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
4장에서 논의된 바와 같이, 러셀의 협회장 재임 중, 누군가 "충실하고 지혜로운 종"이라는 인물을 럿셀에게 개인적으로 적용했다. 그의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럿셀은 그 적용을 받아들였음에 분명하다. 그는 그것이 그리스도인 모임 구성원 전체 반열에 적용되는 것이 아님을 주장하고, ´하나님이 정한 시간´에 특별한 종인 개인의 출현을 예언한 것이라는 데에 찬성의 뜻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그가 죽고 그의 예언이 모두 실패로 끝나자 러더포드는 협회장 임기 첫 10년 동안 전임자가 지녔던 것과 같은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 세월 동안, 러셀이 정말로 ´그 종´이며, 그가 정한 연대를 포함해 그가 가르쳐 준 모든 것들이 의심의 여지없이 정확하다고 열정적으로 그는 주장했으나, 그가 완전한 통제권을 일단 얻게 되자 이런 상황이 중단되면서, 러셀의 견해들은 점점 더 많이 자신의 견해로 대체되고 심지어, 역방향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러더포드는 거의 마법에 가까운 용어인 ´조직´ 개념을 들여왔고, ´하나님(神)의 통치´인 신권통치를 강조하기로 했다. 그가 하나님의 통치기구를 아래로부터 위로가 아니라" "위로부터 아래로의 조직이라는 주장이 그의 협회장직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것이 주는 효과는 지상에서 자신이 최고 머리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제 그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의 적용을 개인에게서 모든 "기름부음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반열로 바꾸었다. 워치타워의 출판물이 이러한 해석적 토대를 기반으로, 하나님께서 양식을 나누어 주는 "종" 조직을 통해서만 사람들을 인도한다는 인식으로 세뇌시키고, 오늘날 그 조직이 워치타워 협회라는 법인체를 움직이는 조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워치타워 협회의 가르침이, "종 반열"은 서기 33년에 시작해서 현재까지 지속적이고 중단 없이 존재해왔다고 주장한다. 사도시대 이후에 주류가 결국 그리스도교국으로 발전한 것인데, 이 그리스도교국은 워치타워가 배도자로 보고 있으므로 "종 반열"은 제도권 외부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그러나 워치타워 협회의 출판물들은 이러한 통로가 배도의 상태가 됨으로 인하여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 반열의 확인이 "불분명하게" 되었다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기간 동안에 그러한 "통로"가 존재했는지의 여부는 단순히 존재했다는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역사는 수세기를 내려오는 동안의 종교적 발전에 대해 결코 은폐하지 않았다. 그것은 보편화된 가톨릭 교회 조직의 단계별 발전뿐만 아니라 그 체제로부터의 이견과 분리, 개신교 교파의 개혁과 형성을 이끄는 다양한 운동의 형성에 대해서도 꽤 완전한 그림을 우리에게 던져 준다. 그러나 모든 기록에서 워치타워가 주장하는, 단 하나의 지속적인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 반열에 대한 묘사에 맞는 것은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 워치타워는 중세의 집단들 이를테면 발도파, 롤라드 (14-15세기의 죤 위클리프파의 교도) 그리고 그 시대의 순수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존재해 왔을 지도모른다는 암시로서 그와 비슷한 집단들ㅡ충실하고 슬기로운 종 반열의 일부가 되었을 가능성ㅡ 을 가끔 언급한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 단체들이 흔히 삼위일체, 영혼 불멸, 그리고 이와 비슷한 교리를 믿었다는 사실은 은근슬쩍 얼버무리고 있다. 이러한 교리들은 모든 거짓 교리들 가운데서 워치타워 협회가 가장 심각하게 보고 있는 교리들이다. 게다가 이러한 단체들은 기본적으로 한 국가 또는 기껏해야 몇개 국가로 제한되는 지역적인 것이었다. 우리가 당시 세계 분야의 모든 "밀"이 단지 한 나라 또는 소수의 국가에만 한정되어 있었다고 가정하지 않는다면 당시 어느 단체도 전세계적인 규모로 사람들에게 "동일한 영적 양식"을 공급하는 유일한 통로 역할을 한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또한 워치타워의 주장은, "충.슬.종" 반열이, 세대와 세대를 연결하는 고리로서 존재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그 연결고리는 결국 찰스 태이즈 러셀과 그가 설립한 워치 타워 협회와 연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러셀 자신은 "재림주의로부터 도움을 받은 단 하나의 진리도 없다"고 주장했으며, 그는 자신의 성경을 책꽂이에서 내려, 사적으로, 독립적으로 스스로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협회가 인정한 출판물에 기술되어 있다. 그렇다면 럿셀은 그들 자신의 말로 설명되는 워치타워 성서 책자 협회의 시작의 근간이다. 그것은 소위 충.슬.종 반열에 대해 그들이 신중하게 정립한 전제를 완전히 부인한다. 젊은 러셀이 성경에 대한 독자적인 연구를 시작한 1870년이 되면 이른바 충.슬.종 반열은 1800살이 넘은 할아버지가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1800살이 넘은 충.슬.