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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 속에 나오는 ‘선녀와 나무꾼’이 실제로 지리산에 살고 있다. 사실이다. 날마다 그들의 삶을 흠모하며 사는 이웃집 사람으로서 언제든지 증명할 수 있다. 수취인 이름을 그냥 ‘선녀와 나무꾼’이라 쓴 뒤 편지를 보낸다면 며칠 안에 반드시 답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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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지리산 ‘선녀와 나무꾼’으로 통하는 신도웅·박경애 부부가 귀농 16년차를 맞아 자신들이 직접 조성한 집앞 뜰에서 포즈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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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경남 하동군 화개면 덕은리 중기마을. 섬진강변 19번국도의 벚꽃길에서 부자슈퍼를 지나 골목길을 50m쯤 올라가면 빨간 우체통과 대문, 그리고 1톤 트럭에 ‘선녀와 나무꾼’이라는 글씨가 또렷하게 새겨진 집이 있다.
골목길 왼쪽에는 ‘피아노를 치는 허수아비’가 눈길을 끄는 안채가 있고, 오른쪽 두 개의 대문을 들어서면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사계절 아름다운 꽃밭의 정원이 나오는데, 그곳에는 다용도 주방과 마치 몽골의 겔 같은 팔각정의 작업실, 그리고 게스트하우스 등이 있다. 이 모두 나무꾼과 선녀가 오랜 세월 동안 재활용과 폐자재로 직접 만든 것이다. 안채는 소 외양간을 개조한 것이고, 아래채는 꽃사슴 축사를 개조한 것이다.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하나씩 짓다 보니 무려 건물이 6동이나 된다. 얼핏 둘러봐도 주인장의 이력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건물과 정원 곳곳에는 세월과 땀의 흔적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이 마을을 처음 지나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호기심에 안팎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을 정도다.
이 집이 바로 나무꾼 신도웅(59), 선녀 박경애(53)씨의 집이다. 멋진 카우보이모자를 쓰지 않았을 때의 나무꾼이나 외출할 때의 선글라스를 벗은 선녀의 모습은 영락없는 시골의 아저씨 아줌마다. 반바지에 슬리퍼를 끌고 마을의 집집마다 수도 검침하러 다니는 모습이나 산중의 고사리를 뜯거나 호미를 들고 텃밭과 꽃밭을 가꾸는 모습은 촌부의 모습 그대로다.
그러나 알고 보면 요즘 말로 스펙이 만만치 않은 인물들이다. 나무꾼 신도웅씨는 서울대 음대 작곡과를 나왔고, 선녀 박경애씨는 이화여대 무용과를 졸업한 교사 출신 엘리트 예술가들이다. 신도웅씨의 친형은 ‘재즈피아노의 대부’로 널리 알려진 신관웅씨이며, 그의 절친한 음악계 동료로는 소리꾼 장사익을 발굴한 피아니스트 임창동씨 등이 있다.
이들 부부가 귀농한 지는 벌써 16년이 지났다. 1998년에 입산한 나보다 먼저 지리산에 들어왔으며, 당시는 귀농 혹은 귀촌 바람이 불기 전이었다. 일찌감치 도시 생활을 접고 선녀가 살던 하늘나라가 아니라 곳곳에 선녀탕이 있는 지리산에 안착한 것이다. 말하자면 도피의 승천이 아니라 행복의 연착륙이었던 것이다.
서울대·이화여대 출신 엘리트
이 부부의 러브스토리는 아주 오래 전 서울의 진선여고 교사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총각 음악선생 바로 옆자리에 하필이면 새로운 처녀 무용선생이 앉으면서 운명은 시작됐다. 순진한 나무꾼의 가슴은 마구 뛰기 시작했지만 제대로 표현을 못해 어쩔 줄 모르는 날들이 이어졌다. 당시의 여섯 살 차이는 요즘과 달리 꽤 큰 것이었다. 막상 연애를 시작하고도 공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남몰래 하는 사랑도 결국엔 드러나게 돼있다. 어찌 그 간절한 눈빛과 몸짓마저 감출 수 있겠는가. 노총각과 처녀 선생의 사랑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학생들의 날카로운 눈썰미와 교사들의 구설수를 피해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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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나무꾼 신도웅씨가 직접 만든 게스트하우스 전경.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지켜보는 가운데 각종 꽃들이 만발해 있는 아름다운 게스트하우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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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그 당시 사립학교는 국공립학교와 달리 부부교사를 인정하지 않았다. 나무꾼과 선녀의 은밀한 연애는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당당하게 연애를 하고 결혼하려면 한 사람이라도 학교를 그만 두거나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나무꾼이 먼저 결단을 내려 계원예고로 자리를 옮겼다.
