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822
7월15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연중 제15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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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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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CaWkBmMXb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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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께서는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 곁에 늘 함께 하실 것입니다!>
찌는 듯한 무더위에, 거듭되는 재확산에, 그에 따른 경제적·정신적 고통에 다들 얼마나 힘드십니까? 어디 그뿐인가요?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상처입고, 그 상처 부여안고 눈물 흘리고...
이런 우리에게 오늘 주님께서는 참으로 큰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오 복음 11장 28~30절)
우리가 그분께로 다가갈 때 마다 환한 미소와 함께 활짝 열린 두 팔로 환대하시고, 꼭 안아주시고, 고생 많다며 등을 토닥여주시는 주님을 생각하니 순식간에 피로가 사라지는 느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릿속에는 주로 부릅뜬 눈으로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시고, 여차하면 진노하시고 징벌을 내리시는,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하느님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소개하시며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표현하시니,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고생하고 방황하는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 안식을 주시긴 하시는데, 거저 주시지는 않으시겠답니다. 당신의 멍에를 메는 사람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편안한 안식을 주시겠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복된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 한번 보십시오. 그 큰 고통에다, 그 숱한 짐을 지고 힘겹게 하루하루를 걸어가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 특히 죽음과 내세에 대한 공포로 더욱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분께서 친히 우리 짐을 가볍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모두가 외면한다 할지라도 나만은 너를 외면하지 않겠다, 나만은 너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고 언약하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겪고 있는 여러 가지 고통, 지고 가고 있는 많은 짐들을 순식간에 없애주시겠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나눠지시겠다고 하십니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우리와 함께 나란히 걸어가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결국 고통 중에 가장 큰 고통인 마음의 고통, 정신적인 고통을 없애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거기다 고통의 끝판왕인 죽음의 고통을 덜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언제나 고통과 십자가를 이고 지고, 손에 들고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오늘 우리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을 완전히 없애주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완벽한 해결책을 제시해주시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단 주님께서는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 곁에 늘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에 못 이겨 신음할 때 우리 옆에서 위로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더 이상 고통도 눈물도 없는 당신 나라로 우리를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복된 그날까지 매일의 고통을 기쁘게 인내하면서 살아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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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SwBvu67MK1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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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으로 산다는 것>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이유는 ‘철부지’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겸손하게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행동을 바꿔서만 되는 게 아니고 생각을 바꿔서 끝나는 게 아니며, 가장 깊이 있는 인간의 핵심인 마음을 바꿔야만 합니다. 오늘 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의 지배를 받습니다. 마음은 욕구를 자아내는 본성이 머무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을 봉헌하고 당신 마음으로 살아가라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평안한 안식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아이언맨 1’(2008)의 이야기입니다. 토니 스타크는 천재로서 전자회로를 4살에 만들었고 6살에는 자동차 엔진을 만들었으며 17세에는 수석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21살에는 부모가 죽어 스타크 인더스트리 회사의 수장이 됩니다. 스타크 인더스트리는 군수물자를 수출하는 회사였기에 토니 스타크는 평소처럼 아프가니스탄에 무기 소개를 하러 가게 됩니다.
그러던 중 테러단체에 공격을 받고 납치를 당합니다. 그중 그의 심장에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되고 함께 있던 인센이란 과학자가 그의 심장에 ‘아크 리액터’라고 하는 에너지원인 전자석을 만들어 넣어줍니다. 스타크는 무기를 만들라는 테러리스트들의 말을 듣지 않고 몰래 자신을 덮어씌울 마크 1이라는 것을 만듭니다. 이 과정에서 인센은 “낭비하지 말아요. 당신의 삶을….” 이라고 말하며 숨을 거둡니다. 스타크는 자신이 만든 슈트 1을 입고 탈출에 성공합니다.
돌아와서는 아직도 거만함을 버리지 못하고 인센이 만들어준 심장을 버리고 더 세련된 ‘아크 리액터’를 만듭니다. 그리고 마크 1보다 더 세련된 마크 2를 만듭니다. 그의 아버지의 동업자였던 오베디아는 스타크의 생각에 반대하여 몰래 계속 무기를 판매합니다. 그리고 마크 1을 기반으로 엄청나게 큰 무기를 만듭니다.
결국, 토니 스타크와 오베디아는 각자 자기가 만든 무기를 입고 싸우게 되는데 오베디아는 자신이 만든 무기에 아크 리엑터를 장착하기 위해 토니 스타크 가슴에 있는 아크 리엑터를 빼내 갑니다. 그러면 토니는 심장이 없어 죽습니다.
하지만 인생을 낭비하며 살지 말라고 하며 죽어간 인센이란 과학자가 만들어준 오래된 낡은 아크 리엑터를 버리지 않고 둔 페퍼라는 비서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죽기 직전 다시 옛 심장을 넣고 오베디아와 싸워 승리한다는 내용입니다.
저는 사람을 육체와 영혼과 영으로 봅니다. 영은 심장에 있다고 여기기에 육체와 머리와 심장으로 보아도 될 것입니다. 토니 스타크가 만들어 입은 슈트는 육체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는 토니 스타크는 영혼이고 머리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개를 다 살릴 수 있는 것은 가슴에 넣은 심장입니다. 이 에너지가 없다면 슈트도 그 안에 든 사람도 죽은 목숨입니다. 이것을 지켜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영화에서는 인센이 그 심장을 만들어주었지만 토니 스타크는 계속 자신이 만든 심장을 사용하려 합니다. 그러다 결국 인센이 넣어준 심장을 재장착하고 싸움을 승리로 이끕니다. 여기에서 목숨을 내어주며 스타크에게 심장을 전해준 인센이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 심장을 성체를 통해 우리에게 줍니다. 여기서 페퍼는 교회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페퍼가 아니면 다시 그리스도의 심장을 장착할 수 없습니다. 물론 오베디아는 내 교만한 심장으로 세상을 정복하려는 사탄을 상징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심장을 받아도 사용하기 싫으면 사용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심장을 사용하지 않게 될 때는 내 마음으로 살겠다는 교만이 커질 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멍에를 메라고 합니다. 당신 심장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내가 만든 것이 옳다고 여길 때는 그분의 심장이 빠지고 나의 심장으로 살게 되며 그러면 나도 죽고 육체도 힘을 쓸 수 없게 됩니다. 심장에 모든 것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토니가 인센 덕분으로 살 수 있었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을 허비하지 말고 살라는 인센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믿지 말고 인센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의 심장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 됩니다. 심장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인센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심장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여야 그리스도의 심장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나를 봉헌하고 나를 그리스도로 여길 때 내 안에 온유하고 겸손한 심장이 작동합니다. 그러면 나도 살고 내가 만든 슈트도 삽니다. 그렇게 세상을 이기고 많은 이들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철부지 어린이처럼 된다는 말은 나에게 심장을 주시는 그분께 온유하고 겸손하게 순종하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분을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예수님의 심장으로 살아갑시다. 내가 그리스도이고 그래서 나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말을 하루에 수백 번이라도 반복합시다. 그러면 정말 믿어질 것이고 그러면 정말 아이언맨이 될 것입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내가 ‘아이언맨’입니다.”입니다. 그가 한 일을 숨기라는 많은 사람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명확히 밝힙니다. 이는 자신의 심장이 인센이 준 심장임을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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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1,28-30 :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28절) 이 말씀은 율법을 지키려 하지만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 악의 세력에 짓눌리며 살고 있는 우상 숭배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착한 마음을 가지고 살려고 노력하지만 그렇지를 못해 절망해 버린 사람들, 또한 자신의 약함과 죄의 짐으로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초대하시는 말씀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29절) 예수님은 당신에게서 세상을 건설하는 법,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창조하는 법, 기적을 일으키고 죽은 이를 되살리는 법을 배울 것이 아니라,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것을 배우라고 하신다. 이것은 겸손하게 시작을 잘 해야 한다는 것이다.
