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조선의 부흥운동
근대선교의 기적을 이룬 나라, 조선에서의 복음전파는 1888년, 고종황제의 금교령에도 불구하고 신자는 오히려 5배 증가하였습니다. 1880년 이후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들의 본격적인 전국 순회전도는 단지 예수교를 홍보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 지역에서 복음의 씨앗이 생명으로 자라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1888년, 북장로교선교부는 존 로스에 의해 전도된 “서상륜(경기지방), 정공빈(해서지방), 최명오(해서지방), 백홍준(관서지방)을 한국 최초의 지역관할 전도사로 임명하였습니다. 1892년, 북장로교선교부는 평안북도에 김관근 의주 전도사, 평안남도에 한석진 평양 전도사를 파송하는 등 지역을 점진적으로 세분화 하였습니다. 1888년, 감리교는 강재성, 조한규를 전도사로 임명하여 조한규는 배재학당, 강재성은 1892년, 인천교회 설립을 주도하도록 하였습니다. 한국의 복음화 정책은 1차적으로 선교사가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2차적으로 한국인 전도자가 직접 전도사로 파송되어 새생명을 일으키는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 전도정책을 실현하였습니다.
(1) 북부지역 전도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는 조선 북부지역 전도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순회전도의 씨앗을 뿌리고 한국인 전도자를 파송하여 생명이 자라도록 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청일전쟁(1894년)과 러일전쟁(1904년)의 공포는 북부지역 주민들의 심리적 불안감을 자극하였고 기독교적 신앙관을 갖게하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평양, 의주, 선천, 재령을 기점으로 한 북장로교 선교사와 원산부흥운동의 주력인 하디와 저다인, 개성에서는 남감리교 크램, 스톡스, 갬블, 리드선교사가 부흥운동의 열정을 헌신하였습니다. 한국침례교의 아버지 말콤 펜윅은 원산에서 부흥의 불을 일으켰습니다.
➀ 의주지역전도
언더우드 선교사는 의주와 평양과 소래를 북부지역 3대 거점으로 여겼습니다. 의주는 조선과 중국의 관문으로 타도시에 비하여 다소 개방적인 도시였습니다. 의주 출신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는 1876년, 만주 우장 고려문에서 맥킨타이어를 만나 세례를 받았습니다. 백홍준은 1883년, 의주로 귀국하여 권서인겸 전도인으로 활동하면서 의주 복음화의 기틀을 세웠습니다. 1888년 11월, 아펜젤러는 북부지역 순회전도 가운데 백홍준에게 전도를 받은 박상모, 송상하에게 세례를 주는 등 의주에서 1명의 세례교인과 14명의 학습교인을 구성원으로 하는 감리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1888년 11월25일, 감리교는 두 사람을 지방전도사로 임명하고 의주지역 전도를 본격화 하였습니다.
1889년 3월, 언더우드 선교사 부부는 결혼기념 전도여행으로 송도, 소래, 평양, 강계, 의주를 순회하며 600명의 환자들을 치료하였습니다. 4월27일, 100명의 세례지원자를 만났으나 조선안에서 세례가 불가능하여 김이련, 김관근 등 33명과 함께 압록강을 도하하여 만주에서 세례식과 함께 성찬식을 하였습니다. 1891년 5월, 마펫과 게일선교사와 전도인 정공빈, 최명오와 함께 송천, 평양, 의주를 순회하였습니다. 의주에서 백홍준은 의주교회를 설립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마펫은 봉천에서 존 로스와 만나 의주지역 선교사역을 인수받으며 1,400마일의 전도여행을 하는 가운데 지난 2년간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둔 의주지역에 대하여 감격하였습니다. 1892년 마펫은 한석진, 김정현, 김석례 등 3인에게 세례를 베풀고 한석진을 평양지역 전도인으로 채용하였습니다. 1896년, 마펫이후 휘트모어 선교사가 의주지역 책임자가 되었으며 북장로교 선교회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➁ 복음의 성지, 평양
평양은 역사적, 지리적, 정치적, 상업적으로 가장 중요한 중심지였습니다. 1866년 토마스 선교사가 평양 쑥섬에서 순교한 이후 21년만인 1887년 4월24일, 북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헌트와 함께 평양을 방문하였습니다. 그해 겨울에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방문하는 등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다섯 차례에 걸쳐 평양을 방문하며 높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1888년, 아펜젤러가 파송한 전도사가 정기적인 모임과 함께 복음을 전하고 성경도 보급하고 있었습니다. 1891년, 마펫은 휴 브라운 의료선교사와 함께 평양을 방문하여 11명에게 학습문답을 하였습니다. 1892년, 마펫은 빈톤 선교사와 함께 세차례 평양을 방문하고 의주의 “한석진”을 평양 전도인으로 파송하여 마포삼열(마펫)의 평양선교를 협력하였습니다. 제주도 선교사로 알려진 “이기풍”이 불신자 시절 군중들 가운데서 마펫 선교사에게 돌을 던진적이 있었는데 그때가 1893년 1월이었습니다.
