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아버지 덕이고 한울님 감응이야요
백덕실 당호(誠信堂, 성신당) 강서교구
평북 영변 출생
1926년 10월 2일 생
여성회본부 부회장, 감사, 고문
설거지 하고 있던 참인데, 누가 관사로 들어왔어요.
웬 할머니야요. 시아버지를 알려 달래요.
나는 처음 보는 할머니라
“누구신가요?” 하니 아무 말 말래요.
그게 뭔가 하면 삼일재현운동 비밀문서를 가져오신 거라요.
그분이 김지수 부인이신 박현화 씨야요.
원래 출생지는 평북 영변인데, 어릴 적 일찍 떠났어요. 어머니가 난산으로 고생을 해서 아버지가 그런 곳에 살면 안 된다 하시며 평북 개천으로 이사를 했어요. 결혼은 같은 교인 집과 했지요. 시집, 친정이 모두 천도교 집안이라 그저 신앙은 따라했습니다.
결혼은 21살에 하고 22살에 애를 낳았어요. 남편이 왜정 때 평양 전문학교에 들어갔는데 해방되고 나서 김일성 의과대학에 편입했어요. 남편이 2학년 때 결혼을 했는데 집안 성분이 나빠서 그 정치(공산당) 아래 어렵게 공부하고 어렵게 졸업을 했죠.
그때는 의사라야 일반 군인이 됐어요. 보통 사람들은 군대 가서 총알받이 노릇 했거든요. 함경남도 청진 결핵요양소로 보냈어요. 남쪽으로는 못 가게하고 함경도 쪽으로 보내더라고요. 거기에 있다 새로 병원이 생긴다고 해서 또 다른 곳으로 갔어요. 그리고 조금 있다 또 다시 청진으로 가래요. 북쪽으로 북쪽으로 자꾸 보내대요. 말도 행동도 감시받는 상태니까 견디기 힘들었어요.
사상적으로 우리는 성분이 나빴어요. 우리 시할아버지 시아버님 모두 천도교 도당일을 하시니 청우당을 무조건 밉게 본 거죠. 우리 친정아버지께서도 그때 평안남도 도당 재정국장까지 하셨어요. 그리고 우리 시아버님께서 도당 위원장을 지내니 다들 청우당 간부집이니까 항상 우리 집은 정치보위부에서 감시를 했어요.
우리는 도당 관사에 살았는데 그때가 1948년 1월쯤 됐을까요? 추울 때였어요. 갓난애가 처음 생겨서 한 5, 6개월 됐는데 기는 연습을 하는 거야요. 다들 좋아서 보고 있고 나는 저녁 먹은 설거지 하고 있던 참인데, 누가 관사로 들어왔어요. 웬 할머니야요. 시아버지를 알려 달래요. 나는 처음 보는 할머니라 “누구신가요?” 하니 아무 말 말래요. 그게 뭔가 하면 삼일재현운동 비밀문서를 가져오신 거라요. 그분이 김지수 부인이신 박현화 씨야요. 저녁 때 그분이 집에 들어오니 식구들이 다 긴장하는 기라요. 난 멋도 모르고 저녁밥을 차리려고 하니 금방 가야 한대요.
시아버지( #김일대 )는 키도 크고 눈이 부리부리하셨는데, 그 당시 청우당 도당 위원장을 하셨죠. 할머니가 저녁도 안 드시고 떠난대요. 그래서 어쩌다 이런 추운 날에 저녁도 안 드시고 가시는가? 했는데, 집 분위기를 보니 가족들 얼굴 표정이 굳었어요. ‘아, 뭔가 있구나’ 생각했죠. 시어머님이 “너는 내일 애 데리고 친정집에 가라” 하시는 거라요.
나는 시집살이 안 했어요. 며느리가 고생할까봐 불과 일주일을 시댁에 안 두어요. 친정은 경제적으로 풍부하고 살 만했지만 시댁은 돈벌이 안 하고 교회사업만 하신 분이라 풍부하지 못했어요.
