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임 시인>>
<<이경임 시인의 양력>>
* 1963년 서울 출생.
* 서강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 전남대학교 대학원 영문학과를 졸업.
* 199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 시집 : 『부드러운 감옥』, 『겨울 숲으로 몇 발자국 더』
<<이경임 시인의 시>>
바람 한 줄기/이경임
바람 속엔 헤아릴 수 없는 냄새와 소리와
얼룩과 소문들이 있다
높은 산맥을 넘은 후 평지에 도달한 바람 속엔
무(無)가 있다
이 바람은 무겁다
이 바람은 무겁지 않다
이 바람의 몸속엔 한 방울의 물기도 없다
없는 눈물이 가득 차오르면
메마른 나뭇가지에 새순이 돋는다
없는 사랑이 가득 차오르면 바보처럼 자주 웃는다
꽃들은 텅 빈 나무의 엔진이다
겨울이 지나가면 작란(作亂)이 다시 시작된다
바람 속엔 다시 엔진 돌아가는 소리가 그득하고
이 낮은 지상은 신음 소리들로 가득 채워진다
늙은 호박이 있는 풍경/이경임
바람이 허공에 매달린 풍경(風磬)을 흔들고 지나가니
내 안의 풍경(風磬)들도 흔들린다
흔들리는 입술, 흔들리는 새, 흔들리는 구름
바람이 무게 없는 갈대들을 쓰러뜨리고 지나가니
내 안의 갈대들도 쓰러진다
쓰러지는 시계, 쓰러지는 꽃병, 쓰러지는 사원
바람이 늙은 호박 위로 지나가니
그것은 늦가을 저녁 햇살을 받으며 황금빛으로 빛난다
그저 호박속이 채워져 있을 터인데
동요도 없이 묵묵히
제 부피만큼의 그늘을 드리우며
낮은 곳에서 빛난다
소박한 향연/이경임
어항 속의 열대어들이 끊임없이 움직인다
이곳에선 형광등이 태양,
열대어 사료가 싱싱한 플랑크톤
염소냄새를 가라앉힌 수돗물은 비릿한 바다의 향기를 풍긴다
어항 속의 열대어들이 벌 받는 듯 헤엄치고 있다
아니, 그 무엇도 상관없다는 듯 춤추고 있다
자연이든 문명이든 주어진 운명엔 관심 없다는 듯
지느러미 흔들며 춤추는 방식에만 몰두하려는 듯
아름답게, 잔인하게
열대어들이 떠다니고 있다
가라앉지 않는 것이
기쁨인 것처럼
멈추지 않는 것이
사랑인 것처럼
어떤 살풀이/이경임
그곳은 참, 우울한 병실이었어, 라고
속삭이며
잎새 하나가
나무의 몸 밖으로 퇴원한다
몸 속의 오장육부를
모두 드러낸 것들만이 거느릴 수 있는
저 처연한 평화
한 잎 두 잎 갈빛의 박제들이
춤추듯 지상을 향해 귀향한다
저 춤은 끝까지 내려간 뿌리들이
검은 바닥에서 길어올린
얼음처럼 투명한 죽음의 살풀이
너의 몸 속엔 아직
한 방울의 눈물이
한 방울의 독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
아이야, 낡은 벤치에서 일어나
허공을 향해 다시 걸어가자
저 차거운 바닥에 닿을 때까지
계단에 이르는 길/이경임
늙은 개처럼 헐떡이며
계단을 오를 때가 있다
물고기들처럼 뻐끔거리며
계단을 내려올 때가 있다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앉아서
계단을 바라볼 때가 있다
빗방울처럼, 자동차 경적소리처럼
눈송이처럼, 까페에서 흘러나오는 커피냄새처럼
계단에 머무를 때가 있다
때로는 계단을 머리에 이고, 계단을 업고
계단을 질질 끌면서
학교에도 가고 결혼식에도 가고 장례식에도 간다
계단은 무덤처럼 풀이 돋기도 하고
용광로처럼 끓어오르기도 하고
참새처럼 폴짝폴짝 날아다니기도 하고
배고픈 비둘기처럼 구구거리며 걸어 다니기도 한다
계단을 애무한다고 상상하며
계단을 허물고 새로 반죽하고 색칠하기도 한다
