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온양제일교회 서성열 목사님의 글(논문 요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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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農)적 삶과 농(農)사상
"농적 삶을 위한 사유”
영남대학교 대학원, 2019
* 이 글은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바탕으로 한 단행본의 내용 일부를 발췌하여 편집한 것이다. 주석은 가급적 생략했다. 서성열, 『농적 삶을 위한 사유』(좋은땅, 2021).
1. 2020년 여름 장마는 기록적인 호우를 뿌리며 곳곳에서 물난리와 산사태를 일으켰다. 그해 8월 9일 기준, 장마로 인한 사망자만 38명이고, 실종도 12명이나 되었다. 역대 최장인 그 장마는 기후 위기의 서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기후변화의 영향은 장마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를 ‘집콕’ 하게 만든 코로나19도 기후변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많은 학자들은 생태학적 위기가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을 일으켰다고 언급하며 이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으로 근대 산업문명과 라이프스타일의 전환을 말한다.
특히 우리의 식생활 중 기후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공장식 축산과 산업화된 농업이라고 할 수 있다. 진화생물학자 롭 월러스(Rob Wallace)는 코로나19 위기의 구조적 원인을 다국적 기업의 식량 생산 체계와 산업농이라고 지적하며, 이러한 농기업은 오랜 기간 진화한 삼림 생태계를 파괴하면서 새로운 질병이 생겨날 조건을 만들어낸다고 진단했다. 따라서 위험한 병원체가 애초에 등장하지 않도록 생산 및 공급 체계를 재편해야 한다고 언급하며 건강한 먹거리를 길러내는 땅과 소농을 보호할 생태농업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2020년 6월 25일에 소천한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 또한 근대 산업문명의 대안으로 농적(農的) 삶과 농적 순환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끊임없이 주장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비상사태는 생명의 순환, 농적 순환이 잘 안 되어 빚어진 것이다. 땅(지구)의 고통은 기후의 역습, 그리고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으로 우리를 엄습해오고 있다. 나의 논문은 이러한 비상상황에서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을 성찰하며 농적 삶을 제안한다.
오늘날의 지구 환경 파괴와 인류 기아의 원인은 근원적으로 우리의 산업적 생활방식에 있다. 나는 그 대안으로 ‘생명농업에 토대를 둔 소농 중심의 마을공동체’에 기반한 삶, 혹은 이를 지지하는 삶을 제안한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농적 삶’(agrarian life)이라고 칭하고, ‘농적 삶을 위한 사유’(thinking for agrarian life)를 ‘농사상’(agrarianism), ‘농신학’(agrarian theology), ‘농철학’(agrarian philosophy)이라 부르고자 한다.
2. 나의 박사학위 논문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철학적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우리와 같은 북반구 도시민의 삶을 흔히 ‘산업적 생활방식’ 혹은 ‘근대적 문명생활’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생활방식은 남반구 사람들, 특히 소농(小農)의 희생에 기인한다. 독일의 국제정치학자 울리히 브란트(Ulrich brand)와 사회과학자 마르쿠스 비센(Markus Wissen)은 북반구 도시민의 삶을 ‘제국적 생활양식’(the imperial mode of living)이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남북 문제(north-south problem)가 포함되어 있다.
흔히 북반구는 잘사는 곳, 남반구는 못사는 곳으로 인식된다. 남반구는 단순히 지리적 용어가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불평등을 나타내는 말이다. 북반구의 식민지가 남반구이고, 북반구의 농촌은 북반구 도시의 식민지, 곧 북반구의 남반구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세계 식량 체계 속에서 북반구와 남반구의 소농들은 모두 고통을 당하고 있다. 하지만 헬레나 노르베지 호지(Helena Norberg-Hodge)의 말처럼, 북반구 소농의 위태로운 삶은 남반구 소농의 고통스러운 삶에서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남반구와 북반구의 격차, 이 남북 문제를 문화인류학자이자 환경운동가 쓰지 신이치[한국명 이규(李珪)]는 수치로 우리에게 알려준다.
전 세계 인구 20%가 80%의 자연 자원을 소비하고, GDP의 86%, 이산화탄소 배출의 75%, 전화 회선의 74%를 점하고 있다. 특히 세계 인구의 5%를 차지하는 미국은 세계 자동차의 32%를 소유하고 있고, 이산화탄소의 22%를 배출하며, 전 세계에서 수확되는 옥수수의 4분의 1을 가축 사료로 소비하고 있다. 1940년까지 인류가 사용한 것과 동일한 양의 광물 자원을 미국인이 지난 60년 동안 소비했다. 미국인 1인당 방글라데시인 168명 분에 해당하는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다. 지구상의 인간 모두가 북미인의 라이프스타일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지구 4개가 필요하다고 한다.1
위의 자료에서 볼 수 있듯이 “북미인의 라이프스타일”은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쓰지 신이치는 산업적 생활방식의 대안으로 ‘슬로 라이프’(slow life)를 제안한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슬로 라이프’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는지를 독자에게 묻는다.
