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복(祈福)이란 한자로 ‘복을 비는 것’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복(福)을 한번 짚고 넘어가자. 복이란 무엇인가? 복이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삶에서 누리는 좋고 만족할 만한 행운. 또는 거기서 얻는 행복’을 말한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복을 얻고 누리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인간은 엄청난 위력의 자연에 비해 한없이 연약하며, 막강한 권력에서 나오는 제도에 매여 복종하며 살아야 하는 초라하고 무능한 한 개인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복은 무능하고 연약한 인간이 스스로 창조하고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지전능한 신적 존재로부터 공급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복은 절대자인 신에게 빌고 구해야 얻어지게 되므로, 자신이 믿는 신에게 정성을 다해 복을 비는 기복행위가 기복신앙으로 정착하여 민간에 내려오게 되었다.
교회 안으로 들어온 기복신앙
기복신앙이 교회 내에 은밀하게 들어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왕성한 활동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뜻과 얼핏 구별되지 않는 보호색을 가지고 있어, 이를 전파하는 이들이나 받아들이는 이들이 아무런 의심을 갖지 않고 온전한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조상대대로 내려온 민간신앙으로 복을 빌고 받는 풍토에 익숙한 정서와 사상은 교회 내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의 복과 흡사하여 아전인수적으로 해석하거나 자의적으로 왜곡되게 성경을 풀이하여도 성경지식에 해박하거나 정확한 판단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과 꼼꼼하게 비교분석하지 않는다면 이의 잘못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것이 쉽지 않은 탓이다. 게다가 평소에 존경하고 신봉해 마지않은 담임목사나 교회지도자들이 가르치거나 설교하기 때문에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여준다.
또한 기복신앙이 무분별하게 교회에 침투하기 시작했던 시기가 절묘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의 부흥은 6.25전쟁이 끝나고 산업이 피폐되어 미국의 원조로 겨우 입에 풀칠하던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미래의 번영과 행복을 열어줄 자녀교육을 위한 학비는 고사하고 학교시설조차 변변치 못한 시절이었고, 먹고 입을 것이 변변치 못해 우방국가에서 원조해주는 밀가루를 받아 수제비로 배를 채우거나 산과 들을 찾아다니며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벗겨먹던 시절이니 우리 부모들의 실망감과 허망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들에게 유일하게 희망의 소리를 전해주는 곳은 다름 아닌 교회였다. 외국에서 보내주는 원조의 한 통로로 교회가 이를 수행하면서 교회에 오면 입을 옷과 먹을 것을 얻을 수도 있었고 신기한 풍금소리에 맞추어 신나게 노래를 부를 수 있었으니 동네 어린이들의 천국이었고 어른들도 힐끔힐끔 교회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예로부터 내려온 민간신앙이나 불교를 믿어왔던 터라 부정적인 시각이 없지 않았지만, 한 두 차례 교회에 와서 예배에 참석하고 설교를 들으면서 이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고 희망을 갖게 해주는 소리가 있었으니, 교회에 와서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복을 받아 부자가 돼서 배부르게 먹고 자녀를 대학에 보낼 수 있으며 내 소유의 집에서 살고 자가용까지 굴릴 수 있다고 생각하니 심장은 벌렁벌렁 뛰고 가슴은 새로운 희망으로 용솟음쳤다. 설교자들은 미국을 예로 들면서, 하나님의 복을 받아 엄청난 부자나라가 되어 우리 같은 가난한 나라를 원조해주는 세계제일의 경제부국이 되었으니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다는 논리로 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새벽마다 방방곡곡의 교회에서는 기도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그 기도소리의 대부분은 복을 받아 부자가 되며 만사형통하게 해달라는 것이 되고 말았다.