구름들, 신기루, 바다, 숲, 적막함이라고
계단을 부를 수 있는 순간이 다가오고
투병일기, 모래시계, 매혹, 음악, 밥그릇이라고
계단을 불러보는 순간이 지나간다
계단은 빛과 어둠을 거느린 성좌처럼
벌과 나비가 붐비는 꽃들처럼
멀리에서 가까이에서 손짓을 하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사라지듯이
계단은 새들처럼 날아가고 거품처럼 꺼져버린다
계단은 운무 속에 잠겨있는 산맥들처럼
제 형상을 지우고 가라앉을 때도 있다
나는 얼음못들이 박혀 있는 계단을 밟고 있다
한기를 참지 못해 못들을 빼버리면
계단은 투명한 피를 흘리며 허물어질 것이다
아직은 못이 녹을 때까지
죽음과 농담을 나누며 산책을 즐겨야겠다
언제인가 계단은 기하학적 도형들이 되고
흙이 되고 물이 되고 불이 되고 바람이 되고
휘파람 소리가 되고
나뭇잎 냄새가 될 것이다
그러면 나는 계단과 입 맞추며
즐거운 상상 속으로 계단을 돌려보낼 것이다
수사법이 내게 준 선물들/이경임
엄마의 품에서 자라나는 아기
연인의 품에서 죽어가는 노인
학교와 결혼식과 요양원과 장례식과 애국가
막 지는 단풍
막 피는 꽃봉오리
숲, 바다, 하늘, 돌멩이들과 이어진 길들
병원, 공장, 신호등, 상점과 이어진 길들
떠오르는 해
지는 노을
여행 가방들과
몰두하는 덧없는 작업들
시와 음악과 그림과 영화와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세심한 손길들
오랫동안 함께한 가구들과
애완동물과 식물들
간섭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늘어놓는
무의미하면서도 따뜻한 대화
타로점을 보러 가는 여자들
도박을 하러 가는 남자들
별이 보이는 고장에서 떠오른 추억들
혼자만 품고 있는 비밀과 꿈들
육체와 육체 사이에 머물렀던 입맞춤
모래시계와 투병하는 시한부 환자들
겨울 응달처럼, 병아리 깃털처럼
불현듯 다가오는 죽음의 감촉
말하는 법을 배울 때는
더 깊이 베였다.
더 넓게 점령당했다.
고해성사/이경임
사랑한다고 당신께 말할 때
나는
거대한 산을 옮기고 있는
달팽이 같습니다.
나는
화려하고 강력한 날개를 지닌
달팽이 같습니다.
태양의 둘레를 도는 별보다
더 멀리에서 혹은 더 가까이에서
태양의 둘레를 도는 별들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혹은 더 느리게
신이라 부르고 싶은 것들을 찾아
혹은
사랑이라 부르고 싶은 것들을 찾아
하늘과 땅을 오르내리는
달팽이 같습니다.
어두운 허공 속에서
수다스런 침묵을 조각하는
달팽이 같습니다.
줄타기를 즐기는 광대의 천성을 지녔기에
줄이 망가져도
줄에서 떨어져도
신이라 불렀던 것들 속에
혹은
사랑이라 불렀던 것들 속에
나는 매달려 있습니다.
봄비/이경임
새벽 2시에서 3시를 향해 움직이는
커다란 초침소리처럼
나의 출생신고에 사용된 숫자들처럼
나의 사망신고에 사용될 숫자들처럼
천진한 울음처럼
발랄한 체념처럼
그렇게 무엇인가가 땅으로 내려와
하늘을 향해 속삭였다
시계 우물 속 개구리처럼
마음 우물 속 개구리처럼
분주하게 폴짝거리며 힘 빼지 말고
하늘을 꼭 껴안고 더 많이 놀아야지
땅과 뒹굴며 더 많이 놀아야지
차갑고 메마른 입술 위로
흘러내리는 봄비의 촉감처럼
죽음의 촉감과 더 친밀해져야지
동화가 있는 풍경/이경임
아기나무가 엄마나무에게 물었답니다
나는 왜 새나 바람이나
구름이나 햇살이나 물이 될 수 없나요
너는 날마다 키가 크는 감옥이야
아무나 그런 감옥이 될 수는 없단다
그럼, 키가 커서 난 무엇이 되는 거죠?
