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원고는 경남신문 4월 12일(수)자 교육면 특별기고로서, 신문에 게재된 내용은 편집을 거쳐 일부 삭제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충분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송부한 원고의 전문(全文)을 탑재합니다. |
열린교육의 이해
최 호 성(경남대학교 교수)
바야흐로 인류는 21세기를 경험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21세기는 천연색 코우트를 입고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막론하고, 21세기를 향한 변화의 소용돌이를 겪지 않는 것은 없을 것이다.
교육도 그 예외는 아니다. 새로운 1000년을 맞이하면서, 우리의 자녀들을 어떻게 길러 가야 할 지에 대해 혼란스러울 만큼 다양한 주장들이 쏟아져 나왔다. 국가가 주도한 ‘교육개혁’의 태풍은 교사는 물론이고, 학생 및 학부모의 가치관과 생활방식을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하였다. ‘열린교육’, ‘수행평가’, ‘학교운영위원회’, ‘수준별교육과정’과 같이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의 정책들이 혼재하고 있다. 우리는 새로운 교육정책들의 모태(母胎)를 규명하거나, 그들간의 상호작용성을 진지하게 따져 볼 여유를 갖지 못하였다. 기원과 실체의 정체감을 확보하지 못한 갖가지 교육정책들은, ‘자기 발전의 내적 원동력’을 발현시키지 못한 채로 사회정치적 외부세력에 밀려 출몰과 부침(浮沈)을 계속해 오고 있다. ‘교육을 겨냥한 교육의 정책들이 교육적 논의를 배제시킨’ 지극히 당연한 귀결일 지도 모른다.
이미 도입된 지 10여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 간 ‘열린교육’은, 극단적 신봉주의자와 부정적 냉소주의자간의 팽팽한 긴장속에서 그 어떤 생산적 교육 담론(談論)도 성숙시키지 못한 채, 그저 우리에게 익숙해져 버린 한갖된 ‘단어’가 되어 버렸다. ‘열린교육이 아이들을 망친다’는 재미 교육학자 황 용길 교수의 질타를 놓고, 우리 교육계는 ‘인정(認定)의 겸허함’과 ‘합리적 반박의 예리함’을 발휘하질 못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국이 경험한 개방교육과 한국이 추구하는 열린교육은 근원적 차별성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그러해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 교육계는 ‘유사(類似) 열린교육’과 ‘위장(僞裝) 열린교육’의 파상적 공격에 대해, 전통과 역사의 맥락이 숨쉬는 우리 교실을 무비판적으로 내어 주고 있지는 않은 지 되돌아 볼 일이다.
일찍이 서구의 열린교육은 진보주의 교육철학으로 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영국에서는 1950년대와 60년대까지, 유아 및 초등학교 저학년을 중심으로 전시(戰時) 교육 상황으로부터 출발된 “자유학교”의 전통이 이어져 왔다. 영국은 유아학교에서의 비형식적 교육을 통하여 아동의 자유가 존중되는 학교, 교사의 전문적 자율성이 보장되는 학교, 생활에의 적합성이 높은 학교 교육을 추구해 왔다.
이러한 영국의 교육전통은 1960년대 이후, 학문구조중심의 교육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던 미국 교육계에 상당한 매력을 주었다. 영국의 교실은 아동의 흥미와 관심을 중심으로 코너학습, 융통성 있는 시간표 운영, 팀티칭 등을 통해 다채로운 수업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열린 공간을 활용한 이동식 수업, 주제와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한 교과통합적 수업을 운영해 가고 있었다.
이제, 미국은 과거 자신들이 영국으로 전파시켰던 진보주의와 인본주의 교육철학을 가치중립적용어인 ‘열린교육 혹은 개방교육’(open education)의 이름으로 다시 수입하게 된 것이다. 미국은 적어도 198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신보수주의적 교육개혁이 있기까지는, 열린교육을 통한 자유주의 학교를 확산시켜 왔다.
일본은 미국의 열린교육을 개별화 및 개성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였다. 특히 일본은 특유의 자기화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미국의 열린교육에서 강조하는 팀티칭과 열린 공간을 활용하여, 여러 교과영역에서 개인의 수준과 개성에 알맞은 수업, 즉 하게미(오름길 학습)학습을 발전시켜 왔으며, 일본인 특성에 알맞은 집단속에서의 개별화 교육을 위한 팀티칭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한국에서의 열린교육은 1984년부터 서울의 영훈 초등학교에서 실시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후 1985년에 운현 초등학교가 개교하면서 열린교육에 동참하게 되었다고 한다. 공립학교로서는 경기도의 안중 초등학교가 처음으로 열린교육을 실천하였다고 하며, 그 후 열린교육협의회와 열린교실응용학회의 노력으로 전국적인 확산․보급이 가속화되었다.