1893년 10월, 평양 대동강변에 정착한 마펫은 22명을 대상으로 학습반을 조직하여 성경과 기독교 교리를 교육하였습니다. 1894년 1월8일 7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성찬식을 거행하였습니다. 평양에서 가장 먼저 복음을 받아들인 길선주의 친구 “김종섭”도 마펫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조선에서의 특이점은 순회선교사들이 한국인들과 복음의 접촉점이 되는 곳으로 “사랑방”이 중심이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방을 중심으로 언더우드 선교사는 언더우드학당을 설립하였고, 스크랜톤은 병원을 설립하였습니다. 마펫은 이 사랑방에서 평양 최초의 “널다리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1892년 8월, 북감리교 선교사연회는 “제임스 홀” 박사 부부를 평양선교사로 파송하였습니다. 제임스 홀은 한국에 온 선교사 가운데 가장 성자다운 사람이라고 극찬을 받을 만큼 훌륭한 선교를 하였습니다. 9월30일부터 5주간 평양주민을 대상으로 치료를 한 후, 1893년 2월, 기생학교 교사인 권번을 인수하여 의료선교를 본격화 하였습니다. 제임스 홀의 희생적인 사랑과 치료와 선교는 초기 기독교에 적대적인 행정관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돌팔매를 던지던 민중들의 심장에 감동을 주었습니다. 급기야 서양인 선교사를 추방하라는 조정의 청원을 거절하고 평양감사는 서양인 선교사를 박해하는 자를 처벌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하루 평균 50~60명의 환자를 정성스럽게 치료하는 제임스 부부를 평양사람들은 성자라고 불렀습니다. 제임스 홀은 환자 뿐만 아니라 평양의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데도 정성을 다 하였습니다. 드디어 고종황제도 제임스 홀에게 조선 모든 지역에 관한 여행 허가증을 받을 정도로 그의 명성은 날로날로 퍼져 갔으며, 그가 믿는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들도 증가하였습니다. 1893년 3월, 서문통에서 예배를 드리고 교육과 의료선교를 병행하였습니다. 소학교를 개설해 교사 1명을 채용하고 13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교리문답 교육을 하였습니다. 제임스 홀에게는 “김창식” 전도사와 영어교사 노병선, 제임스 홀의 어학선생 황정모, 오석형, 이향선, 김낙선, 박관수, 조한수, 김재선, 주경조, 전용기, 조용순, 전삼덕, 리은성 등 훌륭한 조력자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며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1894년 5월8일, 기독교를 반대하는 박해가 발생하였습니다. 서양인이 조선한옥을 구입할 수 없어서 한석진 명의로 구입한 대동문안 한옥이 문제의 발단이었습니다. 명성황후의 인척인 평안 관찰사 “민병석”은 마펫의 조사 한석진과 제임스 홀의 조사 김창식, 그리고 이들에게 집을 매매한 집주인 홍재응을 긴급 체포하고 고문을 자행하였습니다. 현장에서 함께 체포된 최치량, 신상호, 우지룡, 송인서는 포졸들이 요구하는 300냥의 돈을 지불하고 석방되었지만 나머지는 10만량이라는 무리한 댓가를 요구하였기 때문에 거절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연락을 받고 감옥으로 면회를 갔던 오석형과 이향선과 제임스 홀에게 집을 판 김씨까지 체포하는 등 문제는 더욱 더 복잡하게 얽혀 있었습니다. 다급한 제임스 홀이 스크랜톤과 마펫과 매켄지와 연결되어 주미, 주영공사관으로부터 석방소식을 접했으나 결과는 정반대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조선왕이 닥터 홀은 나쁜 사람이니 모든 기독교 신자들에게 오늘 참형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졌고 때마침 김창식도 사형수 감옥으로 이감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기적은 의외의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조선 외무부가 모든 조선 고용인들과 기독교인들을 즉시 석방하라는 문서를 평양 관찰사에게 긴급 전송한 것이었습니다. 명령 불복시 그에 따른 책임추궁을 할 것이며, 영미 군함이 평양으로 진격해 전쟁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석방을 주저하던 평양 관찰사 민병석은 이들을 전원 석방하고 박해는 모두 중단 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서울을 중심으로 선교사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주미 공사등 각국 공사 채널을 동원하는 등 이들을 구명하기 위해 일치단결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창식은 감리교 사상 최초로 목사안수를 받게 되었으며 가장 존경받는 한국의 교회지도자로 성장하였습니다. 선교사들과 한국인 조사와 전도사들은 이 사건의 진행과정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독교 헌신자들을 구하셨을 뿐만 아니라 조선 조정으로 하여금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불법적으로 체포를 일삼았던 평양 관찰사 민병석과 평양감사 신덕균은 좌천되었고, 행정관 김영호와 김낙구도 평양에서 추방당하도록 하셨습니다.