7,80년대 우리나라가 고도의 경제개발로 인해 못살던 후진국에서 중진국의 문턱에 들어갈 무렵은 모두 가난하던 사람들이어서 못사는 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지만 주변에서 하나, 둘 부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중동의 해외 건설회사 노동자로 한 3년 갔다 오면 집을 한 채 사고 흑백이지만 텔레비전을 들여놓은 가정이 온 동네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게다가 수출이 활기를 띠면서 우후죽순 공장이 들어서고 턱없이 낮은 임금으로 돈을 모은 거부들이 흙먼지를 날리면서 새까만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 것을 지켜보면서 이들도 새로운 목표를 갖게 되었다. ‘하면 된다.’ ‘할 수 있다.’라는 구호와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가 모든 국민이 애창하는 가요가 되어 전국적으로 라디오 전파를 타고 울려 퍼졌다. 모두들 부자가 되는 것이 먼 훗날의 얘기가 아니가 손에 잡힐 듯 가깝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그들의 꿈은 하나 둘씩 이루어지는 듯 보였다. 얼굴에 땟국이 얼룩진 골목의 아이들이 모여 살던 판잣집은 번듯한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들어섰고, 명절이 아니라도 늘 새 옷을 번갈아 입으며 자가용을 소유한 이들로 변했으며, 그들이 다니던 교회의 헌금도 부유해지지 시작했다. 교회들은 너도나도 허름한 건물을 다시 짓거나 새로 건설되는 신도시의 한복판에 크고 웅장한 교회를 짓고 옮겨갔다. 신도시에 자리 잡은 교회들은 대형교회가 되는 기회를 놓칠세라 너도 나도 경쟁적으로 새로 이사한 입주민들을 유치하려고 어깨띠를 두르고 만면에 미소를 띠고 휴지와 생수통을 들고 집집마다 초인종을 눌러댔다. 기존에 다니던 교회가 멀어 옮겨야 하는 교인들도 새로운 교회를 정하기 위해 주일마다 이 교회 저 교회를 돌아다니며 설교를 평가하기 시작했다. 동네 교회 목사들의 설교대회에 점수를 매기는 심사위원이 된 이들을 위해서 설교자들은 눈에 확 띄는 최고의 선물을 선보여야했기에, 복을 주시는 하나님, 부자가 되고 만사형통하게 해주시는 하나님, 자녀가 잘되고 남편이 승진하고 사업체를 성공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을 소리 높여 외쳤다. 목회자 필요와 성도들의 요구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기복신앙은 단시간에 급성장하는 교회, 중견교회에서 대형교회로, 대형교회에서 초대형교회로 커가는 교회들의 최고 성장비결이 되고 말았고 하나님은 세상의 복을 퍼 주시는 인심 좋은 이웃의 부잣집 할아버지처럼 비쳐지고 있다.
기복신앙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기복신앙이 교회에 빠르게 침투하여 들어와 세력을 확장하게 된 이유는, 세상의 복을 얻고 싶어 하는 수요와 이를 조건으로 교회를 키우고 성도를 불리고자 하는 공급의 계산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만약, 사업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졌다면 회사는 사업에 성공하고 엄청난 부를 축적하였을 것이며, 돈을 주고 상품인 서비스를 산 고객들은 만족하게 생각하고 주변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자랑하여 날이 갈수록 이 사업은 번창하게 되었음을 자명한 일이다. 그렇지만 교회는 세상의 사업의 원칙과 다르다. 아무리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잘 맞는 일이라도 수요자의 목적이나 공급원의 서비스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다면 허망한 일이다. 그렇기에 기복신앙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지만 황금만능의 자본주의 세태 속에 부와 성공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속성을 잘 이용하여 대형교회의 CEO가 되어 성공신화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는 삯꾼목자의 교묘한 유혹에 올바른 교회들도 물들어가고 있다. 마치 양파 망 속에 양파 한 개가 썩어 가기 시작하면 다른 양파들도 전염되어 썩어가며 오래지 않아 양파 전부가 썩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기복신앙은 위험도와 전염성이 높아 건강한 교회를 쉽게 물들고 썩게 한다. 그러므로 어떤 병이라도 진단이 정확해야 치료하는 시간과 노력이 절약되고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있듯이, 기복신앙의 문제를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그 심각한 폐해를 곰씹어보는 시간이 있어야 이의 해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복을 구하고 빌기만 하면 받을 수 있다는 기복신앙은 하나님의 뜻과 다르지만, 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일부를 발췌하여 전체의 뜻인 양 들이대며 말한다면, 이를 판단할 성경지식이 부족하거나 하나님의 종으로 여기며 목사의 권위를 무조건 인정하는 교인들은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게 된다. 