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에 관힌 시모음 28)
거룩한 꽃 /송인영
대야도 겹쳐 놓으면 꽃잎이 된다는 걸
민속떡집 아줌마는 이미 알고 있었나보다
퍼 줄 거 다 퍼준 봄날
꽃으로 핀 그런대야
개척교회 설교하듯 떡방앗간 도는 날은
백설기, 무지개떡, 인절미, 조개송편
나는 또 어느 전화의
주문떡 될까 몰라
밭일은 못 나가도 노인정에 나오셨네
햇볕 한 번 쐰 적 없는 어머니 요실금 팬티
지린내 봄 햇살 불러
창세기를 빚고 있네
사랑받는 꽃 /한다혜
사랑받는 꽃은
정말이지
고운 빛이 절대 아니다
까닭은
온몸이 으깨진 멍든 색이기 때문이다
튼실한 나무일수록
불평 없이 뻗는 잔뿌리의 간절한 정성이 담긴다
그처럼
참한 사람은 누구에게나 따뜻하여
고운 솜씨가 눈으로 퍼져
자취 없어도 향기가 오래간다
가지마다 물오른 이 봄날에
너그럽게
차례를 기다리는 꽃눈은
차가운 밤에도 꽃수를 놓으며
잎눈이 지기를 기다린다
척박한 땅일수록
사랑받는 꽃은
조용히
웅크려서 저린 발로 꽃귀를 맞추며
도리를 지켜 꽃파랑이를 만든다
꽃 /문인수
말이 되지 않는다.
손아귀에 꽉 꽉 꽉 구겨진 A4 용지를 냅다 방구석으로 던졌다.
어, 처박힌 종이 뭉치에서 웬 관절 펴는 소리가 난다. 뿌드드드 드드
부풀어오르다, 부풀어오르다,
이내 잠잠해진다.
종이도 죽는구나.
그러나 입 꽉 틀어막힌 그 마음의 밑바닥에 얼마나 오래 눌어붙어 붙어먹었으면,
그리고 그 무거운 절망, 기나긴 암흑의 산도(産道)를 얼마나 힘껏 빠져나왔으면 그토록 환하게
뼈 부러지게 기뻤을까.
누가,
날 구겨 한번 멀리 던져다오.
그리움의 꽃 /박금자
피었다 사그라져
사랑받지 못해 오므린 채
어둠 속 헤매어
가도 가도 제자리
긴 긴 터널
빛 보였다 사라지곤
못내 가둬 버립니다
안간힘
허우적대니
눈부시게 내리쬐는 태양이
이제야 반깁니다
망막에 껍질 씌워
정화수 깨끗이 씻고 바라보니
찬란한 한 송이 꽃이
그리움의 꽃이더이다
꽃의 최전선 /정하해
여러 해 땅을 놓쳤던 것들
안으로 걸어 잠근 얼굴이 바짝 말랐다
죽은 행운목 뽑아내고
다른 화분도 몇 개 준비해 여물대로 여문 꽃씨 심었다
살아나오지 않으면 그만이고
그러니까 꼬불꼬불 기어 나오는 불행으로부터의 기척
저 서러운 새끼들
봉숭아는 해가 오는 쪽으로 당장 달려 나가고
나팔 줄기는 아무데나 붙을 작정으로
점점 험악하다
저들의 분주한 삶이 한바탕 휘몰아치겠다는 생각보다
슬금슬금 내 안에서 놀겠다는 살림살이가
어쩌면 족쇄?
