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 4월 15일 성 다미안 드 베스테르 사제 St. Damien de Veuster Beato Damiano de Molokai Beato Damiano de Veuster 신분: 신부, 선교사 활동지역: 몰로카이(Molokai) 활동연도: 1840-1889년 같은이름: 다미아노, 다미아누스, 다미앵
몰로카이의 성 다미안 드 베스테르(Damien de Veuster)
성 다미안 드 베스테르(원명은 Joseph de Veuster)는 1840년 벨기에의 한 작은 마을에서 성실하고 신앙심 깊은 아버지 프랑스와 드 베스테르와 어머니 카타리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모들처럼 농사를 지을 생각이었으나 수도원에 들어간 큰형의 영향을 받아 수도원에 들어가기를 희망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깊어 기도와 고행을 실천하면서 성장하였다.
일찍이 영성에 눈을 뜬 그는 고향에서 초등 교육과정을 마치고 발론(Vallon) 지방의 르 콩(Brain le Comt)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공부하던 중,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복음적 권고를 통해 완덕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였다. 그래서 그는 1859년 ‘예수와 마리아의 성심 수도회’(The Fathers of the Sacred Hearts of Jesus and Mary, 일명 Picpus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수도회 회칙에 따라 의사로서 시칠리아 섬의 주민들을 헌신적으로 돕다가 4세기 초에 순교한 다미안으로 세례명을 바꾸었다. 수도회 입회 후 벨기에 루뱅과 프랑스 파리에서 공부하였다.
해외선교를 주요 목적으로 삼고 있던 예수와 마리아의 성심 수도회는 1825년 이해 수차례에 걸쳐 하와이 군도의 샌드위치 섬에 선교사를 파견하고 있었다. 1863년 하와이 선교사로 선발된 큰형 팜필 신부가 병자들을 돌보다 장티푸스에 걸리자 성 다미안은 형을 대신하여 하와이 선교를 자원하였다. 이듬해 하와이로 간 성 다미안은 호놀룰루 근교의 아피마뉴 대신학교에서 약 2개월 간 공부하고, 그 해 5월 호놀룰루 대성전에서 메그레 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후 푸노(Puno) 지역에서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한 성 다미안 신부는 1865년에는 코할라(Kohala)로 옮겨 원주민들의 인습과 싸우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여 성당을 짓고 용암으로 덮인 섬을 돌아다니면서 미사를 봉헌하였다.
1865년 하와이 군도에 나병 환자가 급격히 늘어나자 감염된 환자를 격리 수용하는 법이 제정되었는데, 이에 따라 나환자들은 몰로카이(Molokai) 섬에 격리 수용되었다. 1873년 메그레 주교로부터 몰로카이 섬에 수용된 나환자들의 참상을 전해들은 성 다미안 신부는 33세의 나이로 그곳에 건너가 700여 명이 넘는 나환자들의 집을 지어주고, 의사의 도움 없이 나환자들의 고름을 짜 주고 환부를 씻어 주며 붕대를 갈아주고,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빛을 밝혀 주었다.
그리고 매일 죽어가는 이들을 위하여 관을 만들고 무덤을 파고 장례를 치러 주었다. 이렇게 어려움 속에서 나환자들을 위해 희생적으로 활동을 전개하자 냉담하던 환자들도 신뢰와 존경심을 가지고 따르게 되었다. 1881년에는 하와이 정부로부터 나환자들을 위해 헌신한 공로로 ‘카라카우아’ 훈장을 받았다.
성 다미안 신부는 1885년 자신이 나병에 감염된 것을 알았으나 용기를 잃지 않고 나환자들을 위하여 계속 일하였다. 요양하라는 주위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환자들을 돌보다가 1889년 4월 15일 세상을 떠났다. 성 다미안 신부의 유해는 1936년 몰로카이 섬에서 벨기에로 옮겨 안장되었다. 성 다미안 신부는 1992년 7월 시복 대상자로 확정되었고, 1995년 6월 4일 벨기에 브뤼셀(Brussel)의 퀘켈베르그 대성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다. 그리고 2009년 10월 11일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성 다미안 신부
다미안 신부가 평생을 몸바친 하와이 몰로카이섬에는 그를 기리는 다음과 같이 씌인 비문이 있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버리는 일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스스로 택한 ‘상처입은 치유자’의 길
나환우 고름 짜주고 붕대 감아주며 버림받은 이들에게 하느님 손길 전파
1885년 어느날 밤, 다미안 신부는 언제나처럼 파김치가 된 몸을 이끌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하루를 온전히 나환우들을 위해 바치는 그는 일과를 마치고 나면 항상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피로를 느끼곤 하지만 이날은 유난히 무력함을 느꼈다.