또한 하나님이 자신에게 복을 주어 부자가 되고 성공케 하여 형통하게 살게 해준다는데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렇지만 아무리 이루고 싶은 축복의 말이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허망한 일일 뿐이다. 기복신앙의 특징은 현세적인 복만을 추구한다. 현대인들이 현실의 삶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부자, 성공, 승진, 출세, 자녀의 형통, 지병의 치유, 건강, 행운 등 말하자면 끝이 없겠지만, 이것들의 특징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얻고 싶고 누리고 싶은 것들이다. 기복신앙은 이러한 세상의 복을 얻는 방법으로 복을 비는 행위에 국한하고 있고, 치성을 드리는 노력의 정도가 잣대가 되어 복을 받을 수 있는 순위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추운 겨울에도 차가운 물로 목욕재계하고 다리에 마비가 올 정도로 오랫동안 절을 하며 소원을 비는 것이다. 복이 오는 척도는 여러 가지이지만 기도를 하는 기간을 얼마나 오래 잡았느냐가 중요하다. 그래서 간절히 원하는 소원성취를 위해서는 석 달이 넘게 걸리는 백일기도를 하기도 한다. 여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은 치성을 드리는 행위 이외에도 돈을 얼마나 드리느냐에 달려있다. 오늘 신문에 로또 복권에 당첨시켜 준다는 무속인의 말에 속아 무려 14억 원을 사기 당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처음에 점지해준 번호가 틀리더라도 의심하지 않고 다시 엄청난 돈을 무속인에게 주어가며 당첨번호를 얻으려했다는 것은 일반인의 생각에 얼른 이해가 가지 않지만, 무속인이 치성이 부족하다며 더 많은 돈을 요구해도 빚을 얻어가며 주게 되는 것은 치성의 정도에 따라 복이 온다는 기복신앙의 절대적인 믿음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기복신앙처럼 현세적인 복을 우선으로 하지도 않을뿐더러, 복을 비는 치성의 정도에 따라 복을 주신다는 구절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오해 1 - 열심히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기복신앙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세상종교의 특징은 자신의 몸을 괴롭게 하며 극한 상황에서 수행을 하여야 도를 터득하거나 복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티베트 라마교의 승려, 힌두교도, 부두교의 신봉자들은 오랫동안 먹지 않거나 자지 않고 기도하기, 몸을 상하게 하거나 괴롭게 하면서 기도하거나 춤추는 행위들이 자신들이 숭배하는 신을 즐겁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불교에서도 득도를 하기위해 사용하는 기도방법인 장좌불와(長座不臥)는 벽에 기대지도 않고 눕지도 않은 채 오랜 기간 기도하는 자세로서 보통의 인내와 극기가 없어서는 안 되는 방법이다. 이러한 현상을 교회에서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요즈음 ‘삼천번제 기도회’라는 것이 그 한 예이다. 삼천번제의 기원은 솔로몬이 아버지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 삼천번제를 드리고 나서 꿈을 꾸었을 때 하나님이 나타나 소원을 묻자 지혜를 구하여 하나님의 만족하심을 받아 지혜뿐 아니라 부와 명예도 받았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삼천번제는 삼천일 동안 계속해서 삼천 번이나 번제를 드렸다는 것이 아니라 수천마리의 양과 소를 번제물로 드렸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삼천일의 기간을 정해서 저녁마다 기도회를 갖는 다. 삼천일이라면 무려 삼년 가까운 기간인데, 이처럼 오랜 기간 동안 예배를 드리면서 기도하며 교회의 성전건축이나 부흥을 비롯해서 개인적인 소원을 빌고 응답을 받기위한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오랜 기간 동안 끈기 있게 기도하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자세인 것은 분명하지만, 삼천번제라는 기도회의 제목에서 타 종교나 기복신앙에서 행하는 천일기도나 백일기도가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기도원 등에서 볼 수 있는 ‘40일 작정 금식기도’는 분명 인간이 가진 식욕의 본능을 억제하며 배고픔을 이겨내며 온전히 기도에 매달려 간절한 마음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그래서 금식기도는 다른 기도의 방법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래서 하루 금식하는 것보다는 3일 금식이 더 효력이 있고, 3일 금식보다는 7일이 더 나으며 예수님이 광야에서 금식한 기간인 40일이 최고의 기간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배고픔을 참아내며 금식을 오래할수록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라고 생각한다면, 자신의 몸을 괴롭게 하여 기도하는 장좌불와나 삼보일배, 백일기도와 다를 게 무엇이 있겠는가?