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난 너희 형님이 아니다
1
가장 먼저 현우가 한 행동은 벌벌 떨다 쇠파이프를 놓친 것이었다.
용빈은 손을 슬쩍 은미의 가슴에서 내려놓았다. 그러나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이해를 못했음인지 은미의 목에서 단검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누가 형님이라고?”
그때 맨앞에 서 있던 사내가 숙였던 허리를 펴며 대답했다.
“홍길동 형님이 아니십니까?”
“이름은 홍길동 맞다. 그런데 형님은 모르겠군. 형님 소리를 듣기엔 내가 당신보다 너무 어리다는 생각 안 들어? 그것도 상당히 말이야.”
“나인 상관없습니다. 회장님께서 친구로 인정하신 것만으로도 저희들한테 존중받으시기에 모자람이 없으십니다.”
“…….”
길동은 대답하지 않았다.
현우가 그 말에 반응을 보였다.
“회, 회장님의……?”
털썩
현우는 그만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놀란 정도가 아니었다.
심장이 터져나갈 만큼 경악했다.
“난 싫다! 형님이라고 부르지 마라!”
“알겠습니다. 그럼 뭐라 부를까요?”
길동은 잠시 갈등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것 때문에 입씨름할 때가 아니었다.
골치도 아팠다.
“그냥! 알아서 불러라.”
“알겠습니다, 형님.”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 그는 다시 형님이 되었다.
선글라스를 낀 사내가 건넨 손수건을 받아 이마에 흐르는 피를 닦은 길동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녀석들과는 어떤 관계지?”
“누구 말씀이십니까?”
선글라스 사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딴청을 부렸다.
“정말 모르는가?”
“무슨 말씀인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저기 눈앞에서 내 애인을 잡아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저 새끼가 누군지 정말 몰라?”
쿵!
길동의 분노가 극에 달았음인가.
바닥을 구르자 바닥이 뚫렸다.
쩍쩍 금까지 갔다.
은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애, 애인……?’
다급한 상황이고 뭐고 은미의 귀와 마음엔 그 한마디만이 하울링처럼 울려 퍼질 뿐이었다. 이것이 바로 여심이란 말인가?
엄청난 진동과 함께 바닥에 쩍쩍 금이 가는 것을 목도한 선글라스 사내가 겁먹은 얼굴로 물었다.
“애, 애인이라고 하셨습니까? 저분이 형님 애인이십니까?”
“…….”
길동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을 긍정으로 판단한 선글라스 사내가 말했다.
“저 녀석들은 전혀 모르는 사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잘 아는 사이도 아닙니다. 얼굴을 한두 번 봤을 뿐이지요.”
“사실인가?”
“사실입니다. 저들이 찾아와 수하로 써달라고 부탁을 하긴 했지만, 확실한 건 아직 우리 식구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린 저런 양아치는 키우지 않습니다.”
“……!”
모두의 시선이 현우와 용빈에게 고정되었다.
용빈이 애처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혀, 형님!”
누구도 용빈의 목소리를 듣고 불쌍하다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길동이 물었다.
“형님이라는데?”
선글라스 사내가 뒤돌아보며 물었다.
“저 자식들 형님이 누구냐?”
그 말에 한 녀석이 쭈뼛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선글라스 사내가 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는 사내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저 녀석은 뭐냐?”
“근영이라고…… 말단에 있는 놈입니다.”
“그래?”
선글라스 사내는 근영이라는 녀석한테 고개를 돌렸다.
그가 물었다.
“네 동생들이냐?”
“아, 아닙니다! 형님!”
“저 녀석들은 너를 아는 것 같은데?”
용빈과 현우는 애처로운 눈으로 근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근영은 끝내 그 눈빛을 외면했다.
자신의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말 한마디 삐끗했다가는 그까지도 생매장당할 수 있었다.
“모, 모릅니다.”
“그래?”
선글라스 사내는 용빈과 현우에게 확인을 했다.
“솔직히 말해라. 이 녀석 알아, 몰라?”
용빈과 현우가 동시에 외쳤다.
“혀, 형님! 저 용빈입니다! 불철주야 형님이 시키는 대로 분골쇄신 일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저희를 버리십니까?”
