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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에게나타나신부활의주
누가복음 24:13-27
1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19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부활의 날에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16장을 보면, 그들 역시 몇몇 여인들의 빈 무덤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자들이지만 헛소리로 여기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낸 후 안식일까지 준수한 다음 그들의 고향인 엠마오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즉, 부활의 날 주일 오후에 그들은 슬픔으로 가득한 채 집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까지는 약 11킬로미터 되는데 걸어서 2-3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누가복음 24장 14절과 15절을 보면, 그들은 지난 한 주에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일 아침에 몇몇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다녀온 이야기에 대해서도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그 여인들이 헛것을 보고 헛소리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상심한채 걷고 있는데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가가셔서 함께 걸으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대화에 합세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누가는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16절)
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리어져서”라는 단어의 원어는 (에크라툰토)라고 되어 있는데 (크라데오)라는 동사의 과거형 피동태입니다. 즉, 그들의 눈이 외부의 어떤 요인에 의해 가리어져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이에 NLT(New Living Translation) 같은 영어 버전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가리웠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물론 두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을 전혀 기대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걷는 동안 ‘계속’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눈은 예수님을 보고 있었지만 그들의 지각과 마음은 예수님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였습니다.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분명히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31절을 보면 그들이 주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다가 ‘갑자기’ 알아보게 됩니다. 이때 31절 역시 하나님의 간섭 때문에 그들이 주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을 암시합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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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문맥으로 볼 때 그 두 제자가 주님을 알아보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뜻에 따라 그들의 지각과 마음이 닫히기도 하고 열리기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제자를 따라온 낯선 사람, 즉 예수님은 그들의 대화를 계속 듣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무거운 상태에서 서로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질문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웠습니다. 어느 순간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당신들이 걸어가면서 서로 주고 받은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들은 잠깐 서서 주님을 똑바로 보았습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슬픈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낙심과 절망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난 주에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끔찍한 사건들 및 그후 제자들 사이에 들린 몇몇 여인들이 전한 이상한 이야기 때문에 멍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예수님의 질문을 받은 그들은 도대체 예루살렘에서 발행한 일을 모르는 사람도 있는가 하고 의아해 하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들 중에 글로바라는 제자가 예수님의 질문에 답변합니다.
“당신은 우리처럼 유월절 때문에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것 같은데, 그곳에서 최근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는 말이오? 어떻게 온 세상이 아는 일을 당신 혼자만 모를 수가 있소”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들이 답변합니다.
“나사렛 예수님에 관한 일인데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씀과 능력을 나타내던 선지자였소.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통치자들이 그분을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지요. 우리는 그분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라고 단단히 믿고 바랐는데 이렇게 십자가에 죽고 말았답니다…. 그런데 더 이상한 일은 그분은 십자가에서 삼일 전에 죽었는데 오늘 아침 새벽에 몇몇 여인들이 그의 무덤에 갔다가 그분의 시체를 보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천사들이 나타나서 그들에게 하는 말이 예수께서 살아나셨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럼에도 우리와 함께 하는 제자들 중에 두어 사람이 확인해 보려고 무덤에 가보았는데 정말로 여자들이 말한 것처럼 예수님의 시신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한 제자는 예수님이 부활하였다고 말하였고 대부분의 다른 제자들은 헛소리 하지 말라며 조용히 입 닥치고 있으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지금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도 거의 혼동 상태에 있습니다.”
두 제자는 계속해서 그들과 함께 걷고 있는 예수께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일들에 대해 상세하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분이라는 소망을 가졌었는데 지금은 그 소망이 사라졌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들의 상태는 나머지 제자들의 상태와 똑같았습니다. 즉, 예수님의 죽음은 제자들 모두의 기대에 종지부를 찍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들의 소망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들의 소망은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정결하게 하시고 나아가 로마 제국으로부터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여 뭇 나라 위에 세울 메시아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주의 참된 백성을 로마 군대의 박해에서, 가난에서, 병마에서 구해 줄 메시아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버린 것입니다.