1894년 7월23일, 청일전쟁이 발생하여 평양은 최전선이 되었습니다. 전쟁은 일본군의 승리로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전쟁의 참상가운데 수많은 환자들과 부상자들은 제임스 홀의 병원으로 집중되었습니다. 제임스 홀은 환자 치료는 물론 남학교의 재건사업과 저녁마다 예배인도로 이미 과로한 상태였습니다. 결국 제임스 홀은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었고 항급히 서울로 이송하였으나 11월24일, 운명하고 말았습니다. 위대한 성자의 죽음은 평양을 눈물로 적셔 놓았습니다. 기독교인 뿐만 아니라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물결이 평양을 뒤덮었습니다.
1895년, 제임스 홀의 빈자리는 김창식 전도사에 의해 1년간 관리되었고 그는 탁월한 복음적 성과를 이루며 평양성을 지켰습니다. 1896년 8월, “노블”과 의료선교사 포웰이 평양에 파송되어 1897년 11월, 노블 부인은 “여자 사경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여자 사경회를 통하여 김세디, 김더커스, 노살롬, 김다비다, 이세벨, 리수산나 등 수많은 전도부인들을 양성하여 황해도와 평안도 전역에서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보급하며 복음전파의 기수가 되게 하였습니다. 이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 1897년, 평양감리교회는 51명에서 263명으로 교인이 증가하였고, 1898년에는 525명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김세디는 수천명을 전도하여 800명이 결신하였고, 김더커스는 자신이 전도한 사람들을 목사와 속장과 권사와 전도사로 양육하는 훌륭한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평양성의 위대한 전도자 김창식은 48개의 교회를 설립하였고, 황정모 또한 3개의 교회를 설립하는 등 평양에서의 복음전파와 부흥의 불길은 거세게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➂ 황해도 송천 솔내의 복음운동
1889년, 게일, 1891년, 말콤펜윅에 이어 1894년 2월, 매켄지 선교사는 어학선생 “서경조”에게 한글을 배우는 과정에서 한국인으로 변화해 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속에 사로잡힌 매켄지는 매일아침마다 1시간 반동안 소리내어 성경을 읽었으며 그가 읽는 성경을 통하여 소래지역은 복음화의 길을 열어갔습니다. 1894년에 일어난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으로 소래는 전쟁의 몸살을 앓고 있었습니다. 동학으로 인하여 기독교에 관한 괴소문이 퍼져갔고 11월25일, 서울로 피신하라는 첩보가 들려왔지만 매켄지는 거절하였습니다. 12월부터 동학도들은 살인과 보복을 일삼으며 소래지역을 무법천지화 하였고, 매켄지를 위협하였습니다. 그러나 서경조와 함께 매켄지는 굴욕적인 타협보다 순교의 길을 선택하겠다는 각오로 소래땅에 거주하는 기독교인들과 끝까지 함께 하려 하였습니다. 매켄지의 순교적 신앙은 결국 동학도들의 마음을 변화시켰습니다. 1894년 12월12일, 한국교회 사상 최초로 소래교회에 성조지기가 게양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895년 3월1일, 3명의 동학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매켄지로 부터 기독교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1895년, 소래교회는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의 틈바구니속에서도 매켄지의 헌신과 서경조의 리더십으로 굳건히 지키며 신앙인들의 생명의 가지를 이어갔습니다. 수요기도회에 50명이 모여 예배당으로 사용하는 서경조의 사랑채는 1월의 매서운 한파를 녹이고 있었습니다. 주일예배에는 부녀자들만 60여명이 모여 새로운 교회당을 신축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렇게 순수 한국인들의 자립에 의한 교회당 건립이 완성되어 갔습니다. 2월에는 주일학교가 개설되어 성경공부와 함께 지리와 언문을 교육하여 소래 어린이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교육다운 교육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1895년 5월17일, 매켄지 선교사는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고열과 두통으로 투병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6월24일 주일 아침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며 하나님 품으로 떠나갔습니다. 7월3일, 매켄지의 남은 유산인 소래교회의 헌당식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대신해야만 했습니다.