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장난감을 사달라고 보채도 효력이 없자 땅바닥에 뒹굴면서 억지를 부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어내려고 하는 행위와 비슷하다. 그런 논리라면, 금식기도에 탁월한 능력이 있거나 극기와 인내심이 대단한 사람들만이 기도응답을 잘 받는 비결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약 4:2~3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하나님께 복을 빌고 응답을 받기를 원한다면 기도하는 목적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고 자신의 욕심만을 위해 구하는 것은 아무리 오랫동안 간절히 기도한다 할지라도 응답이 없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뜻을 잘 살펴보는 것이 먼저이다. 그렇지 않다면 오랫동안 고생하면서 기도한 행위가 허망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 뿐이다. 기복신앙은 열심히 기도만 하면 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하지만, 온전한 하나님의 뜻은 열심히 기도하는 행위에 있기보다 구하는 목적이나 동기가 하나님 앞에 합당해야 한다.
오해 2 - 십일조나 헌금을 많이 드리면 복이 온다.
적지 않은 성도들에게 십일조와 각종 헌금은 뜨거운 감자이다. 마땅히 드려야 하지만 드릴 수 없는 상황도 있고, 아끼고 쌓아두어 부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에 수입의 10%를 드리는 십일조는 살을 저미는 고통으로 다가온다. 어디 그뿐이랴? 명칭도 제각각인 선교헌금, 건축헌금, 주일헌금, 감사헌금 등을 모두 다 합하면 수입의 20~30%를 웃도는 가정도 있다. 소득에서 이들을 제하고 나면 생활비가 빠듯한 게 현실이다. 게다가 자고나면 치솟는 물가에 허리를 휘는 자녀의 사교육비는 살인적이며, 주택대출 이자에 신용카드를 막기도 벅찬데 저축하며 노후대책을 준비할 겨를이 있겠는가?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드려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해 주변의 눈치를 보며 손이 쪼그라들어 겨우 체면치례만 할 뿐이다. 그래서 십일조나 헌금에 대한 설교를 할 때면 몸이 움츠러들고 죄책감에 얼굴을 못 든다. 이러한 마음을 눈치라도 챈 듯, 목사님은 십일조를 열심히 드리면 하늘의 복이 넘치도록 내려와 부와 성공의 반열에 설 수 있다고 큰소리로 외친다. 여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말라기의 십일조에 대한 성경말씀이다. 십일조를 드리면 하늘 복이 내리는 지 시험해보라고까지 하셨다고 하면서 더욱 목청을 높인다.
마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그렇다면 성경에서 십일조를 가장 열심히 냈던 사람들은 누구일가? 그들은 다름 아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다. 아마 십일조를 철저히 내는 대회가 있었다면 아마 그들이 탁월한 성적으로 우승했을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수입이외에도 가족들이 먹으려고 텃밭에서 기르는 채소에 이르기까지 꼼꼼한 규정을 만들어 철저하게 십일조를 드렸던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예수님에게서 칭찬은커녕 가혹한 책망을 듣는 당사자들이 되었다. 물론 예수님은 이들이 십일조를 열심히 드린 행위를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십일조를 드리는 행위와 더불어 믿음과 성품과 동기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할 것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잣대에 따르면 십일조를 내는 행위만 가지고 하나님을 감동시켜 복을 받을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렇지만 어찌된 일인지 우리나라 교회의 설교단상에서는 다른 말은 없고 오직 십일조를 드리는 행위만 유독 강조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십일조나 헌금을 즐거운 마음으로 넘치도록 드리는 것을 하나님께서 싫어하실 리 없다. 