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 |
한국 |
중국 |
비고 |
2012.7.29. (일) |
14:00 인천공항 출발 |
15:00 (푸동(海東)공항 도착)
<상해> 16:00 타이캉루 옛거리 17:00 남경로 19:00 (항주로 이동 ) |
인천 → 상해 → 항주 |
2012.7.30. (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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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주> 09:00 서호 10:00 화향관어 12:00 청하방 옛거리 15:00 송성가무쇼 17:00 전신 마사지 |
항주 |
2012.7.31. (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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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0 (소주로 이동)
<소주> 11:00 사자림 12:00 운하유람 14:00 (상해로 이동)
<상해> 15:00 발 마사지 15:00 예원옛거리 18:00 상해 서커스 21:45 유람선 야경 |
항주 → 소주 → 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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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1. (수) |
21:00 김포공항 도착 |
<상해> 10:00 동방명주 13:00 임시정부 청사 11:00 신천지 18:00 (훙차오(虹橋)공항 출발) |
상해 → 김포 |
** 여행 개괄지도
*** 여행 일정도
1. 프롤로그
고향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간다는 것은 단순한 일탈의 행동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우리 삶의 터전을 벗어나야한다는 점에서 분명한 목적의식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보호막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의미로 볼 때 위험과 도전은 필연적이다. 또한 미성숙한 인간의 성숙을 위한 과정으로서 여행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일종의 통과의례라는 차원 높은 의미도 가진다. 따라서 인간에게 여행은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개체로서의 완전성을 추구하기 위한 의미 있는 과정으로 생각할 수 있다.
시대와 상황의 변화로 이러한 여행의 본래적 의의는 많이 퇴색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도외시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외국 여행의 경우는 기회의 희소성이라는 측면에서 한번쯤 숙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처음 접하는 외국 사람들과 차별화된 그들의 문화 인식을 통해 자신의 삶의 안목을 넓히는 기회로 삼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단 하나의 목적이라도 염두에 두고 떠나는 여행은 그만큼 흥미와 즐거움을 배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2. 출발하기까지
한 달 전부터 예정되었던 이번 상해 여행은 회사 사정 때문에 떠나는 하루 전까지 불투명했다. 우여곡절 끝에 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에 오를 수 있었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첫 단추가 순조롭지 못하다는 것은 여행의 즐거움이 반감되는 것은 물론 정신적 피로감으로 빚어질 수 있는 체념 상태도 장담하지 못했다. 이러한 압박은 당일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받은 회사에서 보내온 문자 한 통으로 해결이 되었지만 그간 마음고생의 후유증은 미진하게 남아 있었다.
처음 여행 목적지를 상해로 잡았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은 거기서 무엇을 볼 수 있을 것인가였다. 중국 여행은 이번이 두 번째가 된다. 가족들과 시안(장안)을 거쳐 계림을 다녀온 지 12년만이다. 당시 우리 가족들만의 여행이었기 때문에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여행지를 잡았기 때문에 여행 내내 즐겁고 만족스러웠다. 중국 고대사의 중심으로 들어가서 내가 알고 있는 학문적 지식에 대한 현장 답사 의미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시안은 ‘병마용’ 하나만으로도 모든 것을 덮고도 남았다. 거기다 ‘계림’의 심미적 자연경관 체험까지 했으니 아무랄 데 없었다. 덤으로 가족 여행이라는 심적 충만감까지 만끽했으니 거의 완벽한 여행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상해’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가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영국과의 아편전쟁 이후 서구 열강에 의해 강제 개항된 중국 근대사의 치욕을 안고 있는 항구도시라는 것 정도였다. 사실 만약 중국 여행갈 기회가 생긴다면 북경에서 자금성과 만리장성을 보고 싶다는 것이 오랜 희망이었다. 내가 보고 싶은 것, 내가 가고 싶은 곳을 떠나는 것이 참여행일 것이다. 그렇지만 몇몇 부부와 서로 일정과 장소를 맞추고 또 여행사의 주관으로 가는 여행이니 내 바람을 내세울 형편이 못되었다. 그렇다보니 이번 상해 여행의 목적이 불투명해 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셈이다. 다만 일정 중에 항주의 ‘서호’가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소동파가 노래했던 아름다운 호수는 어떤 모습일까 하는 호기심 정도가 내 관심을 끄는 정도였다.
외국 여행을 하면서 내가 가장 귀찮아하는 일이 입출국 수속이다. 기본 외국어인 영어도 제대로 되지 않다보니 모든 것이 지레 겁부터 먹는다. 비행기도 꼭 한국 국적기를 고집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여행은 ‘단체비자’라는 처음 듣는 제도를 통해 수속을 하는 것이라는 여행사 가이드 말을 듣고부터 골치가 아프기 시작했다. 여행사 주관으로 함께 여행하는 팀은 우리 일행 네 부부 여덟 명과 대전에서 친정 부모님을 모시고 남편과 함께 온 가족 네 명, 모두 12명이었다. 그런데 단체 비자가 6명 단위로 끊다보니 우리 부부만 초면의 대전 일행 4명과 행동을 맞춰야하는 것이다. 입출국 때마다 나란히 번호대로 줄을 서서 수속을 받으란다.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처음 대하는 일은 생소함 때문에 항상 고민거리를 만들고, 그것은 부담이 되어 행동마저 귀찮아지게 되는 것이다. 여행은 모험이고 도전이라는 말은 젊은 날의 금언으로 남겨두어야 할 것 같다.
