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 2
함석헌
교사 노릇을 하고 있는 10년 동안 나는 나 개인의 장래와 나라의 장래를 생각할 때 언제나 교육, 종교, 농촌, 이 셋을 하나로 붙여서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일본의 압력 밑에서 모든 자유를 잃고 있는 우리에게 살 길은 오직 두터운 신앙을 밑바닥 또는 마지막 목적으로 삼는 교육으로 씨알을 깨워내는 데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형편에 있어서 우리의 첫째 할 일은 민족의 해방이었습니다. 남들이 다 봉건제도의 낡은 껍질을 벗어 제치고 근대식의 민주국가로 민족 문화로 발전을 하고 있는 때에 우리만이 그것을 이루지 못해 남의 식민지가 돼버리고 말았으니, 우선 그 종의 멍에부터 벗지 않고는 아무런 발달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만이 그때 누구나 뜻이 있는 사람은 다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민족 해방을 어떻게 하면 이룰 수 있느냐가 문제였습니다.
나라가 망하던 전후에 사람들이 가장 많아 한 것은 무력혁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실력은 없었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몇 천 년을 줄곧 밖에서 쳐들어오는 대적 때문에 부대껴온 나라요, 그때는 또 서양서 오는 군국주의 침략주의 때문에 참 어려운 때였는데 어쩌면 그렇게도 국방 생각을 아니했을까? 나라가 망해도 참 더럽게 망했습니다. 별로 반항다운 반항 하나 못해보고 썩어진 담 무너지듯 소리도 없이 폭삭했습니다. 그 망국은 싸우다가 힘이 모자라서 망한 것이 아니고 씨알과는 완전히 떨어진 벼슬아치 놈들이 흥정해서 팔아먹음으로 망한 것입니다. 이 글을 쓰는 오늘 영친왕의 장례라고 신문, 라디오가 떠듭니다마는 영친왕이 무슨 빌어먹을 영친왕입니까? 그것이 이 땅과 씨알을 온통 일본 손에 팔아넘기는 대신 받았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 대적은 쳐들어온 놈보다 구차한 돈과 지위를 받고 우리를 종으로 부릴 도둑을 불러들였던 그놈들입니다. 그러나 팔아먹는 놈은 벼슬아치여도 고생하는 것은 팔려 넘어가는 씨알인데 그 씨알이 멍청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랬나? 나라는 자기네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아직 깨지 못한 데입니다. 다 팔려 넘어간 다음에야 비로소 깨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늦었습니다. 늦었지만 옳습니다. 늦었지만 아주 틀린 것 아닙니다. 어려울 뿐입니다.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습니다. 하다가 나라 안에서 할 수 없으니 만주, 시베리아로 가서 계속하려 했습니다. 산업으로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황무지였던 거기서 마음대로 땅을 갈아먹으며 실력을 기르고 중국, 러시아의 힘을 빌어 일본과 한번 맞서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비장이람 비장한 생각이지만 어림없는 일이었습니다. 청일, 러일의 두 큰 전쟁에 이기고 난 일본 군대를 동양에서는 당할 놈이 없었고, 또 씨알을 기를 생각은 아니하고 군인으로 그나마도 남의 군인을 빌어서 나라를 찾자는 것은 결코 역사의 앞뒤를 살펴서 하는 깊은 것이 못됩니다. 그때는 사실 지사(志士)라는 사람들, 오늘 말로 하면 지도적인 엘리트들의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했고, 나라 안의 일반 사람들도 목을 늘여 그 ‘해외’(海外)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잘못된 것이었기 때문에, 그때는 나라사랑으로 알고 했어도 후에는 민족의 비극이 여기서 인연이 되어 오게 됩니다. 오늘의 민족의 허리를 조르는 죽음의 38선은 사실 이때부터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외국 군대 힘을 빌자는 생각이 아니었던들 중국과 러시아파가 갈리지는 않았을 것이고, 러시아에 갔던 사람들이 없었던들 이북 괴뢰정권이라는 소리는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력혁명에 희망이 없는 줄 깨달은 다음에 한 것은 국제정세에 타보려는 노력이었습니다. 