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치』를 읽고
강치야, 이젠 돌아와 함께 살자꾸나
김 종 숙
우연히 모 TV의 '진짜 사나이'라는 예능 프로에 눈길이 멈추었다. 해군 병사들이 광개토대왕함을 타고 독도로 향하는 장면이다. 밤새워 항해를 하고 새벽을 맞는 함정의 갑판에서 서너 명의 병사가 오로지 어느 한 지점을 응시하는 실루엣이 나타났다. 잠시 후 아직은 미명인 채로 회색 어두움에 싸여있는 시각이었지만 어느 샌가 숫자를 불린 병사들이 모두 같은 곳을 향하여 팔을 뻗어가며 한 목소리로 탄성을 내 지른다.
“독도다! 저게 우리 독도야!"
독도라고? 평소에 주의 깊게 보아온 적 없는 독도의 실제 모습이 출렁이는 파도 사이에 의연히 서있다. 전에 없이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화면에 빠져든 까닭은 바로 하루 전에 독도를 배경으로 한 소설 한편을 읽고 난 후였기 때문이다.
독도, 두개의 바위섬, 동도와 서도, 이 먼 곳에서 외롭게 그러나 당당하게 대한민국을 향해 나란히 서있는 독도, 병사들은 한결같이 뜨거운 표정으로 가까워지는 독도를 마주하고 서서 수평선을 박차고 찬연히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애국가를 부른다. 나도 그들과 같은 배에 타고 있는 양 숙연해지며 젊은이들의 빛나는 눈빛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저토록 아름다운 섬, 인간의 발길이 닿기 어려워 수많은 생명들과 착하디착한 강치들이 살고 있던 독도에 왜곡된 역사의 더러움이 숨겨져 있단다.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지만 하루빨리 진실을 밝혀야 할 사명감으로 이 책을 쓴 저자에게 박수를 보낸다. 이 책을 통하여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역사의 기록을 바르게 알고 아픈 가슴으로 세상을 떠난 진정한 영웅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지나간 일, 좋은 게 좋은 거지, 인류 역사를 거슬러본다 한들 제대로 기록된 것들이 얼마나 있겠나. 나 죽고 나면 그만이지’라는 등의 눈감아버림은 너그러운 용서가 아니라 잘못된 것을 묵인하거나 용기 있게 고발하지 못하는 인간성, 어쩌면 보편적인 소인근성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소설가 백시종은 강치를 앞세워 그들의 수난사와 관련되어 잘못 흘러온 과거사를 고발한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독도는 우리 땅'이란 노래를 통해서라도 일본과의 영토분쟁에 관한 이야기는 대부분 알고 있지만 우리 민족끼리, 이웃끼리 독도를 훼손하고 선악을 뒤바꿔놓은 사실은 알지 못한다. 일제의 압박이 풀리며 나라의 기틀이 제대로 잡히지 못한데다가, 이어진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만연했던 적당주의가 주범이 아닐까도 싶다.
소설『강치』가 전하는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1950년부터 1965년까지 울릉도 경찰관으로 재직했던 김산리씨는 이제 80중반의 고령노인이 되었지만 날조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평생을 바친 장본인이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해 줄 수많은 서류철들을 가지고 다니며 진실을 밝히려 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그의 투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마지막으로, 작가를 찾아 그 사건의 전말을 글로 써서 세상에 알릴 수 있는 한 권의 책을 소망한다. 이러저러한 인연으로 그는 소설가 백시종을 만났고 다시 한 번 울분을 터뜨리며 너덜거리는 증거서류들을 늘어놓는다. 처음에는 그리 탐탁지 않게 듣기 시작한 날조된 역사의 진실을 가슴으로 공감하게 된 백시종은 김산리옹과의 만남을 운명처럼 여기며 진실을 되밟기 시작한다.