친정에 와 있는 동안에 시댁에서 분란이 났어요. 내가 평양 시댁에 급히 가 보니, 시아버님(김일대)은 어느 날 교당에 갔다 오시다가 실종되셨대요. 비서를 데리고 역으로 가셨는데 비서가 전차표를 타러 갔다 오니까 위원장님이 온 데 간 데 없더래요. ‘혼자 집에 가셨나보다’ 생각하고 우리 집에 전화를 했는데 집에 안 오셨어요. 그렇게 해서 그때부터 시아버지가 행방불명 된 거야요.
그리고 우리 집에 와서 사람 내놓으라고 못살게 하는 거야요. 우리 시어머니도 힘들게 했지만, 평양중학교에 다니는 셋째 시동생한테 아버지 찾아내라고 협박하고 못 살게 했어요. 똑똑해서 그런지 막내를 유독 고생시키니 시어머니는 “아이구, 안 되겠다. 막내 데리고 먼저 서울 가야 되겠다”며 떠났어요. 막내 시누이도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걔는 여자니까 막내 시동생부터 서울 데리고 가야겠다 하고 길을 나선 거야요. 그런데 얼마 못 가 그만 붙잡혔어요. 매도 맞고 몇 번 감옥에도 가고 세 번인가 네 번 월남을 시도했다 매번 잡혔어요. 노인네하고 애라 다행히 풀어 주어 집으로 왔는데 집 감시가 아주 심한 거라요.
또 서울로 떠났어요. 시동생이 생각다 못해 바보 노릇을 했대요. 엿을 먹으면서 침을 질질 흘리면서 갔어요. 우리 시어머니가 저 바보 데리고 서울 가는데 여기 있으면 짐이 될 것 같다. 서울 가서 고쳐 볼까 하고 서울 간다 하니, 쳐다보다 머저리 같으니까 가라고 하더래요. 삼팔선을 넘어왔어요. 시어머니는 남한에 사시는 시할아버지( #김광호 )를 만났어요. 경제적으로 힘들어서 그때 교회에서 보탬을 주었다는 말도 있어요.
나도 #삼일재현운동 으로 끌려갔어요. 시아버지를 찾아내라고 해요. 나 보고 찾으라니 말이 돼요? 나는 거짓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어디 있는지 알면 춤을 추갔다. 당신들이 더 잘 찾지 않느냐 하니 어디 두고 보자고 그래요. 그래서 두고 보자고 했죠. 감옥에 집어넣더라고요. 그래서 할 수 없이 거기 있었는데 저녁 때 다시 데려다 주대요. 시아버님은 그 길로 행방을 몰라요. 어떤 분이 말하기를 독방에 계시다가 시베리아로 끌려갔다는 말이 있어요. 시어머님이 눈물 많이 흘리셨죠. 북한에 시누이까지 두고 오셨으니. 시아버지 제사는 기일을 몰라 어머님 제사 때 밥 한 그릇 더 올려놓아요. 그때 시아버님 연세가 4, 50살 정도 됐던 것 같아요.
월남하기 전에 함경도 청진에 근무하다 다른 곳에 갔다 다시 청진에 왔는데 또 다시 어디로 가라고 해요. 공포가 심해 안 가려고 산속에 숨었어요. 그때가 국군이 한참 올라올 땐데 남편이 산속에만 숨어 있으니 안 되겠다며 병원 식구 한 사람 데리고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대요. 못 돌아올지 모른다고 해요. 그래서 내가 그 사람 가운 주머니에 생쌀을 넣어 주었어요. 혹시 어떤 기회를 타서 다시 올지 모른다 기약 없이 갔어요. 나는 밤만 되면 밖만 바라보고 있었어요.