높이 올라가려 한다면 밑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높은 건물을 지으려 한다면 터부터 닦아야 한다. 이것이 겸손이다. 건물이 높아지면 높이 질수록 그 기초는 그만큼 깊어야 한다. 기초가 튼튼한 만큼 건물도 튼튼하게 지을 수 있다. 건물은 높이 올라간다. 그러나 그 건물의 기초를 세우는 사람은 먼저 아주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29절) 주님 안에서만이 이러한 안식을 누릴 수 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30절) 주님의 멍에가 편하고 그 짐이 가볍다면 왜 “그 길”을 “좁은” 길이라고 하셨을까? 게으른 이들에게는 좁은 길이다. 그러나 열성적인 이들에게 주님의 계명은 가볍다. 그 멍에는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로 가려고 하는 것 때문에 파생되는 어려움을 이야기 한다. 이 멍에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 멍에는 이미 멍에가 아니라, 나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는 것이 된다.
생명을 원하고 좋은 날들을 보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부정과 악의의 멍에를 벗어버려야 한다. 모든 악덕의 불쏘시개인 부정이라는 멍에를 벗어 버리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편하고 가벼운 멍에를 멜 수 없다. 이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힘들게 보이는 것은, 세상의 욕망에 물든 마음은 하늘의 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은 아직 그리스도께서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울 수 없다.
짐 진 이들에게 힘을 북돋아 주는 참으로 기분 좋은 무게이다. 그 무게는 우리가지지 못할 만큼 무거운 것이 아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지워주는 짐은 우리의 힘을 더 빠지게 하지만, 그리스도의 짐은 그 짐을 진 사람들을 도와준다. 우리가 은총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지고 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은총을 돕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도우라고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맞은 짐을 지게 하시며 그것을 충분히 이겨나갈 수 있는 힘도 주시는 분이다. 그것을 우리의 능력 밖에서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기에 우리는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즉 사랑의 마음으로 정성껏 천국의 멍에를 지도록 해야 하겠다.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그러한 삶을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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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가볍고 편한 멍에가 세상에 존재할까요? 무겁고 불편해야 멍에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날마다 그러한 멍에를 짊어지고 산다면, 그것이 무거운지도 모른 채 살아갈 것입니다. 그 무게에 짓눌려 어깨는 망가지고 마음도 갈기갈기 찢겨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 나 자신을 발견한 뒤에야, 우리는 이 멍에를 어떻게, 왜 짊어지게 되었는지 생각합니다. 그 고민의 끝자락에서 멍에로 말미암은 고통과 짓눌림의 원인을 내가 아닌 남에게서 찾고 멍에를 사정없이 내동댕이칩니다.
미사를 시작하기 전에 제의를 입으며 침묵 가운데 기도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고 하셨으니 제가 주님의 은총을 입어 이 짐을 잘 지고 가게 하소서. 아멘!” 그리고 지금 제가 메고 있는 멍에의 무게를 묵상해 봅니다.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어깨에 두른 영대와 몸에 걸치는 제의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지 못할 때도 있으며 누군가를 위한 희생을 스스로에게 강요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 무게에 쓰러져 아무것도 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리하셨던 것처럼 다시 일어섭니다. 그분께서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시며 세 번이나 넘어지셨고, 다시금 묵묵히 일어나셨습니다. 그 멍에를 내려놓고 싶다고 피땀 흘리시며 아버지께 기도하셨고, 수많은 모욕과 조롱을 받으시면서도 그 무게를 견디어 내셨습니다. 예수님의 멍에가 무겁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 무게와 고통보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이 더 크셨기 때문입니다.
멍에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의 멍에가 다른 사람들의 멍에보다 더 고통스럽고 무겁게 느껴집니다. 그 무게를 견딜 수 있게 지탱해 주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멍에가 가벼워지거나 고통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려움을 견디고 버텨 내는 것입니다. 오늘도 사랑으로 기꺼이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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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1) 예수님은 온갖 억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 ‘해방’이 바로 ‘구원’입니다.) ‘짐’과 ‘멍에’를 유대교의 율법들로만 해석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 당시에는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었겠지만,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는 일이고, 중요하지도 않은 일입니다. 우리는 유대교 율법들과 상관없이 살고 있고, 그 율법들이 우리에게 ‘짐’과 ‘멍에’로 작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유대교 율법은 그냥 다른 종교의 율법일 뿐입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오늘날의 우리에게 ‘짐’과 ‘멍에’는 인생살이의 여러 가지 고통들입니다.
2) 멍에에 관한 예수님 말씀 바로 뒤에는, 바리사이들이 어느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먹는 제자들을 비난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자들은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습니다.(마태 12,1)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의 배고픔은 보지 않고, 밀 이삭 몇 개를 뜯어 먹는 것만 보았습니다. 그 상황에서 ‘안식일 규정’이 멍에일까? ‘배고픔’이 멍에일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진짜 멍에는 ‘배고픔’입니다. 잘못된 율법 해석과 적용은 그 멍에를 더욱 무겁고 괴롭게 만드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배고픔’에 초점을 맞춰서 그들을 변호해 주셨습니다.(마태 12,3-4) 그리고 안식일 규정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으셨고, 바리사이들의 잘못된 해석과 적용을 비판하셨습니다.(마태 12,7)
3)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이 말씀은, 예수님만이 우리의 멍에와 짐을 없애시는 분이고,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안식’은 모든 멍에와 짐을 벗어버린 상태입니다.)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을 보면,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 앞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여러 고을에서 그 소문을 듣고 군중이 육로로 그분을 따라나섰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마태 14,13-14)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마르 6,32-34)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몰려든 것은 ‘참된 안식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신 것은, 온갖 멍에와 짐에 짓눌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는 말은, 안식을 전혀 누리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빵의 기적’을 일으키신 것은 전부 다 멍에와 짐들의 억압에서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신 일입니다.