피로가 풀릴까 하고 목욕물을 끓인 그는 실수로 뜨거운 목욕물을 양말도 신지 않은 발등에 쏟았다. 아차 하는 순간 그는 가슴이 덜컥했다. 덴 자리에 통증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감각의 상실, 그것은 나병의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엄청난 충격에 그는 옆으로 몸을 눕히면서 흉측하게 일그러진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 날이 올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목숨마저 내놓은 사랑
하버드대 교수로 성공과 성취로 장식된 인생을 살아가다가 명성과 명예를 버리고 인생의 말년을 정박아 시설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보낸 헨리 나웬. 그가 펴낸 저서 중 하나는 <상처 입은 치유자>이다. 참된 치유를 위해서는 치유자 스스로가 상처를 입어야 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상처 입은 치유자의 최고의 모범이었다. 평생을 나환자들을 위해 살아가다가 급기야는 자기 자신도 나병에 감염된 다미안 신부 역시 그러한 예수의 모범을 따라 살아간 현대의 성자이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버리는 일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 12)로 쓰여진 몰로카이섬의 기념비문은 그에게 참으로 적당한 표현이었다.
‘나환우의 사도’
원명 요셉 드 베스테르(Joseph de Veuster). 나환우의 사도이자 현대 구라 사업의 개척자로서 스스로 나병에 걸려 자신이 그렇게도 사랑하고 헌신했던 나환우들과 똑같은 고통을 겪으며 하느님께로 떠나간 다미안 신부는 1995년 6월 4일 벨기에 브뤼셀의 퀘켈베르그 대성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됐다.
그는 벨기에의 한 마을에서 1840년 성실하고 신앙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났다. 소박하게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갈 생각이었으나 앞서 수도회에 입회한 형의 영향을 받아 1859년 ‘예수와 마리아의 성심 수도회’에 입회한다. 회칙에 따라 의사로서 시칠리아섬의 주민들을 위해 살다가 4세기 초에 순교한 다미안으로 세례명을 바꾸었고, 입회 후 벨기에 루뱅과 프랑스 파리에서 공부했다.
그가 입회한 수도회는 주로 해외선교 활동을 해왔는데, 특히 1825년 이래 하와이 군도의 샌드위치섬에 선교사를 파견하고 있었다. 그는 같은 수도회의 형 팜필 신부의 와병으로 형을 대신해 하와이 선교단에 자원해 1864년 하와이로 건너 간 뒤 5월에 호놀룰루에서 사제로 서품된다. 그후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한 다미안은 1865년에는 코할라로 옮기게 된다.
바로 그해 하와이 군도에는 나병 환자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감염된 환자들은 격리 수용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거주 여건이 열악해 폭동을 일으키는 등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게 되고 이런 참상을 전해들은 다미안 신부는 1873년 33세의 젊은 나이에 이곳에 가기로 결심한다. 천형의 땅에 도착한 그는 700명이 넘는 나환우들을 위해 그들의 집을 지어주고 의사의 도움도 없이 나환우들의 고름을 짜주고 환부를 씻고 붕대를 감아주면서 버림받은 이들에게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게 해준다.
닫힌 마음 열게 한 희생
극도의 적대심과 경계심 속에서 다미안 신부에게 도무지 마음을 열지 않았던 나환우들은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스스로를 희생해가면서 봉사하는 그에게 신뢰와 존경심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하와이 정부는 다미안 신부로 하여금 섬을 떠나지 못하게 하고 누구도 이 섬을 드나들지 못하도록 했었지만, 차차 이들을 인간으로 여기기 시작했고 그의 헌신을 통해 교회와 개인들의 정성과 관심들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1881년, 하와이 정부는 나환우들을 위해 헌신한 그의 공로를 높이 사 ‘카라키우아’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1885년 자신이 나병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이전과 똑같이 나환우들을 위한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거듭되는 과로와 나병의 진행으로 인해 그는 결국 건강을 잃어버렸고 병에 걸린지 불과 4년 남짓한 1889년 4월 14일 세상을 떠난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1893년에는 몰로카이섬에 기념비가 세워졌고, 1894년에는 벨기에 루뱅에 있는 성 야고보 성당에는 동상이 세워졌으며 유해는 1936년 몰로카이섬에서 조국 벨기에로 이장됐다.
