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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817
7월10일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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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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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0zb43oki0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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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안에 주님께서 자리하시고, 그분의 영으로 가득 찰 때, 우리는 아름답습니다!>
시골 살다 보니 참 재미있는 일이 많이 생깁니다. 며칠 전부터 삐쩍 마른 개가 수도원 주변을 서성거렸습니다. 배가 딱 붙어버린 것이 보아하니 일주일은 굶은 것 같았습니다. 정말 불쌍해보였습니다. 순해 빠져서 아무에게나 꼬리를 흔들었습니다.
알아보니 연로하신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키우시던 개인데, 얼마 전 목줄을 끊고 달아나 애타게 찾고 계신답니다. 고기 몇 점으로 유인해서 트럭 옆자리에 태웠습니다.
슬쩍 옆을 쳐다보니 정말 재미있는 녀석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엄청 긴장했던지 엄청 발버둥을 치고 난리더니, 조금 달리니, 여유롭게 서서 바깥 풍경을 만끽했습니다.
마침내 그리던 집에 도착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아까 수도원에서의 불쌍하고 비참한 모습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자기 집이라고 행동이 아주 자신만만했습니다.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확인하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나타나시자, 세상 행복한 얼굴이었습니다. 물론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에도 환한 웃음꽃이 피어났습니다.
주인집을 떠난 강아지와 주인과 함께 있는 강아지는 천지 차이였습니다. 마찬가지겠지요. 주님과 늘 함께 있는 우리는 언제나 행복합니다. 그러나 주님과 멀어져버린 우리는 비참한 존재일 뿐입니다.
인간이란 존재,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때로 한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더할 나위 없이 비참한 존재로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마냥 그렇게 살지는 않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어제의 나를 훌훌 털고, 화사하고 찬란한 얼굴로 변모합니다. 아름답고 위대한 존재로 탈바꿈합니다.
이렇게 우리 안에는 극단적 선과 악이 공존합니다. 때로 천사의 얼굴을 하고 살아가지만, 순식간에 사탄의 얼굴로 돌변합니다.
언젠가 정말 오랜만에 성당 장식을 하면서 등경을 제작했습니다. 나무 조각으로 먼저 틀을 만들고, 바깥을 한지로 감쌌습니다. 십자가도 그려넣었습니다.
미술 실력이 없어서 인지 참으로 볼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해가 저물고 나서 그 볼품없는 등경들 속에 초를 한 자루씩 넣고 불을 밝히니, 세상에 작품도 그런 작품이 없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 나만 가득할 때, 세속적인 욕심과 이기심, 자만심으로 가득할 때, 우리는 정말이지 볼품이 하나도 없습니다. 초라하고 누추함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주님께서 자리하시고, 그분의 영으로 가득 찰 때, 우리는 아름답습니다. 존재 자체로 찬란하고 영롱합니다. 그때 우리는 인간 본연의 비참과 어둠을 딛고 위대함으로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하며 언제나 죄인인 우리들이지만, 주님으로 인해 존귀해지고 가치를 지닙니다. 투박한 질그릇 같은 우리들이지만, 보잘 것 없는 우리들의 그릇 안에 주님의 영을 가득 담게 될 때, 우리는 더없이 사랑스런 존재로 변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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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mOoJSz3Ka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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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지금 속한 세상을 찢을 용기를 준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이 세상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들을 두려워한다면 영혼까지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은 그 사람을 부끄럽게 여기실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사람이 죽음을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저도 죽음이 두렵습니다. 그러나 이전보다는 덜 두렵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주님을 조금 더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알아갈수록 당연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줄어들게 되어있습니다.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아기를 사랑하면 큰 차에 뛰어들기도 합니다. 사랑이 이렇게 죽음의 두려움도 이기게 만드는 이유는 사랑이 영원한 생명의 보장이기 때문입니다.
아기는 어머니 뱃속에서 어머니 사랑만 받으며 삽니다. 그러나 더 넓은 가정이라는 세상으로 나아오면 가족을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춰야 합니다. 그것을 넘어서면 이제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준비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지금 있는 세상에 갇히게 되고 제 삶을 살 수 없게 됩니다. 지금 세상을 극복하여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힘은 지금 함께 사는 사람들이 나를 죽이더라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여기 피로와 무기력감, 자살에 대한 유혹을 느끼는 막 40대에 접어든 미혼 여성의 삶을 보고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이 여성은 공무원이라는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연봉은 많지 않았지만, 그녀가 만족스럽게 살아가기에는 충분했습니다. 1남 1녀 중 첫째로 태어난 그녀는 소위 한국의 전형적인 장녀였습니다.
아버지를 일찍이 사고로 잃은 그녀는 고등학생 때부터 집안의 기둥 역할을 맡아왔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도 사춘기도, 질풍노도의 시기도 그녀에게는 사치에 가까웠습니다. “네가 빨리 자리를 잡아 어린 남동생을 경제적으로 도와줘야 한다.”라는 어머니의 말에 따라 청춘도 연예도 뒤로하고 오직 안정된 직장을 잡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남동생이 재수, 삼수를 하는 동안 학원비는 언제나 그녀의 몫이었습니다. 대학에 합격하자 남동생은 그녀가 평생 엄두도 내보지 못한 해외 어학연수를 다녀오기를 원했고 그 다음은 사업을 하기를 원했습니다. 사업비용은 어머니의 대출로 이루어졌고 어머니의 대출금은 당연하게도 그녀가 갚아나갔습니다.
동생의 결혼을 여러 날 앞둔 어느 날 어머니의 다음 말은 그녀를 폭발하게 하였습니다. “너희 아버지가 남겨준 아파트 있지? 그거 네 동생 신혼집으로 주기로 했다. 그래도 명색이 남잔데 집 한 칸은 해줘야 사돈 보기에도 체면이 서지.” 기가 막힌 그녀가 “그러면 엄마는 어디로 이사할 건데?”라고 묻자 어머니는 당연한 듯 말했습니다. “너희 집으로 가면 되지. 이제 같이 나이 먹어 가는 모녀끼리 친구처럼 한 번 살아보자!” 그녀도 이번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생애 처음 반대의견을 내본 뒤 돌아오는 것은 어머니의 순식간에 일그러진 얼굴과 폭언,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빨대 꽂아 다 빨아먹은 동생의 적반하장 반응이었습니다.
