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묘자리 해미성지를 찾아서
박해의 상징 호야나무가 있는 해미읍성
난 내포땅을 좋아한다. 이곳 사람들은 순진하면서도 고집스러울 정도로 우직하기 때문이다. 윤봉길의사도 그렇고, 한용운선생님도 말할 것도 없고, 김좌진 장군도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준 분이다.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시복시성대상자 124명중 51명이 충청도사람일 정도로 순교자가 많다. 중국과 가까워서 그런지 일찍이 서학을 받아들이기 쉬웠고, 혈연으로 거미줄처럼 묶여있어 한 일가가 신앙촌을 형성하기 쉬었을 것이다.
서산의 해미도 신앙이 불처럼 일어난 곳이다.
해미의 산 너머 동네가 김대건신부님이 탄생하신 솔뫼라는 곳으로 김대건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 비오가 1814년에 옥사했고, 대건의 아버지도 칼을 받고 순교했고, 어머니는 반미치광이가 되어 풍비박산이 난다. 그러니 당시에 천주교를 믿는 다는 것은 온 집안의 파멸을 의미한다.
그들은 왜 죽음을 알면서도 가시밭길을 걸었을까? 그런 의문을 품고 해미에 발을 들여 놓았다.
해미는 천주교가 전파된 내포지방의 여러 고을 가운데서 유일하게 진영이 있던 군사 요충지였다. 한때 이순신장군도 이곳에서 훈련원교관으로 10개월을 근무했을 만큼 역사적 의미를 가진 곳이다.
그런 해미읍성이 천주교 박해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1866년부터 100여 년 동안 무려 3천명의 천주교 신자가 죽어갔다. 그 중 양반도 있었고, 미천한 노비, 대가집 규수댁과 몸종도 함께 순교에 동참했다. 철저한 신분제 아래 십자가는 그들을 하나로 묶는 상징물이다. 순교하기 전 양반은 자기가 부리는 노비에게 용서를 빌고 노비문서를 불살랐다고 한다. 그리고 떳떳이 주님을 향해 걸어간 것이다.
부드러운 곡선의 홍예문인 진남문은 읍성의 정문에 해당한다. 동헌을 향해 걷다보면 우측에 '호야나무'를 볼 수 있다. 원래 회화나무인데 충청도 사투리인 호야나무로 불리다가 거의 고유명사화 했다.
이 나무 가지에 천주교도들의 상투를 매달고 매질을 하고 돌로 짓이겼다고 한다. 심지어는 사람이 표적이 되어 화살로 쏘아 죽였다고 한다.
나무를 자세히 보면 하얗게 원이 쳐 있는 자국이 보인다. 바로 저곳에 철사를 묶었다고 한다. 원래 이곳에 가지가 길게 늘어섰다고 하는데 1940년대 태풍으로 부러졌다. 아마 나무 스스로도 자신의 행위에 견딜 수 없었나 보다.
천주교도들은 나무 뒷편 감옥에 갇혀 처참하게 죽어가는 신자들이 절규를 들었을 것이다. 고문소리에 신앙심은 허물어지고 배교를 해야만했다.
당시의 참혹한 현장은 온데간데 없고 너무나 평온한 것이 야속하게 느껴질 정도다. 이 나무에 대한 천주교의 사랑은 눈물겨운 노력은 오늘날에도 계속된다. 1989년부터 해미천주교회에서 썩은 가지는 치료했고, 영양주사까지 맞추며 대대적으로 수술을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근처에 네그루의 후계목까지 심었다. 순교자를 살리는 심정으로 말이다.
위리안치도 그렇고 감옥은 원형의 형태를 띄고 있다. 온갖 고문과 회유에도 그들은 성호경을 그으며 신앙을 지켜냈다. 수천 명의 교인들이 이곳 감옥터를 거쳐갔을 것이다. 서로 기도해주고, 의지하면서 신앙의 힘을 다졌을 것이다. 김대건 성인의 증조부인 김진후(비오)가 10년간 옥고를 치르고, 죽어간 곳이다.
(사진: 휘광이 칼)
몇 년 전에 이곳을 찾았을 때 난 무척 화가 나 있었다.
'왜 주님은 우리 민족에게만 이런 시련을 주셨나이까? 우리는 스스로 주님을 받아 들였고, 누구보다 열심히 믿어왔는데 말입니다.'
이름 석자도 모르는 수 천 명의 사람들이 주님을 부르짖으며 죽어가고 있었는데 교황청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했단 말인가? 혹시나 제국주의에 영토 확장의 앞장 선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기껏 생각해낸 것이 남연군묘의 도굴이었다. 분명 그렇게 되면 박해의 피바람이 몰아칠텐데 왜 그리 무모한 짓을 햇는지 이해를 할 수 없다. 정당하고 합리적인 방법을 찾았어야 했는데 그런 행동에 희생은 이땅의 민초들이었다.
동헌 건물도 복원되었다. 네로황제가 엄지손가락을 거꾸로 하면 사자밥이 되듯 이 땅의 천주쟁이들도 마당에 엎드려 죄 아닌 죄를 고백해야했다.
