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 프로필 이미지
젊은공인중개사의모임
카페 가입하기
 
 
 
 
 
 

카페 통계

 
방문
20240718
219
20240719
34
20240720
31
20240721
38
20240722
74
가입
20240718
1
20240719
0
20240720
0
20240721
0
20240722
0
게시글
20240718
0
20240719
0
20240720
1
20240721
0
20240722
2
댓글
20240718
0
20240719
0
20240720
0
20240721
0
20240722
0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좋은 글 스크랩 ●이세민과 위징
잠실/맥(조문희) 추천 0 조회 72 15.08.11 10:3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이세민과 위징

 

제가 글을 읽다가 당태종인 이세민의 글을 읽으면서 참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세민의 아버지는 이연이쟎아요 그런데 이연은 자기의 자리를 태자인 이건성에게 물려줄 준비를 합니다 이때 이건성에게는 뛰어난 지략가가 있었습니다. 그가 누구인가 하면---위징이라는 사람입니다

위징은 태자인 이건성에게 이세민(李世民)을 제거할 것을 기회만 되면 권유 합니다--

그것이 나라를 안정시키는 길이고 당신이 보위를 얻는 길이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건성은 형제를 죽일 수 없다고 하다가 결국은 태자 이건성은 이세민에게 죽임을 당한다.

 

위징은 체포된 후 이세민에게 말하기를 "태자가 만일 내 말을 들었더라면, 절대 오늘의 환란에서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이세민은 그가 솔직한 것을 높이 사서, 그를 간의대부(諫議大夫)를 맡긴다. 이 때부터 위징은 이세민을 충심으로 보좌하여 천하를 잘 다스려 소위 정관지치(貞觀之治)라는 태평성대를 열도록 도와준다.

 

위징이 당태종과의 사이에 있었던 몇가지 얘기는 그의 뛰어남을 알려준다.

한번은 당태종이 위징에게 "황제를 하면서 어떻게 하면 시비를 잘 판별할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더니 위징은 "겸청즉명, 편청즉암(兼聽則明, 偏聽則暗, 양쪽말을 골고루 들으면 밝은 것이고, 한쪽 말만 들으면 어두운 것이다)"라는 말을 한다.

 

위징은 당태종이 백성의 뜻과는 달리---왕의 권위만 가지고 백성들을 억누르고 자기의 뜻만을 고집할 때에 태종에게 충언을 하기를 "수능대주, 역능복주(水能戴舟, 亦能覆舟,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또한 배를 뒤집기도 한다)"는 말로써, 배는 황제, 물은 백성이라고 하여, 백성들은 황제를 옹립하기도 하지만, 황제가 제대로 하지 못하면 뒤집을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고한 바도 있다고 합니다.

 

저는 이런 글을 읽으면서---위징도 대단하지만---당태종이 더 위대해 보였습니다

왜냐하면---겸청즉명, 편청즉암----수능대주, 역능복주 양쪽말을 골고루 들으면 밝은 것이고, 한쪽 말만 들으면 어두운 것입니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또한 배를 뒤집기도 합니다. 이런 말들을 왕에게 쉽게할 수 있는 말들이 아닙니다. 수능대주 역능복주---이런 말을 했다간--- 그럼 네 놈이 역적모의라도 하겠다는 것이냐---한칼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세민은 그를 귀히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세민이 중국 역사에 가장 위대한 왕중에 한 명이라는 것입니다

 

※난세에 등장한 불세출의 영웅, 위징

중국 역사에 나오는 강직한 신하 중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는 “위징”이란 신하가 있었다.그는 유능한 황제 당나라 태종에게 직언을 아끼지 않았던 인물이다.위징(580∼643)은 당나라 초기의 공신, 학자로서 자는 현성, 시호는 문정공이다.그는 중국 산동성 곡성에서 출생하였다. 