3.1운동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무력혁명이 아니고 정치적이었다는 데서, 더구나 씨 알이 그 주체가 됐다는 점에서 전보다 한 걸음 나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실패했습니다. 씨알이 주체는 됐으나 그것은 알이 든 씨알이 되지 못했습니다. 일본의 제국주의를 무너뜨릴 만한 혁명의 이론도 조직도 가진 것이 없이 다만 세계의 정의감에 호소를 했을 뿐입니다. 우리 속에 힘의 가능성이 있는 것은 알았습니다. 그것은 큰 수확입니다. 그러나 가능성은 길러내서만 실지의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정의의 법칙을 믿은 것은 옳습니다. 잘한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 속은 것이 있습니다. 세계의 열강이라는 나라가 결코 정의의 사도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다 우리의 압박자인 일본의 선생인 군국주의 제국주의의 나라들입니다. 세계대전은 그 제국주의 실행의 결과였습니다. 세계를 서로 제각기 제가 다 먹으려다가 충돌이 돼서 너도 못 먹고 나도 못 먹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제국주의를 결코 버린 것은 아닙니다. 이상주의 윌슨의 말은 옳습니다. 유럽의 씨알들은 그를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그 지배자들은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윌슨 자신 실패하고 멋없이 돌아가는 판입니다, 윌슨을 손아귀에 넣고 주무른 제국주의자들은 서로 타협하고 나는 이것을 먹는 대신 너는 그것 먹어 좋다 식으로 세계 몇 억의 약소민족을 자신들은 얼굴 하나 말 한 마디 내놓을 기회 없이 지도 위에서 갈라먹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파리강화회의였습니다. 도둑이 존경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고 도둑질하는 실력입니다. 동양의 모든 민족이 석가를 내고 공자, 노자를 냈건만 존경받은 것은 인도, 중국이 아니고 자기네게서 강도질을 배워 상당한 실력을 발휘한 일본 하나뿐이었습니다. 죽을 땅으로 끌려가는 양인 한국의 비명을 아는 척 할 리가 없었습니다. 일본은 이제 조선, 만주를 맘대로 먹어도 좋다는 승낙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속은 것은 우리 자신이었습니다. “만세!” 하는 것은 우리는 결코 일본의 지배를 원치 않는다 하는 말인데, 그렇다면 그것을 실천했어야 할 것입니다. 만세 부르는 그 날은 물론 그만큼 실천한 것이지만 실천은 거기 그쳐서는 아니 됩니다. 그 부르짖음이 정말 참 부르짖음이 되려면 그날로 일본 관청에 출석하기를 그만두고, 일본 사람이 가르치는 학교에 가기를 그만두고, 세금 바치기를 그만두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랬다면 만세가 만세로만 끝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문명한 나라에 정의가 없지 않습니다. 그 지배자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씨알에게는 있습니다. 사실 문명한 나라의 힘 있는 것은, 그 군대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보이지만 그 사실 아닌 것이 전쟁으로 증거 됐습니다. 정말 정의는 일하는 씨알에 있습니다. 그것이 전쟁 동안의 참혹에서 견딤과 전쟁 후의 부흥에서 증명했습니다. 우리는 그 지배자를 보고 호소할 것이 아니라 그 씨알에 대해 했어야 할 것입니다. 씨알은 일하는 씨알, 참의 씨알이므로 말만 아니라 사실로만 호소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공연히 우상의 표시인 깃발만 흔들지 말고 실지로 정의를 지킴으로써 오는 피와 땀으로 계속 부르짖었던들 세계의 씨알은 가만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씨알은 내놓고 그들을 짜먹는 지배자들을 보고 했으니 될 리가 없었습니다.
