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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법 1장 47절 “곡하는 것이 옳습니까” 하는 종도들의 궁금증을 상제께서 풀어주시고자 말씀하시기를 “원통하게 죽은 신에게 우는 것이 가하나 그렇지 않게 죽은 신에게는 곡하지 않는 것이 옳으니라” 하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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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의 장례문화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 있다......
성사께서는 “원통하게 죽은 신에게 우는 것이 가하나 그렇지 않게 죽은 신에게는 곡하지 않는 것이 옳으니라” 하셨는데, 여기서 곡은 한자로 哭 이라 쓴다.
(1) 성사께서 인용하신 한시
김병연(金炳淵)의 금강산시(金剛山詩)
『전경』 행록 2장 6절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첫구의 습(拾)은 줍다, 오르다, 올라가다 등의 뜻이 있다. 따라서 보습(步拾)은 “걸어서 올라가다”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보습이라는 관용어는 없다. 다만 “길을 걷고 물을 건너다”는 뜻의 보섭(步涉)이 전할 따름이다. 따라서 습(拾)은 섭(涉)과 통용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해석하더라도 위 한시의 1구와 2구의 뜻이 선뜻 통하지 않는다. 금강산의 경치를 걸어서 구경하니 푸른 산이 뼈만 남는다는 의미가 불분명하다. 그리고 3구와 4구도 맥락이 통하지 않는다. 금강산의 경치를 배경으로 삼은 나귀를 탄 손님이 흥이 없이 주저할 따름이라고 노래하는데, 나귀를 타고 있는 객과 흥취가 없이 주저한다는 행위는 그다지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분명 대순진리적 관점에서의 해석이 필요하다고 보여진다.
이 시와 유사한 김삿갓이 지은 금강산(金剛山)의 경치를 읊은 다음과 같은 시가 전한다. 특별한 제목은 전하지 않는다.04
이 시를 해석하는 가장 큰 실마리는 기경객(騎鯨客)이다. 기경객의 어원과 뜻이 구체적으로 밝혀지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기경객(騎鯨客)은 중국 당대(唐代)의 유명한 시인 이백(李白, 701~762)을 가리킨다. 이백은 자신을 해상기경객(海上騎鯨客)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이백이 술에 취한 채 채석강(采石江)에서 노닐다가 물속의 달을 잡으려다 빠져 죽은 뒤 고래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속전(俗傳)이 있는데, 훗날 시와 술을 마음껏 즐기며 호방하게 노니는 문인(文人)을 비유하는 표현으로 기경(騎鯨)이 쓰이게 되었다. 이는 다음과 같은 기록으로 입증된다. “이태백(李太白)이 최종지(崔宗之)와 함께 채석에서 금릉(金陵)까지 달밤에 배를 타고 갈 적에 시와 술을 즐기면서 방약무인(傍若無人)하게 노닐었는데, 뒷사람들이 ‘고래를 타고 가는 이백을 만난다면 (若逢李白騎鯨魚)’이라는 두보(杜甫)의 시구를 빌미로 해서 이백이 술에 만취한 채 채석강에 비친 달을 붙잡으려다 빠져 죽었다고 믿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는 기록이 『당재자전(唐才子傳)』, [이백(李白)]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사와 관련하여 북송(北宋) 마존(馬存)의 시 [연사정(燕思亭)]에 “이백이 고래를 타고 하늘로 날아 올라가니(李白騎鯨飛上天), 강남 땅 풍월이 한가한지 여러 해라(江南風月閑多年)”라는 구절이 『송예보집(宋藝圃集)』 권 13에도 있다. 그리고 매성유(梅聖兪, 1002~1060)는05 [채석강증곽공보(采石江贈郭公甫)]라는 시에서 이백의 죽음을 두고 “응당 굶주린 교룡(蛟龍)의 입에 떨어지지 않고(不應暴落飢蛟涎), 고래를 타고 푸른 하늘로 올라갔으리(便當騎鯨上靑天)”라고 노래했다.