비행기에 탑승 후 이륙을 기다리면서 다소 불안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로서 항공 여행은 언제나 두려움이었다. 비행 중에 기류나 좋지 않은 날씨 때문에 동체가 흔들릴 때면 견디기 힘들었다. 교통수단 중 가장 안전한 것이 비행기라고 하지만 몇 천 미터 상공에서 기체가 이리저리 흔들리면 그런 통계치는 아무 소용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비행기 타기가 무섭고 겁이 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두려움이 생긴 것은 아마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주도 여행을 갔을 때 겪은 첫 경험 때문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악천후 때문에 동체는 나뭇잎처럼 흔들렸고 기내 모든 승객들, 심지어 승무원조차 얼굴색이 하얗게 변했다. 나이 마흔 살에 처음 탄 비행기가 그랬다 보니 이젠 비행기만 타면 그때 악몽이 되새겨지는 것이다. 그런데 탑승하고 보니 아내와 좌석이 떨어져 있다. 낭패다. 비행기가 흔들리면 붙잡고 의지해야할 손이 없는 것이다.
3. 상해의 폭염
푸동공항에 내린 것은 현지 시각으로 15:00였다. 중국은 한국보다 1시간이 빠르므로 인천에서 14:00에 출발했으니 인천에서 상해까지는 대략 두 시간 거리인 셈이다. 지도상으로 제법 멀게 보였는데 체감되는 시간은 짧았다. 생각보다 가깝다는 느낌, 그리고 공항에서 상해 시가지로 진입하면서 펼쳐진 전형적 대도시의 모습에서 별다른 이질감을 느낄 수 없었다. 십 수 년 전 시안 공항에 나열해 있던 공안들의 굳은 표정과 으스스한 분위기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사회주의 국가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고 그냥 두어 시간 거리의 한국 이웃 도시에 들어서는 느낌이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나를 반긴 것은 폭염이었다. 뜨겁다는 표현보다는 찐다는 느낌이 더 가까울 것이다. 숨이 훅 막힐 정도로 순간적인 호흡곤란까지 느낄 정도였다. 상해는 중국 사람들이 용틀임이라고 하는 양자강 하류 항구 도시이고, 시내는 양자강의 지류인 황포강이 관통하고 있어 대기는 습했다. 서울보다 3~4도 기온이 높다고 했지만 습한 공기와 함께 체감온도는 40도가 훨씬 웃도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해외여행이란 설렘 때문에 더위는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아니 잊어야 했고, 또 참을 수 있었다. 어렵게 성사된 여행, 내가 보고 느낄 멋진 문화에 대한 충만감을 예감하면서 관광버스에 오르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상하이(Shanghai, 上海) |
시가지 |
중국 양쯔강[揚子江] 하구에 있는 중국 최대 도시. 황포강이 시가지를 관통하고 양쯔강으로 합류. 면적은 약 6000㎢(서울 605㎢의 약 10배), 상주인구 약 2,300만명(2010년기준). 국제화와 현대화가 이루어진 대도시이자 중국의 대외개방 창구이며, 주요 수출입 국경출입구이다. 남송(南宋) 시대에 진이 설치되고, 명(明) 나라 중기에 왜란(倭乱)을 방비하기 위하여 성을 건설한 이래 400~500년의 역사. 양푸대교[杨浦大橋]와 둥팡밍주타[东方明珠塔], 상하이의 박물관과 도서관, 대극장 등 대형 현대화 건축물이 도시의 멋을 더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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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에서 처음 들른 곳은 타이캉루(泰康路) 예술인거리.