실패는 섭섭하지만 실패처럼 값어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합니다. 만세를 부르면 독립이 될 줄 알았다가 그대로 아니 되는 것을 본 다음에야 한국의 씨 알은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함은 곧 알듦입니다. 3.1운동 이후 우리 민족이 허탈감에 빠지지 않고 자라기 시작한 것은 깊이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점은 오늘의 씨알들이 깊이 반성할 점입니다. 국민투표 이후 왜 이렇게 맥이 빠집니까?
생각해 얻은 결과는 한 마디로 표시해서 교육입니다. 살 길을 가르치는데 있다 하는 것입니다. 전에 무력으로 반항함으로, 세계 대세에 주목하여 정치적으로 활동함으로 살 수 있을 줄 알았던 데 비해 훨씬 깊이 들어간 것입니다. 가르쳐야 한다 할 때 폭력보다는 정신의 힘 있는 것을 안 것입니다. 정치보다 문화에 더 생명이 있는 것을 안 것입니다. 내 발등의 불부터 끄려 할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같이 쓰고 사는 집에 당긴 불부터 꺼야 하는 것을 안 것입니다. 사람이 있어 역사를 낳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내다보고 거기 참여하는 데서 사람의 살림이 나오는 것을 안 것입니다. 나라 팔아먹은 것이 이완용, 송병준이가 아니라 우리 자신들인 것을 안 것입니다. 나라가 어느 한 놈 두 놈, 어떤 계급의 것이었을 때 그들이 팔아먹을 수 있었을는지 모르나, 나라가 우리 것인 담에 우리가 아니 파는데 누가 팔 수 있느냐? 일본이 뺏은 것 아니라 우리가 도둑을 불러들인 것이다. 스스로 불러들이지 않는데 들어오는 도둑이 어디 있느냐? 설혹 있다손 치더라도 지킨 채로 죽었음 죽었지 어찌 빼앗긴다는 법이 있느냐? 뺏을 수 없는 것이 나라다. 나라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 이렇게 알게 된 것입니다. 분명히 그렇게가 아니라도 적어도 어렴풋이 그 짐작이라도 하게 된 것입니다.
넓고 깊은 의미에서 생각할 때 사람의 하는 모든 일이 결국 교육입니다. 사람의 일만 아니라 생명의 전 과정이 곧 교육입니다. 진화는 곧 생명의 자기 키움이요 자기 고쳐감입니다. 정신을 곧 생명의 저 돌아봄이란다면 하나님은 자기 교육을 영원히 하시는 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3.1운동 이후 교육열이 올라간 것은 결국 씨알이 스스로 깨고 스스로 자기를 키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연한 과정이요 바로 된 일입니다. 그런데 그 교육을 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당연이람 당연한 일이지만 이것이 마지막 일이니만큼 하지도 못하고 아니하지도 못하고 그 어려움을 말로 할 수 없습니다.
무기를 뺏으면 그것은 내놔도 좋습니다. 정치를 못하게 하면 그것을 못하고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육을 못하게 한다면 어찌합니까? 아니하면 짐승도 못됩니다. 짐승도 제 새끼를 가르치기는 합니다. 하자니 그 정치와 그 폭력에 맞서야 합니다. 그러면 죽음을 의미하는 것뿐입니다. 그러고 보면 일제 마지막에 성을 일본식으로 고쳐라 했을 때 거의 모든 사람이 다 그 명령에 복종하면서 자녀의 교육 때문이라 했던 것은 그럴 만한 일입니다. 성을 갈다니, 사람으로선 할 수 없는 일인데, 사람은커녕 짐승 버러지는 더구나도 아니하는 일인데, 죽지 못해 그 비겁한 짓을 하면서 그 구실을 교육에 가져다 댔습니다. 그런 때에 쓰는 것은 절대적인 것일 터인데 교육은 그만큼 중대하단 말입니다. 그것 때문이라면 짐승도 아니하는 짓을 하고도 용서를 받을 법하다 해서 한 말입니다. 그들도 성 갊이 곧 그렇게 시키는 교육인 줄 모르지 않았겠는데 그 모순을 하리만큼 교육은 무서운 것입니다.
