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인 시인>>
<<김사인 시인의 양력>>
* 1956년 충북 보은 출생.
* 대전고, 서울대 국문과 졸업.
* 1981년 《시와 경제》동인으로 참여.
* 1982년 동인지 시와 경제 창간동인 참여.
* 동덕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국장(1996 ~).
* 스토리뱅크 편집위원(2000~).
* 제6회 신동엽창작기금 수상(1987).
* 제14회 대산문학상 시부문수상(2006).
* 제50회 현대문학상 시부문수상(2005).
* 시집 『밤에 쓰는 편지』, 『가만히 좋아하는』, 『어린 당나귀 곁에서』 등.
<<김사인 시인의 시>>
봄바다 / 김사인
구장집 마누라
방뎅이 커서
다라이만 했지
다라이만 했지
구장집 마누라는
젖통도 커서
헌 런닝구 앞이
묏등만 했지
묏등만 했지
그 낮잠 곁에 나도 따라
채송화처럼 눕고 싶었지
아득한 코골이 소리 속으로
사라지고 싶었지
미끈덩 인물도 좋은
구장집 셋째 아들로 환생해설랑
서울 가 부잣집 과부하고 배 맞추고 싶었지
내 고향동네/김사인
내 고향동네 썩 들어서면
첫째 집에는
큰아들은 백령도 가서 고기 잡고 작은아들은 사람 때려 징역에 들락달락
더 썩을 속도 없는 유씨네가 막걸리 판다
둘째 집에는
고등고시한다는 큰아들 뒷바라지에 속아 한살림 말아올리
고 밑에 애들은 다 국민학교만 끄을러 객지로 떠나보낸
문씨네 늙은 내외가 점방을 한다
셋째 집은
마누라 바람나서 내뺀 지 삼 년째인 홀아비네 칼판집
아직 앳된 맏딸이 제 남편 데리고 들어와서 술도 팔고 고기도 판다
넷째 집에는
일곱 동생 제금 내주랴 자식들 학비 대랴 등골이 빠져
키조차 작달막한 박대목네 내외가 면서기 지서 순경 하숙쳐서 산다
다섯째 집에는
서른 전에 혼자된 동네 누님 하나가 애들 둘 바라보며 가게를 하고
여섯째 집은
데모쟁이 대학생 아들놈 덕에 십 년은 땡겨 파싹 늙은 약방집 김씨 내외
옛 마을은 다 물 속으로 거꾸러지고
산날망 한귀퉁이로 쪼그라붙은
내 고향동네 휘둘러보면
하늘은 더 낮게 내려앉아 있고
무너지고 남은 부스러기들만 꺼칠하게 산다
헌 바지 저고리
삭막한 바람과 때없이 짖어대는 똥개 몇 마리가 산다
밤기차/김사인
모두 고개를 옆으로 떨구고 잠들어 있다.
왁자하던 입구 쪽 사내들도
턱 밑에 하나씩 그늘을 달고 묵묵히 건들거린다.
헤친 앞섭 사이로 런닝 목이 풀 죽은 배추잎 같다.
조심히 통로를 지나 승무원 사내는
보는 이 없는 객실에 대고
꾸벅 절하고 간다.
가끔은 이런 식의 영원도 있나 몰라.
다만 흘러가는 길고 긴 여행.
기차는 혼자 깨어서 간다.
얼비치는 불빛들 옆구리에 매달고
낙타처럼
무화과 피는 먼 곳 어디
누군가 하나는 깨어 있을까
기다리고 있을까 이 늙은 기차.
시를 쓰며 5/김사인
칼이 하나 있어야겠다
애꿎게 썩은 호박이나 쑤셔대는 그런 것 말고
만만한 닭모가지나 치는 그런 것 말고
서진룸싸롱 그런 식도 말고
당당하고 총명한 칼 한 자루
산맥과 같이 장하고 깊은 강의 설움으로 오래 벼린
뜨겁고 눈빛 맑은 칼 한 자루
누구 있어 저 침묵의 하늘
써억 배 가르리
새 빛 속에 제 몸 버텨 세우리
칼에 대하여/김사인
사람이 통째로 칼이 되기도 한다.
한이 쌓이면 증오가 엉기면
퍼렇게 날 선 칼이 된다.
나중에는 날이다 뭐다 할 것도 없이
아무것도 아닌 것같이 된다.