하루는 사방에서 콩 볶듯 총알 소리가 나는데 보니 개가 짖어요. 허연 가운을 입은 사람이 두 사람 들어오더라고요. 우리는 그때 이남 갈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청진 도립 병원장 할 사람이 없었나 봐요. 의사가 없어서 어떻게 소문 듣고 남편을 찾은 거예요. 마이크 대고 부르고 동네가 야단이에요. 뭐 찾을 수가 있나요. 그때가 가을인데 몇 달을 그렇게 지냈죠. 중공군이 나온다 안 나온다 하는 중이었어요. 하루는 병원 식구들 다 데리고 남한으로 피난가야 한대요. 빵구 난 목선을 수리해서 간대요. 우리 병원식구 5, 6명 데리고 가는데 그때 부둣가에 사람들이 저마다 배를 타려고 야단이에요. 배표를 나눠줬는데, 그때 얼굴이 흑색이 된 사람이 자기는 함경도에서 걸어왔는데 잡히면 당장 사형이래요. 자기도 가야 된다면서 사정을 해요. 애기 표를 자기 달래요. 애기 데리고 자기가 타려고 드는데 애도 표가 있어야 타는 거라요. 공짜가 없어요. 결국 그 사람이 내렸죠. 그 얼굴이 까맣게 돼서 서 있던 그 얼굴이 지금도 생생해요.
그 배 선주가 밤에 떠났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아직 청진이라요. 선장이 당원인 걸 모르고 그 사람 믿은 거예요. 선주에게 ‘너 죽을래 살래’ 하면서 너 바다에 처넣고 우리끼리 간다고 공갈을 하니 다시 떠났어요. 열흘 밤 걸려서 주문진에 도착 했어요. 주문진에서 처음 피난생활을 했죠. 병원 식구 여섯 사람 데리고 왔는데 구호미도 주고해서 그렇게 고생은 안 했어요. 병원 식구라 하니 다들 잘 봐줘요. 그런데 병원 식구들이 원장 하나만 믿고 가면 안 되겠다 싶은지 몇이 떨어져 도망을 갔어요. 나로서는 오히려 잘 됐다 싶었어요. 여섯 사람 먹여 살려야 되니 굉장한 짐이었거든요. 대신 그 사람이 내 피난 보따리를 지켰는데 그걸 밑천으로 가져갔어요. 빈손으로 못 보내는데 잘 됐다 싶었지요. ‘우리 어디 가서 밥은 먹을 수 있겠지’ 하며 애를 업고 오다 보니까 인동이라요.
피난 댕기다 보면, 밤마다 ‘아이구, 오늘은 어디서 또 하룻밤을 지내야 하나’ 고민하는데 애를 데리고 있으니 많은 덕을 봤지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면 서글픈 생각이 들어요. 그 슬픈 생각을 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요. 어느 양반이 오더니, “피난민 같은데 어디서 주무세요” 하면서 따라오래요. 인동 장씨 종가로 갔어요. 아직도 그 집이 훤하게 생각나요. 사랑방에서 잤어요. 우리가 범상해 보이지 않았는지 된장, 고추장 다른 데서 얻지 말고 자기네 거 먹으라고 그래요. 얼마나 고마워요.
이북에서 뭐 하다가 왔냐고 해서 도립 병원장 했다 하니, 그러면 개업을 하래요. 그래서 개업했는데, 그 동네 의사가 고발을 했어요. 피난민이 면허 없이 개업했다고 이북 면허 가지고 할 수 없더라고요. 할 수 없이 그만 두었어요.
지내다 보니 연고지가 있어야 하겠더라고요. 뭔가 연고지를 찾아야지 이거 만일 우리 집 양반 군대에 잡혀가면 내가 도리가 없으니까 충북 공주에 사시는 이모님 댁을 찾아갔지요. 원래는 사공면인데 곡계면이라 잘못 알아서 찾아보니 공주에 곡계면이 없는 거라요. 청주에서 밤을 지내게 됐는데 머물던 집 주인 애가 홍역을 하는 거예요. 집주인이 “이북에서 뭐하다가 나왔어요?” 묻기에 병원장 했다고 했더니 자기 딸 좀 봐 달라는 거라요. 홍역에 폐렴이 왔어요. 페니실린 약이 제일 특효약이었어요. 페니실린주사를 사 오라고 해서 치료를 해줬는데, 그때 마침 우리 집 양반이 도청 보건과에 취직이 됐어요.