종 반열과 럿셀의 독자적인 성경연구 그룹은 연결이 전혀 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럿셀은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 자신의 시대에 처음 등장했다고 믿었음이 분명하고, 자기 자신도 성서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어떤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 반열´에 가지 않았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론 프례는 이렇게 논평한다: 여호와의 증인의 뿌리는 이른바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 반열 교리에 관한 워치타워 협회의 전제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그들의 권위주의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여호와께서 모두 순종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지상의 통로로 조직을 이용하고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그것을 주장하려면 그들은 이것이 서기 33년의 처음부터 상황이었고 이것이 항상 하나님의 방식이었다고 일관되게 주장해야 한다. 그러나 러셀이 그런 지상의 조직에 의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워치타워 역사에 분명히 남아 있다. 그는 독자적으로 행동했다. 충.슬.종과 밝아지는 빛에 대한 두 가지 모순점 1 충슬종은 역사적으로 계속되어 왔고 계속 빛이 밝아 졌다면 럿셀의 때에 그는 무지 밝은 빛을 받아야 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배도한 진리를 회복시켰다고 한다. 2 영적 양식의 서빙의 시간과 음식의 질에서 합격했다면 그 조사기간은 1914년 가을부터 1919년 봄 합격할 때까지 4년 6개월 동안 검사한 셈이다. 그렇다면 그 기간 중 그렇게 질 좋던 음식(교리나 가르침)이 왜 다 사라지고 지금은 전혀 다른 음식을 공급하는가? (럿셀이 가르친 서적들은 단 한권도 워치타워 도서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검사에 합격하기 위해서 그 기간 중에 올바른 영적 양식을 공급하여 왔는가? <종말을 고하는 비밀>에 나오는 예언 해석들이 이러한 기준에 얼마나 터무니 없는 내용인가를 보여준다. 한 예를 들면 나훔 2장 3절부터 6절까지 (킹 제임스 역본에 수록된)의 해석이 아래와 같다: 나훔은 거룩한 예언자에 버금가는 자였다; 죄로 가득한 세상에 평화의 흐름과 더불어 오게 될 왕에 대해 앞 장의 마지막 절(나훔 2:3-6)에서 에언한 후, 왕국이 설립되면, 있게 될 흔한 일상의 문제가 될 수 있는 흥미로운 장면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는 움직이는 선로상의 기차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동차가 아니라] 만일 우리가 나훔처럼 예언자적 위치에 서서 그가 본 환상과 그가 흥미롭게 관찰했던 것을 보게 될 수 있다. 먼저 예언자는 그에게 다가오는 엔진을 보게 되자 이렇게 말했다. 가리워진 것[위대한 전사 앞에 놓인 것 ㅡ헤드라이트]이 붉게 되자[눈부시게 빛나자] 용사들[기술자와 소방수들]이 주홍색으로 물들었고[불꽃이 화염상자로부터 밤에 상자내부를 비추었다]소방수가 탄광으로 던지기 위해 방화문을 열자 병거들은[선로를 따라 움직이는]예비의 날에 횃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다음 예언자는 기차 안에서 그의 자리를 차지하고는 창 밖의 경치를 바라본다. "전나무는 심하게 흔들릴 것이다. 전차는 거리에서 맹위를 떨칠 것이다[철도는 단지 정교하고 과학적으로 건설된 거리 또는 하이웨이일 뿐이다]. 차들이 서로 접촉되고 부딪치는 것은 철도 문제의 중요한 사항 중 하나이다] 그들은 횃불처럼 보일 것이다. [밤의 기차, 먼 들판을 질주하는 물체는, 광대한 횃불처럼 보일 것이다. 그들은 번갯불처럼 빨리 달릴 것이다.] 다음 예언자는 차장이 그의 표를 향해 오더니 이렇게 말한다, "그는 그의 신분을 재확인 해야 한다. [거의 모든 시간을 지휘자가 소비하고, 세고, 그리고 말한다. 승객을 검문하는 등]. 승객은 보행 중에 비틀거리며 [급속히 움직이는 열차로 걸어보라.] [다음 도시나 마을까지]의 표지판에 서둘러 도착해야 하며, 표지[열차 창고, 역]는 [짐꾼, 짐꾼, 우편 마차, 호텔 버스, 승객 및 승객을 만나려는 친구가 모두 열차가 오기를 기다린다]. 강문을 열고 [차문을 열고 사람이 빠져나갈 것으로 하고], 궁궐[차]은 해체될 것이다[비워야 한다]. 이러한 해석들이 과연 적절한 시기의 올바른 양식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어떻게 1914년 가을에서 1919년 봄에 이르는 예수의 검사기간에서 적절한 시기에 올바른 양식을 공급한 충슬종으로 임명 받을 수 있었단 말인가? 워치타워 협회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1914년 자신의 위대한 왕권을 장악하고 ´이기고 또 이기려고´(계시록 6:2)를 진행하는 것으로 묘사하면서, 그의 종들에 대한 검사를 하여 1919년 봄에 충.슬.종을 임명하였다고 하면서, 동시에 그의 통치의 시작에서 하나님의 유일한 조직은 ´바빌론´에서 속박된 적들에 의해 지상의 종들을 거의 도매금으로 포획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것이 이기는 것이며 충슬종의 검사의 결과인가? 그리고 왜 이 "선택된 통로"는 즉시 또 다시 잘못된 때의 예언을 알리기 시작하여 1925년과 그 시기에 도래할 새 천년의 시작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주요한 캠페인("지금 살아있는 수백만 캠페인")을 시도한 것인가? "지금 살아있는 수백만 캠페인"을 선택한 유일한 "통로"를 지휘했던 사람이 때에 근거한 성취되지 않은 예언과 관련하여 나중에 (자신의 말에 따라) 터무니 없는 엉터리 캠페인이 이루어진 것을 사과할 책임이 있지 않은가? 이 모든 것이 어리둥절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아들의 지혜, 권력, 왕권에 대한 모욕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어리석음을 통해 스스로 재정적인 어려움에 빠지고 많은 돈을 잃은 사업가로 가는 것과 같으며, 파산 선언을 해야 했는데, 그때 여러분은 이 사업가를 향해 "잘했도다! 너는 우리의 작은 재산을 잃었으니 이제 우리의 전 재산을 네 손에 맡기겠노라." 라고 선언하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이런 말씀은 ´게으르고 악한 종´에게 하신 말씀으로 보아야 한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대체적인 생각은, ´종´이 제공하는 ´적절한 시기의 양식´이 브루클린 중심의 워치타워 조직에서 제공하는 정보이며 그러한 정보가 출판물과 지시사항 속에 들어 있다는 데에 조금도 의문의 여지를 갖지 않는다. 1986년 1월 1일자 파수대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이 모든 시설과 정비가 진실로 필요합니까? 