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문경 공덕산(公德山, 913m)에
대승사(大乘寺)가 있으며 부속 암자로 윤필암(潤筆庵)과 묘적암(妙寂庵)이 있다. 대승사가 많은 대덕 고승들이 거쳐간 천년 사찰로도 유명하지만
윤필암과 묘적암은 기도 수행처로 최고의 명당 자리이면서 또한 그곳에 얽힌 스님들의 시절 인연 이야기는 불가(佛家)와 인연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회자 될 만큼 널리 알려져 있다. 폭염은
지나 갔으나 아직 여름의 뜨거움이 남아 있는 시절, 땀나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산길을 걸으며 오래된
윤필암과 묘적암을 찾아가 본다.
삼국유사 설화에 의하면 진평왕 9년(587년), 붉은 비단에 싸인 사면석불상(四面石佛像)이 하늘에서 떨어졌고 왕이 가서 예를 갖춰 경배하고 그 바위 곁에 절을 하나 지으니 그 절이 대승사(大乘寺)라고 했다. 후세
사람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바위를 사불암(四佛巖)이라 불렀고
이런 연유로 지금은 공덕산보다 사불산으로 많이 불린다. 대승사에서 윤필암으로 가는 산 중턱에 서 있는
사불암에 오르면 사방이 탁트인 전망으로 가슴이 시원해진다. 안내문에 의하면 석가여래, 아미타여래, 약사여래, 미륵여래가
사면에 새겨져 있는데 지금은 풍화에 많이 지워졌다.
1,400 여 년의 창건 역사를 자랑하는 문경의 대승사도 여느 사찰처럼
여러 차례 전란을 겪으며 중건 재건을 반복하며 오늘에 이르러 고색창연한 맛은 없으나 경내에 오르면 여느 사찰 보다 강한 선기(禪氣)로 시간이 멎은 듯 한 적막함을 느낀다. 적막함 속에 묘한 기운으로 꽉 찬 듯한 느낌은 아마도 터의 기가 강해서 그런지 모르겠다. 일주문을 지나면 백련당(白蓮堂) 회랑이
대궐의 성곽처럼 웅장하게 펼쳐진다. 대웅전과 나란히 서 있는 대승선원(大乘禪院)은 선원의 엄격한 선풍을 그대로 보여준다. 조계종 초대 총무원장과
2대 종정을 지낸 청담 스님과 7대 종정을 지낸 성철 스님이
젊은 시절 함께 수행 정진한 사찰이기도하다.
윤필암은 대승사에서 산길로 1km 정도 떨어져 있다.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고려 말(1380년)에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입적하자 승려 각관이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사찰을 짓고 목은 이색(牧隱 李穡)에게 기문(記文)을 요청하였는데
이색은 승려가 모아온 기문의 집필료를 받지 않고 사찰 건립 비용으로 충당케하여 윤필암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윤필은 원래 글을 지어주는 대가로 받는 일종의 사례금으로써 집필료를 말한다. 지금은 비구니들의
수행공간처이다.
1980년대 어느 건설회사의 시주로 현대식 건물로 새로 지어진 윤필암은
비구니선원이 있는 기도도량으로 일반인들 출입이 상당히 제한적이다. 다만 사불전(四佛殿)만이 자유롭게 참배를 할 수 있는데 사불전은 적멸보궁처럼 불상을
모시지 않고 있다. 정면의 유리창을 통해 사불산 자락에 있는 사면석불을 불상으로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비구니 사찰이라 그런가 정갈하다는 느낌, 아늑하다는 느낌이 드는
이 윤필암을 가장 아름다운 암자로 꼽는 사람들이 많다. 이 윤필암에는 청담(靑潭) 스님과 묘엄(妙嚴) 스님 두 부녀간의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청담스님(1902-1971)은 경남 진주 출생이다. 25세에 출가 할 당시 이미 결혼하여 딸이 하나 있었다. 진주에
법회 참석차 내려 갔다가 법회장으로 찾아온 노모의 간곡한 ‘대를 이어 달라’는 요청을 끝내 뿌리치지 못하고 ‘지옥에 갈 각오로 하룻밤 파계’를 선택한다. 열 달 후 오대산 상원사에 머물던 청담은 ‘딸을 분만 했다’는 전보를 받는다.
죽음을 선택하고자 했으나 도반들의 만류로 뜻을 접고 100일 간 참회 기도를 하고 10년 간 맨발의 고행을 했다고 한다. 이 때 태어난 딸의 이름이 ‘인순’이다.