그렇지만 십일조나 헌금을 드리는 금액이나 기간에 따라 하나님이 즐겨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마음이나 성품과 믿음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해야 한다. 여기에 기복신앙과의 차이가 있다. 기복신앙은 드리는 사람의 동기나 성품, 믿음에 관계없이 풍성한 제물을 차려 그들의 신을 즐겁게 하기만 하면 된다. 물론 이를 주관하는 무당에게 후한 대가를 지불하여야 한다. 이들은 재앙이나 불행을 벗어나거나 사업의 성공, 회사에서의 승진, 선거의 당선, 자녀의 명문대학에 합격을 바라는 복을 얻게 하기위한다면 더 많은 돈을 들여 제사상을 차리고 제물을 올려놓으면 된다고 한다. 오직 그들이 섬기는 신은 돈을 많이 들이고 상이 떡 부러지게 차려 좋으면 기뻐할 뿐이지 복을 비는 사람의 다른 조건은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은 십일조나 헌금을 많이 드린다고 기뻐하는 분이 아니다. 십일조로 가져 온 돈이 불법적이고 부정한 방법으로 모으고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벌어드린 돈이나 부자나 성공을 위한 탐욕의 목적으로 가져온 돈이라면 아무리 큰 액수라도 하나님은 외면하신다. 그렇지만 이를 받는 적지 않은 교회나 삯꾼목자들은 이러한 것을 굳이 따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 많은 돈을 가져온 손만을 칭찬하고 교인들에게 선전해주어 더 많은 이들이 이에 동참하기만 바란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지 않는다면 허망한 돈이 되며, 교회를 부자로 만들어주어 담임목사를 유명하게 해주고 교회건물을 더 크고 짓거나 아름답게 치장하는데 사용될 뿐이다. 아무리 목회자의 입에서 축복의 선포가 우렁차게 나올지라도 아무런 효험이 없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오해 3 - 목회자를 잘 섬기면 형통해진다.
필자는 평신도 시절에 목회자를 잘 섬기면 복을 받는다는 말을 여러 번 들어본 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며 교회를 섬기는 이들이라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사실, 하나님 앞에 바로 선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가르치고 교인들을 올바르게 이끌기 때문에 이들의 말을 잘 듣고 가르친 대로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통한 복이 내려오는 길인 것도 틀리지 않다. 그렇지만 이 말의 진위를 잘 살펴서 판단하고 잘못되고 어그러진 길을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수많은 선지자를 통해 알려 이를 책으로 지은 것이 성경이며, 신비하고 특별한 일을 시행하더라도 이 원칙에 어긋나지 않도록 행하신다. 그래서 엄청난 능력을 행하며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가진 선지자이며 하나님의 종이라고 주변에서 떠받들더라도 성경에 어긋나게 행한다면 이는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다. 성경에는 선지자를 선대하라고 되어있지만 이는 모든 이웃에게 착한 일을 하라는 기본적인 원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귀한 사역을 담당하는 목회자를 정성껏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당연한 행위이겠지만, 목회자의 말을 잘 듣고 정성껏 섬기는 행위 자체가 복이 오는 통로는 아니다. 목회자가 하는 말이라도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가르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깨달아 솔선수범하며 가르치는 목회자의 말을 잘 듣고 따르는 것과, 교회를 지도하고 성도들을 이끄는 목회자이기 때문에 잘 섬기기만 하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상이 교회 내에 뿌리 깊게 존재한다. 그 이유는 두 가지 원인에서 기인한다. 첫째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유교사상의 근간으로 유서 깊은 가부장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유교가 통치이념이었던 조선시대에는 나라의 최고의 자리는 임금이므로 신하와 백성은 충성을 맹세하여야하며, 집안의 우두머리의 자리는 나이가 많은 순서대로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이어 내려온다. 그래서 집안에서 아버지의 말은 그대로 법이 되었다. 아무도 불평을 할 수도 없고 거역하는 것은 아버지의 권위에 정면 도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집에서 내쫒기는 형벌을 각오해야 한다. 