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밭에 관한 시모음 7)
내 이마의 꽃밭에서 /강인한
내 이제
이마의 조브장한 안마당에 터를 장만하면
비 내리겠지. 은(銀)실비 내리겠지.
은실비 맞는 내 꽃모종
수정(水晶)에 뜨물 부어 순 기르듯이
눈물을 길어 잎을 틔우고, 씨를 얻어 보리.
아기씨의 족두리에 꿰인 구슬 알맹이들이
몸 비비며 수줍어하는 밤 이슥한
순금(純金)의 회오리바람.
불씨 빌려오듯이 소중한 금(金)빛 고단한
잠은 깨우지 않고 꽃잠은 깨우지 않고
멀리서 초록(草綠) 두꺼운 해가림 하며
쉬임 없이 보살피리.
잔등이에 금이 간, 저 소용돌이를 타는 거북이
거북이의 닳아진 발바닥을 가슴에 얹고
이랑진 등허리에 살을 출렁이게 하는, 아기씨
긴 자락 나부끼는 은(銀)실 웃음 담으랴면
굽이 저승에서
동아줄 늘여
내 꿈 낚는 한 천년을
천년을 땀 흘려도 싫지 않으리.
살찐 은어(銀魚)가 무지갯빛 비늘로
한 마장의 물결을 걷어 올리는 모양 익히어
수정 속 같은 바람 데불고 한 천년을 이마로써
꽃밭을 매며 살아보리,
살아보리.
하마 오늘 밤
이승에서 밝히는 새우잠 속에라도
아기씨 눈썹 적실
비 내리겠지. 은실비 내리겠지.
어머니의 꽃밭 /이대흠
꽃이 어디 있었다냐
다 노물이었제
빈 땅이라면 손톱눈만한 자리라도
마늘이며 고추며 오이를 심었던 어머니가
칠 순 넘어 웬걸 꽃밭을 만드신다
인자 가슬 되먼 마당이 환할 것이다
뜰 가득 댕댕이꽃
돌나물 구절초를 모종내는 어머니
고방 깊숙이 무씨 두듯
감추어두었을 설움이나 슬픔 같은 것
우북우북 피어나
얼굴 가득 꽃밭이다
만개한 저승꽃
온종일 꽃밭에서 /감상미
엄마, 오늘 한 곡의 노래가 끝났어요,
노래가 끝나면 사랑도 끝이 난대요,
꽃밭엔 작약, 모란, 장미꽃들이 활짝피어나고 있어요.
그들에게 물주면서 엄마, 나는 물 없이 비타민을 삼켰어요.
스스로도 알아챌 수 없는 쓸쓸함이 환한 꽃잎들을 흔드는 게 보기 싫어
눈물 방울 같은 비타민을 삼켰어요,
하늘은 맑고, 하얀 벙어리 집들을 지었다
간 허물고 또다시 지었다간 허무는 구름들이 마음 밑바닥을
그늘로 덮어 꽃밭까지 어두워졌어요,
순간, 바람 한 자락이, 내 삶보다 엄마 삶보다도 더 긴바람 한 자락이,
눈 끝에 묻은 노래자락까지 다 지워버렸어요,
노래가 끝나면 사랑도 끝난다는데...엄마, 꽃밭에 기댄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 와요,
새장 안에 갇힌 새처럼 꽃들이 울고 있어요,
노래는 이미 끝났는데 이마를 짚고 누운 사랑은 이제 무얼 먹고 살아야 하나요?
무얼 먹고 버텨야 하나요?
온 종일 꽃밭에서 꽃은 피고 꽃은 지는데...
유채꽃밭 /임영준
노랑이면 다 노랑인 줄 아세요
유채꽃밭 한번 찾아보세요
만발했다는 말 가끔 쓰시나요
그곳을 제대로 보고 나서나 쓰시지요
그때 그녀와 함께 바라보던
유채꽃밭에서
아롱거리던 현기증을
우리 사랑의 증표인 줄만 알았지요
웬만한 열정이 아니라면
엄벙덤벙 유채꽃밭 가지 마세요
일평생 뿌리내린 잔상으로
모호하게 헛디딜 때가 많답니다
어지간한 사이가 아니라면
유채꽃밭에서 오래 머물지도 마세요
그 시절이 하염없이 파고들어
자꾸만 돌아가고 싶어질 겁니다
어깨 너머 꽃밭 /이수미
십 원짜리 동전들이 몰려다녀요
엉덩이들은 따뜻하구요
문 밖의 밭들도 다 쉬고 있어요
겨울에 피는 꽃은 따먹는 맛이 있죠
여자들은 앞자락마다 꽃들을 진열해 놓아요
나는 어려서 어깨 너머로 꽃들의 이름을 배웠어요
매화 벚꽃 모란 국화 난초,
한 손에 열두 달을 다 쥘 수 있다는 것도 그때 배웠지요
꽃들에겐 저마다 달[月]이 정해져 있지만
엎치락뒤치락 만날 때마다 서로 치고받았죠
이 손 저 손을 건너다니며
가슴을 졸이게 만들고 계절을 다투지만
개평, 열두 달을 손에 쥐고 오고 간 값을 헤아리다 보면
꽃의 시절은 손가락 사이로 술술 빠져나갔어요
조금씩 허물어지면서 사라진
