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날에 관한 시모음 12)
복날 /조하혜
뼈를 우려낸 국물을 훌훌 들이키고도
상 위에 수북이 뼈다귀가 남았습니다.
어머니,
당신을 참 맛나게 먹었습니다.
아무런 말도 하시지 않는 당신의 밥상 앞에서
쪽쪽 뼈들을 발라내고 빨아먹기도 했습니다.
상 위에 수북이 쌓인 뼈들이
당신인 것을 안 뒤에도 한참을
한 번 소리내 우시지도 못한 당신,
복날이 지나고,
가을 바람 서걱일 때
텅 비어버린 당신의 뼈 속으로
우수수 바람 스며듭니다.
정살 뿌옇게 오른 세계에서
또 아기가 태어나고
나도 늙어 당신의 뼈마디에서 들리는
음악소릴 연주해 볼 참입니다.
여름이 곳곳에서 무성합니다.
중복 /나상국
하지로부터
네 번째 경일이라는 오늘
중복이다.
열대야로 잠 못 이룬 밤
바람 한 점 그리워
창문을 모두 열어 놓았지만
바람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콧구멍도 보이지 않는다
벌거벗은 몸 위로
어디서 기어 나왔는지
바구미 한 마리
바람처럼 내달린다.
복달임 음식
분명 삼계탕에 들어갈
찹쌀을 야금야금
갉아 먹었을 게다.
날도 더운데,
땀으로 눅눅해진
몸뚱아리를
운동장 삼으려는지
수영장 삼으려는지
바구미 한 마리
생을 재촉하고 있다.
삼복더위에
닭도
개도
장어도 살기 위해서
몸을 바짝 낮출 텐데
복날 /정민기
닭장에 피어나 한들거리는 맨드라미를 잡아
찹쌀에 인삼까지 넣어서 김이 모락모락
머리를 풀어 헤치도록 푹 고아 내온 삼계탕집
더위에는 이열치열이라고 이왕에 수건까지
목에 걸고 연신 비 오듯 흐르는 땀을 닦으며
더위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온몸에 닭살이 돋기 전에 닭살을 뜯고 있다
엎드러졌으니 맛보는 것이라고 늘어놓는 감탄!
사람들을 창밖 맨드라미가 피어 고개를 빼꼼
한참을 기웃거리느라 허리에 땀띠를 두른다
그동안에 몸보신하고 자동차 몇 대,
구름 건너는 햇살처럼 주차장을 떠났다
한쪽에 묶인 백구 한 마리가 손님이 남긴
국물이라도 구름 같은 혀를 날름거리고 있다
거북이보다 느릿느릿 기어가는 더위
나뭇잎 창문으로 내다보는 푸르디푸른 눈빛
삼복더위 소뿔도 꼬부라지게 하는 힘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도 여름 한 철이 지나면
넘칠 것 같았던 패기는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복날이면 생각나는 기억 /조성국
셰퍼트가 퍼질러놓은 똥을 더뎌 치우다,
트집 잡혔다
육이오 때에나 감행했던 원산폭격을 몹시 받았다
팔꿈치 물팍이 다 까지도록 기합이란 기합은 죄다 받았다
군대식 물자분류법에 따르면
이등급 군견보다 팔등급쯤 된 내가
좆같이 취급당한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곧 폐기처분될 개보다 못한 대우에
싸움개 으르렁대듯
화딱증이 불끈거렸다
부아가 치밀어 그 개새끼 골통에 늙은 인사계의 이름을 붙여 부르며
개머리판으로 내려찍고는 하였다
제대말년까지도 나는
수색 나갔다가 산토끼길목에 올무 덫 놓아, 돌멩이도
소화시킨다는 한참 때의
지독한 식욕을 달래기도 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만, 셰퍼트가 덫에 걸려 뒈져버린 사변이 터진 것이었
다
노발대발 인사계는 부대막사를 이 잡듯이 뒤졌고,
그 식탐의 눈빛을
견디다 못한 군견이 월북했다는 입소문만 무성히 나돌았다
또 그것을 보았다는 중대원들 말에 나는
그저 배시시 웃으며 한랭기단의 새하얀 한파와 눈보라 헤치는
천리나 먼 행군을 거뜬히 마칠 수가 있었다
여름을 보내며 /이향아
절정은 지나갔다
8월은 이제 만만한 풋내기가 아니다
말복을 향해 불을 뿜던 칸나도
제풀에 지쳐 목이 잠기고
감출 것도 머뭇거릴 것도 없는
그렇다고 으스대지도 않는
이미 판가름이 난 굿판
발표가 남았어도 조바심하지 않는다
결과는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을 것
두근거림도 가라앉히고
평온하게,
아주 평온하게 익어가는 대낮
햇발은 느긋하게 그림자를 늘인다
그래도 매미는 죽을힘을 다해
최후의 공연을 부르짖는다
나무 /서정우
바람 한 점 없는 중복 더위에 불볕 가득한 운동장에 서 보셨나요? 정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이 무작위로 내리꽂는 폭서. 때 맞추어 아래로부터 푹푹 쪄오르는 지열. 그래요. 현기증 같은 아지랑이가 온 지천에서 스멀스멀 자라 내게로만 밀려드는.