그가 평생을 헌신한 몰로카이섬에는 이제 불과 수십명의 나환우들이 남아있을 뿐이다. 새로 발생하는 나환우들은 이곳으로 보내지지 않고 있으며, 현재의 나환우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면 이곳은 역사적인 자연 공원으로 조성될 계획이다.
[가톨릭신문, 2006년 8월 13일, 박영호 기자]
몰로카이의 성자 다미안 신부의 생애
바다로 둘러싸인 외딴 곳에서 사목하는 한 사제가 자신의 사목구를 방문한 주교님을 만나기 위해 조각배를 저어 항구에서 멀리 떨어진 배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곳은 정부당국으로부터 주교님을 비롯한 모든 일반인의 상륙이 금지된 격리 수용지였기 때문입니다. 고해성사에 목말랐던 사제는 성사를 볼 수 있게 단 몇 분이라도 승선을 허락해 달라고 청하지만 무참히 거부당합니다.
그러자 사제는 자신이 타고 온 조각배의 뱃머리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주교님은 그의 고백을 듣기 위해 최대한 바다를 향하여 몸을 기울입니다. 배 밑에는 통회의 눈물을 흘리며 고백을 하는 사제, 배 위에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엄숙하게 듣는 주교님, 그 순간 바다 전체가 거대한 고해소가 되었습니다. 이 감동적인 고해성사의 장면은 ‘몰로카이의 성자’ 다미안 신부님의 삶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일화입니다.
사제 다미안은 1840년 1월 4일 벨기에의 트레멜로 마을에 있는 베스테르 집안에서 여섯째로 태어나 요셉(Joseph de Veuster)이라는 이름으로 세례 받았습니다. 어려서부터 신심이 깊고 건장했기에, 부모는 그가 실업교육을 받아 집안의 기둥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기대와 다르게 그는 성소를 꿈꾸었고 끈기 있는 그의 지향은 결국 열매를 맺어 형이 먼저 입회한 ‘예수와 마리아의 성심 수도회’에 들어가 ‘다미안’이라는 수도명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불굴의 지향은 다미안 신부의 가장 큰 덕목이었습니다.
해외선교가 주요 목적이었던 성심 수도회는 하와이 군도에 선교사를 파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863년 선교사로 선발된 형 팜필 신부가 병자들을 돌보다 장티푸스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신학 공부 중이던 다미안은 형을 대신하여 하와이로 가고자 했으나 수련장이 허락하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몰래 프랑스에 있는 수도원의 총원에 청원서를 냅니다.
그리고 그 청원이 수락되어 이듬해 하와이로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피마뉴 대신학교에서 약 2개월간의 남은 신학 공부를 마친 후, 그 해 1864년 5월 21일 호놀룰루 대성당에서 루이 메그레 주교에 의해 사제 서품을 받습니다. 이후 하와이 군도의 푸나, 코할라, 하마쿠아 지구를 맡아 8년 동안 그곳에서 사목하게 됩니다.
그런데 다미안 신부가 하와이에 도착했던 당시 그곳 사정은 몹시 좋지 않았습니다. 서구 질병에 항체를 갖고 있지 못하였던 하와이의 주민들이 티푸스, 콜레라, 매독과 같은 병에 전염되어 1790년에 50만 명이었던 인구가 1865년에는 겨우 5만 명으로 줄어든 상태였고, 인구의 10~15%가 한센균(나균)에 감염될 정도였습니다. 이에 공포에 사로잡힌 정부는 치유 불가능한 한센병 환자를 강제 이주시키는 정책을 반포했습니다.
자녀, 연인, 부모에게서 강제로 격리된 환자들은 하와이 군도 중앙에 위치한 몰로카이 섬의 북쪽 ‘칼라우파파’라고 불리는 오지, 즉 삼면은 바다이고 육지와 연결된 남쪽은 600~900m의 벼랑으로 막혀 있는 춥고 습한 곳으로 쫓겨났습니다. 약속했던 옷과 음식은 제공되지 않았고 그로 인하여 40%의 환자가 영양실조로 사망하는 지옥의 땅, 그곳이 바로 몰로카이 섬의 ‘칼라우파파’였습니다. 이러한 곳에서 33세의 다미안 신부는 1873년 5월부터 새로운 사목을 시작합니다.