꽃의 밑천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꽃들이나 사람이나 살다 보면 짝들이 사라져요
시계방향으로 돌던 계절에
감쪽같이 꽃 하나가 숨곤 하지만
꽃 판에서 꽃대 하나가 사라진다는 건
누군가 잠시 한눈을 판 시간의 값이죠
젊은 언니 엉덩이 밑에 깔려 있던
그 앙큼한 꽃, 모든 판의 파투는
숨은 꽃들 탓이겠지만
꽃들은 여전히 판을 돌고 있죠
꽃밭에 자드락비 들이친다 /서승현
모반의 도적떼처럼 가만가만 비 내리고
멸망한 나라의 궐처럼 밤은 깊어간다
도열한 귀비(貴妃)들, 괴는 수심 무거워
실핏줄 싱싱한 채 이울어 지고 있다
훗훗한 숨결로 버무려지던 꽃등마다
기화되어 퍼지던 연붉은 입자들
촘촘하게 점화되어 일렁이던 등불과
흥청망청 흐드러지던 비단 치마폭
흙먼지 날리는 가문 날에도
바쁜 손길 손짓하고
순간마다 눈멀게 하더니
기어이 안녹산의 내달리는 말발굽처럼
몰아치는 빗줄기에 드잡이질 당하고 있다
만개의 절정을 탐하듯 비바람은
붉은 꽃 분홍 꽃 훌치고 밀치며 흐트러 버린다
쏠리다가 쓰러지며 물큰대는 살내
태풍이 잠시 들른 천변부지는
꽃양귀비 널브러진 패색의 전쟁터
일장춘몽은 도처에서 출몰하는 중이다
꽃밭에서 /미산 윤의섭
6월의 꽃은 탐스러워요
풍만한 여름의 참멋을 내며
색조와 풍미를 자랑하지요
흙 속의 진실을 빨아올린
찔레꽃
떠오르는 보름달 정의의
장미꽃
꽃향기 아름다워
숲을 찾은 가인이여!
땅속의 백골 잊은 지 67년
2대에 미치는 그 흔적 미풍은 알지요.
꽃밭에서 /장이지
어머니의 꽃밭에서
백일홍을 붉다.
중년의 아들은 송아지처럼
백일홍 꽃무더기 사이로 달리고,
늙은 개가 어머니 곁에 앉아
코를 하늘로 쳐들고 바람 냄새를 맡는다.
꽃이 곱다고 말하지 않아서
어머니는 섭섭하고,
하늘은 꽃보다, 늙은 어머니가 곱다고
속으로 말한다.
어머니는 관절염의 다리를 절며 백일홍 옆에 가
빛 속에 선다
바람이 불고 빛이 꽃 사이로 흩어지고…….
이런 생각을 들키면
분명 누군가는 슬퍼지겠지만,
죽는 날까지
어머니가 앓는 병을 다 앓다 죽으리라고
못한 아들은
코를 하늘로 쳐들고 바람 냄새를 맡는다.
마음의 꽃밭 /정연복
마음속에 아담한
꽃밭 하나를 일구자
예쁜 꽃 송이송이 피어날
꽃씨들을 심어보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꽃씨를 많이 심자
용서와 화해와 화합의
꽃씨도 곳곳에 심자
자유와 평화와 평등의
꽃씨도 더러 심자
날마다 물도 주고
정성껏 가꾸어 가자
잡초가 자라면
정기적으로 제거하자
예쁜 꽃들이 피어날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자
아름다운 세상을
내 맘속에서부터 이루어가자.
꽃밭의 서사 /김지요
틈만 보이면 올라왔다
채송화가 숨을 고르면
쇠비름의 역공이 시작됐다
쇠비름을 뽑아주니 채송화에 생기가 돌았다
꽃밭의 장르는 느와르
피는 것이 전쟁이었다
만원 버스에 실려 가는 출근길
가까스로 비집고 서있던 킬 힐처럼
죽을힘을 다해 뿌리를 뻗어야 살아졌다
하루살이 개화에 목을 맸다
출근할 때 피고 퇴근하며 사그라졌다
사랑하느라 늙고 늙느라 바빴다
가을이 오고
틈이 보이기 시작했다
쇠락함이 무성한 뜰에 앉아있다
명아주도 쇠비름도 이겨 낸
검버섯이 장엄하다
자운영 꽃밭 /임 보
저 시방정토 밝은 세상에
웬 연등들을 저리 내 걸었나?
팔만 보살님들
붉은 가슴들을 열고
젖 보시 경쟁이다
모여든 꿀벌들
야단법석
왁자한
극락이다
꽃밭 편지 /이해인
수녀님 생일 선물로
내가 꽃을 심은 거
보았어요?
‘꽃구름’이란 팻말이 붙은
나의 조그만 꽃밭에
80대의 노수녀님이 심어준
빨간 튤립 두 송이가
활짝 웃으며
나를 반기는 아침
처음 받아보는
꽃밭 편지로
나에겐 오늘
세상이 다 꽃밭이네
꽃밭 /이재환
텅 빈
앞마당에
화단을 만들고
예쁜 꽃 심었더니
우리 집
분위기가 살아났네
나도 흐뭇하고
마음의 부자가 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