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이른바 ‘학림사건’이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 전두환 정권 시절 대표적 공안 조작사건으로 불리는 ‘학림사건’이란 당시 학생운동 및 노동운동을 하던 인사들을 반체제 빨갱이로 몰기 위해 고문수사로 거짓자백을 받아낸 조작사건입니다. 2009년 진실화해위는 이 사건에 대해 재심권고 결정을 내렸고, 이듬해 고법의 무죄판결에 이어 이번에 대법원에서 무죄가 최종 확정됐습니다. 이 글은 이 사건의 피해자 가운데 한 사람인 엄주웅 호루라기재단 상임이사에게 본지가 특별히 청탁하여 받은 것으로, 암울했던 독재정권 시절의 편린 하나를 고발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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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1년 ‘학림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던 민병두(왼쪽 첫번째), 이태복(왼쪽 두번째), 엄주웅 등 전민노련, 전민학련 피해자들이 2009년 진실화해위의 재심 권고 결정을 환영하는 성명을 낭독하고 있다. ⓒ프레시안 | 찌는 듯 더운 날이었다. 열서너 시간 야간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기숙사, 지칠 대로 지쳤는데도 공원(工員)들은 바로 잠을 자지 않았다. 고스톱 판을 몇 번 돌리고서야 씻고 낮잠을 청하는 게 일과였다. 멍하니 화투 패를 쪼고 있는데 열린 방문으로 소란스런 기척이 들렸다.
“야, 여기가 경일화성 기숙사야?”
“엄주웅이라고 있어?”
목소리부터가 왈짜다웠다. 퍼뜩 정신이 들어 러닝셔츠 바람으로 복도 끝 창문으로 내달았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창문턱을 잡고 오르려는 순간 허리 뒤춤이 우악스런 손아귀에 잡히고 말았다. 집채같은 덩치 두 명이 나를 바닥에 쓰러뜨렸다.
“너, 이 새끼! 우리가 누군 줄 알아?”
당근 누군지 알 리가 없었다. 구둣발로 몇 번 까이고 두 놈한테 납작 들려 차에 실렸다. 마치 영화에서처럼 뒷자리의 덩치 큰 놈들 사이에 끼여 앉았다. 놈들은 내게 두건을 씌우고 출발했다. 1981년 8월 5일, 내겐 정말 오싹하게도 더운 여름날이었다.
그 전 해 5월, 나는 복학한 학교에서 두 번째로 제적을 당했다. 졸업도 못했으니 앞으로 뭘 하고 살까 하는 고민 끝에 기술을 배워 취직하기로 했다. 물론 그런 데에는 노동운동을 하고 싶은 동기가 있기도 했다. 유신 시절 전태일이니 동일방직, YH무역사건 등을 접할 때마다 대학생이란 게 부끄러웠던 터라 이참에 노동현장에 들어가 노동조합도 만들고 노동자 권리를 향상시켜 보자고도 마음먹었다. 동대문에서 선반 기술을 배우고 몇 군데 ‘마찌꼬바’를 거쳐 인천 주안공단으로 흘러들어 왔다.
거기서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을 가끔 만났다.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인데 시국에 불만이 없을 수 없었다. 술추렴하면서 그 당시 표현으로 ‘광주사태’ 이야기도 하고 일자리 정보도 나눴다. 어쩌다 쉬는 날에는 선배를 만나 철학 공부를 하기도 했다. 노동운동을 하는 데 필요한 교양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 모임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아는 데에는 문제의 차량에 실린 지 5분도 안 지나서였다.
“너 이 새끼, 오상석(전 한겨레 기자)이 알지, 그 새끼 어딨어?”
덩치들이 쥐어박으면서 절친의 행방을 물었다. 오리발을 내밀 여유도 없이 한국수출산업 제5공단 사무실로 끌려갔다. 눈 가린 채 얻어맞은 게 쇠파이프임을 안 건 그게 떨어질 때 낸 쇳소리 때문이었다. 내 입에서 나온 어렴풋한 단서를 갖고 지들끼리 어쩌구저쩌구 하더니 다른 한 팀은 상석이를 잡으러 갔다.