수천 수만 개의 모공에서 하염없이 묻어나온 신음 같은 땀방울이 골골이 흘러 온몸 적십니다. 정신이 아뜩해지고 나는 문득 푸른 동산에 서 있습니다. 잎새 가득한 건강한 나무, 잎새 흔들어 청량한 바람 동산에 뿌리는, 눈이 큰 짐승과 詩보다 아름다운 아기가 소리 없이 웃는.
그러나 그뿐, 고개 들면 나는 땡볕 가득한 운동장에 서 있을 뿐입니다. 그냥 그 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한 자리 지키다가 다른 자리로 지정해 옮겨가는 것.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진데. 세상에! 나는 이제 이곳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일상에 붙박혀 있는 것입니다. 선택했었고, 오랜 나날 지켜왔던. 이제는 '나'보다 더 '나'를 대신하는.
자리. 하염없이 서 있는.
내 발 밑에서 뿌리가 내리고 있습니다. 시나브로 시작된 이 작업은 발바닥 언저리 핏줄과 신경을 땅 밑으로 끌어내립니다. 접지 된 몸은 뜻과는 상관없이 그 자리 버팁니다. 멍멍한 눈으로 바라보는 운동장엔 나무들 저마다의 生으로 드문드문 붙박혀 있습니다. 더러는 푸른 잎 피워 올리지만.
나무들. 마음이 탈진되어도 수백 번도 더 탈진되었을.
삼계탕 /권오범
수컷구실 한번 하지 못하도록
애당초 몽달귀로 낙인찍혔다지만
천명이 턱없이 에누리당해
얼굴마저 저당 잡혀 볼썽사납다
행여 머나먼 저승길 허기질세라
대추 밤 찹쌀 미리 얻어먹고
지옥 물에 목욕재개하고 나니
골수마저 녹아내려 온몸이 녹작지근하다.
어린 것이 다리 꼬고 누워
인삼 하나 끌어안고
남세스럽게 누드쇼는 하지만
버젓한 한류스타이기에 여한은 없다.
저승사자인 인간들이여
마지막 가는 길 부탁하나하자
젓가락으로 잔인하게 꼬집어도 좋으니
뼈 마디마디 깔끔하게 추려 해탈시켜다오
삼복(三伏) /서거정
한 주발 향그런 차 조그마한 얼음 띄워
마셔보니 참으로 무더위를 씻겠네
한가하게 죽침 베고 단잠에 막 드는데,
손님 와 문 두드리니 백번인들 대답 않네.
삼복 혹서 /김남현
기록적인 삼복 폭염으로
땡볕이 내려쬐는
메마른 가지마다.
불 짚이듯 붉게 타니
바람 깃도 허물지 못해
가축, 물고기 떼죽음
처절한 비명소리에
주인은 억장이 무너지고
더위에 무딘 걸음
미소 대신 짜증만 늘어간다.
소나기 한 줄기 기다리는
깊은 가슴에
풀벌레 소리만 가득하고
햇살 굴려가는 벼논에
거북등 성형이 선명하다.
복날 (伏一) /이원문
덥기도 더운 여름
중복 날이 오늘인가 닭이다 개다
오늘 아니면 몇 번 먹는 고기일까
핑게 삼아 먹는 고기 한 두 번의 복날
일 년 내내 먹어야 몇 번을 먹겠나
세월 저 건너편 그 세월에 우리네 삶
우리의 음식 문화라 하니 그랬지 않았나
닭장 안의 닭도 그렇고
문간에 매어 놓은 정든 누렁이 개도 그렇고
복 날이면 떠나야 하는 날 닭 개가 알았겠나
그래도 좋다 하고 알 짓는 소리
문간의 개 사람이 좋다 하고 꼬리 치는 모습
앞 마당 화둑 솥에 물 끓이는 날
닭은 집에서 누렁이 개는 냇가로 그렇게 끌려 갔다
복날 /김명인
말복이라 식당 안은
보신하러 온 손님들로 법석인데
온몸 개개풀리는 땡볕 나절을
熱絲 속으로 꼿꼿이 고개 쳐들고 선
화단의 저 꽃 이름은 무얼까
그 아래 목매아지로 배 깔고 엎드린
황구 한 마리
내가 묻는 것은 꽃말이 아니라 표 나게
삼복을 건너는 제각각의 팔자인데
케케묵은 冊曆까지 들추고 나와
세상은 그런 것이다 한낮이 패도록 經 읽어대는
말매미 저 억센 울음
저도 애벌의 시간을 견디고 며칠 동안만
허락받은 그늘 밑의 生이려니
넘치도록 그림자 드리운 느티나무 아래 평상에
늘어앉아 식당 쪽을 흘낏거리는
저 노인들도 한때는 어깨가 무너져라
땡볕을 져 날랐으리
엘레지 /오탁번
말복날 개 한 마리를 잡아 동네 술추렴을 했다
가마솥에 발가벗은 개를 넣고
땀 뻘뻘 흘리면서 장작불을 지폈다
참이슬 두 상자를 다 비우면서
밭농사 망쳐놓은 하늘을 욕했다
술이 거나해졌을 때 아랫집 김씨가 말했다
-이건 오씨가 먹어요, 엘레지요
엉겁결에 길쭉하게 생긴 고기를 받았다
엘레지라니? 농부들이 웬 비가(悲歌)를 다 알지?