물론 한국의 열린교육이 그 철학과 실천에 있어서 순수 자생적 교육운동은 아니었다. 서구 교육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가까이는 일본의 교육개혁으로 부터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이 사실은 한국 교육의 주체성을 구속하는 족쇄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한국이 외국의 교육이론과 실천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소극성을 탈피하여, 한국의 전통과 상황에 적절한 교육운동으로 승화시킬려고 노력만 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새롭고도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 줄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최근 한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열린교육이 적어도 70년대 미국의 열린교육의 복제품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현재까지 열린 교육에 관한 단행본이나 연구논문들이 거의 발표되지 않는 미국 교육계를 들여다 보더라도, 그들에게 열린교육은 “세계수준의 경쟁력있는 미국교육”의 희망을 더 이상 보장해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속된 표현을 빌리자면, 이미 1990년대 이후의 미국에서 열린교육이란 ‘한물간 교육’이며, 그 자체를 미국 교육계는 잊은 채 살아간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왜 이렇게도 열린교육을 외치고 있는가? 필자가 보기에, 열린교육은 앞으로도 계속 부르짖어야 한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가야 한다. 비록 같은 용어를 쓰고는 있지만, 한국의 열린교육은 무비판적으로 수입하고 흉내내는 70년대 미국교육이 아니라, 우리 나름대로의 ‘교육문화 혁신’ 노력이어야 한다. 우리의 교육이 창의적 문제해결력을 신장하는 데 적합하지 못한 교육이었다면 그것을 고치고, 인간의 전인적인 역량을 온당하게 평가해 내는 데 실패하였다면 그것을 바로 잡아야 하며, 학교의 경영이 비민주적이었다면 보다 민주적으로 바꾸어 가고, 학부모의 소아적-이기주의적 교육관이 학교교육의 폐단을 심화시켰다면 그것을 완화시키려는 노력과 같이 교육 본연(本然)을 회복하기 위한 ‘21세기형 교육 르네상스’를 지향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적어도 열린교육은 합의된 의미로 소통되어야 한다. 열린교육과 비열린교육을 현명하게 식별해 내기 위해서도, 아니 경직된 열린교육 관점에 스스로 갇혀 버리지 않기 위해서도, 우리는 열린교육의 개념에 대한 열린 논의를 허용해야 한다. 비록, 열린교육운동이 초등학교의 교실 수업 사태를 혁신하기 위해 출발된 것이라 할지라도, 이 즈음의 열린교육은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교육장소의 열림’, ‘교육시기의 열림’, ‘교육내용과 방법의 열림’, ‘교육행정의 열림’ 등과 같은 열린교육의 갖가지 가능태(可能態)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미 열린교육은 출발 당시보다 수평적․수직적으로 그 외연(外延)이 크게 확장되어 왔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한국형 열린교육은 거시적․미시적 수준에서의 다양한 교육개혁들을 포괄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학교급별에 구애되지 않으며, 특정 교육상황에만 국한되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와 기성(旣成) 교육으로부터의 탈피 행위를 모두 열린교육으로 간주하자는 뜻은 아니다. 제 아무리 열린교육의 의미를 확장해 가더라도, 열린교육과 그것이 아닌 것을 구별할 수 있는 가치판단의 일반적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
먼저, 열린교육은 최근 동안 전개되어온 한국교육개혁의 신(新)교육 운동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되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 교육계의 열린교육 운동은 ‘교육을 통한 국가 경쟁력의 강화’라는 국가 수준 교육개혁 조치의 전위(前衛)가 된 셈이다. 열린교육은 새로운 교육개혁 움직임을 가속화하려는 하나의 ‘전략적 용어’로 해석되는 게 옳은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용어에는 두 가지의 전략적 의도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하나로, 이 용어는 ‘바른 교육’, ‘좋은 교육’, ‘효율적인 교육’, 즉 ‘교육다운 교육’으로 옮아 가려는 희망의 표출이며 그 실현을 위한 조직적 실천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기존 교육의 부정적인 측면을 해소하고, 보다 건전한 교육기업을 구축해 보려는 일련의 의식적․체계적 노력들을 총괄하기 위해 고안된 하나의 우산식(雨傘式) 개념인 것이다. 