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성경 골로새서 1장 13-17절
찬송 210장
1. 우리가 받은 크고 위대한 구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1:13)
보십시오. 성경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으로 우리가 받은 구원의 영광스러움과 복됨을 선포합니까? 성경 말씀에 조금만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이 말씀은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말씀을 가만히 읽으며 그 뜻을 새겨보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아직 성경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을 위해 다시 그 뜻을 새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어두움의 권세가 지배하는 나라로부터 건져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다스리시는 빛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는 더 이상 어두움 가운데 살지 않습니다. 오직 빛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가 믿는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참 빛이시니 어둠이 그를 주관할 수 없습니다.
아멘입니다. 빛은 어둠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참 빛이신 하나님과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 또한 결코 어둠 가운데 살 수 없습니다. 반드시 어둠을 떠나 빛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이는 상식입니다. 이 진리를 따라 성경은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셔서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구원의 내용입니다.
2. 흑암의 권세를 깨뜨리신 예수 그리스도
그렇다면 여기서 말씀하는 흑암(어둠)의 권세란 무엇입니까? 첫째, 한 분 삼위일체 거룩하신 하나님을 불신하고 거슬러 살아가는 죄의 권세입니다. 둘째, 그 죄가 선물해주는 죽음의 권세입니다. 셋째, 거짓말쟁이이며 하나님의 대적자인 마귀의 권세입니다. 이런 권세 아래서 종노릇하는 세상은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캄캄한 어둠과 절말 뿐입니다.
하나님 아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구원해주시기 전까지 온 세상은 이 권세 아래 종노릇하며 살아왔습니다. 이 권세 아래 붙들려 억압당하고 신음하며 아무런 소망 없이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들 예수님께서 이 세상 가운데 오셔서 이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까?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루신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서입니다. 이 큰 구원을 받은 사람이 부르는 영광스럽고 행복한 노래를 들어보십시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55-58)
이 큰 승리의 노래가 누구 안에 있습니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 안에 있습니다. 오늘 순천새중앙교회 안에 있습니다. 아무도 이 노래를 우리에게서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믿는 믿음을 통해 구원받은 성도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구원 사건으로 말미암아 나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죽음이 더 이상 나를 상관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믿으십시오. 죄로 말미암아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끊어진 사람들 가운데서만 죽음의 권세는 힘을 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을 따라 영생을 얻은 성도들과 죽음은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품안에 안겨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죽음은 어떤 힘도 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음 때문에 하늘 아버지의 품안에서 영원히 살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마귀는 절대 나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누가 감히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품안에 있는 사람을 해코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권세는 그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죄 용서함 받고 영생을 선물로 받은 성도를 훼방할 수 있는 세력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는 말할 수 없이 큰 확신을 가지고 고백하며 선포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3.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
이제 하나님께서 사랑하사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는 뜻을 새겨볼 차례입니다. 이 진리는 앞서 나눈 말씀을 통해 그 뜻이 이미 드러났습니다. 아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모든 이들을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처럼 그들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도록 하셨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좀 더 자세하게 새겨볼까요?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가 받은 구원을 이렇게 소개받곤 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이들은 누구나 하나님 나라(천국)를 선물로 받아 누리게 되었다.
이 말씀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말씀이어서 우리가 받은 구원을 생각할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 바로 천국, 혹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골로새서에서는 이렇게 우리 귀에 익숙한 천국이라는 말 대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이는 어린 아이가 그 어머니의 품안에 안겨 있는 것처럼 구원 받은 우리도 아버지 하나님의 품안에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품안에 안겨 계시는 것처럼,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하나님 품안에 안겨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듣고 보니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품안에 안겨 있다는 사실보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영광스러움과 복됨을 더 잘 설명해주는 말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를 들어보십시오.