여행소개서에는 우리나라의 홍대 골목이나 삼청동 혹은 인사동을 연상케 하는 곳이라고 소개되고 있지만 좁은 골목이 나를 숨 막히게 했다. ‘상해는 정말 더운 곳이다.’라는 첫인상이 새겨진 것이 이때였다. 상해 첫 여행지가 미로 같은 골목이었고, 상인, 현지인, 외국인, 그리고 관광객까지 합세하여 폭이 2미터도 되지 않는 골목을 가득 메웠다. 곳곳에서 저마다 사진을 찍느라 길을 온통 차지하거나 막고 있을 때면 더위가 뭉텅뭉텅 목구멍을 타고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가이드는 깃발을 높이 치켜들고 쉼 없이 우리를 소풍 나온 유치원생처럼 이끌었다. 주위 풍경에 눈 돌릴 틈도 없이 일행의 뒤꽁무니 쫓기에 바빴다. 서울의 10배나 된다는 면적의 상해의 첫인상치고는 썩 유쾌하지 못했다. 얼른 지저분한 이 골목을 벗어나 에어컨이 좋은 버스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무엇인가에 쫓기는 듯한 인상을 연신 풍기는 가이드는 서울의 명동과 같은 곳이라는 남경로로 안내했다. 상해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라는 말대로 사람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주위에 늘어선 상점들의 호객 소리가 어지럽고, 거리에서 과일을 파는 잡상인들과 관광객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어 우리가 사람 구경하러 이곳까지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상인들은 우리가 한국인인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우리가 지나가면 서투른 한국말로 ‘싸다’ 등의 말을 던진다. 같은 동양인이라도 이목구비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후미진 골목 입구에서 한국말로 또렷하게 ‘짝퉁 있다’ 며 팔을 이끈다. 몇 발자국 따라 들어가다가 언뜻 그들의 필사적인 표정에서 섬뜩한 느낌을 받고 서둘러 빠져나오기도 했다.
첫날 상해 여행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여행 일정은 저녁을 먹은 후 항주로 이동하게 되어 있었다. 가이드는 틈틈이 여러 가지 설명을 했으나 입을 다물고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연변 출신 조선족인 가이드는 대학을 나와 회사에 잠깐 다니다가 이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상해에서 모든 것이 돈 중심이라는 말을 당당하게 말했다. 어떻게 하면 돈을 잘 벌 수 있는가에 삶의 초점이 맞춰져있다는 말을 몇 번이고 강조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은 고층건물, 한국인 못지않게 종종 걸음을 치는 시민들 행동으로 그 말은 충분히 증명되고 있었다. 좋은 말로 ‘희망이 있는 도시’, ‘꿈을 펼칠 수 있는 신천지’라는 말로 상황을 규정했다.
가이드의 말이 설령 옳다고 하더라도 내게는 논리적인 설득력이 부족했다. 상해 시민들의 생활철학이 경제제일주의임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내게 강조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더구나 이 뜨거운 폭염아래 상해의 볼거리라고 데려간 곳은 전혀 볼거리가 없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지 않을 것이다. 여행사의 일정표에 따라 지극히 경제적인 계산아래 짜인 각본에 무조건 따라오라는 일방적인 의사를 관광객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고민을 하는 척이라도 하는 것이 진정한 경제인의 자세일 것이다.
우리가 묻지마 관광을 온 것은 아니지 않은가. 외국 여행이 쉬운 일도 아니지 않는가. 그들에게는 우리가 매일 맞이하는 여행객들 중 한 팀일 뿐이겠지만 진정성은 보여줘야 하는 것이 가이드라는 직장인으로서의 책무이기도 할 것이다. 내가 만난 그 가이드는 상해에서 20년을 살았다고 했지만 단순한 지식의 전달마저도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중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전문 지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데도 그의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상해라는 도시의 기본적인 현황 파악도 덜 되어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상해를 처음 만난 내 인상은 너무 더워 살고 싶지 않은 짜증나는 도시였다.
그러나 아직 여행 시작일 뿐이다. 앞으로 내가 만나게 될 이질적인 문화적 체험에 대한 설렘이 있었다. 또한 우리 일행은 서로 충분히 가까운 사이였고, 즐거움을 기꺼이 나눌 준비가 되어있었다. 때때로 맛난 술도 마시면서, 이국정취의 아름다움도 노래하면서, 우리가 해외여행을 왔다는 선민의식도 공유하면서 즐겨야 할 날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상해에서 항주로 가는 길, 버스가 달려도 달려도 산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넓은 땅처럼 내 마음도 내일의 여행을 기대하며 끝없이 확장되고 있었다.
3. 서호의 소제와 백제
서호는 항주시 서쪽에 있는 자연호수다. 항주를 두르며 흐르는 전단강에 토사가 쌓이면서 오랜 세월의 흐름 끝에 호수가 만들어진 것이다. 호수 남쪽 입구에는 조각상이 하나 있는데 바로 소동파상이다. 소동파(본명은 蘇軾, 1036∼1101)가 항주 지사로 있을 때 황폐해진 서호를 준설하고 제방을 쌓았다. 바로 소제(蘇堤)라고 불리는 곳이다. <장한가(長恨歌)>로 유명한 당나라 시인 백거이(772∼846)가 항주의 지방관으로 부임했을 때 서호는 관리 상태가 엉망이어서 비가 많이 오면 물이 넘쳐서 주변지역에 피해를 입혔고, 반대로 가뭄이 닥치면 호수 바닥이 드러나 버렸다. 백거이는 호수 바닥을 준설하고 서북쪽에 길다란 제방을 쌓았다. 이 제방이 바로 백제(白堤)다.