다미안 신부는 통나무처럼 떡 벌어진 가슴과 근육을 지니고, 마음 깊은 곳에는 자신의 가장 큰 장점인 끈기 있는 지향이라는 무기를 지니고 자신의 사명을 실천하였습니다. 때로는 불 같은 성격으로 인해 손에 몽둥이를 들고 밀수꾼, 뚜쟁이, 노름꾼, 도둑들을 대적했으며, 정부 당국과 세상과 교회를 향해서는 “끈질기게 기도하는 과부(루카18,1-8)”처럼 청원함으로써 환자들의 삶을 향상시켰습니다.
16년의 사목 생활 동안 다미안 신부는 사제이면서 동시에 경찰, 건축가, 목수, 간호원, 농부, 농장 관리인, 변호사, 은행가, 수입상, 부동산 중개인, 기업가, 무덤 파는 인부, 그리고 관 제작자로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특히 타고난 목수였던 다미안 신부는 경당, 사제관, 학교, 성당(필로메나 성당)뿐 아니라 집 없는 사람에게는 집을 지어주고, 손가락이 없는 사람을 위해서는 자신의 손으로 고름을 짜주고 싸매주었으며, 자포자기한 사람들에게는 재생의 은혜를 가르쳤습니다.
그는 스스럼없이 환자들에게 다가갔고, 환자들을 친구로 대했습니다. 환자들이 재배한 토란 요리와 그들이 피고름 나는 손으로 집어 주는 돼지고기를 받아먹었으며, 사제관을 모든 환자들에게 개방하였고, 한 환자를 요리사로 두기까지 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한센병에 걸리지 않아서 환자들의 고통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다 결국 자신도 그 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1885년, 자신이 병에 걸린 것을 안 다미안 신부는 강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다가가게 하기 위해 나도 나환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강론할 때 나는, 교우라는 말 대신 ‘우리 나환자’라고 말합니다.”
다미안 신부는 한센병에 감염된 후에도 나환자들을 위하여 계속 일하였습니다. 요양해야 한다는 주위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환자들을 돌보다가 1889년 4월 15일 성주간 월요일 8시에 선종하였습니다. 다미안 신부의 유해는 성 필로메나 교회 바로 옆, ‘칼라우파파’에서 첫 밤을 지냈던 나무 아래에 묻혔습니다. 그 후 벨기에 정부가 하와이로부터 허가를 받아 고향 땅으로 모셔, 현재는 벨기에 루뱅의 성 요셉 성당 지하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제의 해로 선포된 2009년 10월 11일, 성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하여 성인 반열에 올랐습니다.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0년 3월호]
버림받은 자들의 아버지, 데미안 신부
인간이 체험한 최초의 병이라는 문둥병. 코뼈가 내려앉고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이 병을 앓게 된 하와이의 환자들은 몰로카이의 북쪽 칼라와오(Kalawao)에 격리되어 초기 나환자 수용소로 옮겨졌다. 물살 세기로 유명한 몰로카이 해협과 세계에서 가장 높은 해안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이 반도.
세상 어느 누구도 감히 도망칠 수 없는 이곳은 나환자를 수용하기에 최적의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불치병으로 치부되던 나병은 죽음 전에 오는 또 하나의 죽음이라 할 정도의 몹쓸 병이었고, 그야말로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들만이 감수해야하는 천벌이었다.
나환자촌에 모여든 환자가 700여 명. 그들에게도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다. 세상이 등을 돌린 이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것을 자청한 사람은 바로 33세의 청년, 다미안(Joseph Damien de Veuster) 신부였다. 1840년 벨기에에서 태어나 신학공부를 마치고, 24세 되던 해 하와이 호놀루루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마침내 칼라우파파(Kalaupapa) 나환자촌에서 문둥병 환자들의 영혼을 돌보는 사제가 되었다.
그는 환자들을 위해 집, 교회, 병원 등을 건축했고 사회적인 질서와 노동을 가르쳤다. 영생을 추구하는 환자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해주었고 죽어가는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였다. 그리곤 16년 만에 그 역시 그가 바라던 대로 그들과 똑같은 나병에 걸려 죽음을 맞이했다. 현재 그의 시신은 벨기에 정부에 의해 본국으로 송환되었지만 하와이인들의 애절한 요청으로 인해 성스러운 오른쪽 팔을 다시 이송, 칼라우파파 묘지에 안치시켜 놓았다
[사제의 해 기획 - 사제(司祭)의 사제(師弟)] 성 다미안 신부(St. Damien de Veuster) 나환우와 16년 동고동락 ... 가슴에 '용기' 심어
▲ 선종 전 다미안 신부
그는 자신이 한센병에 걸리지 않아 환자들 고통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다 결국… 그도 한센병을 앓게 됐다.