남편이 애만 붙들고 있을 수 없어서 내가 주사를 처음 놓게 됐어요. 약이 잘 들어서 애가 금방 화색이 돌고 낫는 거라요. 너무 기뻐서 그 다음날도 놓고 또 놓아준 거예요. 그 집에서 다른 데 가지 말고 같이 살자고 그래요. 나를 붙잡는 거라요. 하는 수 없이 당분간 그 집에서 살았어요.
우리 집 양반은 구두가 다 망가져 버렸어도 구두 파는 데를 몰라서 고무신을 신고 다녔어요. 검정 고무신을요. 도청에 검정 고무신 신고 들어가니 거기 경비아저씨가 못 들어가게 했어요. 그래서 사실 나 보건과 피난민인데, 신을 파는 데를 몰라서 그런다고 하니 통과가 됐지요.
홍역 하던 애가 다 나으니 반찬을 그 집에서 다 대 주었어요. 그 집 딸이 청주에 살러 가는데 같이 가자고 해서 갔죠. 하루는 군대에서 영장이 나왔어요. 그때 남편은 보건과에서 죽어가는 피난민을 치료하는 일을 했는데, 출장을 가면 열흘, 보름 있었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옆집 살던 어떤 아버지가 붙잡혀 갔다는 소리가 들려요. 영장 가지고 가만있으면 안 되겠기에 영장을 들고 병무청에 갔어요. 청주 서교국민학교에 출두하라 해서 나갔지요. 수많은 남자 중에 여자는 나뿐인 거예요. 사실 우리 남편이 출장 나가서 전화 연락 안 되어 영장을 다시 가지고 왔다하니 다행히 영장을 받아 줬어요. 그래서 남편이 무사했죠.
보건과 과장이 청주 시내에서 동업해서 개업하자는 거야요. 개업을 했어요. 그때는 정식면허 있는 사람이 그렇게 없었어요. 그 과장은 보건과 출근해야 하니까 병원일 못 보고 우리 집 양반이 병원을 꾸렸지요. 얼마 안 가 그만 두고 충북 진통에 보건과에 발령을 받았어요. 거기에 살림을 내라 해서 갔더니 장마다 쌀 한 말, 나무 한 짐 사 줘요. 월급이 그거더라고. 그나마 피난민인데 고마워서 거기 있었어요.
그때 33인 중 #나인협 씨가 환원하셨다는 기사가 신문에 났어요. 우리 시할아버지(김광호)가 장의위원회 고문으로 나왔더라고요. 부산으로 어떻게 연락을 해서 오니 시동생이 먼저 와 있대요. 우리 양반은 얼마나 사람을 못 보는지 시동생도 못 알아봐요. 그래서 우리 형님이 고생을 너무 해서 돌았나보다 생각했대요. 나는 얼른 알아보겠더라고요. 시동생이 군복 입고 나왔어요. 이제 시어머니, 시할아버지 계시고 또 시동생도 두 분이나 계시니 함께 살려고 부산으로 갔어요. 하꼬방에 세 들어 살더라고요. 우리 집 양반은 경주인가 그 어딘가 ROTC 무슨 사업을 하는데 그곳에 의사로 갔어요. 나는 그때 애가 둘이라서 놀고먹을 수 없어서 시어머니께 가게라도 차리자고 해서 그 하꼬방에서 식품 장사를 했어요. 부산에서 1년 정도 가게하며 살다가 청주로 다시 와서 우리 집 양반이 병원을 개업 했어요.