항주 [ 杭州(Hangzhou) ] |
시가지 |
중국 저장성의 성도. 전당강 북안에 있으며 풍광명미로 알려짐. 선사시대부터 양자강 도작문화(稻作文化)의 중심, 진대(奏代)부터 전당현이라 불리워졌고 한~남북조시대를 통해 오현(소주)과 함께 강남 개발의 거점, 수대(隋代)에 항주로 개칭. 오대십국시대, 월국이 항주를 왕도로 함, 남송·건염 3년(1129), 임안부(臨安府)로 승격되어 행궁이 가설되고 임시 국도가 되었다. 원대에는 항주로(杭州路)라고 했고, 당시의 회교사원 봉황사가 현존. 항주지방은 위진남북조~당시대에 월주요의 중심지로 알려져, 오월전씨의 보호와 장려에 의해 비색청자가 만들어졌으며 북중국과 해외에까지 알려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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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호를 만났을 때 떠오른 것이 한국의 강릉 경포호수였다. 발생학적으로 본다면 경포호와 서호는 동일하다. 바다를 끼고 있는 담수호라는 특징도 같다. 외관상의 차이는 여의도 넓이의 서호가 규모면에서 크다는 것뿐이다. 서호를 중국 강남의 대표적 명승지로 꼽고 있지만 얼른 보기에는 평범한 호수였다. 남송시대 화단에서 서호 10경이라는 말까지 만들었다지만 이름이야 붙이기 나름일 것이다. 예를 들어 연못에서 금붕어가 노니는 것을 풍경을 즐겼다는 ‘화항관어’, 겨울에 백제에 눈이 내렸다 녹을 때 가운데부터 녹아 다리가 끊어진 것처럼 보인다는 ‘단교잔설’. 서호 속에 있는 섬이라는 ‘삼담인월’ 등 그저 그런 것들을 명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보다는 경포대에서 경포호를 바라보며 달이 여덟 개라는 조선 선비들의 여유로움이 더 멋진 것이 아닐까.
서호(남향) |
서호(동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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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호라는 이름은 항주시의 서쪽에 있다는 의미도 있지만 소동파가 서호의 아름다움을 월나라 미녀 서시와 비교하면서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호수 위에서 술을 마시노라니 맑다가 비가 오네> 음호상초청후우(飮湖上初晴後雨) 날이 맑을 때는 물빛이 반짝반짝 아름답더니 수광렴염청방호(水光澰灩晴方好) 비 내릴 때 역시 산빛이 어둑어둑 멋지기 그지없구나 산색공몽우역기(山色空濛雨亦奇) 서호는 미인 서시를 닮았도다. 욕파서호비서자(欲把西湖比西子) 옅은 화장이나 짙은 분, 모두 잘 어울리는구나. 담장농말총상의(淡妝濃抹總相宜)
뜨거운 햇볕을 가리고자 산 부채에 적힌 소동파의 시이다. 부채는 10위안, 한국돈으로 2천원 정도였다.
중국 4대미녀(침어낙안 폐월수화) | |||
서시<西施> 침어(侵魚) |
왕소군<王昭君> 낙안(落雁) |
초선<貂蟬> 폐월(閉月) |
양귀비<楊貴妃> 수화(羞花) |
춘추전국시대인 기원전 5세기경 월나라의 항주에서 태어난 나무꾼의 딸이다. 본명은 시이광(施夷光)이다. 중국에서는 서자(西子)라고도 한다. 월왕 구천이 복수를 위해 오와 부차에게 바쳤다. 어느 날 서시가 강변에 있었는데 맑고 투명한 강물이 서시의 아름다운 모습을 비추었다. 그 모습을 본 물속의 물고기가 수영하는 것을 잊고 천천히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다 하여 침어(侵魚)라는 칭호를 얻었다. |
기원전 1세기 흉노의 호한야 처로, 본래 한나라 원제의 궁녀였다. 한 원제는 북쪽의 흉노를 달래기 위해 그녀를 호한야와 결혼하게 한다. 한 원제는 궁녀들 초상화를 그리는 모연수를 처형. 흉노로 떠나가는 도중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고 고향 생각에 비파를 탔는데 이를 들은 기러기들이 그녀의 미모와 비파 소리를 듣고 날개 움직이는 것을 잊어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고 한데서 낙안(落雁)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
초선은 《삼국지연의》에서 왕윤의 수양딸로 등장해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질시키는 역할로 유명함. 이는 여포가 동탁의 시녀와 염문을 가졌다는 정사의 기록과 왕윤이 여포를 부추겨 동탁을 죽이게 했다는 사실을 각색한 것임. 초선이 화원에서 구름 한 조각이 달을 가리자, '달이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었다.' 고 하여 폐월(閉月)이라 불림. 나라를 망하게 할 정도의 미녀라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은 그녀에게서 나온 고사이다. |
