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사항: 본문에 등장하는 주요인물은 전원 가상의 인물들이며 본문은 실존하는 단체, 국가, 사후 인물, 물리법칙을 포함한 일체의 요소와 무관함을 밝힙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실존인물은 전원 부수적인 인물이며 거기에 대하여 등장하는 사항은 실제와 어떠한 연관성도 가지지 않습니다. 또한 본문에 픽션성에 대한 어떠한 질문에도 답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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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존재하지 않는 첫 만남
......1.
나는 원래는 비오는 날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재수학원을 다니던 시절에 어떤 영어선생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그 선생은 자신이 비오는 날을 좋아하며 그것은 건물 안에 있는 안도감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죽음에 가까워서 그런 경향이 더 강하다고 주장했다. 이렇다 할 근거라곤 없는 주장이었지만 난 거기에 동의했다. 내가 그랬던 탓이다.
대한민국에서 1984년에 태어난 평범한 대학생이, 그땐 재수생이었지만 어쨌든, 죽음과 딱히 가까울 이유는 없었지만 나에겐 불행히도 있었다. 내가 피해자가 될 죽음도, 내가 가해자가 될 죽음도 모두 내게 가까웠다. 그래서 난 영어선생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내 비를 좋아하는 음침한 성격의 이유를 내 유감스런 특징에 덮어씌워 버리며 스스로를 위로하곤 했다.
그런 웃기지도 않는 자위를 할 필요가 없게 되었을 때, 그러니까 내가 비오는 날을 전보다 조금은 싫어하게 된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도 비가 오고 있었다. 그 사건은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뭣같은 일이었고, 그래서 난 지금도 비가 오는 날은 조심을 하는 편이다.
그날은 아침부터 흐렸다. 밖을 내다본 나는 집에서 큰 우산을 가지고 나와야 했다. 나는 흔히들 '파라솔 우산'이라 부를 정도로 큰 우산을 쓰는 것을 즐기는 편이었는데, 그런 우산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날은 아침에 비가 많이 내려서 학원으로 가는 도중에 난 무릎까지 왕창 적시고 말았다.
내가 아무리 비가 오는 날을 좋아한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옷을 적실 일이 없을 때의 이야기였다. 난 광년이 처럼 온 몸을 적시며 폭우 속을 뚫고 다니는 취미는 없었기에 바지가 비에 젖자 이럭저럭 신경질이 나기 시작했다. 오전 수업을 들으며 질척이는 바지의 느낌을 어느 정도 덜어내긴 했지만, 쉬는 시간에 학원건물 지하에 있던 서점에 가다가 멋지게 자빠짐으로써 원래의 기분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런 고로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 내 기분의 상태는 바깥 날씨와 비슷했다.
그 전 같았으면 점심을 다 먹은 다음에는 우산을 들고 옥상에 올라가서 비오는 날 경치를 감상했겠지만 왠일인지 그날은 그것도 귀찮았다. 어째 만사가 귀찮아지는 하루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그날 밤에 있을 사건의 예지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도 비가 올 때 그런 적이 있었던 나는 그저 기분이 꾸리꾸리한 거겠거니 하고 오후 수업까지 넘겼다.
사실 그 때는 꼭 비가 아니더라도 내 기분 갉아먹을 것들이 많았다. 수능에 관한 온갖 유언비어들이 난무하는 학원에서 선생들의 갈굼도 날이 갈수록 신랄해졌고 모의고사점수는 그것보다 세 배쯤 더 신랄해졌다. 재수생은 방학이 없어서 재학생보다 유리하다는 말을 불신하게 된 시기에 비 좀 왔다고 기분 나빠진 게 그렇게 특별할 것도 없었다. 수업을 마치고 서점 바로 아래에 있는 지하 자습실로 내려가서 자리를 잡고 문제집을 펼쳐들며 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이따가 저녁에 도련님도시락 생선까스 돈까스로 바꾸고 군만두까지 껴 먹는 거야. 그럼 됐지 뭐.'
자습을 띵까고 피시방에 가서 노는 수도 있었지만 그건 너무 위험한데다 고작 비 좀 많이 왔다고 그러는 건 오바다 싶어서 관뒀다. 오후수업 끝난 다음부터 저녁시간까지의 자습시간은 실제로도 얼마 되지 않지만 느낌으로도 금방 지나가는 듯한 시간이다. 나는 '저녁 먹고 들어와라'란 소리에 벌떡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학원에서 나와서 건물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분식 점과 도시락 집이 늘어선 건물이 있다. 빨리 가지 않으면 도시락 집 앞에서 오래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난 우산을 펼쳐들고 발걸음을 재개 놀렸다. 그런데 건물 모퉁이를 막 돌려고 했을 때 누군가가 내 왼쪽 어깨를 들이받는 것이었다. 나는 참 볼썽사납게 앞으로 고꾸라졌다.
"......!!"
나는 고개를 홱 돌려 뒤를 쏘아보았다. 거기에는 잔뜩 질린 표정을 한 여자 애 하나가 서 있었다. 어깨까지 오는 머리에 수수한 차림새. 동글동글 순진한 눈빛에 조그마한 입. 녀석은 재수학원에서 같은 반인 아현이였다. 애가 좀 조용조용하고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그런 스타일이었다.