“근영 형님!”
그것을 보던 선글라스 사내가 수하에게 말했다.
“저 녀석들은 우리 가족이 아니다. 우리한테 저런 양아치는 필요 없다. 양아치 동생을 둔 형도 필요 없다.”
“혀, 형님!”
바닥에 무릎을 꿇은 근영이 선글라스 사내의 다리를 잡고 매달렸다.
그러나 선글라스 사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차갑게 한마디 할 뿐이었다.
“어서 치워!”
“예! 형님!”
“오늘 이후 이 녀석이 내 눈에 띄면 그때는 너희가 죽는다.”
“알겠습니다, 형님!”
“혀, 형님! 형님!”
간절한 외침은 서서히 멀어져갔다.
더 이상 들리지 않자 선글라스 사내는 길동에게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피치 못하게 안 좋은 꼴을 보여드렸습니다.”
“난 괜찮아. 어차피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으니까…….”
길동은 말끝을 흐렸다.
선글라스 사내가 앞으로 눈을 돌리며 물었다.
“저 녀석들은 어떻게 해드릴까요?”
“힉!”
덩치 셋이 다가서자 용빈이 검을 내저으며 위협했다.
“꼬, 꼼짝 마! 다가오지 마!”
그러나 비웃음을 사기 딱 좋은 모습이었다.
“아가야, 그렇게 겁을 먹고 칼이 제대로 쓸 수 있겠니?”
“칼은 말이다. 그렇게 들면 안 돼. 제대로 들어야지. 그러다 상대는 멀쩡하고 네 손톱만 나간다.”
“어허, 그렇게 부들부들 떨면서 칼로 누구를 찌르겠다고 그런다냐. 위험한 장난감을 저리 치우고 싸게싸게 이리 온나?”
건달들이 용빈에게 건들건들 다가갔다.
용빈의 몸이 공포와 두려움에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그때 길동이 말했다.
“그놈들은 내꺼다!”
그 한마디에 덩치 셋이 당혹스런 표정으로 머뭇거리자 선글라스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뒤로 빠지라는 뜻이었다.
길동이 말했다.
“내 친구들을 부탁합니다.”
내 친구란 수정, 진아, 미정을 지칭했다.
선글라스 사내가 아무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을 보건대, 그 셋 때문에 길동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선글라스 사내가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길동의 신형이 허공을 갈랐다.
휘익!
“허억!”
당황한 용빈이 은미 목에 단검을 들이밀었다.
그러나 길동의 주먹이 더 빨랐다.
퍼억!
“커억!”
비명과 함께 튕겨지듯 날아가는 용빈!
길동은 은미를 가볍게 안았다.
순간 은미는 울음보를 터뜨렸다.
길동은 한동안 말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러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안해, 나 때문에…… 조금만 기다려?”
끄덕
힘겹게 눈물을 훔친 은미는 길동을 따라 뒤로 빠졌다.
다른 여자애들이 은미한테 다가왔다.
“은미야!”
“수정아, 진아, 미정아!”
그녀들은 얼싸안고 꺼이꺼이 목 놓아 울었다.
하지만 울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울음을 그치고 그녀들은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길동에게 고개를 돌렸다. 길동이 녀석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지켜보기 위해.
2
길동이 다가갔을 때 용빈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그나마 길동이 힘 조절을 잘한 덕이다. 제대로 분풀이를 했다면 녀석은 그 한 방에 유명을 달리했다. 그러나 한 방에 죽일 수는 없었다.
너무 끔찍한 소리다.
길동은 그렇듯 곱게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은미를 붙잡고 인질극을 벌이기 전이었다면, 그랬다면 한번쯤 생각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양근을 한 방에 기절시킨 것처럼, 간단히 마무리 지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은미한테 치욕을 안겨준 것이다.
그래서 길동은 다짐했다. 녀석이 그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아픔을 전해주겠노라고 굳게굳게 다짐을 했다.
삼복구타권법이라는 것이 있다.
명칭 그대로 ‘복날 개 패듯 패는 권법’인데 어찌 보며 굉장히 졸렬한 권법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그것만큼 걸맞는 권법을 찾을 길이 없었다. 녀석의 치졸한 행동을 봤기 때문이다.