나중에 #박현화 씨 집에 갔어요. 박현화 씨에게 물어봤죠. “어머니 그때 비밀문서를 어디에다 감춰서 가져갔어요?” “아이구, 그때 말하지 말라” 비밀문서를 한지에 돌돌 말아서, 한지를 말랑말랑하게 해서 저고리 등솔 안에 넣어서 갔대요. 박현화 씨 #김지수 (박현화 남편) 씨 그 양반들에게 신세 많이 졌어요. 돌아가신 지 한 20년 됐나? 포천 교회 묘지에 가면 지금도 산소를 꼭 찾아봬요. 내가 강서교구에서 두 내외 묘를 해 놓겠다 하니 그 집 며느리 #김화복 이 말하기를 잘 하려면 손대고 안 그러면 손대지 말래요. 그래서 잘한다는 한도가 어디까지인지 몰라서 그냥 두었어요. 아이구, 해 놓고 괜히 칭찬도 못 받을 것 같아 그냥 손을 안 댔어요. 지금 거기 가면 잘 안 돌보는 것 같아요. 그저 맨 날 이끼가 끼어서 다 죽은 걸 보면 가슴이 아파요. 그야말로 삼일재현운동이라는 게 요새 와서는 어떻게 생각되는지 몰라도 그때는 참 훌륭하게 생각했었는데요. 지금도 8월 추석날하고 한식날 일 년에 두 번 그분들 묘에 가서 심고하고 와요. 산소 관리가 안 돼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아들이 하나 있는데 우리 집 양반이 집에 한번 오라고 했는데 오지 않았어요. 그러다 우리 집 양반도 돌아가셨죠.
나는요. 천도교가 내 몸에 다 배어 있으니 으레 한울님 보살핌으로 만사가 다 이루어졌다는 걸 나이 80이 넘어서 깨닫게 됐어요. 한울님과 천도교 나 사이를 항상 잊어본 적이 없어요. 지금껏 살아온 것도 또 가는 곳마다 먹을 것이 이루어지는 이것이 한울님 간섭, 은덕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사가 한울님 은덕 없이 이루어지는 게 없고 그것은 내 몸에 배어 있어요.
우리 할아버지가 #개천교구 를 사서 세웠어요. 저 어려서 교구 시일 볼 땐 사람이 몇 안 모였지만, 무슨 일 있을 때는 많이 모였어요. 그때 얼음사탕 물을 사람들과 함께 먹던 생각이 나요. 나는 천도교와 떼려야 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어릴 적부터 평생 고생을 하지 않고 살았어요.
우리 아버지는 오산중에 다녔어요. 학식이 있으신 분이라 도당 위원장까지 지내고 오직 기독교한테 지기 싫어서 “울려라, 개벽소리 만 국민에게” 노래 있죠? 저녁마다 집에 들어올 때 그 노래를 크게 불렀어요. 예수교한테 이기려고요. 그러니까 개천에서는 천도교에 꼼짝 못했죠. 아버지가 도당에 재정국장하시는 데다 돈까지 있으니까 거기서 젊은 청년 당원을 산속에 많이 숨겨줬지요. 1·4 후퇴 때, 청년들을 굴에 숨겨 놓으면 미군이 금방 올 줄 알고 다시 굴로 보내고 했죠. 아버지가 한발 더 앞서 생각해서 이남으로 청년을 다 보냈어도 될 것을, 미군이 더 빨리 돌아올 줄 생각하셨나 봐요. 물론 우리 고향 사람들이 우리 아버지 일을 잘 아시는 분이 많아요. 나는 지금까지 다 아버지 덕으로 궁색하게 고생 안 했어요. 아버지 성함은 백자 정자 윤자, 백정윤이에요.
우리 아버지는 교당일로 나가 계시다가 미군 지프차를 타고 사리원까지 오셨는데 집 생각이 나서 다시 내리셨어요. 집에서는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안 오시니까 백씨 문중 가까운 식구들과 함께 이남으로 내려왔는데, 미군들이 젊은 청년들을 다 빼간다는 말에 할아버지는 젊은 애들 싹 다 빼 가면 우리가 살아서 무슨 소용 있나 하면서 다시 개천으로 돌아갔다고 해요. 그때 내 남동생은 고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미군이 남동생만 빼놓고 모두 포로수용소로 다 보냈어요. 전쟁 끝나고 이남 이북 갈릴 때 우리 남동생은 이북 안 가고 서울로 왔어요. 우리 시댁이 모두 천도교니까 천도교에 가면 나를 만날 것 같아서 찾아 왔대요. 만나니 처음에는 분간이 안 돼요. 그땐 누구든지 이남 가면 천도교로 가면 된다고 생각들을 했죠. 항상 천도교에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해요.