"...아야야... 뭐야, 너였냐?"
"미, 미안해..."
"됐어. 그럴 수도 있지 뭐."
아현이는 머뭇머뭇 거리며 손을 내밀었고 난 그 손을 잡고 훌쩍 일어났다. 바지를 대충 털고 우산을 주워드는데 아현이가 말하는 것이었다.
"미안해, 나 때문에 옷이 더러워져서... 내가 밥 살게."
"응? 아니 됐어. 괜찮다니까."
나는 두 손 내밀어 사양의 뜻을 표시했다. 사실 난 재수학원에서 일종의 왕따 같은 존재였다. 누가 나를 따를 시킨다기 보다는 내가 일부러 남과 어울리지 않아서 그렇게 된 거지만, 어쨌든 나는 점심 도시락도 혼자 먹었고 저녁도 나 혼자 사먹는 편이었다. 처음에는 담임선생도 밥 먹을 때 다른 애들하고 어울리라고 참견하고 나한테 도시락을 들고 오는 남자녀석도 있었지만 결국 내가 모두 완곡하게 거부함으로써 나는 혼자가 되었다. 재수생활에서 친구를 키운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는 생각의 발로에서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는다는 건 참 껄끄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그게 여자라면야 더더욱! 원래부터 여자하고는 말도 잘 못하는 나로선 여자와 함께 밥을 먹는 상황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도 고문이었다. 아현이라는 애는 가끔 나한테 모르는 문제를 물어보기는 했지만 그다지 친한 사이도 아니어서 여러모로 곤란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그날 저녁을 상당한 진수성찬으로 먹을 야심찬 계획을 꾸미고 있었는데 아현이가 밥을 사준다면 값싼 메뉴를 고르는 수밖에 없지 않나 말이다.
"저기, 내가 미안해서 그래. 정말 안될까? 저...하고 싶은 말도 있...고..."
나는 순간적으로 명랑학원멜로물의 흔해빠진 전개를 떠올렸다. 내가 그런 웃기지도 않는 정신적 반응을 보였던 것은 아현이의 부탁을 거절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서야 난 평소에 널...'어쩌구 하는 망상에 잠시나마 빠지며 현실을 도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래 그러고 있기는 어려웠다. 난 결국 내가 저녁에 도련님도시락에 군만두를 먹을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했다.
"정 그럼 한턱 쏘든지."
아현이는 아씨도시락을 골랐고, 나는 돈까스 도시락을 골랐다. 지하 자습실로 돌아와서 젓가락을 뜯고 도시락을 열었다. 젓가락을 놀려 밥을 한술 뜨며 나는 물어보았다.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저...너 이번 모의고사 몇 점 나왔어?"
예상하고 있던 질문이 나왔다. 그냥 물어보면 될 걸 가지고 저녁씩이나 쏴 가면서 얘기를 꺼내다니 정말이지 숫기가 없는 애였다. 이번 모의고사라 함은 어저께 본 대성 모의고사 이야기다. 대성은 문제가 쉽기로 유명한데, 난 그다지 만족스런 점수를 내지 못했다. 문과가 수학을 56점을 맞아버렸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긴 하지만 만족스러운 일은 아니다. 언제 30점이나 40점으로 뚝뚝 떨어질 지 모르는 게 수학이니까. 사회하고 과학은 간신히 100점을 넘고 영어도 60점 대 후반은 나와주었다. 문제는 국어였다.
세상에 87점이라니.
문과가 국어를 87점을 맞아버리다니 그게 될 말인가. 나야 물론 그 당시에도 교대를 목표로 하고 있어서 전과목 반영이긴 했지만, 일단은 문과이니 교대가 안될 때를 고려하자면 국어와 영어는 반드시 잘 봐야 했다. 그런데 영어도 70점을 못 넘은 판에 국어가 87점이라니, 국어 총점 120점에 87점이라면 그건 괘멸적인 점수다. 그것도 그 쉽다는 대성 모의고사에서.
"...못 봤어. 312점."
"에에? 300점 넘었잖아??"
아현이가 답잖게 큰 목소리로 물었다. 때문에 나는 돈까스를 베어먹다 말고 뺨따구로 날아온 밥풀을 띠어내야 했다. 돈까스를 목구멍으로 넘긴 나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쉬운 대성 꺼에서 삼 백대 초반이 잘 나온 거냐? 작년 수능 때도 그만큼 나왔는데 7월 달에 이런 점수가 나온 게 뭐가 잘 나온 거겠어. 젠장. 재수한다고 점수 올라간다는 건 역시 다 뻥이라니깐."
내 푸념을 들은 아현이는 그 이상은 말을 하지 않고 밥을 깨작깨작 먹었다. 난 아현이가 밥 먹는 소리가 적이 신경 쓰였지만 뭐라고 하지는 못했다. 집에서 동생이 그렇게 했으면 '예라이 샹년아~'로 시작하는 농담을 던졌겠지만 아현이는 그런 농담을 농담으로라도 못할 정도의 분위기를 뿜어내며 밥을 먹고 있었다. 난 내가 처치 곤란한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그냥 312점 맞았다 고만 말하고 쓸데없는 부연설명은 뺐어야 했지 싶었다. 하지만 이미 뱉어놓은 말이었고, 나는 '넌 몇 점 나왔는데?'라는 당연한 질문도 던지지 못한 채로 그 깨작거리는 소리를 10분이나 들어야 했다.
