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 선생 기념 강연(2012년 5월 6일)
김교신과 밀턴
박상익(우석대 교수/ 서양사)
오늘 드릴 말씀은 20세기 전반기 조선에서 살다 간 김교신과 17세기 영국 시인 밀턴에 관한 것입니다. 둘 사이엔 무슨 공통점이 있을까요? 두 사람은 시간적으로는 300년이나 떨어져 살았고, 공간적으로는 지구 반대편에서 살았습니다. 두 인물 사이에는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요? 언뜻 보기에 둘 사이에는 아무 관계도 없어 보입니다.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밀턴은 영어권의 시인이라는 것, 그리고 김교신은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와 도쿄고등사범학교 영어과에 입학해 젊은 날 영어를 전공했다는 점에서 둘의 공통점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김교신은 도쿄고등사범학교 1학년을 마친 뒤 지리박물과로 전과를 하고 맙니다. 그나마 간신히 찾아낸 공통점도 사라지고 맙니다. 두 인물에게 공통점이라곤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두 사람의 조국이 처한 상황도 크게 달랐습니다. 김교신은 생애의 대부분을 식민지 조선인으로 살다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하직했습니다. 반면 밀턴의 조국인 영국은 어땠습니까?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절 스페인 무적함대를 물리치고 나서 유럽의 열강으로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밀턴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죽은 지 5년 후 태어났습니다. 일본제국의 식민지 조선과 유럽 열강 반열에 오른 영국, 별로 공통점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겉모습만 보면 두 인물은 아무 관계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피상적인 관점입니다. 두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두 사람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각별히 프로테스탄트 신앙인이었습니다. 프로테스탄트라 하면 우리 시대로 치면 개신교가 될 겁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프로테스탄티즘은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이름만 프로테스탄트로 남은 우리나라의 개신교와는 크게 달랐습니다. 두 사람은 실로 프로테스탄트 중의 프로테스탄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 정신이 살아 숨 쉬는 기독교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프로테스탄티즘에 내포된 핵심적인 공통점을 저는 개인주의와 민족주의로 파악합니다. 오늘 제가 두 분에 관해 발표할 내용 또한 이 개인주의와 민족주의라고 하는 두 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전개하고자 합니다.
개인주의 먼저 개인주의에 대한 항간의 오해부터 지적해야 하겠습니다. 개인주의란 말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오늘날 개인주의란 말은 이기주의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커다란 오해입니다. 개인주의(individualism)는 이기주의(egoism)와는 다른 것입니다. 개인주의는 서양 근대사의 전개 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상입니다. 이것이 없었다면 서양 근대 사회의 성립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우리는 자유주의(liberalism)를 잘 알고 있습니다. 대한민국도 자유주의를 헌정의 기본 원리로 삼고 있습니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합친 자유민주주의가 우리 헌법의 근본 바탕이지요. 개인주의는 바로 이 자유주의의 철학적 기초를 이룹니다. 자유주의란 그 핵심이 “개인의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서양 역사에서 개인주의를 등장시킨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루터의 종교개혁이었습니다. 특히 루터가 종교개혁 원리로 제시한 만인사제주의(priesthood of all believers)는 신자 개개인이 하나님과 일대일의 관계에 들어갈 것을 요구했습니다. 개인의 도덕적 각성과 인격적 자각을 강조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근대적 개인’이 탄생했습니다.