벨기에(Belgium)? 낯선 나라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유럽 북서부에 위치한 입헌군주제 국가로 설명되어 있다. 수도는 브뤼셀. 한반도의 약 7분의 1크기 땅에 1050여만명이 살고 있다.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종교는 가톨릭 75%, 기타(개신교 포함) 25%의 분포를 보이고 있다. 이것이 전부다. 음악에 관심 있는 젊은이라면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주제가를 부른 벨기에 국적의 다나 위너(Dana Winner)라는 여가수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낯선 작은 나라가 세계적으로 추앙받는 위대한 성자를 배출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지난 10월 11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벨기에 출신의 다미안 신부를 성인 반열에 올렸다.
1840년 벨기에의 한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하느님 부르심의 징표에 응답하겠다는 비범한 각오를 보여 주었다. 그 결과 성장해서는 형을 따라 ‘예수와 마리아의 성심 수도회’(The Fathers of the Sacred Hearts of Jesus and Mary)에 입회했다.
그런데 하와이 선교사로 선발된 큰형 팜필 신부가 병자들을 돌보다 장티푸스에 걸리는 일이 일어났다. 형은 더 이상 하와이에서 사목할 수 없었다. 이에 다미안은 형을 대신해 하와이 선교를 자원한다. 1864년 하와이에 첫 발을 내디딘 그는 호놀룰루 근교의 아피마뉴 대신학교에서 약 2개월 간 수학한 후, 그 해 5월 호놀룰루대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한 다미안 신부는 섬 곳곳을 누비며 미사를 봉헌하는 등 헌신적으로 사목에 임했다. 그러던 중 그의 삶을 바꾸는 중대한 사건이 발생한다.
하와이 군도에 한센병 환자가 급격히 늘어난 것이다. 이에 감염된 환자를 격리 수용하는 법을 제정됐고, 이에 따라 한센병 환자들은 몰로카이(Molokai) 섬에 격리 수용됐다. 치료와 보호를 위한 격리수용이 아니었다. 한센병 환자들은 철저히 버려졌으며, 외면됐고, 잊혀졌다.
몰로카이 섬의 참상을 전해들은 다미안 신부는 33세의 나이로 그곳에 자원해 700여 명이 넘는 한센병 환자들을 사랑과 자비로 돌보기 시작했다. 집 없는 사람에게는 집을 지어주었고, 손가락이 없는 사람을 위해서는 자신의 손으로 고름을 짜주고 싸매주었으며, 자포자기한 사람들에게는 재생의 은혜를 가르쳤다. 그는 처음부터 스스럼없이 한센병 환자들에게 다가갔고 자신이 한센병에 걸리지 않아 환자들의 고통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다 결국에는 그 자신도 한센병을 앓게 됐다. 한센병 발병 당시의 모습은 일본인 오타베의 「몰로카이 나병의 섬과 그 영웅 다미안 신부」에 생생히 묘사돼 있다.
“1885년 어느 날 밤 다미안은 언제나 못지않게 피로하여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은 일도 일이거니와 피로의 도가 이전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목욕을 하면 몸도 기분도 좀 풀리려니 하고 목욕물을 끓였다. 잠깐 실수로 그는 뜨거워진 목욕물을 양말도 신지 않은 발등 위에 쏟았다. 아차 하는 순간 그는 가슴이 덜컥했다. 덴 자리에 아픔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감각의 상실! 그것은 무엇보다 확실한 나병의 증상이다. 다미안은 너무나 심한 놀라움에 그만 옆으로 몸을 눕히고 말았다. 그리고 흉칙하게 일그러진 자기의 마지막 순간이 눈 앞에 떠오른다. 다미안은 일찍부터 이날이 올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다미안 신부는 한센병에 걸린 후에도 계속하여 자신을 온전히 바쳤으며, 평온과 내적 평화의 놀라운 표양 그리고 충실한 기도, 특별히 자기 수도회의 전통에 따라 성체 조배와 성체 신비 묵상에 대한 놀라운 모범을 보여 주었다. 그는 16년 동안 한센병 환자들 가운데서 살며,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선교사”라고 말했다.