식사를 마친 아현이는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고마워'라고 말하고는 비척비척 자습실을 나갔다.
그런 녀석의 모습이 걱정되긴 했지만 나는 '모의고사 한두 번 보나'하는 생각으로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게 바보짓이었다. 그때 쫓아가서 등 두드려주고 '야야 괜찮아 아직 넉 달이나 남았어.'라는 말이라도 해 줬어야 했지만, 나는 별로 친하지도 않고 그런 말 해봐야 소용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만두었던 것이다. 난 평소대로 남은 저녁시간동안 서점에서 셜록 홈즈 전집을 서서 보고, 저녁시간이 끝나기 5분전에 자습실로 내려가 자습을 시작했다. 자습을 시작할 때 녀석의 자리를 한번 흘긋 보기는 했지만 녀석은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을 뿐 별다른 기미는 없었다.
평소와 하나도 다를 것 없는 일상이 끝나고, 밤 열 두시가 되어 나는 자습실을 나섰다. 시끌벅적한 인파를 헤치고 학원 바깥으로 나가니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고약하게도 아침에 맞먹을 정도로 세차게 퍼붓고 있었다. 나는 혀를 차며 우산을 펴고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길 중간에는 공원이 있는데, 우리 나라의 공원이 으레 그렇듯이 그 공원도 분위기가 밤에는 참 음침했다. 그날은 그나마 비가 오고있어서 그렇지 않았지만 평소에는 깡패도 가끔 있었다. 그런 이유들 때문에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귀가 길을, 나는 애써 즐거운 생각을 하며 거닐곤 했다. 그런데 그날 밤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이렇다 할 생각거리가 떠오르지를 않았다. 결국엔 어차피 3분도 안 걸리는 거리를 걷는데 뭐 하러 용쓰나 싶어서 난 그냥 앞만 보고 걸었다. 그러자 맞은편에서 오는 여자가 하나 보였다.
기분 나쁜 여자였다. 사람은 일상에서 멀어진 대상에 대해 그런 감정을 느낄 때가 많은데 그 여자는 거기에 참으로 알맞는 존재였다. 물론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데 우산을 쓰지 않은 채 거리를 나다닐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럴 땐 보통 손으로 하늘을 가리고 발바닥에 부스터를 단 채로 뛰어 다니는 것이 상식 아닌가 말이다.(아닌가?) 그 여자는 언뜻 보기에도 허리까지는 갈 것 같은 머리칼을 치렁치렁 늘어뜨린 채로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것도 이 밤중에. 멀리서 보기에는 그다지 키도 커 보이지 않았는데, 가까워질수록 존재감이 커지는 것이었다. 짝 달라붙는 면바지에 젖지만 않았다면 깔끔해 보일 정장을 입어서 좀 커 보이기는 하지만 키는 아마도 나와 비슷한 것 같았다. 이런 빗속을 저렇게 천천히 걸어다니다니. 나는 잠깐 엄한 상상을 해 보았다. '빤쮸까지 쫄딱 젖겠네.'
거리가 가까워지자 나는 무시 못할 존재감에 그 여자를 슬쩍 곁눈질해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얼굴을 보자 그 여자에 대한 내 생각은 더 굳어졌다. 생긴 건 그럭저럭 길거리에서 남정네 시선 여럿 끌겠다 싶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얼굴은 가지고 있는 모든 안면근육을 동원해 'I'm nihilist.'라고 외치는 듯 했다. 그런 얼굴이 기-다란 머리카락 속에 있으니 느낌이 굉장히 스산했다. 결과적으로 그 여자의 미모는 보는 사람에게 심각한 부담감을 주고 있었다. 내 경우엔 그게 좀 더 심했는데, 그건 나 또한 스스로를 니힐리스트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난 나와 비슷한 면을 보이는 사람을 극도로 싫어한다.
정말이지 싫은 첫인상을 가진 여자라 나는 우산과 시선을 내리고 발걸음을 조금 틀어 그 여자가 가는 길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그대로 지나쳐 갈 줄 알았는데, 별안간 내 우산 안으로 손 하나가 불쑥 들어오는 것이었다. 나는 기겁을 해서 다시 앞을 쳐다보았다. 그 여자가 내 코앞에 서서 날 똑바로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멋대로 길러서 헝클어질 데로 헝클어진 머리에 안경을 끼고 남자답지 않게 조그만 주둥이를 한 내 꼴이 멋있어서 날 들여다보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가까이 에서 제대로 다시 봐도 호감이라곤 가지 않는 그 얼굴은 아마 나와 비슷한 나이인 듯 했다. 여자는 할 말을 잃고 눈만 껌벅이는 날 그렇게 뚫어져라 들여다보더니 대뜸 내뱉었다.
"받아."
"뭐, 뭘요?"