목숨을 저리 저장해 놓고 쓸 수 있다면
목숨의 부레를 채우기 위한 뜨거운 식사자리 잠깐이면 되는 거다
멀리 떠나 있는 얼굴이 온다
꽃이 온다
잡히는 대로 선반이다 일요목연하게 살 한 점씩 걸어놓고
단시간 폭발시키는
그의 밖은 성한 데가 없다
꽃의 몸 달 뜨다 /이가을
어긋나기 시작한 뼈에 균열이 왔다 밤새 놓아주지 않은 통증, 신열 가득한 이마로 으아리꽃
혼절했다가 깨었다 먹장구름이 젖은 달의 얼굴을 가릴 때 통증이 덮쳐온 것은 아닐진대 몸 구
석구석 불안이 덮쳐왔다 내 몸 균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참을 수 없는 가려움들까지 붉은
점점들 두견화 꽃씨들, 꽃말들 널려있다 목선을 타고 쇄골에서 어깨선을 지나 겨드랑이에 달
이 떴다 노랗게 뜬 달이 머문 몸이 정거장이구나
몸에 새긴 꽃의 전문들, 꽃의 말을 읽는 소리. 몸의 입구마다 줄서서 뼈들 달을 보려고 웅성거
린다 소란스럽다
꽃들의 웃음 /유영서
하루의 무게가 돌덩이처럼
어깨를 짓누를 때
추운 겨울 헤치고
용케도 살아 남아
눈 비비고 일어나
마중 나온 베고니아
꽃 분홍 철쭉이랑 자줏빛 사랑초
예쁜 꽃 미운 꽃
향기 풀풀 날리며 나를 반긴다
겨우내 얼어 죽을세라
뿌리를 감싸고 동여 매어 키운
은혜의 보답일까
한치의 소홀함 없는
아내의 정성일까
살짜기 웃음 짓는 모습에
불끈불끈 힘이 솟는다.
꽃 /최병도
누가 이 꽃을
아시나요
해바라기 줄기를 타고
피어나는 나팔꽃을 닮았네
백년에 한 번
피어 날까 말까
하는 꽃으로
귀한 꽃이라고
너무나 귀해서
행운이라는 꽃말을 달고
나라에 좋은 일이 생길 징조로
예사롭지 않은 꽃이라고...
지칠줄 모르는
폭염이 이어지는 여러날
낯익은 꽃이 피었다
줄기마다 고구마 꽃이
꽃에 관한 각서-5 /강남주
짓이기지 않고는 안된다.
소리치면서 반드시 떨어지는 꽃.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도
끝내는 혁명을 맞고 만다.
총소리보다 냉정한,
무너지는 바람에 따라 무너지는
꽃이여,
행동으로 말하는 그대의 행동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살갗이 닳고 있다.
누추한 변절.
꽃의 시절에 /김왕노
벌새 한 마리 좋지
꽃의 꿀을 찾다 스스로 모순에 빠져버린 새
날개를 수없이 친 만큼 허기가 져 꽃을 찾고
꽃을 찾아다닌 만큼 또 허기져 날개를 치는
온통 꽃에 미쳐
생시도 꿈도 꽃으로 범벅된 꽃의 시절에 벌새 한 마리
한번쯤 모순에 빠진 그런 생도 참 좋지
삶도 사람도 꽃 시절엔 다 꽃이지
꽃 시절 참 좋지
사람이 꽃처럼 피어나고 꽃이 사람처럼 피어나
서로가 서로에게 등 기대고 세상을 사랑하는
세상 가장 어두웠던 곳에도 꽃이 피고 꽃 같은 사람이 드나들고
세월에 밀려 멀어질 한 때 고여 있던 울음
굳은 내 마음 여기 저기 갈어엎고 꽃 심는 꽃 시절 참 좋지
꽃의 시절에
꽃이 피어도 꽃을 읽지 못하는 저 맹목의 거리로
나도 수 천 수 만 송이 꽃으로 피어나 몰려간다면
드디어 꽃에 눈 뜰 저 편애의 하늘
시간의 잔주름마다 더 촘촘이 피어나는 꽃
꽃의 시절에 못 삭인 그리움에 못 피운 그리움에
수군수군 뜨거운 눈물 꽃 피어나도 참 좋지
울먹이며 피는 꽃 /강세화
울먹이지 마라
철 모르고 앙센듯이 피는 꽃이여
오락가락 헷갈리는 물정 때문에
눈에는 핏발이 곤두서지만
헛헛하여 민망한 심사를 헤아리며
마음을 담아 피는 꽃이여
비죽이 내다보는 세상이 시뻐도
눈 붉히지 마라
안타까운 바람이 어린 꽃이여
늘상 부대끼는 이웃 사이에
돌아서서 후회하는 일도 있지만
끝내 외면하지 못하는 인정이
선명한 느낌으로 눈 뜨는 꽃이여
어디 없이 퍼런 심줄이 불거져
못 참아낼 나날이 숨가빠도
스러지지 마라
가슴마다 굼실굼실 파고드는 꽃이여
꽃 마음 /노정혜
꽃지게 지고 봄이 왔네
봄빛 따스하다
봄꽃들이 줄지어 핀다
꽃향이 짙다
꽃 피는 봄
온 누리에 꽃 마음을 심는다 .
