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호] 민족최대종교보천교 (05.03.11 17:43)
단층 목조건축물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한옥이 서울 시내 빌딩 숲 한가운데 서 있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다. 조계종 본부가 있는 서울 조계사의 대웅전 얘기다.
종로 우정국로변 상가를 살짝 비켜들면 갑자기 나타나는 대웅전은 그 자체로 장엄하다. 1.6m 높이의 돌 기단도 묵직하지만, 그 위에 34개의 아름드리 나무 기둥을 세워 정면 일곱간(약 30m), 측면 네간(약 17m)으로 만든 전통 한옥은 경복궁 근정전보다 더 크다.
기와지붕 아래로 쭉쭉 뻗어나와 건물의 화려함을 좌우하는 기둥머리의 공포(拱包) 역시 궁중건물 양식이면서 더 화려하다.
대웅전은 일제 식민정책이 한창 가혹하던 1938년 이곳에 터를 잡았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통치의 편의를 위해 난립해 있던 조선불교를 하나의 기구로 통합하고자 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조선불교총본산'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총본산의 심장인 대웅전은 당시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민족종교인 보천교(普天敎)의 성전(聖殿)을 옮겨와 만들었다.. 보천교는 갑오농민전쟁의 패배로 실의에 빠진 농민들을 흡수해 한때 수백만의 교세를 자랑했던 증산교의 일파.
28년 보천교는 일제가 남산에 만든 신궁(神宮)에 대항하는 한민족의 정신적 구심점을 삼아 대규모 성전을 만들었다.전북 정읍에 조성된 성전의 중심이 바로 조계사 대웅전으로 뒤바뀐 십일전(十一殿)이다. 십일(十一)이란 증산교리상 후천개벽(後天開闢) 이후 세계의 흙(土)을 상징한다.
역학(易學)으로 보자면 1은 양(陽)의 상징이자 시작이며, 10은 음(陰)의 상징이자 완성을 뜻한다. 십일전은 곧 우주의 중심이기에 보천교도들은 치성을 모아 조선반도 최고의 건축물로 만들었다.
그러나 민족종교의 명운은 길지 못했다.일제 경찰은 36년 교주가 숨지자마자 성전으로 쳐들어가 각종 제구(祭具)를 압수하고 간부들을 연행했다.
그리고 '보천교측 재산처리위원회'를 만들고는 건물을 내팔았다. 십일전은 조선불교총본산에 팔려 서울로 옮겨졌고, 정문은 가까운 내장사 대웅전으로 바뀌었다.
이후 64년간 조계사 대웅전은 불교계의 오랜 내분과 폭력사태를 지켜보면서도 묵묵히 버텨왔다. 그 사이 서까래에 금이 가고 보머리가 빠지는 중병에 걸렸다고 한다. 조계사가 30억원을 들여 다음달부터 해체 보수에 들어간다고 한다. 묵은 먼지와 중병을 툴툴 털어낸 장엄미가 기다려진다.
오병상 문화부 차장
일제하 최대의 독입운동자금원이었고 물산장려운동을 이끈 주체였던
보천교를 들어보셨나요?
우리는 역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 우리가 배운것중 진실은 얼마나 되고 무엇이 거짓인가? 가까운 근현대사의 은폐왜곡또한 심각한 상황이다 우리는 보천교라는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하였다 물론 보천교가 일제하 독립운동자금원이었고 물산장려운동을 이끈 주체세력이었다는것도 어느 역사교과서에서 배워본 바 없다 .이제 이 지면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그 진실에 접근해보고자 한다.
