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년 전으로 떠나는 전주의 지명 여행
- 김규남(전북언어문화연구소장) -
1. 들어가며
후백제의 도읍이었으며, 조선 건국조 태조 이성계의 본향이고, 조선시대 제주도를 포함한 전라도 전체를 관장하던 주요 도시였던 전주는 이제 예향의 도시라는 수식어가 붙은 지방 중소 도시로 그 위세가 축소되었다. 하지만 최근 전통과 문화를 상품화하는 시대적 동향에 따라 전주의 전통 문화를 되살리려는 노력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8세기 후반, 전라남북여지도의 전주
여느 도시들이 비슷한 방식으로 변모되어 왔던 것처럼 전주 또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정책에 따라 예전의 모습은 이미 그 형체를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파괴되고 당시에 세워진 식민도시로의 도시 개발 계획이 진행되어 왔다. 이는 해방 이후에도 이미 세워진 도시 개발 계획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훼손된 역사와 문화를 회복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점이 그 방증이다. 전주는, 그런 점에서 다른 도시에 비해 그 훼손의 정도가 심각한 곳 중 하나였다고 할 만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조선시대 전주가 건국조의 관향이었으며 그와 관련된 주요 유적지들이 산재해 있어서 전주는 가히 조선 왕조의 권위를 상징하는 도시였다. 왜인들이 전주를 훼손하는 데는 명백하게 그런 속셈이 숨겨져 있었으며 그로부터 비롯되는 전주의 식민도시화는 과거와 현재를 단절시키기에 충분했다. 조선시대 전주의 지명을 살피는 일은 조선 시대의 전주의 원형을 가늠해 보고, 그 자연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는 시도이다. 이 글에서는 백여 년 전 전주의 자연적 배경을 이루는 산과 물길 등의 자연적 조건과 관련된 지명들을 살피고, 이런 자연적 배경을 중심으로 전주의 사회적 삶과 문화적 토양이 그 위에 수 놓여진 전주의 다양한 삶의 양상들을 살피게 될 것이다.
2. 전주부성과 근교
그림 1) 부사면도, 구한말 전주의 행정구역
문헌자료 상으로 남아 있는 당시 전주의 행정구역을 좇아 전주성과 근교가 어떻게 구획되었는지 살펴보자. 경성제국대학부속도서관 소장, 조선 말기 전부와 근교를 그려놓은 부사면도(府四面圖)에 표시되어 있는 행정 구역들을 보면, 전주부성을 중심으로 한 전주의 중심부는, 서문에서 동문, 남문에서 북문에 이르는 십자형 도로를 중심으로 부북면, 부동면, 부서면, 부남면으로 나뉜다. 즉, 동문에서 서문을 관통하는 도로 위는 부북면과 부동면, 도로 아래는 부남면과 부서면으로 나뉘며, 다시 남문과 북문을 중심으로 동편은 부동면과 부남면, 서편은 부북면과 부서면으로 나뉜다. 부북면은 부북일계, 이계, 삼계, 사계로 표시되어 있으며, 부동면은 남문, 북문간 도로의 동편 전체를 가리키는데, 남문에서 동문에 이르는 성벽 안쪽에서부터 부동일계, 이계, 삼계, 사계로 나뉘고 성벽 밖으로 부동오계와 부동육계가 나뉘어 있다. 부서면은 동서문 도로의 남쪽 남북문 도로 서쪽 일대로, 부서일계, 이계, 성밖으로 부서삼계, 사계 그리고 전주천 넘어 빙고리를 포함하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부남면 가운데 성문 안에 있는 구역은 부남일계로 남문에서 서문으로 이어지는 성벽 안쪽 지역이 이에 속한다. 부남면은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다양한 동네 이름들을 갖는다. 부남 방천리는 남문 밖에서 전주천에 이르는 서쪽 지역, 구석리는 남문 밖에서 전주천에 이르는 동쪽 지대, 부남 삼계는 구석리 동편, 부남사계는 오목대 주변, 향교 주변은 교동, 전주천을 넘어 지금의 서완산동 부근은 은송리, 동완산동 부근은 곤지리, 서학동 부근은 사정리, 동서학동 부근은 반석리로 표시되어 있다. 전주부성 안에는 객사와 전라감영, 전주부영이 중심부에 있었으며 주변은 상인이나 평민들의 거주 지역들이 북문에서 서문을 거쳐 남문으로 이어지는 성벽 안쪽에 동네를 이루고 있었다. 당시에 이 동네들에 대한 지명이 있었을 것이지만 지금으로서는 구전 자료조차 남아 있지 않다.
위 지도는 19세기 전주의 부성과 인근의 모습을 비교적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전주부성 내의 주요 건물들은 그 자체로 지명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객사, 한벽루, 향교, 경기전 등이 지금도 그 건물 명칭이 지명처럼 사용되는 것과 같은 방식이었을 것이다. 우선 조선시대 도시 형성에 있어서 부성의 부속 건물로 1묘, 1사, 2단 조성이 관례화 되어 있어서, 향교의 문묘, 성황사(동고산성터), 사직단(현 신흥고등학교 자리), 여단(동초등학교 뒷산) 등이 배치되어 있었을 것이고, 당시 부성과 관련 건물들로 객사, 선화당, 중진영, 경기전, 향교 등을 비롯하여 인근의 화산서원(1578년), 한벽당(1400년), 공북루(1461년 이전으로 추정), 군자정(1677년), 희현당(1700년), 다가정(1712년), 읍양정(1766년), 청운정, 백운정(19세기 말) 등은 전주부성과 인근에 위치한 주요 건물들로서 그 자체가 하나의 지명처럼 사용되어 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예이다. 부성의 부속 건물들과 더불어, 사방에 세워진 네 문은 그 자체가 지명이다. 동문(完東門), 서문(沛西門), 남문(豊南門), 북문(拱北門)이 그것이며 이 네 문은 특히 장이 형성되어 인근의 백성들이 물물교환이나 상업적 교류를 위해 모이고 흩어지는 중요한 공간으로 이용되었다. 장의 형성 시기는 생략하기로 하고, 1893년 경 전주의 주요 장으로는 동문밖장, 서문밖장, 남문밖장, 북문밖장이 있었다. 동문밖장은 한약재와 특용작물을, 북문밖장은 포목과 잡곡을 주로 거래하였다고 한다. 특히 남문밖장을 위시하여 전주천변은 천을 따라 온갖 장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곳이다. 싸전다리 밑의 싸전, 매곡교 부근의 쇠전, 설대전, 은송리에서 초록바위까지의 나무전 등은 그 전형적인 예이며 그 자체가 하나의 지명처럼 사용되어 왔다.