청정수산물이 풍부했던 독도는 일본 어부들과의 싸움터이기 이전에 바람과 추위와 암벽으로 이루어진 환경 때문에 사람이 상주하기 힘든 무인도였다. 하지만 경찰공무원인 김산리씨는 몇몇 동료들과 독도 수호의 임무를 띠고 침략근성에 혈안이 된 일본으로부터 목숨 바쳐 우리 영토를 수호하였다. 그런데 목숨을 담보로 하며 지켜낸 진정한 독도의 영웅들은 외면을 당한 채 전쟁이후 횡행하던 재향군인회 소속인 일부 상이용사들이 공권력을 좌지우지하며 그 공로마저 탈취해갔단다. 그들 나쁜 무리의 실권자를 저자는 황철민이란 이름을 내세워 소설화한다. 주인공 황철민은 큰 돈이 될 수 있는 독도의 미역채취권을 어거지로 따낸다. 이후로 힘없고 선량한 어민들을 꾀어 제 잇속을 차리며 어쩌다 한 번씩 독도를 들락거린다. 그의 사기성 축재는 한동안 계속되었는데 그중에도 가장 끔찍한 것은 바로 강치를 쏘아죽이고 정력에 좋다는 수컷의 성기를 도려낸 일이다. 이른바 '해구신'이다. 그것들을 보물처럼 비싼 값에 팔아넘기는 그 잔인함에 진저리가 쳐진다. 일등사수를 꼬여내어 대부분의 수컷 강치들을 겨냥하게 하였다. 가수를 꿈꾸는 북한 출신의 젊은이가 마의 손에 걸려들어 범죄를 저질렀으나 가수는커녕 돈 한 푼도 받지 못한다. 이때 쓰인 총은 어디서 났는가. 그 당시, 황철민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행정공무원들이 그에게 내어준 무기였다. 물론 미역 채취가 주목적이지만 이왕 독도에 주둔하려면 군복을 입고 총으로 무장을 한 채 독도를 지키겠노라 유도한 것인데 그는 '독도의용군'이란 그럴듯한 허울을 쓰고 미역채취와 강치를 잡아 제 이익만을 꾀하였던 것이다. 김산리씨의 증언에 의하면 3년 8개월간의 근무 기록도 조작된 것으로 사실은 고작 6개월을 머물렀을 뿐이라 한다.
사건이 이쯤에서 끝났다면 김산리옹이 40년을 투쟁해가며 요소요소들을 찾아 나서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느 개인도 아닌 대한민국이란 국가가 제대로 조사도 해보지 않고 독도의용군이란 나쁜 무리들을 처벌하기는커녕 독도수호의 영웅으로 탈바꿈시켜 국가 유공자로 대우하며 기념사업회까지 만들어놓은 시점에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격분하게 된 것이다. 더욱 기가 막하는 일은 국가 유공자들에게 지급되는 지원금을 더 많이 타먹기 위해 당시 11명이었던 미역 채취꾼 외에도 그 일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까지 끌어들여 가짜 유공자를 33명으로 불려놓은 사실이다. 그런 인간을 위인처럼 영웅시하여 동상까지 만들어 세웠다니 잘못되어도 너무나 잘못되었다. 기존의 정치적, 또는 사회적인 부정 사건들은 대체로 권력을 쥐고 있는 공무원들이 비리를 저질러 국민의 지탄을 받는 경우가 많은데 이 사건은 정 반대로 임무에 충실했던 진정한 공무원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는 경우라서 의외롭다. 절벽에 사다리를 걸고 짐을 운반하느라 동료의 목숨까지 잃어가면서도 사람이 살 수 있도록 길을 만들고 수시로 출몰하는 일본의 떼거리들을 쫓아버린 전과를 세웠던 당시의 경찰들에게 우리는 진심으로 감사하며 그들의 업적을 인정해야 한다. 근무일지등의 분명한 증거자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사실을 날조한 해당자와 국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오죽이나 억울하면 당시에 근무하던 경찰들이 모여 독도수호동지회를 결성하고 진실을 밝히려 그 많은 나이가 되도록 투쟁을 해왔겠는가. 이런 것을 바위에 달걀치기라 하는 걸까. 물론 지금처럼 밝은 세상에서는 어림없는 일이다. 이제는 작은 일도 국민들의 눈을 속이기 어렵다.