두 제자와 함께 걸으시던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의 구속에 대한 그들의 오해를 바르게 잡아주어야 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이 그릇된 메시아 관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그릇된 개념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무지를 바로 잡아주셔야 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부활하신 주 예수님은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면서 그들의 그릇된 메시야 관을 고쳐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교훈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강림하신 후 비로소 주의 참된 제자들은 이스라엘의 구속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올바르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21절에서 개역개정이 “이스라엘의 속량”이라고 번역한 원어는 (루트로우)인데 그 원어의 의미는 어떤 사람의 빚을 대신 지불하여 노예 상태에서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약과 신약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구속의 개념은 죄로부터의 속량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의 독생하신 아들 예수께서 주의 백성의 죗값을 지불하도록 이 땅에 보내신 것이며, 예수님 역시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 생명과 보혈로 그의 백성의 죗값을 친히 지불하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죄와 마귀로부터 자유하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정치적인 자유나 경제적인 자유가 이스라엘의 구속이 아닙니다. 물론 주의 피로 값주고 산 모든 주의 백성들은 궁극적으로 주님처럼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여 새로운 땅과 하늘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배고픔과 가난도 없을 것이며 정치적인 압박도 없을 것입니다. 오직 완전한 풍성함과 자유함 가운데 한없는 지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리스도의 구속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며 이를 위해 지불해야 하는 것은 죄인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의인의 생명입니다. 따라서 의인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율법에 따른 형량을 지불함으로 그 피로 값주고 산 자들은 죄와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마침내 예수께서 그 두 제자에게 책망하는 투로 말씀하십니다. 근엄하며 권위있는, 그러나 확신을 주는 답변을 하십니다. 하지만 아직 그 두 제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눅 24:25-27).
예수께서 그들을 향해 “미련하다”라고 하신 뜻은 “어리석다”는 뜻으로서 생각이 짧고 성경을 제대로 모르니 현재 발생하는 상황에 대해 전혀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말씀하신 것은 마음이 둔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성경의 진리와 권위보다 자신의 작은 머리와 경험을 의존하는 상태로서 영적인 일들과 진리에 둔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마음으로 진리를 붙들지 못하였으므로 무지와 절망에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예수께서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이라고 한 것은 구약 성경 전체를 말합니다. 즉, 제자들이 성경을 믿는다면 빈 무덤에 대한 여자들의 보고를 믿었을 것이며 따라서 주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지자들을 통해 하신 말씀을 알지도 못하였고 전혀 믿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그들은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 중에 부분적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 전체가 말하는 골자를 놓쳤던 것입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영광 가운데 오신다는 것만 믿었습니다. 그들은 고난 받는 종에 대한 선지자들의 예언은 건너 뛰었고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이 사실은 26절에서 분명하여집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예수님의 반문적인 질문은 강한 긍정을 의미합니다. 즉, 구약 성경 전체가 말하는 골자는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간다는 사실입니다. 메시아는 무엇보다 먼저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영광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죄가 들어온 이후 하나님의 경륜은 메시아가 이스라엘을 구속하기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구약에서 그리스도는 여호와 하나님의 고난 받는 종으로 예언되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모든 예언들은 먼저 그리스도의 고난이 오고 그 다음에 영광이 임하는 것으로 성취됩니다. 이를 위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이 모세와 모든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로 전달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영광을 얻는 그리스도는 받아들였으나 고난 받는 그리스도는 거절하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를 믿는데 있어서 십자가 사건은 그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중요한 목적은 고난을 통해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 백성을 위한 대속 제물이 되심으로 영광에 들어가셨습니다. 주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댓가를 완전하게 치르셨습니다. 따라서 고난이 먼저요, 그 후 영광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한편, 하늘 아버지께서는 죄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후 약속에 따라 그리스도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히심으로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현재 인자이며 그리스도이신 우리 주 예수님은 온 하늘과 땅의 왕이며 구주이십니다. 그분에게 모든 심판의 권세가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 속죄 제물이 되셨고 그후에 영광에 들어가신 사실에 서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모든 구약이 자신에 대한 위대한 파노라마인 사실을 두 제자에게 알려주셨습니다.