청담과 성철이
문경 대승사에서 함께 도반으로 수행을 하던 시절 어느날 어린 소녀 하나가 청담을 찾아 왔다. 일제의
정신대 징집을 피해 아버지가 있는 대승사로 피신을 온 14살의 인순이였다. 청담의 부탁으로 성철은 인순이의 멘토가
되어 사제의 인연을 맺는다. 성철은 인순이를 대승사 산 넘어에 있는 윤필암에서 공부하게 하고 불교는
물론 역사 과학 인문학 전반에 걸친 강도 높은 교육을 시킨다. 인순이는 윤필암의 월혜스님을 은사(恩師)로 성철스님을 계사(戒師)로 사미니계를 수계한다. 성철스님은 사미니계와 함께 묘엄(妙嚴)이라는 법명을 지어 주고 이후 인순이는 묘엄이라는 스님으로 살아간다
14살 어린 묘엄이 윤필암에서 산길로 1km 떨어진 큰 절로 공부하러 수없이 다녔던 산길을 오늘 걷는다. 아버지가
효를 따르고자 저지른 단 한번의 파계로 이 세상에 나온 묘엄은 이 산길을 오가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묘엄은
근현대 한국 불교 최고의 선지식인이라 할만한 향곡, 운허, 경봉, 동산, 자운 스님 등의 가르침을 받게 된다. 특히 자운스님으로부터 律을 전수 받고 동학사의 경봉스님, 대강백
운허스님으로부터 經을 배워 傳講을 받음으로 해서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강사로 성장하게 된다.
대덕고승들로부터 선(禪), 계(戒), 율(律), 경(經)을 배운 묘엄은
수원 광교산 봉녕사에서 40년 간 비구니 승가대학장을 역임하며 한국 불교 비구니의 큰 어머니가 되고
또한 비구니 금강율원(金剛律院)의 율주(律主)로써 이 시대 비구니 대강백(大講伯)이자 청정율사 큰 어른이 되었다. 조계종에서는 그녀에게 명사(明師)라는 품계를 내렸다. 명사는
비구니에게 내리는 선사(禪師)로는 최고의 품계이다. 대선사(大禪師)와 같은
품계다.
파계를 자처한 청담도 평생 참회의 길을 걸었지만 속가의 홀어머니 또한 청담이나 며느님한테 죄를 많이 지었다고
자책을 하였다 한다. 참회 끝에 노모도 자식인 청담의 안내를 받아 김천 직지사에서 性仁이란 법명을 받아
출가를 했다고 한다. 불도(佛道)의 지계(持戒)와 파계(破戒), 공존할 수 없는 인연이지만 청담의 파계 역시 대오불구어소절(大悟不拘於小節/ 큰 깨달음은 작은 절개에 구애 받지 않는다) 하다고 보아줌이 어떠할까. 원효대사, 진묵대사, 경허선사 그들을 파계승이라 하지 않는 것 처럼…
윤필암에서 0.5km 거리에 있는 묘적암은 힘들여 올라 가보니 포크레인을
동원해 한창 공사중이다. 평소에는 비구 승려 한 분이 기도 수행하는 공간으로 일반인들의 출입을 제한하는
편이다. 암자 툇마루에 앉으면 사불암이 지척에 보이는 누가 보아도 기도처로써는 명당 자리임을 알 수
있다. ‘묘적암(妙寂庵)’이라는
현판 글씨도 멋지지만 끝 벽에 걸려있는 ‘一默如雷(일묵여뢰)’라는 편액 글씨가 눈길을 끈다. 알아보니 진주 서예가 은초(隱樵) 정명수 선생의 글씨로 내용은 유마경의 불이법문 중에 나오는
내용이다. 유마거사가 말로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법)를 침묵으로 대신 함으로써 우뢰 같은 깨달음을 주었다는 선가(禪家)의 화두(話頭)같은 내용이다. 침묵은 어려운 말이다. 할 말이 없어 침묵하나 너무 할 말이 많아도
침묵하며, 진실을 위해 침묵하나 진실을 덮을 때도 침묵하며, 신의를
지키기 위해 침묵하나 불의를 외면하기 위해 침묵하기도 하며, 아무것도 아는게 없어 침묵하지만 참으로
깨달은 경지이기에 침묵하기도 한다. 신妙하고 寂적한 庵子에 들려 마음 공부 한 자락 얻어 간다.