우리 남동생 내가 고등학교 보냈어요. 대학을 보내려고 했는데 동생은 떨어지고 시동생만 서울대 붙어서 보냈어요. 재수시킬 형편이 못 되어 동생은 고등학교만 나왔어요. 남동생 하나 금이야 옥이야 키워 집도 사주고 했어요. 친정은 북한에 있고 시댁은 시누이 한 사람만 빼놓고 다 오구.
지금 우리 애들은 아들들만 교당에 나오고 딸들은 입교했다 결혼해서 흐지부지 됐어요. 딸들은 그냥 시댁, 남편 맞추라고 해요. 한 집안에 종교가 두 개 있으면 잘 되지 않아요. 종교는 한 개로 똘똘 뭉쳐야 해요. 마지막으로 내가 할 일은 우리 손자손녀 딸 챙겨서 자손 대대로 천도교 이어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만 남았어요. 그게 지금 내 할 일이야요. 우리 천도교는 어느 집이고 끊어질듯 하면서 연명이 되더라고요. 지금 천도교는 열세지만 앞으로는 발전하고 대한민국 제일의 종교가 되지 않겠나 생각을 합니다.
내가 여성회 활동한 것은 부회장, 감사, 회장 출마도 한 번 했어요. 박공주 회장 때 후보로 나오고 전초련 회장 때 부회장, 김경렬 회장 때는 감사를 했죠. 나는 평생 천도교인이에요. 지금 후학들이 열심히 하시니 좋아요.
지금의 강서교구는 사실 우리집이야요. 교당으로 빌려 주었어요. 한 10년이 넘었어요. 염창동에 있어요. 지금 며느리가 여성회장(강신자)으로 있어요. 강서에 돈이 몇 천만 원 모였기에 며느리한테 “지금 교구가 지하에 있어서 그렇다. 지상에 좋은 데로 내보낼까 한다” 그러면 “어머니 그런 말씀 왜 하세요. 우리 조상님 생각해서 그럴 순 없죠”라고 해요. 우리 집 며느리 같은 사람 없어요. 나는 지금까지 구정물 손 담근 적 없어요. 며느리가 외출할 때도 점심 해 놓고 나가죠.
나는 한울님 은덕을 듬뿍 받았어요. 그리고 조상님 은덕도 있는 것 같고요. 삼일재현운동으로 시아버님은 희생당하셨고 좋은 일도 많이 하셨죠, 우리 영감님도 외상 독촉 하지 않고 공짜 치료 많이 해줬어요. 남한테 해가 되는 일, 해가 되는 이야기도 안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부처 가운데 토막이라고 해요.
여성회도 화합해서 세대 간에 서로 오고가고 해서 교류가 있었으면 참 좋겠어요. 나는 밥을 안 해 먹고 살았어요. 사람을 두고 살았지요. 친정 칠남매 맨 맏이지만 애 한 번 업은 적이 없어요. 설거지 빨래도 안 했어요. 우리 친정집도 사람을 두고 살았으니까요. 며느리 복도 한울님이 주신 것 같아요. 며느리가 잘 들어왔어요. 시아버지 돌아가실 때도 양치질 다해 주고 입감도 다 빼고 나도 하기 싫은데, 그런 며느리 쉽지 않아요.