1895년 10월, 서경조가 피택장로로, 김윤오, 안제경이 집사로 피택되는 등 소래교회는 언더우드 선교사에 의해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하였습니다. 전국 42개의 신앙공동체를 리더하는 소래, 의주, 평양을 중심으로 한국선교의 방향은 부흥의 전기를 맞이 하였습니다. 1897년, 감리교회는 1,074명의 교인과 306명의 세례교인이 보고 되었고, 북장로교회는 530명의 교인과 10개의 조직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➃ 원산부흥
1898년, 15,000명이 거주하는 항구도시 원산은 강화도조약에 의해 1880년, 일본에 개항되었고, 1883년에는 국제적인 항구도시로 발전하였습니다. 1891년, 원산항은 가장 번영한 항구도시로 알려졌으며 지정학적 위치도 복음적 성장에 적합한 구도를 갖고 있다고 보고 되었습니다. 1892년, 북장로교 선교회는 게일을 파송하고, 1894년에 “스왈른”을 파송해 원산을 거점지역으로 함경도 복음화를 시작하였습니다. 스왈른 선교사는 함흥과 함경북도 수도인 경성을 반환점으로 복음전파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북감리교는 올링거와 의료선교사 “윌리엄 맥길”을 정착시켰습니다. 맥길은 원산지역 외국인을 중심으로 치료활동을 시작하다가 점차적으로 원산시민을 대상으로 치료범위를 확대하였고, 더 나아가 선교활동을 본격화 하였습니다. 1892년 11월, 독립선교사 하디는 말콤펜윅의 집에서 진료를 시작하며 복음전파에 나섰습니다. 1893년, 원산에서 학습교인 15명과 함께 219명의 결신자를 맺으며 원산부흥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1895년, 스크랜톤은 60명의 신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남자 8명, 여자 5명, 어린이 6명 등 19명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장로교에서는 1894년 8월5일, 4명의 여인이 세례를 받은 후 1896년, 34명이 세례를 받았고, 24명이 문답을 받았으며, 평균출석 교인이 90명에 달하였습니다. 말콤 펜윅은 원산 모범농장을 운영하며 안정적인 재정을 확보하였습니다. 1903년, 남감리교 페니 힌즈 선교사와 결혼한 후에는 더욱더 안정적인 사역을 하였으며 안대벽, 안덕기, 이정화, 황태봉, 황상필과 4명의 한국인 학생들과 함께 신앙공동체를 이루며 복음의 확장을 경주하였습니다. 말콤 펜윅은 초기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신명균으로부터 안정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점차적으로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게일은 원산의 기독교회가 복음과 일치된 삷을 강조하며 실천적 신앙인이 되기를 기대하였습니다. 조상숭배는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라는 것에 절대적으로 동의한 조선인 기독교인의 결의로 조선에서의 조상숭배금지가 한국교회의 중요한 선교정책으로 채택되었습니다. 1898년 이후, 원산지역 복음화는 캐나다 장로교와 남감리교에게 이양하고 진행중인 모든 선교 정책과 교회와 시약소를 인계하였습니다. 이로서 1903년 원산부흥운동이 시작되면서 원산은 남감리교 선교사들의 헌신이 집중되었습니다.