그렇습니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 영적인 양식을 ´적절한 시기에 ´ 계속 제공하기 위해서라면, 이런 시설은 ´하나님의 집안 일꾼들´의 성장과 200개 이상의 언어로 전 세계에 전파하는 데 매우 필수적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언급된 "양식"은 브루클린에 본사를 둔 워치타워 협회를 통해 출판된 내용을 의미하는 것으로 분명하게 밝혀졌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된다. 이 "기름부음 받은" 자들(적어도 브루클린 본사 밖에 살고 있는 경우)이 제공된 영적인 "양식"의 개발과 공급에 어떻게 참여하는가? 워치타워 조직의 국제 본부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에 대한 개념이 없는 증인들에게는, 이들 8,600명의 "기름부음 받은"자들의 성서 연구와 그 결론들이 어떤 식으로든 궁극적으로 브루클린 본부로 연결되는 길이 있어서,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 반열의 대변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 통치체의 관심으로 연결된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다. 일부 증인들은 지상 전체에 "기름부음 받은" 사람들의 견해를 알기 위해 주기적인 조사가 행해진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직의 중심에 가까이 올수록 이 안개는 걷히고, 8,600명의 "기름부음 받은" 집합체가 영적인 "양식"을 공급하고, 주인의 집안 일꾼의 이익과 일에 대한 방향을 제공하는 데 참여할 것이라는 생각은 망상 수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실은 전체 ´기름부음 받은´ 자들의 단 1%도 성서의 자료나, 정책 형성이나, 여호와의 증인들의 활동을 지시하는 지침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당시 집필부 성원은 오직 한 사람만이 "기름부음 받은 사람" (칼 클레인)이라고 공언하고 있었다. 나머지 6명 정도의 집필부 성원들은 모두 천적 생명이 아닌 지상 희망을 가진 기름 부음 받은 자가 아닌 "다른 양"이라고 불린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 반열에 속하지 않았다. 이 파수대에 게재된 기사의 대부분은 단연코 "기름부음 받은 반열"에 속한 사람들에 의해 씌여진 것이 아니었다. 물론, 다른 나라의 "기름부음 받은" 형제들로부터 나온 출처의 기사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집필부서 감독인 칼 아담스의 재량에 따라 검토, 수정, 그리고 심지어 완전히 재작성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칼 자신은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기름부음 받은´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쓴 글을 ´다른 양´ 중의 한 사람에게 재작업 시키거나 다시 쓰는 데 주저함이 없었고, 자주 그렇게 했다. 그의 윗 사람들 중 누구도 그가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상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주어지는 일반적인 핑계는 기름부음을 받지 않은 성원이 자료의 사고, 개발 및 쓰기를 수행하더라도 인쇄하기 전에 항상 "기름부음 받은" 성원들이 읽고 승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증인들은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 가장 많이 집중된´ 곳이 어디냐에 대해서 ´지상의 어느 한 장소를 들라면 브루클린 국제본부로 알고 있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세계 각처의 여호와의 증인들의 실제 사업의 방향이나 공급되는 ´양식´과 관련해 증인들이 국제본부로부터 받는 성경 해설과 교리적 내용에 대해서는 기름부음 받은 자의 의미가 전혀 없다.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지만 통치체의 내부 구성원이 될 수 있는 특권이 없는 본부 직원은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의견을 표현하기 위해 통치체에 결코 초청받지 않는다. 그들은 그런 문제로 토의된 적이 없으며 그의 생각이 중요한 점을 내포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 대화가 이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들은 베델 본사 가족의 19세 청소년 만큼이나 통치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다. 그러나 워치타워의 해석에 따르면, 그들도 분명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맡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 반열의 일부일 것이다. 출판물의 가르침에 묘사된 바와 같이 약 8,600명의 "기름부음 받은" 사람들의 높은 역할과 특권은 언급된 바와 같이 이론적이고 허구적이지 결코 실제적이거나 실질적이지 않다. 결국 4백만명[당시의 통계] 이상의 기름부음을 받지 않은 증인들이 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 반열에 나타내도록 요구받는 큰 존중과 존경심, 충성심과 순종의 실체는 통치체를 구성하는 12명 정도의 남자 노인들, 즉 소수 집단의 몫으로 전락하게 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회중 장로, 순회 또는 지역 감독자, 선교사, 지부 직원, 지부 위원, 국제본부 직원 등 다른 위치에 있다하더라도, 그가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 반열의 일원인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사실이 기름부음을 받지 않은 동료들보다 그의 생각을 더 많이 배려하게 하거나 출판이나 다른 어떤 분야에서 더 큰 목소리를 내게하는 원인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기름부음 받은´ 성원 8,600명 전부나 대다수의 성원에게,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들이 이러저러한 점에 대해 무엇을 믿고 가르치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때, 사실상 모든 사람들의 답변은 워치타워 출판물에 나오는 그대로일 것이며, 권위있고 정확한 답변의 출처로 이런 출판물들을 참고한다는 데에는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답변이 진정으로 그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들이 듣고 배운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집필과 출판 과정의 어떤 부분에서도 그 답변의 결과나 해석과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기 때문이다. 