일제하 최대의 독립운동자금원겸 물산장려운동을 이끈 주체 보천교
<보천교 십일전건물의 정문인 삼광문>
일제하 한국의 종교 중에서 가장 혹독하게 탄압을 받은 것이 바로 민족종교 보천교였다는 사실과 친일지로서 일제의 문화식민지 정책에 동조한 조선, 동아 등 당시 언론의 유사 종교 내지 사이비 종교로의 일방적 매도는 지금까지도 그 후유증이 큰 상처로 남아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당시 국내에서 가장 큰 종교단체로써 독립운동 자금원으로 의혹 받은 보천교의 막후 영향력이 그만큼 컸음을 역설적으로 입증해 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 이에 관한 자료는 비교적 정리가 잘 된 안 후상의 논문 < 보천교와 물산장려운동 >을 보기 바람 )
조선일보사에서 발간한 <조선일보 항일기사 색인-1920∼1940->에 나타난 항일기사 건수의 통계를 통해 당시 일간지와 월간지에 나타난 보천교 관련 기사를 분석해 보면, 적어도 1925년 이전의 보천교의 활동은 국권회복을 위한 운동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의 항일기사 건수 총계가 23 건, 천주교 2 건, 불교 18 건, 유교 15 건, 천도교 32 건 인데 반해 증산 계열 보천교 83 건, 태을교 9건, 훔치교 55 건으로 총 147 건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면 보천교 하나만 해도 불교나 기독교 항일운동의 4배에 맞먹으며 훔치교만 해도 불교의 3배, 기독교의 2배가 넘고 있는 항일운동 사건을 벌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조계종의 초대 종정인 방 한암 스님이 산천중원(山川重遠)으로, 송광사 주지 임 석진이 임원길(林原吉)로 각기 창씨개명하고 , 월정사 주지 이 종욱이 광전종욱(廣田鍾郁)으로, 용주사 주지 강 대련이 위원형(謂原馨)으로 창씨 개명한 것에서 보다시피 불교는 종단전체 차원에서 친일하는 것이 전반적인 추세이자 분위기였고,
가톨릭과 기독교 역시 경성기독교 연합회와 교계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신사참배와 친일로 돌아선 것이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였다.
특히 임원길은 조선총독 미나미의 향응을 받고 남산의 조선신궁에서 엄숙하게 의식을 거행한 바 있으며 「신불교」라는 친일지를 발행해 총후보국의 논조를 유지했으며, 강 대련은 「불교총보」에 '불교옹호회와 법려(法侶)의 각오'란 친일성향의 글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일본승을 왕실 및 양반집 여인과의 결혼을 주장하는 '조선불교기관 확장의견서'를 1919년 11월 사이토(齊藤實) 총독에게 제출하기도 한 친일 분자였다.
37년 7월 26일 YMCA에서는 종교단체 연합 친일 시국강연회가 열렸는데, 불교의 권 상로, 유교의 안 인식, 천도교의 이 돈화, 이 종린, 감리교의 양 주삼, 장로교의 전 필순 등이 친일을 위한 사자후를 토했으며, 38년 5월 18일 서울 부민관에서는 <경성기독교 연합회>가 창립되어 "40만 십자군병들아, 다같이 일어나 총후보국(銃後報國)의 보조를 맞추자"는 슬로건 아래 내선일체, 신앙보국을 맹서한 바 있다.
1938년 7월 29일, 구세군 최고사령관 윌슨도 전선각처의 소대장에게 국민의례, 황거요배, 국경일 경축행사 실행을 지시하는 통첩을 내렸으며 이에 의해 황 종률 구세군 전장 서기관은 구세군 1만 8천 신도가 앞으로는 단체적으로 신사참배를 할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다. 장로교 역시 1938년 9월 10-15일의 평양 서문 밖 예배당에서 열린 제 27회 총회에서 첫날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다음의 성명서를 채택했다.
'우리들은 신사가 기독교시에 위반되지 않는 본지(本旨)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대국적으로 보아 국가의 의식인 것을 자각하고, 이에 신사참배를 선서함. 신사참배를 솔선하여 이행하며, 더 나아가 국민정신 총동원 운동에 참가하여, 시국하의 총후 황국신민으로서의 적성(赤誠)을 다하기를 기함'
이 결의에 의해 동년 12월 12일 감리교의 양 주삼, 김 종우, 성결교의 이 명식, 장로교의 홍 택기, 김 길창 등 조선을 대표한 기독교계 지도급 교역자 5명의 신궁참배단이 결성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이세(伊勢)신궁, 가시와라(檀原) 신궁, 메이지(明治) 신궁, 야스쿠니(靖國) 신궁 및 모모야마 황릉(桃山宗陵) 등을 참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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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에는 특히 '공인종교(公認宗敎)'라 하여 일본의 전통적 신교(神道), 교단적인 차원에서 창씨개명과 친일노선을 공식화 한 불교, 기독교만을 공식적 종교라고 인정했었다.
