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강인한-
어려서 넘어졌을 땐
흙 털고
무릎에 빨간 약을 발랐다.
오후가 되자 아내는
고만고만한 화분들에 물을 준다.
관음죽은 중년을 넘어 나보다 키가 크다.
바위틈에 지초처럼
나도 깊은 몸속 쓸개에 돌 하나 얻어 키운다.
이따금 못 알아본다고 떼쓰기도 하지만
흐르는 물에 달을 떠내려 보내듯
어둠 속에
황소가 물소리로 우황을 앓는 밤.
돌은 빨갛게 꽃도 피울 것이다.
-일찍 피는 꽃들/조 은-
일찍 맺힌 산당화 꽃망울을 보다가
신호등을 놓친다
해마다 이맘때면 나는 영화의원 앞
신호등을 제때 건너지 못한다
꽃망울을 터뜨리는
그 나무를 보고 있으면
어떤 기운에 취해
돌아갈 수 없는 곳까지 와버린 듯하다
언젠가는 찾아 헤맬 수많은 길들이
등 뒤에서 사라진 듯하다
서슴없이 등져버린 것들이
기억 속에서 앓고 있는 곳
꽃망울이 기포처럼 어린 나를 끓게 하던 곳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그 꽃나무 어딘가에 있는 듯
나는 신호등을 놓치며
자꾸 뒤를 돌아본다
-꽃과 아이/최동문-
꽃말이 배꼽 밑으로 떨어진다.
그녀는 수출용으로 실리는 꽃잎을 만든다.
밤이 지날수록 그녀는
잠근 단추를 하나씩 풀고,
전화선을 뽑고 싶다.
빨간 꽃잎은 하얀 눈동자 속에서 열린다.
그녀는 아이를 낳았다.
밤에서 걸어 나온 물빛 머금은
가슴 뛰는 아이는 깊고 푸른
밤의 갈채로 몸을 씻는다.
외로운 그녀와 그가 만나면 마을이 된다.
마을은 긴 시장을 세우고
그녀와 그는 시장에서 꽃을 산다.
만든 꽃도 곱다.
화병에 꽂으면 보기가 좋다.
만화 보는 아이와 화병이 어울린다.
아이는 어른이 되어 간다.
꽃은 마른다.
행복은 만져질까?
그녀와 그는 빈 들을 일군다.
빈 들이 꽃으로 가득 차면
먼 곳을 보는 눈은 지평선과 닿을까?
아이는 만든 꽃에 볼을 댄다.
아이의 입술에서 꿈 냄새가 난다.
-저마다, 꽃/이종암-
사월 산길을 걷다가, 문득
한 소식 엉겁결에 받아 적는다
-저마다, 꽃!
연두에서 막 초록으로 건너가는
푸름의 빛깔 빛깔들
제 각각인 것 모여, 사월의 봄 숲
총림(叢林)이다
굴참나무 너도밤나무 개옻나무 고로쇠나무
단풍나무 소나무 오동나무 산철쭉 진달래
산목련 아까시나무 때죽나무 오리나무 층층나무
산벚나무 싸리나무 조팝나무 서어나무 물푸레나무……,
꽃을 가졌거나 못 가졌거나
몸의 구부러짐과 곧음
색깔의 유무와 강약에도 관계없이
온전히
함께 숲을 이루는 저 각양각색의
나무, 나무들
사람들 모여 사는 세상 또한, 그렇다
저마다 꽃이다
사람이 꽃이다
-옛집 마당에 꽃피다/김선태-
옛집 마당을 숨어서 들여다본다
누군가 빈집을 사들여 마당에 텃밭을 가꾸었나
온갖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울며 맨발로 뛰쳐나왔던 내 발자국 위에
울음꽃 대신 유채꽃 고추꽃 환하다
어머니 아버지 뒤엉켜 나뒹굴던 자리에도
언제 그랬냐는 듯 깨꽃 메밀꽃 어우러졌다
불화의 기억 속으로 화해가 스민 것인가
가만히 귀 기울이니 식구들 웃음소리 들린다
폭력의 아버지도 눈물의 어머니도
뿔뿔이 흩어졌던 형제들도 모두들 돌아와
마당에 꽃으로 웃고 있다
슬며시 옛집 마당에 들어가 꽃으로 서본다
-꽃피는 시절/이성복-
멀리 있어도 나는 당신을 압니다
귀먹고 눈먼 당신은 추운 땅속을 헤매다
누군가의 입가에서 잔잔한 웃음이 되려 하셨지요
부르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생각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당신이 올 때면 먼발치 마른 흙더미도 고개를 듭니다
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나를 알지 못하고
나를 벗고 싶어 몸부림하지만
내게서 당신이 떠나갈 때면
내 목은 갈라지고 실핏줄 터지고
내 눈, 내 귀, 거덜난 몸뚱이 갈갈이 찢어지고
나는 울고 싶고, 웃고 싶고, 토하고 싶고
벌컥벌컥 물사발 들이키고 싶고 길길이 날뛰며
절편보다 희고 고운 당신을 잎잎이, 뱉아낼 테지만
부서지고 무너지며 당신을 보내는 일 아득합니다
굳은 살가죽에 불 댕길 일 막막합니다
불탄 살가죽 뚫고 다시 태어날 일 꿈 같습니다
지금 당신은 내 안에 있지만
나는 당신을 어떻게 보내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막만한 손으로 뻣센 내 가슴 쥐어 뜯으며 발 구르는 당신
-꽃/오봉옥-
아프다, 나는 쉬이 꽃망울을 터트렸다.