소위 ´종 반열´의 대다수를 대표한다고 해도, 그들은 자신있게 자신의 이해를 말할 수 없고, 이미 주어진 출판물의 내용을 인용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출판물과 다르게 말하는 것을 두렵게 생각할 것이다. 의문점은 권위 구조에 속하지 못한 8,600명[당시 통계]의 "기름부음 받은" 사람들 모두가 어떻게 워치타워 협회의 다른 모든 출판물들이 제시하는 방식으로 "충실한 종"의 모습을 성취하는 일에 참여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적인 조직 관리와 영적인 양식을 제공하는 종 "반열"에 대한 허구적인 가르침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조직의 권위가 달려 있는 주요 근거를 제공하며, 그 권위에 의해 8,600명의 "기름부음 받은" 사람들 중 1퍼센트(0.0014)의 1/7에 불과한 소수의 사람들이 나머지 "기름부음 받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사실 모든 증인들에게, 읽고, 연구하고, 믿고, 실천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결정할 권리를 갖게 되는 것이다. "반열"을 강조함으로써 그것은 또한 실체적 권위 구조를 익명의 장막으로 가리는 역할을 하며, ´전체가 아니며´ 사실과는 다른 외관상의 다양한 구성과 세계성을 제공하는데 이 허구적인 개념은 실질적인 권위 구조 즉, 통치체의 십여 명의 성원들이 거만하거나 자기 잇속만 차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며 그들의 지시하는 바에 거의 완전한 순종을 요구할 수 있게 만든다. 조직이 이론적으로 제시하는 한 가지 관점은 실제적으로는 비유의 의도와는 다른 의도(모든 일과 목표에 대해서 통치체가 그리스도의 모든 지상 관심사를 책임지는 "관리자"가 됨)로 적용하는 동시에 비유의 목적을 왜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것은 주인과 동료 하인들에게 겸손하고 충실한 봉사에 대한 교훈으로 작용하기 보다는, 주로 통치체의 지시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충.슬.종 반열에 대한 워치타워의 해석이 틀렸다는 것은 누가 12:47, 48에 등장한 비슷한 비유에서 알 수 있다: 그때에 주인의 뜻을 이해하고도 준비하지 않았거나 주인이 시킨 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하고 매 맞을 일을 한 사람은 적게 맞을 것입니다. 참으로, 누구든지 많이 받은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될 것이며 많이 맡은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요구될 것입니다. 여기에 따르면 "여러 대의 매를 맞는 반열"과 "조금 맞는 반열"이 존재해야 한다. 이들은 누구인가? 여기에는 묵묵부답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종"이 개개인에게 적용되는 충실성을 의미하기 때문이지 어떤 반열에 적용시키는 것은 비유의 원래 의미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레이]는 통치체 회의에서 이 점들을 꺼냈지만 통치체의 어떤 성원들로부터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흔히 있는 일이지만, 토론은 말없이 다른 문제로 넘어갔다. 성경의 전체 초점은 "반열"이 무엇을 하는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로 개인 남녀가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에 강하게 집중되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성서에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개인적인 방법으로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라는 요구가 끊임없이 제시되고 있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의 희생의 몸값에 대한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믿음의 행로와 그를 통해 하나님께 봉사하는 자기 자신의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산 제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집단적으로가 아니라 개별적이고 개인적 기준으로 믿음을 가지게 된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의한 판단에 따라 보상이 수반되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어떤 ´반열´의 결속이나 집단적 판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개인에 근거한 것이라고 성서는 거듭 말하고 있다. 협회의 신세계역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그분은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일에 따라 갚아 주실 것입니다. 꾸준히 선한 일을 하여 영광과 영예와 썩지 않을 것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그것은 좋은 일에 인내심을 가지고 영광과 명예와 청렴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삶을 줄 것이다. 