4)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이 말씀은, “참된 안식을 얻기를 바란다면, 나를 믿고 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어라.”라는 뜻입니다. 멍에를 멘다는 말과 배운다는 말은,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멍에’는 반어법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멍에’를 주시는 분이 아니라 ‘안식’을 주시는 분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 뒤를 따라가기 위해서 져야 하는 십자가는 멍에인가, 아닌가?” 신앙인이 예수님을 따르면서 지고 가는 십자가는 ‘멍에’도 아니고 ‘짐’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구원과 안식을 얻기 위해서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은총의 도구’입니다. 멍에와 짐을 벗겨주는 도구. 신앙생활은 멍에를 메는 생활이 아니라 멍에에서 해방되는 생활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누리는 생활입니다. 만일에 신앙생활이 ‘멍에’를 메는 생활이라면 그런 생활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제의 경우, 사제 직무는 ‘멍에’도 아니고 ‘짐’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기쁜 일’입니다. 그 일은, 사제 자신이 먼저 안식을 누리고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만일에 자신의 사제 직무 수행을 ‘멍에’나 ‘짐’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딱한 일입니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하는 일에는 기쁨도 없고, 사랑도 없습니다. “사랑하니까 멍에를 참고 견딘다.”는 말은 궤변입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한다면, 멍에란 없습니다.>
5)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이 말씀도 반어법적인 표현인데, 뜻은 “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은 너희의 멍에와 짐을 없애고 너희에게 편안함과 가벼움을 주는 열쇠이다.”입니다.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은 멍에도 아니고 짐도 아닙니다. 우리를 멍에와 짐에서 해방시켜 주는, 그리고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는 ‘은총의 열쇠’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무거운 멍에를 편한 멍에로, 무거운 짐을 가벼운 짐으로 바꿔 주신 것이라면, 그것은 안식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이미 말했지만, 안식이란 멍에와 짐이 하나도 없는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멍에와 짐에서 벗어나라고 우리에게 ‘열쇠’를 주시는데, 그 열쇠를 또 다른 멍에와 짐으로 오해하거나 착각한다면, 멍에와 짐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참된 안식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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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알래스카에 있는 후배 신부님을 만나기로 했습니다. 뉴욕에서 알래스카로 가기 위해서 ‘시애틀’을 경유하였습니다. 마침 시애틀에는 동창신부님이 있어서 하루 머물면서 다음날 동창신부님과 알라스카로 갔습니다. 아직 마스크를 착용하지만 공항은 예전처럼 활기가 넘쳤습니다. 3달 전에 플로리다로 가는 공항에서는 비행기의 좌석도 거리두기를 하였고, 공항에도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백신을 맞아서인지 보안검색에도 시간이 걸렸습니다. 시애틀은 처음 방문했습니다. 시애틀하면 생각나는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맥라이언과 톰행크스가 주연했던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입니다. 잔잔한 감동을 주는 아름다운 영화입니다. 다른 하나는 스타벅스 1호점입니다. 전 세계 50개국에 28,000여 점포가 있는 스타벅스는 시애틀의 작은 시장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커피를 좋아하는 분들은 시애틀에 오면 한번쯤은 방문한다고 합니다.
저는 시애틀의 또 다른 의미를 들었습니다. 시애틀은 아메리카 대륙에 살던 원주민 추장의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미국의 제14대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오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이 지역에 거주하던 인디언 추장 시애틀에게 땅을 팔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미국 대통령의 요구를 들었던 추장 시애틀은 이렇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어머니인 大地(대지)를 어떻게 사고 팔수 있나? 생명의 거미집을 짜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그 안의 한 가닥 거미줄에 불과하다. 생명의 거미집에 가하는 행동은 반드시 그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신선한 공기와 재잘 거리는 시냇물을 어떻게 소유할 수 있단 말인가? 소유하지 않은 것들을 어떻게 저들에게 팔 수 있단 말인가? 들꽃은 우리의 누이고 사슴, 말과 얼룩독수리는 우리의 형제다. 우리는 우리의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보겠다. 그러나 제의를 받아들일 경우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즉 이 땅의 짐승들을 형제처럼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 가지는 우리 모두의 하느님은 하나라는 것이다. 그대들이 땅을 소유하고 싶어 하듯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하느님이며 그의 자비로움은 황색인에게나 백인에게나 꼭 같은 것이다.” 당시 피어슨 대통령은 추장 시애틀의 편지에 감복하여 이 지역을 '시애틀'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모세는 하느님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나는 있는 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서는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신 힘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름다운 세상을 사람들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사람은 아름다운 세상의 주인이 아닙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추장 ‘시애틀’이 말했던 것처럼 사람은 세상이라는 거미집에 머무는 하나의 거미줄과 같습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입니다. 비록 우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하얗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하얗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우리 또한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기다려 주시는 분입니다. 돌아온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품어주신 아버지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서 다시금 하느님께 돌아오기를 기다려 주십니다.
저의 이름은 조재형(趙在衡)입니다. 이름의 의미는 균형을 이루라는 뜻입니다. 중심을 잡으라는 뜻입니다.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서 말하는 초연함(Indifferentia)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름의 뜻대로 살기보다는 우유부단한 삶을 많이 살았습니다. 나의 뜻과 하느님의 뜻의 평균을 내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적이 많았습니다. 저의 세례명은 가브리엘입니다. 이름의 의미는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소식을 전했던 것처럼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제로 사는 저에게는 합당한 세례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나의 이름과 세례명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나는 나의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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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어떻게 멍에가 편하고 짐이 가벼울 수 있을까요? 처음 자동차를 운전할 때에는 운전하는 것이 너무 힘듭니다. 하지만 운전 경력이 쌓이면 힘이 빠지게 되고 오히려 운전을 즐기게 됩니다. 편안하죠! 우리의 영적인 여정도 처음에는 자신의 힘으로 뭔가 하려 하기 때문에 무척 힘이 듭니다. 하지만 힘이 다 빠지고 주님 품에서 주님과 함께 가기 시작할 때 너무도 편안하고 가벼워집니다. 주님의 온유한 마음, 겸손한 마음을 청하며 이 미사를 온 정성을 다 해 봉헌하도록 합시다.