분하게도 존대가 튀어나갔다. 그것 때문에 지금도 가끔 놀림을 받곤 하니 참 후회막급이다. 어쨌든 난 그 여자가 내민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거기엔 카드가 한 장 쥐여져 있었다. 카드를 받아들고 보니 타로였다. 카드의 이름은 Queen Of Disk. 동그란 원반을 하늘 높이 쳐들고 있는 여자가 그려진 카드였는데 코팅이 되어 있었다. 나는 얼결에 그것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여자를 쳐다보았다.
"저기...근데 누구세요?"
"지금은 알 거 없고, 앞으로 사나흘간 행동 조심해."
"...예?"
"나중에 다시 보자. 안녕."
"아, 저..."
난 그 여자에게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 여자는 발칙하게도 고개를 팩 돌리더니 성큼성큼 걸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아니 도대체가 갑자기 다가와서 다짜고짜 타로카드를 주더니 나중에 다시 보자는 건 또 뭔가? 알 수 없는 여자였다. 살짝 기분이 상한 나는 타로카드를 바닥에다 버릴까 하다가 결국엔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놈의 오컬트를 좋아하는 성정 탓에 내가 지금 이 글을 쓸 수 있는 걸 생각하면 아직도 식은땀이 흐를 때가 종종 있다.
이상한 여자에 대한 생각을 훌훌 털어 버리고 집으로 가던 나는 집 앞 상가를 지나다가 인기척에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금 기억을 되새겨보면 내 짧은 인생에서 가장 공포스러웠던 순간이 바로 그 때였다. 이후에 참 여러 가지 일을 겪었지만 그 때만큼 떠올리기에 섬뜩한 때는 없었다.
내가 고개를 돌린 자리에는 아현이가 서 있었다.
아현이도 아까 만났던 이상한 여자처럼 우산을 쓰지 않은 채였다. 비를 많이 맞아서인지 얼굴이 파랗고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얼굴엔 이렇다 할 표정이 없어서 난 아현이를 대하기가 영 꺼림직 했다. 그래도 뭐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이야기했다.
"왜 그래...? 학원버스 놓쳤어?"
아현이의 집은 잘은 모르지만 학원에서 제법 먼 곳인 모양으로, 걔는 항상 버스를 타고 다녔었다. 근데 여기까지 날 쫓아오다니. 무슨 일인거지 하고 생각하며 난 아현이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현이는 내가 물어봐도 대답이 없었다. 그저 몸을 떨며 날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뭔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애가 계속 비를 맞으면 안되겠기에 나는 우산을 내밀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내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아현이는 내가 내민 우산을 피하더니 갑자기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을 하며 내 아랫도리를 죽어라고 노려보는 것이었다. 그 얌전한 애가 그렇게 격렬한 분노에 받힌 표정을 한 것을 처음 본 나는 흠칫 놀라서 뒤로 몇 걸음인가 물러섰다. 아현이가 별안간 내 얼굴을 한번 쫙 째렸을 때는 정말이지 내 놀라움을 숨길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아현이는 날 그렇게 꼴사나운 처지로 몰아넣더니 그대로 뒤로 돌아 빗속을 뛰어가 버렸다.
'뭐...야? 이건?'
난 내가 그날 저녁에 저지른 실수가 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것 아니었을까 하는 상념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집으로 가는 내내 내 머리 속에는 '얘가 집까지 쫓아올 정도로 나한테 화가 났나'하는 생각이 둥둥 떠다녔다. 모두들 자고있는 집에 도착해서도 아현이의 성난 모습은 내 뇌리에서 지워질 줄을 몰랐다. 샤워도 대충 대충하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컵에 부은 나는 싱숭생숭한 마음을 가라앉혀 보려고 컵을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
시원한 바람을 쐬며 비오는 아파트 단지의 밤 풍경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나는 컵의 물을 홀짝홀짝 들이켰다. 조금은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인지는 아마 내일이면 잘 알 수 있겠지 생각하며 눈을 내리 감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을 떴다. 컵을 다시금 입가에 가져가며 아래를 쳐다보는데, 단지 주차장 차 사이로 아까는 보지 못했던 사람 하나가 서 있었다. 멀어서 잘 안보이길래 나는 안경을 바로 쓰고 눈을 가늘게 뜨며 물을 마셨다. 그리고 그대로 사레에 들렸다.
거기 서 있었던 사람은 아현이였다.
......2
내가 어떻게 내 방까지 갔는지는 지금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고작 해야 열 몇 발자국 정도밖에 안 되는 거리를 걸어갔는지, 뛰어갔는지, 가다가 자빠져서 다시 일어났는지도 모른다는 건 어불성설 같지만 내가 그런 걸 떠올릴 여유 따윈 없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엄마는 내가 한밤중에 쿵쾅거리는 소리가 시끄러워서 잠이 다 깼다고 하니 얌전히 걸어서 간 건 아닌 듯 하다.
'뭐야, 뭐야! 젠장. 내가 그렇게 죽을죄를 지었나, 왜 집까지 쳐들어와서 난리냐고! 이런 씨댕알! 대답해주니까 아주 지랄을 떠네 지랄을! 놀랐잖아!!'
아현이가 우리 집 문을 박살내며 난동을 부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는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놀란 가슴을 내리눌러야 했다. 여름이라 방문을 열고 자야 했으나 나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서 문을 닫았다. 책상 옆에 있는 창문까지 닫아버리니 십분도 지나기 전에 보온병 속에 내동댕이쳐진 기분이 들었다.