그러므로 이외의 새로운 종교들은 비슷한 종교 즉 유사종교가 될 수밖에 없었고 당시 가장 막강한 반일 민족종교 보천교는 유례없는 "보천교 신법"까지 만들어 탄압했던 것이다.
역설적으로 앞에서 본 통계와 같이 보천교의 가장 활발한 147 건 항일기사는(기독교 23 건, 불교 18 건, 천주교 2건, 유교 15건) 친일로 돌아선 여타 다른 종교와는 다르게 보천교가 그만큼 가장 활발하게 항일운동을 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일본은 유일하게 친일적이지 않은 민족 자생종교 보천교를 조선의 종교단체를 마음대로 억압하고 요리하는 하나의 샘플로 삼았는데, 이러한 사실을 밝혀주는 자료들은 이미 많이 나와 있다.
특히 통감부령 제 45호 '종교의 포교에 관한 부칙'은 일본 내지(內地) 신도(神道)와 불교, 기독교만을 종교로 인정하고 나머지 민족종교는 근본 속성을 정치적 결사체로 보아 철저한 탄압을 가했다.
당시 650만 신도를 가진 조선 최대의 종교단체가 공개단체도 아닌 비밀단체인데다 여타의 종교처럼 친일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가장 큰 독립운동 자금원인 것을 알고 있는 일제로서는 이 비밀 단체를 어떻게 취급해야 할지 내심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다.
일제는 종교단체와 사상단체 관리를 위한 방편 상, 끊임없는 회유와 협박에 의해 비밀교단의 모습을 공개하도록 유도했으며,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간부 이 상호에 의해 <보천교>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자 이를 계기로 민족종교 탄압책의 일환으로 당시 친일 언론이었던 조선, 동아를 무기 삼아 보천교의 어두운 면 만 집중적으로 부각시켜 유사종교화 내지 사이비 종교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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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산장려운동(신문 포스터와 계몽 행렬)
1936년 3월 주인장(교주 호칭) 차 경석의 사망과 함께 해체되기 전, 당시의 『보천교』는 이미 공개적인 차원에서 친일로 돌아선 국내 여타 종교와는 다르게 국내 종교단체 중 은밀하게 독립운동자금을 대던 가장 막강한 비밀조직이었는데, 조 만식에 의해 시작된 『물산장려운동』의 기관지 <산업계>는 『보천교』의 기관지 <보광>을 인쇄하는 「보광사」인쇄부에서 인쇄되었다.
이는 『보천교』 충남 진정원 간부 임 경호와 보천교 경성 진정원 간부 고 용환(高龍煥) 그리고 3.1 운동과 상해임정에 참여한 바 있는 경성 진정원 부장 주 익(朱翼)이 물산장려회 이사로 참여한 사실과 <산업계>의 실제 사무 담당자가 바로 임 경호, 고 용환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보천교의 역할이 『물산장려운동』의 단순한 배후가 아니라 이를 모든 면에서 실질적으로 주도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고당 조만식,여운형,설산 장덕수, 고하 송진우, 조병욱, 설태희,안재홍등 적지 않은 독립운동가 및 사회운동가들이 비밀리에 [보천교]를 내왕하며 독립운동자금과 사회운동 자금을 제공받았으며 그 중 일부는 직접 입교하여 신도가 되기도 했다. (...이후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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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 사이비라고 하는겁니까 ?!
이글로 증산도나 보천교에 대해서 나쁜 이미지가 사라졌으면 합니다.
(http://paper.cyworld.nate.com/paper/paper_item.asp?paper_id=1000081099&post_seq=513360) ----------------------------------------------- 싸이월드에서 받아보는 페이퍼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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