넌 의자도 될 수 있고, 조각품도 될 수 있단다
하지만 난 어디에든 갈 수가 없잖아요
나중에 그런 것들이 되어보렴
오랫동안 한 곳에
생각의 뿌리를 깊이 내리면
세상의 무수한 갈랫길들이
환하게 보인단다, 그때에는
넌 어디에나 갈 수 있을거야
담쟁이/이경임
내겐 허무의 벽으로만 보이는 것이
그 여자에겐 세상으로 통하는
창문인지도 몰라
내겐 무모한 집착으로만 보이는 것이
그 여자에겐 황홀하게 취하는
광기인지도 몰라
누구도 뿌리 내리지 않으려 하는 곳에
뼈가 닳아지도록
뿌리 내리는 저 여자
잿빛 담장에 녹색의 창문들을
무수히 달고 있네
질긴 슬픔의 동아줄을 엮으며
칸나꽃 보다 더 높이 하늘로 오르네
마침내 벽 하나를
몸속에 집어넣고
온몸으로 벽을 갉아먹고 있네
아, 지독한 사랑이네
즐거운 반성/이경임
피로를 달래기 위해
나는 금붕어처럼 쉬지 않고 뻐끔거렸다
나쁜 꿈의 뒷면엔 좋은 꿈
불필요한 꿈의 뒷면엔 필요한 꿈
졸음의 바깥은 헐벗은 손가락과 발가락들
졸음의 안쪽은 달콤한 입술들
무례한 사람들을 잊기 위해
나는 시계추처럼 규칙적으로 중얼거렸다
햇살에 반짝이는 거미줄 속에서
검은 밤바다가 출렁거려요.
냉소주의자의 경박한 웃음을 흘리지 않기 위해
나는 늘 명랑하면서 진지한 배우의 표정을 지었다
정지된 나뭇잎들 속에서
포르릉 튀어나오는 참새들처럼
임종하는 노인의 침상을 지키는
수다스럽지 않은 가족들처럼
새들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해
의미 있는 새들과 의미 없는 새들로 나누는 바보짓도
더 이상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개를 사랑하는 사람과 사람을 사랑하는 개가
함께 산책하는 풍경처럼
일도 하고 독서도 하고
사랑도 하고 게으름도 피우기로 작정했다
포옹/이경임
나는 냄새를 맡는다, 너의 생각들을
종이 위의 글자들 같은 너를
나는 파고든다, 너의 살을
부풀어 오른 빵 같은 너를
나는 마신다, 너의 입술을
해골 속에 고여 있는 다디단 빗방울 같은 너를
나는 듣는다, 너의 속삭임을
아침이 되면 더 큰 빛 속으로 사라지는
이슬들 같은 너를
나는 바라본다, 너의 미소를
바구니 속에 담겨 환하게 시들어가는 꽃들 같은 너를
나는 포옹한다, 너의 통증을
먼지 한 웅큼 같은 너를
반 고흐의 귀/이경임
나무는 겨울 들판에 서 있었다
나무는 장신구를 떼어버리듯
사소한 귀들을 떨어뜨렸다
모호한 악기들처럼
나무를 흔들던 잎사귀들이 사라졌다
흔들리는 것들이 너무 많았던 나무는
늘 귀가 아팠다
허공이 흔들리는 잎사귀들로 꽉 채워져서
나무는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밤이 되면 세상을 떠돌며 바람이 묻혀온
울음소리들이
나무의 귓속에 소용돌이를 일으키곤 했다
제 몸속의 것이 아닌 울음소리들이
제 울음소리처럼 들릴 때까지
나무는 겨울 들판에 서 있었다
시끄러운 귀들이 죽을 때마다 해바라기가 피고
별이 빛났다
나무는 간신히 한 그루의 텅 빈 귀가 된 것이다
사라지는 얼굴/이경임
너의 얼굴은 모든 곳에서 문을 열고 사라진다
보이지 않는 바다의 색깔로
닿을 수 없는 부드러운 입술로
너의 얼굴은 모든 곳에서 춤을 추고 사라진다