신자 개개인의 도덕적 자각과 인격적 독립을 뜻하는 것이 개인주의의 본뜻입니다. 이것이 역사 술어로서 개인주의가 갖는 의미입니다. 그 개인주의를 기반으로 해서, 후대에 자유주의가 하나의 정치 이념으로서 전개된 것입니다. 김교신의 스승이자 무교회주의를 창도한 우치무라 간조는 이점을 통찰하고 있었습니다. 우치무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혼동한다. 그러나 이 둘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전자는 귀중한 것이고 후자는 비천한 것이다. 나는 개인주의는 존중하지만 이기주의는 전적으로 배척한다. 개인주의는 개인을 존중한다. 자기를 존중함과 동시에 또한 남도 존중한다. ……개인주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서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역사학에 조예가 깊었던 우치무라다운 통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치무라가 개인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유는 메이지유신 직후의 일본 사회가 개인주의를 결여하고 있었음을 꿰뚫어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합니다. 기독교도, 종교개혁도 경험하지 못한 일본에 개인주의가 있을 리 없었습니다. (이점은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19세기 일본이 서양 문물을 도입하면서 어마어마한 열정으로 서양 학문 용어를 일본어로 번역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을 일컬어 ‘번역 왕국’이라고도 부릅니다. 서양의 개념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일본 지식인들은 커다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society’의 번역어인 ‘사회(社會)’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는 ‘society’에 대응할만한 ‘현실’이 없었습니다. 무릇 언어란 그것에 대응하는 실체가 있을 때에만 성립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보겠습니다. 19세기 조선에 서양의 치즈가 들어왔다고 칩시다. 우리 조상들은 치즈가 뭔지 모릅니다. 치즈란 물건을 구경도 못해봤으니까요. 그러니 19세기 조선 사람은 치즈를 우리말로 번역할 수가 없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물건을 번역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마찬가지로 일본에는 ‘society’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영어에서 society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옥스퍼드 영어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은 이렇게 두 가지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1. 동료들과의 결합, 특히 우호적이고 친밀한 결합, 교제 또는 교우. 드물게 동물들의 교우도 포함. (Association with one's fellow men, esp. in a friendly or intimate manner; companionship or fellowship. Also rarely of animals.) 2. 같은 종에 속한 다른 개체 사이의 결합, 모임, 소통에서의 생활태도, 또는 생활조건. 조화를 이룬 공존이나 상호이익, 방위 등을 위해 개인의 집합체가 이용하는 생활조직, 방식. (The state or condition of living in association, company, or intercourse with others of the same species; the system or mode of life adopted by a body of individuals for the purpose of harmonious co-existence or for mutual benefit, defence, etc.)
‘society’의 첫 번째 정의는 단순히 무리, 집합이란 의미입니다. 동물 무리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두 번째 정의입니다. 여기에서 ‘society’는 궁극적으로 개인(individual)을 단위로 하는 인간관계입니다. 전자와 같은 의미라면 일본에도 있었지만, 후자처럼 개인에 기반을 둔 인간관계는 그에 대응하는 현실 자체가 일본에 없었습니다. 개인이 없으니 사회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뜻을 표현할 번역어도 없었습니다. (일본 사회과학의 천황으로 불리는 마루야마 마사오의 말입니다. 그의 스승은 도쿄대학 총장을 지낸 난바라 시게루였는데, 우치무라 간조의 제자였던 난바라는 무교회주의의 입장에 서서 일본의 군국주의와 공산주의를 비판한 정치학자입니다. 난바라의 전공은 서양정치사상사였습니다.)
일본 지식인들은 일본에 실체가 없는 ‘society’를 일본어로 번역하기 위해 심각한 고민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어찌어찌 해서 ‘사회’라는 말이 번역어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걸 받아서 쓰고 있지요. 우리는 스스로 고민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일본의 번역어에 무임승차 한 셈입니다.) 그러나 번역어가 등장했다고 그에 대응할만한 현실이 일본에 존재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일본인들이 ‘society’를 ‘사회’라고 번역할 때는 그 말의 본래 의미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society’를 ‘사회’라고 기계적으로 옮겼을 뿐입니다. 일본어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실체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조어(造語)를 만들어 사용한 것입니다.
개인이 존재하지 않았던 일본에 개인주의가 있을 리 없습니다. 개인이 없으니 당연히 ‘society’도 없습니다. 말로는 사회라고 쓰지만 개인의 집합이라는 의미의 ‘society’는 일본에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우치무라가 무교회주의를 주장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동양 사회의 이러한 역사적 공백을 간파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저는 추측합니다. 무교회주의야말로 철두철미 개인의 자각과 각성을 촉구하는 신앙입니다. 무교회주의란 양심과 이성을 지닌 하나의 소우주로서 각자의 개성에 대한 자각입니다.
우리 또한 일본과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 해 전 주한 미군 사령관 위컴이 한국인을 일컬어 “들쥐 같다”고 모욕적으로 표현했습니다만, 저는 이 말에 수긍할만한 점이 있다고 봅니다. 양심과 이성에 입각한 분별력을 지닌 개인은 없고, 이리저리 깃발 흔드는 대로 몰려다니는 무리만 있는 우리네 풍토가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개인의 집합으로서의 사회는 없고, 집단의 일부로서의 부품만이 존재하는 상황입니다. 인간이라고 다 같은 인간이 아닌 겁니다. 우리에겐 아직도 ‘근대적 개인’이 온전히 등장하지 못했습니다.
경영학자들은 일본이나 한국이 미국의 스티브 잡스 같은 인물을 배출하지 못하는 이유를 개인주의의 결여에서 찾고 있습니다. 진정한 창의성은 개인만이 발휘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키부츠는 집단생활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브루노 베텔하임이란 학자는 키부츠에서 자란 이스라엘의 청소년들을 연구한 결과, 키부츠처럼 집단감정의 공유에 높은 가치를 두는 환경이 창의성을 해친다는 결과를 얻어냈습니다.