교육이야말로 하나님의 발길질입니다. 절대입니다. 하는 줄 알면서도 하고 하는 줄 모르면서도 합니다. 찬성하면서도 하고 반대하면서 하게 되는 것이 교육입니다. “나는 바담풍 해도 너는 바담풍 해라” 하는 말 이 얼마나 그것을 잘 표시합니까? 금하려 해도 금할 수 없습니다. 살림 그 자체, 정신 그 자체가 가르치는 것이요 또 배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교육은 누구나 할 수 있고, 어디서도 할 수 있는 것이요, 또 아무도 할 수 없고 어디서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교육자가 되려고 사범학교 갔을 때 그런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갔습니다. 못했으니 갔지 했다면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이 20이 넘었고 이미 남의 아비가 된 때이니 생각이 없을 수는 없었습니다. 생각을 하고 갔기에 지금도 직업 심리에서 교사가 된 것은 아니란 말은 할 수 있습니다.
시대의 다름도 있겠지만 그래도 인생으로서의 내 앞날 또 씨알의 하나로서의 책임을 생각하면서 골랐지요. 새처럼 먹고 살아갈 일을 위해 하지는 않았습니다. 쉽게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는 취미가 비교적 여러 방면이람 여러 방면입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은 멀리서 영문과를 했느니 철학과를 했느니 추측을 할 만큼 그런데도 생각이 있었담 있었고, 미술은 더구나도 해봤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여럿 중에서 가장 흥미의 점수가 적은 것부터 떼버리는 방법으로 목적을 결정했는데, 내가 내 개성을 정말 바로 알았던가 몰랐던가 그것은 별문제로 하고, 마지막까지 아쉴 정도로 남아 있었던 것은 미술 곧 서양 그림이었습니다. 이제 와서 공정히 생각해 보면 그럴 만큼 그림에 소질이 있었나 하면 그렇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그때는 하고 싶은 개인의 취미대로 하란다면 아마 미술로 갔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때 생각에 당시의 우리나라 형편으로 보아 시급한 것은 교육이라 생각됐기 때문에 그 길을 택했습니다.
물론 무슨 깊은 설명이 있다거나 누구의 지도 조언을 들어서 한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도 어렸을 때 나를 의사로 만들려고 공립학교에 보냈다가 후에 자기가 지내보니 의사 직업이 반드시 좋지 않다 해서 그것 할 것 없다는, 그나마도 꼭 명령은 아니고, 말을 한 다음에는 제 할 일 제가 어련히 알아서 하려니 모든 일에서 믿어주셨기 때문에, 나도 별로 의논도 하지 않았고 그 밖에 어느 선생이나 친구에게 의견을 물은 것도 없이 결정한 것이었습니다. 다만 사회 일반의 생각 돌아가는 형편은 상당히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이따금은 차라리 의사, 더구나 한의라도 됐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는 때가 있고 옥에서 나와서 명의라 고 소문 듣던 주인 없는 약국에 앉아, 교사 노릇은 이미 할 수 없이 된 자신과 물러가는 날 있을 것 같지 않은 일본세력을 보며 장래를 생각 할 때 이제라도 한의를 배워야겠다 하는 생각에 『의학입문』『동의보감』『맥경』『본초』를 읽기까지 했고, 사실로 어떤 때는 한의사이십니까 하고 묻는 것을 당해도 보지만 소질로 하면 의사가 될 수 있었던지도 모릅니다. 또 하면 어지간히 할 것도 같습니다. 그것은 실없는 이야기고, 하여간 그러면서도 지금도 역시 중요한 것은 교육이라 하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가 되는데 노상 생각 없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교단에 서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오래는 못되지만 그래도 남강 선생의 말년 두 해를 모셨는데 그 남강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데 어찌합니까?