또 하나는, ‘열린교육’이라는 용어가 새로운 교육운동에 대한 세인(世人)의 관심을 고조시키기 위한 깃발로서 기능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과거와는 색다른 용어를 들고 나옴으로써, 보다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동참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일찍이 해방 이후 민주주의와 진보주의 교육이념에 바탕을 둔 새 교육 운동은, 어쨌든 전통적 교육이 ‘헌 교육’이었음을 전제로 한다. 1980년대 중반 전교조를 중심으로 한 ‘참 교육’ 운동도 마찬가지이다. 이 운동의 기저에는 현재까지의 교육이 비록 ‘완전한 거짓’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참다운 교육’이라고 볼 수는 없지 않겠는가 라는 현실적 반성이 깔려 있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열린교육’운동을 해석한다면, 이 운동은 현재까지의 교육 전반이 ‘닫혀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운동들은 과거 교육의 부정에만 그치지 않고, 새로운 교육의 희망을 제시해 준다. ‘헌 교육’을 ‘새 교육’으로, ‘참되지 않은 교육’을 ‘참 교육’으로, ‘닫힌 교육’을 ‘열린교육’으로와 같이 말이다.
그 같은 교육운동들은 제 각각 상이한 시대적․사회적 산물로서, 비록 교육운동의 철학과 내용은 다르겠지만, 기존 교육에 대한 반(反)작용이며 동시에 미래 교육의 비전이라는 점에서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이 말은 ‘열린교육’ 운동 또한 전혀 생소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이 아니며, 어쩌면 조금은 추상적인 표현으로, ‘교육 본연으로의 복귀를 위한 집단적 실천’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이때의 열린교육은 새로운 사회적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신 교육운동으로서, “열린교육 운동”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두 번째로, 열린교육은 도입 초창기의 동기(動機)와도 같이, 교실에서의 교수-학습 혁신 노력을 가리키는 용어이기도 하다. 이 용법은 열린교육의 협의적 해석으로서, 교실에서 펼쳐지는 교수-학습 활동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가리킨다. 전통적 교실을 지배해 온 획일성과 교사 주도성, 지식의 파편성과 학습자의 몰개성화 현상 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일체의 노력을 열린교육이라 부른다. 이때의 열린교육은 단위 학교를 중심으로 한 교수-학습 장면에서 전개된다고 보아, ‘열린 수업’ ‘열린 학습’이라고 부르는 게 보다 적절할 것이다.
이러한 어법의 열린교육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기존의 수업사태로부터 탈피하여, 정보사회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그에 적합한 인간을 교육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수업 패러다임이 정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개별화․개성화의 이념, 자율화의 이념, 통합화의 이념, 그리고 협동화의 이념이라고 한다. 이 네 가지의 이념이 열린수업, 열린학습의 근본원리가 되어야 하며, 열린교육의 기본 모델과 선택사양(마치 자동차에 비유하여)을 분별할 수 있는 기준으로 기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러그 미팅이나 코너 학습을 실천하고 있는 가에 따라 열린교육과 그렇지 못한 교육을 구분해서는 안 된다. 외양에 얽매이기 보다는 실질에 근거해야 한다. 미국이나 영국의 열린교육과 현상적으로 얼마나 닮아있는 지를 확인하기 보다는, 그 두 가지의 교육실천이 과연 열린교육의 네 가지 기본원리를 구현하는 데 진실로 타당하고 적합한 전략인 지를 따져 봐야 한다. 학생 저마다로 하여금 자신의 개성과 적성에 적합한 교육기회를 구가할 수 있도록 도와 주고, 학생 스스로가 생각하고 학습하는 방법을 학습할 수 있게 하며, 전인적 발달을 포함한 통합교육을 경험할 수 있게 하고, 학교교육을 통해서 ‘더불어 사는 삶’이나 ‘네트워크 사회의 수평적 인간관계’를 터득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열린교육의 다원성을 감안할 때, 열린교육과 비열린교육은 구체적 사안에 따라 인정 여부가 판단되기보다는, 열린교육의 근본 이념과 원리를 중심축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열린교육은 ‘학교교육체제의 개방과 국가 교육통치구조의 조정 행위’를 지칭한다. 그것은 평생학습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전통적 학교교육의 역할 및 기능을 재개념화하는 일이며, 교육통치 구조 자체에서의 비민주적․비효율적 요인들을 거세하는 일이다. 이러한 의미의 열린교육은 두 가지의 방향성을 지닌다. 그 하나는 ‘학교교육 밖으로의 열림’이며, 또 다른 하나는 ‘학교교육 안에서의 열림’이다.