길동은 다짜고짜 뺨을 후려쳤다.
쫙!
살과 살이 맞부딪쳐 아주 환상적인 음률이 만들어졌다.
보통은 저런 소리가 나기 힘들었다.
쫙쫙쫙쫙쫙!
아주 훌륭한 연주가 시작되었다.
물론 아직은 서곡일 뿐이었다. 길동의 분노를 가라앉혀주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이것은 단지 녀석의 정신을 깨우는 기상나팔정도였다.
“우 우웅.”
드디어 녀석이 정신을 차렸다.
길동의 입이 귀에 걸렸다.
“자아, 초복이다.”
그 한마디로 시작되었다.
어둠의 세계에서 전설로 남을 그 구타의 음률.
퍼버버버버버버버버버버버버버버버버버버버벅!
퍼벅! 퍼벅! 퍼벅!
퍼버버버버버버버!
퍽!
쿠당탕탕!
비명소리는 없었다.
오로지 타격음뿐이었다. 사실 비명을 지를 힘조차 없었다. 고통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부족할 판이었다.
정말 죽을 만큼 아팠다. 아니, 아픈 정도가 아니었다. 그 이상이었다. 하지만 뭐라 설명할 길이 없다.
그냥 이대로 죽고 싶었다.
어떻게 맞으면 이렇게 아픈 것일까?
용빈은 문득 그것이 궁금했다.
그것이 알고 싶었다.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정말 지긋지긋하게 얻어터졌다는 것.
한 대 맞고 아플 사이도 없이 다시 주먹이 날아왔다. 안 맞은 데가 없었고, 어디 하나 성한 구석을 찾을 수 없었다.
고통이 한계상황을 넘어서면 육체가 스스로 정신을 끊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바로 기절이다. 그런데 그는 기절도 못했다. 정신을 잃는가 싶으면 다시 정신이 들고, 새로운 고통이 시작되었다.
용빈은 몰랐지만, 그것이 바로 삼복구타권법의 숨은 묘리였다. 정신을 잃을 만하면 특정 급소를 가격해 정신을 일깨우는 것이다. 그 급소는 사혈로, 맞으면 엄청난 고통이 수반되었음은 물론이다.
아팠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근육이 파열되는 고통이 지금 용빈이 느끼는 고통과 만나면 형님하고 고개를 숙일 정도였다.
너무 아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쉼 없이 꿈틀거렸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한순간 자신이 맞은 듯한 착각에 빠졌다.
고개를 돌려버리는 사람들까지 속출했다.
그러나 은미와 애들은 함께 주먹을 휘둘렀다. 마치 자신들이 용빈을 패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 것 같았다.
그때 갑자기 주먹질이 멎었다.
길동은 바닥에 널브러진 용빈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이미 용빈의 얼굴은 사람의 그것이라고 볼 수 없었다.
사람의 얼굴이 어찌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옥상에서 떨어진 메주도 저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길동은 용빈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은미에게 다가갔다.
“은미야, 쳐!”
“으, 응?”
은미가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무,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내가 널 위해 때릴 곳을 남겨놨거든. 복수해야지?”
길동이 말을 마치며 상큼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디…… 말이니? 아무리 봐도 더 이상 때릴 곳이 없는 것 같은데…….”
“왜 없어? 여기 있잖아, 여기!”
길동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정말 그 부분만 멀쩡했다.
“설마…… 여, 여기?”
“응, 거기!”
은미는 경악하며 손사래를 칠 수밖에 없었다.
“안 되겠어. 더 이상 손을 대는 것은 인간으로서 할 도리가 아닌 것 같아…… 거기에 손을 대면 인간이길 포기해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미안!”
선글라스 사내는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엽기도 이런 엽기가 없었다.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지 않았다면 감정을 감추지 못했을 것이다.
길동의 반응은 더 웃겼다.
“그래? 쩝.”
길동은 아쉽다는 듯 녀석의 멀쩡한 피부를 바라보며 입맛을 쩝 다시더니, 미련 없이 쓰레기더미에 집어던졌다.
“여기다 던져놓으면 알아서 분리수거해주겠지.”