그림 2) 이 그림은 1900년 전후의 것이다. 정면으로 보이는 산이 중바위, 전주천을 중심으로 왼편은 향교와 남문시장, 오른편은 천변으로 형성된 장옥의 모습이다.(전주국립박물관 1998)
전주천변은 특히 전주사람들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온 생활공간 중 하나이다. 한벽루에서는 유생들이 풍류를 즐기고, 각시바우, 서방바우에서는 아이들이 고기잡고 ‘멱감기로 유명했으며, 특히 남천에서 아주머니들이 빨래를 하기도 하고 빨래를 삶아 널기도 하는 장관은 남천표모라 하여 완산팔경 가운데 하나로 꼽을 정도였다. 그리고 싸전다리, 매곡교, 서천교 등에서는 온갖 장이 열리는 장터로 상용 전주천변은 사람이 끊일 날이 없었다. 전주천은 전주부성을 기준으로 부성의 남쪽을 흐르는 천은 남천, 서북진하며 방향을 튼 부근을 서천으로 부른다. 그 외에도 각각의 다리와 인근의 장 이름이 전주천의 부분 부분을 나누어 명명하는 지명으로 사용된다. 남천에는 예전부터 다리가 있었는데, 영조 때 다리가 유실되어 정조 15년에 다시 놓았는데 다섯간의 홍예교였다고 한다. 이를 줄여 통상 홍교라 불렸다고 한다. 그후 광무 5년 관찰사 조한국이 개축하여 평교를 만들었으나 다시 수해를 만나 유실되고 1907년 부내 유지들이 사재를 털어 수축하였다고 한다. 그 많은 곡절만큼이나 남천교의 이름 역시 남천석교, 새다리, 안경다리 등등의 이름을 거쳐 지금의 남천교에 이른다. 남천은 싸전다리를 지나 초록바위 앞에서, 흑석골에서 흘러내린 공수내와 만나 세를 불린다. 전주천을 중심으로 부성 편과 그 반대편에 천변이 만들어 놓은 공간을 이용하여 양쪽 모두에 장시 서 있었다. 싸전다리를 시작으로, 매곡교를 건너 맷골 앞으로는 쇠전이 있어서 쇠전갱변으로 불렸으며, 매곡교에 담배를 파는 장사들이 좌판을 벌인 데서 매곡교를 연죽교, 설대전다리로 부르기도 했다. 특히, 매곡교에서 서천교 사이에 책방거리가 있었다고 하는데, 책방거리는 전주천변에 제방이 쌓이기 전에 있었으며 전주천 물길에 가장 가깝게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곳이 바로 춘향전, 흥부전, 숙영낭자전 등등이 출판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간 한국고대소설 출판 본거지였던 셈이다. 이곳을 지나면 소금전이다. 지금의 완산교 자리는 예전에 소금전이 있어서 염전교 혹은 소금전다리라 불렸다. 소금전을 끝으로 천변의 시장은 끝나고 서문에서 천변을 건너 천양정, 화산서원 등으로 통하는 사마교가 있었다. ‘사마교’는 지금의 신흥학교 부지에 사직과 향교 그리고 생원과 진사들의 집회소인 사마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마교를 지난 서천은 도토릿골, 어은골, 구석뜸, 청수코테기 등의 생활용수로 쓰이고 특히 도토릿골 앞에서 오른편으로 한 줄기를 내어 장잿들쪽으로 흐르는데, 이 물을 이용하여 물방아를 돌렸다는 물방앗골, 쌍물방앗골, 비석거리, 숲정이를 지나 ‘모래내’에서 흘러내린 ‘검암천’에 합수된다.