개인주의의 결여 현상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서 성찰하지 못하고 대형교회 목사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한국 개신교 신도들의 행태는 ‘개인’이 아닌 ‘무리’의 모습입니다. 사회적 물의를 빚은 목사들이 부끄러운 줄 모르고 버젓이 행세하고 다니는 작금의 세태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책임의 상당 부분은 목사를 하나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평신도들에게 있습니다. 예언자 호세아가 말했듯이 ‘그 백성에 그 제사장’인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 과정에서 평신도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영어의 'self'라는 단어가 '연속적이고 다양한 의식을 지닌 영속적인 주체'라는 오늘날의 의미를 가진 것은 1674년의 일이라고 합니다. 이 무렵 self가 다른 단어와 합해져 복합어들이 나왔습니다. 예를 들면 ‘self-sufficient, self-knowledge, self-made, selfish, self-examination, selfhood’ 등이 있습니다. 16세기 루터에 의해 출발한 종교개혁이 200년에 걸친 내면화 과정을 거쳐 개인과 자아의 근대적 개념을 형성해 낸 것입니다. 대학이 중세 유럽의 발명품인 것처럼, 개인주의는 근대 유럽의 발명품입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파된 지 100년을 훌쩍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근대적 개인’이 아직도 온전히 등장하지 못한 것은 한국 기독교가 종교개혁 정신과 사뭇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시인 존 밀턴은 개인주의 신앙을 가장 철저하게 주장한 인물 중 한 사람입니다. 성경 해석에서 개인의 양심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시금석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밀턴은 개인의 양심과 이성에 입각한 개인주의 신앙이야말로 프로테스탄티즘의 핵심이라고 보았습니다. 개인주의 신앙이 영 마음에 걸린다면, 독립 신앙으로 바꿔 불러도 무방합니다. 그것이 바로 루터의 신앙, 밀턴의 신앙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우치무라 간조와 김교신의 무교회주의이기도 합니다.
밀턴의 개인주의 신앙이 가장 잘 드러난 글은 『아레오파기티카』입니다. 이 책에서 밀턴은 자기 종교를 남에게 떠맡겨두고 살아가는 한 부자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이 부자는 잇속 차리는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황금만능주의자이자 향락을 일삼는 쾌락주의자입니다. 그는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대단히 복잡하고 성가신 일이어서, 종교가 자기에게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신앙생활을 하자면 쾌락의 추구도 자제해야 하고, 정직하지 못한 수단을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자는 신앙이 좋다는 평판을 얻고 싶어 합니다. 요컨대 돈벌이도 하고 싶고 즐기고도 싶다, 그런데 신앙 좋다는 소리도 듣고 싶다, 바로 이것이 부자의 속마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부자는 수고스럽고 번잡한 일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기로 작정을 합니다. 자기의 신앙 문제를 전담해줄 관리인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 관리인은 유명하고 존경받는 목사여야 합니다. 부자는 목사에게 종교 문제 일체를 위임합니다. 자물쇠도 열쇠도 모두 그의 관리에 맡깁니다. 밀턴의 표현을 직접 빌자면 이 부자는 목사를 자신의 종교로 삼습니다. 그는 그 목사와 인간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자신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라고 간주합니다. 주일날 교회 출석하고 목사의 설교를 듣기만 하면 종교생활이 충족된다는 것입니다.
밀턴의 말을 계속 인용해 보겠습니다. 이 부자는 종교가 자기 내면이 아닌 바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자는 목사가 자기 집을 방문하면 종교가 자기에게 가까이 왔다고 말하고, 집을 떠나면 종교가 자기에게서 멀어졌다고 말합니다. 아주 편리한 신앙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사는 건 제멋대로 탐욕스럽게 살면서 목사 설교 듣고 교회 출석만 열심히 하면 종교적 구원도 저절로 확보된다는 것입니다. ‘신앙 따로 삶 따로’의 따로국밥 신앙을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겁니다.