내가 살아 온 과거를 생각하니 하나도 아쉬운 게 없어서 주는 것도 서슴없이 줘요. 돈도 잘 주어요. 또 생기니까. 내가 돈을 모으지 않고 쓰는 습관이 든 것은 내가 학교에서 교편생활하면서 월급 받았을 때부터예요. 집이 풍부하니 내가 썼어요. 그때 우리 영감하고 약혼을 했죠. 아버지가 우리 영감을 꼭 찍었어요. 그 사람이 학교에서 연극을 하고 늦게 돌아오면 늦게까지 지키고 있다가 색시 못 봐서 색시 보라고 데려오시는 거라요. 집념이 보통 강하신 분이 아니야요. 약혼하고 보니, 우리 집은 풍부하고 시댁은 농사도 장사도 안하고 오직 교회사업만 했어요. 시집가서 느낀 것은 성미 받은 날 다음에 광 쌀독에 쌀이 가득한 거라요. 친정어머니께 물었더니 천도교 하는 집은 원래 그런 거라고 했어요. 성미를 받은 거예요. 할아버지는 평생 천도교 일만 하셨어요. 우리 집 양반 등록금도 친척 누구인가 몇 번 내 줬대요. 약혼하고 난 후에 내 남편이 학교 다니느라 돈이 필요하니까 내가 월급 탔던 걸 꼬박꼬박 주었지요. 나하고 약혼 후 우리 집에서 등록금 다 대어 주었지요. 애당초 우리 아버지는 돈 없어도 괜찮다 하시며 우리 집에서 다했어요.
시아버지 잡혀 가시고 시할아버지 서울 가시고 나니 시댁 살림이 말도 못했어요. 그러면 우리 친정집에 와서 쌀, 밀가루, 국수 바리바리 다 싣고 갔지요. 딸 배곯을까 봐 바리바리 실어서 보내는 거야요. 시집가서 밥을 해 본 적이 없어요. 시어머님, 시할머님, 시고모님까지 여자 셋이 있으니 아침에 밥 다 해놓으시고 나는 아침에 밥만 푸라고 했어요. 참 인심이 좋으셨어요. 설거지만 대충대충 해놓았죠. 그러다 또 한 일주일 지나면 나를 친정에 보내주시고 했죠. 그러다 애가 세 살 때 남편이 의과대학 나와서 돈벌이를 시작했어요.
학교는 선천 보성을 다녔어요. 선천에 원래 예수교가 제일 먼저 와서 보성학교는 예수교인이 많았어요. 그래도 나는 당당하게 천도교라고 했어요. 왜정 때 그냥 졸업하고 있으면 정신대 뽑혀간대서 학교에서 교원 강습시켜요. 삼 개월 교원 강습하고 시험 보니 자격증을 줘서 3년 교사생활을 했어요. 그때만 해도 중학교 나온 집은 가정이 풍부해서 나왔지 웬만해선 못 갔어요. 다들 집이 잘 사니까 눈이 오면 모교에 가서 즐겁게 놀고, 비 오는 날에는 레인코드를 입고 영화의 멋진 장면을 상상하며 거닐고, 또 사진도 찍으면서 재미있게 놀았어요. 우리 아버지는 큰 포목상을 했어요. 운동도 보통학교 다닐 때 터치 볼 선수로 활동해서 각 학교 대항에 나갔어요. 오산 중학교 시절에는 농구, 배구를 했어요. 전체대표는 못해도 클래스 대표 노릇은 했죠. 우리 학교는 겨울이 되면 운동장에 얼음을 얼려서 스케이트 탔어요. 일본 큰 화살도 쏴보고 운동도 여러 가지 다 했어요.
