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정작전이란 군에 의하여 무지비한 총칼로 다스리는 군정(軍政)이 아니라 특수 훈련된 민사심리요원에 의하여 지역주민을 선무하는 작전을 말한다.
필자는 한때 세계 민사군정작전을 연구한 적이 있었다. 세계군정사는 물론 제2차대전시 독일의 동방성(우쿠라이나, 발트국, 백러시아, 터키와 코카사스)의 군정사,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군정사(조선, 만주국, 남방점령지, 인도네시아, 버마, 대만), 미국의 유럽 군정사(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독일)에 이어 태평양 지역(괌, 사이판)의 군정사를 연구했다.
1. 미군의 공격준비 전 단계
1944년 6월 15일 사이판을 해방하기 위하여 미 해군의 군사작전과 병행하여 미군 민사작전부대가 섬에 상륙했다.
최초의 민사심리장교는 소수인으로 구성된 참모요원으로 미 해군 지휘관에 배속이 되었다.
그러나 군정장교가 다른 참모의 업무에 비해 그 규모가 크고 중요한 사실이 밝혀지자 많은 참모장교가 추가되었고 임무와 가능이 세부적으로 명시되어 참모진의 구조가 행정부(行政府)와 비슷한 기구를 갖게 되었다.
민사작전의 계획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보급문제였다. 모든 기구는 식량, 주택, 의류, 일용품을 군정기구에 의존하고 있었다. 즉, 섬의 모든 물자와 생필수품이 미군 포화로 시설이 파괴될 것으로 예상이 되었으며, 물자, 시설, 식량, 급수, 의약품 획득 수단은 군 계통으로 통하여 마련되어야 했다. 또한 군 작전을 하는 동안 시민생활을 위한 물자공급은 아주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 예상되었다.
따라서 군 공격 이후에 예상되는 사망자와 부상자 치료, 전범자 분류, 재판, 주민통제, 노무자 인력 활용, 주택 보수, 도로 개선, 급수, 식량지원 등등 일어날 수 있는 문제를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하도록 하였다.
2. 공격단계
1944년 6월 15일 공격 초일 군부대의 후속으로 민사장교와 사병들이 해안에 상륙하였다.
상륙한 민사작전 장병들은 점령포고령을 붙이고 이외에는 민간인 나타날 때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생존수단만을 강구하고 있었다.
수일이 지나자 민간인이 10여 명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민사장교들이 이들에게 전화선으로 경계선을 표시하면서 밥을 먹여 주었더니 1주일도 못 가서 800여 명의 인원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민사장교들은 필요 이상으로 주민이 모여들어 보호하자 여기에는 수용과 급식에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래서 미군에 충성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구분하여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람에게는 1일 3식을 제공하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2식을 공급하였다. 또한 병사 1명과 주민 대표 1명이 각각 반을 편성하여 식당을 만들고 수용소를 만들었다.
한편 미 해군은 공공보건처(Public Wealth Department) 기능을 살려 광범위한 보건임무를 수행하였다. 의료시설은 각 수용소마다 설치하였다. 해군의 군의장교와 위생병이 원시적이고 가장 어려운 상황 하에서 영웅적인 활동을 하였다. . 그리고 경험이 있는 괌과 사이판인들을 의사를 모두 재고용시켜 주민들에게 무상으로 치료를 해주었다. 또한 각 부락마다 해군 위생병의 감독 하에 의무실이 개설되었다. 환자 중에 중환자는 해군병원으로 이송하였고, 예방주사 접종도 섬 전체에 시행되었다.영양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에 많은 질병들이 있었고 주민들의 저항력도 낮았다. 막사에 대한 소독은 매일 실시하였고 위생검열을 일과 중 가장 주요한 행사가 되었다.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서 의무반은 수돗물에 대한 검사를 엄격히 실시하였다. 특히 전기시설이 없어 야간에는 석유등을 활용하여 산실(産室)과 야간 장례에 치렀다.
카톨릭 신부는 시간 날 때마다 막사에 와서 미사도 올리고, 어린이들에게 세례도 해주고 사자(死者)의 장례를 주관했다.
이와 같이 섬 주민들을 친절하게 치료해 주자 섬 주민들은 미군을 은인으로 알고 미군의 활동에 적극 지지를 얻게 되었다.
3. 군정초기 활동
초기에 물자수송은 군용트럭이었다. 이 군용트럭을 이용하여 환자를 병원에 호송했고 우편물을 운반하고, 사령부에서 군정기관이나 민간행정관에게 명령이나 지시물을 송달하였다.
농업처에서는 농장으로 보급물과 소독약품을 운반해주고 필요한 물자를 운반해주었다.
군정 초기 단계에서는 화폐가 거의 사용하지 못했다. 상점도 없었고 매매재도는 거의 볼 수가 없었으며 배급개념만 있었다. 상점이 열린 날자가 10월중이라 정해졌다, 그것은 아주 소규모 상점으로 구포품만 취급하는 것이었다. 계획단계에서 주민의 의복 배급은 계획되지 않았다, 그러나 섬에는 의복이 부족하였다. 그래서 미국 적십자사에는 약 10 만 벌의 의복을 준비해서 배급을 했으나 그것도 적어서 만족시켜 주지를 못했다.
식량보급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대부분 주민들은 맨발로 인한 무좀 등 질병이 심했기 때문에 신발이라고 하면 무엇이든지 얻으려 했다. 특히 미군이 공급하는 군화는 일본인의 발에 맞지 않았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적십자사와 기타 자선단체가 의류를 보내와 의복 사정이 완화되기 시작했다.