‘슬로 라이프’라는 말에서 무엇을 떠올리십니까? 주말 강 낚시, 바다가 보이는 집, 집에서 직접 만든 요리, 오후의 낮잠, 텃밭이 있는 생활, 깨끗한 물과 공기, 에코 하우스, 채식, 친구들과의 잡담, 정원 가꾸기, 일요 목공, 아침 산책, 아이 키우기, 비폭력과 평화···.2
이러한 삶의 내용들은 북반구 도시민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만한 것들이고, 텔레비전을 틀면 나오는 여러 프로그램의 소재가 되는 것들이다. 쓰지 신이치도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듯이 ‘슬로 라이프’, ‘웰빙’, ‘자연주의’ 등을 표방하는 초국적 기업의 상품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북반구 도시민들이 선호하는 ‘여유로운 전원생활과 주말의 아웃도어 라이프’의 실상 또한 대량생산과 소비를 부추기는 경제체제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요즘 매스컴에서 자주 등장하는 용어들이 있다. ‘소확행’(小確幸/일본: 일상의 작지만 확실한 행복), ‘휘게’(hygge/덴마크: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소박하고 여유로운 삶), ‘라곰’(lagom/스웨덴: 소박하고 균형 잡힌 생활), ‘오캄’(au calme/프랑스: 여유롭고 편안한 삶) 등으로 상징되는 라이프스타일의 유행은 생태학적 위기의 시대에 땅에 뿌리내리지 못한 삶에서 오는 고통과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라이프스타일은 생태주의, 생태적 삶이라는 보다 큰 흐름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북반구 도시민이 생태적 삶을 추구한다고 할 때, 가장 우선적으로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은 ‘농(農)-농업·농민·농촌’이다. 특히 우리 시대 가장 고통받는 남반구 소농의 삶에 대한 분명한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쓰지 신이치는 북반구 도시민들에게 생태적 삶을 위해 하나하나씩 뺄셈을 시작하자고 한다. 하지만 남반구 소농들에게 더 이상 자신의 삶에서 뺄 것이 있기나 할까? 북반구 도시민들이 ‘슬로 라이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떠올릴 만한 삶의 내용들을 생존의 위기에 처한 남반구 소농들도 떠올릴 수 있을까? ‘생태적 삶’, ‘자연친화적 삶’, ‘자연주의적 삶’, ‘친환경적 삶’이라는 단어를 우리가 들었을 때 남반구 소농의 고통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오늘날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 그리고 인류의 기아와 빈곤 문제는 남반구 소농의 삶에 집약되어 있다. 소농의 삶을 말하지 않는 생태주의는 이미 자본에 잠식된 개념과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자와 신학자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좋은 삶(good life)을 제시해 줄 의무와 책임이 있다. 그리고 그 삶(행위)은 칸트의 말처럼 보편성을 가져야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북반구 도시민의 삶은 남반구 소농의 희생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기에, 북반구의 입장에서 말하는 좋은 삶은 보편성을 획득하기 어렵다고 볼 수 있다.
김종철은 서구 산업주의 문명의 확대로 인해 가장 고통받고 있는 이들이 제3세계 민중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고통에는 산업문명의 비인간성, 반생명성 그리고 파괴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따라서 오늘날 산업적 생활방식을 거부하고 인간 생존의 근원적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제3세계 민중의 입장이 가장 중요하다.