밀턴의 비유에 등장하는 이 부자는 목사와 교회를 종교로 삼는 전형적인 교회주의자의 모습니다. 참 신기하죠? 삶과 신앙을 철저히 분리시키는 크리스천, 교회 출석을 신앙생활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교회주의가 밀턴 시대 잉글랜드에도 널리 성행했음을 보여줍니다. 하긴 예수 시대에도 바리새인들이 있었지요. 교회주의는 실로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교회주의는 인간의 DNA에 새겨진 본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밀턴이 들려준 이야기는 실감나게 이해됩니다. 교회에 가서 예배에 참석하고, 목사님에게 융숭하게 대접도 잘 하고, 헌금도 잘 바쳐서 장로, 집사도 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저 분은 참 믿음이 깊어, 신앙이 좋아, 아주 헌신적이야,” 이런 칭송을 듣지만, 일단 교회 울타리를 빠져나오기만 하면 세상 사람보다 수준 낮은 행태를 보여주는 교회주의자들의 행태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보면 왜 <아레오파기티카>를 고전이라 부르는지 알 것 같습니다. 무릇 고전이란 시공을 초월하는 보편적인 인간 현상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밀턴이 강조한 것은 개인의 양심과 이성에 바탕을 둔 독립신앙입니다. 이 개인주의적 독립신앙을 모범적으로 보여준 인물이 바로 김교신입니다. 성서조선을 15년 동안이나 단독으로 발간한 것은 선생이 독립신앙으로 살았음을 보여주는 산 증거가 됩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자이자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보여준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신앙에 의해 각성된 독립적인 인격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선생이 일생 동안 해온 일들은 누가 강제로 시킨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흔히 소크라테스를 지행일치의 철학자라고 합니다만, 김교신과 밀턴 또한 지행일치의 신앙인이었습니다. 대단히 의지가 강한 타입입니다. 먼저 밀턴부터 볼까요. 밀턴은 신앙이 곧 삶으로 구현되는 철두철미한 지행일치의 삶을 살았습니다. 청교도혁명 후 혁명 정부에서 외무부장관 직을 맡아 10년 동안 공직에 헌신하느라 과로한 나머지 시력을 잃기도 했습니다. 밀턴은 만년을 두 눈의 시력이 완전히 잃은 채 장님으로 살았고, 그 상태에서 <실낙원>을 썼습니다. 혁명이 실패로 끝나고 왕정복고가 되면서 혼란 통에 재산을 거의 다 잃고 말았습니다. 이 때 국왕 찰스 2세는 사람을 보내 공화주의자인 밀턴을 회유해 왕당파로 전향시키려 한 적도 있습니다. 밀턴이 이 때 생각만 바꿨다면 모든 물질적 어려움을 털어버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밀턴은 자신의 종교적, 정치적 신념을 죽는 날까지 지켜냈습니다.
김교신의 지행일치도 대단했습니다. 한국기독교의 암흑시대라고 하는 1930년대에 개신교건 천주교건 할 것 없이 대부분이 민족을 배신하고 일제에 굴복하던 무렵, 선생은 맑은 지조를 끝까지 버리지 않았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김교신이 일제 때 일본인 스승으로부터 신앙을 배운 것 때문에 미국 선교사 영향을 크게 받은 한국 기독교계에서 백안시당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일제 말기에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키고 민족을 배신하지 않은 인물은 김교신이었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도쿄고등사범학교 영어과에 진학했다가 1년 만에 지리박물과로 전과한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문필을 수련하기보다는 농축에 뜻을 두었던 자요, 신학을 연구하기보다는 천연계(자연계)를 상대하는 박물학에 기울어졌던 자다.” 머리로 하는 관념의 과잉을 경계하고, 팔다리를 움직이는 실천에 뜻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앎과 실천, 신앙과 삶을 철저히 일치시킨 선생의 삶은 무엇보다도 김교신전집 ‘일기’에 생생한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밀턴의 신앙(개인주의 신앙 또는 독립신앙)은 김교신의 무교회주의와 매우 흡사합니다. 밀턴은 기독교의 어떤 분파도 따르지 않으며 오직 성경만을 고수한다고 천명했습니다. 밀턴은 신자가 특정 교회의 출석을 강요당하거나 억지로 떼밀려 예배에 참석해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신자 개개인은 하나님의 인도와 성령의 빛을 받음으로써 스스로 성경을 해석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 권력이라 할지라도 개인에게 종교적 일치(특정 교리의 신봉)를 강요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이 밀턴의 믿음이었습니다. 실제로 밀턴은 만년에 특정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가정 예배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무교회주의자들이 하고 있는 가정 예배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18세기 영국의 프랜시스 펙Francis Peck(1692-1743)이란 밀턴 연구자는 만년의 밀턴의 종교적 태도가 “무엇보다도 퀘이커교에 가까웠다”고 평가했습니다. (아마도 현존하는 기독교 분파 가운데 무교회신앙과 가장 가까운 것은 퀘이커교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연구자는, 밀턴의 신앙이 퀘이커교와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밀턴이 퀘이커교와는 달리 군대와 전쟁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말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무교회주의는 병역 문제에서 퀘이커교보다는 밀턴과 같은 입장을 취합니다. 병역문제에 거부반응이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밀턴은 퀘이커교보다는 무교회주의에 훨씬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프랜시스 펙이 18세기가 아닌 20세기 사람이고, 무교회주의의 존재에 대해 알았더라면, 아마 밀턴의 신앙적 입장이 무교회주의와 일치한다고 평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밀턴은 제2, 제3의 끝없는 종교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을 ‘The Reformation’ 대신 ‘reformation’이라고 썼습니다. 정관사 ‘The’를 없애고 소문자를 써서 종교개혁을 일회적인 사건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종교개혁은 낡은 껍질을 벗어 던지며 영구히 지속해야 하는 과제였습니다. 이거야말로 무교회주의 진영에서 항상 강조하는 내용 아닙니까? 밀턴의 종교개혁에 대한 시각이 무교회주의와 정확히 일치함을 알 수 있습니다.