이건 좋지 않은 일이었다. 아침부터 이어진 그 망할 놈의 하루가 아현이 덕에 왕창 늘어나게 생겼던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도 내리던 빗소리를 들으며 양을 세어야 했다. 그러나 방안 기온 때문에 내가 세는 양들까지 덥다고 난리도 아니었다. 결국 나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눈을 좀 붙일 수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다음날 아침에 난 아주 죽을 맛이었다. 아무래도 학원에 가 봤자 선생의 눈초리를 피해 수면을 보충하는 데에나 전력투구하게 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안갈 수도 없었다. 비는 그쳤지만 여전히 어두컴컴한 하늘을 본 나는 우산을 챙기고 쓰레빠를 질질 끌며 학원으로 향했다.
학원에 도착했는데 뭔가 이상했다.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을 경찰들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지하에는 서점하고 내가 다니는 학원의 자습실, 그리고 주차장뿐이었는데 주차장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싶었다. 하지만 오래 신경 쓸 새는 없었다. 난 조금이라도 빨리 올라가서 1교시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잠깐이라도 퍼 자고 싶었다. 어찌나 피곤했던지 아현이에게 어제는 대체 무슨 일이었냐고 따질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기 보다는 아현이의 얼굴을 보는 것 자체가 짜증이 나기도 했다. 어쨌든 나는 몇 분 되지도 않을 잠을 취하기 위해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올라 맨 위층을 눌렀다.
그런데 위층에 도착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거기서 경찰이 불쑥 들어오는 게 아닌가?
별일이었다. 학원에 경찰이 무슨 볼일이 있어서 온 걸까. 역시 이 학원의 학원장도 비리와 검은 돈의 정원에서 푸른 꽃 몇 송이를 꺾으려다가 드디어 정원 주인에게 들켜 정의의 심판을 받게 된 건가. 그런 재미도 없지만 근거는 더더욱 없는 추측을 하며 교실로 들어간 나는 아현이의 자리가 비어있음을 알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씨구. 어제 그렇게 비를 맞더니 감기라도 걸렸나보지.'
그 전부터 아파서 빠지는 일이 잦은 애였다. 어제 밤처럼 쏟아 붓듯이 내리는 비를 그렇게 맞고 서면 감기에 안 걸리는 게 이상할 일이다. 나는 가방을 자리에 내려놓고 두꺼운 책을 몇 권 꺼냈다. 그 책을 베개삼아 책상 위에 엎드리려고 하는데 같은 반의 녀석들이 나누는 이야기 소리가 귓속에 벼락쳤다.
"야. 근데 아현이 왜 자살했데?"
"뻔하잖아. 그저께 본 모의고사 아주 잡쳤나 보던데?"
"말도 안돼. 겨우 모의고사 한번 망친 거 때문에?"
"그 전부터 계속 망쳤나 보지 뭐. 나도 잘 몰라."
"휴... 정말 뒤숭숭하네... 야, 커피 마실래?"
"...그러자."
난 내 자제력이 내 생각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에 놀랐다. 간신히 '뭐!!?? 진짜야, 그게!??'라고 소리지르지 않은 나는 그대로 엎어져서 자는 척 했다. 평소에 별로 친하지도 않던 내가 그렇게 부산을 떤다면 미심쩍은 눈초리를 받게 될 게 뻔했다. 나는 눈을 감고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아마 아현이는 내 집까지 날 쫓아온 후에 자살을 한 모양이었다. 모의고사를 못보고 내가 한 소리를 들었다면... 반은 내 책임 아닌가????
누군가 나를 봤다면 그저 편하게 엎어져 있는 줄 알았겠지만, 내 머리 속에서는 그야말로 온갖 생각이 헝클어져 뜯어지고 터져 나가기 일보직전이었다. 학원에 드나드는 경찰들의 모습이 떠오르는가 하면 전날 나와 아현이가 함께 저녁을 먹었다는 걸 기억하는 녀석이라도 있으면 어쩌나 싶은 생각이 들고 아무튼 미칠 지경이었다.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었다. 담임선생이 교실에 들어오고 나서도 겨우 평정을 가장한 얼굴을 했을 뿐 가슴속은 드글드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선생이 아현이의 자살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는 말도 오른쪽 귀로 스물스물 들어가서 왼쪽 귀로 주르륵 흘러나왔다. 머리에 들어간 건 단 한마디도 없었다. 내 머리에 처음으로 들어온 말은 아현이의 자살 자체에 관한 이야기였다.
"아현이가...어제 자습시간에 화장실에서 손목을 그었지만 아무도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는 게... 선생님은 정말이지 견딜 수가 없다. 누군가가 이상한 걸 느끼고 문이라도 한번 두드렸었다면..."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저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말이 돼나.
내가 어제 자습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에 아현이를 봤는데.
어이없는 일이었다. 담임선생은 나에게 '넌 심령현상을 겪었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뭔가 착오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째 내 기분은 붕 뜨는 것 같았다. 왠지 모든 게 착각이고 꿈같은 몽롱한 기분. 내가 제일 싫어하는 기분이었다.