4. 교육의 부할
구호 및 의복 어느 정도 해소되자 주민들은 교육문제가 중요시 시작하였다. 그래서 9월부터 구교사들이 모임을 갖고 10월 중부터 5개 학교를 개소를 열었다. 교재는 교과서로 복사해서 보충되어 사용하였고, 용지와 백묵, 연필들이 상당 양이 군에서 지원되었다. 전투가 심한 지역에서는 임시학교를 지었는데 지붕은 야자수 덮었고, 기둥은 야지수로 만들었다. 학교운용이 종전과 같이 정상화 되자 여러 가지 행사계획도 추진되었다.
이 섬은 가족분위기에서 사회분위기로 전환하기 위해서 보이스카우트와 걸스카우트 제도를 도입했다. 이러한 지도는 군정요원 중에서 이러한 활동에 경험 있는 전문가를 추천해서 지휘를 맡았다.
주민들이 어려운 일이 생기면 복지처로 찾아왔다. 복지처는 주민과 전투부대건의 중개 역할을 도맡아야 했다.
5. 군정기관의 입법기능
법제처의 최초임무는 군정기관의 존재를 주민들에게 알리고 포고문 초안을 작성하는 일이었다. 미군은 도시를 탈환한 후에는 포고문을 붙였다.
포고령 내용은 전쟁의 상황 설명과 모든 정부의 권력은 군정기관에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권력, 법룰, 모든 규칙은 무효임을 선포하였다. 군사안정에 방해가 되지 않는 한 주민들의 관습, 신앙, 재산은 존중되며, 그들의 정상생활 회복을 약속하였다.
6. 경제문제
경제활동을 적절하게 통제하기 위한 기구를 갖는다는 것은 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후 얻어졌다. 맨 처음에는 경제 및 노무처가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용 가능한 노동력은 25명이 단위가 되어 감독관을 두고 노무반에서 파견된 사병의 지휘 하에 조직이 되고, 노동자는 등록이 되어야 고용을 했다.
전투 초기에 노동자들은 수용소에서 아침 일찍 인솔해갔고, 점신은 전투부대에서 지원받고, 저녁에는 수용소로 되돌아갔다. 군사시설 건설이 시작되자 노동력은 대단히 부족하게 되었다.
노무처는 노동시간 및 임금을 통제해야 했다. 초기에는 노동자의 기술정도에 따라 분류했으나 섬 전체가 정상화 되자 직업별로 차별을 두게 되었다,
상공처는 최초에는 2개소의 도매상사를 설치되었다. 소규모 상품을 팔기 위해 촌락마다 설치했으나 물자가 부족하여 소판매소는 무제한 늘리지를 못했다. 상륙 3개월이 지나자 상업 활동이 정상화가 보이기 시작했고, 군정기관의 부담을 줄여갔다. 최초부터 보급물자는 부족으로 모든 상품은 정가제로 가격을 정했다. 이렇게 정해진 상품질서를 위법하면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농수산처가 농장의 관리, 작업방법의 개선, 새로운 품종 개발, 효과적인 축산 방법 등을 권장했으나 이곳 원주민은 새로운 방법에 대해서 무척 싫어하여 전통적인 방법을 버리려 들지 않았다. 물소가 있는데 복잡한 트랙터를 사서 경작을 하려고 하지 않았으나 군정기관의 노력으로 숫자가 조금씩 늘어갔다.
보급처는 은행이 생기기 전까지 은행 업무를 수행하였다. 원화를 수집해서 영수증을 발급해주었고, 그 후 재무성에서 미화로 보상해 주도록 결정을 내려주었다.
시설처는 섬 전체의 주택시설을 섬 전체에 걸쳐 복구뿐만 아니라 행정용 집기를 제작하고, 학교용 책상과 의자, 가정용 가구도 제작하였다,
안보처는 해병대 장교의 지휘 아래 주민경찰이 주체가 되어 경찰 기능을 수행하고 순찰임무를 수행하였다.
정보처는 전쟁초기에 시민의 검색 업무를 수행하여 일본과 내통한 사실이 있다고 생각되는 주민을 사전에 조사를 실시하였다.
문화처는 주민들에게 영화상영 및 음악을 가르쳐주었으며 주민들 춤도 구경하였다.
7. 민사군정작전 결과
필자가 보기에 세계전생사 가운데 가장 합리적인 민사군정작전이 괌과 사이판에서 실시한 작전으로 보고 있다.
민사군정작전 요원들이 임무를 마치고 괌을 떠날 때 섬 주민들은 막사 위에 올라가 성조기를 흔들면서, “미군이여, 괌에 다시 돌아오라” 노래를 부를 때, 미군의 민사장교와 해군의 의무장교 및 사병들은 가슴이 뿌듯했으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오늘날 괌과 사이판이 미국의 영토가 된 이유는 미국의 국가 이익도 있겠지만, 바로 미 해군의 민사심리 작전요원의 효율적인 작전결과라 볼 수 있다.
8, 교훈
1. 오늘날 미국이 강대국이 된 이유는 전쟁물자가 풍부함에도 기인되지만 휴머니즘 정신이 다른 나라에 비해 강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2. 전쟁초기부터는 민사심리작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사전에 면밀한 준비를 하였으나 초기에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경험하면서 요령을 터득하여 주민의 품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3. 미군 가운데 가장 우수한 엘리트는 육군보다 해군으로 조직력과 통제력. 단결력이 강하다.
4. 통제 대상은 일본군 잔재세력과 원주민이었으나 섬이 주는 따뜻한 환경 요인과 충분한 보급, 치료, 주민의 호응에 의해 질서 있게 민사작전이 진행되어 갔다.
5. 사이판을 지배한 스페인이나 독일, 일본보다는 원주민들에게 더 자유스럽고, 이익이 되고, 배울 점이 많아 독립보다는 미국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고 본다.
" 오늘날 우리 주변 국가 가운데 어떤 국가가 우리나라에 이익을 많이 줄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