신혼의 교사 부부는 눈치 볼 것 없이 주말이나 방학이면 전국 어디든 마음껏 여행을 다녔다. 전국 곳곳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였다. 산과 바다며 강변에 텐트를 치고 꿈같은 날들을 지내다 보니 어느새 알콩달콩 전설처럼 아들과 딸, 두 아이까지 얻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다 그만 자연에 중독된 것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무꾼 신도웅씨가 귀농을 꿈꾸기 시작했다. 원래 나무꾼이 충남 서산의 농촌 출신이기도 했지만, 날이 갈수록 도시보다는 시골이 더 좋아졌다. 음악예술계에 있어서도 치열한 서울의 무한경쟁이 싫었고 답답했다. 정년퇴직을 한 뒤 시골로 내려가 전원생활을 하자던 신혼 초의 약속은 앞당겨져 현실화하기 시작했다. 나이 마흔 살을 조금 넘긴 나무꾼이 “함께 갈 수 없다면 내가 먼저 지리산으로 내려가겠다”고 선언했다.
나무꾼 신도웅씨는 서울을 떠나올 때의 심경을 이렇게 말했다.
“서울에서의 삶이 불행하지는 않았지만, 오랫동안 귀농의 꿈을 꿔 왔지요. 음악계에 있어서도 프로는 늘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가르치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순간 내가 행복과는 자꾸 멀어지는 삶을 살고 있다는 자괴감이 들더군요.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음악인데, 프로로서의 삶은 언제나 앞만 보고 달려가야 하잖아요? 콩쿠르도 1등만 기억되고 나머지는 전부 잊혀지잖아요. 그러니 도대체 만족을 느낄 수 없었지요.
나는 그것이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언제나 남들과 경쟁하면서 완벽을 추구하던 조바심을 이제 그만 내려놓고 싶었지요. 물론 나는 실패자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마추어로서의 음악 인생이 어쩌면 더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그것도 자연과 더불어 농사도 짓고 꽃사슴도 기르면서 죽을 때까지 음악을 즐기고 싶었지요.”
퇴직하면 가자던 귀농, 마흔 넘어 단행
일단 빈집을 구해 3년간 500만 원에 살기로 하고 덜컥 계약을 했다. 하지만 막상 살아보려니 이 빈집을 수리하는 비용이 더 많이 들 것 같았다. 이미 마을 뒷산의 임야도 사고, 마을 안의 축사 등도 사두었기에 과감하게 이 집을 포기했다. 초기의 시행착오로 산청에서의 정착금과 더불어 계약금 500만 원만 날린 셈이 되었다. 그 대신 소를 키우던 외양간을 고치면 훌륭한 집이 될 것 같았다. 곧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되도록 있는 그대로를 살리며 폐자재나 재활용품들을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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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선녀와 나무꾼이 살고 있는 몽골식 겔 모양의 집과 정원. 이곳에서 그들은 인생 3막 세 번째 신혼 생활을 만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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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짓는 일을 해보니 정말로 재미있더라구요. 힘들기는 했지만 천천히 조금씩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내가 직접 방바닥이며 벽과 지붕을 하나씩 만들어가는 게 엄청난 행복감을 안겨줬습니다. 음악 전문인 내게 있어 집짓기는 아마추어일 뿐이었죠. 정말로 날마다 즐기면서 아내와 내가 살아갈 둥지를 하나씩 지었습니다. 서울에서 계속 살았더라면 절대로 이런 행복감을 맛보지 못했을 거예요. 아마 지금쯤은 스트레스로 벌써 죽었거나 음악적 폐인이 되었을지도 모르지요.”
신도웅씨는 일단 살 집을 완성하자 나무꾼답게 꿈에도 그리던 꽃사슴을 키우기 시작했다. 물론 농사도 시작했지만 이보다는 일단 꽃사슴을 키우면 귀농자로서의 생활비 마련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시작했을 때는 이미 사슴사육이 막차를 타던 시점이었다. 또 한 번의 실패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새 꽃사슴이 70마리로 불어나는데 팔리지는 않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비싼 사료도 다 떨어져 가는데 굶고 있는 꽃사슴을 바라보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날마다 새벽이면 1톤 트럭을 몰고 섬진강변에 나가 하루 종일 풀을 베었다. 강변 모래밭에 차바퀴가 빠지는가 하면 하루 종일 낫질을 하다 보니 허리가 끊어질 듯했다. 그래도 꽃사슴의 맑은 눈망울을 생각하면 잠시도 쉴 수 없었다.
“돈은 안 되지만, 이른 새벽의 섬진강 물안개는 또 얼마나 아름다웠는지요. 풀을 베러 나가는 새벽이 꿈만 같았습니다. 고생은 많았지만 내가 꿈꾸던 음악세계가 비로소 내게로 다가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요. 다시 피아노를 치고 작곡도 하며 서울에서의 1등을 위한 음악과 결별하고 지리산과 섬진강의 행복한 음악을 만나기 시작했지요. 마음이 아팠지만 결국 꽃사슴들을 헐값에 팔아넘기고, 꽃사슴을 키우던 축사 자리에 주방이 딸린 집을 짓고 그 옆에 몽골의 겔 모양을 본 따 나의 음악 작업실을 직접 지었습니다. 지금도 피아노를 치거나 아코디언을 연주하다 보면 문득 꽃사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