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한들한들☆]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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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들한들]
나태주 시집 / 밥북기획시선 001 / 밥북(2015.06.10) / 값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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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들한들
나태주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했던 여자아이이다. 어려서부터 탁월했다. 공부를 잘 했고 글을 잘 썼으며 성격이 야무지고 피아노를 잘 쳤다. 자라서 무어든 한 가지 잘 해내는 사람이 되려니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나중에 친구 아이들한테 들으니 아니었다, 피아노를 잘 쳤지만 피아니스트가 된 것도 아니고 좋은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영문학자가 된 것도 아니고 글을 잘 섰지만 글 쓰는 사람이 되지도 않았다 한다.
다만 잡지사 기자가 되어 잠시 다니다가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하고 나서 직장을 그만 두고 그냥 아줌마로 눌러앉았다는 것이다. 가깝다. 왜 그 애는 그렇게 살까?
친구들 말로는 가끔 그가 좋아하는 가게에 나가 손님들 앞에 피아노도 쳐주면서 한들한들 아무 불평 없이 그냥 아줌마로 잘 산다고 그랬다. 한들한들! 누군가의 삶이기도 하고 누군가의 삶이 아니기도 한 한들한들!
유독 그 ‘한들한들’이란 말이 오래 뒤에 남았다. 왜 나는 그 애처럼 한들한들 살지 못했을까? 몇 줄짜리 시를 쓰고서도 꼬박꼬박 이름 석 자, 끼워 넣어 세상에 날려 보내며 50년을 고역으로 버텼을까!
늦었지만 나도 초등학교 4학년 담임했던 여자 제자 아이가 피우고 있다는 그 한들한들이라는 꽃 한 송이를 따라서 피워보고 싶은 것이다.
멀리 풍경
나태주
마음은 뜨내기
자주 집을 나가서
쉬이 돌아오지 않는다
오늘은 꺼밋한 비구름 하늘
그 아래 비를 맞고 있는
잡목림 안개 자욱
실가지 끝에서 놀고 있다
꽃이 피고 새잎 나는 날
마음아 너도 거기서
꽃 피고 새잎 내면서
놀고 있거라.
무거운 몸
나태주
두 팔과 다리를
나뭇가지 위에 걸어놓고
등과 엉덩이를 구름 위에 눕힌다
머리는 별에게, 가슴은
하늘 물소리한테 맡기면 어떨까?
몸이 조금씩 가벼워진다.
첫눈
나태주
눈도 나무위에 내리면 꽃이 되고
길바닥에 내리면 쓰레기가 된다
오늘 아침 나는
어디에 내린 눈이
되고 싶은 거냐?
고향
나태주
그곳에서 태어난 한 사람은
얼른 자라서 그곳을
떠나고 싶어 했지만
그곳에서 태어나지 않은 한 사람은
어른이 되면 기필코
그곳에서 살겠다고 소원을 세우고
끝내 그곳에서 사는 사람이 되었다
고향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돌멩이
나태주
지구 위에서 나보다 오래 산 놈
새였을까? 물고기였을까?
가끔은 눈을 부라리며
내 발부리를 걷어차기도 한다.
저문 날
나태주
날 저물어 어둑어둑한 골목길
웬 낯선 남자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할머니! 소리쳐 부른다
어, 우리 여진이가 와서
저의 할머니를 부르고 있구나!
아닌 줄 뻔히 알면서도 저린 가슴
어미 잃은 손자라 그런 걸까?
서울 사람
나태주
서울사람은 시골 내려와도 밥 사지 않고
서울 사람은 서울 올라가도 밥 사지 않는다
서울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런다
딸아, 너는 그런 서울사람 되지 말아라
밤 사지 않고 차도 사지 않는
서울사람 되지 말아라
너는 글 쓰는 사람 서울사람 아니더냐!
내 딸이 귀먹은 욕 얻어먹는 사람이면 쓰겄냐!
동행
나태주
어머니는 언제 죽니?
내가 죽을 때 죽지.
시∙1
나태주
만나기는 한나절이지만
잊기에는 평생도 모자랐다.
시∙5
나태주
산문은 100사람에게
한 번씩 읽히는 문장이고
시는 한 사람에게 100번씩
읽히는 문장이라는데
어쩔거냐?
시가 나에게 묻는다.
시인
나태주
주름이 많은 애벌레
주름마다 슬픔과
외로움이 새겨져 있다.
- 시집『저전거를 타고 가다가』에 실린『늙은 시인』이란 작품 개작.
고백
나태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구를 떠날 때
남기고 싶은 말
생각 늘 놓지 않으시어 감사합니다
지구를 떠날 때
다시 남기고 싶은 말
내가 당신에게 꽃인 줄 알았더니
당신이 내게 오히려 꽃이었군요.
예비시인
나태주
살았을 때는 어떠한 시인도
아직은 시인이 아니다
목숨이 다했을 때
관 뚜껑을 덮을 때 비로소
그는 한 사람 시인이 된다
어디까지나 살아있는 시인은
시인이 되려는 예비시인
시인 견습생일 뿐.