3. 중바우에서 칼바우까지
전주시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전주 중앙동 부근의 건물 위에 올라서 보면 전주는 남쪽으로 높은 산줄기에서부터 북진하는 산줄기가 동서 방향으로 뻗어 내리는 형상이다. 현재는 이미 개발이 진행된 상황이기 때문에 그 산줄기의 원형을 가늠하기조차 어렵지만, 응당 자연적 조건을 중요하게 여기고 그에 알맞게 어울려 살아온 선조들의 삶의 태도로 본다면 이 지형적 조건이야말로 전주 형성의 중요한 배경이었음에 틀림없다. 주변의 자연적 상태를 훼손하지 않고 아니 오히려 그것을 중요한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중심으로 사회적 삶이 이루어지던 시대 즉 지금부터 약 백년쯤 전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면, 전주부성은 바로 그 길고 두툼한 산줄기들의 사위에 포근하게 안겨 있는 모습이다. 전주의 고지도들을 통해서 보면 그 양상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게 되는데, 좌우로 두른 산세는, 동쪽이 그 폭과 산세가 훨씬 품이 넓고 크며 서쪽은 그에 비해 다소 짧고 뭉뚝한 편이다. 어떻든 북을 향해 동서로 뻗은 산줄기 덕분에 그 안의 평야부는 전주부성이 남쪽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평야부가 가련산까지 계속된다. 조선시대 혹은 이미 그 이전 시기 즉 풍수를 중심으로 자연을 이해하던 당시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지산(乾止山에)서부터 곤지산(坤止山)에 이르는 선은 전주의 향방을 가늠하는 축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로 건지산은 현재의 전북대 병원 뒷산을 가리키며 곤지산은 전주도서관 자리, 초록바위 뒷산, 이팝나무 군락지의 봉우리를 가리키는데, 이 두 산의 첫 이름이 바로 주역에서 태극을 중심으로 하는 건곤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응당 전주의 간산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건곤지산의 축을 중심으로 보면 전주의 북서방향이 뚫려 있다. 바로 이 자리가 풍수상으로는 빈곤한 지역이라고 여겨 왔다. 그래서 만들어지는 지명이 ‘진북(鎭北)’이다. 건지산 줄기가 덕진제 앞에서 끝나고 그 맞은편에 솟은 가련산(可連山) 또한 북쪽이 허한 점을 막아보려는 비보풍수적 차원에서 건지산과 이어져야 마땅한 산이라는 의미로 명명된 것이다. 어떻든 세간에서 전주의 지형을 배가 가는 모습(行舟形)이라고 하는 까닭도 그런 지형적 조건에 대한 상상력을 동원한 해석에서 비롯된 일이다. 인간이 이미 자연 위에 군림한 지 오랜 까닭에 그까짓 산자락 하나쯤이야 맘만 먹으면 잘라내기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이미 자연과 조응하는 문화는 호랑이 담배 먹던 이야기로 하대를 받지만, 산자락 하나하나에 부여한 전주 사람들의 상상력은 현대인의 자연관과 비교가 되지 않는 매력이 있다.
우선 중바위에서 출발하여 전주부성의 동쪽을 감싸 안는 산자락의 중심에 기린봉이 있다. 기린봉은 봉우리의 모양이 기린의 등과 비슷하기도 하지만 그 산에 기린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역시 기린의 상서로움을 감안한 것이 틀림없다. 즉 동양에서의 기린은 서양 기린과 달리 상상의 동물이다. 즉 성군이 나서 왕도가 행하여지면 나타나는 상서로운 동물인데 생초를 밟지 않고 생물을 먹지 않는다하여 그 성품이 자애롭고 인자함을 상징하며 그 모양은 사슴 같고 이마는 이리, 꼬리는 소, 굽은 말과 같고, 머리 위에 뿔 한 개가 있다고 한다. 바로 그 상서로운 기린이 전주부성을 감싸 안은 까닭은 이곳이 태조 이성계의 본향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기린봉에서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는 것이 전주의 여덟 가지 아름다운 풍경 가운데 으뜸으로 쳐, 전주에서는 흔히 기린토월(麒麟吐月)로 통하고 있다. 중바위에서 오목대에 이르는 산줄기를 발산, 발리산이라고 부른다. 발산(鉢山)과 발리산(發李山)은 하나는 중바위와 관련되고 또 다른 하나는 이목대, 오목대와 관련된다. 발산이 중바위와 관련되는 것은 발(鉢)이 중들이 사용하는 밥그릇 즉 바리때라는 뜻으로 산의 모양이 그렇게 생겼다고 상상하는 데는 그 주봉이 중바위(僧岩山)1)인 데서 비롯된 것이다. 발리산은 말 그대로 이씨들이 발원한 산이란 뜻으로 태조 이성계의 고조인 목조2)가 이곳에서 생장하였다고 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종종 이 산을 그저 이목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목대에는 예전에 호운석이나 장군수와 같이 목조의 유년기와 관련된 지명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역시 문헌에만 기록되어 있을 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사라진 지 오래인 듯하다.
호운석은 목조가 유년기에 아이들과 더불어 병정놀이를 하곤 하였는데, 어느날 비가 몹시 내려서 바위 밑으로 뚫린 굴로 비를 피해 들어갔다고 한다. 그때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그 아이들을 위협했고, 그 때 아이들은 자신의 웃옷을 벗어 호랑이 앞에 던지고 호랑이가 문 옷의 임자가 아이들을 대신하여 호랑이의 먹이가 되기로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목의 옷을 호랑이가 물게 되었고, 이목이 먹이가 되기 위해 굴에서 나가자 그만 굴이 무너져 그만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 이목대에서 뻗어내린 산줄기의 끝자락에 오목대가 있다. 오목대(梧木臺)는 이성계가 고려말에 지금의 운봉에서 왜구를 무찌르고 돌아오다가 승전을 자축하여 연회를 베풀었던 자리이다. 이때 이성계는 자신이 대업을 이룰 뜻을 암시했었고, 그를 간파한 정몽주가 자리를 박차고 지금의 남고산성 성벽의 하나인 만경대에 올라 이성계를 경계하는 글을 바위에 새겼다고 한다. 어떻든 그렇게 보면 발리산, 이목대, 오목대는 모두 조선 건국조 이성계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으며 그 산줄기의 끝자락에 태조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경기전(경기전)을 세워 둔 점도 이곳이 조선 왕조의 성지 중의 으뜸가는 성지였음을 시사한다. 이 산을 중심으로 한벽루가 있다. 이곳은 임실 슬치에서 발원하여 전주로 들어오는 전주천이 시작되는 곳이다. 예전에 물이 많던 시절에는 한벽청연(寒碧晴煙)이라 하여 한벽루 앞에서 피어오른 물안개가 서서히 사라져 가는 모습이 또한 절경이라 하였으며, 오목대 남쪽에 자리한 향교와 오목대가 또한 가까워 전주의 선비들이 이곳에서 전주천을 바라보며 풍취를 즐겼 왔던 명소였다.