꽃피는 날 /허영자
누구냐 누구냐
또 우리 맘속 설렁줄을
흔드는 이는
석 달 열흘 모진 추위
둘치같이 앉은 혼을
불러내는 손님은
팔난봉이 바람둥이
사낼지라도
문 닫을 수 없는
꽃의 맘이다.
꽃 /김수영
꽃은 과거와 또 과거를 향하여
피어나는 것
나는 결코 그의 종자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설움의 귀결을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설움이 없기 때문에 꽃은 피어나고
꽃이 피어나는 순간
푸르고 연하고 길기만 한 가지와 줄기의 내면은
완전한 공허를 끝마치고 있었던 것이다
중단과 계속과 해학이 일치되듯이
어지러운 가지에 꽃이 피어오른다
과거와 미래에 통하는 꽃
견고한 꽃이
공허의 말단에서 마음껏 찬란하게 피어오른다
꽃들의 진화 /신지혜
뜰에 뿌린 제라늄꽃씨가
어느 날 예서제서 얼굴들 뾰족이 내밀더니
그늘 한 장씩 거느린 채 도도하다
꽃들은 지구별 위에서 가장 맹렬하다
천둥 번개 치는 날에도 꽃들은 터진다
안개 자욱해도 꽃잎에 꽃술을 단다
꽃들은 영악스럽고 당차다 너풀거리는 그들 얼굴
들여다보면 무섭다
얼마나 많은 꽃들이 이 땅을 읽어갔을까
이 세상의 명암을 알아버린 후, 꽃들은
향기를 풀어 한 계절을 포박했다 그리고
꿀벌과 나비 떼 부르고
바람 불러 그들 존재를 널리 알렸다
소문이 번져 절벽 끝 무명초나 사막 선인장까지
그 소식 알아들었고 열려있는 모든 귀가 알아듣고 함께 동조했다
꽃의 집단은 입을 모아 말한다
모래 위에, 바람 속에, 안개 속에서도 우린
끝까지 쟁취해요. 거저 된 것 아무것도 없어요
내 얼굴화장과 독특한 향기 위해 때때로 공기의 빙벽에
무수히 갈비뼈를 찧으며 파란만장했습니다
우리 꽃빛은 저마다 그 고통의 빛깔입니다
그의 얼굴인 꽃잎 속 암술수술들 보존키 위한
특이한 디자인은 그들만의 대물림 유전인자를 고초 끝에
진화시킨 결과이다
우린 꽃들에게 열광한다 갈채 보내며, 꽃 앞에서 V자를 그린다
그럼에도 꽃들은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종래에
이 지구 전체를 점령하고 우월한 종이라는 정복자의 깃발을 꽂는 것이다
그리하여 함부로 삶을 집적대거나 꺾어대는
오만방자한 사람들을 무릎 꿇리고 싶은 것이다
꽃은 /백승운
피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고 있었다
필 때까지의 고통 참아내며
조금씩 조금씩 열리다
한순간 쏟아내는
생명의 탄생처럼
아픔으로 피어나 그렇게
지고 있었다
태어나 영글듯 자라나
청춘의 열정으로 살다
결실의 분신 남기고
미련 없이 훌훌 날아가는
영혼의 웃음처럼
그렇게 이쁘게 웃다가
바람에 소풍 가듯 지고 있었다
어디 지지 않는 게 있고
가지 않는 게 있겠는가?
기운의 존재 조금 남아 버티고 버티다
생명 같은 물줄기 뿜어내는
심장의 멈춤처럼 뚝 떨어지며
지고 마는 것을
꽃은 아름다움으로 지고
사람은 추억으로 기억되어
피었다 지는 순리의 시간 안에서
오늘도 피었다 지는 꽃들의 이야기에
나도 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