한때는 자랑이었다.
풀섶에서 만난 봉오리들 불러모아
피어봐, 한번 피어봐 하고
아무런 죄도 없이 상처도 없이 노래를 불렀으니
이제 내가 부른 꽃들
모두 졌다.
아프다, 다시는 쉬이 꽃이 되지 않으련다.
꽁꽁 얼어붙은
내 몸의 수만개 이파리들
누가 와서 불러도
죽다가도 살아나는 내 안의 생기가
무섭게 흔들어도
다시는 쉬이 꽃이 되지 않으련다.
-꽃 피고 지는/이 령-
A.
꽃 핀 자리
가지가 휘었다 꽃차례로 화분에 칼자국이 늘었다 여자는 엄마의 손가락을 잘라 흙속에 묻었다
비 오고 바람 불고 달빛 창을 넘는 사이 썩은 손가락에서 별 빛 새순이 돋았다 여자는 양철지붕
에 비드는 날이면 피 냄새에 놀라 꽃잎을 뚝 뚝 뜯었다
꽃 핀 자린
무한, 유한, 복합
어긋나기, 돌려나기, 마주나기
꽃 핀 자린
비밀, 어둠, 잘린 손가락 속에 숨어있던 기억들의 아우라
꽃을 오래 보기위해 여자는 화분을 음지로 옮겼다 핏기 없는 엄마는 침대에 누워 파라미타를 꿈
꾸었다 아상, 인상, 중생상 너머 보살이 되려 했지만 되려 화분에 새겨진 빗금 하나 지워내지 못
했다
B.
꽃 진 자리
빛이 사라졌다 화분에 칼자국이 지워지고 있었다 여자는 흙속에 묻어둔 손가락을 까맣게 잊었다
그림자 없는 창으로 화분을 돌렸다
꽃 지고 잎 피나 잎 지고 꽃 피나 무릇무릇 사랑이라 부르던 것들은 까마득 사라졌다 사이 나무는
하늘에 오르는 꿈을 꾸었다 구름에 앉았다 느닷없이 동인(動因) 하는 꿈, 새 화분을 들였지만 더
이상 꽃 필 기미 없었다
꽃 진 자린
자웅동주, 자웅이주 할 것 없이
진물이 흐르고
꽃부리, 꽃덮이
그 흔적마저 거두었지만
꽃 진 자린
소멸, 침묵, 환생,
한때 스스로 빛나던 것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오랜 기다림 이란 걸
여자는 깨진 화분 파편을 가슴으로 모으고 있다 화분과 여자는 동숙이다 기꺼이 잘린 손가락을 지
탄(指彈)하지 않던 엄마,
꽃 진 자리는 새로 필 꽃을 위해 휘어지도록 우거졌다
-꽃을 던지다/이인원-
選拔式을 고수 하는 저승길엔
發病도 안 된 발병 따위는 핑계거리도 못 되고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물론
온 세상을 다 버리고 가셔도 천만리는 거뜬하게 보장된 여정
호명 되자마자 벌써 푸른 구름 너머로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健脚들
이승의 법은 아직 선착순이어서