-엘레지 몰라요? 개자지 몰라요?
30년 동안 국어선생 월급 받아먹고도
'엘레지'라는 우리말을 모르고 있었다니
나는 정말 부끄러웠다
그날 밤 나는 꿈에서 개가 되었다
가마솥에서 익는 나의 엘레지를 보았다
초복을 앞두고 /정심 김덕성
여름은 익어가는 계절
세월의 흐름으로 여름이 열리니
어제도 그랬듯 오늘도
햇살은 기세당당하게 폭염으로
초복의 문을 연다
나무는 꿈을 잃지 않고
여념 없이 바쁘게 움직이면서
초록빛 옷으로 갈아입고 고맙게
햇살을 잠재우며 시원하게
그늘이 되어 준다
각박한 세상이라지만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한 곳
익어가는 계절인지라
초복에도 더위와 싸워 이겨
시들지 말고 씽씽한 초록빛으로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으로
성숙하게 살면 어떠리
말복 더위 /박승열
그림을 그리려고 앉았더니 더위가 문제다. 실상은 시를 쓰고 있으면서 왜 그림을 그린다 하는가?
다른 행동을 하는 다른 인물을 써내면서 자판 앞에 앉은 자신을 지우려 함인가? 아니면 그림을 그
리듯, 이라는 말처럼 시쓰기에 대한 일종의 비유로 이런 말을 하는가? 지우려 지우려 해도 끈질기
게 거기 버티고 있는 자 누구인가? 그림 그리는 자들도 자신을 그림 속 주연으로 그려넣곤 하는가?
이를 테면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라는 그림 속에 들라크루아 자신을
그려넣기, 아니면 자신의 영화에 출연하는 수많은 감독들, 앨프리드 히치콕, 로만 폴란스키, 마틴
스코세이지, 우디 앨런, 쿠엔틴 타란티노, 박찬욱, 봉준호까지도! 이때 끈질기게 이들을 촬영하는
자 누구인가? 거기 절대적인 시선, 누구인가? 역시나 더위가 문제다. 그림을 그려야 할 판에 이런
답도 없는 질문들을 시키는 게 바로 말복 더위다. 그치만 거기, 문 틈새로 또 나를 지켜보는 자 누
구인가, 느낄 수만 있고 도저히 그려낼 수 없는 그 시선은 누구의 것인가. 더위처럼 내리쬔다 더위
처럼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이 빌어먹을 것 그러나 그것은 실상 나의 시선이다, 하는 시시한
결말이 아니고,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내가 역으로 겨눌 수 없는, 저 빌어먹을 것!
삼복더위 /김홍택
누가 보기 좋게
초복
중복
말복을 정해놓고
마음으로 산다
복날이면
으레히 삼계탕을 먹는다
이열치열이라 했던가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한여름을 보낸다
덥다 너무 더워서
등목을 해도 소용이 없다
이 지구까지 말썽이다
장맛비를 맞으며
걷고 또 걸었다
수수깡으로 안경을 만들고
밤마다 뒤척이며 바로 보는 행복한 잠탓이다
말복 /한영희
내 이름은 흙구 풍물패 흙무디의 상징이라고 누나가 지어주었어 풍돌이 말복이 똥개 마음대로 부르지만 그래도 나는 흙구
누나는 나를 잘생겼다고 해 사진을 찍어 카카오톡에 올리고 잘생긴 흙구 라고 썼어 흙구야 누나가 부르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45도 얼짱 각도로 고개를 들어주곤 해
내 눈이 슬퍼 보인다고 해 어느 날 형님 누님들의 대화를 듣고 말았어 나를 말복이라 부르는 술고래 형님이 말복 날 솥단지를 걸겠다고 해
누나는
ㅡ 걱정 마 말복 전 날 네 목줄을 풀어줄게 하는데
검은 구름은 두렵지 않아 처량한 밥그릇에 코를 박고 꼬깃꼬깃한 미련을 버리지 못할 누나가 발음될 뿐이야 술고래 형님이 미끼를 던져주고 가네
덩 덩 쿵따쿵 누나가 장구를 울린다
가락이 눈꺼풀 위에서 춤을 춘다 컹 컹
화장실 유리에 낀 습기는 사람들이 놓고 간 똥에서 올라온 근심
시들어 가는 방향제는 구석에 앉아 먼지를 뒤집어쓰고
커져버린 머리가 기우뚱 멀미를 할 때
서리서리 머금은 통증이 아픈 시간을 핥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