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 W. 우드, 광대극 그리고 N선의 신비
P. T.바넘 같은 흥행사이자 우수한 광학 엔지니어이며 물리학자인 로버트 윌리엄스 우드
의 광대극과 광학 탐구를 묘사하는 것으로 20세기의 막을 올리도록 하자.
뢴트겐이 X선을 처음 발표하고 8년이 지난 1903년, 전세계의 언론은 프랑스 낭시 대학교
의 르네 블롱들로 교수가 발명한 N선에 대해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현상의 놀라운
특징은 이 광선이 바로 인간의 두뇌에서 나온다는 사실이었다. 비록 발산하는 힘은 아주
약했으나, 블롱들로에게 영원한 명성을 보장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발견이었다. 프랑스
과학아카데미는 블롱들로에게 금메달과2만 프랑을 상으로 주었으며, 언론은 블롱들로 교수
의 일거수 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언론이 주장한 바에 의하면, 인류는 새로운 파동의
정점에 있으며, 이것은 X선의 공헌을 훨씬 뛰어 넘을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볼티모어의 존스홉킨스 대학교에서 광학 전문가로 이름난 우드 교수는 도저히 N
선의 발견을 확신할 수 없었다. 우드가 영국 케임브리지를 방문하자, 하인리히 루벤스는 프
랑스를 방문해서 블롱들로의 실험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우드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영
국와 독일 그리고 미국 그 어느 곳에도 동일한 결과를 도출한 과학자가 없었다. 모든 언론
이 프랑스 연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블롱들로는 미국의 유명한 교수가 방문해, 나무를 제외한 모든 물질을 관통할 수 있는 이
신비한 광선을 살펴보는 걸 환영했다. 우드가 블롱들로의 연구실로 들어가니, 사방에 검은
부착물을 대서 빛을 차단한 상태였다. 블롱들로는 우드에게 장비의 구멍을 통해 살펴보라
고 안내했다. 하니만 우드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블롱들로는 우드에게 광선을
말다줄 나무 조각을 건네 다음, 광선이 나타날 때 소리를 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때 우
드는예상했던 대로, 프랑스인 한 명이 어둠 속에서 광선을 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블롱들
로의 조수였다. 우드는 장비에 잇는 키 프리즘을 살짝 들어내, 두 명의 프랑스인이 움직이
는 모습을 재미있게 관찰했다. 그리고 불이 들어오기 직전에 키 프리즘을 다시 닫았다.
영국으로 돌아온 우드 교수는 이 사실을 <네이처>에 실었다. 그 결과, N선은 하나의 해
프닝으로 끝나고, 블롱들로는 불명예에 시달리다가 1930년에 사망했다.
로버트 우드 교수는 1868년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에서 태어나, 전생애를 장난꾸러기 아이
처럼 행동하며 보냈다. 그는 짓궂은 농담꾼에다 폭로자이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광학의
천재였다. 우드 교수의 강의는 쇼맨십으로 빛났으며, 광학에 대한 탐구 정신은 양자 역학
의 길을 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별명은 '어른으로 절대 성장하지 않는 물리학
자'였다.
콩코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가족과 함께 보스턴 남부 교외의 자메이카 평원으로
이사했다. 유리 공장을 경영하는 이웃은 우드의 과학에 대한 재능을 발견하고, 우드에게 공
장에 있는 여러 가지 장비와 화학 약품을 마음대로 사용하도록 허락해주었다.
우드는 장난꾸러기 소년이었다. 어는 전몰장병 기념일에 5m높이의 남북 전쟁 군인 동상
의 머리에 광대 모자를 씌어놓아, 기념 행진이 벌어지는 동안 사다리와 갈고리를 동원한 소
방서 직원들이 모자를 벗겨내느라 소동을 벌인 적도 있었다. 그리고 잿물의 염소산염과 황
을 혼합하면 커다란 폭발음이 난다는 사실을 발견한 우드는 그걸 터트려 마차 끄는 말을 놀
라게도 하고 유리창도 빈번하게 깨뜨렸다. 또한 닿기만 하면 터지는 폭발물을 개발해 뒷담
에다 뿌려놓아 고양이가 접근을 못하도록 만들기도 하였다.