27절을 보니, 예수께서는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선자자들을 들어 구약 성경 전체가 예수님 자신에 대한 것임을 자세히 설명하여 주십니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예수님의 교훈 방법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Sola Scriptura!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말씀 전체가 그리스도 예수님에 관한 것임을 알려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시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도록 도우셨습니다. 부활하여 영광을 얻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성경이 자신에 대한 것임을 분명하게 한 후에 모든 성경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해석의 골자는 이미 살펴본 것처럼 26절입니다. 즉,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드디어 두 제자와 예수님은 엠마오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때는 날이 이미 저물었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께 함께 식사하고 그곳에 함께 묵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마지못해 그들의 간절한 청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손님으로 초대되어 식탁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식탁에 앉으시자 떡을 떼신 후에 축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떡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떡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밝게 열리면서 예수님을 온전하게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앗, 예수님이셨군요. 우리의 선생님이신 예수님을 우리가 아직까지 못 알아보다니!”
그때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면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 있었지만, 심지어 같이 있은지 벌써 꽤 오랜 시간이 되었지만 아직까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축사하시고 떼어 주시는 떡을 받자 갑자기 그들의 눈이 열리면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뜻입니다. 그들의 눈과 이성과 마음이 주 하나님 및 예수님에 의해 밝게 열려 부활의 예수님을 분명하게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아마도 주 예수께서 떡을 떼시는 모습과 행위, 그리고 감사 기도를 드리시는 특이한 모습으로 인해 그들의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보게 된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24장 44절 이하를 보면, 엠마오로 내려간 두 제자가 황급하게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열한 제자 및 여러 성도들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눅 24:44-47).
거기서도 예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셔서 성경을 깨닫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깨달을 때 알게 되는 골자는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골자가 중요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은 주의 백성의 죄사함을 위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복음이요, 영생의 길임을 분명하게 한 것입니다.
아무튼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사 그들이 성경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구약에 정통한 바울에게도 친히 나타나셔서 성경을 바르게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그는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이방인의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여 아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며 부활 승천하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을 통한 역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은 환상이나 허상이 아닙니다. 유령도 아닙니다. 그분은 시간과 공간의 역사 속에 실재하는 분이십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사상에 서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에 서 있지 않습니다. 심지어 어떤 올바른 도덕적인 교훈에 서 있는 것도 아닙니다. 철학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역사성과 그 실제 사건에 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역사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바탕입니다. 우리의 절대적인 소망입니다.
31절을 보니, 두 제자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자 그 순간 예수님은 그들이 보는 앞에서 사라지셨습니다. 31절의 뜻은 예수께서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방금 전에 그들과 함께 분명히 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주께서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 눈에서 사라지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부활과 함께 이제는 자신의 뜻대로 나타나기도 하시고 사라질 수도 있는 새로운 상태에 들어가셨습니다. 36절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완벽하게 봉인된 무덤에서 나오신 것처럼 이제 사방으로 잠긴 집 안으로 들어오셔서 나타나십니다. 요한은 그 장면에 대해 설명하기를 그곳은 밀폐된 공간이라고 진술하였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
지금 현재 우리로서는 부활체의 특성이 어떤 것인지 거의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영광의 부활체는 자기 뜻대로 현재의 시공간을 초월하여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인간의 오감을 초월하여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영광의 부활의 몸은 현재의 죄와 저주로 인하여 부끄러워진 썪어질 이 몸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부활의 몸은 영광의 몸이며 영원히 죽지 않는 불멸의 몸입니다.
예수께서 그들 앞에서 갑자기 사라지자, 두 제자들이 서로 말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32절).