사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말하는데, 모두 나에게 무릎을 꿇을 것이며 모든 혀가 하느님을 공개적으로 인정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 자신에 대해 하느님께 답변하게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심판석에 서야 한다. 그래서 우리 각자는 하나님께 자기 계명을 전할 것이다. 그리고 그 여자의 자녀를 치사적인 병으로 죽이겠다. 그러면 모든 회중은 내가 사람의 가장 깊은 생각과 마음을 살피는 자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너희의 행위대로 각 사람에게 갚아 주겠다.(로마서 2:6, 7; 14:11, 12; 계시록 2:23) 예수의 비유가 전체적로서의 그의 교회 또는 회중에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며, 그 비유 안에서 주된 원칙은 ´그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분인 모든 사람들에게 참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비유를 개인에게 고려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개인적으로 적용하는 것에 반대하거나 다투는 것은 성서 자체의 가르침을 반대하는 것이다. 성서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각자가 주인의 충실한 관리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 그 자체로 매우 명백하다. 충.슬.종이란, 충실한 관리인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도는 그레데 섬에 있는 디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누구보다도 장로들에 관한 조언을 하였는데, 이러하다: 하느님의 관리인으로서 감독자는 비난받을 일이 없고, 자기 고집대로 하지 않고, 쉽게 화를 내지 않고,술 취하는 자가 아니고, 폭력적이지않고, 부정한 이득을 탐내지 않고(디도 :1:7, 신세계역)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비유에 묘사된 두 종 중에서, 어느 종이 주인이 도착해야 할 특정 시간에 대한 선입견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충실한 종이 아니라 악한 종이었다. 이 후자의 종은 주인이 일정 기간 내에 그가 온다고 기대하지 않았다면 ´지체하고 있다´고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충실한 노예는 주인이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을지에 대한 특별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그는 주인이 없는 기간을 추정하거나 한정하려고 하지 않고 단순히 충실하게 봉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특정 시기를 기준으로 그 때 혹은 이전에 태어난 사람의 생애 기간 내에 도착이 올 것이며, 또 와야 한다고 수십년 동안 주장했던 워치타워 조직과는 상당히 다르다. 워치타워 조직은 계속해서 주인의 돌아오심에 대해 자신감을가지고 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불충실한 종이 주인이 오기를 지체시키는 것은 그의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 속에" 있는 것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인의 ´도착 지연´은 (워치타워 조직이 그랬던 것처럼) 일정 기간 내에 도착 예정임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일부 다른 종과의 단지 의견 차이를 표현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종의 말 자체가 그가 내심 도착을 ´지체´하고 있는지를 반드시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점을 드러내는 것은 그가 하는 일과 하는 일의 방식이다. 이 비유는 비유는 진지하고 가슴 깊이 파고드는 자기 성찰을 유도해야 한다. 어떤 자기 확신에 찬 자세, 권위주의적인 태도나 주장된 우월적 지위에 대한 과시, 자신의 의지나 관점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징벌적 조치를 취하려는 어떤 성향은 분명 자신의 마음 속에 회계(會計)하는 일을 ´지체´하는 증거일 것이다. |
제 6 장 행위가 아닌 믿음에 의한 구원
그리스도인이 법 아래 있지 않다고 해서 반드시 그가 무법자가 되는 것은 아니며 그를 무법자로 만들어서도 안된다. 하나님의 은총 아래 있기 때문에 그의 법 집행으로부터의 자유는 의가 부족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더 우월한 의로움, 곧 종교적 규범에 복종하기보다는 믿음, 사랑, 진리에 바탕을 둔 하나님의 의로움을 나타게 된다. 마찬가지로, 행위보다는 믿음의 바탕 위에서 그가 구원받는 것은 그와 같은 요소들로부터 흘러 나오는 비활동, 수동성, 무관심이 아니라 더 우월한 활동의 결과로 나타나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 여호와의 증인의 종교조직 내의 상황은 어떤가? 워치타워 조직도 우리는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이 그들의 활동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우리는 중앙집권적 권위에 대한 복종과 그에 대한 충성과 그 조직의 지시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동일하게 취급되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것이 여호와의 증인들이 하나님, 그리스도, 그리고 동료에 대한 그들의 봉사에 전체적으로 볼 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그 효과는 건강한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논의된 성서 원칙에 궁극적으로 반하는 작용으로 나타나는가? 조직 내에 어떠한 영이 만연되어 있는지 알 수 있는 예는, 원래 야고보의 편지에 대한 성경 해설서에 포함하기 위해 준비되었던 특정 자료에 대해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가 보여준 태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야고보서의 주석>은 주로 에드워드 던랩이 쓴 것으로, 과거 ´길르앗´이라고 불리는 워치타워 선교학교의 교무주임이었으며, 성경 사전인 <성서 이해를 위한 보조서>(현재의 표제는 <성경 통찰>)에 크게 기여했다. 