우드는 커다란 곤충 화석을 발견해 신문의 일면 톱을 장식하기도 했는데, 그건 우드가 직
접 만들어 하버드 고고학과 학생들이 파다만 채굴장 속에 미리 파묻어 놓았던 가짜 화석이
었다.
어린 우드는 가끔 마주치는 짓궂은 동네 아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나트륨을 항상 몸에 지
니고 다녔다. 그래서 이 아이들이 있는 곳을 지나칠 때는 웅덩이 안에 침을 뱉으면서 동시
에 재빠른 손놀림으로 나트륨을 떨어뜨렸다. 그러면 연기와 불이 피어올라 아이들은 놀라
도망을 쳤다. 우드는 이런 행동 때문에 악마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우드는 또한 고무줄
새총과 불꽃놀이, 망원경, 현미경 등을 좋아했다.
<시카고 트리뷴>은 불덩이처럼 지구를 강타한, 파랗게 빛나는 금속 조각에 재한 우드의
편지를 기하고 싣기도 했다. 그 밑에는 그 금속이 아주 낯선 성분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
는 엉터리 화학자의 보고서도 함께 실려 있었다. 비록 무명이긴 하지만, 우드가 이와 같은
장난으로 전국적인 관심을 끌 때의 나이는 불과 열 아홉 살이었다.
우드는 1887년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최초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 논문에는 하
버드 지질학과 교수가 제기한 빙하의 침식에 대한 이론을 반박하기 위해 직접 실험한 내용
이 담겨 있었다. 1891년 하버드를 졸업한 후 우드는 존스 홉킨스 대학교로 옮겨 하숙 생활
을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잘, 먹다 남은 스테이크로 잘게 썬 고기 요리를 만드는지 아니지
를 둘러싸고 집주인 아주머니와 논쟁을 벌였다. 하지만 이 논쟁은 바로 이틀 후에 판명이
났다. 다음날, 우드가 먹다 남은 고기에 리튬염화물을 뿌려놓아, 그 다음날 질게 썬 고기
요리에서 그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우드는 약 3m길이의 메가폰을 만들어, 하숙집 지붕에서 도로를 걸어가는 사람의 귀까지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도 있었다. 그 메가폰으로 "미안하지만, 속옷이 흘러내렸군요"하
고 속삭이면, 길을 가던 사람은 깜짝 놀라 어쩔 줄 몰라하고 친구들은 배꼽을 잡으며 폭소
를 터뜨렸다.
미래의 아내가 될 여성과 겨울에 눈썰매 여행을 갈 때는 발열성 황산을 물에 섞어 그릇
겉을 가득 채운 보온병에 뜨거운 물을 담아 강한 인상을 주기도 하였다. 1892년 알래스카
로 신혼 여행을 떠나는 도중 옐로스톤국립공원에 들렀을 때에는, 그곳에 있는 유명한 에메
랄드 연못에 형광 물질을 몰래 집어 넣어 연못 색깔을 울긋불긋하게 만들어 안내인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우드는 1892년 명예 연구원으로 시카고 대학교에 입교해 연구 조수 역할을 수행했다. 이
시기에는 커다란 기름 천에 구멍 하나를 내서 지름이 3-4m나 되는 커다란 연기 고리를 불
어내는 기술을 개발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894년 우드 부부는 베를린으로 여행을 갔는
데, 그곳에서 우드늬 관심이 화학에서 물리학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뢴트겐이 X선을 발명
할 당시 마침 독일에 머무르고 있던 우드가 그 내용을 기사로 작성해 미국 신문사에 처음으
로 제공했다.