그러니 조선을 제국주의의 제물로 삼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이곳을 의도적으로 훼손하려 들었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왜인들이 파괴를 일삼으면서도 명분은 개발이었던 것처럼 이곳 역시 철로 개설이라는 명분으로 이목대에서 오목대로 이어지는 발리산의 정기를 잘라냈던 것이다. 조용한 산자락에서 둘러 앉아 낭랑하게 글을 읽던 향교 뒤로 또 전주천을 바라보며 시를 읊던 한벽루를 떨거지로 남겨 초라하게 만든 채 일제의 철로는 조선의 자존심을 짓밟으며 지나다녔을 것이다. 이때 구한말 전주의 큰 선비이었던 흠재(欽齋) 최병심 선생의 서슬 퍼런 저항이 자만동, 옥류동 사람들 사이에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고 있다. 당시 금재 선생의 집이 향교 뒤 지금의 자만동 근처였다고 한다. 이곳에 철로를 개설하기 위해 산자락을 파헤치는 것에 분개한 선생은 부득불 철로로 끊긴 발리산의 정기를 다리로라도 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기차의 진행을 몸으로 막아섰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목대와 이목대에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기차가 이 언덕을 넘어서지 못하다가 다리가 놓이고 나서야 기차가 제대로 이곳을 다녔다는 전설이 있었다고 회고한다.
중바위에서 기린봉으로 뻗어내리는 산줄기에서 곁가지로 흘러내리는 산자락 끝에 간납대라는 곳이 있다. 이는 사간과 헌납을 지난 이기발, 이흥발 형제가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굴욕적인 조약이 맺어진 후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하였다는 데서 그 벼슬 명칭을 따 만들어진 이름이다. 지금의 기린봉은 마당재와 가재미3)가 모두 개발이 된 상태이기 때문에 치맛자락처럼 펼치던 산으로서의 기개를 잃은 지 오래다. 하지만 100년 전 기린봉은 마당재를 넘어 서낭댕이로 이어져 반대산으로 솟아오른 산자락 하나와 가재미를 지나 안골 뒷산, 도당산에서 솟아오른 사위로 그 산기운을 굽이굽이 펼쳐 그 넓고 깊은 사위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우선 기린봉을 지나 마당재를 넘어 서낭댕이, 반대산으로 뻗어내리는 산줄기로 시선을 옮겨보자. 반대산 줄기에서 처음 만나는 마당재는 말 그대로 고개이다. 고개가 마당처럼 넓어서 마당재라는 이름이 붙은 셈인데,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서 고려시대에는 야단이 설치되고 법석이 열렸다고 한다. 당시에도 기린봉 자락에 있는 선린사가 그 법회를 주관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곳이 초파일 야단법석이 열리던 곳이었다고 하니 마당재가 그냥 마당재가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마당재를 넘어가면 한배미를 거쳐 아중리 저수지, 왜망실4)로 가는 길이다. 예전에 나무를 해서 살아가던 시절에는 마당재를 넘어 왜망실까지 나무하러 가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고 하니, 전주 사람들에게 마당재는 이래저래 사연이 깊은 곳이겠다.
마당재에서 인봉리를 감싸고 도는 산자락은 서낭댕이로 이어진다. 서낭댕이는 전주의 동북부 지역으로 나가는 길목이다. 즉, 서낭댕이를 넘어 서면 모래내, 안골, 안덕원을 거쳐 소양, 진안으로 빠져 나가는 길이다. 지금 서낭댕이에는 굽은 소나무 하나와 이곳이 예전에 서낭당이 있었음을 설명해주는 설명비가 서 있어서 시간의 다리를 놓고 있다. 서낭댕이 왼편으로 솟은 봉우리에 지금의 동초등학교가 들어서 있고 그 뒤로 솟은 봉우리가 반대산 혹은 반다뫼이다. 그곳에 여단터가 남아 있다. 여단은 조선시대 도시를 형성할 때 종묘, 사직 등과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요소 가운데 하나로, 국가에 극심한 가뭄과 같은 재해가 있을 때 하늘에 제를 올리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전주부성과 관련된 조선시대 전주의 범위는 이 반대산 자락 안쪽까지를 전주부성 지역이라고 할 만하다. 이 반다뫼 기슭에 무랑물이라는 동네가 있었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전주 유씨 집성촌이었다고 한다. 전주부성을 인접한 동네 가운데 무랑물5)은 뒤로 산이 있고 앞으로 물이 흐르는 남향받이일 뿐만 아니라 그 인근에 적당한 정도의 농토를 확보하고 있어서 여타의 동네에 비해 마을 조성의 입지적 조건이 매우 좋은 곳이다. 다시 기린봉에서 가재미 골짜기를 따라 가보면 도당산에 이른다. 도당산은 지금의 전주역쪽으로 한 줄기를 뻗어내리고 다른 한 줄기는 서쪽으로 틀어 매봉산으로 향한다. 가재미에서 도당산 그리고 도당산에서 매봉산쪽으로 뻗은 각진 산줄기에 들어앉은 동네가 안골이다. 안골은 서낭댕이를 넘어 소양, 진안 방향으로 가는 길과 전주부성의 북문을 나와 진밭들을 지나 명짓골, 아리랑 고개를 지나 고산으로 가는 길 사이에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말 그대로 골짜기 안에 들어앉은 마을이다. 한편 매봉산으로 흘러내린 도당산 줄기는 칼바우 쪽으로 한 가닥을 내리고, 다른 한 가닥은 북으로 흘러 지금의 전북대학교과 사대부고 사이를 지나 전북대 농과대학 쪽에서 마무리 된다. 한편 도당산과 매봉산 중간에 북쪽으로 산줄기가 뻗어 도천봉에 이른다. 