맡을 수 없는 나뭇잎들의 냄새로
들을 수 없는 벌레들의 울음으로
너의 얼굴은 모든 곳에서 미소짓고 사라진다
실천할 수 없는 햇살의 공평함으로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들의 율동으로
너의 얼굴은 모든 곳에서 기다리다 사라진다
공원 벤치의 모서리에 매달린 물방울들로
걷어낼 수 없는 어둠으로
꿈의 해석/이경임
사람들은 옷을 입는다
어떤 사람들은 항상 누드 같은 옷을 사지만
이 사람은 옷에 대해 과대망상을 갖고 있다
이 사람은 밤마다 벌거벗은 임금님 꿈을 꾼다
이 사람의 외투는 명품이다
이 사람의 외투는 명품이 아니다
이 사람의 외투는 따뜻하지 않다
이 사람은 거머리처럼 자신에게 들러붙어 있는 외투를 벗을 수 없다
이 사람이 다른 외투를 선택한다면 그는 다른 사람이 된다
외투는 강박 충동이거나 만장일치로 설계된 함정이거나 몽상이다
나는 거짓말들을 수집해 외투를 만들지도 모른다
너는 대형 천막을 걸친 난쟁이처럼 우스꽝스러울 것이다
꽃씨에 대한 명상/이경임
차가운 흙은 부드러운 관의 냄새를 풍기고
어둠은 이제 낡은 담요 같다
햇빛에 입술을 댈 때마다 향기는 흩어지고
그림자들은 새어 나온다
수의를 벗어버릴 때 폭발은 일어나겠지
그렇게 사랑은 시작되지만
모든 문들은 어둠 속에서 다시 닫히고
난해한 흉터 속엔 멈춘 시곗바늘과 째깍거리는 시곗바늘이 돌아간다
전쟁터의 총소리가 정원을 굴러다닐 때
거울 속 분장하는 자의 비애는 늙어가고
허물어진 사원의 모퉁이에서 소리를 삼킨 꽃잎들은 시들어간다
꽃의 죽음이 다시 꽃을 점화시키겠지
재의 향기는 흙 묻은 날개들의 속삭임을 거느리고
마침내 텅 빈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아름다운 연애/이경임
세계는 한여름 광장의 낡은 벤치
나는 그곳에 걸쳐진 두꺼운 외투
너무 어울리지 않아
연애밖에 할 것이 없다
내가 너에게 입 맞추는 순간
집의 창문, 종려나무에 흘러내리는 빛,
혹은 서늘하게 반짝이는 침엽수림
나침반도 없이
욕설도 찬사도 없이
우리의 입술들을 반죽해서 빵을 굽고
빵을 나누어주는 것밖에 할 것이 없다
약한 자들과 교활한 자들,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심부름꾼들과 정치가, 성직자와 사기꾼
색정광과 전쟁광과 강박적인 시민들
과학자들과 장사꾼들과 시한부 환자들과 감상주의자와 염세주의자들
어릿광대와 유령들과 철학자들
예술가와 어린아이들과 죽은 사람들이
한 식탁에 둘러앉아 빵을 먹는다
빵은 늘 모자라고
식사는 불평 속에서 끝난다
세계는 한여름 광장의 낡은 벤치
사람들은 그곳에서 아이스크림처럼 흘러내린다
우리는 너무 무력해서
연애밖에 할 것이 없다
내가 너에게 입 맞추는 순간
하얀 비둘기 뫼비우스의 띠,
혹은 서로를 핥아주는 고래들이 살고 있는 바다
여름/이경임
피아노 위에 지구본이 있다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돌고 아침에는 해가 떠오른다
피아노는 36개의 검은 건반과 52개의 흰 건반을 갖고 있다
녹차 위에 띄워 놓은 얼음이 녹고 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어느 지역은 집중호우때 물난리를 겪는다