짝사랑
나태주
세상의 모든 사랑은 짝사랑이란 말
마음 아프다
나는 너를 보고 있는데
너는 또 누구를 보고 있는 거냐?
조금쯤 외롭고 슬프고 쓸쓸한 우리
그러나 끝가지는 불행하지 않은 우리
마음속에 짝사랑이란 꽃이라도 한 송이
오래 피어 있기에 다행이다.
조용한 날
나태주
나는 네가 좋은데
너도 내가 좋으냐!
하늘 구름에게 말해보고
화분의 꽃들에게도 물어본다.
사랑
나태주
오래 함께 마주 앉아서
바라보는 것
말이 없어도 눈으로 가슴으로
말을 하는 것
보일 듯 말 듯 얼굴에
웃음 머금는 것
그러다가 끝내는 눈물이 돌아
고개 떨구기도 하는 것.
여러 날
나태주
마음을 보여줄 수 없어
시를 보여주고
여러 날
마음을 다 줄 수 없어
선물을 고른다
오래오래
오해 없었으면 좋겠다.
시로 쓸 때마다
나태주
지구는 우주 속에서
하나밖에 없는
푸른 생명의 별
나는 또 지구 가운데서도
한국이라는 나라에 하는
시 쓰는 한 사람
너는 또 내가 사랑하여
시로 쓰기도 하는 오직
한 사람 여자
내가 시로 쓸 때마다 너는
나의 푸른 중심이 되고 끝내
우주의 중심이 되기도 한다.
눈빛
나태주
눈빛이 달라졌다 그러지
짐스럽다 그러지
사람을 뚫고 지나가는 눈빛
사람 마음을 후비는 눈빛
더러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눈빛
가운데서도 나의 눈빛은
울면서 매달리는 눈빛
왜 안 그러겠니?
늘, 오늘 이것이 마지막이가 싶은데.
눈부처
나태주
내 눈 속에 네가 있고
네 눈 속에 내가 있다
호수가 산을 품고
산이 또 호수를 가르듯
네 맘속에 내가 살고
내 맘속에 네가 산다.
그리고
나태주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
얼굴도 보지 못하고
목소리도 듣지 못한다는 것
웃으며 이야기 나누지도 못하고
음식도 함께 먹을 수 없다는 것
악수도 하지 못하고
머리칼도 쓸어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리고
보고 싶은 마음도 조금씩 작아지고
생각까지도 흐려지고 말 것이라는 것
그것을 또 못내 슬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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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산문
보리밥으로서의 시
나태주
내가 처음 공주로 학교를 옮겨 교직 생활을 하던 때의 일이다. 아무래도 고향 서천에서 그대로 머물러 산다면 이도 w도 안 될 것만 같아서 일생일대 용단을 내려 직장을 옮긴 곳이 공주였다. 공주는 내가 고등학교를 다닌 도시로서 청소년 시절부터 공주에 와서 사는 것이 나름대로 하나의 소원이다시피 했던 곳이다.
옮긴 학교는 공주교대 부설초등학교, 1979년, 세 살짜리 아들아이와 갓 난 딸아이를 둔 이미 소른 셋 중년의 사내였다. 초등학교 선생이 되어 시 쓰는 일만 열심히 했지, 선생 노릇은 제대로 하지 않아 교직 성장이 늦었는데 그걸 좀 해보려고 노력하며 살던 때였다.
당시 공주에는 나의 은사님들이라든지 문단의 선배들이 많았다. 그분들을 도우면서 열심히 문단활동도 해나갔다. 언제든 앞장서는 일꾼이 필요한 세상, 그래서 앞장서는 일꾼이 되고자 했다. 자연스럽게 어른들과 어울리는 기회가 많았고 크고 작은 문단 행사에 심부름을 주로 맡았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다. 나보다 몇 해쯤 선배 되는 사람 하나다 나를 보더니 정색을 하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이봐 나 선생, 내가 보기로 나 선생은 아무래도 보리밥인데 왜 공주에 와서 쌀밥 행세를 하고 그래?”
그것은 강력한 비난이고 비아냥이고 인격 모독이었다. 나더러 보리밥이라고? 그런데 쌀밥 행세 한다고? 그런 뒤로 나는 오랫동안 보라바보가 쌀밥에 대하여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예전 우리가 어렸을 때는 미역국에 쌀밥 한 그릇 말아먹는 것이 최상의 음식이었다. 그만큼 쌀밥이 귀했고 그립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떤가? 사람들 사는 형편이 달라지고 음식도 가기능성이 되고 특성화되어 보리밥도 특별대우를 받는 세상이 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일부러라도 찾아 먹는 음식이 되었다.
내가 보리밥이라고? 보리밥이면 어떤가. 보리밥이라도 제대로 보리밥 노릇만 하면 되는 일이 아닌가. 그 뒤로 내 생각은 많이 달라졌다. 보리밥, 일단 좋다. 보리밥으로 열심히 사는 거다. 내가 언제 쌀밥 흉내 낸 적이 있었던가. 언제나 나는 마이너였고 촌놈이었고 지극히 작은 자였다. 소수파였다. 아니 나는 언제나 그냥 나였을 뿐이다. 그것으로 만족하고 보람을 갖는다.