안타까운 것은 그토록 원하던 진실을 밝히는 책이 발간되기 나흘 전에 김산리옹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높은님께서 나흘만 더 그의 생명을 허락하셨더라면 이 책을 안고 편안한 마음으로 영면하셨을 것을. 그래서 저자는 속표지에 이 책을 김산리옹의 영전에 바친다고 썼으리라. 하지만 그가 한을 풀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해도 아직 늦지 않았다. 선조들이 잘못한 일은 후손들이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기다릴 것이다. 90을 바라보는 독도수호동지회 회원이 한명이라도 남아있을 동안 아니, 지금 당장 그 사건의 전말을 낱낱이 파헤쳐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 그래야 부끄럽지 않은 후손이 될 것이다. 광개토대왕함의 갑판위에서 뜨거운 심장으로 독도를 응시하던 젊은 병사들에게도 독도의 영웅을 바로 알게 해줘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우리 인간들의 잘못으로 죽음을 당하고 삶의 터전을 떠나간 강치들에게도 용서를 빌며 간절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 강치야, 이젠 돌아와 우리 함께 살자꾸나!'
며칠 후 지방신문에 게재된 이 글을 본 백시종선생으로부터 전화를 받으며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 이 소설 발간 후 별 일 없으신가요?"
"황철민에게 협박 전화를 받아요. 죽여버리겠다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목숨을 걸기도 하는 작가의 의지에 고개가 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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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연의 『밀양 密陽』
김 종 숙
영화 『밀양은 원작자 이청준의 『밀양, 벌레이야기』를 모체로 하였다 한다. 밀양이라면 밀양아리랑으로 익히 그 지명을 알지만 영화를 만든 이가 왜 하필 그 곳을 택한 것인지 궁금하였다. 감독은 그 궁금증에 대꾸하듯 스크린이 열리자 곧 여주인공인 신애의 입을 통해 답변한다. 밀양密陽, 영어로는 Secret Sunshine, 비밀스런 햇살이라 할까, 몰래 비춘 햇볕이라 할까. 남다른 감성을 지닌 어느 이웃의 권유 탓이기도 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배우 전도연 때문에도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읍내에 볼일 있어 나간 어느 날, 현재 상영 중임을 확인하고 극장을 찾았다. 장마 탓이라 해도 지나치게 퀴퀴한 냄새 때문에 텅 빈 홀은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곰팡이 냄새를 견디기 위해 숨은 죽지 않을 정도로 쉬어가며 눅눅한 의자에 몸을 묻고 스크린에 집중하였다. 관객은 남편과 나 단 두 사람, 그래도 필름을 돌려야 하는 시골 극장이 가여웠다.