민족주의 김교신과 밀턴의 개인주의 신앙은 요즘 언론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회자되는, 파편화된 개인주의(이기주의라고 해야 맞습니다)가 아닙니다. 두 사람의 개인주의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김교신과 밀턴은 신앙 진리를 통한 이웃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두 사람에게 이웃 사랑이란 곧 조국에 대한 사랑을 의미했습니다. 김교신의 제자인 노평구 선생은 평소 이런 말을 종종 했습니다. “우리 사회를 향상시키지 못하는 신앙은 쓸데없는 신앙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김교신과 밀턴 두 사람의 신앙은 이웃(즉 민족과 공동체)의 정신적 수준을 향상시키고자 했습니다. 김교신이 조선을 사랑했듯이, 밀턴 또한 그의 조국을 사랑했습니다.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로서, 그리고 자각한 개인으로서 하나님과 조국을 향해 헌신했습니다.
앞서 영국이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를 물리치고 국위를 선양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전쟁에서 한 차례 이겼다고 해서 영국이 단박에 선진국 대열에 올라선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의 우리로서는 얼른 납득하기 힘들지만 17~18세기 영국은 유럽에서 열등감에 찌든 변두리 국가였습니다. 물론 영국은 근대 초기의 지리상발견 이후 새롭게 개척한 신세계와의 교역을 통해 막대한 상업적 이익을 얻었습니다. 설탕, 담배, 향료, 노예 등을 교역함으로써 영국 상인들의 주머니는 두둑해졌습니다. 부유해진 것은 영국만이 아니었습니다. 유럽 전체가 신세계와의 접촉을 통해 부유해졌습니다.
하지만 유럽 각국 사이에는 문화적 격차가 크게 벌어져 있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문화 선진국은 단연 이탈리아와 프랑스였습니다. 영국인, 독일인, 러시아인, 스칸디나비아인은 자신들의 문화 수준에 대해 열등감이 심했습니다. 그들이 선망의 대상으로 여기고 부러워한 나라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였습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 두 나라 가운데 특히 이탈리아는 고대 로마 제국의 중심지로서 곳곳에 아름다운 건축물과 미술 작품이 남아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탈리아는 15세기에 화려한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워 낸 그야말로 유럽 최고의 ‘문화 선진국’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영국은 유럽의 서북쪽 끝에 붙어 있는 변두리 2류 국가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 행세깨나 한다는 영국인 가운데 이탈리아에서 2, 3년간 체류한 경험을 갖지 못한 사람은 시골뜨기 취급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18세기 영국 문인 새뮤얼 존슨(흔히 존슨 박사로 불리죠?)은 “이탈리아에 다녀오지 않은 사람은 항상 열등감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그 정도로 영국인의 이탈리아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했습니다. (한국 사람이 미국에 콤플렉스 느끼는 것처럼 말입니다.) 스칸디나비아, 독일, 러시아 등 유럽 북부의 귀족들도 재빨리 유행을 뒤따랐습니다. 이탈리아 여행 붐이 인 것입니다. 18세기 유럽의 이 같은 이탈리아 여행 붐을 ‘그랜드 투어’라고 합니다. 그것은 사실상의 해외유학이었습니다. 비용도 요즘 돈으로 치면 수억 원이 소요되는 호화판 유학이었습니다. 밀턴은 31세 되던 해에 1년 3개월 동안 프랑스를 거쳐 이탈리아를 여행했습니다. 이탈리아에 가서는 가택연금 상태에 놓여 있던 천문학자 갈릴레이의 자택을 방문해 교분을 쌓기도 했습니다.