“불효녀”, “욕심 많은 년”,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누나 왜 그렇게 엄마 힘들게 해!”와 같은 비난이었습니다.
몇 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남겨준 아파트는 동생이 신혼집으로 쓰고 있고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의 집에 함께 살고 있습니다. 만나던 남자친구는 어머니의 반대로 헤어졌습니다.[출처: 『이제 독성관계는 정리합시다』, 권순재, 생각의 길]
위 여성의 문제는 이전 세상을 찢을 용기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자궁이 좋아서 자궁을 찢을 용기가 없다면 아기는 자궁보다 더 넓은 세상을 맛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가정에서도 어머니, 아버지를 버릴 용기가 없다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자신의 세상에 머무르도록 딸과 아들을 자기가 꼭 필요한 사람으로 만들려는 어머니가 나쁜 사람입니다. 나뿐인 사람인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도록 자신을 버리게 할 의무가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딸은 어머니와 동생을 버릴 용기를 가졌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평생 살아봐야 자신의 인생은 단 하루도 살 수 없고 그렇게 해도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삶이 될까요? 어리석은 삶이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도 우리를 자신들에게 충성하도록 붙잡아놓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 방법으로 위협을 합니다. 돈을 덜 준다던가 빼앗는다던가, 사랑하는 가족을 잃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이 여러 위협을 견뎌낼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 사람은 어쨌건 하느님 나라로 나아갈 준비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집착하여 두려움 속에 당신을 증언하지 못하고 당신을 믿는 것을 부끄러워한 것을 이해하실 수 있으실까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세상의 많은 회유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안다고 증언하셔서 순교하셨습니다. 이 모습이 천국으로 나아갈 준비가 된 분의 모습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이용하려고 두려움이란 무기로 우리를 잡아두려 합니다. 그러나 사랑엔 두려움이 없습니다.
제가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읽고 또 성체조배도 하며 결국엔 사제의 길로 부르심에 응답하기로 했을 때 적지 않은 반대가 있었습니다. 먼저 아버지의 반대가 있었고 여자들의 반대도 있었으며 다니던 학교도 지금까지 공부 잘해놓고 왜 그러느냐고 전화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두려움을 극복할 힘은 더 큰 사랑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세상 사람들을 더 구원하고 싶은 사랑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 사랑이 이 세상에서 저를 붙잡는 힘을 이겨내게 하였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모든 성소자들이 그러할 것입니다.
위 40대 노처녀는 어머니와 동생이 자신을 미워하고 원망해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웠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유롭게 자신의 인생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은 영원하신 하느님의 본성이기 때문에 영원하지 않은 것들을 끊을 힘도 줍니다. 따라서 사랑을 많이 성장시킨 사람은 이 세상에서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꾸준하게 해나가야 하는 일은 ‘사랑을 성장시켜’ 언제라도 이 세상을 찢고 영원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지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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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0,24-33 : 육신만 죽이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25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스승으로 모시고 있기에 우리가 그분과 같이만 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단계이다. 그리고 제자들이 자신을 스승이나 주님보다 더 높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종이라 하시지 않고 친구라고 하셨다(요한 15,15 참조). 그들이 예수님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제자들에게는 더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박해자들의 위협이나 모략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이 모든 것이 헛된 일이라는 것이 심판 날에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에서 나오는 “어두운 곳”, “밝은 곳”, “귓속말”, “지붕 위”(27절)라는 말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어둠이고 밤이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게 높은 곳에서 선포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28절)고 하신다. 육체적으로는 죽일 수 있지만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우리가 두려워해야할 분은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28절)이시다. 이 멸망은 묵시록에서 “두 번째 죽음”(20,6)이라고 하며 이 죽음은 지옥에서 겪게 될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다.
참새는 창조물 가운데서도 아주 작은 것이다. 아주 하찮은 것이다. 그러나 그 참새조차도 하느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 이는 하느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알고 계시다는 뜻이다. 이렇게 미물까지 다 알고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자녀인 우리는 얼마나 더 잘 알고 계시겠는가? 우리는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것을 섭리로 돌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수많은 참새의 생명보다도 오히려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를 보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과 입으로 하느님을 안다고 증언해야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32절)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지 않으면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믿어도 아무 소용없다. 고백의 뿌리는 마음의 믿음이다. 고백은 믿음의 열매이다. 뿌리가 살아있는 한, 뿌리는 가지나 잎을 만들어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로마 10,10)라고 하셨다. 마음의 믿음이 없다면 입으로 고백할 수 없으며, 마음의 믿음도 입으로 고백하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우리의 믿음을 건강하게 하여 입으로 늘 고백의 씨앗을 뿌리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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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강의를 끝마치고 나면 스스로 강의에 대한 평가를 합니다. 내용은 어떠하였는지, 강의에 참여한 이들의 반응은 좋았는지 반성하는데, 그 평가는 언제나 박합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제가 채우지 못한 것은 하느님께서 채워 주셨다고 믿으며 주님의 은총을 청합니다. 또한 사소한 내용을 말하더라도 대단하게 받아들여 주는 신자분들이 있기에 감사합니다. 이러한 반성 가운데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열정입니다. 얼마나 진심으로 강의를 준비하였는지,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내 삶의 이야기로 다가갔는지, 그리고 최선을 다하였는지 되돌아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은 한없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정의를 부르짖으며 옳은 일에 나서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 행하려는 노력들이 부끄럽고 어색할 때가 많습니다. 다른 이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판단할지 의심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가르치시는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그분처럼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겨 드리고 의지하는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때로는 사람들 앞에서 선포하고 외치는 것이 오지랖이 넓은 것 같고 어색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외면하고 숨고 피하며 살아갑니다.