우드가 했던 또 다른 심한 장난은 베를린의 '엘'기차 2등칸에 올라탔을 때 발생했다. 물
론 주머니 속에는 2등칸 차표가 있었지만 그는 다른 승객들이 보도록 3등칸 차표를 흔들었
다. 승무원이 말을 걸자, 우드는 독일어를 모르는 척 하면서 20여분 동안 말싸움을 벌여 승
객들을 즐겁게 만들었다. 결국 다음 정거장에서 체포되자, 그는 주머니에서 2등칸 차표를
꺼내보여, 모든 승객들로 하여금 폭소를 터트리게 만들었다. 당혹감에 휩싸여 어쩔 줄 몰라
하는 승무원에게 그는 독일어로 잘 가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1896년에는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의 기자 흉내를 내서 처음 개통되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공짜로 탄 적도 있었다. 그때 톨스토이의 친구 한 명이 러시아에서 금지된 톨스토
이 작품의 독일어판 몇 권을 밀수하도록 우드를 설득했다. 우드는 책들을 몸 안에 동여매
서 세관 검사원을 속인 다음, 톨스토이의 친구인 안톤 체홉에게 직접 그 책을 전달했다. 러
시아어를 전혀 몰랐던 우드는 그곳에 머무는 동안 상점에서 물건을 사고 싶으면 그림을 그
려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우드가 처음 접근한 상점의 주인은 그가 그림
을 팔려는 장사치라 생각하고 재빨리 쫓아버렸다.
미국으로 돌아온 우드는 행글라이더 비행법을 배웠다. 또한 수중 생태계를 살펴볼 수 있
는 구형 잠수 장치를 최초로 만들었다. 공기는 수면 위에서 자전거 페달을 밟아 공급했다.
1897년 그는 위스콘신 대학교의 교수로 발령이 났으며, 훨씬 커다란 연기고리제작기를 만들
었는데, 이번에는 눈에 안 보이는 동그란 압축 공기를 사용해 연기를 올려보냈다. 1899년의
혹독한 겨울철에 우드는 전열기를 만들어서 얼어붙은 수도관을 녹였는데, 주 정부에서는 너
무 고마워, 대학에 건물동 하나를 새로 건설할 자금 20만 달러를 선뜻 제공하기도 했다.
나트륨 증기에서 발산된 스펙트럼에 대한 우드의 연구와 롤랜드가 개발한 회절발은 보어
의 궤도 양자론의 기초를 제공했다. 롤랜드가 1903년에 사망하자, 우드는 공석이 된 존스홉
킨스 대학의 교수 자리에 초빙을 받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 남아 있었다.
다음에 우드는 파리의 레프트 뱅크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며, 유명한 예술가들과 함께 예
술 기법에 대해 토론했다. 그리고 케임브리지에서 연설을 해달라는 레일리 백작의 초대를
받아들여, 주말을 백작의 저택에서 보내게 되었다. 백작의 저택을 방문할 때, 그는 여러 가
지 필터와 렌즈, 프리즘 등을 찢어진 남성용 속옷에 담아가지고 갔는데, 그가 거실 입구에서
주인에게 방문 인사를 하는 동안, 집사는 강의용 도그를 풀어, 찢어진 옷쪼가리는 옷장에 집
어넣고, 광학 장비는 우드의 면도기와 빗을 비롯해 일상 용품과 합께 탁자 위에 나란히 올
려놓았다고 한다.
1905년에 우드는 <물리광학>이라는 유명한 저서의 초고를 출판사에 건네주었다. 그가
파리에 머무르고 있을 때 출판사가 교정 원고 세 질을 보내주었는데, 우드는 그 가운데 한
질의 교정을 끝내고 우편으로 보낸 다음, 나머지 두 질은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런데 자동
차를 타고 프랑스 전역을 여행하던 도중에 어느 호텔의 화장실에 걸려 있는 교정쇄 두 질을
발견하고 놀란 적도 있다.