도천봉은 동서로 한 줄기가 뻗고 북으로 다른 한줄기가 뻗어 장구봉으로 이어진다. 장구봉에서 갈미봉, 건지산을 지나 덕진연못 제방에서 기린봉으로부터 뻗어내린 산자락이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백여 년 전 전주의 동부 산간을 형성하는 이 산줄기 사이사이에 크고 작은 자연부락들이 들어 서 있었다. 발리산과 간납대 사이에 낙수정, 지금은 군경묘지로 통하는 곳은 해방 후 피난민들이 들어와 정착한 마을이어서 백여 년 전에는 동네로서의 규모를 가진 주거지는 아니었던 듯하다. 다만, 발리산 줄기를 넘어 발리산 기슭에 자만동과 옥류동이 있었다. 그러나 이곳 역시 이렇다할 농지를 갖지 못한 지역이어서 마을이 있었다고 해도 그 규모는 매우 작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간납대와 마당재 사이에 참나무정이, 웃마당재, 아랫마당재라는 자연부락들이 있었다. 이곳 역시 농지를 확보하지 못한 곳들이어서 농경 중심의 조선 시대에 큰 마을로 보기는 어렵다. 다만 마당재에서는 주로 예전에 묵을 만들어 연명했다고 한다. 마당재에서 서낭댕이로 넘어가는 산록에 인봉리가 있다. 마을 이름으로 ‘리’를 사용한 것으로 보면 그 근방에서 인봉리가 중심이 되는 큰 마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가재미와 안골, 큰 모래내, 작은 모래내 등은 각각 기린봉의 북쪽 산록에 형성된 마을, 한배미에서부터 흘러내린 물줄기가 모래내로 이어지며 하천 주변의 작은 다랑이 논들에 붙어 연명한 작은 마을들이 있었으며, 큰 모래내에 와서야 들다운 들 진밭들을 거느린 검암을 만나게 된다. 진밭들, 진밭다리 등은 반대산 자락 북쪽 매봉산 자락 앞쪽의 긴 골짜기 사이로 길게 흐르는 모래내를 따라 형성된 들녘으로 ‘진밭’은 ‘길-+-ㄴ’에 ‘밭’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지명으로 말 그대로 ‘긴 밭 들’ 즉 ‘길게 형성되어 있는 밭들이 모여 이루어진 들’이다.
‘검암’은 ‘앞검암’, ‘뒷검암’으로 나누어진다. 구암산 즉 지금의 KBS 방송국과 교통정보센터가 자리한 구암산(九巖山)을 중심으로, 앞검암은 진밭들을, 뒷검암은 사평들쪽을 바라보고 앉아 있다. 구암산이라는 이름은 예전에 이곳에 아홉 바위가 있어서 생긴 이름인 듯하다. 지금도 그와 관련된 바위 이름들이 노년층 제보자들 사이에 회자되곤 한다. ‘검암’은 지금의 금암동이란 동 명칭의 바탕이 되는 것인데 고유어로는 ‘칼바우’다. ‘칼바우’은 지금의 전주 KBS에서 기린로 쪽으로 내려선 바위를 가리키는데, 이 바위가 진북사 앞에 있었던 범바우와 마주 보고 있었다고 한다. 진북사 쪽의 범바우가 그 드센 기운을 드러내는 것을 견제하는 것이 바로 이 칼바우였다고 한다. 칼바우 끝에는 ‘배맨바우’가 있었고 ‘배맨바우’ 주변을 ‘배맨자리’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모두 기린로가 개설되고 그 자리에 현대자동차 서비스 센터가 들어서면서 그 자취를 감추었다. 또한 KBS방송국 정문 앞에 공알바우가 있었는데, 뒷검암 사람들은 이 공알바우에 떼를 입혀 두었다고 한다. 이 떼가 벗겨지면 뒷검암리 여자들이 바람이 난다는 속설이 있었는데, 앞검암리 사람들이 자꾸 떼를 벗기는 바람에 마을 간에 싸움이 잦았다고 한다. 이 바위 또한 전북대 신정문 앞에서 전주고에 이르는 남북로가 개설되면서 없어졌다고 한다. 어떻든 ‘검암’은 왜정시대에 들어 ‘금암(金巖)’으로 바뀌게 된다. 아마도 ‘범바우’의 기운을 막을 ‘검암’이 사라질 운명이 이 당시부터 예정되었던 것은 아닐까.
중바우에서 시작되어 기린봉에서부터 그 사위가 갈래를 타고 오르고 내리며 전주부성의 동부지대를 겹겹이 둘러싸던 산자락들은 네 줄기의 물줄기를 따라 크고 작은 마을들이 들어서 다랑다랑 붙은 논배미 밭 뙤기에 매달려 연명해 온 셈이다. 불과 백여 년의 세월 동안 예전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지금은 산도 물도 자연으로서의 운명을 다하고 도심의 일부가 되어 세월과 콘크리트 속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그림 3)) 전주부성과 주변의 산줄기(김규남⋅이길재 2001: 28쪽)
4. 좁은목에서 청수코테기까지
중바우에서 칼바우까지가 전주의 중심부를 감싸는 동편 산줄기라고 한다면, 좁은목에서 청수코테기까지는 남쪽에서부터 서쪽으로 북진하며 전주부성을 감싸는 산줄기를 일컫는다. 전주부성의 남부 지역은 두툼한 고봉으로 막힌 듯하지만, 임실 슬치에서 발원하여 전주로 흘러들어 오는 전주천 물길이 흘러 들어오며, 중바우와 남고산을 완전히 갈라놓는다. 중바우 쪽의 산줄기는 앞 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주의 동부지역을 감싸고, 남고산에서 시작되는 산줄기는 학봉, 완산칠봉, 다가산, 유연대를 지나 청수코테기까지 전주천의 물줄기의 방향을 인도하며 전주의 남서부 지역을 감싸고 돈다. 남고산이 한벽루를 바라보며 가파르게 내려앉은 끝자락이 ‘좁은목’이다. ‘좁은목’은 말 그대로 남원, 임실, 관촌, 상관 방향에서 전주로 들어오는 길목이며 가파른 산자락을 따라 휘돌아 들어서며 좁다란 길목을 형성하는 곳이다. ‘좁은목’과 더불어 남고산 기슭을 타고 들어오는 또 다른 길목으로 ‘노루목’이 있다. 이곳이 ‘노루목’이 된 까닭은 맞은 편 중바우 기슭은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형국이며, 이곳은 노루가 한가롭게 풀을 뜯다가 목이 말라 물을 찾다가 호랑이를 보고 깜짝 놀라 숨을 곳을 찾아 날뛰는 형국이라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전주시지 1997, 119쪽). 이는 여느 풍수지리상의 설명보다 재미나고 동적인 구성으로 만들어진 이야기여서 흥미롭다.