찬미 예수님! 인간의 심리적 치유, 삶의 변화, 영적인 성장에 관하여 많은 심리학자들, 종교학자들, 그리고 영성 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mystical experience, 즉 신비 체험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품 안에서 느끼는 어떤 뜨거운 영적인 사랑의 체험을 했을 때, 우리의 마음은 치유되고 변화되며 성장해 우리의 일상과 마주 오는 사람과 사건들이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지칠 때 엄마의 품에 안긴 자녀들은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낍니다. 힘들 때 연인들이나 부부 간에 서로를 안아 줌으로써 서로 용서하고 치유받고 사랑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전에 제가 토론토에서 만난 한 자매님의 이야기가 떠 오릅니다.
부부 지간에 사이가 좋지 않아 남편은 자주 집을 비우고 아내는 삯바느질을 해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경제적 능력이 없는 남편에 대한 원망과 자녀들을 키워야 하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그 자매님을 처음 보았을 때에는 너무도 얼굴이 어두워보였습니다. 모든 희망을 잃고 죽지 못해 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날도 오랫동안 집을 비우고 돌아온 남편과 밤새도록 부부싸움을 하였다고 합니다. 언성이 높아지고 눈물이 쏟아지고 정말 지칠대로 지쳐 둘은 힘이 다 빠졌다고 합니다. 그때 남편이 "우리 밥이라도 먹고 또 싸우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같이 새벽에 문을 연 한인 식당에 함께 가서 순두부 찌게를 나누어 먹었습니다. 말없이 승용차를 타고 집에 돌아 왔는데, 갑자기 남편이 자신을 꼬옥 안더니 "미안해 여보"라고 말하더랍니다. 보통때 같으면 남편을 밀쳤을 텐데, 이상하게 그 날은 남편의 품이 참 편안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불쌍한 마음, 미안한 마음, 원망의 마음이 교차되어 한 없이 남편 품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 사건 이후로 남편은 다시 집으로 들어왔고, 집안 일을 도우며 함께 잘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그 후로 이 자매님의 얼굴이 너무도 환하게 변해서 제가 딴 사람인 줄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코로나 전에 저의 명상의 집에도 오셔서 피정을 하고 가셨습니다.
자매 형제 여러분, 인간 사이에서 서로를 안아 주는 것이 큰 힘이 된다면 하물며 하느님 품에 안기는 것은 얼마나 더 큰 기쁨이요 행복이겠습니까! 그분의 품 안에 깊이 머물며 그 사랑과 자비를 체험했을 때,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 순간에 주님께서 늘 함께 하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 곁에 머무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평화롭고 즐거운 지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께로 다가가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게 될 때, 우리는 영적인 재 탄생을 맛보게 됩니다.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 그분 앞에 어린이가 되었을 때 우리는 주님의 깊은 뜻을 이해하게 되고 그분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 서두에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라고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철부지 어린이에 관해 언급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적인 신비 체험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비워내고 항상 우리 곁에 신비롭게 다가 오시는 그분을 우리 마음 속에 맞이하기 위해서는 기도와 침묵, 고독과 절제, 명상과 자선의 삶, 즉 수행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그분의 멍에를 메는 것은 바로 수행의 삶을 가리킵니다. 그분이 가르쳐 주신 삶을 따라 그분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이 바로 수행의 삶이며 이 수행의 삶을 통해 우리 마음은 정화되고 비워지며, 오롯이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밭이 되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며, 그분의 품에 안긴 어린이가 되기 위해 정진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메고 가야 할 주님의 멍에는 무엇입니까?
그 멍에가 처음에는 힘겹고 무겁게 느껴지겠지만, 나를 내려 놓고 그분께 의탁하기 시작할 때, 자연스럽게 나의 삶의 일부가 되고, 그분과 함께 이 길을 걸어갈 때, 그 멍에를 통해 영적인 평화와 기쁨의 체험을 하게 되고 진정 새롭게 영적인 어린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의 품에서 위로와 은총을 받는 시간을 꼭 가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자녀들이나 남편, 아내를 꼬옥 안아 주며 서로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시간을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이 되어 주세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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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집트에서 고통받는 이스라엘 민족을 끌어내는 사명을 새롭게 주십니다.
모세가 하느님께 징표를 받고자, 그들이 하느님의 이름을 물으면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느냐고 아뢰자, 하느님께서는 “나는 있는 나다.”라고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은 항상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특정한 모습으로 당신 자신을 고정하지 않으시지요.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방법과 장소에 따라 사람을 구하시고자 자유롭게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서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지요. 이런 의미로 “나는 있는 나다.”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무거운 짐이란 형식적인 계명들입니다.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계명은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지요.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하느님을 알려면 사랑을 해야 합니다.(1요한 4,8 참조) 하느님을 사랑하려면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하지요.
만일 하느님을 무서운 분, 벌하시는 분으로만 정의한다면 신앙생활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겠습니까? 불필요한 계명들만 많아질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려면 누가 내 이웃인지 알아야 합니다. 어느 범위까지를 내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요. 이웃을 예수님의 눈길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습니까?
만일 나에게 필요한 사람만 내 이웃으로 받아들인다면 매우 편협한 사랑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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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당신 이름이 ‘야훼(에흐예)’, 곧 ‘있는 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야훼를 글자 그대로 번역하자면, ‘나는 있을 것이다.’ 또는 ‘나는 있다.’입니다. 이 낱말은 명사가 아니라 있음, 곧 존재를 나타내는 동사입니다.
이름은 단순히 그 사람에게 붙여지는 의미 없는 낱말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또 어떤 사명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려 줍니다.
하느님의 이름도 마찬가지입니다. ‘야훼’라는 이름은 하느님의 특징, 곧 ‘우리와 함께 항상 계신 분’, ‘아브라함 때도, 이사악 때도, 야곱 때도 계셨으며, 이스라엘 백성들, 더 나아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와도 늘 함께 계셔 주시는 분’이라는 특징을 잘 드러내 줍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억압받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하느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참으로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계셨음을, 당신이야말로 참된 ‘야훼’이심을 알려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라고 밝히시며 당신의 멍에를 메고 당신에게서 배우라고 권고하십니다.
여기서 ‘온유하다’라고 번역한 그리스어는 ‘프라위스’입니다. 이 낱말은 본디 히브리어 ‘아나빔’(가난한 이들)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하느님과 이웃 앞에서 자신을 철저히 낮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온유함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온유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온유한 이들은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마태 5,5 참조)
곧,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해 주셨던 그 땅, 하느님 나라를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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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법의 멍에와 예수님의 멍에>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 사회는 양심과 도덕, 풍습과 관습, 그리고 법률과 헌법의 조화로운 지배를 받는다. 올바른 양심과 도덕은 좋은 풍습과 관습을 만들어 주며, 이는 또다시 정감과 평화가 넘치는 사회를 만들어 준다. 사람들의 양심과 도덕이 개인적인 차등을 보이고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법률과 헌법이 등장한다.