살은 거멓게 타고 마르고
눈에는 핏발이 오른 뒤
그것도 지치면 차라리 누레지는 것이다.
악물고 악물어 어금니가 주저앉고
밥도 잊고 잠도 잊고 나면
칼이 된다.
입은 웃는 것처럼 잇바디가 드러나고
한기가 피식피식 웃음처럼 새는 것이다.
무딘 듯 누더기인 듯 온몸이 서는 것이다.
한두십년에 오지 않는다.
진펄에 멍석말이로 뒹굴며
피떡이 되어 이백년 삼백년
비로소 칼이 서는 것이다.
꺼먼 칼이 되는 것이다.
김남주가 그랬다.
내곡동 블루스/김사인
국정원은 내곡동에 있고
뭐랄 수도 없는 국정원은 내곡동에나 있고
모두 무서워만 하는 국정원은 알 사람이나 아는 내곡동에 박혀 있고
국정원은 내 친구 박정원과 이름이 같고
제자 전정원은 아직도 시집을 못 갔을 것 같고
최정원 김정원도 여럿이었고
성이 국씨가 아닌 줄은 알지만
그러나 정원이란 이름은 얼마나 품위 있고 서정적인가
정다울 정 집 원, 비원 곁에 있음직한 이름
나라 국은 또 얼마나 장중한 관형어인가
국정원은 내곡동에 있고
내곡동에는 비가 내리고
바바리 깃을 세운 「카사블랑카」의 주인공 사내가
지포 라이터로 담뱃불을 붙이며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좌우를 빠르게 훑어볼 것 같은 국정원의 정문에는
「007 두 번 산다」의 그런 인물들은 보이지 않고
다만 비가 내리고
어깨에 뽕을 넣은 깍둑머리 젊은 병사가
충성을 외칠 뿐이고
할 수만 있다면
저 우울하고 뻣뻣한 목과 어깨와 눈빛에 대고
그 또한 나쁘지 않다고 위로하고 싶은 것이고
자신도 자기가 하는 일이 무슨 일인지 모른다고 하니
오른손도 모르게 하라는 성경 말씀과 같고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고 하니
좀 음산하지만 또 겸허하게도 느껴지고
아무튼 모른다 아무도
다만 비가 내릴 뿐
우울히 비가 내릴 뿐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그밖의 삼인칭 우수마발(牛溲馬勃)도 알 리 없고
원격 투시하는 천안통 빅 브라더께서는?
그러나 그이야 관심이나 있을까
내곡동의 비에 대해
내뿜는 담배연기에 대해
우수 어린 내곡동 바바리코트에 대해
신경질적인 가래침에 대해
하느님은 아실까
그러나 그걸 알 사람도 또한 국정원뿐
그러나 내곡동엔 다만 비가 내릴 뿐
주왕산에서/김사인
가을볕
이 엄숙한 투명 앞에 서면
썼던 모자도 다시 벗어야 할 것 같다
곱게 늙은 나뭇잎들 소리내며 구르고
아직 목숨 붙은 것들 맑게 서로 몸 부비는 소리
아무도 남은 길 더는 가지 않고
온 길을 되돌아보며
까칠한 입술에 한 개피씩 담배를 빼문다
어떤 얼굴로 저 가을볕 속에 서면
사람은 비로소 잘 익은 게 되리
바지랑대도 닿지 않는 아슬한 꼭대기
혼자 남아 지키는 감처럼
닥쳐올 그 어느 시간의 예감을 지키며
기다려야 한다면
나는 이 맑음 속에 어떤 자세로 앉아야 하리
봄바다/김사인
구장집 마누라
방뎅이 커서
다라이만 했지
다라이만 했지
구장집 마누라는
젖통도 커서
헌 런링구 앞이
묏등만 했지
묏등만 했지
그 낮잠 곁에 나도 따라
채송화처럼 눕고 싶었지
아득한 코골이 소리 속으로
사라지고 싶었지
미끈덩 인물도 좋은
구장집 셋째 아들로 환생해설랑
서울 가 부잣집 과부하고 배 맞추고 싶었겠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김사인
하느님
가령 이런 시는
다시 한번 공들여 옮겨 적는 것만으로
제가 새로 시 한 벌 지은 셈 쳐주실 수 없을까요
"다리를 건너는 한 사람이 보이네
가다가 서서 잠시 먼 산을 보고 가다가 쉬며 또 그러네
얼마후 또 한 사람이 다리를 건너네
빠른 걸음으로 지나서 어느새 자취도 없고
그가 지나고 만 다리만 혼자 허전하게 남아있네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네"
라는 시인데
(좋은 시는 얼마든지 있다고요?)