조례를 추도사로 날려먹은 담임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교실을 나갔다. 담임은 나가면서 오늘은 경찰조사 때문에 학원을 쉰다고 말해주었다. 원래대로라면 환성을 질러야 할 학원생들은 끼리끼리 수군대며 가방을 챙겼다. 난 멍한 얼굴로 책을 가방에 집어넣고 일어섰다.
아현이가 자살을 했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의 긴장과 흥분은 싹 가시고, 지독하게 야릇한 기분이 내 등골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담임이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게 틀림없어.'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는 엘리베이터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학원건물의 엘리베이터는 7층 교무실과 가까이 있었다. 1층까지 내려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느라고 서 있자니, 열려있는 교무실 문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새어나왔다.
"정확한 사망 추정시각은 언젭니까?"
"부검결과가 나오지 않아서 아직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어젯밤 11시 전후로 보입니다. 아마 당신 네 들이 정한 마지막 자습시간 중이었을 겁니다. 마지막 쉬는 시간이 언제였죠?"
"10시 40분이요. 화장실에서 별다른 건 나오지 않았나요?"
"손목을 긋는 데에 쓴 커터 칼을 빼면 이렇다 할 건... 쓰레기통도 엎어보고 변기도 수색해 봤지만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뭔가 더 듣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다시 올라오는 것도 기다리지 않고, 나는 계단을 통해 1층까지 내려갔다.
담임이 잘못 안 것이 아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어제 귀신을 봤다는 소리다.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어제 죽을 뻔했다는 소리다.
그게 무슨 소리냐?
집어쳐, 젠장.
나는 엄마가 저녁 값으로 준 돈 삼천 원을 들고 피시방으로 갔다. 아무 생각이 안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엄청나게 많은 생각이 머리 속을 뒤집어 놓는 것 같기도 했다. 단골로 드나들던 피시방에 가서 자리를 맡아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워크래프트3을 실행시켰다.
래더게임 1대1을 했다. 평소에 하던 휴먼을 고르지도 않고 랜덤으로 그냥 해 버렸다. 내가 랜덤으로 한 줄도 몰랐다. 시작화면이 떴는데 언데드였다. 왠지 모를 짜증이 치밀어 그대로 나왔다. 두 번째에는 휴먼을 골랐다. 게임이 시작되고 난 아무 생각 없이 건물을 지었다. 그런데 배럭을 지은 다음에 팜을 연속으로 세 채나 지어버렸다. 황급히 두 채를 취소하고 홀 오브 아너를 짓는데 파시어가 갠세이를 들어왔다. 이번에도 변변한 싸움 한번 하지 못하고 나갔다. 눈 깜짝할 새에 래더에서 2패를 기록했는데 여전히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워크래프트를 끄고 디아블로2를 실행시켰다. 그날 따라 왠지 그렇게 좋아하던 네크로맨서로 하는 게 엄청나게 거부감이 드는 것이었다. 소서리스로 앵벌이를 하기로 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아니면 상념의 소용돌이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그저 증오의 사원 2층 웨이를 타고 3층으로 내려가 메피스토를 부지런히 잡았다. 중간에 샤코가 나왔다. 그런데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샤코를 아이덴티피 해서 용병에게 줘버리고 계속 메피스토를 잡았다. 그 뒤부터는 이렇다 할 아이템이 나오지 않았다. alt+tab을 누르고 시간을 보니 1시간 40분 정도가 지나 있었다. 디아도 꺼버리고 피시방을 나왔다.
점심때가 겨워오고 있었다. 도시락을 먹을 데가 없어서 학원에 가서 빈 강의실을 찾았다. 대충 자리를 잡고 되는 데로 집어먹었다. 사실 그날 엄마는 도시락반찬을 꽤 괜찮은 걸 싸줬지만 난 맛있는 줄도 모르고 그저 먹기만 했다.
밥도 다 먹었다. 딱히 할 일도 없어서 서점으로 갔다. 바로 아래층 화장실에서 누군가가 자살했는데도 서점은 열려 있었다. 평소처럼 선 채로 셜록 홈즈 전집을 읽었다.
그제서야 제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단편 두 편을 읽고 나서 서점을 나왔다. 그리고 학원가의 거리를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전날 본 것은 아현이의 유령이 확실했다. 아침에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볼 때, 아현이는 자습시간 막판에 화장실에서 손목을 그었고, 화장실 안에서 그대로 죽었다. 그리고 나는 자습시간이 끝난 뒤에 집으로 가는 길에서 아현이를 만났다. 그리고 집밖에서 나를 노려보는 아현이도 보았다. 그렇다면 그 아현이는 사람이 아니라는 소리밖엔 안 된다.
보통 사람이라면 평생 한번 겪어볼까말까 한 진귀한 경험을 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제정신이 돌아왔다지만 그렇다고 내가 겪은 일에 대한 해결책까지 생기는 것도 아니라서 기분은 오히려 지독히도 답답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이런 생각까지 했을까.
'내가 헛것을 본 건 아닌가?'