원래 이 시의 첫머리에 나오는 약사(若捨)는 『전경』의 보습(步拾)과는 다르다. 두 번째 구절의 ‘청산개골여’의 의미와 통하는 구절은 김삿갓의 시에 나오는 약사다. 금강산의 수려한 경치를 제외한다면 푸른 산은 앙상한 뼈대만 남게 될 것이라는 한탄으로 앞의 두 구는 해석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경』처럼 보습(步拾)으로 시작하면 이어지는 ‘청산개골여’의 의미는 기존의 해석과는 다르게 접근해야 뜻이 통할 것이다. 그리고 3구와 4구는 “고래를 탄 손님”, 즉 엄청난 시재(詩才)를 지닌 이백(李白)과 같은 시인이라 하더라도 금강산의 아름다운 풍경이 없어진 뼈만 남은 산 앞에서는 시흥(詩興)이 돋지 않은 채 다만 주저하게 될 뿐이라고 해석해야 자연스럽다. 김삿갓이 지은 [금강산경(金剛山景)]이란 제목의 시가 있고 이 시는 3구가 ‘응지기경객(應知騎鯨客)’이 아니라 ‘기후기려객(其後騎驢客)’이라는 주장도 있다.06 그러나 이 시의 제목과 전체 내용이 정확히 어떠한 문헌을 근거로 하는지를 밝히지 않아 필자가 이에 대해서 확인하지는 못하였다. 만약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3구 ‘기후기려객’이 4구와 의미가 통하지 않는데 과연 천재적 시인인 김삿갓의 실제 작품일지 의문이다. 혹 전승 과정에서 경(鯨)이 려(騎)로 잘못 알려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전경』의 ‘보습금강경(步拾金剛景)’으로 시작되는 시는 성사께서 김삿갓의 시를 활용하여 새로운 시를 구성하신 것이고 따라서 원래 시가 가진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담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대순진리에 입각한 해석이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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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설명글을 읽어보면, .....
성사께서는 김삿갓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시를 인용하셨는데, 인용한 시에서 글자를 몇 개 바꿈으로써 그 의미하는 바가 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
성사께서 인용하신 시를 탐구할 때는 그 차이점이 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남원(南原) 양진사(楊進士)의 만사> 도 마찬가지다.
(2) <남원(南原) 양진사(楊進士)의 만사>
김병학(金炳學)이 스승 양석룡(楊錫龍)을 위해 지은 만시(輓詩)
『전경』 권지 2장 27절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성사에 관한 최초의 언행록인 『증산천사공사기(甑山天師公事記)』(1926) 139쪽에는 “또다시 남원(南原) 양진사(梁進士)의 자만사(自輓詞)를 외어주시니 아래와 같더라. 시중이백주중령(詩中李白酒中伶), 일거청산진적요(一去靑山盡寂寥), 우유강남양진사(又有江南梁進士), 자고방초우소소(苜苦芳草雨蕭蕭)”라고 적혀 있다. 마지막 구절의 자고(苜苦)는 의미에 닿지 않으므로 오자(誤字)로 보인다. 어쨌든 애초의 기록은 양씨(梁氏) 성을 가진 진사 벼슬을 했던 인물이 자신의 죽음에 이르러 직접 지은 애도시라고 주장되었다.
또한 『대순전경(大巡典經)』 초판(1929)에는 양진사(楊進士)의 자만시(自輓詩)로 기록되었고, 자고(鷓鴣)로 바로잡아져 있다. 『대순전경』 2판(1933)은 한글판으로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대순전경』 3판(1947)에는 ‘남원(南原) 양봉래(楊蓬萊)의 자만시’라고 적혀 있다. 결국 『대순전경』 의 편찬자는 이 시를 “남원에 살던 양봉래의 자만시”라고 주장한 것이다.