안되겠다면 도리 없지요
그렇지만 하느님
너무 빨리 읽고 지나쳐
시를 외롭게는 말아 주세요, 모쪼록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 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싶어
덜덜 떨며 이 세상 버린 영혼입니다
* 연전에 작고한 이성선 시인의 <다리> 전문과 <별을 보며> 첫 부분을 빌리다
화양연화(花樣年華)/김사인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물러서는 저녁 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짖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겯고 꽃장화 탕탕 물 장난 치며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철모르는 오누인 듯 살아가거라.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
노숙/김사인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 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었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 / 김사인
하느님
가령 이런 시는
다시 한번 공들여 옮겨 적는 것만으로
제가 새로 시 한 벌 지은 셈 쳐주실 수 없을까요
다리를 건너는 한 사람이 보이네
가다가 서서 잠시 먼 산을 보고 가다가 쉬며 또 그러네
얼마후 또 한 사람이 다리를 건너네
빠른 걸음으로 지나서 어느새 자취도 없고
그가 지나고 만 다리만 혼자 허전하게 남아있네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네
라는 시인데
(좋은 시는 얼마든지 있다고요?)
안되겠다면 도리 없지요
그렇지만 하느님
너무 빨리 읽고 지나쳐
시를 외롭게는 말아 주세요, 모쪼록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 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싶어
덜덜 떨며 이 세상 버린 영혼입니다
"연전에 작고한 이성선 시인의 <다리> 전문과 <별을 보며> 첫 부분을 빌리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 김사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지
그 처자 볕에 그을어 행색 초라하지만
가슴과 허벅지는 소젖보다 희리
그 몸에 엎으러져 개개 풀린 늦잠을 자고
더부룩한 수염발로 눈꼽을 떼며
날만 새면 나 주막 골방 노름판으로 쫓아가겠네
남는 잔이나 기웃거리다
중늙은 주모에게 실없는 농도 붙여보다가
취하면 뒷전에 고꾸라져 또 하루를 보내고
'나 갈라네' 아무도 안 듣는 인사 허공에 던지고
허청허청 별빛 지고 돌아오겠네
그렇게 한두 십년 놓아 보내고
맥없이 그 처자 몸에 아이나 서넛 슬어놓겠네
슬어놓고 나 무능하겠네
젊은 그 여자
혼자 잉잉거릴 뿐 갈 곳도 없지
아이들은 오소리 새끼처럼 천하게 자라고
굴 속같이 어두운 토방에 팔 괴고 누워
나 부연 들창 틈서리 푸설거리는 마른 눈이나 내다보겠네
쓴 담배나 뻑뻑 빨면서 또 한 세월 보내겠네
그 여자 허리 굵어지고 울음조차 잦아들고
두 눈에 파랗게 불이 올 때쯤
나 덜컥 몹쓸 병 들어 시렁 밑에 자리 보겠네
말리는 술도 숨겨놓고 질기게 마시겠네
몇 해고 애를 먹어 여자 머리 반쯤 셀 때
마침내 나 먼저 숨을 놓으면
그 여자 이제는 울도 웃도 못하리
나 피우던 쓴 담배 따라 피우며
못 마시던 술이나 배우리 욕도 배우리
이만하면 제법 속절없는 사랑 하나 안 되겠는가
말이 될는지는 모르겠으나.
고향의 누님 / 김사인
한 주먹 재처럼 사그라져
먼데 보고 있으면
누님, 무엇이 보이는가요.
아무도 없는데요.
달려나가 사방으로 소리쳐 봐도
사금파리 끝에 하얗게 까무라치는
늦가을 햇살 뿐
주인 잃은 지게만
마당 끝에 모로 자빠졌는데요.
아아, 시렁에 얹힌 메주 덩어리처럼
올망졸망 아이들은 천하게 자라
삐져나온 종아리 맨살이
차라리 눈부신데요.
현기증처럼 세상 노랗게 흔들리고
흔들리는 세상을
손톱이 자빠지게 할퀴어 잡고 버텨와
한 소리 비명으로
마루 끝에 주저앉은 누님,
늦가을 스산한 해거름이네요.