도쿄대학 명예교수 오가와 하루히사(小川晴久)는 근대 일본의 실학이 한국을 식민지로 수탈하는 부도덕성을 보여주었고 이에 대한 반성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도덕성을 지닌 실학 개념의 구축을 언급하면서 일본이 착취해왔던 제3세계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두 학자 모두 생태학적 위기의 시대에 새로운 삶의 방식이 요구되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에 대한 상상력을 제3세계로부터 얻을 수 있다고 역설한다. 나는 두 학자의 의견에 공감하며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남반구 소농의 삶(입장)이 새로운 생활방식의 원천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독교 신학에서도 하나님의 보편성은 지구촌에서 가장 고통받는 이들의 하나님, 히브리 노예들의 하나님이 되실 때 드러난다. 그러므로 남반구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가는 소농의 입장에서의 좋은 삶이 지구촌에 사는 모두에게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껏 북반구의 산업적 생활방식을 근대적 문명생활이라 치켜세우며, 그렇게 살지 못하는 남반구의 삶을 ‘후진적’이라고, 심지어 ‘미개하다’고 경멸해왔다. 하지만 하버드대학교의 뚜웨이밍(杜維明)은 세계적인 신학자 이워트 커즌스(Ewert Cousins)의 말을 빌려 생태학적 위기의 시대에 “우리의 예언자는 땅(지구)이며, 우리의 선생은 그 땅에서 대대로 살아온 사람”이라고 말한다. 우리 시대의 선생은 땅의 고통을 자신의 삶으로 드러내는 남반구 소농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남반구 소농의 저력에서 지구 환경 파괴와 인류 기아의 문제를 극복할 대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3. 나는 논문을 통해 우리 시대의 두 가지 과제인 인류 기아와 지구 환경 파괴가 남반구 소농의 고통스러운 삶에 고스란히 반영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남반구 소농의 고통에서 출발한 농적 삶은 북반구 도시민에게도 대안이 될 수 있음을 말하였다.
이러한 현실 인식의 토대 위에서 ‘농적 삶을 위한 사유(근거)’를 히브리 성서(기자)와 정도전(鄭道傳), 정조(正祖), 정약용(丁若鏞)을 통해 찾았다. 이들이 추구하고 실천하고자 했던 이상적 세계와 인간은 농적 삶을 대변하고, 보호하고, 지향하는 것이다.
지구(땅)와 인류의 존속을 위해서 우리는 ‘생명농업에 토대를 둔 소농 중심의 마을공동체의 삶’을 지향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농적 삶을 위한 히브리인과 조선인의 만남은 그리스도인이면서 한국인이고, 한국인이면서 그리스도인인 나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히브리인의 우주론과 인간론은 출애굽의 이상(理想), ‘농적 삶’을 위해 구축된 것이다. 그래서 온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은 농부로 묘사된다. 농부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땅을 경작하도록 하셨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농적 존재임을 선언한 것이다.
이집트에서 해방된 히브리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땅과 함께하는 삶, 거룩한 백성(聖民)의 삶을 하나님으로부터 요청받는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5-6)
히브리인에게 거룩한 삶은 무엇일까? 이 물음은 조선인에게도 중요하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이상을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라고 할 때, 히브리인과 조선인 둘 다 거룩함(聖)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이집트에서 노예였던 히브리인들은 땅 없는 삶을 살았다. 이집트에서 해방된 그들은 ‘약속의 땅’과 ‘땅이 있는 삶’을 하나님께 선물로 받았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요청한 삶은 약속의 땅에 걸맞은 거룩한 삶이고 이것이 그들에게 구원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주신 땅을 가꾸며 돌보는 자유농민의 삶, 농적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거룩한 백성의 자격은 조상 대대로 물려 내려온 땅을 가진 자를 말하며, 자신의 땅을 경작하는 자만이 법적 지위를 누릴 수 있고, 군대를 가거나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약속의 땅에 정착해서 사는 백성’은 ‘자영농민’(free peasant)이고 이들이 바로 거룩한 백성, ‘이스라엘’이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지파별, 가족별로 하나님이 인정하는 방식으로 토지를 분배받는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은 누구나 자기가 농사지을 땅을 얻는다는 것, 바로 토지권을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히브리인의 삶에서 토지권은 하나님의 거룩함(聖)이 드러나는 표징이라고 할 수 있다.
히브리인이 경작하는 토지는 가족, 친족을 통해 상속되고, 토지는 매매할 수 있는 상품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토지권은 히브리 소농(가족농)의 삶을 보호하고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히브리 지배층들은 가나안 땅에 살면서 토지를 상품으로 대하기 시작했고 토지를 매입해 대지주가 되었다. 그러면서 자유농민의 삶은 황폐해졌고,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비판적 지식인, 곧 예언자를 통해 소농의 입장을 철저하게 대변하였다.
조선시대의 비판적 지식인들도 자영농민의 대변자로 불렸다. 유학자들이 말하는 성인(聖人) 정치는 땅을 경작하는 농민이 땅을 소유해야 한다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는 자작농의 삶, 농적 삶을 보호하겠다는 뜻이고 성인 정치는 다름 아닌 농적 삶을 위한 것임을 말한다.