후진국인 영국 출신인 밀턴은 문화 선진국 이탈리아 여행을 하는 동안 조국에 대한 사랑이 더욱 커졌습니다. (미국 다녀온 우리나라 지식인들의 경우 미국 사랑이 더욱 커지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밀턴은 해외 유학을 통해 영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오히려 강해졌습니다.) 영국이 비록 유럽의 변방이라고는 하나 주눅 들 필요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우리나라 엘리트들은 미국이라면 주눅이 들어서 껌뻑 죽죠.) 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지 2년이 지난 다음 밀턴은 이탈리아 여행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내가 무엇인가 후세를 위해 글로 쓰게 된다면…… 내 조국을 명예롭게 만들고 지식을 충만케 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말고는 달리 고려할 것이 없다. ……나는 모든 근면과 기예를 다 발휘하여 나의 모국어를 아름답게 장식하는데 사용할 것이다. …… 이 섬나라에 사는 나의 동포 시민들 사이에서 일어난 가장 훌륭하고 슬기로운 일들을 모국어로 전달하고 해석하는 자가 되련다. 아테네인, 로마인, 근대 이탈리아인, 그리고 고대 히브리인의 가장 우수한 최고의 지성이 그들의 조국을 위해 했던 그 일을, 나 또한―무엇보다도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나의 조국을 위해 하고자 한다. 혹시 라틴어로 글을 쓰면 해외에서 더 큰 명예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나, 그런데 관심을 두지 않고, 이 영국 땅을 나의 세계로 삼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윗글에서 마지막 문장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밀턴 시대의 영어는 변방 언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영어로 작품을 써봤댔자 전 유럽에서 명예를 얻을 전망은 희박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밀턴은 라틴어로 글을 써야 국제적 명성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불이익에 개의치 않고 모국어인 영어로 작품 활동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모국어로 시를 써서 조국을 명예롭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밀턴이 라틴어 실력이 변변치 않으니 그런 소리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네요. 밀턴의 라틴어 실력은 전 유럽에서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탁월한 라틴어 실력 덕분에 크롬웰 혁명 정부에서 10년간 외무부장관직을 수행했습니다. 당시 유럽의 외교어는 라틴어였거든요.)
밀턴은 이탈리아 여행을 하기 전부터 일찌감치 시인으로서의 자질과 능력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온 뒤 자신의 목표에 대한 방향성을 확고히 했습니다. 밀턴은 모국어에 대한 한층 더 깊은 애정을 품고 영어로 된 위대한 작품을 남기겠다는 야심을 간직한 채 귀국했습니다. 그의 야심은 후일 실낙원, 복낙원 등으로 구체화되기에 이릅니다.
후진국 문학청년 밀턴이 모국어에 대해 품었던 애정은, 김교신 선생의 조선에 대한 사랑과 참 많이 닮았습니다. 김교신 선생은 젊은 날 함흥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던 무렵 3.1운동에 가담했다가, 쫓기듯이 일본 유학길에 올라 부산항에서 연락선에 오릅니다. 선생이 현해탄을 건너던 연락선 갑판을 구르며 “나는 아무래도 조선인이다”라고 부르짖었다는 이야기는 꽤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식민지 조선 청년으로서 일본으로 향하던 김교신 선생은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철심(鐵心)”을 품고 동해를 건넜다고 일본행 당시의 심경을 술회하고 있습니다.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불구대천의 원수 일본에 대한 복수심이 타올랐습니다.
이렇듯 적개심에 불타던 청년 김교신의 나라 사랑은 스승 우치무라 간조를 만나면서 질적 변화를 겪습니다. 그의 눈에 우치무라의 모습은 어떻게 비쳤을까요?
“국적(國賊)으로 전 국민의 비방을 받으면서도 조국 일본을 저버리지 못하는 애국자의 열혈(熱血), 이것이 나를 끌어당겼다. 조선에 만일 그와 같은 애국자가 출현했다면 쏟아 바쳤을 경모(敬慕)의 염(念)을 그에게 바쳤다.”
우치무라의 진리에 바탕을 둔 나라 사랑이 식민지 청년의 조국애를 승화시킨 것입니다. 이후 선생의 조국애는 무력이나 정치 투쟁이 아닌, 성서의 진리에 바탕을 둔 나라사랑으로 승화됩니다. 무교회주의 기독교신앙을 통해 새로운 차원으로 업그레이드된 것입니다. 성서조선이라는 잡지의 이름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선생은 일생 한국인의 정신적 수준을 끌어올리는 일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양정학교 교사 시절 김교신은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조선을 알고, 조선을 먹고, 조선을 숨 쉬다가 장차 그 흙으로 돌아가리니 불역열호(不亦說乎)” 선생은 학생들에게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항상 당부했습니다.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할 것을 촉구한 것입니다. 선생의 한 제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시 우리가 배우는 지리과목의 대부분은 일본 지리였고, 우리나라 지리는 겨우 두서너 시간뿐으로 마치도록 교과서가 씌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의 일 년을 통해서 우리나라 지리만을 배웠습니다. 자기를 분명히 알아 가는 것이 인생의 근본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스스로를 멸시하기 쉬웠던 우리들은 조국에 대한 재인식을 근본적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분명히 알아가는 것인 인생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즉 개인의 정체성과 민족의 정체성을 깨우치라는 것입니다. 선생은 일제의 지배 하에서 자학에 빠지기 쉬운 다감한 청년들이 우리의 지리와 역사를 통해 민족적 긍지와 포부를 가져줄 것을 소망했습니다. 성서조선 제62호(1934년 3월)에 “조선지리소고(朝鮮地理小考)”를 쓴 것도 이러한 동기에서였습니다. 이 글은 정말 명문입니다. 선생은 이 글에서 민족의 이상을 이렇게 설파합니다.