내 감성과 내 이성 둘 다 그 질문을 부정했다. 난 환각에 시달리는 정신병자가 되는 것도 사절이었지만 두 번이나 본 걸 헛것이라고 단정지어 버리는 현실도피행각은 더더욱 사절이었다. 내가 본 건 진짜다. 그런 결론이 나왔다. 그리고 난 벽에 부딪혔다. 그럼 어떡해야 하는데?
오늘밤에 아현이를 또 볼지, 아니면 내일 밤에 볼지, 아니면 이제 영영 안 볼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건 무서우리만치 찝찝했다. 그럼 부적이라도 사야 하나? 난 평소에 오컬트에 관심이 많은 편이긴 했지만 제대로 된 무속이나 사령의 개념을 접해본 적이라곤 없었다. 어딜 가야 진짜 능력 있는 무당을 만날 수 있고 어딜 가면 무당학원 졸업생을 만나게 되는 지도 몰랐다. 그저 어디어디의 무슨 보살, 무슨 박수는 대부분 돌팔이라는 상식 정도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 데나 가서 부적 한 장 그려 가지고 마음의 위안을 삼을 수 있을 정도로 내가 무신경하지 않다는 사실이 가슴속 깊이 사무쳤다.
'젠장. 뭐 반드시 또 나오란 법은 없잖아?'
그렇게도 생각해 봤지만 마음은 여전히 편치 않았다. 아마 내가 전날 만난 것이 살아있는 아현이였다면, 나는 귀신걱정 보다는 죄책감에 짓눌려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본 것이 산 아현이가 아닌, 죽은 아현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내 정신을 흩어놓던 감각은 죄책감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강렬한 감정이 그 전에 희미하게 산재하던 죄책감을 흩뜨려버리고 오전 내내 내 머리 속을 휘저어 놓았던 것이다.
그때 난 그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잘 몰랐다. 지금은 확실히 알고 있지만.
그것은 '분노'였다.
......3
바람이 시원스레 불며 우두커니 서 있던 내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평소에 그렇게 면박을 받게끔 만든 장발을 쓰다듬으며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학원가는 사람이 하나 죽던 말던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닭둘기들이 퍼드득 거리며 날아다니고 중 고등학생 반, 대학생과 아줌마 반의 인파들이 바쁜 걸음을 놀렸다. 하늘은 여전히 비를 내릴까 말까 고민하는 얼굴이었고 바람은 그런 하늘을 재촉하다가 심심했던지 잎이 무성한 가로수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어 대고 있었다.
바람이 가로수를 괴롭히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는지, 하늘이 비를 한 방울 똑 떨궜다.
그리고 그 빗방울은 내 안경알을 직격했다. 나는 안경을 벗어서 옷소매에 대충 닦고 우산을 펼쳤다. 빗방울이 사방에 쏟아지고 있었다. 비를 피하기 위해 오락실이 있는 건물로 뛰어들어갔다.
손목시계를 보니 오후 3시였다. 집으로 가긴 좀 그랬다. 안 그래도 재수생이라고 눈칫밥 먹고 사는 신센데 괜히 일찍 들어가서 좋을 것도 없었다. 학원으로 돌아가서 자습을 할 수는 있었다. 지하 자습실은 경찰들이 조사를 한다고 폐쇄되었지만, 학원이 수업을 쉬니 빈 강의실은 남아돌 것이었다. 하지만 그 선택에도 문제가 있었는데, 당최 공부가 손에 잡힐 것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아무도 없는 공간에 혼자 있는 것도 매우 꺼림칙했다.
'뭐하지.'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던 나는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전날 아현이 덕에 아낀 밥값 삼천 원에 오늘 피시방에서 쓰고 남은 돈 천 삼 백원. 도합 사천 삼 백원이 있었다. 피시방에 한번 더 가도 될 돈이다. 하지만 가까운 곳에 오락실이 있었다는 사실이 내 발목을 잡았다. 나는 백원 짜리 동전 세 개를 쥐고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았다.
오락실에서 내가 주로 하는 게임은 소울칼리버다. 그것도 그리 잘 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게임이 그래픽이 멋있고 내 취향의 캐릭터가 둘이나 있어서 즐겨 하고 있었다.
오락실 안은 사람이 많은 편이었다. 하지만 소울칼리버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아쉽긴 했지만 아케이드 모드라도 깨자 싶어서 기계에 동전을 집어넣고 버튼을 눌렀다. 캐릭터 선택 창이 뜨자 난 잠시 고민에 빠졌다. 누가 이을 것 같지가 않으니 백원만 하고 말 생각이었는데, 그러자면 캐릭터는 한번만 고를 수 있으니 말이다.
내가 하는 캐릭터는 셋이지만 봉을 쓰는 킬릭은 아케이드모드로는 잘 하지 않아서 일찌감치 제외했다. 나머지는 소울 엣지라는 대검을 쓰는 나이트매어와 레이피어를 쓰는 라파엘이었다. 그날은 기분도 거지같아서 아주 다 박살을 내버리자는 심정으로 나이트매어를 골랐다.
그런데 첫 번째 스테이지를 막 시작하려는 순간 누군가가 이었다.
의외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람하고 하는 편이 더 나으니 잘됐다 싶었다. 상대방이 나이트매어를 고르길래 나도 나이트매어를 골랐다. 그리고 바로 게임이 시작되었다.