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어려워” 하고는 한숨을 쉬시곤 했습니다. 왜 그렇게 어려웠던가? 그 설명을 좀 해보기로 합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어려서 받던 교육처럼 효과적인 교육은 없었습니다. 교육시설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교재가 잘 정돈돼서도 아닙니다. 교사가 훌륭해서 조차도 아닙니다. 그때에 무슨 시설이나 교재가 있으며 그런 시골구석에 무슨 훌륭한 교사가 있습니까? 그래도 선생과 학생이 하나가 되어 산교육이 되어갔습니다. 그 까닭이 어디 있나 하면 그 시대 공기에 있습니다. 선생이 가르치고 아이들이 배운 것 아닙니다. 역사 자신이 가르치고 역사 자신이 배웠습니다. 잘 가르쳐도 나라요 못 가르쳐도 나라입니다. 교육은 되게만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도 시설 부족 교재 부족 교사의 부족을 알지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살아 있는 전체 그 자체가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내 집 자식이 아닙니다. 우리 ‘학도생’이지. 누가 잘해 상을 타도 시기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잘못해 벌을 받아도 업신여기거나 아주 몹쓸 놈으로 버리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도 다른 것 엔 몰라도 거기는 향수를 느낍니다. 그런 시대의 분위기, 민족이 하나로 감격하던 그런 시대정신이 또 한 번 왔으면! 그때에 잘해서 민족의 성격을 틀잡지 못한 것이 한입니다. 전체적인 감격 없이 교육은 아니 됩니다.
그것이 깨지고 교육이 잘못되기 시작한 것은 합병하고 일본 사람의 손으로 교육을 하게 되던 때부터입니다. 벌써 전체는 없습니다. 교사도 그것을 알고 아이들도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거짓입니다. 교육이 될 리 없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아주 아니 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 전체, 혹은 나라, 혹은 역사가 적어도 아이들 편에는 깨지지 않고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본 교사(혹은 일본 노릇을 하는 조선 사람 교사)가 일부러 우리에게는 해로운 것을 가르쳐도 아이들이 그 근본 천성, 혹은 속에 있는 전체의 명령에 의해 자동적으로 바꾸어 놓기 때문에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어떻게 어린아이도 그것은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는 원수로 아는 일본 사람에게 아이들을 보내면 서도 안심할 수가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닭한테서 오리 알을 까내는 셈입니다. 어리석은 암탉이 아무리 불러도 소용이 없습니다. 부르면 부를수록 오리새끼는 물로 갑니다. 그럼 일본 사람은 그것을 모르나? 모를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니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모이를 아니 주고는 알을 빼앗아 먹을 수 없듯이 교육 아니 하고는 지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르쳐 놓으면 지배를 벗어버릴 힘이 자동적으로 생깁니다. 선한 것이 마지막에 이기고 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본시대 초기의 교육도 효과가 없지 않았습니다. 지배자를 심판할 지혜와 그것을 쳐부술 능력을 다른 사람 아닌 지배자 자신이 가르쳐줍니다. 그것이 또 그들에게 손해 아닙니다. 남을 지배하는 것이 잘난 것이 아니라 아니하는 것이 잘난 것입니다. 이것이 악한 자가 악을 해도 제 악으로 인해 악이 없는 자리에 가도록 마련이 되어있는 것이 하나님 있는 증거입니다.