➄ 함경도 복음화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는 함경도 선교를 본격화 하면서 1898년 9월7일, “윌리엄 푸트”, “로버트 그리어슨”, “던칸 맥래” 선교사가 함경도를 거점지역으로 하였습니다. 11월12일 푸트가 원산에 1착하고, 그리어슨과 맥래는 5주간의 순회전도여행과 한국어 교육을 받은 후 1899년 2월11일, 원산에 도착하였습니다. 함경도지역의 원활한 복음전파를 위해 푸트는 원산을 기점으로 남부지역을 담당하였고, 그리어슨과 맥래는 원산을 기점으로 함흥 등 북부지역을 담당하였습니다. 함흥에는 스왈른이 전도한 “차을영”이라는 매우 열정적인 전도자가 있었습니다. 말씀과 기도에 매진하는 차을영은 세례전에 이미 산악지대와 자신의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많은 사람들을 전도하였습니다.
1900년, 푸트는 남부지역을 연 1회 이상 순회하며 지역마다 수차례에 걸쳐 지역 사경회를 개최하였습니다. 맥래와 그리어슨은 함흥에 있는 작은 교회들을 방문하여 기도회를 인도하고 사경회를 개최하였습니다. 한국교회의 새로운 리더 서상륜이 그리어슨과 동행하며 선교여행의 길잡이가 되었습니다. 그리어슨은 문천지역에서 탁월한 능력과 가장 사랑받는 목회자인 “전계은”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어슨은 순회전도여행 기간동안 미국에서 보내준 자전거를 이용하였는데 자전거를 처음본 한국인들이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며 그리어슨의 뒤를 쫓아 다니는 진풍경이 벌어졌습니다.
1900년 8월, 일본에서 에딧 서더랜드와 결혼한 맥래 선교사는 9월16일, 캐나다 여선교사 “루이스 맥컬리”(Louis H.McCully)와 함께 원산에 도착하였습니다. 맥컬리 선교사는 전통적 복음주의자로 원산지역에서 영적각성운동을 촉발시킨 촉매제 역할을 하였습니다. 맥컬리는 한국에 파견된 가장 탁월한 여선교사들 가운데 한사람으로서 열정과 헌신과 역동적인 복음운동가였습니다.
1900년 11월, 맥래와 그리어슨은 소련과 국경을 이루며 새롭게 개방된 성진항으로 전도여행을 시작하였습니다. 원산이 남방향의 기준점이라면 성진은 북방향의 기준점으로 성진에 선교부 개설의 필요성을 절감하였고, 캐나다 선교부는 이를 즉각적으로 수용하였습니다. 이로서 푸트는 원산, 맥래는 함흥, 그리어슨은 성진을 거점지역으로 복음전파를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1901년, 럽(A.F,Robb) 부부, 케이트 맥밀란, 1903년, 제니 럽, 1905년, 캐더린 마이어, 1906년, 영(L.L.Young), 1907년, 로스 선교사가 차례로 입국하여 함경도지역 복음화에 헌신적인 투자를 하였습니다.
복음전파는 순회전도, 성경공부, 사경회순으로 이어지는 3각구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캐나다선교회는 장로교선교회와 동일하게 사경회원리에 의한 성경공부와 지도자훈련을 가장 중요한 사역으로 강조하였습니다. 어느 지역에서나 조선인 신앙인에 의한 조선인의 전도가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원산지역의 한 노인은 자신의 주거지에서 80마일 떨어진 곳에 사는 새신자를 위해 겨울철을 그곳에서 보내는 헌신을 하였습니다. 원산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한사람은 안변으로 이사를 하여 그곳에서 새로운 교회를 개척 설립하였습니다. 1년전 설립된 성진교회도 원산지역 신앙인이 성진으로 이사를 하여 세운 교회였습니다.(푸트의 보고서)
1899년, 3명의 남선교사, 2명의 여선교사와 초등학생 15명, 14개의 신앙조직, 63명의 입교인 등 총 308명이 시작하여 1909년, 6명의 남선교사, 4명의 선교사 부인, 4명의 여선교사, 87명의 한국인 사역자, 9명의 신학생과 고등학생 110명, 초등학생 712명, 134개의 교회와 1,141명의 입교인, 1,108명의 학습교인 등 5,594명으로 성장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