“길동아, 그런데 말이야. 저 상태로 놔두면 안 죽어?”
“안 죽어!”
길동의 단호한 말투에 은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얼굴에서는 한 치의 의심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것을 믿냐?’
‘저건 이미 시체 수준이라고!’
주변에 있던 조폭과 친구들은 의심 없는 은미의 얼굴에 경악했다.
그때 길동이 은미에게 말했다.
“아직 끝나지 않아서 말인데, 잠시만 더 기다려줄래?”
“알았어.”
은미가 고개를 끄덕이자 길동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잠시만 고개를 돌려줘. 애들이 볼만한 게 아니거든.”
끄덕
은미가 시선을 돌리자 길동은 쓰레기더미에서 녀석을 들어올리더니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크큭, 기다리느라 힘들었지?”
도리도리
용빈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강력히 부정했다.
“이번엔 중복이다.”
씨익
길동의 그 미소는 아름다웠다.
어찌나 아름다운지 지켜보던 현우는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쿵
기절한 것이다.
다음 차례가 자신인데, 초복 중복 말복을 이겨낼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피떡!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 정말 의미 있는 하루였다.
“안녕히 가십쇼, 형님!”
조폭들이 다시 허리를 숙여 깍듯이 인사를 했다.
그러나 길동은 본체만체하며 태연히 주먹에 묻은 피를 쓰러져 있는 녀석들 옷에 닦고 있었다.
“젠장, 더럽게 안 지워지는군.”
혼자 투덜거리더니 은미에게 시선을 돌림과 동시에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그만 갈까?”
마치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말투다.
은미와 애들은 길동한테 바짝 달라붙어 저편으로 사라졌고, 선글라스 사내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사라져가는 길동의 뒷모습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밀려드는 오한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 수하가 물었다.
“형님, 저 녀석들을 어떻게 할까요?”
“깨끗이 치워라!”
“알겠습니다.”
“신경 써라. 아니면 응급차를 부르든지.”
응급차라는 말에 수하는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선글라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지만, 그가 응급차를 입에 담긴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진정이십니까?”
“그럼 내가 너랑 한가하게 농담 따먹기나 하게 생겼냐?”
움찔
선글라스가 담배를 담에 거칠게 비벼 끄며 말했다.
“씨팔! 저 새끼들이 몸소 가르쳐주지 않더냐? 건들지 말아야 할 상대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
“저번에 최문식 형님께서 당하시는 모습을 보긴 했지만.”
“오늘 일에 비하면 조폭지혈이었지.”
“조족지혈입니다요, 형님.”
순간 선글라스 사내가 수하의 말에 당혹스런 표정을 짓더니 버럭 화를 냈다.
“씨팔, 조크야, 조크!”
“아, 조, 조크. 아하하하…….”
“제발 새겨들어라!”
퍼억!
“으윽!”
”씨팔 쪽팔리게…… 그나저나 내 품위 있는 조크를 받아줄 놈은 정녕 없는 건가!”
“죄, 죄송합니다.”
“시끄러! 어서 빨리 녀석들이나 분리수거해, 어서!”
“예, 형님.”
그제야 덩치들은 부산하게 반 시체(?)를 분류해 치워나갔다.
“이놈은 중환자실, 이놈도 중환자실…….”
겨우 숨만 붙어 있을 뿐, 시체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본 덩치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바닥을 주름잡으며 조폭으로 살아왔지만, 이처럼 끔찍하고 잔혹한 장면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하마터면 자신들도 이 꼴로 분리수거가 되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자 소름이 쫙 끼쳤다.
살아 있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게 났다는 말이 있는데, 바로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었다.
[자, 말복이 왔다!]
그 말과 함께 사방팔방으로 튀던 핏방울들이 떠오르는 순간, 그들의 얼굴에서 핏기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앞으로도 꿈처럼, 환상처럼 머릿속에 각인되어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빨리빨리 치우지 못해!”
“죄, 죄송…….”
“씨팔, 내가 저 인간을 두 번 다시 만나면 사람이 아니다. 으, 치떨려!”
말을 마친 선글라스 사내는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다 됐으면 그만 가자.”