주님께 맡기는 삶은 우리의 두려움을, 어색함과 창피함을, 그리고 나약함과 죄스러움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그 봉헌으로 더 많이 채워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오로지 사랑과 열정만 있으면 됩니다.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살아가고 싶은 바람과 희망만 있다면, 우리의 삶을 통하여,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그분께서는 세상 속에서 당신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 자신이 귀한 존재임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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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주가톨릭평화신문에 ‘평화 책꽂이’라는 지면이 있습니다. 오늘은 지난 6월 13일에 소개된 ‘사라예보의 첼리스트(The Cellist of Sarajevo)'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내전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갔습니다. 22명이 죽은 자리에서 첼리스트는 22일간 첼로를 연주하기로 합니다. 첼리스트가 연주를 한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도 아닙니다. 첼리스트가 연주를 한다고 해서 전쟁이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첼리스트의 연주는 전쟁의 참상 속에서도 인간의 품격과 인간의 가치를 느낄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저격수였던 여성은 첼리스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더 이상 무고한 사람을 죽이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노인의 물병을 더 이상 가져다주지 않기로 했던 청년은 첼리스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노인을 위해 물병을 가져다주기로 합니다. 특종을 내기 위해서 죽어가는 사람을 카메라에 담으려했던 기자는 첼리스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사진 찍기를 포기합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도와줍니다. 1992년 5월 27일부터 22일간 첼리스트 Vedran Smailovic는 목숨을 걸고 사람들이 죽어간 곳에서 연주를 했다고 합니다.
예전에 보았던 ‘타이타닉’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기억납니다. 이제 곧 배는 깊은 바다 속으로 침몰하게 됩니다. 악단은 마지막 한 사람이 구명정에 오를 때까지 음악을 연주하였습니다.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의 선한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배가 침몰하는 혼돈의 상황입니다. 구명정에 오르지 못한 사람은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엄혹한 현실입니다. 절망하고, 현실을 부정하고, 누군가를 원망하면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쉬움과 그리움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세상을 떠나는 이들에게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해 주었습니다. 예전에 함석헌 선생님은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만리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신앙이란 바로 ‘그 사람’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모습을 많이 닮았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돈을 받고 상인들에게 팔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유다는 예수님을 율법학자와 대사제들에게 돈을 받고 팔았습니다. 요셉은 유혹을 받았지만 이겨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유혹을 받았지만 이겨내셨습니다. 요셉은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감옥에 갇혔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요셉은 굶주린 사람들을 배불리 먹게 하였습니다. 가족들을 이집트 땅으로 데려와 편히 살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팔아넘겼던 형제들을 용서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하느님께 이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청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용서하셨습니다. 평화를 빌어 주셨고, 성령을 주셨습니다.
신앙이란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도 첼로를 연주했던 것처럼, 침몰하는 배위에서도 음악을 연주했던 것처럼 지치고 힘든 사람에게 ‘그 사람’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요셉이 자신을 버렸던 형제들을 용서했던 것처럼, 나에게 잘못한 이를 기쁜 마음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육신을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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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동일한 운명과 생명의 공동체>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의 반대를 받은 이유는,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더 좋아하는 세상이 진리와 봉사와 사랑을 피력하는 복음의 근본정신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원래 세상, 또는 세속의 본성이 그렇다. 그러므로 세상은 복음에 무관심과 적대심을 표하게 되고, 무관심은 독선을 조장하고 적대심은 박해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박해를 피하는 길은 복음을 등지고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과 흥정을 벌이고 급기야 타협할 수 있을지 모르나 복음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과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면 예수의 운명을 복음선포자의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복음선포자는 다양한 형태의 박해를 각오해야 하며, 실제로 그 길을 걸어야 한다. 하지만 그 길에는 성령께서 선포자를 동반하실 것이고, 그 길 끝에는 천상의 월계관이 선포자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오늘의 복음말씀은 실제적 박해상황 속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님께 끝까지 항구할 것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루카복음에서와는(6,40) 약간 다른 맥락으로 기록된 “제자가 스승보다 더 높을 수 없고 종이 주인보다 더 높을 수 없으며, 제자가 스승만 해지고 종이 주인만 해지면 그것으로 넉넉하다.”(24-25절)는 말씀은 복음선포자가 예수님보다 더 나은 팔자를 기대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께서 베엘제불(마귀두목)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9,34) 모함을 받았으니, 복음선포자도 같은 모함을 받을 것이라는 말이다.(25b절)
결국 예수님과 복음선포자,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은 철저하게 같은 팔자며 운명이다. 이는 사도 바오로가 그토록 강조하는 그리스도와 세례 받은 자의 운명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공동체는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께서 이루시는 성삼, 하느님의 생명공동체에로 질서 지워진다.
그러므로 복음선포자가 두려워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세 번씩이나 박해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고하신다.(26.28.31절)
두려워해야 할 것이 있다면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28절) 하느님이시다. 그러나 하느님을 두려워함은 지혜의 시작이 아니겠는가?(집회 1,14)
따라서 복음선포자는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으로부터 은밀히 배운 모든 것을 아무 거리낌이나 두려움 없이 공공연히 선포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상황이 요구한다면 목숨까지 내어놓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사람의 목숨도 아무 값없이 그저 바쳐지는 경우는 없다. 그래서 어떤 순교도 순교자 안에 거처하시는 성령의 활동이 아닌 것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공중을 날고 있는 하찮은 참새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땅에 떨어지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29절)
하느님께서는 복음선포자를 이런 참새보다도 훨씬 귀하게 여기시며, 각각의 머리카락을 낱낱이 세어두실 정도로 심혈을 기울여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30-31절)
예수님 때문에, 그리고 복음 때문에 당해야 하는 박해 앞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지에 대한 명확한 답은 사실상 없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이 극한 박해에 직면하여 있지는 않다. 그러나 미소한 손해에서부터 목숨까지 내어놓아야 하는 다양한 형태의 박해 상황은 언제나 존재한다.