어떤 이는 그 칼이 무서워, 가족의 위안이 걱정되어 또는 감언이설에 넘어가 배교를 한다. 원님은 만족하고 묘한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배교한 자들은 다시 성을 나와 유다처럼 고민하고 번뇌한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회개하고는 다시 성안으로 들어온다.
"저는 주님을 버릴 수 없습니다. "
아마 그가 주님을 버린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허정 뒷편으로 솔숲이 있어 순교자의 죽음을 생각하며 사색하기에 그만이다. 이왕이면 성벽 위를 타박타박 거닐어 보면 어떨까.
그들은 왜 죽어갔을까? 북쪽에는 인공수로의 해자를 볼 수 있다.
서문밖 순교 성지는 옹색하게 보인다. 서문도 굳게 닫혀 있고, 한때 성지순례자로 북적거렸던 '자리개돌'도 여숫골로 옮겼기 때문이다. 지금 보이는 돌은 모형돌
원래 읍성 옆, 개울을 건너는 돌다리였지요. 천주교도들이 얼마나 지독했던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배교를 강요했다.
이 돌다리 위에 십자고상과 묵주를 깔아놓고 ' 이걸 밟고 지나가면 술과 음식을 베풀어주고 너희들을 바로 풀어준다'라고 유혹했지요.
그러나 아무도 밟고 지나간 사람이 없었습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그런 용기는 어디서 나왔단 말입니까?그리고 신자들은 엄청난 대가를 치루어야 합니다. 천주교도들은 돌에 올려졌고 병사들은 큰 돌로 머리를 짖이겼다. 눈이 튀어나오고 창자가 사방으로 튀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어찌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지 는 핏물이 개울을 따라 수 십리까지 따라 갔다고 합니다.
그 피를 보는 순간 신도들은 두려워야했는데 오히려 감동받고 기뻐한다. 아마 예수님이 죽었을때도 예루살렘 사람들도 이런 생각을 가지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목숨을 바치는 것을 보니 하느님이 있을지 몰라.' 이렇게 주님이 하시는 일은 오묘합니다.
작은 불씨 하나가 세상을 밝히는 불빛이 되었다. 아멘
딱딱하고 무심한 돌도 순교자의 죽음을 애도한 것일까, 돌을 자세히 보면 핏물이 스며 들어 붉을 빛을 띠고 있다.
몇 년 전 딸에게 물었다.
"정수야. 여기는 예수님을 사랑하냐고 물어보고 사랑한다고 대답하면 돌로 쳐죽이고 미워한다고 얘기하면 집에 가게 해준대. 정수는 포졸이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 할거니?"
아주 어려운 질문인가보다. 아주 심각한 고민을 하더니
"포졸앞에서 예수님 미워한다고 대답하고, 집에 가서 몰래 기도할거야. 그럼 모를 거야. 하느님만 알꺼야."
참 솔직한 답변이다.
나는 그런 솔직한 신앙도 잊은지 오래 되었다.
산채로 순교의 구덩이 속으로 ~여수골
수 십년간의 박해에도 끄덕없었다. 천주교 신자는 활화산처럼 불어난다. 형리는 일일이 매질하는 것보다 산 채로 묻어 버리면 훨씬 수월하다고 생각했다. 구제역에 걸린 소처럼 말이다.
죽음의 구덩이로 들어가는 그들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그러나 천국에 들어가는 문으로 생각하고 기도하며 죽음을 떳떳이 받아들인다.
그들은 죽어가면서 "예수 마리아"를 목청껏 외쳤다. 이를 본 동네사람들은 "여우머리"라고 잘못 듣고 여우에 홀려 머리채로 들어갔다고 하여 '여숫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바로 '진둠벙'이란 곳이 이들의 무덤이다. 신자들을 꼭 묶어 둠벙에 처박아 처형하였다. 동네사람들은 '죄인둠벙'이라고 부르다가 오늘날 '진둠벙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옆에 십자가의 길은 순교자가 죽음을 향하는 길로 묘사되어 있다.
"순교자가 죽음의 구덩이로 들어가는 것을 묵상합시다."
그들은 농민이고 천민이었기에 이름도 알려지지 않아 훗날 성인반열에 오르지 못했고 후세에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것에 늘 아쉬움을 받았다. 발굴했을 때 머리를 처박고 죽은 신자, 꼿꼿히 선채로 죽어간 신자들의 유골이 고스란히 모셔졌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날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왕릉처럼 생긴 '유해참배실'을 마련해주셨기 때문이다. 가장 미천하게 죽었지만 이젠 왕의 반열에 올랐단 말이다. 이럿듯 세상은 돌고도는 것이다.
따뜻한 주님의 품안에서 평안하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얼마나 힘들게 얻은 신앙인가? 수천명의 목숨과 바꾼 신앙의 자유를 저는 지금 만끽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쉽게 얻은 신앙이어서 그런가? 세상이 알아주지 않은 나만의 믿음을 지키고 싶습니다.
시장순대
해미읍성 정문 앞에 유명한 순대집이 하나 있다. 원래 시장통에 장사를 하다가 유명해지니 자신의 살림집으로 옯겨 순대를 팔고 있다. 냄새가 나지 않고 푸짐한 것이 이 집의 매력.
점심시간에는 빈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로 유명하다.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172-2
041-688-437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