법이란 몇 사람의 생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또는 모든 사람들의 뜻을 모아 제정되는 것이기에 다같이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준법정신은 법을 실제로 지키려는 의지이며, 그 나라 국민들의 문화수준을 나타내는 척도라고 한다.
선진 국민일수록 준법정신이 강하다는 것은 그만큼 문화수준이 높다는 말이다. 그러나 문화수준을 높이자고 법을 지키는 것은 아니다.
법 이전에 사람은 인간적이고 보편적인 양심과 도덕을 먼저 따라 행동해야 한다. 그러므로 법이 있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로는 우리 인간의 양심과 도덕이 인간적이고 보편적이지 못한 현실을 폭로하는 것과도 같다.
법을 제정해야만 하는 현실을 한편으로는 통탄해야 하겠지만, 이왕에 제정된 법은 다른 한편으로 모두가 준수해야할 의무를 요구하는 것이다.
법이란 무릇 한자어가 뜻하듯이 ‘물이 가는 것’이다. 절대 거꾸로 가지 않고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만 가며, 막히면 머물고, 넘치면 다시 가는 물의 흐름이 곧 법이요, 법은 극히 자연스런 이치라는 말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양심과 도덕에 따라 자연스럽게 법의 이치를 꿰뚫을 수 있다는 말이다. 결국 법은 인간의 양심과 도덕에 따른 자연스러움을 제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법은 어떠한가? 어느 변호사의 말을 들으니 우리나라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법은 다 모아 놓았다고 한다. 독일, 미국, 일본의 좋은 법은 다 갔다 놓았다는 것이다.
법이 좋다는 말은 사람이 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법 이전에 사람은 자신의 양심과 도덕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했다.
양심과 도덕, 올바른 양심과 보편적인 도덕에 따라 행동한 사람이 법(法)을 잘 몰라서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유린당하고, 경제적 손해를 보며, 사회적 불이익을 당해야 하는 국민이 있다면 대한민국의 법은 이 국민 앞에 잘못을 빌어야 한다.
시대에 뒤떨어지는 비현실적인 법조문 하나 때문에 손해를 보고 이로 인해 심적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강한 자에게는 법을 피할 길을 가르쳐주고 약한 자에게는 이 법, 저 법으로 올가미를 씌워 길바닥에 내동댕이치는 그런 조국의 현실을 보면서 오늘 복음이 들려주는 예수님의 말씀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613 가지의 율법을 짊어지고 살았다. (금령 365개, 명령 248개) 이런 율법 때문에 고생하고 허덕이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당신께로 초대하신다. 예수님께서 편히 쉬게 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께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법의 멍에를 벗겨주시고, 당신의 멍에를 지워주시고자 하신다. 예수님의 멍에는 법이 아니라 가르침이며, 최종적으로는 사랑으로 요약된다. 그것은 올바르고 보편적인 양심과 도덕이며, 훈훈하고 정이 넘치는 관습과 풍습이다.
이는 자기가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해주는 것(황금률: 마태 7,12)이며, 하느님과 이웃을 동시에 자기 몸같이 사랑하는 것(사랑의 이중계명: 마태 22,34-40)이다. 물론 이 사랑은 나중에 십자가의 신비로 그 알맹이를 채우게 된다.
누구든지 사람은 법의 멍에든 십자가의 멍에든 하나를 지고 가며 살아야 한다. 법의 멍에는 사람을 노예로 만들지만, 예수님의 멍에는 사람을 겸손하고 온유하게 만든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예수님의 멍에를 지고 예수님께 배우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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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
오늘도 우리는 각자의 ‘짐’을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나그네가 바랑을 지고 다니듯, 바랑이 없는 거지도 끼니를 챙겨야 하는 ‘짐’을 져야 하듯, 오늘도 우리는 삶을 ‘짐’으로 지고 살아갑니다. 원하던 원하지 않던 어쩔 수 없이 짊어져야 하는 ‘짐’이 있고, 수도자로서 스스로 짊어진 ‘짐’도 있습니다.
부모로서 져야 하는 ‘짐’이 있고, 자녀로서 져야 하는 ‘짐’이 있고, 가족으로서 함께 져야 하는 ‘짐’이 있습니다.
질병과 육신, 상처와 나약함, 분노와 원망을 ‘짐’으로 지고 가기도 합니다.
형제를 ‘짐’으로 지고 가고, 세상을 ‘짐’ 지고 가며, 자기 자신을 ‘짐’으로 지고 갑니다.
자신만이 짊어져야 하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짐’이 있고, 부당하게 떠맡겨지는 ‘짐’도 있고, 피하고 싶은 ‘짐’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짐’을 다른 이에게 떠맡기기도 하고, 다른 이의 ‘짐’을 떠맡기도 하며, 함께 나누어지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우리는 탄생과 더불어 생명을 ‘짐’으로 짊어지고 살아가고, 살면서는 죽음을 ‘짐’으로 짊어지고 죽어갑니다.
사도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의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10).
그런데 나의 몸에서, 나의 짐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드러나고 있는가?
사실, 예수님께서도 ‘짐’을 지고 가셨습니다. 세상을 짊어지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아니, 그 ‘짐’을 지기 위해 오셨습니다. 바로 그 ‘짐’을 지고서야 가실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결코, 그 ‘짐’을 지지 않고는 가야할 그 길을 갈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길이요, 십자가 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진 ‘짐’은 우리를 짓누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길을 갈 수 있도록 를 도와주고 북돋아줍니다.
사실, 우리를 짓누르는 것은 ‘짐’이 아니라, 짐을 지지 않으려는 우리 자신일 뿐입니다.
오히려 ‘짐’으로 하여, 우리는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오히려 ‘짐’이 우리를 짊어지고 가는 까닭입니다.
정녕 ‘짐’을 지고서야 갈 수 있는 길을 가는 까닭입니다. ‘짐’이 없이는 가지를 못하는 길을 가는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짐’은 우리를 북돋아주고 도와주는 은총입니다.
그 ‘짐’은 저를 구원으로 이끄는 ‘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명에"에 짐을 올려놓고 그리스도와 함께 짐을 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은총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지고 갑니다.
우리가 은총을 돕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돕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지고 가십니다.