다시 차를 타고 어디론가 이동하는 동안 나는 고통보다도 더한 공포에 질려 있었다. 어딘지도 모를 곳에 내려 계단을 올라 어느 방으로 끌려갔다. 들어서자마자 폭풍 구타가 시작됐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맞았다. 눈을 가린 채, 몇 놈인지 뭐로 때리는지도 모르게... 28일간의 악몽의 시작이었다.
나는 그곳이 남영동 대공분실인지는 한참 후에 알았다. 내가 받은 고문이 나중에 박종철이가 받은 거란 같다는 것도 박종철 사건이 신문에 난 몇 년 후에야 알았다. 나는 거기서 오로지 어떻게 하면 덜 맞고 어떻게 하면 무고한 이름들을 안 댈 수 있을까에만 머리를 굴렸다. 눈가리개를 벗고 의자에 앉은 내게 그들이 처음 물은 것은 이랬다.
“너, 공산주의자지. 이 새끼!” “여기다 써! 임마, 공산주의자라고”
더 말해 무엇하랴. 나는 인간 밑바닥까지 갔다.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빌었다. 엉뚱하고도 무고한 이름들을 대고 나서는 몰래 소리 죽여 울었다. 생각하면 고통스러운 많은 기억 가운데서도 지금까지도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건 두 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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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재판을 받기 위해 호송되고 있는 모습 | 첫째는 내가 당하는 것만큼, 아니 그보다 더 공포스러운 건 옆방에서 고문당하는 다른 사람의 비명이라는 사실이다. 옆방에는 양승조(전 청계피복노조 지부장) 선배가 있었다. 며칠간 밤마다 들린 그의 비명보다 내 살을 저미는 공포는 지금껏 겪어본 적이 없다. 양 선배 담당 취조관은 이근안이었다.
두 번째는 그 이근안이 내가 조사받던 방에 들어와 다른 취조관들이랑 농담 따먹기를 하는 장면이다. 내가 보기엔 악마 같은 놈들이 제 자식 성적 걱정하고 교회 봉사 같은 평범한 일상을 떠들곤 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나중에 떠올릴 때마다 얼마나 치가 떨렸는지...
내가 잡혀간 그 일은 ‘전민노련사건’이라고 했다. 사회과학 출판사를 하던 이태복(전 보건복지부 장관)이라는 사람이 주모하여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통해 민중봉기를 획책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하기 위해 결성한 단체라는 것이다. 거기에 나는 최규엽 선배를 통해 예비회원으로 연결되어 있다고도 했다.
나는 이태복은 물론이고 전민학련 쪽의 학생들, 그리고 전민노련에 연루된 노동자들 거의 전부와 일면식도 없었다. 1000 페이지가 넘는 공소장에다가 공범이 스물여섯 명이나 된다는 것도 재판정에서야 비로소 알았다. 이걸 일명 ‘학림사건’이라고 부른다는 것도 한 참 뒤에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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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로 '학림다방' 간판 |
‘학림’이라, 옛 서울대 문리대 앞(현 대학로)의 다방 이름이 아닌가. 가본 적은 있어도 내 삶과 그리 엮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무림사건’에 대비해 붙인 이름이래도 나하고는 안 어울렸다.
굳이 따지자면 노동자로 살면서 노조를 만들고 노동운동을 하겠다는 내 생각은 아마 무림에 가까웠을 것이다. 당시에도 김문수(현 경기도지사) 씨처럼 노동현장에서 일하던 몇몇 학생 출신 선배들처럼 되고 싶기도 했다. 오죽하면 취조관조차 “넌 임마, 소 팔러 가는데 쫓아온 개야!”라고 했을까.
남영동 대공분실에는 한 달 가량 있었다. 조서를 꾸민 후에 계속 협박을 받았다.
“너 짜샤, 검사 앞에 가서 딴 소리 하면 죽어!”