교사생활은 정신대 무서워서 했는데 우리 학교가 사립학교이다 보니 선생님 중 사상가가 있었어요. 동경 제국 나온 철저한 사상가 선생님께서 그런 주입을 암암리에 해 주었어요. 왜놈들이 얼마나 끔찍하게 하는지에 대해서요. 지금 그들이 ‘증거 없다’고 하는데 그 말도 맞아요. 왜냐면 정신대 끌려갈 때 정신대 끌려간다고 안 했거든요. 공장에 일하러가는 줄 알지. 공장 가면 월급도 조금 주는데다 잘 안 주지 집에는 가고 싶지, 그러면 꼬여서 그런 곳으로 뽑아가는 거야요. 아베 신타론가 뭔가 서류상 증거 없다고 하는데 정신대 간다고 뽑아가지 않아요. 공장 간다고 데려가지. 요즘 정신대 할머니 보면 무식한 할머니 없어요. 애국심이다 뭐다 해서 나가야 된다고 해서 공립학교에서 더 많이 나갔어요. 그런데 그 선생님이 암시적으로 사상적으로 그런 말을 해 주는 거야요. 학교 졸업 하면 맥없이 끌러간다고요. 다 한울님 보살핌이고 감응이지요. 그런 학교에 간 것도 다 현명하신 아버지와 조상님 은덕이에요. 항상 고맙게 생각해요.
우리 할아버지도 보통 아니셨어요. 단발령 내렸을 때 고모님 고모부님 시집올 때 상투 틀고 사돈들이 오면 어디 상투 틀고 오냐고 그날로 싹 뚝 잘라요. 우리 할아버지 보통 넘어요. 상투하신 분 우리 집에 못 와요. 우리 할아버지 천도교만 고집했죠. 우리 남동생 축구를 참 잘했지만 아버지가 축구하면 볼 일 없다고 반대했어요. 그래서 남동생이 공차서 받은 상을 다리 밑에 두고 왔대요. 여기 와서야 나한테 말하데요.
이북에 남은 가족 면회신청이 9월까지 있어서 쓸까 말까 내가 망설이니 아들이 “그것 한 번 써 내지 그래요” 해요. 그런데 그걸 써서 내게 좋아질 것 같은 느낌이 없어요. 만나면 눈에 더 걸릴 것 같아서요.
우리 할아버지는 젊었을 때 자수성가하셨어요. 글 잘 쓰시고 가계장부 정리 잘하시고 부기까지 하는 사람은 우리 할아버지 밖에 없었어요. 우리 할아버지 칭찬이 많았죠. 부기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고 그러셨어요. 그걸 할아버지한테 배우다 잘 안 되면 엄한 꾸지람에 상다리가 부러졌어요. 그래서 누구도 배울 엄두를 못 냈지요.
우리 아버지는 거지가 와도 밥상을 차려서 딱 내어 주는데 오는 거지마다 밥상을 받고 갔어요. 이북에서는 잘 사는 집에서 결혼을 하면 처가에 1, 2년 있다가 시집을 가요. 내가 1년 있다가 시집을 가는데 차가 없어 트럭을 타고 갔어요. 뒤에 짐을 싣고 앞에 나, 할머니, 아버지 셋이 타고 가는데 밖에서 절을 해요. 거지가 우리 아버지 보고 절을 하는 거예요. 그때 ‘우리 아버지 참 훌륭하시구나’ 생각했어요. ‘내가 항상 아버지 덕에 평생을 편안하게 잘 사는구나’ 늘 그렇게 생각하며 지금까지 살았어요.
우리 아버지는 우리 집에 도둑이 들어오면 두 차례 정도는 바로 경찰에 안 넘겨요. 다 없어서 도둑질 한다면서 오히려 옛날 강냉이 말린 걸 내줘요. 경찰에 넘기고 때리고 하지 않아요. 피난 갈 때도 고추장 된장도 그냥 다 줬어요. 내가 어디 다니면서 얻을 사람이 아니래요. 어디서든 남을 챙겨만 주어요. 아버지가 그런 분이래서 그랬다는 생각을 해요. 아버지가 항상 고맙게 생각돼요. 우리 할아버지가 엄하셔도 그런 건 인정을 해요. 천도교에 감사해요. 주문을 외우기보다 진실성이 대대로 배어 있으면 그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나도 많이 퍼 주었어요. 모든 게 아버지 덕이고 한울님 감응 이야요.
(구술일: 포덕 148(2007)년 9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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