마음도 한 발짝도 못 붙여두는 先發에만 급급한 마음과
찢어지게 슬퍼도 속울음의 바닥까지는 못 내려가는 蹇脚이 될 뿐
가슴에 묻는다는 거룩한 말도
어쨌든 내 심장은 잘 뛰고 있다는 말
다만 망자에 대한 마지막 인사로
꽃다발 하나 멀리 던지고 돌아서는데
예의상 커튼콜까지 꾹 참고 앉아 있던 오페라 관객처럼
삼일장을 잘 치러낸 질긴 분홍 항문에 바치는 헌화였네 아니,
개똥밭에 잡초 보다 무성한
죽고 싶다는 말의 뿌리를 힘껏 뽑아 던졌던 것이네
벽에 똥칠할까 두렵다는 걱정도
하늘이 무너진다는 넋두리도
해골 보다 더 오래 굴러다닌, 선착순 일등의 구린 거짓말
-꽃과 가시/강원호-
누구나 하나씩
가시를 품고 산다
가장 행복한 때라도
갑자기 눈물나게 하는
가시를 품고 산다
누구나 하나씩
꽃을 안고 산다
가장 슬플 때라도
눈물보다 아름다운
꽃을 안고 산다
누구라도 한 병씩
눈물을 품고 산다
꽃이 가시에 찔리어
흘린 진액을 모아
가슴에 안고 산다
-시든 꽃/이선영-
저 꽃의 영혼은
추워서 방으로 들어갔단다
추운 집밖을 나서다 보니
시든 꽃 한송이
영혼이 저만 따뜻한 곳 찾아 들어가버린
아니면 시들어가면서 꽃이
영혼 먼저 들여보냈나?
영혼이 놓아두고 간
시든 꽃잎들은
이제 아무데로나 떨어져내릴 것이다
추위를 견딜 마지막 힘조차 잃었는가
방 안에서 잠시 쉬었다
봄이 되면/다른 꽃을 찾아들리
꽃들은 끝내 시들고
시들지 않는 영혼만이 천년 만년
새로운 꽃으로 옮겨 다닌다
-꽃들1/최동문-
장미는 로사. 시계가 멎었다. 로사! 얼굴만 있구나. 로사? 어린 너만 있구나.
로사, 새벽 앞이다. 닭은 울지 않고 강물만 눈물만 쌓이는구나. 그래서 웃는
다. 로사.
민들레꽃은 누구나 어른. 하얀 꽃, 노랑. 뒤엉켜 피더니 오늘 하나 없이 씨앗
으로 날았다. 둥근 날개 하나씩 달고 맨 몸이 하늘은 나는 성체.
패랭이! 너는 고요히 번지는 법이다. 번지고 나면 마른자리로 앉는 법을 배운
다. 피어있어도 숨 드러나지 않는 그늘. 그늘의 키로 스민다.
할미꽃 뿌리 뽑아 변소에 넣었다. 땅 파서 묻은 항아리 변기 속에 구더기들이
할미꽃 뿌리를 넣은 다음날 하얗게 죽어 있었다. 할미꽃은 꽃보다 뿌리가 무
서웠다. 뿌리는 독이었다.
모란? 엄마가 생각나면, 모란이 엄마를 부르던 그 오월이 생각나면, 따가운
눈물이 갈라진 주름살로 흐른 엄마가 생각나면, 댓바람에 맞아서 그렇게 눈
물이 나는 엄마를 보면. 이제 아픈 것을 새벽 문 앞에 갖다놓았다. 까치가 아
침에 물고 갔다.