양귀비(719~756년)는 당 현종의 후궁이자, 며느리이다. 양귀비가 화원에 가서 꽃을 감상하며 우울함을 달래는데, 무의식 중에 함수화(미모사)를 건드렸다. 함수화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부끄러워하며 바로 잎을 말아 올렸고, 당 현종이 그녀의 '꽃을 부끄럽게 하는 아름다움(수화(羞花)' 에 찬탄하고 그녀를 절대가인(絶對佳人)이라 칭했다. 안록산의 난 때 피난길에서 처형되었다. |
소동파가 쌓은 소제를 건너 나루터에서 유람선을 타고 서호를 한 바퀴 돌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돌았다기보다는 맞은편인 북쪽의 백제까지 왕복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호수 가운데 섬에는 윤난히 우뚝 솟은 탑이 있는데 뇌봉탑이란다. 북송 때인 975년 오월(吳越)의 왕이 총비 황씨에게서 득남한 것을 경축하기 위하여 세웠다고 하여 황비탑(黃妃塔)이라 불렀으며, 《백사전(白蛇傳)》으로 유명한 백사의 전설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서호에서 본 뇌봉탑 |
백사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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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경극의 희곡. 작자 미상. 송대로부터 전해오는 서호의 뇌봉탑(雷峰塔)에 관한 백사 전설을 1736년에 극화한 것. 서호의 청년 허선(許宣)은 배를 타고 성묘하고 오는 길에, 묘령의 여자 백랑(白娘)을 배에 태워준 것이 인연이 되어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백랑은 백사(白蛇)가 변신한 여자, 허선은 여자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금산사의 법해선사에게 몸을 기탁, 난을 피하려고 하지만, 서호 단교정(斷橋亭)에서 백랑을 만나 같이 살게 된다. 백랑은 임신하여 아이를 낳고, 그 후 법해선사의 법력에 의하여 뇌봉탑 밑에서 백랑은 진압된다. 백랑이 남자의 변심(變心)을 나무라는 ‘단교(斷橋)’의 장면이 유명하다. |
4. 항주의 송성가무쇼(宋城千古情)
청하방 옛거리에서 아내는 찻값을 흥정했다. 용정녹차 가게마다 차를 덖는 솥과 나란히 전시된 초록색 차, 아내는 그 차 이름이 무엇인지 궁금해 했다. 일단 차를 조금 사기로 결정하고 흥정을 하는데 언어불통이다. 내가 볼펜을 꺼내 종이에 한자로 ‘차명(茶名)?’ 이라고 적어 보여줬더니 직원이 무슨 글이라고 썼는데 약자라 읽을 수 없었다. 몽블랑 볼펜을 잃어버린 곳이 바로 그 가게에서였다. 나중에 가이드는 그 글씨가 녹차의 중국식 약어라고 설명했고, 아내는 그 차가 바로 중국 최고의 녹차인 용정 녹차라는 사실을 알았다.
날씨는 여전히 뜨겁고 가이드는 최고의 볼거리라는 송성가무쇼 장으로 안내했다. 여행일정에 포함된 것은 일반석이었다. 가이드는 제대로 보려면 1인당 35천원을 추가하여 VVIP석을 권유했으나 결국 15천원 추가하여 VIP석으로 타협했다.
항주는 남송의 수도였다. 만주의 여진족이 국호를 금이라 칭하고 흠종 때인 1127년에 송의 수도인 개봉(開封)을 함락했다. 이때 휘종, 흠종 등 수많은 황족이 금으로 압송되고 흠종의 동생만이 남쪽으로 내려와 수도를 항주로 정하고 왕조를 재건하였는데 바로 남송(1127~1279)이다. 이후 원에게 멸망할 때까지 150년간 남송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송성 가무쇼는 바로 이러한 남송의 역사적 배경을 극화한 것이다.
<송성가무쇼> (宋城千古情) [제1막 항주의 빛] 송나라의 건국과 태평성대,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화려한 연회 [제2막 금과의 전쟁] 남송의 영웅이었던 악비장군이 금나라에 용감하게 대항하다 간신배(진회)의 계략으로 죽고 결국 멸망한다는 내용 [제3막 서호와 전설] 천년묵은 뱀과 인간의 사랑이야기 [제4막 세계의 평화] 세계인이 항주에서 만난다는 내용. 고산족, 한국의 부채춤 포함
송성민속촌에 있는 대극장에서 매일 3차례씩 공연되는 송성가무쇼는 규모면에서 압도적이었다. 수십 명의 등장인물들과 화려한 의상, 현란한 현대식 조명이 어우러져 장대한 서사시를 그렸다. 약 1시간 반 공연시간 동안 시종일관 흥미진진하고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관람석이 좌우로 움직이고, 무대로 말 탄 군인들이 달리고, 일순간 거대한 물바다로 변하는가 하면, 관람석으로 물이슬 방울이 떨어지게 하고, 극장 전체를 이용한 레이저 조명 등이 압권이었다. 그 중 첫 장면, 갑자기 객석에서 가운데에서 화려한 의상의 궁녀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가슴이 뭉클하여 눈물이 날 뻔했다. 왜 한국은 이런 쇼를 만들 수 없는가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 공연이었다.