묘적암은 신라 말기에 부설거사에 의해 창건 되었다는 정도로 알려진 암자이나 나옹선사(懶翁禪師)가 출가하여 수행한 사찰로 유명하다. 나옹선사는 태고국사 보우와 함께 고려 말 쌍벽을 이룬 최고의 선승이다. 두
분 모두 원나라에 유학하여 임제종을 정식으로 공부하고 돌아온 분들로 그들의 천재성은 중국의 황제도 인정을 해 줄 정도 였다. 태조 이성계의 싸부 무학대사가 나옹선사의 제자다. 친구의 갑작스런
죽음을 보고 공덕산 묘적암으로 출가한 나옹선사는 중국에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공민왕 왕사를 지냈으며 56세로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할 때까지 침체된 고려말 불교를 쇄신하고 선불교의 선풍을 고양시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인 위대한 고승으로 평가 받고 있다.
입적은 신륵사에서 하였으나 그의 사리를 봉안한 부도는 위에서 언급한대로 윤필암에 세워 졌는데 정확한 위치는 묘적암
가까이 있는 반야 약수터 위 숲 속에 있다. 속가(俗家)의 표현대로 하면 고향을 떠나 한 평생 세상을 주유하다 죽어서는 그 고향에 묻힘과 같다. 신묘하고 적적한 공덕산 산 속에서 팔 백 성상을 묵언 수행하며 참선 중인 그의 부도탑(浮屠塔)에는 하얀 우담바라가 여기저기 피었다. 선사의 부도 옆에서 잠시 배낭을 내리고 쉬며 그가 오대산에서 수행하며 지었다는 토굴가(土窟歌)를 폰에서 찾아 틀어 놓으니 머리가 맑아진다..
靑山林 깊은 골에 一間土窟 지어놓고/ 松門을 半開하고 石徑을 徘徊하니/ 綠楊春三月下에 春風이 건듯 불어/ 庭前의 百種花는 處處에 피었는데/… …
승려이면서 노래 그림 글씨 등 여러 분야에 뛰어 났던 대선사 나옹, 팔
백 년 전 그가 노래했다 靑山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한다고, 蒼空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한다고... 탐,진,치(貪,瞋,癡) 모두 내려 놓고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 가란다고..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如水若風居歸天하고픈... 공덕산을 내려 오니 산밑
과수원에 사과가 발갛다.
-끝-
첫댓글 읽다가 '인순'이라는 이름이 나와 더열심히 읽었네요ㅎ
그분이 그렇게 유명한분인줄은 몰랐네요~
새로운 앎을 알면서 잘읽고갑니다^~^
동시대에 삼대가 출가를 하게된 인연 흔치 않은 얘기지요. 긴글 읽느라 고생했습니다. 감사.
작년 가을 단풍 한창이고 사과밭이 이뻤던 문경 일대를 답사한 적이 있어요. 유성룡이 머물렀다는 봉생정, 문경 고모산성과 영남대로 옛길 주막집, 문경 장수황씨 고택 거쳐 사불산 대승사 오솔길과 윤필암을 돌아보았는데 대준 동기 글을 보니 아주 반갑습니다.
더구나 청담스님은 생전에 어머님이 존경하시던 분이라 더욱 새롭고 애틋하네요...
좋을 때 문경을 답사하셨군요. 진남교반 고모산성과 토끼비리도 돌아 보시고.. 고모산성에 주인없는 감나무 올해도 많은 감이 열리겠지요. 문경, 예천,영주,봉화 등 옛날엔 오지라 했던 동네들 언제가도 옛 냄새가 나는 이름다운 동네입니다.
조만간 영주의 사과가 빻갛게 읽은 날 부석사 무량수전 앞 안양루에서 해넘어 가는 소리나 들어 볼까 합니다. 고맙습니다.
한때 접근하기가 불편하고 먼길이지만 여러번 들렸던 사불산 윤필암.작지만 비구니도량으로 유명하며 건축사진작가들이 아름다운 암자로 선택한 곳.주변산에 묻혀서 눈에 잘 띠지도않는 기도처 아름다운곳입니다. 잘읽었습니다.
늦게라도 읽고 마음을 남겨놓고 가시니 고맙습니다. 높은 암자 한번 동행할까 했는데 그 날 얘기듣고 알았네요. 아쉽고.. 명절 잘 보내시고 늘 건강하시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