봉래(蓬萊)라는 호를 가진 인물로는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이 유명하다. 그러나 양사언의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남원에 살았던 적도 없던 인물이다. 그리고 양사언의 문집에는 위의 시가 보이지 않는다. 이는 『증산천사공사기(甑山天師公事記)』나 『대순전경(大巡典經)』 의 저술 또는 편찬자가 정확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추측으로 기록하였음을 보여준다.
이에 비해 『전경』은 이 시를 양진사의 만사(輓詞)라고 알려주어 정확성을 보인다. 김병학(金炳學, 1821~1879)이 스승인 진사(進士) 양석룡(楊錫龍, 1800~1868)을 추모하며 지은 [만양상사(輓楊上舍)]라는 시가 다음과 같이 전해져 이를 증명한다.07 만사(輓詞)는 죽은 이를 슬퍼하여 지은 글이며 상사(上舍)는 진사(進士)와 같은 말이다.
이 시가 전해지는 문헌인 『남원양씨대동보』는 위의 시를 “시 가운데의 이태백과 술 속의 광대(도연명)도 청산을 한번 떠나니 고요했는데, 또 호남의 양진사가 가니, 자고 방초도 쓸쓸하구나”라고 해석하였다.08 1구에 나타난 인물이 유령인지 도연명인지는 기록이 엇갈린다. 족손(族孫) 양병익(楊秉益)이 찬한 양석룡의 행장에는 1구가 “시중이백주중도(詩中李白酒中陶)”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뜻에 큰 차이가 없지만 『전경』에는 3구의 곡(哭)이 유(有)로 적혀 있기도 하다.
1구에 나오는 이백(李白, 701~762)은 중국 당나라 때 두보와 더불어 최고의 유명 시인이다. 그리고 유령(劉伶, 225?~280?)은 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와 서진(西晉)의 시인으로 자는 백륜(伯倫)이며, 죽림칠현의 한 사람이다. 평소 술을 좋아한 나머지 유령호주(劉伶好酒)라는 말까지 생길 정도였다. 만약 첫구가 령(伶)이 아니라 도(陶)라면 도연명(陶淵明, 365~427)09을 가리키는 말이다.
김병학이 지은 만사(輓詞)의 주인공인 양석룡(楊錫龍)은 조선 후기의 유학자로 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 성내면(星內面) 옥제(玉提)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이 남원(南原)으로 양지복(楊志馥)의 장남이다. 그는 학문과 문장이 뛰어났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후학양성에 전념하였다. 문인으로 좌찬성(左贊成) 김병기(金炳冀),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김병학(金炳學), 예조판서(禮曹判書) 김병필(金炳弼), 이조판서(吏曹判書) 신석희(申錫禧) 등이 있다. 양석룡은 제자들의 권유로 그의 나이 59세 되던 철종 9년(185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2등 22위로 합격하여 서울에 올라와 성균관에서 장의(掌議)로 뽑혀 수학하였다. 몇 년 뒤 양석룡은 다시 한강 이남에 있는 고향에 내려와 머물다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자녀로 3남 1녀를 두었으며, 그의 묘는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옥제리에 있다.