칸 영화제에서 주연여우상을 받으며 주목을 받았다면 우리나라에서 흥행을 보장 받기는 힘들 것이다. 유럽 취향의 영화들은 그 내용이 조금은 철학적이고 우리네 인습과는 거리가 있는 편이기 때문이다. 두 시간이 조금 넘는 상영시간을 용케 참아내고 극장에서 나오며 재미를 기대하고 들어가는 사람들은 하품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신애라는 서른셋의 젊은 여인의 이야기다. 사고로 남편을 잃고 죽은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살러가는 신애와 그 아들의 모습을 클로즈업하며 영화는 시작한다. 밀양에 거의 다 도착한 어느 지점에선가 고장나버린 자동차를 고치려다가 신애는 남자주인공인 김 사장을 만난다. 자동차 수리를 부탁받은 카센타 사장이다. 그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 똑똑하고 다부져 보이지만 안쓰러운 젊은 여인과 우리주변에서 가장 평범해 보이는, 그저 적당히 낙천적이고 속물적인 중년 남정네의 사랑이랄 것도 없는 유대관계가 이어진다. 자신의 인생에서 너무나 빨리 겪어야 했던 상실의 땅을 벗어나 남편의 고향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밀양이라는 낯선 곳을 찾아든 신애. 그래도 한 번 살아볼 이유를 붙잡기 위해 그녀는 아들 준에게 온 마음을 기대고 이웃들과도 웃음 나누려 노력하며 희미하나마 희망을 바라본다. 그녀의 생계수단은 피아노학원이고 그 학원 주변에는 늘 김 사장(송강호 분)의 눈길이 따른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깊은 상처로 커다란 옹이를 가슴에 간직한 그녀에게 시련이 닥쳐온다. 하지만 이 영화를 만든 이창동감독은 관객을 그리 애타게 하지는 않는다. 한두 번의 힌트로 예감할 수 있는 장면을 예비해 둔, 일종의 배려라 할까 현재로서는 신애의 유일한 존재의 이유인 준이 잠시 눈앞에서 사라지는 숨바꼭질 장면을 마련해 두었다. 비비 꼬아 골치 아프게 엮어나가지도 않는다. 단순 소박하게 펼쳐나가는 중심내용에 놀래킴의 장치도 숨겨두지 않았다. 남편을 잃은 상실감보다 더 큰 아픔이 있을까 했지만 아이를 잃는 것은 내 목숨을 잃는 것의 천 배 만 배의 아픔이요 슬픔이요 두려움이어서 그것은 이미 죽음을 넘어선 공포이다. 차라리 죽어버렸다면 널브러진 절망으로 함께 죽을 수나 있겠지만 아이의 생사조차 알 수 없는 납치상황은 죽음보다 더한 공포, 바로 그것이다.
문제는 돈, 아들 준의 납치를 부른 빌미는 너무나 우습게도 신애의 작은 허영에서 비롯되었다. 낯선 곳에 굴러들어와 젊은 과부로 살자니 만만하게 보이면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있는 사람처럼 위장하려는 방어기재가 작동된 것이다. 마치 땅에 투자할만한 돈이라도 있는 양 허세를 부렸던 것이다. 그것이 엉뚱하게도 이웃인 웅변학원 원장의 범죄 심리를 자극하다니...
영화의 핵심을 흐리지 않으려 이창동은 살인자를 오래 숨겨두지 않는다. 납치된 아들의 안부를 몰라 부들거리는 모정은 연기 잘 하는 전도연에게 맡기고 숨 막히는 고통들을 몇 장면 치른 후 곧 죽음을 당한 아들의 시체를 확인하는 신애의 넋 나간 모습과 살인자로 연행되어가는 이웃 남정네의 비정한 모습이 엇갈리는 정도로 처리한다. 아주 잠시 관객까지 참담하게 만들지만 용의자가 누구일까를 오래 생각하게 하는 것이 이 영화의 초점은 아니란 얘기다. 삶의 이유였던 아들을 잃고도 신애는 죽지 않는다. 머릿속은 하얗게, 가슴은 까맣게 타버렸어도 아직 숨을 쉬고 있다. 혼이 나간 듯 빈껍데기로 서 있는 그녀에게 한 가지 죄목이 더 들씌워진다. 남편 잡아먹은 년이 자식까지 잡아먹고도 눈물 한 방울도 없냐는 시어머니의 독설, 하지만 신애에게는 더 이상 충격을 받을 기력도 없다. 그런 신애가 안쓰러워 노인을 향해 '너무 하시는 것 아니냐.'며 신애를 감싸려 한 김사장의 몸짓은 '넌 뭐냐!'라는 또 다른 멍에만 하나 얹어준 꼴이 되어버린다. 극한 시련에 몰리면 정말 가슴을 쥐어뜯어도 빼내지 못하는 통증 때문에 숨이 멎기도 할 것이다. 상실 자체만으로도 형벌인데 그 이후로도 치러야 하는 심신의 고통은 더욱 큰 형벌이다.