그러면서 송치 후에 다시 대공분실 끌려와서 작살난 사람들 얘기를 해줬다. 9월 초에 서울구치소로 넘어갔다. 취조 막판에 얻어터져 생긴 귓속 상처가 유치장에서부터 곪았다. 감옥의 내 독방 위에는 접근엄금을 표시하는 빨간 딱지가 붙었다. 당연히 치료 따위는 꿈도 못 꿨다. 죽고 싶어 하며 끙끙 앓기만 하던 어느날 귀에서 고름이 흘러 나왔다.
가족을 만난 건 그후로도 한 참 뒤였다. 훈장을 세 개나 받은 HID 출신 예비역 중령인 우리 아버지는 아들놈에게 국가보안법이 씌워진 게 어이가 없었는지 면회시간 동안 멍하니 벽만 쳐다보셨다. 어머니는 상석이 엄마랑 함께 경찰서며 온갖 기관을 다 찾아다닌 모양이었다.
2년을 꼬박 살았다. 징역을 살고 나오니 잊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잊혀졌다. 기분 나쁜 기억은 꼬불치는 영리한 뇌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끔씩 보도되는 공안사건을 접할 때마다 기억은 되살아났다. 결정적으로는 출소 후 2년쯤 지났을까, 당시 취조관이 나를 일터로 찾아왔다. 무슨 일을 물으러 왔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앞에서 한 없이 고분고분했던 부끄러운 기억이 남아 있다. 1988년이었든가, 그 여름에는 또 다른 취조관 한 놈을 종로 피맛골 부근에서 봤다. 민주화 된 이후여서 날 고문했던 놈을 만나면 흠씬 패줄 거라고 흰소리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웬걸, 먼발치에서 그 놈 얼굴을 본 순간 나는 얼음이 되었다. 나도 몰래 비칠비칠 뒤로 물러나 골목 뒤로 숨었다. 그날 밤 집에서 나는 하염없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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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림사건' 고법 판결 당시 보도(동아, 82.5.22) | 서대문구치소가 역사공원(‘독립공원’)이 되고 남영동 대공분실이 무슨 기념관이 되었다고 그리로 제법 구경들을 가는 모양이다. 하지만 난 그 이후로 한 번도 그곳에 가지 않았다. 아무런 감정의 파도도 없이 지난 기억을 되살리기란 어려운 일이다. 스무살 갓 넘긴 내 젊음은 그렇게 멍든 채 성숙해갔다. 분명 어딘가 깊은 곳에 멍은 그대로 있을 것이다.
재심을 하자는 통문을 받았을 때도 난 좀 떨떠름했다. 고문 당했다는 호소, 억울하다는 탄원을 개무시한 채 무고한 사람에게 ‘빨갱이’ 낙인을 찍어 유형에 처한 자들이 외려 잘 나가던 시절이었다. 안강민, 김경회 등등의 검사 나으리들은 나중에 국회의원도 되고 장관도 되었다. 황우여(현 새누리당 대표)가 판사였던 줄은 엊그제 알았다. 그런 자들이 높은 곳에 계신데 무슨 재심이냐는 생각에 우리 중 한 사람은 신청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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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엄주웅 씨 | 우리 어머니는 16년 전에 우울증으로 돌아가셨다. 둘째 아들 빼내겠다고 굿 빼놓고는 안 해본 일이 없었고 외국 제쳐놓고는 안 가본 데가 없었다. 그분 말년을 괴롭힌 악성 관절염은 순전히 나로 인한 것, 아니 저 우악스런 권력에 의한 것이었다. 고등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나온 다음날 나는 어머니 무덤에 갔다. 서러운 기억은 이제 다 날려 보낼 테니 편히 쉬시라고 말했다.
그렇다. 이제 아픈 기억은 내게서 해방되어야 한다. 나는 이제 정말로 잊을 것이다. 기억이 멈추는 곳 치후아타네오(‘쇼생크 탈출’ 엔딩에 나오는 지명)에는 못가도, 아무런 회한 없이 남영동도 가보고 서대문에도 가보리라. 그 대신 나를 포함한 ‘학림사건’ 스물여섯 명의 기억은 사회가 가져가길 바란다. 그리고 잊지 않아 주었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