노루목을 넘어서면, 전주부의 부남면 반석리이고, 노루목에서 남고산 정상을 향해 가파르게 올라서면, 남고산성을 만난다. 남고산성은 둘레가 약 5400미터에 이르며 후백제의 옛 성터라고도 하는데, 지금 남아 있는 남고산성은 조선 순조 11년(1811년)에 관찰사 이상황(李相璜)이 증축한 것으로 전해지며, 고종 8년 관찰사 이호준(李鎬俊)이 부남 삼리 반에 남관진(南關鎭)을 설치하여 남원에서 오는 도로를 지키게 하고, 남고산성 별감으로 하여금 겸직하여 6개월 교대로 주둔하게 하였다고 하는 것처럼 전주를 엄호하는 주요 방어진지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으나 고종 32년 남고산성 별장과 더불어 남관진을 폐지함으로써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남고산성에는 억경대, 만경대, 천경대가 있는데, 각각의 봉우리에 올라서면 억, 만, 천 가지 경관이 한 눈에 들어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남고산성 내에는 웃산성과 아랫산성으로 불리는 마을이 있다. 이곳은 산성이라는 말마따나 난을 피해 들어오거나 세상을 등지고 들어와 살던 사람들에 형성된 마을이었다. 웃산성 안에는 관왕묘(關王廟)가 있는데, 이는 고종 34년(1895년) 전라도 관찰사 김성근과 남고별장 이신문의 발기로 각처 유지의 헌납을 받아, 관우의 제향을 모시기 위해 만들어진 사당이라고 전한다. 아랫산성은 예전에도 불과 몇 가호에 불과한 조그마한 마을이었다고 하는데 조선 중기 충신 이정란 선생의 사당인 충경공 사당이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노루목을 건너면 반석리를 만나는데 아랫산성을 내려 오면서도 반석리를 만나게 된다. 반석리는 조선말기 감영과 부영에 속한 노비들이 이곳에 수백호의 관노마을을 형성하고 살고 있었는데, 신분 차별이 엄격하던 시기에 노비들이 옷과 신발을 갖추어 사인교를 타고 혼례식을 치른 것에 대해 이속들이 벌을 준 것이 도화선이 되어 1889년 이곳의 노비들이 일제히 봉기하여 성내에 쇄도 감영 앞까지 침입한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감영의 병졸들이 이들을 격퇴하고 반석리를 불태워 버렸는데, 이에 분개한 노비들은 동학군에 들어가 약탈을 자행하자, 이속들은 모두 흩어져 도망치고, 관아에서는 이로 말미암아 노비의 근무를 폐지하고 동족의 자제로 충당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반석리를 지나면 학봉 마을을 만나게 되는데, 학봉 마을은 주로 이속들이 살던 마을이었다고 하며, 남고산에서 뻗어내린 산세가 마치 쌍학이 날개짓을 하는 형국이라는 데서 연유한 지명이다. 이전 시기의 학봉리는 전주천에서 산쪽으로 들어와 있었으며 그 사이는 대부분 미나리깡이었다고 한다. 지금의 전주교대부속초등학교 자리는 예전에 ‘사정물’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이는 ‘사정(射亭)+’로 활을 쏘는 정자가 있던 마을이었다. ‘사정물’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지금의 전주남초등학교 자리에 예전에는 소를 도살하던 ‘도수장’이 있었다. 그 길을 따라 곧장 올라가면 ‘공수내’를 만나고 ‘공수내’를 따라 올라가면 ‘흑석골’이다. 흑석골(黑石골)은 한자 뜻 그대로 검은 돌이 많아서 생긴 이름인데, 70년대 무렵까지만 해도 연탄공장들이 많았다고 하며, 물이 좋아서 한지를 만드는 공장들이 들어서기도 했다. 흑석골은 남고산과 고덕산 봉우리로 막혀 있으나 남고산성으로 넘어가는 매봉재, 고덕산을 넘어 구이 평촌, 임실 신평으로 넘어가는 보광재의 길목이었다. 즉 조선시대에 이곳은 근방의 사람들이 전주로 드나들던 주요 관문이었으며 나무꾼이 많던 시절에는 그 길이 달구지가 다닐만큼 넓은 길이었다고 한다. 한편 매봉재에서 내리는 물은 ‘베락수’라는 폭포를 거쳐 내리고, 보광재 쪽에서 내리는 물은 학두암을 지나 용천대라는 폭포를 이루어 흑석골에서 합수하게 되는데, 흑석골의 두무소6)는 전주부성 사람들의 피서지로 유명했었다고 한다. 두무소를 따라 내리는 물은 공수내(拱水내)가 되는데, 사람들은 공수내를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의 발음과 유사한 데 착상하여 이 다리가 이승을 올 때도 빈 손으로 왔듯 저승에 갈 때도 빈손으로 가는 다리로 생각해 왔으나 실상, 한자의 뜻 대로 예전에 이곳은 물이 많고 물살이 급하여 이곳 공수내에서 센 물살이 굽이치며 포말을 이룬 데서 비롯된 뜻이다.