처음 시작하자마자 나와 상대방은 동시에 달려나가서 칼을 똑같은 방식으로 내리찍었다. 자연히 중간에 양쪽 다 칼을 튕겨 냈고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칼을 횡으로 휘두르려고 했다. 그러나 상대방은 이미 내 나이트매어의 멱살을 잡고 올리고 있었다.
'젠장!'
바닥에 팽개쳐지자마자 나는 벌떡 일어나 다시 돌격했다. 상대방은 내가 내려찍기를 할 줄 알고 칼을 들어 막았지만 나는 그대로 달려가서 녀석이 했던 것과 똑같은 잡기 기술을 걸었다. 상대방도 똑같이 나가떨어졌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거리를 재었다. 녀석이 일어나자 나는 방향타를 뒤로 홱 꺾으며 칼을 종형으로 휘둘렀다. 이렇게 키를 누르면 나이트매어는 야구방망이 휘두르듯이 검을 휘두르는데, 그 사정거리가 농담이 아니다. 물론 그 큰 검을 그런 식으로 휘두르면 빈틈이 많이 생긴다. 횡으로 비껴내기를 하며 접근하면 그 빈틈을 잡아 반격할 수 있고, 녀석은 그렇게 했다. 가까운 거리에서 큰 베기. 내 나이트매어의 체력이 절반이 넘게 깎여나갔다.
그러나 무지막지한 파워를 자랑하는 나이트매어끼리의 싸움에서 그 정도로 승패가 갈렸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뒤로 굴러서 일어난 뒤에 다시 거리를 쟀다. 이번에는 달려가면서 한바탕 난리를 칠 생각이었다. 종과 횡 공격키를 동시에 누르며 달려가자 나이트매어가 검을 한 팔로 들고 크게 두 번 씩 베어 들어갔다. 그리고 상대방은...
숙였다.
지랄! 역시 너무 서둘렀어. 나는 그렇게 탄식했지만 때늦은 외침이었다. 허리를 숙여 조그맣게 웅크린 녀석은 내 나이트매어의 발목을 잡고 데굴데굴 굴렸고 내 나이트매어는 허공에서 팽이처럼 돌아 패대기쳐졌다. 그리고 그대로 K.O.
나름대로 굉장히 어이없는 패배에 나는 이를 갈고 동전을 하나 더 꺼냈다. 상대방은 나보다 잘하지는 않았다. 내가 마지막에 너무 뻔히 보이는 공격을 했던 것이다. 나는 동전을 투입구에 갖다대었다. 그런데 그 때 이상하게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맞은편에서 들려왔다.
"어머...되게 못하네, 너."
나는 발끈한다기 보다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말았다. 그 어리벙벙한 얼굴을 들어올려서 맞은 편에 있던 사람을 바라본 것이다. 훗날 두고두고 후회할 실수를 한 지도 깨닫지 못한 채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넌...?"
"응? 갑자기 또 반말이네. 어젯밤엔 존대 쓰더니. 사람이 왜 그렇게 일관성이 없어?"
맞은편에 앉아서 내 나이트매어를 작살낸 녀석은 다름 아닌 전날 밤의 그 기분 나쁜 여자였다. 그 여자는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아니면 단순히 내 나이트매어를 패대기쳐서 통쾌한 건지 전날 보단 얼굴이 좋아 보였다. 난 그렇지 못한데.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첫댓글 무지하게 긴장감이 도는 글... 난 이런글이 좋터라~ ㅋ
흐음.. 그래도 느낌표를 몇십개나 같다 붙이면 보기 좀 많이 그렇습니다.
맨위에 그건 모지? 영화에 나올법한 주의사항...^^;;;
...보다는 … 이 낫겟죠? 그럼 다시 읽으러+_+ 읽던중에 꼬릿말쓰는-_-;;
잘쓰시네요 ㅇㅅㅇ 재미밌어요. 와 ㅇㅅㅇ 다 제가 아는 게임임!! 저는 소울 칼리버 타키 하는데 ㅇㅅㅇ)! 워크는 나엘이고 디아는 어쌔...<-;;; 타로카드라...판타클이 디스크로 명시된 걸 보니 판타스티컬이...아닌가;;(찾아보니 아니다)그런데 그런식으로 한장씩 남에게 줘도 되는건가 ~ㅅ~;;;;;
저는 소울 칼리버 상화나 가브리엘을 한다는 왠지 경검 오른손이 좋아서리 ㅋ
질문입니다... 문법도 의도적으로 틀리게 한 것인가요?
일부는 그러합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틀리게 한 문법이라고 해도 문법오류는 엄연한 문법오류이니 평가시에는 틀린건 틀린 것으로 반영해주십시오.
그 사안에 대해서는 일체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오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고유명사를 제외한 오타가 평가에 반영된다고 해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올린지 꽤 됬는데도 평가가 안되네... 특별히 이글만은 어떻게 평가가될지 알고싶다는...
심히 주목되지요.ㅋㅋㅋ[씨익]
초코씨가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으므로, 이 글은 초코씨가 평가하는걸로 간주하고 전 다른걸 평가 하겠습니다.a
엄청난 묘사의 압박은 여전하시군요.^^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