그들은 낯선 어떤 사람이 나타나 성경을 풀어줄 때에 그들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뜨거워진 그들의 마음은 그 낯선 사람을 향한 진심과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 함께 식사하며 머물라고 간청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구든지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되면 주님과 식사하며 함께 거하게 됩니다. 현재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것은 성령 안에서 그분을 만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우리가 성령 안에 있으면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 불타오르고 거룩함을 향한 소원이 불타오르며 진리와 진실을 향해 가슴이 불타오르게 됩니다. 이러한 뜨거운 마음을 소유한 자들은 서로 간에 뜨겁게 진실함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 사랑 안에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과 기쁨과 평강과 소망이 가득합니다. 열정과 기대와 신기함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즉,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그러나 실제로 만났기 때문에 두 제자에게 나타난 똑같은 증상이 우리에게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믿음과 마음이 뜨거워져서 사랑의 열정으로 타오를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사랑이 뜨거워질 것이고, 그 사랑에 강권되어 성도들을 향한 사랑 역시 뜨거워질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 그리스도를 만납니까?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하신대로 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께서 두 제자의 마음을 뜨겁게 하기 위해 하신 일은 새로운 계시를 주신 것이 아니라 기존의 성경을 풀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올바르게 성경을 풀어주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어야 합니다. 올바른 설교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서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이 우리 마음 속에 임하면서 우리가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마음이 뜨거워질 것입니다.
부활하여 영원히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만난 두 제자는 당장 다른 제자들이 모여있는 예루살렘으로 달려갔습니다. 그곳에 이르니 열한 명의 사도 및 여러 성도들이 함께 모여 있었습니다. 매우 늦은 시간이었지만 상관 없었습니다. 그들은 두 세 시간을 다시 걸어서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습니다. 아마도 대단히 늦은 시간에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제자들은 로마 군병들과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사방으로 문을 잠그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두 제자가 다른 제자들이 모여있는 집 안까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이미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본 증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수많은 제자들이 여전히 부활을 믿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제자가 그들에게 있던 일을 이야기하자 그곳에 모인 무리들은 크게 흥분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들 중에는 주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막 16:12).
이때 더 놀라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36절입니다.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두 제자가 말하는 중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 가운데 나타나신 것입니다. 갑자기 불현듯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벽을 부수고 들어오신 것이 아닙니다. 문을 열고 들어오신 것도 아닙니다. 그곳은 사면으로 갇혀 있었고 문이 잠긴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부활의 몸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그들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영광스러운 몸은 이 땅의 시간과 공간과 오감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다시 재림하실 때도 이 땅의 시간과 공간과 오감에 제약되지 않고 임하실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분은 부활의 영광의 상태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그곳에 모인 자들은 갑자기 그들 무리 가운데 나타나신 예수님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37절).
그들은 부활체의 특성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예수께서 갑자기 나타나시자 놀랄 수밖에 없었고 유령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개역 개정은 그들이 예수님을 보고 “놀라고 무서워하여”라고 번역하였는데, 쉽게 말하면 그곳에 있는 사람들 전부가 갑자기 나타나신 예수님을 보고 놀라 소스라쳤다는 뜻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
38 …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4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41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눅 24:38-43).
[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요 20:20-22).
예수께서는 살아나셨으며 영원히 죽지 않는 몸으로 일어나셨습니다. 바울은 부활의 첫 열매를 따라 풍성하게 추수 때에 거두게 될 우리의 부활체에 대해 선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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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
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
53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이썩을것이썩지아니함을입고이죽을것이죽지아니함을입을때에는사망을삼키고이기리라고기록된말씀이이루어지리라
](고전 15:42-44, 49-50, 53-54).
오늘 이 영광스러운 부활의 날을 맞아 우리의 영원한 참 소망을 붙들기 바랍니다. 그 소망은 우리의 부활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죽지 않는 인간의 영광스런 몸을 입고 살게 될 하나님의 나라! 그 나라가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며 바로 그 나라의 주인이며 왕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믿고 순종함으로 부활의 보증이신 성령으로 충만하여지는 복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pyright@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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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나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려는 마음은 마음속에 평안과 안식을 준답니다.
진실한 말 한마디로 믿음과 행복을 줄수 있다면 마음의 문을 열어 진실한 목소리로 행복을 주고 싶습니다.
건강하게 사랑과 행복으로 편안한 삶에 만사형통 하시고 즐겁게 아름다운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