그는 롱아일랜드 이스트햄프톤에 있는 여름 별장을 구입했으며, 회전식 수은 거울을 발명
해 신문의 일면 기사를 장식하기도 했다. 벽바닥에 있는 큰 접시 안에 담긴 수은이 천천히
회전하는 동안 포물선을 형성해 반사 망원경 같은 역할을 하였다. 그러자 텍사스의 한 대
기업은 이 유명한 교수에게 5만 달러를 제공할 테니 화성인과 통신할 수 있는 거대한 회전
거울을 만들어달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우드는 본빌 염전에 있는 거대한 흑점을 활용해도
화성에서 충분히 복 수 있을 뿐 아니라 비용도 훨씬 싸게 먹힐 거라며 거절했다. 명성은
이렇게 불필요한 관심도 끌게 마련이다.
우드는 그림을 슬라이드로 찍은 뒤 다시 그 그림 위에 비추어서 빛과 어둠의 대비를 더
두드러지게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냈는데, 많은 화랑에서 이 기법을 채택했다. 이 이유로
1909년, 럼퍼드는 메달을 수상할 수 있었다.
또 우드는 이스트햄프톤의 여름 별장에서 야외 파티를 열었을 때, 영국해협을 비행기로
횡단한 프랑스 조종사 블레리오의 복장을 하고 나타났다. 미리 창고 지붕에서 먼 곳까지
안 보이는 줄을 설치해놓은 우드는 창고 지붕에 돌라 자신이 만든 조그만 비행기를 타고 날
아보겠다고 말하고선 시야에서 사라녔다. 줄을 따라가던 우드의 비행기에서 한 순간 불깅
이 치솟더니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여성들은 겁에 질려 넋을 잃을 정도였지만,
숨어 있던 우드는 지붕 꼭대기에 다시 등장해 박수 갈채를 받기도 했다.
또한 그는 여름 별장에서 13m 길이의 원통에 15cm의 렌즈를 부착해 부광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다음해 여름,그 분괃기를 완성시키기 위해 여름 별장으로 돌아왔더니, 원통 속은
거미줄로 가득했다. 그는 고양이 한 마리를 잡아 그 안에 집어 넣고 뚜껑을 닫았다. 고양
이는 거미줄을 깨끗하게 청소하며 다른 쪽 끝으로 기어나왔다.
회절발은 1인당 1만 5,000개의 라인으로서 총 7만 5,000개의 라인에 달했으며, 전체 스펙
트럼의 길이는 16m에 달했다. 우드는 이 분광기에 계속 습기가 차는 걸 고민하다가, 결국
원통을 지하에 매설하는 방안을 고안했다. 우드가 불러온 인부는 분뇨 구덩이를 파는 것으
로 생각했기 때문에 직선 형태로 파야 한다는 걸 의아스럽게 여기기도 했다.
1913년, 우드는 버밍엄 대학교에서 로렌츠 그리고 마담 퀴리와 함께 명예 법학 박사 학위
를 받았다. 또 <지구를 뒤흔든 사나이>라는 제목으로 초기 과학 소설을 집필하기도 했다.