시인들도 마찬가지다. 우선 자기가 보리인지 쌀인지 알아야 한다. 나아가 밀인지 기장인지 수수인지, 아니면 팥이나 콩인지 헤아려 알아야 한다. 그런 뒤에 자신의 본분에 충실해야 한다. 그러할 때 좋은 시가 써진다. 아니 자기다운 시가 나온다. 거짓 없는 시다. 진정성이 있는 시다. 그럴 때 감동이란 것도 더불어 보장될 것이라고 본다.
언제나 나의 시는 보리밥으로서의 시다. 그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쌀밥의 시가 휩쓰는 세상에 보리밥의 시로서 일관할 수 있었다는 건 그것 자체로서 한 성과이고 보람이고 배짱이라고 할 것이다. 나의 시사 조금이라도 성공했다면 그것은 보리밥의 시를 일관한 가운데 어떤 대목의 시가 남았기 때문일 거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시한테 진 빚
나태주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비치기를 원한다. 그래서 외향을 꾸미고 체면을 차리고 때로는 가면을 쓰기까지 한다. 나란 사람은 체구가 작고 성격이 소심하고 나약한 편이기 때문에 얼핏 다른 사람들에게 괜찮은 인상 내지는 별로 경계하지 않아도 좋은 사람으로 비칠 수 있다.
과연 나는 괜찮은 사람일까? 젊은 시절 나는 무조건 나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어쩌면 그건 스스로 당연한 일이도 미리 결정 내려진 일이었다. 그래서 일이 잘 안되거나 문제가 생기면 그것은 오로지 내 탓이 아니라 남의 잘못이라고만 핑계 삼는 경향이 있었다.
대개 체구가 왜소하고 심약한 사람이 갖는 성격적 특성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성격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랬을 것이다. 선생을 하면서도 사회생활이나 가정생활 가운데서도 늘 당당하지 못하고 의연하지 못했다. 조금은 비겁하기조차 했다.
타인이 대한 진정한 배려가 부족했고 독단적인 생각이나 행동이 많았다. 특히 가까운 사람, 친한 사람, 임의로운 사람에게 더욱 그랬다. 어려서는 외할머니한테 그랬고 성생을 하면서는 아이들한테 그랬고 결혼하고 나서는 아내나 자식들에게 그랬다. 참으로 후회스러운 일이고 부끄러운 일이다.
나만 아는 나, 내 안의 나는 결코 좋은 내가 아니고 당당한 내가 아니다. 정직한 나도 아니고 공평무사한 나도 아니다. 지극히 편견이 심하고 아집이 강하고 이기적인 인간이다. 요즘 와서 측은지심이니 케어니 그런 말을 자주 하지만 역시 그쪽의 마음이 제대된 인간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러한 나를 위하여 나는 어떠한 노력을 하면서 살았던가?
그것은 좋은 시 읽기다. 좋은 시를 골라 읽음으로 자신의 내면의 어둠을 밝히고 비뚤어진 부분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정말로 좋은 시를 읽으면 바른 마음이 생기고 어두운 마음이 조금씩 밝아지고 삶에 대한 욕구도 생긴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만약에 나에게 이러한 시 읽기마저 허락되지 않았다면 나는 어떤 인간이 되었을까?
지금보다 더욱 형편없는 인간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좋은 시 읽기는 내 마음의 평형을 잡는 일이이었고 내 마음을 청소하는 일이었고 스스로 바르게 살아보려는 출구를 찾는 일이기도 했다. 살아오면서 시한테 진 빚이 많다. 고마운 일이다.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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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세상 한 가운데로
이 책은 예상치 못한 책이다, 조금쯤 쉬었다가 책을 내고 싶었는데 또다시 행운을 얻어 시집을 내게 되었다. 70년대 이래 좋은 시의 동료 권달웅 형께서 신작 시집을 내면서 함께 시리즈로 낼 것을 권유해주어 책을 내게 되었다.
언제든 책을 낼 때는 행운이란 생각을 한다. 문제는 독자들이 어떻게 이 책을 받아줄까이다. 시집을 낼 때마다 그 모든 시들이 독자들한테 가서 자리 잡는 건 아니다. 그 가운데에 서 몇 편만이 독자들의 판정에 합격점을 얻는다.
그저 몇 편만이라도 가서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 여전하다. 그러기 위해서 나의 시는 좀 더 가벼워져야 하고 군더더기가 없어야 했다. 그리고 독자들의 마음 바탕과 좀 더 가까이 갔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주문이 제대로 이루어졌는지는 나도 모르는 일. 다만 감사한 마음으로 책 한 권을 세상 가운데로 보낼 뿐이다.
2015년 초여름
나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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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유독 그 ‘한들한들’이란 말이 오래 뒤에 남았다. 왜
나는 그 애처럼 한들한들 살지 못했을까? 몇 줄짜리
시를 쓰고서도 꼬박꼬박 이름 석 자, 끼워 넣어 세상에
날려 보내며 50년을 고역으로 버텼을까!
<한들한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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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태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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