교육이 정말 하기 어려워진 것은 공산주의가 들어오면서부터 입니다. 공산주의가 나빠서 아닙니다. 물론 나쁘지만 나쁜 것만 가지고 내가 잘 못되지는 않습니다. 공산주의 사상 때문이 아니라 그로 인해 민족 분열이 생긴 때문입니다. 그럼 일본 제국주의는 못했던 민족 분열을 공산주의는 어떻게 하게 됐나? 일제도 전연 아니한 것 아닙니다. 그들도 갈라놓고 지배한다는 것을 모를 리 없습니다. 될수록 갈라놔서 개인의 무리로 만들어서 전체를 없이 해놓고 다스리려고 애를 썼습니다. 한국 역사를 일부러 비뚤어지게 써가지고 가르친 것도 그것이요 교육이랍시고 실업 교육만을 한 것도 그것입니다. 사람은 살려면 일해야 하는데 일은 결과에 매달리는 것이기 때문에 일에 열심하면 할수록 전체는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전체는 나와 남의 하는 모든 일을 묶어 한 의미로 살리는 생각 속에만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될수록 기술, 그나마도 고등한 것은 아니고 낮은 기술을 가르쳐서 자기네의 심부름하는 자격을 가지게 하는 한편 생각하는 기회를 없이하려 했습니다. 그리고는 더구나 나쁜 것은 중류 이상의 일부 사람에게는 약간의 지위도 사업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출세할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그때 일본은 고도의 자본주의로 들어가려 하는 때이므로 어느 정도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네에게 유리했습니다. 그렇게 한 결과 어떤 현상이 나타났느냐 하면 전에 지사(志士)라 민족주의 지도자라 하던 많은 사람이 약해져서 타협을 하고 일본세력 밑으로 들어가게 되고 사회에 유산자 무산자 하는 계급 현상이 일어나게 됐습니다. 이리해서 전에 총칼 앞에서는 하나로 서던 민족이 이제 돈과 세력 앞에서는 갈라지게 됐습니다. 그렇게 되면 공산주의를 부르지 않아도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대체로 민족주의 시대기 때문에 그 민족감정이 지배적이어서 분열이 그리 심하지 않았고 교육도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당초에 지사들이 북만주, 시베리아 눈바람 속을 헤맸을 때 다 사랑하는 한배 나라 건지자는 생각에서 그랬지 다른 야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씨알을 주인으로 삼고 그것을 길러서 하잔 생각보다도 급한 마음에 정신보다는 방법으로 기울어져 밖의 힘을 빌어 가지고 일을 해보잔 생각을 했을 때 전체는 깨지고 분열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힘을 비느냐? 러시아 힘을 비느냐? 이것이 비극의 시작 입니다. 러시아 힘을 빌려 할 때 그들은 그 러시아가 레닌, 스탈린의 공산주의 나라 될 줄 몰랐는지 모릅니다. 또 공산 러시아가 된 후에라도 사상적으로 공명해 한국을 공산화하자는 생각보다는 한때 그 힘을 빌 자는 생각에서만 했는지 모릅니다. 사실 일본을 제어할 힘은 그밖에 없었으니, 또 설혹 공산화시킬 생각이었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오늘같이 이렇게 남북으로 분열이 될 줄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후에 와서 역사를 돌아보는 사람은 그 당시 사람의 맘 속에 생각했던 것만 보아서는 아니됩니다. 생각 못했더라도 그 속에 숨어 있던 것을 집어내야 합니다. 그렇게 볼 때 밖의 세력을 전략적으로 이용하려 했던 이들 지사들의 일은 많이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힘을 빌려는 사람은 벌써 전체를 어느 정도 잊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본위로 빠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흥정을 하는 김에는 흥정 맡은 내가 거기서 먹는 것이 있고 싶습니다. 그러면 파가 갈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순전히 전체를 위하는 마음에서 남의 힘 의지란 있을 수 없습니다. 뒤집어 생각하면 환합니다. 한국 독립을 위해 원조를 하는 중국이나 러시아가 정말 우리 위해 희생적으로 의용군을 줄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서로서로 흥정이요 이용해 먹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과는 첨부터 뻔한 것입니다. 외국 세력으로 독립이란 논리가 서지 않는 말입니다. 설혹 됐다 해도 그것은 나라의 독립이 아닙니다. 어느 정권이 선 것뿐입니다. 반드시 그 후에 그 국민은 그 정권과 싸워서 정말 독립을 다시 싸워 얻어야 할 것입니다. 동쪽의 일본 역사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남의 이야기를 하려고 이 말을 하는 줄 압니까? 오늘 우리 일이 그것 아닙니까?