분명한 것은 지금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 어떠한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취한 태도만큼 그분으로부터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는 곧 복음선포자와 예수님 사이에 종말론적인 ‘동태보상률’이 적용됨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모든 복음선포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고,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하겠다.”(32-33절; 마르 8,38; 루카 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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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요셉이 용서하고 화해하였지만 형제들은 요셉의 진심을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버지 핑계를 대며 자신들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자신들이 요셉의 종이라며 엎드리기도 합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진정으로 반성하는 모습이 아니라 죽음이 두려워 갈팡질팡하는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요셉은 가슴 아파하며 웁니다. 그리고 다시금 형제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어 주셨으니, 자신도 그들에게 더 이상 잘못을 묻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요셉은 모든 형제와 그 아이들도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말합니다. 시간이 지난 뒤 요셉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면서 형제들에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을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때 여기서 내 유골을 가지고 올라가십시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를(창세기 15장 13절-16절 참조) 반드시 이루실 그때 자신도 약속된 땅에 묻히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요셉의 간청에 따라 약속이 이루어져 이집트를 떠나는 날,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나와 (탈출 13,19 참조) 스켐에 묻습니다.(여호수아 예언서 24장 32절 참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실, 하느님을 증언하며 살다 보면 사람들의 미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당신을 증언하라고 권고하십니다.
그러면 요셉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숨겨져 있던 구원을 직접 보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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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우종선 라우렌시오 신부님]
<우리가 진정 두려워 할 분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격려와 함께 의무감을 심어주고 계십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위험이 있을 때 슬기와 여유롭게 대처하면서, 박해가 너무 심할때 때를 기다리면서 잠깐 옆 동네로 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는 아주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육신만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정작 두려워 할 분은 '육신과 영혼을 함께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 즉 하느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동시에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모든 것, 머리카락의 수도 알고 계시는 분께서 멸망시키실 리가 없기에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청취자 여러분, 복음을 증거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까? 믿음이 부족한 탓입니까?
좀 더 물질적으로 잘 살려고 하는 욕심 때문입니까? 귀찮아서 입니까? 시간과 경제적인 제약 때문입니까? 내 것을 포기하고 희생, 봉사하는 것이 힘들어서 입니까? 영원한 생명에 대한 구원에 대한 관심이 아직은 없어서 입니까?
사실 이 모두가 장애가 되겠지요. 그러나 더 큰 장애물은 '사람'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다른 사람의 반응에 너무나 민감한 나머지 눈치를 보고만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복음을 증거 하는데 필요한 첫 번째 요소는 바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디에서든 식사나 음식을 섭취할 때 항상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하고 성호를 그어야 합니다. 형제님들 같은 경우는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실 때, 호프집에서 맥주를 마실 때, 그 외 어느 술자리에서든 술을 마실 때 항상 성호를 그어야 합니다.
식사 전 기도를 한다면 더욱 좋고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라는 것을 밝혀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멈칫거리기도 하고 그냥 지나쳐 버리기도 합니다. '신앙인'이라는 것이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요.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그렇게나 부끄럽고, 창피스러우십니까?
먼저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을 떳떳이 드러내야 합니다. 당연히 언행이 따라 주어야만 가능하겠지만요. 그런 다음에 복음을 증언해야 하는데 이에도 문제가 따릅니다.
교회 안의 한 사람으로서 올바른 일을 해도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눈총이 너무나 따갑고, 그들의 시기, 질투로 다시는 맡은 일을, 바른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충실히 이행하는 사람은 별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믿음보다는 자신의 욕심에 가득 찬 사람은 함부로 말을 하고 전함으로써 복음을 전하는 것을 방해하고 더 나아가 되돌릴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안겨주기도 합니다.
이외에도 신앙심이 없어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간섭이나 방해요소로 인한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 의해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짜증나기도 하고 힘들고 피곤해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극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하는 우리들 뒤에는 주님께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시고 후원자가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증거하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그러나 혹시 '나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두렵게 하고는 있지 않는가?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봐야 하겠습니다.
옛부터 상식 이하나 인간답지 못한 사람을 두고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라는 말을 써 왔습니다. 신앙인이 아니라도 하늘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살아왔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을 갖고 살아갑니다. 희망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주권자이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늘나라에 관한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의무인 것입니다.
의무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의무에는 분명히 책임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모른다'라고 하시며 외면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희망도 포기해야만 합니다. 한정적으로 우리를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하는 '사람' 때문에 꿈과 희망을 포기하거나 의무를 소홀히 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박해하는 사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우리의 전부를 육신과 영혼까지도 멸망시킬 수 있는 하느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면서 하느님께 자신을 의탁하며 꿈과 희망을 키워갑니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 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복음을 전하는 충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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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제자들을 격려해 주십니다.
곧 그 어떤 박해와 고난을 겪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당신께 대한 믿음과 의탁의 요청입니다.
사실, “두려움”의 원래 이유는 에덴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는 그들을 찾으시는 하느님께 말합니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 2,10)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숨은 이유가 사실, 아담의 말처럼 알몸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처벌하시는 분으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자비로우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원죄는 단지 금기사항을 위반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하느님의 모습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주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빼앗는 하느님, 자유보다 속박하는 하느님, 용서보다 처벌하는 하느님으로 왜곡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움의 반대는 용기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이 있는 호수 위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겁내지 마라.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이처럼, 불신이 두려움을 불러왔으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심은 곧 당신께 대한 믿음의 촉구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두셨을”(마태 10,30) 만큼 제자들을 소중히 여기시고 보살피고 돌보시는 하느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곧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두려움을 몰아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진정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신지를 밝히십니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이는 하느님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로지 주님만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러한 “주님을 두려워함”은 처벌에 대한 노예적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과 믿음을 지닌 ‘사랑의 두려움’입니다.
이를 <집회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계명을 지킨다.”(집회 2,15)
“주님을 두려워함이 주님을 사랑함의 시작이며, 주님에 대한 사랑의 시작은 믿음이다.”(집회 25,12)
그러니 오늘 <복음>에 세 번 나오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과 한 번 나오는 “두려워하여라.”는 말씀은 다 같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이 “믿음”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활동하시거나 우리를 박해나 고통으로부터 빼내주시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는 그 박해와 고통을 함께 견디어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고난으로부터 구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구해주시고, 고통으로부터 보호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보호해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십자가로부터 구원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속에서 구원하십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말합니다.
