아련합니다. 좋은 날 되십시요.()()()
동화사, 참 예쁜 절이 됐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