조선의 건국도 불타는 토지대장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중심에 삼봉 정도전이 있었다. 고려 말 백성들은 송곳 하나 꽂을 자기 땅이 없었다. 그래서 정도전은 고려의 토지대장을 몽땅 불살라버린 것이다. 『태조실록』에 보면 당시 민심이 사전(私田) 혁파로 인해 이성계에게 쏠리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정도전에 이르러 지주(地主)적 성리학이 자작농(自作農)의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농민(農民)적 성리학으로 발전했다. 성인이 되고자 했던 유학자들이 꿈꾸었던 세상은 자작농의 나라였다. 정약용도 자신의 시 〈미원은사가〉(薇源隱士歌)를 통해 유토피아의 중심에 자작농(미원에 사는 심씨)이 있음을 말하였다.
히브리 예언자들이 꿈꾸었던 세상도 이와 같다.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의 역사에서 최대 전성기를 누렸던 시대를 다시 꿈꾸는데, 바로 다윗과 솔로몬 시대였다. 히브리성서 열왕기상 4장 25절에서는 솔로몬의 시대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왕상 4:25)
열왕기 기자는 솔로몬 왕의 치세를 이스라엘의 백성 각자(각 가정)가 자급과 자치를 이루는 농적 삶으로 묘사한다. 히브리성서에 나타난 이상적인 왕, 이상적인 인간은 자유농민의 권리를 보호하고 지키는 존재다.
조선 후기 최대 전성기를 누렸던 정조 시대에는 여느 왕들보다 권농교서(勸農敎書)를 많이 내렸다. 정조는 스스로 ‘성왕’(聖王)이라고 자처했고, 그가 반포한 권농교서를 보면 옛 성왕들이 한결같이 농을 국정의 최우선 순위로 두었다고 반복해서 언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성인은 농사(전통·생명농업)가 잘 되게 하고, 농민(소농)을 잘살게 하는 사람이다.
철인군주 정조는 유가 철학의 중심 주제인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자신의 삶과 통치철학으로 보여준다. 정조는 농을 망치게 하는 자연재이(自然災異) 앞에 임금의 수랏상 반찬을 줄이는 감선(減膳)을 하며 자신의 도덕적 삶을 성찰하고, 기곡제(祈穀祭)를 통해 농사의 신 ‘신농’(神農)을 만난다.
정조가 신하와 유생들에게 나라의 정책 등에 관해 질문한 「책문」(策問)에도 농(農)에 관한 내용이 있다. 여기에 기록된 정조의 농에 관한 질문은 직접 농사를 지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정조는 천지인(天地人)의 삼재지도(三才之道)가 농을 통해 드러난다고 말한다. 따라서 유가의 이상적 인간 곧 성왕은 바로 농도(農道)를 실현하고 천지화육(天地化育)에 동참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생태학적 위기는 소농의 위기이자, 근원적으로 농적 경험의 상실에 기인한 것이다. 히브리인과 조선인의 삶과 사유는 농적 경험을 기반하고 농적 삶을 지향하고 있다. 더욱이 둘 다 농의 고통을 하나님(天), 자연(地), 인간(人)의 비통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히브리인과 조선인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성인)은 ‘농을 살리는 존재’이고, 그 존재가 만들어가고 꿈꾸는 세상은 ‘농을 살리는 세계’였다. 나는 남반구 소농의 삶의 자리에 히브리인과 조선인의 만남을 주선하였고, 누구보다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가는 남반구 농민들에게 이 만남이 작은 위안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북반구 도시민에게는 농적 삶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4. 글을 마무리하면서 내 뇌리를 끊임없이 지배하는 것은 지구촌 곳곳에 벌어지고 있는 소농들의 죽음이고, 그들의 몰락이다. 2003년 9월 10일 WTO(세계무역기구) 각료회의가 열린 멕시코 칸쿤에서 한국 농민 이경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죽기 전까지 손에 들고 있던 팻말에는 “WTO가 농민을 죽인다”라고 쓰여 있었다. 세계 무역 시스템에서 농업을 제외하라는 말이다. 김종철은 그의 죽음에 대한 한국 지식인들의 미온적 반응을 지적하며 이렇게 말한다.