“예수님은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게 아니라 당신 자신이 오십니다. 당신 자신을 내어주심으로써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박해와 고통 속에서 동행하시는 그분을 만날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사랑하는 법을 배울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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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두려워하지 말라”(마태 10,31)
주님!
받아들여지지 않더라고 박해를 받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진리이신 당신께 희망을 두고,
주님이신 당신께 믿음을 두게 하소서!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두신 당신의 사랑으로 제 두려움을 몰아내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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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마태10,26)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고,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라.'고, 그러면 '예수님께서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지금 여기에 열세 번째 사도로 파견되어 있는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파견되어진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처럼 살고, 예수님처럼 너를 위해 죽는다는 것,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사실 이 두려움은 세상 것에 대한 두려움, 세상 것으로부터 오는 두려움입니다. 곧 내가 손해 보는 것에 대한 두려움, 내가 소외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내가 남들보다 뒤쳐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내가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두려움들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보내주신 성령을 받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담대하게 세상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수많은 성인성녀들과 수많은 순교자들이 또한 그들의 뒤를 따라갔고, 배교하라는 칼 앞에서 그들은 기쁘게 복음을 선택했고,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죽음 너머에 있는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번 주 평일 독서로 듣고 있는 창세기의 말씀은 요셉을 통해 이루신 하느님의 구원 업적에 관한 말씀입니다.
요셉은 '악을 선으로 바꾸신 하느님' 앞에서
자기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제 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을 찾아오셔서, 여러분을 이 땅에서 이끌어 내시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실 것입니다."(창세50,24)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를 향하여 힘차게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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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아! 좋다>
마태오 10,24-33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아! 좋다>
빛이
나를 태워
널리 비추네
아! 좋다
복음이
나를 울려
널리 퍼지네
아! 좋다
하느님이
나를 통해
널리 가시네
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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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는가?>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그러나 막상 위기가 닥치면 우리는 예수님께 믿음을 두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며 세속적인 방법을 택하기도 합니다. 미사를 봉헌하기에 앞서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고 귀하게 여기시는 예수님의 그 큰 사랑의 마음에 믿음을 두고 사랑의 삶으로써 그분을 안다는 것을 증언할 수 있는 은혜를 청하도록 합시다. 아울러 나는 세상의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 지? 혹은 사람들 앞에 예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도 진정한 사랑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 지? 그리고 나는 가족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은 아닌지 반성하며 주님의 자비를 청하도록 합시다.
찬미 예수님! 방금 들은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 번이나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여라”고 한 번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박해하는 자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십니다.
사실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찾아 옵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십자가의 수난 앞에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시며 두려움을 느끼셨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두려움을 이겨 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믿음이었습니다. 끝까지 자신을 지켜 주실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있었기에 두려움을 이기고 아버지의 뜻을 다르셨던 것입니다.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분들의 영웅적인 모습에 감동과 함께 작은 역경에도 두려움에 떨며 걱정하는 우리의 모습에 부끄러움이 밀려 오곤 합니다. 그런데 과연 모든 순교자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어떤 모진 박해도, 심지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마음을 가지셨을까요? 그들이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으로 용기를 내어 모진 박해를 견디어 낼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그들 역시 예수님처럼 하느님께서 끝까지 자신을 지켜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었을까요!
형제 자매 여러분, 비록 눈에 보이는 외적인 박해가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이지만, ‘가진 것을 잃어 버릴까?’ 혹은 ‘죽어서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무시하고 떠나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저희 어머니는 예전에 ‘죽어서 연옥에라도 가야할 텐데…’하며 걱정 섞인 말씀을 제게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연옥에라도 가면 천국에 갈 수 있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머니의 삶은 그 누구보다 아름답고 선하고 훌륭합니다. 이미 천국의 사랑을 나누며 사시는데 무엇을 두려워하고 걱정하셔요!”라고 위안을 드렸습니다.
사실 저희 명상의 집에 오시는 많은 교우분들은 참 열심히 사시는 분들이십니다. 매일 미사에 참례하고, 자식들 위해, 가족들 위해 기도하고, 교회와 사람을 위해 봉사와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십니다. 아픈 몸, 상처 난 마음을 기도와 미사로 주님 안에서 위안을 받고 매일매일 예수님의 영 안에서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들이지만, 때때로 뭔가 모를 두려움이 밀려 올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알리는 소식이나 갑작스런 사고나 병고 소식을 듣고 나면, 마음이 불안해지기도 하고, 지금 내가 불치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하면, 혹은 지금 내가 죽는다면 나는 과연 하느님 앞에 부끄럼 없이 갈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해 옵니다. 사랑하지 못했던 시간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지 못하고 스스로 뭔가를 하고자 발버둥치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 갑니다. 약한 믿음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세상에 타협하며 살았던 이기적이고 욕망에 가득 했던 부끄러운 시간들 속으로 빠져 들어 헤어나질 못할 때도 있습니다.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그래도 뭔가 모를 불안과 두려움이 밀려 오는 분이 계시다면 다음의 일화가 우리에게 큰 깨우침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안토니오라는 수사님은 오랜 세월 수도 생활을 하였습니다. 금욕과 고행으로 자신을 수행하고 기도와 단식의 삶을 살면 하느님께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나태해질 때에는 하느님의 진노와 지옥 불을 두려워하며 자신을 더 혹독하게 고행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던 그렇게 충실하게 살다 보니 자신의 마음 속에 ‘이제는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이 밀려 왔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낡은 자신의 구두를 고치기 위해 수선공에게 갔다. 그는 수선공에게 구두를 맡기며 “식구는 몇 명입니까?”하고 말을 걸었습니다.
“부모님과 아내와 아이들 6명 해서 모두 10명입니다.”
“구두를 수선하여 열 식구가 굶지 않을 수 있습니까?”
수선공은 잠시 생각하다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다만 사람들의 신발이 편안하도록 수선할 뿐입니다.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채워 주시겠지요.”