먼저 하나님께서는 빛이십니다. 하나님께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습니다. 온 세상의 모든 빛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옵니다. 맨 처음 빛을 창조하실 때 일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셨을 때 이 땅의 모든 것이 그 정체를 드러내고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빛을 선물해주시는 곳마다 생명으로 충만하였습니다. 빛이 함께 하는 자리에는 모든 것이 분명하고 확실하였습니다. 불확실함이 사라지므로 불안과 두려움 또한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빛의 나라는 생명과 소망으로 충만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어두움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두움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불확실함과 깊은 두려움입니다. 혹 캄캄한 어둠 가운데 혼자 계셔 보셨습니까? 그때 어떠하였습니까? 너무 너무 두렵지 않으셨습니까? 맞습니다. 어두움은 깊은 두려움을 가져다줍니다. 왜요? 모든 것이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어두움의 특징은 불확실함입니다. 어둠 가운데 있으면 내가 어떤 형편 가운데 있는지, 앞으로 무슨 일을 만날지, 내가 내딛는 발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빛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확실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으면 어떤 두려움도 없습니다. 항상 모든 일에 평안하고 담대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품안에 안겨 있는 성도는 모든 일에 담대할 수 있습니다. 그가 걷는 모든 걸음이 복되고 형통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걷는 걸음마다 빛 가운데서 걷는 걸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품안에 안겨있다는 사실이 왜 우리에게 큰 구원이 되는지 더 이야기해볼까요? 하나님께는 어두움뿐 아니라 거짓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진실하십니다. 맞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속임을 당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누구를 속이지도 않으십니다. 하지만 타락하여 죄로 심히 오염되고 부패한 이 세상은 거짓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입니다. 모두가 일어나 서로 속고 속이는 거짓된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 가운데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품보다 더 안전한 곳이 또 있을까요?
또 하나님 품안에는 죽음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앞서 말씀을 나눈 그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근원이신데, 어찌 그 품안에서 죽음의 세력이 힘을 쓸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품안에는 생명과 소망이 충만합니다. 영원한 행복과 만족이 있습니다. 때문에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를 일컬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에 속해 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처럼 아버지 하나님의 품안에 안겨 사랑을 받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성도는 누구나 흑암의 나라를 떠나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겼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품안에 안겨 있습니다. 가장 선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큰 행복을 노래하는 노래를 들어보십시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가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34:8-10)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신33:29)
4.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와 같이 흑암의 권세에서 건짐 받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게 된 것을 일컬어 성경은 구속(ἀπολύτρωσιν, 속량), 곧 죄 사함이라 합니다. 이제 이 진리를 새겨보도록 합시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1:14)
구속(ἀπολύτρωσιν, 속량)이라는 말은 몸값을 지불하고 포로나 종을 사서 자유를 선물할 때 쓰는 말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이지만, 그 뜻은 다시 한 번 새겨볼까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들 예수님을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셨습니다. 이를 통해 죄와 사망과 마귀에게 붙들려 종노릇하며 살던 죄인을 구속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로 모든 죄를 씻어주셨습니다. 하나님 아들 예수님께서 죄인을 대신해서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저주와 형벌로 말미암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셨습니다. 더 이상 죄와 사망과 마귀에게 매여 하나님의 원수로 살지 않도록 해주셨습니다. 죄와 사망과 마귀의 손아귀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마음껏 하나님을 공경하고 섬길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 품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순전하고 아름다우신 것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사랑하고 섬기고 일하며 살아가도록 해주셨습니다. 물론 이 모든 구원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성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아멘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는 구원받았습니다. 죄와 죽음과 마귀의 세력으로부터 구속(ἀπολύτρωσιν, 속량)받았습니다. 때문에 더 이상 죄와 죽음과 마귀의 종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같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종, 하나님 나라의 일꾼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가 받은 구원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구원입니까? 얼마나 큰 영광이며 복입니까?