에드워드 던랩은 그 자신이 매우 활동적인 증인이었다. 워치타워 브루클린 본사 건물 단지에서 거주하던 지난 5, 6년 동안 나는 그의 숙소 부근에 기거했고, 매주 일요일 아침 에드와 그의 아내는 예외 없이 다른 회중 성원들과 함께 ´야외 봉사´를 하기 위해 카나르시 회중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는 이런 점에서 몇몇 통치체 성원들보다 상당히 모범적이었다. 조직의 연구 프로그램에 일정 기간 동안 승인되어, 출판되고, 그 주석이 포함되었지만, 이 주석(조직이 유일하게 발행한 실제 성경 주석)은 그 후 인쇄되지 않게 되었다. 왜 그런지 이유는 통치체의 한 회기에서 이 책과 관련하여 내린 결정이다. 원래 쓰여진 대로의 기록은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야고보가 보여준 것처럼, 누구든지 형제를 판단하거나 자신의 인간적 기준을 그가 따라야 할 기준으로 설정해서는 안됩니다. 아마 그는 형제를 격려하여 선한 일을 하도록 고무시킬지 모르며, 그가 조언하는 성서적 근거와 정해진 성서적 근거로써 형제를 책망할지도 모릅니다.(약 4:11, 12; 갈 6:1; 히 10:24) 의로운 일이 성사되려면, 양심의 지시에 따라 수행되어야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기계적인 반복이나 세부적인 규칙의 지시를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압력에 의해서 선한 일을 도모하지는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점을 로마서 14장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순수하고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행위는 당연히 따르게 될 것입니다. 그 행위들은 경건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응하시는 선행일 것입니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한 것들로부터 의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은 실패할 것입니다. 그러한 의는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인간의 의인 것입니다. 이것은 (7면의) 이 문단이 원래 통치체의 집필 위원회에서 승인되어 워치 타워의 브루클린 인쇄 공장으로 보내져 실제로 수십만 부씩 복사본이 인쇄된 것이다. 그러나 통치체 성원들과 몇몇 다른 사람들 외에는 어떤 증인들도 이 내용을 보지 못했고 그가 소유한 주석의 사본에서 이 내용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이유는 특정 통치체 성원의 반대로 이 문단이 다시 작성되었고 이미 인쇄된 수십만 부(각각 수십만 장)가 파쇄되었기 때문이다.ㅡ모든 부분이 파쇄된 것은 아니며 오직 32면에 해당되는 각 부분들이 파쇄되었다. 이유가 무엇일까? 통치체 성원들이 이의를 제기하여 바뀐 점들은 결과적으로 그들 스스로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드러낸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원래 주석에 나타나는 것과 동일한 단락을 최종적으로 발행 및 배포된 것과 비교해서 살펴보라. 야고보가 보여준 것처럼, 누구든지 형제를 판단하거나 자신의 인간적 기준을 구원을 얻기 위한 기준으로 설정해서는 안됩니다. 아마 그는 형제를 격려하여 선한 일을 하도록 고무시킬지 모르며, 그가 조언하는 성서적 근거와 정해진 성서적 근거로써 형제를 책망할지도 모릅니다.(약 4:11, 12; 갈 6:1; 히 10:24) 의로운 일이 성사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의 지시의 반응으로 수행되어야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기계적인 반복이나 세부적인 규칙의 지시를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단지 인간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선한 일을 도모하지는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점을 로마서 14장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순수하고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일을 포함하여 행위는 당연히 따르게 될 것입니다. 그 행위들은 경건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응하시는 선행일 것입니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한 것들로부터 의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은 실패할 것입니다. 그러한 의는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인간의 의인 것입니다. 원본 야고보가 보여주듯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무도 형제를 판단하거나 따라야 할 인간적 기준을 세우지 않습니다. 그들은 양심이 시키는 바에 따라 의롭게 행해야 합니다. 또한 그들은 사람들의 압력 때문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로마서 14장에서 지적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순수하고 살아있는 믿음이 있다면 행위는 당연히 뒤따르게 됩니다 개정 야고보가 보여주듯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무도 형제를 판단하거나 구원을 얻기 위해 따라야 할 인간적 기준을 세우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여 의롭게 행해야 합니다. 또한 그는 인간을 기쁘게 하기 위해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순수하고 살아있는 믿음이 있다면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것을 포함하여 훌륭한 행위는 당연히 뒤따르게 됩니다.