안토니오 수사는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다시 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그동안 언제나 열심히 살아가고 최선을 다 한다면 시간이 흘러 좋은 수도자가 될 것이라고 착각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지 못한다면, 진정 믿음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의 수고와 열심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안토니오 수사님은 내가 열심히 했기에 좋은 수도자가 되었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하느님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그렇게 살았던 것입니다. 이 체험 이후로 그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 드리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고행보다는 사랑을 나누고, 사람들 마음 속에 두려움 대신 평화를 심어 주는 수도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자매 형제 여러분, 우리는 때때로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너무 강해,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잊을 때가 있습니다. 그 반대로 자비로운 하느님만을 생각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로 오만과 교만으로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우리를 너무도 귀하게 여기시며 사랑으로 돌보시는 하느님의 더 큰 사랑을 잊은 채, 가진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기도 하고,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하기도 하고, 사람을 잃을까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제 스스로의 힘으로 열심히 사는 모습을 자랑하기 보다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 드리며 살아갑시다. 말보다는 사랑의 삶을 통해 세상에 하느님을 안다는 것을 증언하며 주님의 섭리에 의탁하도록 합시다.
우리를 끝까지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을 향한 믿음, 우리를 너무도 귀하게 여기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향한 믿음으로 마음의 두려움을 주님께 맡겨 드리도록 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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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옛날 어느 집에 질투가 심한 사람과 몹시 인색한 사람이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질투와 인색함은 서로 함께 잘 살도록 도움을 주었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예상대로 허구한 날 둘이 싸웠고, 이 점을 마을 사람 모두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임금이 이 둘을 화해시키려고 불러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원하는 것을 내가 모두 들어주마. 그런데 먼저 청하는 자에게는 하나를 주고, 나중에 청하면 그것의 두 배를 주겠다.”
이 둘은 어떻게 했을까요? 소원을 이야기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상대방이 두 배 얻는다는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상대방이 먼저 이야기하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기다려도 말을 하지 않자 임금은 질투가 심한 자에게 먼저 말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잠깐 머뭇거린 질투가 심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임금님께서는 제 눈 하나를 뽑아주십시오.” 먼저 말한 사람의 두 배를 상대방이 받는다는 말에, 자기의 눈 하나가 뽑히면 상대는 두 눈을 잃게 될 것으로 생각한 것이지요. 자기가 손해를 보더라도 남 좋은 꼴은 보지 못하겠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남의 이익을 보지 말고, 호의를 베풀어 준 임금을 봤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질투를 없애고 인색함도 줄여나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계속해서 남의 이익만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질투가 넘쳐나고 인색함이 멈추지 않게 됩니다.
우리도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것을 베풀어주신 주님의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질투와 인색함에서 벗어나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에 충만해질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을 배척하듯이 제자들을 배척할 사람들의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은 바로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질투와 인색함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사랑의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 주님의 보살핌을 계속해서 받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기에 두려움 없이 힘차게 복음을 전하면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는 주님의 호의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면 참 많은 보살핌을 받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밤에 잠자는 순간까지…. 단 한 순간도 주님의 보살핌이 없었던 적은 없습니다. 내가 가장 힘들다고 여겼던 그 순간에도 생각해 보면 주님께서 분명히 함께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에 세상의 모든 질투와 인색함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사랑 가득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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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길 원하십니까?>
어느 의사의 책을 읽다가 이런 내용을 읽었습니다. 바쁜 아침의 회진 시간에, 자신이 돌보는 유방암 환자가 물어보지도 않는 내용까지 계속 의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바쁘고 귀찮기도 했지만, 차마 이 말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지요. 이런 의사의 마음도 모르고 환자는 자기 집안의 일을 비롯한 병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환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선생님. 미안해요. 바쁜데 내가 너무 귀찮게 하지? 사실 선생님이 나를 암 환자로만 기억할까 봐 그래. 나야 선생님이 보는 수많은 환자 중 하나겠지만, 그냥 암 환자가 아니라 적어도 ‘재밌었던 아줌마’로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다른 이에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길 원하십니까? 몸이 아픈 사람? 돈만 밝히는 사람? 이기적인 사람?
아니지요. 아마 열심히 살았던 사람, 사랑을 실천한 사람, 주님 뜻에 맞게 산 사람 등등 긍정적 이미지로 기억되길 바랄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금 당장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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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참된 두려움>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 경외심은 다른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합니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 사울은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드나들며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계 유다인들은 사울을 없애 버리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서 평화를 누리며 굳건히 세워지고,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면서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효가 늘어갔습니다. 진정한 두려움은 주님을 차지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너는 매우 큰 상을 받을 것이다”(창세15,1)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도 “두려워 마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준다.”(이사 41,10)
“내 가르침을 마음속에 간직한 백성아, 사람들의 모욕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악담에 낙심하지 마라”(이사 51,7)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도 더 귀하다”(마태10,31)고 하셨고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고 하시며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8)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셔서 힘을 주신다는 것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전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할 때 예기치 않은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천상의 것은 서로를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기를 원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분명 ‘아니오’ 하고 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적인 힘도 천상 생명에 대한 우리의 희망을 파괴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수많은 참새보다 더 나를 귀하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드러나게도 부르시고, 때로는 침묵하시고, 때로는 어떤 일을 우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제 때에 그분의 뜻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응답은 좋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이 뒤 틀릴 때, 그때야말로 결단의 순간이고 신앙이 증거 되어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사랑이시고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마르 8,38) 주님께서는 우리의 힘이시니 주님을 경외하고 세상 것에 두려워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은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설 때 ‘잘 왔다. 그간 내 뜻대로 살았으니 이제 편히 쉬어라.’ 는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까? 아니면, ‘너는 아무래도 잘못 온 것 같다. 좀 더 단련을 받아야 하겠는 걸?’ 하는 말씀을 들어야 하겠습니까? 주변 사람에게 원성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랑과 봉사의 삶으로 이웃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으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주님을 증거 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세례명을 받은 선택받은 신앙인의 품위를 지켜 주님과 하느님 아버지 앞에 당당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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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두려워하지 마라>
-주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신다-
엊저녁의 감동도 잊지 못합니다. 저녁 기도 전 수도원 경내 성모님상 배경의 소나무를 전지하는 형제를 보았는데 기도를 끝내고 났을 때도 온갖 정성을 다해 전지 중이었고, 저녁 식사후도 이어 끝기도후 어둑어둑 할 때까지 묵묵히 전지하고 있는 형제였습니다.