물리학의 거장만 참가할 수 있었던 그 유명한 1913년의 솔베이 총회에서, 흡연을 금지해달
라는 마담 퀴리의 사전 요청을 깬 사람도 우드였다. 모든 참석자가 마담 퀴리의 요청을
존중했으나, 우드가 파이프에 불을 붙이면서 그 규칙이 깨지고 말았다. 솔베이에서 고급 하
바나 시가를 선물받았던 참석자들은 뭔가 손해를 존다는 느낌 속에서 한 명씩 불을 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유일한 여성 참석자였던 마담 퀴리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곧장 밖으
로 뛰쳐나갔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우드는 에디슨과 함께 해군성 상담역을 맡았다. 우드는 배
주변에 수포를 만들어 어뢰를 격퇴하는 방법과 잠수함을 찾도록 물개를 훈련시키는 방법을
해군성 본부에 제안했다. 해군 제독은 두 번째 제안을 '배 끝에 꼬리를 붙이자는 제안보다
더 괴상한'방법이라고 혹평했다. 하지만 영국 해군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물개를 굶주
리게 해 목표물을 찾으면 먹이를 주는 방법을 시도했다. 하니만 실전에 투입된 굶주린 물
개는 눈앞에 나타난 물고기를 쫓아 사방을 돌아다닐 뿐이었다. 소령에 임관돼 프랑스로 파
견된 우드는 집에서 만든 '육분의'를 사용해 수송선의 항해로를 만들었으나, 항해로를 글비
사항으로 간주하고 있던 선장은 시계를 45분 앞당겨놓아 우드를 골탕먹였다. 나중에 퍼싱
장군이 우드의 파견 임무에 대해 묻자, 우드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사실,
극비 사항입니다만, 장군님에게 말씀드리는 건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프랑스에서 우드는 단지 1-2제곱미터에만 초점을 맞춰도 1.6km 전방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신호 망원경을 개발했다. 또한 자외선으로 가짜 여권을 식별하는 방법을 개발해 정부 당국
에 제공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자, 우드는 13m의 분광기를 스키넥터니에 새로 세운 연구실로 옮겨서, 자력이
스펙트럼 형태로 나뉘는 현상에 대해 연구했다. 우드의 국제적인 명성은 높아졌으며, 1931
년 투탕카멘 왕의 무덤을 방문했을 때는 무덤에 있는 보랏빛 금 조각 몇 개를 은밀하게 전
달받기도 했다. 그것은 이집트인들이 금에 화려한 보랏빛을 덧씌운 신비를 밝히기 위해서
였다. 볼티모어로 돌아온 우드는 보랏빛이 철과 금의 합금 때문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밝혀
냈다. 심지어 살인 사건을 해결해달라는 요청과 심령술사의 정체를 밝혀달라는 요청까지
우드에게 몰려들었다.
한편 시카고 대학교에서 논문 작업을 마치지 못했기 때문에, 우드는 물리학 발사 학위를
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1931년 베를린 대학교는 우드에게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우드가 <꽃들은 새들에게 어떻게 말하는가?>라는 저서를 위원회에 제출한 직후
였다.
1935년, 우드는 미국물리학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38년에는 영국 럼퍼드 메달을 수상
했는데, 그는 바로 이 수상식에서 왕립학회의 금연 관습을 깨뜨렸다. 그후 이 관습은 많이
완화되었다.
일흔 살에는 부메랑 던지기에 깊이 빠져들어 존스홉킨스 대학교 축구 시합장에서, 하프
타임 때 관중을 즐겁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부메랑을 날려 관객이 펼쳐든 우산을 낚아채는
실험을 한 것이다. 우드가 사망하자, 물리학계는 커다란 손실을 입었다. 우드가 광학 분야
에서 개발한 여러 가지 이론과 실험은 보어, 가우드스미트, 슈뢰딩거, 하이젠베르크, 파울리
등이 양자론을 실험할 때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금세기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하기 전에 우리는 광자와 전자라는 두 개의 기본 입자에 대
해 20세기가 밝혀낸 내용을 조망해야겠다. 바로 이 두 입자의 관련성 속에서 이 세계가 만
들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두 개를 독립된 존재로 다루고 있지만, 사실 이 두 개는 자연
이 에너지를 감아내는 두 개의 방식을, 광자는 가장 낮은 단계의 에너지를 대변할 뿐이다.
양성자와 중성자를 가지고 있는 원자핵은 더 높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지만, 빛에 대한 그림
을 그릴 때 양성자와 중성자에 초점을 맞추는 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뫼스봐우어 효과를
제외하면, 광자와 핵이 서로 관계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기 때문이다.
빛의 역사 [지은이: 리차드바이스/ 옮긴이: 김옥수 ]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