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윤동주 문학기행
이영호
여행하면서 현지에서 있었던 모습과 추억들을 간직하기 위해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두거나 동영상 촬영을 해서 편집해 DVD로 만들어 보관해 두기도 한다.
얼마 전 일이다. 책장 서랍 정리를 하다가 깊숙이 잠자고 있는 나의 일기장과 원고 뭉치를 발견하였다. 해외 여행기였다.
그동안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나의 지난날의 낭만과 추억의 여행길을 되돌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원고나 기록이 없는 것은, 찍어 두었던 사진이나 DVD를 참고해서 여행기를 쓰고 있다.
2019년 7월 3일부터 7월6일까지 계간지 창작산맥 문학회에서 ‘백두산. 윤동주 문학기행’을 하였다.
첫날, 문학회 회원 모두 시간 엄수 출국 전에 도착하였다.
인천국제공항에서 출국, 장춘국제공항에 2시간 20분 만에 도착, 장춘에서 중식 후 이도백하로 이동, 버스로 5시간이 소요 되었다. 이도백하에서 석 식후 호텔에 투입 후 잠시 쉬었다가 호텔 로비에 모이라는 연락이 왔다. 회원들의 자기소개와 즐거운 첫 밤을 보냈다.
둘째 날부터 관광이 시작, 버스로 백두산 북파 산문 가는 길 양쪽에는 자작나무가 쭉쭉 뻗어 있고, 산문에 도착, 다시 전용 봉고 차량으로 천문봉까지 올라가 천지를 보려는데, 비구름이 가려 잘 보지 못했다. 아침 떠날 때 가이드가 오늘은 꼭 볼 수 있다고 장담까지 했는데, 천지의 모습을 비바람이 가로막는다.
간혹 회원 중에 구름 사이로 천지를 보았다는 회원이 있기는 하지만 훤하게 보지는 못했다. 6년 전에 서파로 백두산을 왔을 때도 비구름이 가로막아 보지 못했다.
백두산 천지는 1년에 30일 정도 본다고 한다. 열 번을 왔는데도 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
천지를 뒤로하고 장백폭포로 이동하여 백두산 온천지대를 지나 협곡 사이로 장엄한 폭포수가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았다. 마치 용이 승천하는 모습 같다고 하여 비룡폭포라고 한다.
연길로 이동 석식후 호텔로 이동 잠자기도 뭣하고 해서 같은 방 문 작가와 한잔하면서 늦도록 이국의 밤을 보냈다.
삼 일째, 북간도 용정으로 향했다. 버스로 지나가면서 일송정을 바라보았고, 해란강은 잠시 관람하고, 명동 소학교로 이동, 윤동주 기념관에 들러 어린 시절과 가족들의 사진들을 관람하고, 명동촌 윤동주 생가에 들렀다.
기와집으로 넓은 앞마당에는 윤동주 시가 군데군데 돌기둥에 쓰여 있고 옆 큰 바위에 서시(序詩)가 있다. 윤동주는 중학교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회원 중에는 기념사진을 찍느라 바쁘다. 윤동주 생가 길목에 간이 서점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 시집을 한권 샀다.
다음 코스로 두만강 도문에 도착했다. 서파로 백두산 여행 때 압록강은 넓고 깊은데 두만강은 생각과는 폭이 좁고 시냇물같이 느껴진다. 강 건너에는 북한 땅이다. 중국과 조선족 국경지대 함경북도 남양 시를 눈앞에서 바라보며, ‘저 건너에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루빨리 통일되어 자유롭게 왕래하는 날을 기다릴 수밖에’ 한숨이 나온다.
장춘에서 석식 후 호텔로 이동, 오늘은 몸도 피곤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마지막 날 아침 식사 때에 김 회장이 윤동주 묘소 단체관람은 안된다는 중국 정부의 지침이라고 해서, 대표 몇 분이 가이드 승용차로 새벽 일찍 다녀왔다고 했다. 준비해온 소주로 잔을 부어 시인 윤동주지묘(詩人 尹東柱之墓)라고 쓴 묘지에 참배하고. 옆에 송몽규 묘소에도 참배했다고 한다.
