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복영 池復榮 (1920~2007) 】 "지청천의 딸, 임정과 광복군을 넘나든 여전사 '지복영' 독립운동가"
많은 애국지사들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한 몸을 바쳤지만 그중 무장투쟁에 앞장선 지사들의 희생이 더욱 컸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목숨을 초개와 같이 나라에 바친 무명 애국지사들입니다.
<역사의 수레를 끌고 밀며> 저자 지복영의 말에서
지복영
최초 여군 ‘여자광복군’으로 활약한 지복영은 3·1만세운동이 일어났던 4월 11일, 1919년 기미생인데요. 부친 지청천과 모친 윤용자의 1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지만, 태어난 지 3일 만에 부친과 이별했답니다.
한국독립당 군사위원장,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광복군 총사령부 사령관 등 수많은 수식어만큼 부친 지청천은 독립운동사에 굵직한 흔적을 남긴 인물인데요. 지복영은 1924년 6세가 되어서야 부친을 만날 수 있었어요.
“이분이 누구인지 아니? 아저씨란다. 아저씨한테 인사해야지”라고 소개하는 누군가의 말에 서슴없이 “아저씨,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한 이는 얼굴도 몰랐던 부친 지청천이였는데요. 초롱한 눈망울의 소녀를 번쩍 들어 안은 부친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어요.
남편 없이 어린 삼남매를 홀로 키우느라 삯바느질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던 모친은 만주 벌판에서 활동하던 부친의 소식을 간간이 전해주던 공작원과 연락이 끊어지자 결단을 내렸는데요. ‘왜놈의 교육을 받게 해 왜놈으로 만들 수 없다’는 생각에 무작정 국경을 넘었어요.
<광복>지에 실린 지복영 선생의 기고문
그때부터 지복영 가족은 먼 타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는데요. 그리고 1995년 3월 1일이 되어 출간을 알렸답니다. 광복 이후 직접 10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한 책 <역사의 수레를 끌고 밀며>에는 독립운동의 생생한 이야기가 담겼어요. 지복영은 학업의 열정이 가득한 여성이었어요. 광복되자 1946년 8월 한국 국립도서관 전문학교 과정을 거쳐 다음 해 가을,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사서로 재직한 그녀의 이력은 남달랐는데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하이, 난징, 충칭 등지로 이동하는 과정에서의 학업에 대한 열정이 말해주고 있었답니다.
베이징에 있는 구지소학교를 다니면서 중학교 갈 준비를 했을 즈음, 막 시작한 영어 공부도 무척 즐거웠는데요. 그런데 어느 날 오광선 선생이 부친을 찾아와서 급히 난징으로 옮겨가야 한다고 전했어요. 곧 베이징이 일본의 세력권에 들어가서 독립운동가 가족의 생활이 위협받을 것이라는 우려였어요. 지복영은 학비 없이도 공부를 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이 눈앞에 있는데 결코 떠날 수가 없었는데요. 그래서 혼자 남아 고학을 해서라도 꼭 중학에 갈 것이라고 고집했어요. 그 절박함은 스스로 학업에 책임을 지겠다는 내용의 호소 편지에서 드러나요.
부친 지청천은 “그저 계집애로만 생각했는데 가르치면 사람 구실할 것 같소. 어떻게 해서든지 학비는 마련해 보내줘야겠소”라며 오 선생에게 편지를 보여주며 눈물을 흘렸는데요. 상황이 급박해지자 오 선생은 “만일 너의 아버지께서 학비를 대지 못하시면 내가 책임지고 공부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니 어서 난징으로 가자”라고 여러 번 다짐을 확인시켜주고 함께 피란길에 올랐어요. 1935년 여름 난징에 도착한 뒤 지복영은 6학년 편입시험을 악착같이 준비했고 육군중학에 합격했어요.
어느 날, 집에서 한 통의 긴급전보 ‘모친병위(母親病危), 화속회가(火速回家)’라는 소식을 들었는데요. 깜짝 놀라 지복영은 새벽 첫차를 타고 한걸음에 집으로 달려갔어요. 어머니는 무사하셨고 일본 침략군이 쳐들어와 수도 난징까지 위험하니 빨리 철수해야 한다고 급박한 상황을 전했어요.
베이징에서 1년 반, 난징에서 3년을 채우지 못한 채 다시 피란 행렬에 올라 배를 타고 향한 곳이 남서쪽 후난성의 창사(長沙)인데요. 그곳에서 오 선생의 부인과 오희영, 오희옥, 오영걸 형제, 엄항섭 선생과 김의한 선생 가족, 곽낙원 여사, 이동녕 선생과 차리석, 송병조 선생 등 임정 식구들과 함께 생활을 시작해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총무처 직원. 두 번째 줄 맨 오른쪽이 지복영(1940. 12. 26)
1939년 9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의 결단식 이후로 지복영은 광복군 활동에 뛰어들었어요. 그곳에서 소년 소녀들은 독립운동을 주제로 연극을 했고 독립 의지를 확고히 했는데요. 먼 타국의 긴박한 일상을 지복영은 회고록에 기록했는데 마치 한국판 <안네의 일기>와 흡사해요.
급박했던 시대 상황을 인식하며 한국광복군은 1940년 9월에 조직되었는데요. 창설 당시 사진에는 지복영을 포함해 제복을 입은 4명의 여성이 있어요. 한국광복군은 총사령관 지청천과 참모장 이범석, 총무처장 최용덕 등이 중심이 되어 본격 투쟁에 들어갔는데요. 1941년에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한국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되면서 지복영은 총사령부 소속이 되었어요.
군 기관지인 <광복>의 한글판과 중국어판을 펴내는 일부터 총무부, 정훈처 활동, 한국광복군 초모위원회 일원이었던 오희영, 오광심 등과 적정 탐지 및 광복군 초모(사람을 모집함) 공작활동에 이르기까지 지복영은 독립전쟁의 한가운데 있었는데요. 그러자 늘 소리 없이 걱정하는 모친을 위해 지복영은 사진관에서 군복을 입고 거수경례를 하는 독사진을 찍었는데, 지금 광복군 시절 유일한 독사진으로 남아요.
임시정부 선전부와 외무부, 자료과 과원, 선전과 과원, 중국 중앙방송국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비서실에서 복무한 화려한 그녀의 이력만큼이나 독립전쟁은 치열해졌는데요. 장갑차 위에 당당히 올라선 지복영의 모습과 같이 전쟁터 속 한국 여성은 강건한 모습으로 독립을 꿈꾸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