이런 다미안 신부에 대해 교황요한 바오로 2세는 2005년 이렇게 말했다.
“다미안 신부는 한센병 치유와 사회 복귀 가능성을 옹호한 세계 최초의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힘의 원천은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고취된 그의 신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신앙의 은총으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위로를 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복음은 특별히 나환자들에게 구세주의 동정심에 대한 생생한 표상을 보여 주고 있으며 그들이 그토록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도덕적인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미안 신부는 이 복음 메시지의 사도요 그 증거자였습니다.”
다미안 신부에게도 죽음이 찾아왔다. 1889년 4월 19일,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한센병 환자들의 옆에 묻혔다. 그는 임종을 앞두고 진지하게 내적인 기쁨으로 수도 서원을 갱신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지상에서가 아니라 천국에서 영원한 부활절을 경축하고 싶습니다.”
그의 삶과 신앙은 ‘도화선’(導火線, fuse)이었다. 소외된 자들에 대한 사랑을 온 세계에 전파시키는 도화선이었다. 2005년 벨기에의 플랑드르 지방 주민들은 가장 위대한 벨기에인으로 다미안 신부를 선정했다.
다미안 신부는 선종 즉시 시복 시성 절차가 이뤄질 듯 했지만, 성인품에 오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선종한 지 103년이 지나서야 1992년 7월 시복 대상자로 확정됐고, 1995년 6월 4일 벨기에 브뤼셀의 퀘켈베르그 대성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이후 지난해 7월 교황청 시성성은 10년 전 하와이에서 한 은퇴 여교사가 다미안 신부의 전구로 말기 폐암이 치료된 것을 기적으로 인정해 복자 다미안 신부의 시성을 예고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10월 11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성인 반열에 올랐다.
<다미안 신부가 남긴 말> - 하느님 진실로 내 인생은 행복이었습니다. - 주님, 저에게도 같은 나병을 허락하시어 저들의 고통에 동참하게 해주소서 -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다가가게 하기 위해 나도 나환자가 됐습니다. 그래서 설교할 때 나는 교우라는 말 대신, ‘우리 나환자’라고 말합니다.
[가톨릭신문, 2009년 11월 29일), 우광호 기자]
몰로카이의 성인 다미안 신부의 생애 THE STORY OF FATHER DAMIEN 저자. 폴 콕스(Paul Cox) 출판사. 바오로딸.
나환자들을 위해 자신의 생을 온전히 불태운 나환자들의 아버지 성 다미안 신부의 생애를 감동적으로 그린 영화이다. 1872년 하와이! 태평양에 있는 이 아름다운 군도는 정치적으로 점점 영국과 미국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가고 개신교와 가톨릭의 세력이 겨루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와이 근해에 있는 불모의 땅 몰로카이 섬! 그곳은 나병이 전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환자들을 가차 없이 추방하는 곳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높고 가파른 암벽으로 둘러싸인 팔리 계곡에 갇혀 죽음만을 기다리며 살아간다.
33세의 젊은 나이로 그곳에 최초로 파견된 다미안 신부는 영국인 윌리엄슨과의 만남을 시작으로 조금씩 나환자들의 신뢰를 얻어간다.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조차 없는 몰로카이에서 다미안 신부의 헌신적 노력은 세계적인 호응을 얻게 된다. 마침내 수녀 지원팀이 오게 되어 병원도 확장을 하고 다미안 신부도 휴식을 얻게 된다. 이렇듯 불모의 땅 몰로카이에 희망이 싹틀 무렵 다미안 신부에게도 나병이 찾아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환자들을 위한 헌신과 투쟁은 계속된다.
"나환자, 내 형제들이여~"라는 말로 시작되는 강론을 통해 모든 이들에게 자긍심과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되찾아 주는 다미안 신부는 미사도중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가고 그곳에서 최후를 맞는다.
다미안 신부가 이룬 행적과 그의 인간적인 고뇌와 심오한 인간애를 강렬한 사실성에 입각하여 그린 이 영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진솔한 공명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한 인간으로서 엄격한 도덕주의로 무장하고 섬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려는 의지만을 지닌 한 사제로 몰로카이에 들어갔던 다미안 신부가 나환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여정 안에서 신앙뿐 아니라 인간애의 절대적 필요를 깨닫는다.