“예, 형님.”
다음날.
홍철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애써 길동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다 결국에는 자는 척했다. 길동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해주었다.
더 이상 녀석과 연관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 탓이다.
그때 잠시 자리를 비웠던 은미가 호들갑스럽게 다가왔다.
“어머, 길동아! 그런데 상처가……?”
“아아, 괜찮아.”
“벌써 나았어?”
은미가 머리를 뒤적이자 길동이 슬쩍 피하며 살짝 인상을 썼다.
은미가 상처를 건드린 것이다.
“미, 미안!”
“크지 않으니까 걱정 마.”
“크지 않다니? 그렇게 피를 흘려놓고선.”
은미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길동이 허둥거렸다.
“우, 울지 마. 머리는 원래 작은 상처만 나도 피가 많이 나는 곳이야.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 많이 나았거든. 봐봐, 거뜬하잖아.”
“정말 미안!”
“미안하긴…… 괜찮아, 괜찮아.”
“그래도 나 때문에…….”
은미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결국 길동은 최후의 수단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나중에 떡볶이나 사줘. 그럼 되잖아.”
책임을 전가하고 약간의 보상으로 만회하라는 아주 초보적인 심리학 이론을 적용한 것인데, 효과는 아주 탁월했다.
“응.”
끄덕끄덕
은미가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길동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에효……!”
어느새 돌아온 점심시간.
보통은 가장 즐거워야할 시간이지만, 요 근래 길동에게는 가장 끔찍한 시간이었다.
“오늘은 18과를 할 차례네? 내가 암기하라고 했던 곳 외웠어?”
“그, 그게…….”
수정의 말에 길동은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영어가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그래?”
“그럼 안 어렵냐? 너는 미국에서 살다왔으니 그런 거고…… 수정아, 나는 말이지. 과거부터 지금까지 내가 못 알아듣는 말은 다 욕이라고 생각했어. 문제는 내가 알아듣는 영어 역시 욕밖에 없고 말이야. 뻑큐라든지, 썬오브비치라든지.”
“뭐라고?”
수정이 결국 졌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잘났어, 정말.”
“미안, 외우려고 했는데 어제는…… 그리고 외운 것도 밤새 빵구 난 이곳으로 다 빠져나가버렸지 뭐야.”
“으이그, 인간아! 공동묘지에 가면 이유 없는 무덤 없다더니, 너 언제 공부할래?”
“솔직히…….”
길동이 머리를 푹 숙였다.
그때 은미가 다가와 길동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요즘 교생 선생님이 안 보이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그러고 보니…… 그날부터였나?’
벌써 삼 일이 지났는데, 본 적이 없었다.
분명 출근하는 것 같긴 한데, 나한테 삐졌나?
수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러게 정말 요즘에는 통 안보이시네?”
“난 복도에서 한번 마주친 적 있어.”
“나도!”
진아와 미정이 차례로 말했다.
“그럼 학교에 나오신다는 말인데, 왜 교실에는 안 들어오시지?”
은미가 길동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러나 길동은 해줄 말이 없었다.
그날, 길동은 화장실에 다녀오다 우연히 미나와 마주쳤다.
반가운 마음에 그는 손을 번쩍 들었다.
“어, 선생님!”
그러나 미나는 본체만체 도망치듯 멀어져갔다.
길동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악몽 같은 시험 날.
여자애들한테 열심히 배운 탓일까?
한번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그녀들이 뽑아준 집중공략 문제는 몇 번이나 읽어보지 않았던가. 읽어도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것은 몇 되지 않고, 기억이 되는 것은 거의 없다시피 했으나 실망하지 않고 계속 반복했다.
드디어 운명의 시간이었다.
“시험 잘 봐.”
“너도.”
“화이팅!”
길동도 주먹을 흔들며 응수했다.
시험시간 종이 울리고 정답게 들려오는 선생님 목소리.
“불법행위를 하는 녀석, 눈 돌아가는 소리를 내는 녀석, 가차 없이 빵점 처리한다. 너희들은 시선은 시험지 위에만 정착되어야 하고 나머지는 모두 사각지대라고 생각해라, 알겠나?”
“네에……!”