농사란 결코 자본주의 체제 속의 단순한 산업의 일부가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이 지구상에서 사람답게 살면서 지속가능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거의 유일한 삶의 방식이라는 사실이다. 게다가 농사야말로 진정한 풀뿌리 민주주의의 성립에 필수적인 자립적, 자주적 생활방식을 보장하는 핵심적인 기반이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온갖 종류의 그럴듯한 사회적 이슈에는 시시콜콜 관여하면서도, 정작 인간생존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인 농사문제에는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다.3
내 논문은 농민 이경해의 죽음에 대한 철학적, 신학적 응답으로서 농적 삶을 위한 사유, 농사상을 전개해본 것이다. 그가 살고 싶었을 농적 삶은 신학과 철학, 문화와 예술, 정치와 경제보다 우선되는 인간의 근원적이며 궁극적 목표라고 할 수 있다.4 오늘날 농이 경시되는 풍조는 우리의 학문이 많이 왜곡되어 있음을 반증하며, 농의 파괴는 끝내 문명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 이경해는 죽으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매일 열 사람이 죽어가는 것보다
열 사람을 위해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
그가 말한 매일 죽어가는 열 사람은 한국 농민만이 아니다. 우리 문명의 토대인 지구와 땅을 일구는 지구촌 모든 소농의 비극적 상황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말이다. 그래서 그의 장례는 세계 농민장으로 치러졌고, 세계 농민들은 그를 가슴에 품고 “우리 모두가 이경해다!”라고 외쳤던 것이다.5
전라북도 장수 출신인 그는 내가 속한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장수교회의 교인이었다고 한다. 그의 유언은 나로 하여금 ‘농부 예수’6가 죽기 전에 남긴 말을 생각나게 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내 삶은 예수와 이경해의 말을 언급하기 부끄럽기 짝이 없다. 다만 바라기는 내 논문이 농이 천시되는 오늘의 현실에서 농의 가치를 알리며, 농적 삶을 실천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작은 용기와 힘이 되기를 바란다.
주(註)
1 쓰지 신이치, 김향 옮김, 『슬로 라이프』(디자인하우스, 2018), 178.
2 쓰지 신이치, 위의 책, 6.
3 김종철,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 녹색평론 서문집』(녹색평론사, 2008), 237-238.
4 박성원, “농부이신 하나님,” 「농촌과 목회」 21호(2004): 195. 박성원(경안대학원대학교 총장)은 “농업은 여하한 정치 체제나 문화적 차이나 경제적 능력이나 심지어는 종교적 교리보다도 우선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5 스테판 스미스(Stephen Smith)는 〈이경해를 위한 발라드〉(A Ballad for Lee Kyung Hae)라는 노래를 만들었다.
추석날 칸쿤에서 우리 곁을 떠나간 / 이경해에 대해 노래하려 한다네 / 그는 대한민국에서 홀연히 나타나 / 독사굴에 빠진 사람들을 구출했다네 // 드넓은 농토에서 탐스러운 열매들이 열리는 장수에서 / 철따라 눈과 서리가 내리는 산비탈 논밭에서 / 은행가들은 아무런 수확도 거둘 수 없다던 그 땅에서 / 그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수확을 거두어냈다네 // 쌀의 가치가 땅에 떨어진 바로 지금 / 그가 얻은 것이 널리널리 전파되도록 / 더 많은 사람들이 무리지어 그와 함께 땀 흘리며 살아가도록 / 농민의 땀방울이 얼마나 풍요로운지 배울 수 있도록 // 그러나 4분의 1 가격으로 바다 건너온 쌀의 홍수는 / 그를 무릎 꿇게 만들었고 / 20년 만에 300만 농민은 일자리를 잃게 되었으니 / 이경해 그 또한 머리를 움켜쥐게 되고 말았다네 // 그의 농토를 잃던 날, 그는 아내를 묻었으며 / 전국의 농민들이 자살을 택했다네 / 이제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이경해는 /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농민을 위한 목소리가 되기로 작정했다네 // 추석, 그의 농토를 빼앗은 은행가들이 모인 그날 / 이경해는 바리케이트를 넘어 자신의 삶을 불살랐다네 / 그의 자살 의식은 이 마지막 말을 남겼다네 / ‘열 사람을 위해 한 사람이 죽는 것이, / 매일 열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보다 낫다’고 - 피터 M. 로셋, 김영배 옮김, 『식량주권: 식량은 상품이 아니라 주권이다』(시대의창, 2008), 5.
6 예수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 존 도미니크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은 자신의 책 『역사적 예수』(The Historical Jesus)의 부제를 ‘지중해 지역의 한 유대인 농부의 생애’(The Life of a Mediterranean Jewish Peasant)로 달았다.
서성열|영남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농적 삶을 위한 사유』가 있다. 현재 부천의 고등학교에서 국제화(세계시민교육) 수업을 진행하며, 온양제일교회 교육목사로 고등부를 섬기고 있다. 1인 연구소 ‘농사상연구소’를 통해 농적 사유와 실천을 모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