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에관한 시모음 29)
지는 꽃의 말 /정연복
나는 이제 죽어요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져요
그런데 나는 죽지 않아요
누군가의 맘속에 살아 있을 테니까요
나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아요
평온한 마음으로
나의 죽음을 받아들여요
한번 피었으니
한번은 지는 것!
이 자연스러운 생명의 이치에
고분고분 따라요
꽃피는 난간 /김왕노
삶은 언제나 능소화꽃 끝까지 따라와도
결국 꽃 피지 못하는 눅눅한 난간이다
난간에 서면 생이 아찔해지고 너는 보이지 않는다
난간모서리를 잡고 어디쯤 있을까 가늠하면
도시의 끝 쪽이 보이고 도시로 찾아드는 황혼
하루를 바다에서 탕진해 버리고
서둘러 공원 숲으로 내려앉는 황금새 떼
벌써 안식을 짜며 자라 오르는 잠
그리움은 더 먼 쪽을 보기 위해
난간 밖으로 몸을 내밀고
난간에 선 상심한 마음을 위로하러
스스로 길을 닦고 북소리처럼 다가오는 불빛
옛날 함께 밝히던 꽃등 같은 네 편지
행간 속에 피어 함께 사위어 가던 촛불 같은
무거운 영혼일수록 난간으로 나서기 쉽지 않다는 것
삐걱이는 바닥이 두려운데 아차 기우뚱하며
벼랑 아래로 추락해 가는 생
추락하다 떠나온 난간을 바라보면
언제 네가 왔다 울고 간 흔적인가
환한 꽃 한 송이
이제는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아! 저 꽃피는 난간
꽃의 실험 /김정화
소리마디가 가득한 길턱에서
겨우 하나 받았다
5, 4, 3, 2,
1,
0.5
하얗게 덮어쓰고 앉은 침묵
아름다운 꿈길에 앉아 새가 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뽀글 파마 정거장에서 헤맸다
저마다 별로 가려고 몸을 싣고
지그시 눈 감고 별맞이 기차를 탄다
스치는 이 하루만을 본다
꽃을 여는 길
이곳이 그리운데 멀리 와 버렸다
뚜껑을 열자
사십 분짜리 꽃봄
하늘과 땅 사이, 꽃 덤불 핀다
꽃에서 바람 불고 /신대철
새를 부르고 열병과
광기를 부르는 꽃과 나무들
식물 원정 탐사대가
사막과 열대우림에서 납치한 희귀 식물들이
거대한 접시형 온실
인공 땅속에 뿌리 내린다.
나무 지지대에 기대어 조화 같은 꽃을 피운다.
배수펌프장 근처까지 걸어야
꽃에서 바람 불고
햇빛 쓸리고 흙내가 난다.
쐐기풀 옆 돌 그림자에는
우리에게서 점점 멀어진 풀들도 모여 있다.
조뱅이 질경이 개비름 지칭개 엉겅퀴 바랭이
쨍 머릿속을 울리는
얼음 갈라지는 소리도
그 여운 같은 우리도
돌과 풀 사이에 붙박인다, 들썩인다.
꽃 잠잔다 /김미선
쉿!
깨우지 마라
꽃 질라
자고 있는 꽃이 예쁘다.
건너편 닭들 새벽부터 일어나 소리치며 홰치는데
들은 채만채
아직 곤히 자고 있는 꽃이 참
예쁘다.
그때
엄마가 그랬지
밤에
꽃 잠 못 잔다고 가로등 켠 것 다 불 끄라고 소리쳤지.
잠을 푹 자야 활짝 꽃 필수 있다고.
그렇게 꽃은 피었다 지네 /우남정
저녁이 엎드리네
접시는 접시끼리 대접은 대접끼리 종지는 종지끼리
담았던 것을 비우고 같은 방향으로 순하게 눕네
서로의 물기가 말라갈 때까지
비눗방울 같은 진공이 잠시 머물다 가네
어떤 포옹은 위태로워라
포옹이 포옹을 물고 잘 빠지지 않네
수작업으로 구운 도자기 그릇들
허공을 담은 꽃들
둘레와 깊이가 미세하게 다른 것들은 잘 포개지지 않네
어긋난 여백은 깨지기 쉽네
사는 일은 생떼 같아 늘 설거지거리를 남긴다네
매일매일 새 그릇이 필요하듯
작거나 넓적하거나 둥글거나 길쭉하거나
그렇게 하루가 피었다 스러지네
덜거덕거리던 것들을 물소리에 씻어내네
돋아난 달이 창문에 걸려 잠을 말리는 동안
포개질 수 없는 것들은
따로 씻어
무명수건 위에 가만히 엎어놓아야 하네
꽃이 나의 계절을 찾아와 /윤성택
꽃이 나의 계절을 찾아와
한 시절 피다 간 것을 사랑이었다고 말한다면
사랑은, 제 계절을 위해
하나의 꽃에 한 시절 열렬했다는 거겠지요
그러나 사랑은 이별을 기다려 본 적 없고
이별은 사랑을 기약할 줄 모르니
우리는 각자의 색으로 피어 들녘을 견딜 뿐입니다
무시로 피었다 저무는 사람이
향기로 젖는 몇 날,
꽃은 가장 아름다웠던 때를
햇볕에 씻느라 색을 풀어놓았습니다
살면서 몇 번의 계절이 꽃을 앓을까 싶어
조심조심 밤을 걷습니다
시간이 깃들어
기꺼이 생기를 기록하는 시듦, 그 사이
누군가 한낮이 되었습니다
꽃이 나의 계절을 찾아와
한 시절 피다 간 것을 사랑이었다고 말한다면
꽃은, 열렬히
한 시절 햇볕을 내게 준 것입니다
그늘에서 피는 꽃 /김주완
그늘에서도 꽃이 핀다
수심의 빛깔이 배어든 푸른 미소가
파리하고 애절하게 핀다
눈을 피해서 숨어든 조용한 입속말
사랑처럼
속 깊어
저미는 아픔에서 배어나오는 색깔의
그늘에서 피는 꽃이 더 곱다
세상의 모든 꽃, 그 절절한 색깔에는