더불어 오로지 사랑하는 나환자들의 복지 외에는 다른 욕심을 내지 말아야 함을 느끼고 점점 유연하고 인정 넘치는 따스한 아버지로 변모해 가는 과정이 훈훈한 감동으로 전해진다.
이 영화를 감독한 폴 콕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 영화는 다미안 신부의 정신에 대한 찬양이 될 것이다. 그가 이룬 행적을 표방하는 것으로 볼 때 그는 남성판 마더 데레사 수녀이다. 나는 이 세계가 다미안 신부와 같은 영웅적인 인물의 부활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폴 콕스 감독의 말처럼 정치적·경제적·환경적으로 많은 어려움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위로를 주고 사랑이신 하느님께로 나아가도록 이끌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한 사제의 헌신적 노력과 봉사의 정신을 통해 신앙인으로서 새롭게 나아갈 이정표를 제시받게 되며, 모든 사람이 인간으로서 자긍심과 존엄성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 줄 것이다.
복자 다미안 신부 전구 통한 기적 확인 교황청 시성성 의학위
[바티칸 외신종합] ‘몰로카이 섬의 성자’로 추앙받는 복자 다미안 베스테르(Joseph de Veuster.1840~1898) 신부의 전구를 통한 기적이 공식적으로 확인됐다.
교황청 시성성 의학위원회는 최근 회의를 열어, “10여 년 전 하와이의 한 여성이 다미안 신부에게 전구를 청해 폐암이 치료된 것과 관련해 다미안 신부가 이 여인을 치유한 것은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라고 판결했다.
이 치유가 신학자들로 이뤄진 신학자위원회 심사를 통해 기적으로 인정되면, 추기경들과 주교로 이뤄진 위원회 및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최종 승인을 거쳐 다미안 신부의 시성이 확정된다.
1840년 벨기에 출생의 다미안 신부는 1859년 ‘예수와 마리아의 성심 수도회’에 입회, 벨기에 루뱅과 프랑스 파리에서 공부했다. 1864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사제품을 받은 그는 1973년부터 선교사 생활을 하면서 몰로카이 섬의 한센병(나병) 환우들을 돌보아왔으며, 결국 자신도 한센병에 걸려 1889년 4월 14일 선종했다. 다미안 신부는 1995년 6월 4일 벨기에 브뤼셀의 퀘켈베르그 대성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됐다.
[가톨릭신문, 2007년 11월 18일]
교황청, 다미안 신부 기적 공식 인정 ‘불치 암’ 진단 여성 전구 기도 후 치유…시성 한 걸음 앞당겨져
【바티칸 외신종합】교황청이 나환우의 사도인 복자 다미안 신부와 연관된 기적을 공식적으로 인정함으로써 다미안 신부의 시성이 한 걸음 더 앞당겨졌다. 교황청 시성성은 최근 암에 걸렸다가 다미안 신부에게 기도를 청함으로써 치유된 기적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다미안 신부의 시성 청원인인 브루노 베나티 신부는 6월 초 교황청 시성성이 하와이의 한 여성의 암 치유를 다미안 신부에 대한 기도 덕분인 것으로 공식 발표했다. 시성성에 따르면, 오드리 토구치(Audrey Toguchi)라는 한 여성이 치유 불가능한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으나, 다미안 신부에게 전구의 기도를 바친 뒤 암이 치유됐다.
이러한 보고에 따라 이 여성을 진단한 전문 의료진은 다각적이고 엄격한 진단을 실시해 이 치유 현상이 ‘초자연적’인 것이라고 최종 판단을 내렸다. 현재 이 여성은 완전히 건강을 회복한 상태이다.
[가톨릭신문, 2008년 6월 15일]
10월 11일 시성된 다미안 신부 사랑 · 자비로 700여 한센인과 아픔 나눠
다미안 베스테르(Joseph de Veuster·1840~1889) 신부는 1840년 벨기에의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모를 따라 농사를 지을 생각이었으나, 수도자의 길을 걷는 큰형의 영향을 받아 수도원에 들어가기를 희망했다.