(마태 24:14; 28:19, 20) ´인간적 기준´을 ´구원을 얻기 위한 인간적 기준´으로 바뀌었고, 옳은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양심에 따라´라는 문구를 삭제하고 대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응답하여´로 바뀌었으며 .그의 선한 행위들은 "다른 사람들의 압력 때문"이라는 문구는 "인간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라고 바뀌었다. "행위가 뒤따른다"는 "왕국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일을 포함하여 훌륭한 행위가 뒤따른다"로 바뀌었는데 이것은 야고보의 전체 편지에서 야고보 자신이 그런 전파 활동을 논하지 않는 반면, 그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가난한 사람들이라도 존중하고, 가난한 회중 성원을 돌보고, 노동자들을 적절히 대우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순수한 그리스도인 숭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과 진정한 믿음, 자비, 사랑이라는 행위를 설명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것은 무엇을 드러내는가? "구원을 얻기 위해" 인간 기준을 세울 권리를 가진 그리스도인이 아무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왜 통치체의 성원들은 그것을 "구원을 얻기 위해"로 제한하기를 원했으며, 왜 그들은 그 문제를 모든 문제에 대헤 인간적인 기준으로까지 확대시킨 초기 버전에 반대했을까? 그것은 바로 ´형제´가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분명한 이유는 수십년 동안 조직의 관행은 그러한 인간 기준을 세밀하게 구성하여 준수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왔기 때문이며, 많은 경우 이를 준수하지 않은 이유로 제명을 해온 사례들에 고착하려 했기 때문이다.(그리고, 제명이 불응에 대한 벌칙인 경우, 결과에 있어서 그들이 설정한 기준은 구원을 얻기 위해 필요한 요건으로 인간적인 기준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야고보 주석의 개정된 문구에서 읽을 수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오는 지시에 응답하여" 옳은 일을 한다. 하지만 왜 초기 버전에서 발견되었듯이, "양심"을 이 문제에서 제거했을까? 최종 분석에서 어떤 방식으로 특정 행위를 해야 할지 결정하는 데 양심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가? 심지어 특정 행위가 ´올바른 행위´이고 하나님의 말씀과 조화를 이루는 것에 대한 개인적 확신을 갖는 데 있어서 양심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가? 그런데 왜 문구를 바꿨는가? 왜냐하면 수십년 동안 그 조직은 강한 개인적 소신을 반영해 준 그리스도교가 아니라 조직적 순응에 의해 구별되는 그리스도교를 강조해왔기 때문인데, 중앙집권적 권위가 구성원들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의 방향"이 무엇이며, 이에 대한 그들의 "대응"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세밀하게 결정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양심의 행사는 조직적으로 통제될 필요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단지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선행을 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보통 무엇이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심지어 억지로도 마음이 기울어지게 되고 또는 반대로 기분이 좋아지게 하는 것일까? 그것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작용하는 압력이 아닌가? 즉, 동료의 압력, 보상 시스템에 기초한 압력, 명시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발생하는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압력? 그런 압력이 ´사람을 기쁘게 한다´는 문제의 뿌리에 있기 때문인데, 무슨 이유로 원래의 버전에서 ´압력´에 대한 언급을 제거하였는가? 이 부분이 논의되자 통치체 성원인 자라츠는 "압력은 좋은 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이렇게 변경시킬 것을 추천했다. 사실상 그 조직은 수십년 동안 증인들에게 압력을 가해왔는데, 특정한 조직 활동에 참여하도록 압력을 가했으며, 증인들의 개별적인 양심이 그렇게 하도록 움직이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거의 또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조직이 정한 인간 기준에 맞추도록 압력을 가해왔다. 이러한 압력을 행사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수단은 각 증인이 매달 (호별방문 사업과 그와 관련된 활동을 작성한 목록)을 장로들이나 순회 감독자가 검토할 수 있도록 파일에 보관될 것으로 예상되는 ´야외봉사 보고서´를 회중에 제출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에 반대하거나 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의로운 일´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 즉 ´의로운 일´을 수행하려는 열의가 부족하거나, 너무 자존심이 강해서 조직이 강조하는 특정 활동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의 견해로 워치타워 출판물에서 제시하는 방식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수행하도록 강조된 모든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협회 간행물과 함께 호별 방문 활동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과 헌신을 나타내는 다른 봉사는 그렇게 뚜렷하고 심지어 결정적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사도 바울이 구원이 행위에 달려 있지 않는 것에 대해 기술할 때 그것은 거의, 율법이나 "율법의 행위"라는 것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것이 위의 그림과 다른 것인가? 