쇼를 관람한 후 송성민속촌을 한 바퀴 돌았다. 지독한 더위 때문에 일행들은 그늘을 찾고 있을 때 아내와 거대한 불상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 중 한 곳,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동굴 미로를 헤매다가 착시 회전거울이 있는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곳이었다. 다리는 커다란 원형 거울 속에 있었는데 거울이 빙글빙글 돌아가자 다리도 함께 돌아가는 착시 현상 때문에 무서움으로 쩔쩔매며 아내 손을 꼭 잡았다.
5. 물의 도시 소주
3일째 아침 일찍 항주를 떠나 물의 도시 소주로 향했다. 여행은 이제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입에 맞지 않은 매끼 식사만 제외하고는 특별이 힘든 일은 없었다. 같이 간 부부의 환갑 축하식도 조촐하게 치뤘고, 뜨거운 날씨도 점점 적응되어갔다. 노쇼핑 여행이라 그다지 일정이 빡빡한 것도 아니어서 그런대로 여행의 잔재미도 느꼈다. 가이드에 대한 아쉬움은 여전했지만 그러려니 하면 큰 불만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서울의 주관 여행사의 업무 착오로 돌아갈 비행기 시각이 약간 늦춰지면서 대전에 온 그분들의 귀가 일정과 관련된 실랑이만 뺀다면 대체로 무난한 진행이었다.
소주는 마르코 폴로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했던 곳이다. 동양의 베니스라 불리기도 할 만큼 도시 전체가 물과 운하, 정원으로 유명하고. 중국에서 미인이 가장 많이 난다는 곳이라니 옛날 오염되지 않는 시대에, 고관대작들이 얼마나 살기 좋았겠는지 짐작이 간다. 소주의 아름다운 경관은 중국 영화 대부분이 이곳에서 촬영할 정도하고 하는데, 내가 보고 왔던 소주에는 이 같은 사실을 긍정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없었다.
소주 [ 蘇州(Suzhou) ] |
시가지 |
중국 장쑤성 남동부에 있는 옛 성시(成市). 부근에는 태호, 양징호 등 대소 호수가 있어 도작농업과 상공업 및 내하 수운에 의하여 번영. 성 밖의 호구, 천평산, 영암산 등에는 명소나 유적이 많고 항주와 나란히 강남문화의 중심지다. 수나라(589)때 소주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원말(元末)에 장사성이 소주에서 오왕이라 불릴 무렵, 동란을 피해 시인, 화가가 많이 모임. 성내에는 359개의 다리가 있고 남쪽 교외의 보대교(806경 창건, 1445 중건)는 53개의 석조 아치를 연결하여 길이 317m. 또한 성내에는 유서깊은 원림(園林)이 많고 송의 창랑정, 원의 사자림, 명의 졸정원, 청의 유원은 소주 4대명원으로 알려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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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에서 들른 사자림은 중국식 정원의 전형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청나라 황제가 5번이나 찾았다는 기암괴석으로 꾸민 정원은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규모였다. 특히 암석으로 교묘하게 만든 미로가 압권이었다.
소주 사자림(蘇州 獅子林) |
전경도 |
부지면적 8800㎡이며, 원나라 혜종 때인 1342년 선승(禪僧) 유칙(惟則)이 조성하였다. 정원 안에 사자와 비슷하게 생긴 전설 속의 맹수 산예(狻猊)를 닮은 기암괴석이 있다 하여 사자림보리정종사(獅子林菩提正宗寺)라 명명하고, 줄여서 사자림이라고 불렀다. 원래는 선사(禪寺)였으나 명·청 시대를 거치면서 개인 저택으로 사용되었으며, 1917년 상인 베이런위안[貝仁元]이 폐허가 된 이곳을 매입하여 재건하였다. 1982년 장쑤성의 문물보호지로 지정되었고, 2000년 쑤저우원림[蘇州園林]에 포함되어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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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전체가 운하로 사통팔달이 된다는 운하 중 한 곳을 유람했는데 물의 도시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탁하고 지저분했다. 운하의 폭은 10미터에 불과했고 어떤 곳은 작은 배가 교행이 어려울 정도로 좁았다. 운하 양쪽의 주택들은 당장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아 보기에 안쓰러웠고, 물가에 나와 있는 서민들의 무기력한 모습에서 나도 함께 지쳐갔다.
소주를 떠나면서 가이드가 소개한 호구탑, 소동파가 꼭 한번은 오나라 합려의 무덤이 있다는 이 탑은 약 3.5도 기울어져 있어 동양의 피사의 사탑이라고 불리고 있다지만 차창으로 보이는 까마득한 탑의 모습으로는 그 무엇도 느끼기 어려웠다.