일찍이 영성에 눈을 뜬 그는 고향에서 초등교육을 마치고 발론(Vallon) 지방의 르콩(Brain le Comt) 고등학교에 진학해 공부하던 중,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완덕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이후 1859년 ‘예수와 마리아의 성심 수도회’(The Fathers of the Sacred Hearts of Jesus and Mary)에 입회한 그는 수도회 회칙에 따라 의사로서 시칠리아 섬의 주민들을 헌신적으로 돕다가 4세기 초에 순교한 ‘다미안’으로 세례명을 변경했다. 수도회 입회 후에는 벨기에 루뱅과 프랑스 파리에서 공부했다.
1863년 하와이 선교사로 선발된 큰형 팜필 신부가 병자들을 돌보다 장티푸스에 걸리자 다미안은 형을 대신해 하와이 선교를 자원했다. 1864년 하와이에 첫 발을 내디딘 그는 호놀룰루 근교의 아피마뉴 대신학교에서 약 2개월 간 수학한 후, 그 해 5월 호놀룰루대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푸노(Puno) 지역에서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한 다미안 신부는 1865년 코할라(Kohala)로 옮겨 원주민들의 인습과 싸우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성당을 짓고 섬 곳곳을 돌아다니며 미사를 봉헌했다.
1865년 하와이 군도에 한센병 환자가 급격히 늘어나자 하와이는 감염된 환자를 격리 수용하는 법을 제정했고, 이에 따라 한센병 환자들은 몰로카이(Molokai) 섬에 격리 수용됐다. 1873년 몰로카이 섬의 참상을 전해들은 다미안 신부는 33세의 나이로 그곳에 자원해 700여 명이 넘는 한센병 환자들을 사랑과 자비로 돌봤다. 그는 처음부터 스스럼없이 한센병 환자들에게 다가갔고 자신이 한센병에 걸리지 않아 환자들 고통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을 정도였다. 그는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1881년 하와이 정부로부터 ‘카라카우아’ 훈장을 받기도 했다.
다미안 신부는 1885년 자신도 한센병에 전염된 것을 알았으나 용기를 잃지 않고 환자들을 돌보다 결국 1889년 4월 15일 선종했다. 그의 유해는 1936년 몰로카이 섬에서 벨기에로 옮겨 안장됐다.
다미안 신부는 선종 즉시 시복시성 절차가 이뤄질 듯 했지만, 성인품에 오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선종한 지 103년이 지나서야 1992년 7월 시복 대상자로 확정됐고, 1995년 6월 4일 벨기에 브뤼셀의 퀘켈베르그 대성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이후 지난해 7월 교황청 시성성은 10년 전 하와이에서 한 은퇴 여교사가 다미안 신부의 전구로 말기 폐암이 치료된 것을 기적으로 인정해 복자 다미안 신부의 시성을 예고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10월 11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성인 반열에 올랐다. 다미안 신부는 이에 앞서 2005년 벨기에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가톨릭신문, 2009년 10월 18일, 곽승한 기자]
교황, 다미안 신부 등 5명 시성식 거행
‘몰로카이섬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복자 다미안 신부(1840~1889년)가 성인 반열에 올랐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10월 11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한센병 환우들의 목자로 헌신한 다미안 신부 등 5명의 복자들에 대한 시성식을 거행했다.
교황은 시성식 강론에서 “오늘 탄생한 새로운 성인들은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면서까지도 하느님의 숭고한 뜻을 저버리지 않았던 사제와 수도자들”이라면서 “우리 모두를 당신 앞으로 초대하며 새로운 성인의 탄생이란 거룩한 은총을 허락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벨기에 출신의 다미안 신부는 1873년 33세의 나이로 하와이 몰로카이섬에 자원해 한센병 환우들을 사랑과 자비로 돌보다 자신도 한센병에 전염돼 1889년 4월 15일 49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이날 새롭게 성인품에 오른 인물 중에는 폴란드의 지그문트 펠린스키 대주교(1822~1895년)도 포함됐다. 또 스페인 도미니크회의 프란치스코 콜 기타르트 신부(1812~1875년)와 스페인 출신의 트라피스트회 수도자 라파엘 아르나이즈 바론 수사(1911~1938년)도 나란히 성인이 됐다. ‘가난한 이들의 작은 자매회’ 창립자인 쟌쥬강 수녀(1792~1879년)도 성인품에 올랐다.
이날 시성식에는 한국에서 전 수원교구장 최덕기 주교와 수원교구 평택대리구장 김화태 신부, 성 라자로 마을 원장 조욱현 신부, 라자로돕기회 봉두완 상임고문 등이 참석했다.
[가톨릭신문, 2009년 10월 18일, 곽승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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