참배하지 못한 나의 마음 한구석에는 중국 정부가 원망스럽다. 북간도 용정 동산에 쓸쓸히 지내고 있을 두 분을 하루빨리 국립묘지에 모셔 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번 문학기행은 나로서는 평소 잘 몰랐던 윤동주 시인의 과거와 흔적을 찾아보는 좋은 기회가 되어본다.
일제 강점기 윤동주는 고향 용정에서 명동 소학교, 은진중학교에서 숭실중으로 전학하여 다니다가 폐교되자, 용정에 있는 광명학원에서 졸업 후 서울로 유학 그 당시 조선어 수업이 강한 연희전문에 입학한다.
대학을 다니면서 계속 시를 썼으나 문예지에 발표하지는 않고 모아두었다가 친필로 쓴 시 19편을 세 권을 만들어 한 권은 본인이 가지고, 한 권은 이 양하 교수, 또 한 권은 연희전문 후배인 정병욱에게 맡기고 일본 유학을 떠난다.
윤동주는 일본 릿쿄대학(立敎大學)에 입학 후 고종사촌 송몽규(교토 제국대학 사학과 입학)와 가까이 지냈으며, 윤동주는 다시 교토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로 옮긴다.
그 당시 민족 말살 정책으로 창씨개명, 일본이 한국인과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하자, 송몽규는 일본에 대한 저항을 행동으로 표현했다면, 윤동주는 우리 조선인의 삶의 슬픔을 문학적인 시(詩)로, 일본의 식민 통치를 시로 항거했다,
일본 경찰은 가만있지 않았다. 1943년 7월 송몽규와 윤동주는 독립운동을 이유로 치안유지법으로 2년의 실형을 받고 후쿠오카 교도소에 갇히게 된다.
그 후 독방에서 일 년도 되지 않아 윤동주는 병사가 아닌 의문사로 28세의 나이에 그 당시 지키던 간수의 증언에 의하면 큰 소리를 외치고 이국땅 차디찬 교도소에서 1945년 해방을 6개월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송몽규도 뒤를 이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의문의 죽음이 혹시 생체실험, 731부대(일본 관동군 방역 급수 부) ‘마루타’가 떠오른다.
윤동주는 시 자화상(自畵像)에서 우물에서 비취는 거울, 행동 표현보다는 시로서 나라를 사랑하고 우리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는 시가 아닌가 한다. 또 다른 구리에 비취는 거울에 비유, 역사의식이 투철한 참회록(懺悔錄)이 일본을 떠나기 전 조국에서 쓴 마지막 시(詩)로 표현했다.
일제 눈을 피해 정병욱이 윤동주의 시를 잘 숨겨 보관했다가 해방 후 강 처중, 유가족이 보관해 둔 것을 합쳐, 1948년 척 작품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31편을 세상에 내놓았으며, 그 후 창작산맥 문학지 발행인이며 평론가인 김우종 교수님이 ‘문학사상’, ‘한국문학’ 등에 유동주의 시를 세상에 알리자 다른 문학잡지에서도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현존하는 윤동주의 유작 품은 모두 125편이나 된다고 한다. 모국어를 무참히 짓밟히던 시절 한글 시로 썼다는 것은 참으로 높이 평가할 일이다.
일본의 뜻있는 분들은 윤동주의 시를 예찬하며 도지사(同志社)대학에 시비(詩碑)도 세우고, 한일관계의 문학적인 교류가 활발하다. 일본의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일본인도 윤동주의 시를 읽고, 울며 가슴 아파하는 것을 볼 때 국적을 떠나, 사람의 마음은 마찬가지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
이번 문학기행은 참으로 뜻깊고 보람 있었다.
살아생전에는 시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윤동주가 죽어서 영원히 사랑받고 있는 민족의 시인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나는 눈을 지그시 감는다. 어슴푸레 저편에서 윤동주 시인이 환영(幻影)으로 나타나 “나를 생각하여 멀리 용정 집까지 찾아주고, 나의 슬픈 과거를 함께 해서 고맙다”라고 한다.
‘윤동주 기념관’ 시비(詩碑)가 있는 곳에서, 매년 2월 16일이면 추모행사를 하며,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에서도 뜻있는 학자들이 윤동주 연구에 활발하며. ‘영원한 청년 시인’ 윤동주 시인은 몸은 갔지만 영혼은 영원히 우리들의 삶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2024.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