쑤저우 윈옌사탑[蘇州 雲岩寺塔, 호구탑] |
원경도 |
호구탑(虎丘塔)이라고도 한다. 959년 오대(五代)의 후주(後周) 때 착공하여 961년 북송(北宋) 태조(太祖) 때 완공된 누각식(樓閣式) 탑이다. 송나라 때 건립된 탑 가운데 가장 오래 되고 규모가 클 뿐 아니라 구조도 정교하다. 벽돌로 목조건축을 모방하여 쌓아올린 8각형 전탑으로, 모두 7층이며 높이는 47.5m이다. 검지(劍池), 천인석(千人石), 시검석(試劍石) 등 오왕 합려(闔廬, 재위 B.C.515~496)의 전설 관련 유적이 있다. 1957년 기울어진 탑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석함을 통하여 창건연대가 밝혀졌고, 탑의 기반을 튼튼하게 하여 더 이상 기울어지지 않게 하였다. ‘피사의 사탑'보다 창건 연대가 100여 년 앞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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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주와 소주는 아름답기로 소문난 자연경관을 가지고 있다는 여행소개서나 가이드의 말을 증명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도심을 훑다시피 지나온 때문일까. 짧은 여행기간과 제한된 여행경비 문제일까. 현장을 보고 느끼는 문화 체험을 통해 서로를 알고 우리의 위치를 가늠해보겠다는 기대는 충분히 채워지지 못했다.
6. 다시 상해로
소주에서 무엇을 관람했는지 기억도 흐릿한 채 상해로 향했다. 상해에 도착하자마자 발마사지를 받았는데 원래 일정에는 없는 것이었다. 여행사에서 비행기 시간에 대한 실수를 인정하고 봉사 차원에서 급하게 집어넣은 것이었다. 동남아 여행 시 필수코스인 마사지 일정, 나는 항상 작은 고민에 빠진다. 팁을 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번 여행에서 팁 문화에 대한 가이드의 안내는 전혀 없었다. 마사지를 마치고 우리가 나갈 때까지 눈치만 슬슬 보고 있는 종업원들을 보고 있으면 그렇게 어색할 수 없는 것이다. 차라리 미리 얼마씩 주라는 말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작은 배려도 여행의 편안함을 배가시킬 수 있다는 것을 왜 모르나.
상해의 서커스는 원래 첫날 일정에 잡혀 있었다. 송성가무쇼를 보고 난 뒤의 서커스는 졸리기만 했다. 아내는 옆에서 줄곧 졸다가 깨다가 했다. 서커스라고 당연히 있어야 할 공중그네타기, 그것을 잔뜩 기대하고 갔는데 김치국만 마신 격이 되고 말았다. 송성가무쇼와 일정순서를 바꾸었다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황포강 유람선을 타고 상해 야경을 구경하는 것이 이날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유람선을 타고 야경을 본 것은 파리 세느강, 싱가폴, 시드니 야경이었다. 도시의 야경은 언제나 아름답다는 것이 지론이다.
가이드가 몇 번씩 말했던 외탄지구는 버스로, 유람선으로, 동방명주에서 멀리서 보았을 뿐이다. 외탄이 상해 유명 관광지로 손꼽히는 것은 상해가 19세기 말 열강의 조차지가 되면서 세웠던 서구적 건물과, 개와 중국인은 들어올 수 없다는 비애를 가진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잠깐이라도 버스에서 내려 걸어보고 싶었지만 일정에는 없는 것을 어찌 하겠는가. 가이드는 모든 스케줄을 일정표에 의해 움직였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을 몇 차례 했을 때, ‘누가 상해 사람 아니랄까봐.’라는 소리가 목구멍에서 기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던 기억만 떠올렸다.
7. 동방명주
방명주는 이번 여행의 유일한 선택 관광이었다. 가이드가 권하기도 했지만 일행들도 그 유명세를 듣고 같이 희망했던 것이다. 263미터 중간 전망대에서 한 계단 내려가면 바닥을 유리로 만든 전망대가 있는데 아래가 바로 내려다보여 처음에는 오금이 저렸다. 내가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것과 겁이 많고, 간이 작다는 것은 맞는 모양이다.
동방명주 [ 東方明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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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착공, 1994년 10월 1일에 완공. 용도는 방송탑이며 높이는 468m이다. 내부의 고속엘리베이터는 탑승 후 40초 만에 전망대에 도착하여 세상에서 가장 빠른 엘리베이터. 93m, 263m, 350m 지점에 각각 전망대가 꾸며져 있고 최상층부인 350m에는 태공선이라고 불리는 한 시간에 한 바퀴씩 돌아가는 회전형 전망대가 있다. 건축물은 3개의 둥근 원형의 모양과 이를 연결하는 기둥으로 되어있다. 건축물을 구성하는 둥근 모양 때문에 동양의 진주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상하이 야경의 핵심적 역할이다. |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상해 시내는 여느 도시들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유독 눈에 띄는 것은 황포강을 오르내리는 끝없는 선박들의 행렬이다. 수나라 양제가 수도 장안에서 항주를 연결하는 대운하를 건설한 이래 여러 중국 왕조들이 운하를 확장하면서 지금은 북경까지 2000톤급 이상의 배가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는 장면이었다. 어젯밤 유람선을 탔을 때와 오늘 전망대에서 보는 황포강, 한국의 한강은 왜 안 되는가. 나의 단견으로 판단할 문제는 아닌 듯하지만 당장 눈앞의 현상들이 마음을 서운하게 만들었다.