죽지도 못하는 신애는 별 생각 없이 하나님을 믿으라는 교회 부흥회에 발을 넣는다. 부흥회에서 숨이 막힐 듯 꺽꺽, 겨우 기침으로 숨통을 열고 오열하는 연기 장면은 전도연을 기진하게 만들고 칸 영화제의 심사위원들을 감동시킨다. 감독인 이창동은 그녀에게 특별히 요구하지 않았단다. 스스로 알아서 연기하도록 맡겨두고 그는 감탄하며 오케이 사인을 했던가 보다. 송강호 또한 작품 안에서의 캐릭터를 스스로 해석하여 연기했다 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세 사람이 만들었다는 설명을 굳이 앞세웠나 보다.
이후로 신애는 마음 씻김을 경험한 듯 웃음을 찾고 신자가 된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 곳에도 김 사장의 그림자는 여전히 뒤따른다. 얼마 후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를 해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살인자를 찾아가는 신애와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김 사장, 영화는 이 쯤에서 하이라이트가 연출된다. 신애는 교도소로 가는 길에 들꽃을 꺾어 용서를 더욱 빛나게 장식하려 애쓰고 동료신자들은 용서에 성공하라며 화이팅을 모아준다. 관객의 응원까지 기대하는 듯한 의미로 해석하면서 용서의 위대함으로 영화를 끝맺으려는 건 아니겠다는 불길함이 머리를 스친다. 아니나 다를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천사 같은 마음이 되어 원수를 용서하려는 신애 앞에 너무나 평안한 살인범의 얼굴이 등장한다. 당한 자의 고통보다 만 배는 힘들어하다가 수척해질 대로 수척해진 살인자의 얼굴이 아닌 보얗고 미소 그윽한 살인범의 얼굴을 대하는 신애의 충격, 그녀는 천사의 미소를 거두고 서서히 굳어간다. 더구나 살인자의 입을 통해 들은 말 한마디는 그녀에게 내려지는 사형선고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미 용서를 받아 평안을 얻었습니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내가 아직 용서하지 않았거늘 어찌 하느님이 먼저 용서를 하셨단 말인가. (우리 미천한 인간에게는 용서할 권리가 없음을 신애는 몰랐을까.)
그녀가 미쳐가는 건 이제부터다. 남편을 잃었을 때는 아직 씩씩하였고 아들까지 잃었을 땐 넋이 나갔지만 미치지는 않았었다. 어불성설, 혼란, 이럴 순 없어, 모든 것은 거짓이야! 배신감에 휩싸인 그녀의 복수심은 점차 비정상인의 행태를 부르고 급기야는 손목의 동맥을 끊는다. 그녀를 사랑하기에 이제는 괴로움도 함께 겪는 김 사장은 폐인이 되어가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안타까워 절규하면서도 여전히 그녀를 돌보며 곁을 떠나지 않는다. 동맥에서 뚝뚝 흘러내리는 피를 보며 살려달라고 길거리를 헤매는 신애, 감독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그 고통보다도 죽음으로 피하는 비겁함보다는 살아야하는 본능을 부각시키고 싶었던 걸까.
퇴원하는 날, 핏기 없는 신애는 아직도 그녀를 떠나지 않는 김사장과 함께 미장원에 들른다. 머리를 손질하겠다는 건 여자에게 희망이 싹튼다는 징조인데 하필 머리 손질을 맡은 아이가 살인범의 딸이다. 가슴 속 울화를 참으려 애쓰는 그녀와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는 소녀, 미안하다는 말을 못해도 소녀는 안다. 소녀를 용서해야 하는데 그것이 이리 어려운가. 결국 신애는 미장원을 뛰쳐나간다.
배경이 바뀌어 신애의 집. 가위와 빗을 들고 마당으로 나오는 신애가 거울을 앞에 세워두고 머리카락을 자른다. 때마침 대문을 들어서는 김 사장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거울을 잡아준다. 스산한 겨울날에 잘려나간 머리카락은 바람에 날리고 머리카락을 뒤따르는 카메라는 손바닥만 한 마당 한구석에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살을 잡는다. 한참을 머무르는 한줌 햇살, 그 자리에 봄을 맞는 초록 풀 몇 잎이 햇살에 생명을 기대고 있다. 눈물겨운 밀양(密陽)이다! 이 영화는 인생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란 말이 실감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