 

수(隋)나라 말 혼란기에 '이밀'의 군대에 참가하였으나 곧 당 고조에게 귀순 하여..고조의 장자 '이건성'의 유력한 측근 이 되었다.황태자 건성이 아우 세민(후의 태종)과의 경쟁에서 패하였으나 위징의 인격에 끌린 태종의 부름을 받아 '간의대부' 등의 요직을 역임한 후 재상으로 중용 되었다.특히 굽힐 줄 모르는 직간으로 황제를 보필한 위징은 주, 수, 오대 등의 정사편찬 사업과..『유례』, 『군서치요』 등의 편찬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관중, 제갈공명의 맥을 이어 중국사에서 명재상의 전통을 계승한 특출한 인물의 하나가..'위징'이라는 데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당의 창업에 일등공신인 이세민이 황제가 된 후 제국을 경영하는데도 성공하도록 힘쓴 명재상이다. 수(隋: 581∼619)나라 말의 혼란기에 이세민은 아버지인 이연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관중을 장악했다. 이듬해(618) 2세 양제가 암살되자 이세민은 양제의 손자인 3세 공제를 폐하고.. 당(唐: 618∼907)나라를 창업한다.626년 고조 이연에 이어 제위에 오른 2세 태종(太宗) 이세민은 우선 사치를 경계하고..외정을 통해 국토를 넓히는 한편, 제도적으로 민생안정을 꾀하고, 널리 인재를 등용하여..학문·문화 창달에 힘씀으로써 후세 군왕이 치세의 본보기로 삼는 성세를 이룩했다.  

 

당태종의 시대(서기 627∼649)는 '정관의 치' 라 하여 중국사에서 길이 추앙되는 황금시대를 맞이하는데 위징은 그 시대를 여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이다.'정관의 치'라 칭송받을 수 있었던 것은.. 결단력이 뛰어난 좌복야 '두여회', 기획력이 빼어난 우복야 '방현령', 강직한 대부 '위징' 등과 같은.. 많은 현신들이 선정에 힘쓰는 태종을 잘 보필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태종은 이들 현신이 모인 자리에서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창업과 수성 중에 어느 쪽이 더 어렵냐”고 질문을 했다. 방현령이 대답했다. “창업은 우후죽순처럼 일어난 군웅 가운데 최후의 승리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인 만큼.. 창업이 어려운 줄로 아옵니다”고 한다.

그러나 위징은 대답이 달랐다. “예로부터 임금의 자리는 간난 속에서 어렵게 얻어 안일 속에서 쉽게 잃는 법이라고 합니다. 그런 만큼 수성이 어렵습니다”라고 아뢴다.

 

그러자 태종이 말을 했다.“방공은 짐과 더불어 천하를 얻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소. 그래서 창업이 어렵다고 말한 것이오. 그리고 위공은 짐과 함께 국태민안을 위해 항상 부귀에서 싹트는 교사(교만하고 사치함)와 방심에서.. 오는 화란을 두려워하고 있소. 그래서 수성이 어렵다고 말한 것이오. 그러나 이제 창업의 어려움은.. 끝났소. 그래서 짐은 앞으로 제공과 함께 수성에 힘쓸까 하오”라고 말한다. 이처럼 명민한 군주 밑에 위징과 같은 훌륭한 신하가 있었기에 당태종의 치적은 중국사에서.. 『논어』, 『맹자』, 『춘추좌전』, 『서경』, 『자치통감』과 더불어.. '제왕학'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정관정요』를 통해 치세의 법방을 후대에 전하는 영광을 얻게 된다. 『정관정요』는 바로 당태종과 위징의 치국문답임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원정에 패배한 당태종이 위징이 살았다면 원정을 말렸을 것이라며..그의 무덤을 돌보고 유족을 후대한 것만 보아도 위징의 진면목이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당태종 시대에는 무엇보다 과거제도를 통해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였다. 전통 명문과 한미한 집안, 그리고 서족까지 포함하여.. 신구 세력의 조화 속에 능력 위주의 새로운 인재들을 발탁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위징은 원래 태종과 왕권을 다툰 태종의 형 이건성의 전략가로서 태종을 죽여야 한다던 인물이었으나..추후 태종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국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당태종의 시대에는 중앙관제, 토지제도, 세금제도, 병제 등이 637년 율령격식으로 정비되어.. 중앙집권적 지배체제가 완성되었고 그 중심에 위징이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시된 것은 강력한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완성이었다.이것은 이른바 중국을 천하의 중심에 놓는 중화사상에 바탕을 둔 제국주의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 토대는 강력한 경제력과 정치·문화·군사력에 기초한다. 그것은 기원전 2세기에 시작하여 19세기말까지 2천년의 역사를 갖지만.. 그 토대는 '한무제 시대'에 다져지고 '당태종 시대'에 완성된 것이다. 위징은 중화체제라는 동아시아의 중국패권체제를 형성하는데 기여한 역량있는 건설자였고..유장한 중국사에서 명재상으로서 태평성대의 전통을 이은 걸출한 영웅이었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