무려 3시간 이상을 쉼없이 말없이 거기 그 자리에서 몰아沒我의 경지에서 전지에 몰두沒頭하고 있는 박응표 세례자 요한 형제였습니다. 모습 자체가 예술이라 사진에 담았습니다. 아니 오전부터 시작한 수도원 정원 전지였으니 하루종일 품삯도 없이 사랑으로 봉사한 형제였습니다. 참으로 수도원을, 하느님을 사랑하는 형제입니다. 그대로 주님 사랑의 현존같은 분입니다.
-“늘
거기
그 자리에 있어도
참
좋다
새롭다
아름답다
당신이
바로
그렇다”-
얼마 전에 써놓은 시가 생각납니다. 넉넉한 공간을 마련하여 시를 쓰니 참 좋습니다. 하느님은 바로 넉넉한 사랑의 내적 공간 자체이십니다. ‘당신이 바로 그렇다’, 당신이 지칭하는 바, 바로 늘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이십니다. 매일 하루에도 수없이 바라보는 하늘과 산입니다. 아주 예전의 시도 생각납니다.
“당신이
그리울 때
당신이
보고 싶을 때
눈을 들어
하늘을 본다
한 눈 가득 들어오는
가슴 가득 안겨오는
푸른 하늘
흰 구름
빛나는 별들
한 눈 가득 들어오는
가슴 가득 안겨오는
그리운 당신
보고 싶은 당신”-1998.11.22
아마 저보다 하늘과 산을 많이 바라보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늘 거기 그 자리에 있어도 늘 새롭고 좋은 하늘과 산입니다. 수도원 십자로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예수성심상도 바로 그러합니다. 이들 모두가 상징하는 바 주님이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성심상을 받치고 있는 바위판에 새겨져 있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그분 앞에서 늘 거기 그 자리에서 그분 발치에 엎드려 기도하는 모습의 남자 모습의 바위 형상은 바라볼 때 마다 늘 새로운 감동입니다.
오늘 제1독서 창세기에서 형제들을 다정히 위로하는 요셉의 모습이 감동입니다. 참으로 하느님다운 모습입니다. 얼마나 하느님과 깊은 일치의 관계에 있는지 깨닫습니다. 흡사 예수님의 모습을, 하느님의 모습을 대하는 느낌입니다. 두려움의 그늘이 완전히 사라진 모습입니다.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하느님의 자리에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아이들을 부양하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거듭 말하며 형제들의 불안한 마음을 다독이는 대인군자大人君子 요셉입니다. 그대로 너그럽고 자비롭기가 하느님을 닮은 요셉입니다.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과제입니다. 문제는,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문제요 적입니다. 남을 탓할 것이 아니라 부단히 나를 탓하며 부단한 자아초월自我超越을 통해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 답입니다. 하느님은 참 좋으신 분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할 때 하느님은 당신 최상의 방법으로 우리를 참 좋게 인도해 주실 것이니 추호도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형제들의 내적 수준을 한없이 능가하여 하느님을 많이도 닮은 요셉입니다. 같은 형제들이라도 주님과 관계의 깊이는 천지차이입니다. 그러니 궁극의 답은 단 하나, 주님을 날로 닮아가는 것뿐입니다. 근원적 두려움에 대한 답도 이 하나뿐입니다. 주님을 닮아 사랑과 겸손이 날로 깊어질 때 저절로 두려움은 사라지고 해소解消되는 문제들입니다.
이렇게 깊이 하느님과 일치되어 살았기에 편안한 선종善終입니다. 오늘 창세기는 야곱에 이어 요셉의 죽음 장면도 참 인상적입니다. 파란만장한 삶중에도 천수天壽를 누리고 주님께 돌아가는 두 분의 유언입니다. 잘 살았기에 선종의 죽음입니다.
“나는 이제 선조들 곁으로 간다. 나를 히타이트 사람 에프론의 밭에 있는 동굴에 조상들과 함께 묻어다오.”
에 이어지는 담담한 야곱의 유언입니다. 죽음을 앞둔 요셉의 유언도 참 자연스럽고 아름답고 거룩합니다.
“나는 이제 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을 찾아오셔서, 여러분을 이땅에서 이끌어 내시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실 것입니다.”
정말 하느님의 꿈쟁이 요셉입니다. 장차 있게될 미래의 꿈도 보여주며 편안히 죽음을 맞이하는 요셉입니다. 이런 창세기의 주인공, 요셉을 닮은 아니 요셉을 능가하는 오늘 복음의 주인공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궁극 목표이자 삶의 잣대는 주 예수님뿐입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바로 예수님을 궁극목표이자 우리 삶의 잣대로, 중심으로, 방향으로, 의미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필생의 과제가 이런 예수님을 사랑하여 알아가고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해결의 답도 이런 예수님뿐입니다. 우리의 두려움과 불안을 말끔히 불식시켜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예수님 아니곤 어디서 누구한테 이런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겠는지요.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입니다.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하느님의 뜻은 아니어도, 하느님의 허락없이 일어나는 우연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느님 섭리의 수중을 벗어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정말 두려워할 것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영혼의 죽음입니다. 살아있어도 주님으로부터 떠나 고립단절의 삶을 자초하여 사는 이들은 살아있어도 실상 영혼이 죽은 이들이요, 육신은 죽었어도 주님과 함께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영혼들은 진짜 살아 있는 이들입니다.