-꽃/이여원-
관은 처음 흰색의 여백이지만
채색하고 마르기를 기다리면
시신 하나를 담고 꽤 오랫동안 버틴다
그 사이
꽃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그림을 그렸고 그림자를 조절했다
꽃들은 향기를 주지 않았고 조용한 정물만 허락했다
죽은 사람은 부끄러움을 모르지만
관은 부끄러움을 아는 존재
꽃은 부끄럼을 몰랐고 또 알았다
손가락으로 지목하면 누구나 당황하듯
내장을 보여준다는 건
살면서 가장 큰 용기다
잇몸을 드러내는 꽃에게는 나비가 피해간다
꽃 속의 과제, 기다란 관을 허락한다
을과 갑이 바뀐 질서 속에서
그러니까 사람은 전생이고
관은 후생이라고 믿는다면
나비는 죽고 꽃은 마른다
관의 어디까지가 나비 것이고 꽃의 일부인지
그림그리기가 쉽지 않다
채색으로 무지를 덮는다
어둠 속에서 한 마리 나비가 또 날아든다
가볍게 붓끝을 나비처럼 팔랑 그려봐,
가끔 물감이 말을 건다
북 대서양을 넘어 화란까지 나비들이 날아갔다
꽃이 완성되자 향기가 얹혔다
며칠이 지나자 꽃잎이 떨어졌다
-상처의 꽃/이경숙-
손가락에도 심장이 있는지
감싸 쥐면 쥘수록
팔딱이며 열이 난다
첫사랑, 그 남자의 뜨거운 체온 같은
빨갛게 달아오른 손을 보며
손톱 밑에 박힌 가시를 찾는 밤
퉁퉁 부어 커진 손가락을 보다가
첫사랑, 그 남자가 손끝에 닿으면
숨 막히도록 예민하게
온몸을 곤두세우던 날들을 생각한다
찌릿하게 심장은 쿵쾅 거리고
마주 잡으면 따뜻한 손
캄캄한 밤을 못 견디고 하르르 무너질 때
검붉은 화농을 따뜻한 손으로 꾹꾹 짜내며
첫사랑, 그 남자가 떨면서
아프지 마, 아프면 안 돼
꽃이 툭 떨어진다
꽃송이가 다 상처다
-꽃 필 때 같이 잤다/박연준-
추락할 줄 알면서 날아가는
연(鳶)의 의지
봄은 난청이다
휘청대는 것은 잠이 아니다
잠을 나눠가진 연인들의 조약돌
욕실 바닥을 기어가는 하루살이는
더듬더듬 날개를 잊고,
날벌레는 죽을 때 되면 기어가나?
그 작은 등에 내 전부를 얹어볼까
가벼이, 다시
돌아가
날아볼까
거꾸로 보면
바다의 하늘은 바다
하늘의 바다는 하늘
-꽃의 북쪽/우대식-
개구리도 겨울잠에 들고
싸락눈이 내리는 밤
마쓰오 바쇼*,
이런 날은 늘 바람이 창호문을 두드렸지
화로에 술을 데우도록 하지
낡은 신발은 방 안 머리맡에 놓아두도록 하지
왜 마음이란
천리만리 달아나는 것인지
조금은 뜨거운 술을 천천히 내장에 붓고
매화나 동백 같은 꽃을 기다리기로 하지
아니면
꽃의 북쪽으로 달아날까
신음처럼 그대가 내게 물을 때
나는 절망의 심줄을 활시위처럼 당겨
심장 가장 먼 뒤쪽으로 모든 생각을 모으곤 하지
마쓰오 바쇼,
조금 추워도 되겠지
유여(裕餘)한 봄빛이 마루 구석 쌀통에 넘칠 즈음이면
안개와 연기는 강줄기를 따라 무진 무진 흐르겠지
그대와 나도
이쯤에서 안녕이지
연기를 좋아하는 나와 안개를 좋아하는 당신
바람이 놀 때까지만 지상에 기대기로 하지
이쯤에서 안녕이지
*17세기 일본의 시인. 정식 이름은 마쓰오 바쇼[松尾芭蕉]. 본명은 마쓰오 무네후사[松尾宗房].
17음절 하이쿠에 불교 선종의 정신을 불어넣고 이 형식을 널리 인정받는 예술 표현수단으로 만들어,
17음절 하이쿠 형식의 의미와 전통을 풍부하게 해주었다.
-늦게 피는 꽃/김효선-
내 손금 어디에 느지막이
내게로 들어오는 사람이 있는 것인지.
꽃이 지고 난 뒤에야 꽃을 피우려
굳은 땅에 삽질하려 하는지.
눈물이 다 마르고 난 뒤에야
갯벌을 밀어 소금밭을 만들려하는지.
태어날 때부터 국적이 없는 사람들,
땅을 밟는 것조차 불법인 그들의 무덤은
물 속 혹은 모래 속.
그러나 살아야하는 이유,
휘발되어 어디론가 사라지기 전에
물꽃으로 모래꽃으로 피어나
또 다른 생으로 붙박이는 일.
내 손금 어디에 느지막이 피는
꽃이 있어
나를 살게 하는 것인지.
[돌샘 이길옥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