시의 작자인 김병학은 순조 21년(1821)에 태어나 고종 16년(1879)에 세상을 떠났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경교(景敎), 호는 영초(潁樵)다. 김이직(金履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인순(金麟淳)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김수근(金洙根)이며, 어머니는 조진택(趙鎭宅)의 딸이다. 그리고 철종(哲宗)의 장인인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 김문근(金汶根)의 조카이다. 김준근(金浚根)에게 입양되었다. 김병학은 철종 4년(1853) 현감으로 정시 문과의 병과로 급제하여, 장령(掌令), 사간이 되었다. 곧이어 그는 안동 김씨의 세도를 배경으로 대사헌,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고종 즉위 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제거할 때도, 고종 즉위에 은밀히 노력한 공로와 딸을 며느리로 줄 것을 약속한 평소의 친분 때문에 고종 1년(1864)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김병학은 이듬해 공조판서가 되었다가 좌찬성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이 해 실록총재관으로 『철종실록(哲宗實錄)』을 편찬하고 조두순(趙斗淳), 이유원(李裕元) 등과 함께 찬집소총재관으로 『대전회통(大典會通)』을 완성하였다. 또 그는 보수적인 척화론자로서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의 탄압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또한 병인양요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흥선대원군에 권고해 당시 척화론을 주장하던 이항로(李恒老)를 승정원동부승지로 등용하도록 천거하였다. 영의정을 거쳐 1875년 영돈녕부사가 된 뒤 조일수호조약(朝日修好條約)의 체결에 극렬하게 반대하였다.
고종 16년(1879) 김병학은 사망하기 직전에도 판부사 홍순목(洪淳穆), 한계원(韓啓源), 영의정 이최응(李最應), 좌의정 김병국(金炳國) 등과 함께 연차(聯箚: 연맹으로 왕에게 쓴 건의문)를 올려 일본이 요구하는 인천, 원산의 개항 가운데 인천만은 서울의 백 리 안에 있으므로 결코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김병학은 자신의 스승인 양석룡을 이백, 유령, 도연명 등과 같은 사람으로 여기고 존경했고 스승이 별세하자 그를 추모하고 기리는 마음으로 이 만사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성사께서 1868년에 지어진 이 시를 언급하신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시에 등장하는 이백과 죽림칠현인 유령, 도연명 등을 통해 그 뜻을 조금이나마 추측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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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도 성사께서는 김병학의 시에서 글자 몇 개를 바꾸었는데 차이점만 이야기하면 아래와 같다.
김병학의 시: 又哭湖南楊上舍
성사의 시: 又有江南楊進士
바뀌어진 부분은 2가지다.
1) 哭 이 有 로 바뀌었고,
2) 上舍 가 進士 로 바뀌었다. .....
1)의 이유는 성사께서 아래와 같이 설명해주셨다.
(아래)
교법 1장 47절 “곡하는 것이 옳습니까” 하는 종도들의 궁금증을 상제께서 풀어주시고자 말씀하시기를 “원통하게 죽은 신에게 우는 것이 가하나 그렇지 않게 죽은 신에게는 곡하지 않는 것이 옳으니라” 하셨도다.
죽어서 잘 된 경우도 성사께서 소개해주셨으니 참고하면 될 듯 하다.
(참고)
교법 1장 2절 우리의 일은 남을 잘 되게 하는 공부이니라. 남이 잘 되고 남은 것만 차지하여도 되나니 전 명숙이 거사할 때에 상놈을 양반으로 만들고 천인(賤人)을 귀하게 만들어 주려는 마음을 두었으므로 죽어서 잘 되어 조선 명부가 되었느니라.
2)의 이유는 알고 있으나,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이야기하려니 손가락이 좀 아플 것 같고, 또 해봐야 영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냥 아쉬움만 남겨놓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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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https://www.youtube.com/watch?v=Gk3xv38do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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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와 우리가 공부하는 道는 밀접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남을 잘되게 하고자 하는 마음만 가져도 잘되어서
조선명부가 된 전명숙!
명부공사가 마무리 되면 세상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이 된다고 하시는데~~
상제님 공사중에 이보다 더 크고 중요한 공사가 또 있었던가?
수도들 하시면서 뭣이 중한디?
욕통만 가득해서
의통이니 운수니 도통이니....
내손에 쥐고파서 안달들이 나시겠지만.
똥물 천지에 독야청청하면 어디에 쓰이겠나?
절에 있는 명부전에 가면
주불로 지장보살이 있고
극락전에는 주불로 아미불(무량수불)이 모셔져 있다.
현무경에도 南無阿彌他佛이라 써놓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