세상에 하느님 아닌 누구도 우리 영혼을 다치지는 못합니다. 하느님의 수중에 있는 우리 영혼들입니다. 그러니 영혼을 멸망시킬 수 있는 하느님을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공포의 두려움이 아니라 경외의 두려움입니다. 정말 하느님을 떠남으로 스스로 자초하는 심판의 지옥을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참으로 하느님을 경외하여 두려워할 때, 하느님과 우리 영혼의 관계를 날로 깊이할 때 모든 두려움은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삶자체가 복음 선포요 증언자의 삶일 것입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입니다. 그러니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하느님만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며, 삶자체로 복음을 선포하며 주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참 행복과 기쁨과 평화도 바로 이런 삶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오늘도 사랑의 주님을 증언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거룩하신 그 이름 자랑하여라.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시편105,3-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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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진정한 두려움을 이야기하십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미움과 박해는 기정 사실이고 예견된 미래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베엘제불이라 손가락질했다면 그 제자들을 어떻게 대할지 불보듯 뻔하니까요.
그들은 그렇다 치고, 그렇다면 제자들은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까요? 인간적으로야 당연히 두렵고 불쾌하기까지 하겠지요. 아무리 선하고 진실하게 다가가도 상대가 곡해해서 반응하고 베엘제불 일당으로 몰아세운다면 답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것이 예수님의 해답입니다. 왜냐하면 피조물로서 갖는 진정한 두려움은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경외심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껏해야 육적인 생명과 안위 정도를 좌지우지하는 존재가 진정한 경외심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제1독서에서 요셉이 형들에게 하는 말 안에 이 점이 잘 드러납니다.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하느님의 자리에라도 있다는 말입니까?"(창세 50,19)
야곱이 죽은 뒤 형들은 과거 요셉에게 저지른 잘못에 대해 보복을 당할까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유언이라며 요셉에게 용서를 구하고 스스로를 아우의 종이라 칭하지요. 이미 용서와 화해가 오간 일이었음에도 가해자의 영혼은 여전히 두려움에 빠져 있습니다.
요셉의 쿨한 답변에서 그의 깊은 신앙적 면모가 드러납니다. 그는 하느님만이 두려움의 대상이어야 함을 잘 알고 있지요. 비록 자기에게 못할 짓을 한 형들이어도, 그들이 꾸민 악을 선으로 바꾸신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라면 함부로 앙갚음하지 않습니다. 갚으실 수 있는 분은 주님뿐이니까요.
형들은 요셉의 육적 생명에 해를 가했지만 영혼까지 해치지는 못했습니다. 만일 그가 스스로 버림받은 데 대한 상처와 분노에 사로잡혀 칼을 갈면서 제 영혼을 갉아먹었다면 사정이 달랐겠지만, 요셉은 어떤 고난과 시련 한가운데서도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순수하고 진실하게 영혼을 지켰습니다.
요셉은 '인간에게 당한 악을 하느님께서 선으로 바꾸어 주실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반드시 이스라엘을 찾아오셔서 약속의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실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이야말로 하느님과 친밀하고 충실한 관계 안에 있는 영혼의 통찰일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 10,31)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십니다. 사람이나 이념, 제도, 형벌은 두려움이 대상이 되지 못하지요.
그런데 그분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경험으로 아시겠지만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늘 약자가 됩니다. 사랑하기에 받아들여 주고 사랑하기에 믿어 주지요. 사랑하기에 져 주고 사랑하기에 내어 줍니다. 거창하게 신앙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우리는 가족과 이웃에게 본능적으로 그렇게 하면서 성장해 왔습니다.
순진무구한 아기처럼 주저없이 거침없이 하느님 아버지께 달려가 영혼을 던지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오직 한 분, 그분은 우리 앞에 늘 활짝 열린 "사랑"이십니다.
코로나19 대응 단계가 격상되어 다음주부터는 대면 미사가 어렵다고 합니다. 다시 영상을 통한 비대면 미사로나마 성체를 모시지 못하는 영혼의 허기를 달래야겠네요. 앞뒤 꽉 막힌 것 같은 힘겨운 상황이지만, 믿음과 인내로써 영혼의 아름다움을 간직하시길 기원합니다. 말씀과 함께 주님 안에 머물러 이 고통의 시기를 건너고 있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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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ZDjHBSf0ScU&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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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 10, 31)
우리를
흔들어
깨우는
소중함의
시간이다.
소중함이
사랑이다.
소중하고
귀한
우리들이다.
더 귀하게
만드시는
하느님 사랑이
또 우리를
비춘다.
그냥
사람이
아니다.
사랑받는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영원한
소중함으로
우리와
함께하신다.
사랑받는
소중한 관계는
살아야 할
우리 삶의
가장 아름다운
이유이다.
소중함이
깊어갈수록
사랑도
깊어간다.
소중한 존재로
변화시키시는
소중함의
하느님이시다.
이 순간이
소중한
순간이다.
기도는
소중함을
되찾는 은총의
체험이다.
소중한
하느님의
자녀들은
기도로
걱정을
맡겨드린다.
소중함으로
제일 중요한
하느님을
알게 된다.
서로를
소중함으로
바꾸어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더 귀한 사랑을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것이다.
사랑은
소중함으로
완성된다.
소중함이
더 귀한
우리 삶의
정체성이다.
소중함은
소중함으로
관계를
확장된다.
소중하기에
삶은 하느님의
은총이다.
아픔을
치유하는
소중함이다.
소중한
오늘이
주어졌다.
소중함을
봉헌한다.
++++++++++++++++++
(2)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마태 10, 31)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귀하고 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으로
무엇이 더 귀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보살핌 속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의
시간입니다.
인간의 두려움과
하느님의 소중함
사이에서 다시
하느님의 소중함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십니다.
소중한 생명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귀하기에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소중한 관계입니다.
소중한 생명의
시간에서 다시금
우리가 누군지를
알게 됩니다.
잘나고 못난 것을
따지는 것은 사람이지만
하느님께서는 모두가
귀하고 귀한 존재임을
가르쳐주십니다.
우리 하나 하나를
소중하게 기억하시는
하느님께 우리의
두려움을 봉헌합니다.
하느님과 함께
두려움의 길이 아니라
소중함의 길을 오늘도
걸어가고 있습니다.
삶의 의미는
소중함의 의미입니다.
무엇이 더 소중하고
더 귀한 것인지요.
사랑의 마음과
사랑의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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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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