어디든 그늘이 잠복하고 있다
찔레꽃 그늘에서 하얀 눈물이 핀다
꽃이 피기 위해 /김새하
다른 숲에 살면서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본 적 있나요
아마 비가 내리는 이유일 겁니다
거기 서 있었죠 붉은 석류나무처럼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멀지만
눈에서 석류가 톡 터지는 향기가 났습니다
잡아 본 손도 안아 본 몸뚱이도 없었지요
석류는 두 번 세 번 새로 열렸지만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고
듣고 싶은 귀와 말하고 싶은 입이
의자 들고 벌서는 아이처럼 위태롭습니다
서먹한 눈물은 그네를 맬 수 없었습니다
고요한 석양이 흔들림 없이 나를 베고
시치미를 떼네요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해 내 몸을 소파에
소파에 던져놓은 물건에는 꽃이 피지 않아요
아프다면 살아있다는 것이겠지요
후회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됐습니다
오늘 비가 참 많이 옵니다
꽃 속의 꽃 /박소영
도라지꽃을 보다가
보랏빛 잎맥에 펼쳐진
여리고 고운
실핏줄 따라 안으로 드니
흰 빛의 꽃
다소곳이 피어 있음을 보았다
이렇게 작은 꽃
피어 있었구나
꽃 속에 든 꽃 보며
눈물처럼 흐르는 감정 따라
눈을 들어 보니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이, 구름이
강물 속의 고기들이
꽃 속의 꽃이었구나
찻잔 속의 차가
밥 그릇 안에 든 밥이
신발 안에 든 발이
엄마에게 아가가
생각이 꼬리를 물고 가다가
도라지꽃 속에서 본 우주
흰빛, 꽃 속의 꽃이었음을
모래에 젖는 꽃 /최세라
모레, 라고 너는 말했다
왜 찌푸리며
너를 따라가지 않으려고 모래 위에 앉는다
왜 하필 나일까
그날은 사람이 많아 외로웠지
두서없는 대화처럼 불쑥 씨가 튀어나오는
작은 복수박을 너에게 준다
흐릿한 연두색 몸피에 옅은 줄무늬
싸인펜으로 진하게 평행선을 그어 봤자
정수리와 배꼽에서 만나고 마는 선
모른 척 해 줘, 너는 말했다
모레에 모른 척 해 줘
조화를 쥐고 있었다
진짜 꽃보다 더 진짜 같아
킬리안 향수를 남김없이 부어 줬다
남김없이 복수박의 표면을 타고 흘렀다
왜 하필 나일까
킬리안 향수와 복수박의 관계처럼
이 아픔과 평행하고 싶어
주소도 없이 통증이 몸을 찾아왔다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는 것 같아
모래가 닿는 자리마다 물이 고였다
왜 하필
기다리지도 않고
모레의 모래가 지금 이 자리에 몰아쳤다
꽃의 웃음 /정연복
하얀 목련
환하게 웃는다
세상이 밝아온다
영혼이 순결해진다.
노란 호박꽃
함박웃음 짓는다
세상이 평안하다
인생살이 근심 사라진다.
꽃 따라
나도 웃는다
그냥
바보같이 웃는다.
꽃 /함민복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서
담장을 보았다
집 안과 밖의 경계인 담장에
화분이 있고
꽃의 전생과 내생 사이에 국화가 피었다
저 꽃은 왜 흙의 공중섬에 피어 있을까
해안가 철책에 초병의 귀로 매달린 돌처럼
도둑의 침입을 경보하기 위한 장치인가
내 것과 내 것 아님의 경계를 나눈 자가
행인들에게 시위하는 완곡한 깃발인가
집의 안과 밖의 꽃의 향기를 음향하려
건배하는 순간인가
눈물이 메말라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지 못하는 날
꽃철책이 시들고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리라
꽃의 권력 /고재종
꽃을 꽃이라고 가만 불러보면
눈앞에 이는
홍색 자색 연분홍 물결
꽃이 꽃이라서 가만 코에 대보면
물큰, 향기는 알 수도 없이 해독된다
꽃 속에 번개가 있고
번개는 영영
찰나의 황홀을 각인하는데
꽃핀 쳐녀들의 얼굴에서
오만 가지의 꽃들을 읽는 나의 난봉은
벌 나비가 먼저 알고
담 너머 대붕(大鵬)도 다 아는 일이어서
나는 이미 난 길들의 지도를 버리고
하릴없는 꽃길에서는
꽃의 권력을 따른다
기온의 변화에 피어나는 꽃 /황인숙
언제나 계절은 변하지 않고 찾아온다
그러나 꽃들은 계절에 상관없이
자신이 피어나는 시기를 모르고
헤매며 피어나는 꽃들이 많다
봄에 피는 꽃이 가을에도 피고
겨울에도 피는 곷들
계절이 바뀌어 지나가는 길에
다른 계절에 피어나는 꽃을 보는데도
그대로의 꽃이 아름답다
우리의 삶은 계절이 없이 지나가고 있다
꽃이 핀다 /신성호
꽃이 핀다
향기로운 꽃이 핀다
나비도 기뻐하고
꿀벌들도 신이 났다
이꽃도 다 좋지만
저꽃 향기따라 간다
초목은 푸르르고
꽃이피니 기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