“조선 역사에 편안할 날이 없는 이유는 한반도가 동양 정국의 중심임을 여실히 증거 한다. …… 동양의 수많은 고난도 이 땅에 집중되었거니와, 동양에서 산출해야 할 바 무슨 고귀한 사상, 동반구의 반만년의 총량을 대용광로에 달이어(煎) 낸 정수는 필연코 이 반도에서 찾아보리라.”
조선이 동양 세계의 중심이며, 동양 정신, 동양 사상의 진수는 한반도에서 표출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민족의 미래에 대한 이런 긍지와 자신감을 왜소해진 요즘의 우리 지식인들에게서는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미래에 대한 비전도 사명감도 찾아볼 수 없는 지식인들의 풍토가 안타까울 뿐입니다.
각자 태어난 자리는 달랐지만 김교신과 밀턴은 각자 조국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쏟아 부었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프로테스탄트 신앙에 의해 각성한 개인으로서 각자의 조국과 동포를 위해 분투했습니다. 조국의 정신적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헌신했습니다.
밀턴의 모국어 사랑이 어떤 결실을 맺었는지는 오늘날 영어의 위상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밀턴의 결단은 수백 년이 흐른 뒤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변두리 언어가 세계어로 탈바꿈한 것입니다. 아마 밀턴 자신도 영어가 이 정도까지 커질 줄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김교신의 민족 이상 역시 밀턴에 못지않게 웅대했습니다. 5000년 동양 역사에서 산출되어야 할 가장 고귀한 사상이 한반도에서 등장하리라고 전망했습니다. 우리 한민족이 동양의 대표 주자로서 세계사에 정신적으로 기여할 것을 꿈꾸었습니다. 비록 아시아의 변방 소국에 지나지 않았고, 게다가 비참한 식민지 상황이었지만 선생은 움츠러들지 않았습니다. 우리 민족의 장래에 대해 무한한 자부심과 긍지를 품었습니다. 마치 독수리가 날갯짓 하며 하늘로 솟구치는 듯합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정체성 2008년 경제위기가 닥쳤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1997년의 IMF 사태 11년 만에 다시 찾아온 위기였지요. 당시 우리나라 지식 사회 일각에서는 한국 현실을 연구하는 경제학자를 국내 대학에서 찾아보기 힘들다는 탄식이 나왔습니다. 대학의 연구 업적 평가 기준이 미국의 저명 학술지에 실린 논문 횟수이기 때문입니다. 국내 학술지보다 미국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이 3~5배 높은 점수를 받는데, 미국 경제학회지에 논문이 실리려면 미국 경제학계의 이슈를 따라가야 합니다. 굳이 한국 현실을 연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국 대학에서 한국 학생들을 가르치며 월급을 받는 학자들이 정작 한국 경제 현실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는 겁니다.
정치인들이야 그러려니 합니다. 어차피 한국현대사에서 소명으로서의 정치를 펼친 정치인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구경하기가 힘듭니다. 조선조 이래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이해득실에 따라 나라 팔아먹는 것도 서슴지 않는 부류였으니까요. 지금도 일부 정치인은 뼛속까지 친미라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민족 이상’이란 약에 쓰려 해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의 100년, 500년 뒤를 내다보는 비전도 찾을 수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국적이 의심스러운 검은머리 미국인들이 권력을 잡고 어찌하면 더 해먹을까만을 궁리하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이야 그러려니 하지만 명색 지식인이라 하는 학자들마저 이 지경이니 이건 문제가 심각합니다. 경제학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인문사회과학 전반이 그런 성향을 띠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배제된 채 외국 학계의 경향만을 성찰 없이 따라다니는 연구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정체성에 대한 자각이 없습니다. 몇 해 전 일입니다. 서울대 나오고 미국에서 박사 공부를 해온 모 국립대 교수와 ‘번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뜻밖의 말을 듣고 당혹스러웠습니다. 그 교수 말이 우리말 번역서가 태부족하다면 일본말을 배워서 읽으면 되지 않겠냐고 반문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일본 식민지로 돌아가자는 말로 들리더군요. 요즘 유행어로 이건 완전히 ‘멘붕(멘탈 붕괴)’ 수준입니다. 당시에 받았던 충격을 저는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한국인으로서 모국어에 대한 긍지와 자존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멘붕 지식인’의 민낯을 목격해버린 것입니다.
