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탐방
한 생각을 잘 일으켜야...
- 법림사 주지 무진 스님
현일 / 대교과
사리암에서 한 달간의 겨울 방학 소임을 마치고 운문사 26ㅎ회 선배스님이신 광주로 가는 동안 날씨는 화창하고 구름도 없고 하늘은 푸른 봄날이었다. 광주시내에서 법림사로 가는 길은 꼬불꼬불, 가는 곳마다 밭이며 시골 풍경이 친근했다. 언덕 위로 올라갈 때 산내음이 물씬 풍겼고, 정상에는 법당 풍경소리가 우리를 반겨 주었다.
법림사에 도착하는 순간 앞에 펄쳐 진 산등성이들은 우리를 포근히 감싸 주는 것 같았다. 단청이 없는 단백한 대웅전의 모습은 주위 산들과 참 잘 어울렸다. 절의 모습을 감상하며 스님에 대한 궁금증이 더욱 솟구치는 그때, 마침 무진스님께서 "반가워요" 하시며 맑은 목소리로 저희를 반겨주셨다.
다실로 안내받아 요사체 안으로 들어갔는데, 복도 한편에는 빼곡한 책들이 있었고, 이 책장을 지나 다실에 들어가는 순간 전면유리창으로 앞산 풍경이 그대로 보였다. 서서 바라만 보고 있는 우리에게 스님께서는 신도분이 직접 만든 녹차라며 차를 내려 주셨다. 담담한 차 맛에 편안해진 분위기 속에서 스님은 자연스럽게 출가 인연을 말씀해 주셨다.
어린 시절 타 지역에서 근무하신 부모님을 떠나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을 했어요.
중2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제 눈에는 할아버지가 그대로였어요. 단지 숨만 안 쉬고 누워만 계신 것 같았는데..... 할아버지를 잊을 수 없어서 6개월간 잠을 못 잤어요. 저는 그때 교회를 다니고 있었고요.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교회 목사님께 찾아가서 "목사님 할아버지는 교회에 한 번도 와 보신 적이 없는데 저희 할아버지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라고 물어봤어요. 그런데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믿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는다" 라는 말에 그만.....
그때 불현듯 중학교 봄가을 소풍으로 뒷산 절에 간 기억에 떠올랐어요. 그래서 덕산사에 가서 스님을 만나 뵈었어요.
스님께도 목사님께 했던 같은 질문을 다시 했어요.
스님께서는 "무엇을 믿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착하게 살았다면 좋은 곳에 태어나고 그렇지 않았다면 그와는 반대가 되겠지요."
이 이야기를 듣고 즉시 출가를 하려 했는데 스님께서 고등학교 졸업장을 가지고 오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바로 출가는 못하고 고등학교에 진학을 하였지요.
그 후로 집에 있던 불교서적이 눈에 보였어요.
달마대사 [혈맥론], [관심론]이었어요.
첫구절에 '관심일법觀心一法 총섭제행總攝諸行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포습한다.' 지금도 이 문구를 화두처럼 여깁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출가에 대한 생각을 잠시 잊어버리고 학교 졸업 후에 진로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힘들 때, 찾아뵈었던 덕산사 스님들과의 약속이 생각나서 절을 찾아 그때 뵈었던 사형님을 만나 출가를 하게 되었어요.
스님의 말씀 중 거울 속에 자신을 바라보며 던진 질문(저 사람이 누구인가?)을 들으니 문득 나의 출가 동기가 생각이 났다. 성철 큰스님의 {영원한 자유}라는 책에서 '자기를 바로 봅시다' 라는 이 말에 '대체 자기를 바르게 보고 안다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과 나와 모든 이들의 영원한 행복을 위해 발심을 했었다. 그래서 스님께 발심을 하시고 세우신 원력이 궁금해서 여쭈어 보았다.
20대에는 강원을 다니면서 오로지 부처님 경전을 제대로 한번 보는 거였어요.
그래서 30대에는 부처님 말씀을 직접 몸으로 체득하고자 그리고, 선지식들의 수행담을 나도 한번 맛보고자 선방으로 향했지요.
첫 철은 해인사 약수암에 방부를 들였고, 성철 큰스님이 계신 총림이기도 했고요.
척추결핵으로 오랜 시간 앉아 있기 힘들었는데, 2시간 앉아도 피곤하지 않을 만큼 좋았어요. 참선을 하면서도 경전을 늘 봤었어요.
40대에는 지금의 법림사를 지은 후 복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때의 원력으로 광주시 소태동에 속가 인연으로 조그만한 건물을 무상임대해서 포교활동을 하면서 광주불교교육원(22년 현재 23회 졸업생 배출)에서 학장 소임을 보면서, 재가 불자님들과 호남불교에 불교를 꽃피우고 싶었어요.