한편 고덕산, 보광재를 지난 산자락은 장승백이에서 다소 완만히 내려앉는 듯하다가 완산으로 드세게 솟아오른다. 장승백이 역시 구이, 원평 쪽에서 전주로 들어오는 길목이며, 장승백이에서 전주쪽으로 내려 오다보면 오른편에 ‘미륵댕이’와 ‘제실뜸’을 만난다. 미륵댕이는 이두리라는 총각이 고승을 만나 발복한 후에 땅속에 묻혀 있던 미륵입상을 발견하고 당을 세운 이후 붙여진 이름이다. 제실뜸은 전주최씨의 제실이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완산은 백제시대 전주를 나타내는 지명이었던 만큼 전주의 중심이 되는 산이기도 하고 그 산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마을 또한 전주의 주요한 마을 가운데 하나였다. 마을에 들어서기에 앞서 완산의 산세에 대해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완산은 일곱 봉우리가 있어 흔히 완산칠봉이라 불리는데, 이철수(1977)에 따르면 내칠봉과 외칠봉, 좌우칠봉으로 나뉘며, 내칠봉은 수봉, 탄금봉, 매화봉, 옥녀봉, 무학봉, 백운봉, 용두봉으로 나뉘며, 외칠봉은 수봉, 검무봉, 선인봉, 목단봉, 금사봉, 도화봉, 매화봉으로 나뉜다고 한다. 각각의 봉우리가 옥녀가 거문고를 타고, 학이 나르며 하얀 구름에 걸린 용의 머리가 비치는 듯하다거나 복사꽃 봉오리, 매화꽃, 모란꽃 봉오리 등으로 비유하여 신선세계나 무릉도원을 염두에 둔 명명 방식이 사용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옥녀봉 꼭대기의 금송아지 바위에 얽힌 설화 등은 이곳에 넘나들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선인들의 온갖 상상력의 보고이었다. 완산에 대한 소박하지만 주목할 만한 설은 완산이 기러기 형국이어서 마치 기러기가 날개짓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어떻든 항공사진으로 보면 완산칠봉은 아니나 다를까 두 날개를 활짝 펴고 두 다리를 늘어뜨린 새의 날개짓과 흡사하니 항공사진을 보지 않았을 당시에 그런 혜안을 가졌던 선조들의 통찰력이 결코 황당한 것은 아니었다.
완산의 동남방으로 뻗은 끝 봉우리가 곤지산이다. 이는 주산 건지산과 마주하고 있는 산인데 예전에 이 산의 자락에서 이어진 바위들이 전주천변까지 뻗어 있었고 그 자리가 죄인을 효수하던 곳이어서 초록바위로 불리던 곳이다. 이런 까닭에 비라도 오는 날 저녁에 이곳을 지나려면 모골이 송연하였다고 한다. 완산동은 조선시대 은송리와 곤지리로 나뉘는데, 곤지리는 곤지산 밑 동네를, 은송리(隱松里)는 완산초등학교와 전주천변 사이의 마을을 가리킨다. 곤지리에는 지금 맷골이라는 전래 지명이 남아 있는데 이로 말미암아 매곡교(梅谷橋)라는 다리가 생겨났지만, 기실 맷골은 묏골 즉 산골짜기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는 뜻이다. 은송리는 지금의 동완산동 지역으로 골목골목이 미로처럼 좁게 형성되어 그 골목을 걷다보면 예전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은송리에는 기령당(예전의 군자정)과 조선시대 말기에 지어진 청학루, 백학루 등의 옛 지명이 남아 있어 나이드신 토박이들 사이에는 청학루 골목, 백학루 골목이라는 옛 지명이 종종 회자되기도 한다. 완산의 능선 하나가 용머리고개로 이어져 다가산, 유연대, 엉골산, 청수코테기로 흐르는데, 이 또한 항공사진으로 보면 영락없는 용의 모습이다. 용머리고개는 김제, 금구로 나가는 고개이며, 강감찬 장군과 관련된 설화7)가 남아있다. 용머리고개에서 다가산 줄기로 감싸여 전주천변 쪽 사이에 있는 동네는 예전에 빙고리(氷庫里) 즉 얼음 창고가 있던 동네이다. 빙고리 옆산은 다가산(多佳山)인데 다가산 너머에 천양정의 전신인 다가정이 있었다. 다가정에서 화산공동묘지를 넘어가는 고개를 강당재라고 한다. 강당(講堂)은 대체로 유생들이 공부를 하기 위해 지어진 집을 의미하므로 이전 시기에 이곳에 강당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확인되지는 못하였다. 어떤 이는 이곳이 강도가 많아서 생긴 이름이라고 하나 이 또한 발음의 유사성에서 비롯된 상상에 불과하다. 다가산과 유연대 사이를 선너머라 부르는 까닭은 화산서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유연대에는 조선시대 주요 건축물인 희현당이 있었으며 구한말 서양의 선교사들이 이곳에서 서양식 교육과 종교를 유포한 중심지가 되어 서양문화가 전주에 발흥하는 발원지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유연대에서 어은골산으로 이어지는 산자락은 가운데 산등성이 하나를 두고 두 갈래로 에워싸는 산세를 형성한다. 그 산 아래 전주천변 쪽으로 자리잡은 동네가 도토릿골과 어은골이다. 도토릿골은 산의 지형이 마치 배의 돛대와 닮았다고 하여 ‘돛대골’로도 불렸다. 어은골은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들이 은둔했던 은사골로 알려진 곳이며, 숨은 잉어의 혈이 있어서 어은골(魚隱골)로 불린다고 하나, 이미 촌로들 사이에서는 전주천에 있는 고기가 숨었다가는 곳이라 하여 그렇게 불리는 것으로 통한다. 어은골산은 엉골산, 서살미, 엉골뒷산, 서산 등으로 불리며, 이산 끝자락에 진북사가 있다. 진북사는 범바우 앞에 지어진 절이라 하여 범바우절이라고도 불린다. 범바우는 부엉바우라고도 불렸는데 일제시대 발파되어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범바우는 특히 검암 칼바우와 서로 마주하며 세력의 균형을 맞추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허두 부분 참조). 진북사(鎭北寺)는 전주의 풍수상 북서부 지역이 허하여 지세의 기운이 빠져 나가는 것을 막으려는 비보풍수의 의미에서 건립된 절이다.