하여간 그것이 인연이 되어 해방 후 38선이 생겼습니다. 물론 국제 정세 때문이지만 국제정세만 따져 가지고는 역사는 없습니다. 인격의 본질이 도덕적인 데 있는 이상 환경에 핑계가 성립되지 않는 모양으로, 역사를 국제관계에만 밀수 없습니다. 아무리 미, 소 두 세력이 왔더라도 우리가 정권을 잡는 것보다도 전체를 건지는 것을 더 중하게 생각 했더라면 차라리 공동 신탁통치 밑에 있으면서라도, 두 정권으로 갈라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론을 하잔 것 아닙니다. 문제의 초점이 전체의 분열에 있는데 그 분열의 쫓아온 유래를 찾는다면 공산주의를 끌어들인 데 있습니다. 일본시대는 강제로 억눌러도 민족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기 때문에 고통이면서도 어지럽지는 않았는데 이제 공산주의가 들어온 후는 민족이 정신적으로 분열이 됐습니다.
그것이 신간회 만들던 무렵부터 시작입니다. 물론 시대적인 까닭이 있습니다. 벌써 민족주의 시대는 지나서 사회혁명 단계에 들어왔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잊어서 아니 되는 것은 우리는 민족 해방을 못한 채 사회혁명 단계에 들어왔기 때문에 남의 나라와 사정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둘을 겸해서 치러야 합니다. 역사에서 건너뜀은 허락 아니 됩니다. 그런데 초기에 들어온 공산주의자들은 ‘조국 러시아’ 라고 내놓고 부르리만큼 얼빠지고 무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더러 오늘의 중공, 소련 관계를 좀 보라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은 민족진영을 일부러 무너뜨리려 갖은 수단을 다 썼습니다. 물론 민족시대는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민족해방을 못하고는 사회해방은 아니 됩니다. 오늘까지도 그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일본의 지배를 못 면한다면 나라 안의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싶어도 아니 됩니다. 지금도 그런데 하물며 총독정치 시대에 있어서겠습니까? 물론 민족주의 지도자들 밉습니다. 썩었습니다. 그들이 썩지 않았던들 공산주의자들이 그렇게 무책임하게 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민족의 분열이 그렇게 일어나고 보니 교육을 도저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선생 선생끼리도 학생 학생끼리도 믿을 수 없습니다. 압박하는 일본에 대해 그전같이 대항할 수가 없습니다. 이를 본 것은 일본 제국주의뿐이었습니다. 시대가 이렇게 바뀌었으니 말이지 만일 그대로 나갔다면 공산주의 자신도 망해버렸을 것입니다.