그리스도의 멍에에 짐을 올려놓으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걸으시며, 몸소 우리의 ‘짐’마저 짊어지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그 멍에는 편하고, 그 짐은 가볍습니다.”(마태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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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
주님!
나그네가 바랑을 짊어지듯, 당신은 저를 지고 나르고
저는 당신의 사랑을 지고 나릅니다.
짓누르는 것은 짐이 아니라 제 자신일 뿐,
짐을 지고 가는 이는 제가 아니라 당신,
당신이 함께 걸으며 저를 짊어지고 갈 뿐,
짐이 되어 업히고서야, 사랑의 짐을 지고서야,
비로소 당신에게로 건너갑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당신의 죽음을 짊어지고 살아가게 하소서!
그 짐에서 당신의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당신의 짐을 지지 않고는 결코 제가 가야할 제자의 길을 갈 수 없게 하소서.
십자가를 지고서야 비로소 제가 갈 길을 갈 수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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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11,28)
<나를 바꾸자!>
점점 더 우리를 지치게 하고 힘들게 하는 요즘입니다.
장마와 폭염이 우리를 지치게 하고 있고, 멈추지 않고 확산되어가는 코로나와 그로 인해 삶의 중요한 부분인 친교(코이노니아)의 멈춤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지치고 힘든 상황 앞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 앞에 진지하게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난국을 뚫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까?'
'이 난국을 놓고 자꾸만 네 탓이라고 외치는 이들이 있는데, 그러면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까?'
'이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 서로가 내 탓을 외치고, 잠시 하고 싶은 것 멈추고 절제를 하면서 힘과 지혜를 모아야 되지 않을까?'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예수님께서 지치고 힘들어 하고 있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이 부르심은, 그러니까 더 많은 사람들이 성당으로 가야하고, 예배당으로 가야한다는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요한15,4)
곧,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예수님의 생각과 말과 행위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너 중심!' 곧,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들이 함께 잘 사는, 그래서 '보시니 참 좋았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하는, 너 중심으로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복된'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모든 형제자매님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하느님을 향한 영혼의 여정'이라는 글에서, 보나벤투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길이요 문이시다. 우리를 위로 오르게 하는 사다리요 운반해 주는 수레이시다."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는 그리스도,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는 그리스도께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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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멍에>
마태오 11,28-30 (내 멍에를 메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멍에>
마지막
한 숨을 내쉬며
영원한 안식에 들기까지는
쉼 없이
삶의 멍에를
메야 하리라
나를 살리려고
스스로에게 지운
가짐의 멍에가 아니라
모든 이 품으라며
주님께서 지우신
비움의 멍에를
가짐의 멍에는
메면 멜수록 힘겹고
비움의 멍에는
메면 멜수록 편한데
나는 지금
무슨 멍에를 메고
나는 지금
누구와 함께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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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산은 백두산으로 2,744m입니다. 남한에서는 제주도의 한라산으로 1,950m입니다. 지리산은 1,905m, 그리고 설악산은 1,708m…. 백두산은 가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다른 세 개의 산은 높이에 걸맞게 정상까지 가는데 아주 힘들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렇다면 4,158m를 오르는 것은 어떨까요? 2,000m가 되지 않는 높이도 너무 힘들었는데, 그 두 배가 되니 얼마나 힘들까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힘들지 않습니다. 4,158m 높이까지 열차를 타고 편하게 오르기 때문입니다. 스위스의 융프라우 이야기입니다.
산의 높이가 높으면 막연하게 힘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높이보다 어떻게 오르느냐가 힘듦의 정도가 바뀝니다. 우리 삶의 고통과 시련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느냐에 따라 힘듦의 강도가 바뀌는 것입니다. 단순히 힘들 것이라면서 좌절과 절망 속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 삶이 절대 쉽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들이 가득한 곳입니다. 그러나 산의 높이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오르냐가 중요한 것처럼, 고통과 시련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이를 이겨내냐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배우라고 하시지요. 그러면 안식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주님으로부터 배워 얻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고통과 시련 자체를 없애는 놀라운 기적을 배워야 할까요? 병을 고치는 기적, 모두를 배부르게 하는 기적, 마귀를 쫓아내는 기적, 내가 원하는 대로 모두 이루어지는 기적 등등…. 우리가 배우고자 청했던 기적의 숫자는 정말로 많았습니다.
그러나 배워야 할 것은 이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그 고통과 시련을 이길 힘을 배워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주님께서 보여 주신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주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부터 배워야 합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별 가치가 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이 세상의 고통과 시련을 편하고 가볍게 이겨낼 수가 없게 됩니다.
커다란 건물을 지으려면, 건물의 기초부터 잘 닦아야 한다고 합니다. 만약 건물의 기초가 부실하면 커다란 건물을 짓다가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주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 바로 세상을 잘 살 수 있는 기초가 됩니다. 지금 주님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많은 것이 필요한 것 같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주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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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의 행복은 없습니다.>
봄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벚나무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나무를 좋아하며 이 나무의 꽃으로 인해 축제까지도 엽니다. 그렇다면 꽃 말고 이 나무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아마 없을 것입니다.
꽃이 피는 기간도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보름에서 길어야 20일 정도입니다. 11달을 꽃 없이 별다른 특징을 보이지 않지만, 사람들은 잠깐 피는 꽃들로 인해 계속해서 사랑을 줍니다.
많은 사람이 매일 매일 행복하길 바랍니다. 계속된 꽃길이 자기 앞에 펼쳐지길 바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잠깐의 피우는 꽃으로도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역시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는 너무나 많고 그 잠깐의 행복으로도 이 세상을 힘차게 살 수 있습니다.
100%의 행복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으며 이로 인해 작은 기쁨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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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내 멍에는 편하다>
‘하던 일도 멍석 펴 놓으면 안 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하던 일을 남이 권하면 오히려 안 한다는 뜻입니다. 무엇이든 자발적으로 하면 신이 나고 힘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하면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힘이 들고 능률도 떨어집니다.
따라서 기왕이면 무슨 일이든 스스로 찾아서 해야 합니다. 하고 싶은 일이라면 신이 나게 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옳은 일이고 해야 할 일이라면 기꺼이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28.30).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고 더군다나 스스로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순명함으로써 우리에게 멍에와 짐을 지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결국 그분의 멍에와 짐은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과 당신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짊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육체적으로는 고달프고 힘드셨겠지만, 사랑의 극진한 표현이었기에 아버지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셨고 내적인 기쁨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주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충실히 감당하면 멍에와 짐은 편하고 가볍게 됩니다.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고 자신을 낮추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리고 “온유함은 하느님께 굴복하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의 규정이라는 괴로운 멍에를 백성들에게 짊어 지게하고 내용보다는 형식에 매여 백성을 힘들게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의 의미와 내용을 자발적으로 지키고 또 가르침으로써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이 되게 하셨습니다.