미세하게 커튼이 흔들리고 숨막히는 열기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기도 한다
스위치를 누르면 선풍기의 날개가 돌아간다
미풍으로 강풍으로 날개를 돌릴 수 있다
선풍기를 튼 채 잠이 들면 질식사한다고도 한다
시계 속에서 나무로 조각된 뻐꾸기가 튀어나와 운다
뻐꾸기 울음 소리를 들으며 손톱발톱을 깍는다
포르노그라피와 범죄와 정치에 관한 기사들과 시집들이
읽혀지지 못한 채 쌓여간다
수족관에는 물고기들이 떠다니고
지구의 어느 끝에서는 파도를 타는 사람들이 있다
저녁에는 해가 지고 지구본은 피아노 위에 있다
어느 봄날, 백목련 나무 밑에서/이경임
하얀 손바닥 같은 목련꽃에 담긴 의지
하얀 손바닥 같은 목련꽃에 담긴 온기
하얀 손바닥 같은 목련꽃에 담긴 향기
겨우내 텅 비어있던 나무가
붐빈다
하얀 손바닥 같은 목련꽃에 담긴 강박관념!
시들어 흉하게 땅바닥에 뒹굴지라도
봄이 오면 또 허공에서 꽃을 피울 것이다
하얀 손들을 모아 또 기도를 드릴 것이다
응답이 없어도!
성찬/이경임
한여름 재래시장 건어물 가게에서
어린 나는 보았지
천장에서부터 길게 늘어진 끈끈이 테이프에
까맣게 들러붙어 있는 파리 떼를
건어물 가게 좌판대에서
어린 나는 보았지
축제/이경임
눈이 상투적으로 내린다
고요하게
눈이 전위적으로 내린다
징소리처럼
그렇게 눈이 내린다
그렇게 살아간다
갓난아기 울음소리처럼
영안실 향 피우는 냄새처럼
눈이 낡아 간다
나도 눈처럼 낡아 너덜너덜 해진다
남루한 눈이 나의 눈을 찌른다
날카로운 새처럼
뜨거운 불꽃처럼
눈이 머는 줄도 모르고
나는 하염없이 눈을 바라본다
내리는 눈마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내리는 눈마저 들리지 않을 때까지
부끄러운 원근법/이경임
낯선 나무 한 그루와
낯선 노인이 그 공원에 서있다
낯선 나무 한 그루에게 마음이 더 끌린다
낯선 강아지 한 마리와
낯선 어린 아이가 그 골목을 지나간다
낯선 강아지 한 마리에게 눈길이 더 간다
낯선 꽃집과
낯선 노숙자가 그 지하철 역에 웅크리고 있다
낯선 꽃 한 송이에게 몸이 더 기운다
낯선 책 한 권과
낯선 환자가 그 병상에 누워있다
낯선 책 한 권에게 손길이 더 간다
그 정원에서/이경임
검붉은 장미 한 송이 겨울 뜨락에 서있고
장미의 메마른 입술들 위로 눈발들이 미끄러져 내린다
하얀 혀와 검붉은 혀가 엉키고 있는 관능적인 비애
독한 술처럼 석양이 허공에 번질 때
창밖의 나무들은 붉게 흔들리고
카멜레온처럼, 도마뱀처럼
몸빛을 바꾸고 꼬리를 끊어버리며
우리는 연애를 하고 투병을 한다
종교적이 되거나 치매를 앓으며
머리 위에 떠있던 별들이 서서히 빛을 잃어 가는 것을 본다
빛을 잃어가는 순간은 빛을 찾아가는 순간
비극적인 것도 희극적인 것도 아닌 빛의 순환, 어둠의 순환
한 여름 이글거리는 보도블록 사이의 잡초들과
겨울 뜨락의 검붉은 장미 한 송이 속에 우리의 숨결은 떠돈다
아름다움에 대한 떨림이 마비될 때
죽음은 빚쟁이처럼 거만해지고
세계에 대한 응시가 사라지는 순간
연인의 입술도 비루해지지만
우리는 낡아가는 그 정원을 공들여 가꾼다