“눈을 감고 시험지를 뒤로 돌린다. 오엠알카드 마킹 미스시 한번만 교환된다. 이점 명시하고 신중하게 체크하도록…… 시작!”
눈앞으로 시험지가 다가오는 순간, 길동은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는 듯한 아찔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문제를 읽어내려 가면서 아는 것부터 풀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오! 이것은 아는 문제네. 헐, 이것도 공략해준 것에 나온 거네?’
확실히 감이 오는 문제가 몇이 있었다.
아리송한 것은 평소처럼 남북통일의 염원을 담아 4번이나 5번으로 통일을 할까도 생각했으나, 그간의 노력이 아깝고 애들한테도 미안한 것 같아 4번과 5번을 적절히 섞어 답안지를 작성해나갔다.
그때 벨소리가 울렸다.
“자, 시험지 걷는다.”
‘윽, 천하의 이 홍길동이가 시험시간이 부족하다니!’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자, 잠깐만요!”
남은 다섯 문제를 보지도 않고 점을 찍어 앞으로 넘겼다.
털썩
책상 위에 장렬히 고꾸라진 길동.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숨을 몰아쉬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하, 하얗게 하얗게 불태웠어……!”
“킥킥, 수고했어. 뒤에서 보니 열심히 잘 풀더라.”
은미의 그 말에 힘입어 간신히 고개를 드는데, 은미의 입에서 결정적인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시험은 잘 봤어?”
“윽!”
쿵!
“알았다, 알았어. 이젠 아주 몸으로 말을 하는구나. 답을 체크해줄게 시험지 이리 줘봐봐.”
책상 깊이 들어갔던 길동의 손에 꾸깃꾸깃한 뭔가가 들려 나왔다. 색감이나 질감을 보건대, 저 폐지의 정체는 시험지가 분명했다.
어느새 다가온 수정이가 그것을 받아들려고 했으나, 길동의 주먹이 펴지지 않았다. 어찌 해도 안 되자 수정은 지그시 이를 물고 길동의 등짝을 후려쳤다.
짝!
경련을 일으키며 책상에 납작 들러붙음과 동시에 길동은 그만 시험지를 놓치고 말았다. 비명이 나오다 들어가 버렸을 정도로 따끔했다.
‘계집애가 손끝이 저렇게 매워서 어디다 쓰겠냐?’
여자애들 시선은 길동의 시험지로 향해 있었다.
얼마 후, 진아의 총평이 교실 안에 울려 퍼졌다.
“푸하하하! 아주 치열하다 못해 처절하구나!”
이어지는 푸념.
“어쩜 이렇게 답 사이를 막 피해갈 수가 있냐, 킥킥킥킥!”
그 한마디 한마디가 길동의 심장에 비수가 되어 날아왔다.
그러나 진아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은미가 나섰다.
“그, 그래도 수, 수고했어…… 반은 건졌다. 괘, 괜찮아!”
그러나 전혀 괜찮지 않은 목소리다!
말은 수고했다고 하지만, 어투나 분위기는 말보다 더 리얼하게 가슴을 찔렀다. 그리고 그것은 길동을 두 번 죽이는 행위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여자애들이 은미에게 한마디씩 했다.
“잔인한 년!”
“그렇게 확인사살까지 해야 했니?”
“내, 내가 뭘?”
은미가 당혹어린 목소리로 대꾸하자 수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네가 가장 독해, 이년아.”
은미는 억울했다.
자신이 대체 뭘 어쨌다고 이러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 수정이 길동에게 다가가 등을 다독거리며 한마디 했다.
“은미가 가르친 국어는 그렇다 치고, 이번 시간이 공교롭게도 내가 가르친 영어시간이네?”
꿈틀
길동은 몸으로 먼저 반응을 했다.
“만약에 기본점수 못 넘으면 알지, 오홋홋홋!”
길동의 머리를 쓰다듬는 수정의 손에 감정이 실렸다.
턱턱턱
무방비로 수정의 공격을 허용하며 길동은 생각했다.
‘이대로 자고 일어나면 꿈일 거야. 난 지금 지독한 악몽을 꾸는 것이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러나 곧 시험지라는 현실과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첫댓글 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