전자는, 교육의 기회가 학교라는 형식적 제도에서만 허용되는 게 아니라는 평생교육의 이념위에서 ‘학습사회’의 제도적 기반을 구축한다는 것이다. 열린 교육체제에서는 개인이 특정 수준의 학교교육을 졸업하였다고 해서, 예컨대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졸업했다고 해서, 그 개인의 교육이 멈추는 게 아니다. 인간은 죽음의 순간까지도, 자신의 성장 욕구가 남아 있는 한 교육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특정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유리한 교육은 결코 열린교육이 아니다. 진정, 열린교육이 개인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교육이라면, 그것을 담아 내는 교육체제도 마땅히 열려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인간 저마다의 적성과 소질을 계발할 수 있도록 ‘누구나,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나’ 자신이 원하는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허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후자는, 현재의 제도권 학교교육 안에서의 열림을 의미하는 것으로, 교육 통치 구조 자체를 개방화․합리화․민주화하는 노력이다. 열린교육은 기존의 중앙집권적 통치구조를 지방분권적․개방적 통치구조로 전환해 보려는 것이다. 과거, 미국이나 영국식의 방임적 분권화를 지향하자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획일적이고 타율적인 교육통치 구조를 민주화해 보려는 것이다. 국가, 지역사회, 단위 학교가 유기적 역할 배분을 통해 자율성과 책무성을 조화시켜 가는 일이다.
교육자치제를 발전시켜 가려는 것이나. 지역 교육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시민 교육 운동을 활성화 하는 일, 학교운영위원회를 통한 단위 학교 경영의 민주화․인간화, 더 나아가 교육과정을 지역화하여 교육내용과 방법의 적합성을 제고하는 일 등은 모두가 국가 교육통치 구조의 재구조화를 통해 실현되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열린교육은 1980년대 중반 서울의 일부 사립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실천되었다. 시기적으로는 전교조의 참교육 운동과 매우 가깝다. 당시 한국의 교육계는 전통적 교육철학과 방식으로써는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에, 새로운 대안적 교육운동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전교조는 한국의 정치사회적인 상황과 맞물려 학교교육의 사회구조적 측면을 부각시켰으며, 당연히 정치적 대항집단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그만큼, 교육혁신을 위한 전교조의 열정은 평가절하될 수 밖에 없었으며, 자생적 교육운동의 순수성도 희석되어 갔다. 한편, 열린교육은 전교조 운동과는 다른 길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이념적 논쟁을 철저히 배격한 채, 학교 현장을 중심으로 교육의 내용 및 방법, 교육환경을 변화시켜 보려는 지극히 소박하고도 순수한 교실개혁운동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제 열린교육이 시도된 지 10 여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고, 국가가 교육개혁의 공식적인 방향으로 열린 교육체제를 표방하는 상황에서, 애당초의 열린교육이 지녔던 의미는 변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사실상 변화되고 있다. 열린교육이 도입되던 초창기에는, 주로 서구의 열린교육 실천 학교들에서 목격할 수 있는 수업방법과 교실환경을 수용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열린교육은 프로젝트 학습이니, 오름길 학습이니, 그리고 코너 학습이니 등등의 비교적 우리 교육에서 생소한 교육실제들을 전파하는 정도였다. 이제 그 동안의 열린교육 실천 경험속에서, 열린교육은 단지 교실상황의 교수-학습 실천 전략을 바꾸려는 노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그것만으로 열린교육이 정착․발전되기 어렵다는 인식들이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열린교육은 세계화․정보화 사회의 도전에 능동적으로 응전하기 위한 필연적 생존전략이자,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한국교육이 서구 교육이론과 실천의 무비판적․탈맥락적 이식(移植) 장소로 더 이상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교육에 대한 냉철한 반성과 비판을 통해 독창적인 교육 개혁 모델을 구성해 내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21세기 한국교육계의 최대 숙제로 던져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