이러한 유교시대의 가부장적인 사상이 교회에 들어와 교회 내에 어른의 자리를 두고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는 목회자에게 자연스레 내주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종인 목회자이기 때문에 무슨 말이나 행동을 하든지 불평하지 않고 잘 듣고 따르는 것이 교회법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람이 손수 만든 유전(遺傳)이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면서 사람이 만든 유전을 더 열심히 지켰다고 책망을 하신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볼일이다. 또 다른 원인은 구약시대의 제사장제도에서 연유한다. 구약시대에 성전을 섬기는 일은 아론의 혈통을 이어받은 레위자손들이 제사장직을 수행하였으며 이중에서 한 사람을 뽑아 그 해의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이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주관하며 관리하였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물을 성전에 가져오면 이들을 대신해서 제사장들이 제사법에 알맞게 제사를 드려주었으므로 하나님의 종으로 섬길 수밖에 없었다.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는 구약의 제사법과 제사장 제도가 폐지되었으므로 더 이상 제사장이 필요 없게 되었고 이제는 모두가 직접 하나님께 기도하며 스스로 예배를 드리는 제사장이 되었다. 즉 목회자가 대신 기도를 드려주며 예배를 대신 드려주지 않는다. 목회자는 신학교에서 신학과 목회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을 받고 교회에서 정해진 경험을 쌓아 안수를 받아 교인을 가르치며 교회를 관리하는 전문직일 뿐이다. 평신도나 목회자나 하나님 앞에서는 우열이 없이 동등한 신분일 뿐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를 잘 섬기기만 하면 무조건 하나님의 복이 내려온다는 말은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말에 불과하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가장 큰 이유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 사람에게 교회에 오기만 하면 부자가 되고 잘 살수 있다는 말은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이다.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예수를 믿기만 하면 완전하게 치유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은 환자의 귀가 번쩍 뜨이게 하는 말이다. 어디 그 뿐일까? 사업이 잘되며 자녀가 명문대학에 합격하고 하는 일마다 잘된다면 부모형제와 자식을 앞세우고 열일을 제쳐놓고서 단숨에 달려와야 할 일이 아닌가? 그렇게 선전한 기복신앙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 문을 열고 들어오게 한 요인이 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기복신앙은 수많은 사람을 뒷문으로 나가게 한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체험한 사례가 적지 않다. 귀신이 쫓겨나가며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며 죽어서 살이 썩어 냄새가 역겨운 시체조차도 두 눈을 번쩍 뜨고 다시 살아나는 판국에 부자가 되고 사업에 성공하는 것쯤은 누워서 식은 죽 먹기처럼 쉬워 보인다. 게다가 구약성경의 믿음의 조상들은 엄청난 부를 소유한 족장들이 아닌가? 욥은 동방의 최고의 부자였음에도 고난을 이겨내고 나자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처음의 부보다 두 배가 넘는 재산을 얻었으며, 겨우 지혜를 구한 솔로몬왕은 하나님을 흡족하게 해 드린 대가(?)로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한 부를 소유한 재산가가 되었다니 성경에는 이처럼 침이 꿀떡 넘어갈 이야기로만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일이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임하지 말라는 말은 없다. 하나님은 과거의 하나님이 아니며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를 만드시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누누이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기독교 서점에 가면 예수를 잘 믿고 십일조를 잘 내어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는 록펠러의 전기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으며 성경의 원칙을 이용하여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로 구성된 책들이 인기가 식을 줄을 모른다.