사람은 죽으면 다 좋은 사람이 돼버리고 역사는 지나가면 다 빛나는 투쟁이 돼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좋기도 하지만 또 그래서만은 아니 되는 점이 있습니다. 3.1운동 찬양하는 사람은 많아도 거기 어떻게 잘못이 있었던 것은 말하려 하지 않습니다. 광주학생사건은 더구나도 그렇습니다. 오늘 와서 말하니 다 용감한 투쟁이라 하지만 그때에는 교육하려는 사람은 참 애 먹었습니다. 민족적인 차별에 분개하여 일어섰던 학생의 일은 장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은 그것을 이용해서 사회질서를 온통 파괴하려 했습니다. 정말 무산계급을 해방시키려면 한국이 일본의 종살이에서 전체로 해방되는 일 없이는 될 수도 없고 된다 해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계급투쟁이란 이름 아래 민족의 전통도, 사회의 질서도, 도덕도 온통 부수자는 것입니다. 또 지도자는 무슨 이데올로기의 이론이 있고 방침이 있어 그런다 가정을 하더라도 그 선전을 듣고 움직이는 학생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반항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론이 설혹 옳다 하더라도 그 움직인 학생들은 이용당한 것이지 혁명을 한 것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은 정말 살부회(殺父會)를 꾸미라 하고 선생들을 없애버리라 했습니다. 나는 자본가의 착취를 반대하고 눌린 씨알을 해방하자는 데서는 누구보다 뒤지고 싶지 않지만 그들의 도덕을 전연 무시하고 시기와 미움과 싸움과 원수 갚음과 파괴만을 일삼는 데는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유물론도 털어놓고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어느면의 진리가 있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계급 없는 사회 건설하자는 데 반대 있을 까닭 없습니다. 계급투쟁까지도 어느 정도 용납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투쟁방법은 악인 것을 말하기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내 사랑하는 학생들을 추겨 내게 반항시켰습니다.
나는 또 좋습니다. 남강 선생에까지 맞섰습니다. 그것이 어디만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입니다. 대세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대세에 못 견디어 비겁해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싸워야 했습니다. 교사 노릇을 그만두고 싶은 생각도 그때는 하지 않았습니다. 난동 치는 학생한테 매도 맞았습니다. 하지만 학생들이 나를 미워하지 않는 것은 뻔합니다. 미워할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선전에 넘어가서 그럽니다. 그러니 나도 그들을 미워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을 설득시킬 확신이 있나 하면 없습니다. 그런 때에 남강 선생님은 배울만했습니다. 동맹휴교 뒤처리를 하게 되면 그 처벌에 있어서 젊은 교사들은 대개 강경론인데 선생님은 그때에 “안돼, 그렇게 하면 아니 돼. 말을 먹여도 물고 차는 상사말을 먹여야 멕일 맛이 있지, 시리죽은 것을 멕여 뭘해!” 했습니다.
그래서 교육을 그만둘 생각은 아니하지만 하고 있는 그 교육에는 확실히 근본적으로 잘못이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공산주의를 극복 못 하는 것이 교육일까? 근본적으로 고쳐 생각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점에서는 남강 선생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 선생 학생이 하나로 어울려 울고 웃고를 같이하는 오산학교를 세웠던 그가 몰라서 그럴 리는 없지만 3.1운동 결과 징역을 마치고 감옥에서 나온 후는 대체로 총독부 교육방침에 순응을 하면서라도 하자는 생각에 반대도 있는 것을 무릅쓰고 관청 거래를 하며 승격 운동을 했습니다. 그러고 누가 조언을 해드렸는지 영국 옥스퍼드 말씀을 해드려서 장차 오산을 옥스퍼드 같은 교육도시를 만들 꿈도 꾸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그렇게 되는 것을 보고는 아주 새로운, 새 교육을 설계해 보려고 생각을 시작했는데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선생님을 잃고난 나는 어머니 잃은 아기 심정이었습니다. 나의 둔한 것을 스스로 책망했습니다. 왜 일찍부터 좀 선생님을 힘써 배울 생각을 못했던가? 정신이 조금 들어 배워야겠다 하는 때에 훌쩍 가버리셨습니다. 바로 이 글을 쓰는 5월 9일입니다. 1930년.
나 혼자서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지근하게나마 한 생각 이 교육과 종교와 농촌을 하나로 연결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의 삼각추(三角維)와 같습니다. 이 셋이 서로 손을 잡고 서서 하나의 바닥을 이루고 그것이 점점 자라 한 점으로 초점을 이루는 곳에 창조적인 생명의 불꽃이 섭니다.
씨알의소리 1970.5월
저작집30; 7-41
전집20; 4- 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