유다교에는 계명이 상당히 많았는데 248조항이 명령이고 365개 조항은 금령으로 613개 조항의 계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잡다한 조항의 계명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계명으로 요약하였고 그 두 계명을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는 것이 더 힘든 요구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언정 그 멍에는 인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요한5,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발적으로 일상을 봉헌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주시는 내적인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약점과 한계, 죄스럽고 못난 모습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받아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결코 무거운 짐이나 멍에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멍에는 주님과의 깊은 만남 안에서 오는 위로와 평화의 원천입니다.
기쁨을 위한 희생과 봉헌의 기초입니다. 혹 힘들고 지칠 때 주님께서 주시는 멍에와 짐을 귀찮아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나에게 오너라..정령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하신 주님을 꼭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나에게 오너라!’하시는 주님께 다가가서 모두를 맡겨야 하겠습니다.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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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사랑에 목말라 하십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되시면서 우리의 목마름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십니다. 그것은 물질적인 의미에서 목마름이 아니라 충만한 생명, 악과 죽음의 노예 상태에서 자유롭게 풀려나는 생명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또한 육화를 통해서 하느님은 한 인간, 나자렛의 예수 안에 당신의 목마름을 태우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을 목말라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의 마음과 우리 사랑에 목말라 하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목마름은 예수님 안에서 타오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마음 안에서 인간적 목마름과 신적 목마름이 만나게 됩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일치를 이루어야 하는 이 갈망은 이 목마름에 속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수난 전날 성자께서 성부께 드린 기도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 21)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모든 이들의 일치를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악마는 분열의 아비이고 항상 갈라놓고 항상 싸움을 일으키며 많은 악을 일으킵니다. 예수님의 이런 목마름이 또한 우리의 목마름이 되기를 바랍니다!"(교황 프란치스코, 삼종기도 2015년 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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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초대, 주님의 환대>
-영원한 안식처-
“주여, 새벽부터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한생 즐겁게 하소서.”(시편90.14)
아침 성무일도시 마음에 와닿은 시편 성구입니다.
“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 기도로 나와 함께 하며 애정을 보여준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병자들과 이들을 도와주는 분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맙시다.”
어제 병원에서 퇴원하신 교황님의 트윗 역시 주님의 환대를 상징합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세라핌 박사(Seraphic Doctor)’라 칭하는 보나벤투라 성인역시 참 좋으신 주님의 자비를, 환대를 상징합니다. 한평생 노심초사 프란치스코 성인을 이어받아 수도회의 기초를 놓고자 온 힘을 다하다 리용공의회 도중 만57세로 선종합니다. 저는 성인보다 15년을 더 살고 있는 셈입니다. 성인들의 축일을 지낼 때 마다 생몰生沒연대를 보며 제 나이와 꼭 비교해보곤 합니다.
당대 파리대학교수로서 쌍벽을 이루었던 도미니코 수도회의 토마스 아퀴나스와의 대조도 참 흥미롭습니다. 천사박사(Doctor Angelicus)라 칭하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리용공의회 참석중 선종합니다. 보나벤투라에 대한 전설같은 이름의 유래도 재미있습니다. 그대로 하느님의 환대를 상징하는 이름 뜻입니다.
프란치스코가 앓고 있는 보나벤투라를 보자 “잘 왔노라(bona ventura)”, 또 그가 병이 나은 것을 듣고 “좋은 소식이로다(bona ventura)”라는 말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전설같은 일화인데 두분 사이 얼마나 돈독한 우정관계에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성인들은 참 좋으신 주님의 환대를 상징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단히 초대하시고 환대하십니다. 주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입니다. 수도원을 찾는 자매들의 이구동성의 고백은 수도원이 친정집, 고향집같이 편안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수도원이 영혼의 고향이자 안식처라는 고백입니다. 수도원내 곳곳에서 끊임없이 환한 얼굴로 피어나 오가는 이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꽃들은 그대로 주님의 환대를 상징합니다. ‘환대는 꽃처럼’ 이라는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환대는 꽃처럼 하는 것이다
한 번이라도 얼굴 찌프린적 있더냐
하루 이틀 몇 날이든
언제나
활짝 핀 환한 얼굴로
오가는 이들
맞이하고 떠나 보내는
주차장 옆 코스모스 꽃 무리들
피곤한 모습 전혀 없다
볼 때 마다 환해지는 마음이다
환대는 꽃처럼 하는 것이다.”-2000.9.27.
어찌 코스모스꽃 뿐이겠습니까? 곳곳에서 끊임없이 피어나는 모든 꽃들이 주님의 환대를 상징합니다. 우리를 부단히 초대하시고 환대하시는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입니다. 제가 고백성사시 보속 ‘처방전 말씀’으로 참 많이 써드리는 오늘 복음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얼마다 고마운 구원의 말씀인지요! 우리의 영원한 쉼터이자 안식처인 예수님이십니다. 두렵고 불안한 세상,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충고나 조언보다는 위로와 격려, 경청이 필요한 분들입니다. 수도원 십자로에 있는 가슴 활짝 벌리고 있는 예수성심상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성구 역시 주님의 환대를 상징합니다.
정주영성과 직결된 환대영성입니다. 환대의 사랑, 환대의 기쁨, 환대의 행복입니다. 환대歡待와 우애友愛의 공생공락共生共樂의 공동체는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반면 냉대冷待는 얼마나 마음 아프게 하는지요. 그리하여 정주 수도원은 세고世苦에 지친 이들을 부단히 환대하는 환대의 집이 되고 수도자들은 환대의 사람이 됩니다. 이어지는 말씀 역시 중요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음 가볍다.”
예수성심의 사랑이 온유와 겸손입니다. 613개 율법의 무거운 짐을 사랑의 짐 하나로 가볍게 만드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값싼 사랑은, 값싼 안식은 없습니다. 수도원은, 우리 믿는 이들의 인생은 ‘사랑의 학교’입니다. 평생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평생 온유와 겸손의 사랑을 배우기 위해 분투奮鬪 노력해야 하는, 평생 학인의 수행자들인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에 비하면 우리의 사랑은 언제나 초보자 수준입니다. 이런 부족한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우리를 부단히 겸손케 하고 분발奮發케 합니다.
온유와 겸손의 사랑의 수행이 깊어갈수록 외관상 좁은 문은 내적 감미의 넓은 문이 되고, 우리의 불편한 멍에는 주님의 편한 멍에로, 우리의 무거운 짐은 주님의 가벼운 짐으로 바뀌어 예수님을 닮은 참 자유인이, 참 환대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 또한 평생과제입니다.