죽은 사람도 산 사람도
떠나 소식 없고
부뚜막엔 엎어진 빈 밥주발
헐어진 토담 위로는 오갈든 가난의
호박 넝쿨만 말라붙어 있는데요.
삽짝 너머 저 빈들 끝으로
누님,
무엇이 참말 오고 있나요.
지상의 방 한칸 / 김사인
세상은 또 한 고비 넘고
잠이 오지 않는다
꿈결에도 식은 땀이 등을 적신다
몸부림치다 와 닿는
둘째놈 애린 손끝이 천 근으로 아프다
세상 그만 내리고만 싶은 나를 애비라 믿어
이렇게 잠이 평화로운가
바로 뉘고 이불을 다독여 준다
이 나이토록 배운 것이라곤 원고지 메꿔 밥비는 재주 뿐
쫓기듯 붙잡는 원고지 칸이
마침내 못 건널 운명의 강처럼 넓기만 한데
달아오른 불덩어리
초라한 몸 가릴 방 한칸이
망망천지에 없단 말이냐
웅크리고 잠든 아내의 등에 얼굴을 대본다
밖에는 바람소리 사정 없고
며칠 후면 남이 누울 방바닥
잠이 오지 않는다
공휴일 / 김사인
중량교 난간에 비슬막히 세워 놓고
사내 하나 가족사진을 찍는데
햇볕에 절어 얼굴 검고
히쭉비쭉 신바람 나 가족사진 찍는데
아이 하나 들춰 업은 촌스러운 마누라는
생전에 처음 일 쑥쓰럽고 좋아서
발그란 얼굴이 어쩔 줄 모르는데
큰애는 엄마 곁에 착 붙어서
학교서 배운 대로 차렷 하고
눈만 떼굴떼굴 숨죽이고 섰는데
저런, 큰애 곁 다릿발 틈으로
웬 코스모스 하나 비죽이 내다보네
짐을 맡아 들고 장모인지 시어머니인지는
오가는 사람들 저리 좀 비키라고
부산도 한데
빈 방 / 김사인
나 이제 눕네
봄풀들은 꽃도 없이 스러지고
우리는 너무 멀리 떠나왔나 봐
저물어가는데
채독 걸린 무서운 아이들만
장다리밭에 뒹굴고
아아 꽃밭은 결딴났으니
봄날의 좋은 별과
환호하던 잎들과
묵묵히 둘러앉던 저녁 밥상 순한 이마들은
어느 처마 밑에서 울고 있는가
나는 눕네 아슬한 가지 끝에
늙은 까마귀같이
무서운 날들이
오고 있네
자, 한 잔
눈물겨운 것이 어디 술뿐일까만
그래도 한 잔
그림자가 없다 / 김사인
내 곁의 여자는 손거울을 꺼내 루즈를 바른다. 맞은편 짧은 치마의 아가씨가 그물스타킹 발을 벗어 구두 위에 얹고 조는 동안, 그 곁 검정 배바지의 50대는 다리를 턱 벌리고 오가는 사람을 아래 위로 훑는다. 손잡이에 매달려 통화에 빨려든 젊은 여성은 배꼽과 허리만 남긴 채 이미 이곳에 없고, 그 앞에서 발을 떨며 문자메세지를 찍어대는 노랑 머리 대학생의 구멍난 청바지 틈엔 허연 살이 아프다.
다들 고향에는 윗대 산소며 큰집 작은집이며 논둑길이며 앞산 밑 개울도 있던, 봄이면 우물가로 앵두꽃도 한철이던, 할아버지는 사랑에서 에에-퉤 하고 위엄있게 가래침도 뱉던 집 자손들이다.
어디서 또 만나겠는가
만나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림자가 없으니.