‘엉골뒷산’을 지난 산줄기는 ‘바구멀’, ‘잿뜸’을 지나면서 낮은 봉우리를 이루고 다시 세 가닥으로 나뉘며 고삿들을 향해 뻗어 내린다. 서남쪽으로 뻗은 자락은 메너머, 다른 하나는 전룡, 또 다른 한 줄기는 감나뭇골을 형성한다. 감나뭇골에서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들 가운데 새터와 구석뜸 그리고 바구멀이 있다. 이곳에 여러 마을들이 몰려 있는 까닭은 그 앞으로 펼쳐진 고사평이 있어 농사지을 땅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구멀은 파구리(波龜里)라고도 하였는데 거북바우가 있어서 생긴 이름이라 한다. 바구멀과 잿뜸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가면 삼거리가 있는데 그 근처를 장고개라 불렀다. 이곳은 메너머, 전룡, 감나뭇골에서 전주부성으로 들어오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장이 서기도 하고 주막이 있기도 했던 연유로 형성된 지명이다. 바구멀을 지나 청수코테기가 용머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용의 꼬리 끝자락이 되는 셈이다. 청수코테기 앞쪽에서 전주천과 모래내가 합수하여 가르내를 형성하게 된다.
5. 나오며 변화는 모든 것의 본질이며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렇다고 해도 가끔은 변화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도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근원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들이다. 즉 가족, 친구, 고향 등 변화하기 이전의 익숙함 그대로가 그리운 것, 우리는 전통문화 또한 그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옳다거나 그르다거나와 같은 선악, 진리와 거짓 등의 양분적 구도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함, 편안함 나아가 내가 그의 일부가 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는 것으로서 비로소 그 존재 가치가 명확해지는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자신의 존재와 그 특성에 대해 나름의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때 그 생명력 또한 지속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전주의 지명과 그에 배어 있는 정신 또한 수백 년을 넘도록 전주 사람들이 삶의 공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토대로 신중하고 사려 깊게 만들어 온 그 나름의 문화유산 가운데 하나이다. 설령 지금 우리가 그것을 복원한다 해도 그 명명이 생명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지명의 토대에 대한 근거가 남아 있거나 그에 대한 애정이 바탕에 깔려 있지 않는다면, 이는 역시 지명의 박제에 불과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의 여행은 박제화 된 지명에 생명을 불어넣고자 하는 행위일 수도 있다. 백 년 전의 전주는 남쪽에서부터 솟아오른 봉우리들이 각각 동북, 서북 방향으로 뻗어나가며 둘러놓은 산자락들이 병풍처럼 전주부성을 감싸 안고, 전주부성을 중심으로 초가집들이 촘촘히 들어 있었으며, 성밖으로는 고샅고샅에 크고 작은 마을들이 자연에 순응하며 들어앉은 모습이었다. 이는 후백제 시대 이후 부침을 거듭하여 오다가 조선시대에 들어 건국조의 본향으로서 권위와 품위를 갖춘 조선조 3대 도시 가운데 하나로서 호남을 관장하는 중심도시로 성장하게 된 결과이다. 전주부성을 감싸는 산줄기들은, 마치 상서로운 짐승, 기린이 살고 있고, 쌍학과 기러기가 날며, 용이 제 몸을 길게 늘어뜨려 전주를 옹위하는 것이라고 상상한 데서 각각의 이름이 붙여지게 된다.
전주부성을 둘러 흐르는 전주천을 중심으로, 동편으로는 낙수정에서 흘러내린 물길과 기린봉 북록에서 시작된 모래내가 인근 마을들의 물줄기 되었고, 남쪽으로는 남고산성의 물길을 모아 흐르는 산성천, 남고산, 보광재에서 흘러내린 물이 공수내를 이루어 전주천의 물길을 더하였다. 전주천은 삼천천과 만나 가르내(추천)가 되고 가르내는 고산천과 만나 한내에 이른다. 예전에는 만경강 줄기를 거슬러 전주천까지 배가 드나들었다고 하니 이쯤 되면 쫄쫄 거리며 흐르는 지금의 전주천으로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로만 남게 되는 셈이다. 이러한 자연적, 사회적 조건을 배경으로, 전주는 판소리, 고대소설을 비롯한 품위 있는 문화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호남 제일의 도시로서의 규모와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전라감영과 전주부영, 객사와 경기전은 전주가 단순히 이 근방의 행정 도시일 뿐만 아니라 호남 일대를 관장하는 도시이며, 드넓은 평야 지대의 윤택한 생활 환경을 확보한 인근 지역들의 주민들이 이곳을 드나들며 사회 문화적 교류의 장을 형성하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해 왔음을 보여준다. 전통적인 전주의 모습은 왜정시대 왜인들이 주도한 식민도시로의 개발과 더불어 그 운명을 다하게 된다. 그것이 개발인지 파괴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지만, 어떻든 수백년 동안 누적되어 왔던 전주의 옛 모습이 자취를 잃게 된 것이 그 시기에서 비롯된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특히 조선이 국가를 유지하며 존재하는 한 건국조의 본향이었던 전주가 이런 방식으로 개발되어 왔을지는 생각해 볼 여지가 많다. 근대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개발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하지만, 이미 개발된 지역을 다시 복원하는 일은 개발 그 자체보다 곱절로 힘이 드는 일이다. 그런 맥락에서 개발에 앞서 우리가 생각해야만 하는 점은, 일단 한번 개발이 진행되면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되어 온 유산들이 다시는 되돌아오지 못할 레테의 강으로 사라진다는 점이다. 그 강을 건너가 버린 조선시대의 전주, 우리는 그 전주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을 박제화된 지명을 통해 들여다보며, 이제 우리에게 쥐어진 개발의 고삐를 제대로 당길 방법을 가늠해야 할 때이다.
<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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