아니, 여호와의 증인들에게는 끊임없이 그들이 수행하도록 촉구되는 행위들이 모든 면에서, 율법으로 규정된 행위, 즉 인간적인, 조직의 지침이면서 동시에 여전히 율법으로 규정되어 있는 행위들로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이유 때문이다. 성경에 사용되는 그리스어 "법"(nomos)의 용어는 법률적 의미에서의 성문화된 법률뿐만 아니라 "모든 규범, 규칙, 관습, 사용 또는 전통 등에 매우 광범위하게 적용된다." 영어에서 "법"은 "구속력 있는 관습이나 공동체의 습관, 통제력 있는 당국에 의해 구속력 또는 집행으로 규정되거나 공식적으로 인정된 행동 규칙"으로 정의된다." (공식적으로 인정된 방식으로 수행되는)「야외 봉사」뿐만 아니라, 5개의 주중 집회의 정기적인 참석에 관해서도, 워치타워 조직의 통제권한에 의해 규정된 행위의 구속력이 행사된다는 점은 명백하다. 이것들은 공식적으로 "법"과 같은 것으로 명시되지 않을 수 있지만, 모든 회원에 대한 구속력 있는 의무로서 "공식적으로 인정"된다. 증인들은 조직이 규정한 활동 프로그램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죄의식을 느끼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동료 형제들의 압력과 결합되어, "통제력 있는 권위"가 이러한 행위의 성과를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 우리는 증인들의 호별 방문 활동의 기원을 살펴 보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 활동은 모든 "충실하고 충성스러운" 증인들의 필수적인 규정으로 그리고 신성하게 부여된 의무로 제시하게 되었다. 이것을 수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총애와 승인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제시되었다; 그것을 수행하지 않으면 "유혈죄"를 짓는다는 느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에스겔 3:18, 19, 이 관점을 뒷받침하는 데 자주 사용되는 성구) 이것은 오늘날까지 대부분의 증인들이 이 문제를 바라보는 명백한 관점이다. 율법에 따르는 이스라엘 민족의 고대 패턴과 유사하게, 매주 "봉사" 활동을 체계적으로 하는 프로그램이 마련되기 시작했고, 그들이 이를 규칙적으로 수행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의(義)의 증거임을 느끼게 되었다. (누가 18:11, 12 비교) 시간이 흘러, 러더포드 시대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독단적인 관점들이 너무도 주제넘게, 무신경한 용어로 언급되었다. 그러나 이전과 같은 기본 관념은 보다 미묘하고 정교한 방식으로 자주 표현되었다. 조직의 모든 마련을 하나라도 준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궁극적으로 죄의식을 느끼게 하는 효과는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호별방문의 활동에 대한 강조는 곧 그 행위가 장로직의 자격을 결정하는 주요한 기준으로 바뀌었다. <3월의 믿음>책(158면)은 1920년대와 1930년대 초의 회중의 장로들이었던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존심 때문에 호별방문 전도봉사에서 예수와 제자들의 모범을 따르기를 거부하던 사람들은 결국 조직에서 완전히 빠져 나가게 된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게 되었다. 그러나 회중에 여전히 남은 모든 사람들은 곧 증거사업이 그들을 정신적으로 성숙시킨다는 사실, 달리 말하면 그들을 장성에 이르도록 인도한 증거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활동적인 사람들은 그들의 충성심과 주의 봉사에 대한 열성 때문에 진정한 "장로들"이 되었다. 이들은 ´장로´의 직분에 선출의 방법이 아니라, 자신들의 봉사활동에 의해 장로가 되었고, 그리하여 합당한 자격을 보여 주었기 때문에 조직 내의 책임있는 봉사의 자리에 임명되었다. 그리스도인 활동이라는 점 자체는 호별방문을 다니는 것이 비성서적이라고 말할 수 없음은 확실하다(뒷장에서 설명되겠지만, 그렇다고 성경에서 호별방문을 반드시 옹호하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다). 잘못된 것은 호별방문을 해야 한다는 강압적인 압박이며, 거기에 참여하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 죄의식을 부과하려는 시도이다. 호별방문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마치 하나님에 대한 불충실, 그의 아들에게 불충성, 의에 대한 열정과 헌신이 결여된 것처럼, 심지어 그들을 매우 거만스러우며 자존심이 강한 것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그런 책략은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보면 변명의 여지가 없다. 1990년 8월 1일 파수대 30면에서는 이 조직이 그리스도인 봉사를 "율법의 행위"로 전환한 또 다른 사례로, 1955년 초 파수대 (138면)에서 이러한 취지의 성명문을 인용한다: 일부 전도인들은 전시간 봉사를 예외로 보는 경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점에서 그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헌신의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전시간 봉사를 할 수 없는 피치 못할 상황이 되지 않는 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전시간 봉사자가 되어야 할 의무 아래 있기 때문이다. 성경 어디에도 그리스도나 그의 사도들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전시간 봉사를 할 수 없는 피치 못할 상황이 되지 않는 한, 그렇게 조직적으로 규정된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길 의무가 있다´고 암시하는 곳은 없다. 조직이 사용한 바로 이 기사는 그 문제가 인간이 고안해 낸 법 중 하나였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