본격적으로 사회복지를 하면서 전문지식을 쌓아야 해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고, 곧바로 동국대 명상상담학과에서 석사과정를 공부했어요. 어르신을 위한 자비명상 프로그램을 통해서 우울감을 가진 파킨슨어르신신이 점차로 치유가 되어가는 과정을 주치의가 의사소견서로 증명해 주셔서, 석사논문을 수월하게 통과했어요.
50대에는 전남대 교수님들과의 친분으로 박사과정을 하면서 전남대 산업공학과에서 사찰음식 강의를 통해 젊은 학생들하고 좋은 시간을 보내고 지냈어요.
어릴 때붙터 몸이 약했던 저는 이렇게 많이 살 줄 몰라, 출가시절에 60세까지만 버킷리스트를 작성했어요. 60대, 지금은 덤으로 사는 생이기에 아무 계획 없이 살아요. 그냥 붓다의 삶으로 사는거죠. 코로나19로 인해서 자연스럽게 놓아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계획이 있다면 2500평 밭에서 어르신들을 위한 야채와 3분의 1은 꽃밭을 만들어 가고 있답니다.
스님께서 20대부터 60세까지 출가계획을 세우고 그대로 실천하신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스님에 대해 사전에 알아본 바에 의하면 대표적으로 주간보호와 방문요양을 하는 {대해노인복지센터}와, 매일 어르신들이 행복하게 건강한 먹거리를 드시는 무료급식 {대해행복밥상}과, 1년에 한번 경노잔치인 {만발 공양}, 자비연탄 나눔 행사, 건강한 먹거리를 직접 키워서 내 몸을 만들어 가는 {사찰음식강의}와, {자비명상}을 통해서 매년 2학기 과정으로 자비명상지도사 8기생을 배출해서 {코로나로 잠시중단} 방과 후 학생들과 대학원에서 강의중이다. 또 템플스테이를 통해서 중고교생들과 함께 붓다의 가르침을 재미나게 실천하고 한국불교가 곧 화엄불교이기에 {화엄경법회}를 통해 보현행을 실천하는 불자를 만들어 가는 자원봉사 활동 등이 있어서 궃체적으로 어쭈어 보았다.
스님의 원력으로 이루신 일 중에서 대표적인 {대해노인복지센터}에 대한 궁금한 점이 있는데요. 특별히 노인복지를 하시게 된 이유와 {대해노인복지센터}에서는 어떤 일들을 하시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90년 초반에 가정형편이 좋지 않은 아이들은 돈이 없어서 중학교를 못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 년 동안에 조금씩 모아 매년 3명씩 장학금을 주었던 게 단초가 되었어요.
어는날 장학생 아이 집에 갔었는데, 어려운 형편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너무 안쓰러웠어요. 그때 한 생각이 났는데 어려운 분들에게 밑반찬 배달을 해드려야겠다. 그래서 신도분들이 부처님께 올린 쌀을 한 자루 모아지면 김치 한 통을 담아서 한 집, 두 집 배달하게 되었는데, 어느새 50~70여 분의 어르신들이 늘어나자 자원봉사자 수도 많이 필요했어요. 그런 과정에서 마음속으로 또 한 생각을 내었어요. '시내에 5층짜리 건물이 있었으면 좋겠다' 는 원력으로 지금의 센터가 이루어졌어요.
제 계획은 지하1층은 흥겨운 노래방, 1층은 무료급식소, {대해행복밥상}이라고 급식을 하면 300명씩이나 많이 왔어요. 2층은 물리치료실, 3층은 개개인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실, 4층은 법당이에요. 4층에 법당이 있는 이유는 1층에서 밥을 먹고, 2층에 물리치료 받고, 3층에서 흥겁게 즐기다가 집으로 가고, 어느 날 4층 부처님이 궁금해서 올라와서 부처님도 뵙고 자연스럽게 함께 하면서 불자로 만들고자 했어요.
그런데 한 생각이 나서 원력을 세울 때는 구체적으로 해야 해요.
지금 현재 {대해복지센터} 건물은 너무 오래되고 허름해요. 나에겐 경제력이 없었고 한 생각에 생긴 건물이기도 했지만 좀더 구체적으로 했었다면 좋았을 텐테... 하는 마음이 아직도 있어요.
스님의 원력으로 오랫동안 복지와 포교 활동을 하시면서 어렵거나 힘든 일들도 많았을 텐데 그럴 때는 어떻게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어려서 열등의식이 강했어요. 학교 다닐 때 번호가 1번 아니면 2번이라서 건강도 약했고, 키도 작고 엄마도 안 계셔서 할아버지 하고 살다보니, 그래서 엄마 없는 소리 듣기 싫어서 진짜 열심히 공부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부처님 법을 만나서 당당해졌어요. 이 사바세계에 왔을 때는 제 역활이 있지 않겠어요?