한 나라의 엘리트 집단이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방식은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자신을 미래 비전을 가진 한 국가의 ‘시민’으로 보는가, 아니면 뿌리 뽑힌 ‘난민’으로 보는가 하는 것입니다. 난민은 난민촌을 영속적인 곳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곳은 난민수용소입니다. 일단 유사시엔 미련 없이 다른 곳으로 떠나면 그만입니다. 백년대계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하루살이처럼 임시방편으로 당대에만 잘 먹고 잘살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소속 집단에 대한 애정이나 시민적 의무감, 장기적 비전이 있을 리 없습니다. 겉모습이야 번지르르하지만 한 꺼풀 벗기고 보면 ‘막 사는 것’이 이들의 특징입니다. 온 나라를 수익모델로 삼고, 일가친척을 동원해 그저 해먹을 궁리만 일삼는 자가 청와대에 버티고 있지 않습니까?
이 나라는 난민촌이 아닙니다. 거적때기 덮고 비, 바람이나 피하면서 살다가 좋은 자리 찾아내면 옮겨가는 난민촌이 아닙니다. 갈고닦아 후손들에게 물려줄 고귀한 자산입니다.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조상이 되어야 합니다. 밀턴, 김교신에게서 우리는 원대한 민족이상을 배워야 합니다. 밀턴의 모국어 사용 결단은 그가 죽은 후 수백 년이 지나서 결실을 맺게 됩니다. 반만년 동양 역사에서 산출되어야 할 가장 고귀한 사상을 한반도서 찾아보리라고 했던 김교신의 이상도,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는 100년, 500년 후에는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밀턴과 김교신의 개인주의와 민족주의는 (개인과 민족의) 정체성 확립이었습니다. 정체성 확립의 토대는 프로테스탄티즘이었습니다. 종교개혁 정신이었습니다. 개인주의와 민족주의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습니다. 이기주의를 그럴듯하게 포장한 사이비 개인주의도 있고, 국수주의를 포장한 허접한 사이비 민족주의도 있습니다. 이런 너절한 개인주의, 민족주의가 근래에 우리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하지만 김교신과 밀턴이 천명한 개인주의, 민족주의야말로 본받을만한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삶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프로테스탄티즘의 정체성을 잃지 않은 기독교가 전제되어야만 합니다. 종교개혁 정신과 멀어지면, 개인도 민족도 정체성을 확립할 수 없습니다. ‘성서’와 ‘조선’을 말한 김교신의 무교회주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정체성에 충실한 기독교입니다. 라틴어 대신 모국어를 선택한 밀턴의 신앙도 프로테스탄티즘의 정체성에 충실한 기독교였습니다. (두 개의 J를 말했던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도 프로테스탄티즘의 본령을 잃지 않은 기독교였습니다.)
김교신과 밀턴의 프로테스탄티즘은 개개인의 달란트를 발견하고 인격적으로 독립하게 만들어주는 기독교입니다. 김교신과 밀턴의 프로테스탄티즘은 우리 민족의 장점을 살려내고 발전시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세계사적 사명을 다하게 해주는 기독교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옆으로는 조국을 바라보며, 각자 자신이 서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달란트를 바쳐야합니다. 이 일이 단기간에 될 수는 없습니다. 밀턴 사후 수백 년 뒤 영어가 세계어로 확립되었듯이, 김교신 선생이 동지를 100년, 500년 뒤에 기대하겠다고 했듯이, 멀리 내다보고 장기적인 비전을 가져야만 합니다. 무엇보다도 젊은 세대의 각성과 분발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프로테스탄티즘의 정체성을 까맣게 잊어버린 한국 교회에는 크게 기대할 바가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지난 100여 년 동안 한국 교회가 거둔 열매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열매 자체가 이미 교회에 대한 심판입니다. 모쪼록 이 땅의 젊은이들이 김교신과 밀턴 두 선각자에게서 배우는 바가 있기를 바랍니다. 두 분은 우리 시대의 훌륭한 롤 모델입니다. 두 분처럼 민족의 미래, 우리 사회의 미래에 대한 큰 비전을 품은 젊은이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
첫댓글 강연 내용이 좋아 옮겨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