바짝 붙어서다 / 김사인
굽은 허리가
신문지를 모으고 상자를 접어 묶는다
몸빼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겁다
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벽에 바짝 붙어 선다
유일한 혈육인양 작은 밀차를 꼭 잡고
저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
더러운 시멘트벽에 거미처럼
수조 바닥의 늙은 가오리처럼 회색벽에
낮고 낮은 저 바짝 붙어서기
차가 지나고 나면
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
천천히 다시 펴진다
밀차의 바퀴 두개가
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
늦밤에 그 방에 켜질 헌 삼성테레비를 생각하면
기운 싱크대와 냄비들
그 앞에 서있을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
목이 메인다
방 한 구석 힘주어 꼭 짜놓은 걸레를 생각하면
허공장경虛空藏經 / 김사인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교를 중퇴한 뒤
권투선수가 되고 싶었으나
공사판 막일꾼이 되었다
결혼을 하자 더욱 어려워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었다
떨어먹고 도로 서울로 와
다시 공사판
급성신부전이라 했다
삼남매 장학적금을 해약하고
두 달 밀린 외상 쌀값 뒤로
무허가 철거장이 날아왔다
산으로 가 목장을 맸다
내려앉을 땅은 없어
재 한 줌으로 다시 허공에 뿌려졌다
나이 마흔둘.
새 / 김사인
거센 바람 속에
새가 난다
날아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파득이는
저 혼신의 날개짓이
넒은 강
건널까
저 거센 힘과 파닥임 사이
아슬한 균형 박차고
기어이 날아갈까
날아
못가고 몸 솟구쳐 이름없는 새
오른다
바람의 숨막히는 쇠그물의 끝을 향해 작은 새
피묻어 오른다
유연한 포물선 아니라
예리한 비수로 파랗게 날 서
수직으로, 온몸을 던져 수직으로
솟구쳐
바람의 멱통을 쪼아, 쪼아
피투성이 육신을
쪼아
살아
건널까 작은 새
죽음의 바람을 뚫고 넓은 강
몸은 벗어 장사지내도 그 예민한 부리
살아 건널까
저 새
기어이
여름날 / 김사인
풀들이 시드렁거드렁 자랍니다
제 오래비 시누 올케에다
시어미 당숙 조카 생질 두루 어우러져
여름 한낮 한가합니다
봉숭아 채송화 분꽃에 양아욱
산나리 고추가 핍니다
언니 아우 함께 핍니다
암탉은 고질고질한
병아리 두엇 데리고
동네 한 바퀴 의젓합니다
나도 삐약거리는 내 새끼 하나하고
그 속에 앉아
어쩌다 비 개인 여름 한나절
시드렁거드렁 그것들 봅니다
긴 듯도 해서 긴 듯도 해서 눈이 십니다
오누이 / 김사인
57번 버스 타고 집에 오는 길
여섯살쯤 됐을까 계집아이 앞세우고
두어살 더 먹었을 머스마 하나이 차에 타는데
꼬무락꼬무락 주머니 뒤져 버스표 두 장 내고
동생 손 끌어다 의자 등 쥐어주고
저는 건드렁 손잡이에 겨우겨우 매달린다
빈 자리 하나 나니 동생 데려다 앉히고
작은 것은 안으로 바짝 당겨 앉으며
'오빠 여기 앉아' 비운 자리 주먹으로 탕탕 때린다
'됐어' 오래비자리는 짐짓 퉁생이를 놓고
차가 급히 설 때마다 걱정스레 동생을 바라보는데
계집애는 앞 등받이 두 손으로 꼭 잡고
'나 잘하지' 하는 얼굴로 오래비 올려다본다
안 보는 척 보고 있자니
하, 그 모양 이뻐
어린 자식 버리고 간 채아무개 추도식에 가
술한테만 화풀이하고 돌아오는 길
내내 멀쩡하던 눈에
그것들 보니
눈물 핑 돈다
강으로 가서 꽃이여 / 김사인
이마에 손을 얹고 꽃이여
이마에 여윈 손 얹고 꽃이여
어둡게 흘러가는 강가로 가자
어린 자갈들은 추위에 입술 파랗고
늙은 여뀌떼 거친 종아리
강으로 가서 우리는
강으로 가서
다만 강물을 보자
하늘엔 찬 별도 총총하리
시든 풀의 굽은 등엔 서리가 희리
취한 듯 슬픔인 듯 강으로 가서
다만 묵묵히 강물을 보자
이마에 손 얹고 꽃이여
귀가 / 김사인
자동차 굉음 속
도시고속도로 갓길을
누런 개 한 마리가 끝없이 따라가고 있다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말린 꼬리 밑으로 비치는
그의 붉은 항문
꽃 / 김사인
모진 비바람에
마침내 꽃이 누웠다
밤내 신열에 떠 있다가
나도 푸석한 얼굴로 일어나
들창을 미느니
살아야지
일어나거라, 꽃아
새끼들 밥 해멕여
학교 보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