"언젠가 할 일이라면 지금하자! 누군가 할 일이라면 내가 하자!"
인생은 어차피 배우는 거예요. 세 번만 실패하면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될 거예요!
즐겁고 재밌게 했어요. 덤으로 산 인생, 덤으로 할 일이 있으니 살아지는 거예요.
스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니 문득 백조가 우아하고 아름답게 물 위를 다니지만, 사실은 물 아래서 보이지 않게 열심히 발을 움직이듯이, 스님께서 원력을 다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부처님의 법을 따르시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모든 일에 최선을 다 하셨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스님께서는 어떻게 수행해 나가실 것이며, 저희 후배 스님들에게 수행에 도움이 될 만한 좋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나의 한 생각을 어떻게 세우는 것에 따라 원력이 되거나 입력에 끌려가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반드시 원력을 세우게 되면 구체적으로 해야 해요. 하지만 지금은 화엄경을 곁에 두면서 화장장엄 세계를 바라며 매일 80권 화엄경을 불자님들이 좀더 쉽게 독송하고 생활에 실천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되게끔 회갑인 3년 전 법공양관으로 인쇄한 "한 권으로 읽는 화엄경" 을 광주불교교육원 강의 책자로 사용하려고 계속 작업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사바의 인연이 다하는 날까지 한국불교, 화엄불교를 꽃피우기 위해서 밭에서는 꽃을 가꾸고 내 마음의 경전인 화엄경은 깊이 수지 독송 서사하는 공덕의 탑을 쌓아가 보렵니다.
후배스님들에게는 공부하는데 있어서 강원에서는 온전히 부처님 경전을 바르게 이해하고 확신하면서 우리네 삶과 붓다의 철학이 온전히 하나 됨을 체득해야 합니다.
화엄경에서 나타내 보이신 수행단계로서 신해행증信解行證
信 믿는다는 것, 어떻게 믿을 것인가? 확신이 중요합니다.
解 이왕 믿는다면 바르게 이해해야 해요.
行 바르게 이해했다면 바로 실천으로 옮기겠지요.
證 부단히 실천하다 보면 깨달음을 증득하는 거지요.
선재동자의 구법행으로 보현보살의 대원행, 그리고 문수보살의 대지혜행을 내 삶 속에서 꽃피우면서 재미나게 강원생활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간이 언제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스님이 들려주신 이야기들은 다시 들어도 좋을 만큼 힘이 되는 말씀들이었다. 스님과 함께 다실 앞 무등산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고 밭을 구경시켜주셨다. 밭은 정말 넓었다. 이 밭에서 나는 작물들로 어르신들에게 맛있는 공양을 하셨을 스님을 보니, 그 뒷모습이 더 위대해 보였다. 그리고 하우스에서 자라고 있는 상추를 한 개, 두 개 뽑으시고 흙을 툴툴 터시면서 "유기농이니 가서 맛나게 먹어요" 라고 주시는 모습에 소탈하지만 가장 중생 가까이에서 포교하시는 삶을 엿 볼 수 있었다.
다음에 올 때는 이곳에 많은 이쁜 꽃들로 장엄 될 모습을 상상하며 스님과 인사를 나누고 돌아왔다.
언제나 긍정적일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의 법을 배우셨기 때문이고, 한 생각 내어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력했기에 모든 이들에게 원력 보살이 된 가르침은 '역시 어른스님들은 가까이서 친견해야 돼' 로 느껴졌다.
현재 운문사의 교화부장으로서 이번 기회에 포교에 나의 원력에 대해 다시 돌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늘 경전을 곁에 두시며 공부하시는 스님!
오늘은 큰 가르침을 얻은 행복한 날이었다.
이 글은 불기2566년 雲門지 봄호에 있는 글을 퍼왔습니다.
그리고 운문사 홈폐이지 계관운문에서 더 자세히 볼수 있습니다.
운문사 사리암 도반 법우 여러분 나반존자님의 가호 가피 많이 많이 받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첫댓글 즉사이진 매사에 진실하라,
어떤 힘든 고통이 있었기에 길에서 방랑하는 여인을 보았는데, 인사를 건네니 잠시 과학관 어린이 대공원 구경을 하다 갈 거라고 합니다.
밥은 드셨나고 하니, 안 드셨다고 하기에.. 김밥이라도 꼭 사 드세요.. 그리고 따스한 눈맞춤 인사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다 같음을 슬픈마음 이겨내고 부디 마음의 건강을 찾기를 기도했습니다.
마음을 환히 밝혀주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나반존자 나반존자 나반존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