오늘 탈출기 말씀도 참 풍부합니다. 모세를 통해 가슴 활짝 열고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 환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모세와 주님과의 다정하고 깊은 대화를 통해 우리 모두를 환대하시며 참 좋은 가르침을 통해 우리를 무지로부터 해방하여 자유롭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서 ‘있는 나’께서 너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신 야훼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히 불릴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대대로 기릴 나의 칭호이다.”
추상적이고 애매모호한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를 환대하시며 늘 우리와 함께 계신 인격의 하느님, 관계의 하느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있는 나(I AM)’라는 하느님 이름은 ‘너희와 함께(I AM with you)’, ’너희를 위해(I AM for you)’ 있는 개방과 환대의 하느님이심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의 여정 역시 값싼 은총의 여정이 아니라 환대의 주님과 함께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하는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를 늘 환대하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역시 언제나 마음 활짝 열고 사랑을 다해 주님을 환대하는지 묻게 됩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우리를 환대해 주시고 우리 또한 주님을 환대하는, 주님의 환대와 우리의 환대가 만나는 사랑의 일치로, 외로움과 그리움이 말끔히 사라진 참으로 기쁨 충만한 복된 시간입니다. 또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당신의 안식을 선물하시며, 우리의 불편한 멍에를 당신의 편한 멍에로, 우리의 무거운 짐은 당신의 가벼운 짐으로 바꿔주시며 예닮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는 힘도 주십니다.
“하느님, 우리 주의 어지심이, 우리 위에 내리옵소서.
우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
우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시편90,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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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은 저희 작은형제회의 제2의 창설자라고 불리는 성 보나벤투라 축일입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를 구원으로 초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순례 여정이 버겁고 힘겨운 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시면서도 인간이 겪고 있는 모든 고통에 함께하고 싶어 이 세상에 오셨지요.
그분은 멍에와 짐에 짓눌려 다리에 힘이 풀리고 휘청대면서 갈길을 몰라 헤매는 우리에게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러냐, 정신력이 약하다'는 식으로 냉혹하게 채근하시지 않으십니다. 그 고통의 극치를 당신이 친히 직접 겪으셨기에, 연민 가득한 사랑의 시선으로 애틋이 바라보시며 어떻게든 좀 더 나은 삶으로 옮겨 주시려고 애쓰시지요.
제1독서에서는 당신 백성을 새로운 삶으로 옮겨 주시려는 하느님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나는 너희를 찾아가 너희가 이집트에서 겪고 있는 일을 살펴보았다. 그리하여 이집트에서 겪는 고난에서 나희를 끌어내어, ...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기로 작정하였다."(탈출 3,16-17)
하느님은 모세를 부르시기 전에 이미 이스라엘 백성의 신음과 울부짖음을 들으셨고, 친히 그들을 찾아가 그 참상을 살펴 보셨습니다.
이처럼 직접 찾아오시어 삶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에서 훗날 이루어질 성자 예수님의 강생이 떠오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있는 나"(탈출 3,14)이신 참 존재자이시면서 피조물의 행복을 위해 역동적으로 움직이시고 섭리를 풀어나가시는 분이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의지에 최선의 노력으로 응답하면서 구원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멍에를 지기 위해 먼저 세상의 멍에와 짐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고생스러웠던 경험뿐만 아니라 안락하고 자기중심적이었던 욕망도 함께 떨쳐버려야 합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닮으려면 세상살이에서 즐겨 애용했던 우월의식, 이기심, 교만, 자기영광 따위가 큰 장애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의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계획을 믿고 떠나긴 했지만 자유와 해방이 당장 거저 주어진 게 아니었습니다. 반항하고 불평하고 심지어 이집트의 시간을 미화해 그리워하기까지 하게 만든 광야의 험난한 시간을 피할 수 없었지요. 그들을 찾아오셔서 이끌어내신 하느님의 사랑을 무참히 배반한 순간도 성경 곳곳에 새겨져 있습니다. 광야는 계약의 백성이 되기 위한 준비의 시공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진정한 안식을 얻기 위해서 우리에게도 광야의 시간이 요구됩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께 배우는 과정 안에는, 우리가 진정 자판기 아닌 인격신 하느님을 사랑하는지, 내 이익만이 아니라 형제와 이웃의 공동선을 바라는지, 자기영광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추구하는지 성찰하게 만드는 사건과 관계들이 줄을 잇게 됩니다. 이 검증의 광야를 거치면서 차츰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의 멍에를 진 그분의 벗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안식은 혼자만 누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이웃과 형제, 세상이 모두 평안하지 않으면 우리의 안식은 그저 먼 일일 뿐이지요. 하느님의 피조물인 우리 모두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을 통해 우리가 절절히 체험하는 바이지요.
우리 모두 탐욕과 자기영광, 이기심을 내려놓고 정말로 가뿐히 주님의 멍에를 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주님 안에서 편하고 가벼이 안식하기를 축복합니다.
성 보나벤투라,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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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suqru22lfss&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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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 28)
편안한 쉼을
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시간이 필요한
우리들 여정이다.
일과 휴식
믿음과 안식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여정이다.
지쳐있는
우리들
삶이다.
안식은
평화를
향한다.
우리들
삶은 안식을
필요로 하고
안식은
우리들 삶을
풍요롭게 한다.
편안한 쉼이
필요한
우리들
마음이다.
무거운 짐을
주님께
내려놓는 것에서
안식은 시작된다.
주님께
맡겨드리는
것이다.
예수님의
온유하신 마음과
겸손한 지혜를
믿음 안에서
배우는 것이다.
낮아지는
믿음이며
낮추는
안식이다.
낮아지신
주님과 함께
쉬는 것이
참된 안식이다.
쉬어야
더 소중하고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안식은
삶의 치유이며
관계의 참된
회복이다.
어리석은 관계가
회복되어야
행복할 수 있는
우리들 행복이다.
안식은
행복이다.
우리를
입히시고
이끄시는
주님이시다.
마르타의 염려와
제자들의 걱정을
받아 안고 가시는
주님이시다.
가장 중요한
것을
일깨워주시는
말씀의 멍애를
메고 우리는
사랑을 배우는
것이다.
말씀은 기도가 되고
기도는 안식이 된다.
안식이 없는
사랑
안식이 없는
믿음은
오래갈 수 없다.
하느님의 안식이
창조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듯
안식은 새로운
삶의 은총이다.
돌보시는
주님께서는
어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
오늘을 다시
살게 하시는
분이시다.
생명은
안식을
필요로 한다.
살아갈 힘을
주시는
안식의
주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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