생각해보니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아간다는 것처럼 영광스럽고 복된 일이 없습니다. 어떻게 우리같이 하찮은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창조주이신 예수님처럼 살 수 있게 되었을까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입니다. 이 큰 구원을 잘 받아 누리며 사는 사람에게 복이 있고 영광이 있습니다. 우리 함께 일어나 모든 일에 예수님처럼, 예수님 닮은 모습으로 살아갑시다. 돌아보십시오. 나는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습니까? 또 얼마나 예수님을 닮아가려고 애쓰고 있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영광과 복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였는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5.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
이 진리를 더욱 굳건하게 하기 위해, 곧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이고 복인가를 말씀하시기 위해 성경 말씀이 우리 예수님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누군가로부터 당신이 믿는 예수님께서 누구십니까? 라는 질문을 받게 되면 무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성도라면 누구나 대번에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아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골1:15)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만물이 창조되기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골1:15)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1-3))
그런데 이렇게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친히 사람이 되셨고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감격이 있습니다. 돌아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고 하는 복음을 들을 때마다 내 영혼 깊숙한 곳에서 흘러넘치는 감격이 있습니까? 만약 이 감격이 없다면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만약 내 영적 형편이 그러하다면, 진실한 마음으로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은혜를 구하십시오. 우리 하나님께서는 진실하고 정직하게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의 간구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여기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성경이 사용하는 헬라어 πρωτότοκος(프로토토코스), 곧 먼저 나신 자라고 번역된 말은 매우 어려운 말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이 말은 교회 안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 이 단어만 똑 떼어놓고 보면 누구나 오해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예수님께서 마치 이 세상 피조물 가운데 가장 먼저 만들어진 피조물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신성, 곧 하나님 되심을 부인하는 많은 이단들이 이 말을 가지고 거짓된 자기주장을 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참 하나님이 아니시다. 다만 피조물 가운데 가장 뛰어난 피조물일 뿐이다. 또 피조물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이름을 얻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뿐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그들의 주장처럼 예수님께서는 다만 피조물 가운데 뛰어난 그 무엇일 뿐일까요? 성경 말씀 전체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혹 여러분께서도 예수님을 향해 이런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고 계셨다면 지금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우리 귀를 어지럽히는 수많은 거짓 교훈들을 경계하십시오.
성경은 그 어디에서도 예수님께서 피조물 가운데 가장 먼저 창조되신 분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로 소개합니다. 앞서 들었던 요한복음 말씀과 함께 다른 성경 말씀들도 함께 들어보십시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1-3))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1-3)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2:5 )
그렇다면 왜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예수님을 향해 만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라고 소개하는 걸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온 천하 만물의 중심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 πρωτότοκος(프로토토코스)라는 말은 바로 이런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다음 말씀을 주목해보십시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1:16)
6. 늘 예수님처럼
그렇습니다. 이 세상 만물이 창조주 하나님을 떠날 때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듯이 만물보다 먼저 나신 자이시며(πρωτότοκος, 프로토토고스) 만물의 대표이신 예수님을 떠날 때 만물은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로서, 온 세상 만물을 그의 피로 구속하신 구속주로서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 만물의 중심이십니다. 이 진리를 선포하는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7)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이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
우리가 믿는 구주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하니 이런 예수님을 본받아 사는 것보다 더 큰 영광과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큰 복이 우리 모두와 항상 함께 하고 더욱 충만하게 우리 삶 가운데서 열매 맺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돌아보십시오. 하나님 품안에 있고 예수님 안에 있는 성도는 얼마나 복되고 영광스럽습니까? 예수님 안에, 예수님과 함께 있으므로 만물의 중심이 되어 살아가는 성도는 얼마나 복되고 영광스럽습니까?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온 세상을 다스리게 될 성도는 얼마나 복되고 영광스럽습니까? 이런 성도는 얼마나 위대합니까? 얼마나 위대하고 놀라운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습니까? 이 믿음을 따라 스스로를 만물의 중심이며 왕이라 여기고 살아가십시다.
정말 간절히 사모하고 또 사모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주신 이 큰 구원의 비밀을 따라 살아갑시다. 이를 위해 항상 서로를 격려하고 세워줍시다. 다만 이 한 가지는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기를 낮추고 섬기는 왕입니다. 이제 이 영적 원리를 따라 나와 나의 가정을 세상의 중심으로 세워갑시다. 온 세상을 섬김으로 다스리는 왕으로 세워갑시다. 우리 교회 또한 이런 교회로 날마다 자라가도록 온 힘을 다합시다. 그리하여 우리 주님의 말씀 그대로 나와 나의 가정과 우리 교회가 온 세상의 빛이 되고 등불이 되도록 합시다.
이를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는 우리가 일평생 살아가면서 항상 쉬지 않고 주님 앞에서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이런 복된 소원을 품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복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온 세상의 왕이며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이루실 크고 위대한 일을 소망 중에 바라보며 살아가는 성도에게 영광 있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