그렇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현실로 돌아와서 부자가 되고 성공하는 사건이 자신에게 직접 일어나고 본인이 생생하게 체험을 해야 납득을 하게 된다. 록펠러는 십일조를 열심히 드려서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는데 왜 나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가? 사실 필자가 재정관리 상담센터를 운영하면서 받은 상담 중에 적지 않은 상담이 십일조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들 중에 십의 일조가 아니라 십의 이조, 삼조를 십년이 넘게 드려도 부자가 되기는 고사하고 극도의 가난한 삶뿐이었다는 눈물겨운 고백을 심심찮게 들어왔다. 공의의 하나님이시라면 백만장자인 록펠러에게 행하셨던 축복의 원칙을 모든 당신의 자녀에게 공평하게 적용하시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게 하는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사건은 교회의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교회를 오랫동안 다니다가 실망을 하고 교회에 발을 끊은 사람들을 만나보라. 이들에게 교회를 왜 그만두었냐고 물어보면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목사는 다 사기꾼이라는 막말이 거침없이 나온다. 물론 이들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배우지 않고 행하지 못한 책임도 적지 않게 있겠지만, 마치 하나님에게 와서 십일조와 헌금을 아낌없이 드리면 넘치도록 복을 내려준다는 설교를 오해하고 곡해하여 그렇게 알고 있다가 사업이 부도가 나고 집이 경매로 넘어가며 신용불량자의 나락에 떨어지게 되면 원망의 대상이 고스란히 교회와 목사들의 몫으로 돌리게 된다. 물론 뒤를 돌아보지 않고 교회를 박차고 나가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필자의 주변에는 이런 사례가 하도 많아 굳이 일일이 옮기고 싶지도 않다. 그들은 공통점은 너무 열심히 예수님을 믿고 정성을 다해 교회와 목사를 섬겼다는 것이다. 아마 그렇게 열심히 믿지 않고 설렁설렁 다녔다면 사업체가 부도가 나고 재정적인 어려움이 닥쳐도 교회를 원망하고 목사에게 불평을 쏟아 붇지 않을 것이다. 목사의 말을 철썩 같이 믿고 하나님의 복을 추호도 의심치 않았기에 이들의 실망감과 허망함은 극에 다다르게 되었으리라. 이 같은 결과의 원인은 거짓된 하나님의 복을 가르쳤거나 일부의 조건에 불과한 하나님의 뜻을 마치 전부인양 과장하고 부풀려 오해를 부추긴 목회자의 잘못된 가르침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 기복신앙이다. 기복신앙은 사람들을 쉽게 교회로 끌어들이는 매력적인 수단인지는 몰라도 쉽게 교회를 등지게 하는 가슴 아픈 이유가 되는 것이다. 교회를 떠나는 이유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들이 교회의 적대자가 되어 교회에 호의적인 사람들에게 조차 자신의 경험을 앞세워 교회가 마치 사기꾼을 소굴이고 목회자는 그 우두머리라며 목청을 곤두세우고 교회와 하나님을 폄훼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그래서 이들이 다시는 교회에 돌아오는 것은 물론이고 전도의 앞길을 가로막는 성령을 훼방하고 하나님을 부정하는 적대자가 되는 두렵고 안타까운 일이 생기게 된다.
마 18:7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통계에 의하면 교회에 왔다가 도로 나간 사람이 천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 사람들만 교회에서 제대로 가르치고 양육했더라면 우리나라 국민 두 명 중의 한 명은 크리스천일 게다. 세상 사람들을 전도해서 교회로 오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오랫동안 기도하면서 시간과 정성을 들이고 돈까지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어렵사리 교회에 오게 해서 하나님을 배우게 하고 예수님의 제자로 키우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이들이 교회를 떠나 세상으로 도로 나가게 하는 빌미를 제공했다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람에 대해 격한 말을 서슴지 않는다. 심지어는 눈이 실족해 한다면 눈을 찍어 버리고, 손발이라면 손발을 잘라버리며,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물에 빠져 죽는 것이 차라리 영혼을 위해서 더 낫다는 단호한 처방을 내린다. 이처럼 하나님은 한 영혼을 실족케 하는 일에는 엄청난 화가 있을 것이라고 상상조차 무서운 경고를 하고 있다. 기복신앙을 참된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가르치고 퍼뜨려서 이를 믿고 교회에 왔다가 실망하고 좌절하여 떠나게 하였다면 위의 성경에 해당하는 죄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대형교회와 성공신화에 눈이 먼 삯꾼 목자들은 위의 경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있으며 세상의 물질주의와 성공만능주의에 물들고 탐욕에 이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성경에서 온전한 하나님의 뜻을 찾기보다 자신들의 부와 성공을 보장해준다는 이들의 말에 지극히 만족해하면서 덮어놓고 박수를 치고 큰소리로 아멘을 외치고 있다. 그렇지만 그런 사이에도 사업의 실패와 직장에서의 해고, 악성부채로 이혼을 당하고 가족과 가정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세상의 복을 기대한 교회와 하나님에게 좌절하고 실망해서 교회 뒷문으로 빠져나가고 있으며 그 자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새로운 사람들로 다시 채워지고 있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출 처 : 다음 카페 [크리스천 영성학교]
글쓴이 : 신상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