동방명주에 이어 들른 예원 옛거리와 신천지, 새로울 것도 신기할 것도 없는 그럭저럭 관광코스용 정도라는 느낌이었다.
8.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
상해와 우리가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 초등학교 때부터 수없이 들었던 상해임시정부. 과연 그곳은 어떤 곳일까. 평생의 신비로 남아있던 머릿속의 장소, 그곳으로 가는 동안 가슴이 떨리기까지 했다.
한 나라의 정부청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3층 벽돌집은 도로에 붙어 있어 자칫 지나칠 수도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상해를 방문하는 모든 한국인 관광객에게는 필수 코스인 때문인지 안내 체계가 적절히 잡혀 있었다.
상해임시정부 |
임시정부 이동경로 |
3·1운동 이후 일본통치에 조직적으로 항거하기 위하여 설립하였다.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각도 대의원 30명이 모여서 임시헌장 10개조를 채택, 4월 13일 한성임시정부와 통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하였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 6월 11일 임시헌법을 제정, 공포하고 이승만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하는 한편 내각을 개편하였다. 1945년 8·15광복까지 상하이(1919)·항저우(1932)·전장(1935)·창사(1937)·광저우(1938)·류저우(1938)·치장(1939)·충칭(1940) 등지로 청사를 옮기며 광복운동 전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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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에서 임시정부에 대한 소개 비디오를 본 후 밖으로 나와 다른 입구로 들어가는데 신발을 감싸는 비닐 주머니를 나누어 주었다. 전시관은 2층과 3층으로 되어 있는데 오르내리는 계단이 좁고 가파르다. 문득 10여 년 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괴테 생가 방문 기억이 떠올랐다. 일국의 정부 청사가 개인 주택보다 못하다는 느낌으로 마음만 슬퍼진다. 당시 대한민국이 이렇게 가난했을까. 아무리 일본 강점 시대였다고 하나 이것은 너무했다는 비감이 전시장 관람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여행사들의 관광일정표에 대해서도 서운했다. 물론 저마다 여행 일정이 빠듯할 것이고 다음 관광객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어야 한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일렬로 서서 주마간산 격으로 휘익 둘러보고 나오는 행태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행사나 가이드가 좀 더 충분한 시간을 배정하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김구 선생의 집무실, 일국의 대통령 집무실은 침대와 책상, 그리고 비서 한 사람이 앉은 책상이 전부였고, 그 옆방은 국무회의실이라는데 가운데 나무탁자 좌우로 의자 3개 있는 것이 전부였다. 이렇게 좁은 곳에서 어떻게 한 나라를 운영할 수 있었을까.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나마도 유지비용이 없어 장개석 정부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니 당시 조선에 있던 많은 재력가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래층에서 가이드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빨리 나와 다른 곳으로 이동하자는 재촉이다. 임시정부청사조차 충분한 시간을 두고 보지 못하는 여행일정이 갑자기 짜증이 난다.
9. 에필로그
어렵게 성사된 상해 여행 일정이 모두 끝났다. 대체로 불만은 없다. 아마 여름을 피해 봄이나 가을에 왔다면 좀 더 여유로웠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전체적으로 일정은 여유가 있었는데도 뭔가에 계속 쫓겼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가이드의 전략과 직업의식의 부족으로 판단된다. 한국 관광객이 두 번째로 많이 찾는다는 상해, 그만의 특별한 매력이 있었을 것이지만 이번 여행에서 그것을 찾아내지 못한 것이 내 불찰일까. 여행안내서에는 항주와 소주를 상유천당 하유소항(上有天堂 下有蘇杭), 즉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는 중국 속담을 인용하여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여행 중 어디에도 그런 곳은 없었다. 현재의 상황이 옛날과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내가 보지 못한 어느 곳에는 그런 느낌이 드는 곳이 있을 것이다. 빠듯한 여행 일정에서 그런 곳을 찾고자 했던 내 바람은 욕심이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행을 마치면서 특별히 기억이 남는 곳은 상해임시정부청사와 송성가무쇼, 그리고 동방명주 정도이다. 그렇다고 다른 곳은 의미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발자국을 찍은 곳, 내가 눈길을 준 곳, 내 가슴으로 느낀 모든 곳이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곳이다. 여행은 무조건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오로지 관광이라는 단순한 목적이라도 처음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체감되는 것은 수준 이하가 될 수도 있다. 이번 상해 여행은 출발부터 난관에 부딪쳤기 때문에 특별한 목적의식을 가질 여유는 없었다는 것이 옳다. 그 점이 여행 내내 마음을 더 편안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아내와, 그리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한 특별한 시간이었다는 점이 가장 빛나는 목적이 될 것이다.
첫댓글 ㅎㅎㅎㅎㅎㅎㅎㅎ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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