시들어 사라지지 못하는 장미들과
시들지 않기 위해 소리 없는 아우성을 흘리는 잡초들을 엮어
하늘/이경임-
모호한 구름의 모양들과 빛깔들이 나타난다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이고
우박이 떨어지고 진눈깨비가 녹아내린다
하얀 벽돌 같은 안개 속에 갇히고
석양이 붉게 번지는 순간에 홀린다
특별한 순간들이 스며들 때도 있다
반짝이는 포플러 입사귀들,
차오르는 빛, 깊어지는 어둠,
무지개가 뜨는 기적, 아침놀이 번지는 공간
소낙비가 쏟아지고 가랑비가 흩뿌려질 때
문득 화사한 우산들을 찢어버리고
낯익은 감상주의자와 결별한다
분주한 그물에 걸려 파닥이는 새들을 날려 보내고
공룡들의 발자국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본다
신음 소리가 가라앉고 투명한 휘파람 소리가
섬광처럼 스쳐갈 때
잠시 통증은 고요한 향연
나쁜 꿈이 없는 광활한 물질 속으로 스며든다
시인/이경임
그가 시를 쓰는 동안
누군가는 땅을 파고
누군가는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누군가는 밥을 짓고 누군가는 죽어간다
그가 시를 쓰지 않는 동안
누군가는 사랑을 하고
누군가는 전쟁을 일으키고
누군가는 경주에서 이기거나 지고
누군가는 투병하고 누군가는 태어난다
그가 시를 쓰면
그는 무위도식자나 사기꾼이나
속 좁은 인간이 될지도 모른다
그가 시를 쓰지 않으면
그는 거지나 자선가의 흉내를 낼 것이다
그가 시를 쓴다고
늘 불면증에 시달리는 것은 아니다
그가 시를 쓰지 않는다고
늘 어떤 것들을 숭배하거나 경멸하는 것은 아니다
공기나 연기 같은 시를 쓰며
그는 매혹될지도 모른다
사물들의 입술에
그의 입술이 닿는 순간의 황홀에
공기나 연기 같은 시를 쓰지 않으며
그는 두려워할 지도 모른다
자신보다 더 큰 바위를 굴리며 언덕을 오른 순간
다시 굴러 떨어지는 연극을
시가 그를 쓰지 않는 동안
그는 참을 수 없이 가벼워지거나 무거워지고
자주 고양이의 하품이거나
씻겨져 사라지는 거품이다
시가 그를 쓰는 동안
그는 번역할 수 없는 외국어이거나
번역하지 않아도 되는 음악이다
아이/이경임
이 세상
가장 먼저
눈물 고이는 한 마디
제 몸을 둥글려
집 한 채 만드는 말
태초를
몸소 보이며
우주를 움직이는 추
모래시계 속에서/이경임
뱀처럼 허물을 벗는 놀이에 몰두한다
벗어놓은 껍질들이 낡은 스타킹처럼
무덤가에 뒹군다
시소처럼 공중과 바닥을 오가는 놀이에 몰두한다
시소를 타던 아이들이 사라지고
빈 공원에 어둠이 깃든다
잎사귀들처럼 나뭇가지와 흙에 들러붙는 놀이에 몰두한다
잎사귀들이 허공에서 사각거리다
흙 위에 떨어져 말라붙은 나비들처럼 고요하다
위쪽 사막이 투명하게 비워지는 동안
아래쪽 사막이 채워지는 놀이에 몰두한다
공처럼 튕겨 올랐다 사라지는 시간 속으로
누군가 목발을 짚고 걸어 간다
채워진 사막을 위로
비워진 사막을 아래로 뒤집어 놓고
꽃피고 바람 부는 날을 기다린다
비맞은 솔잎 끝에 매달려있는 투명한 물방울들을 바라본다
흘러내릴 듯 흘러내리지 않는 세계의 창문들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