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천 시인>>
<<여태천 시인>>
* 1971년 하동 출생.
*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문학박사.
* 200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 시집 : 『저렇게 오렌지는 익어 가고』, 『스윙』, 『국외자들』, 『감히 슬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2021. 제31회 편운문학상 시 부문.
* 동덕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여태천 시인>>
휴일의 감정/여태천
거울 앞에 서서 뒤를 본다.
흠칫
진짜 없는 것들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있다가
있는 척하다가
등 뒤에서 사라진다.
꾸부정한 자세
얼굴에 패인 주름
온데간데없는
생년월일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누군가의 생일 같은
오늘
맞은편 아파트 외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 그리고
실금들
지나간 모든 것들을 믿을 수 있을까.
그런데 이상하지.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북극의 빙하처럼
화학 공식에도 없는
이것은
없는 것보다 못한/여태천
어둠이 무릎까지 차올랐다.
주머니에 넣은 손을 어쩌지 못하고 망설일 때
하나둘씩 카드를 접기 시작했다.
마감뉴스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재수 없다.
메시지는 저 멀리서 온다.
간절하지 않은 것은 없으니
상황은 언제나 최악이다.
한 사람은 이제 걷기 시작했지만
한 사람은 지금 막 주저앉는다.
누군가를 웃게 하는
누군가를 울게 하는
언제나 몸은 피가 모자라고
그 사실은 숨길 수 없다.
만질 수 있는 따뜻한 손이 아니었다.
너무 가까이 하면 안 되는 것이 있다.
목소리들/여태천
사람들이 모였다.
광장 어딘가에
가느다란 두 다리로 서 있었다.
무릎이 시린 날이었다.
사람들이 모였다.
땅을 뚫고 올라오는 저녁의 파처럼
사람들이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사람들이 모였다.
생각들이 모였다.
누구 하나 아프지 않다고?
사람들이 목소리를 조금 더 내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였다.
옆에 서 있는 사내의 흰 머리칼이
어디를 가리키는지
생각들이 밖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안녕에 대해/여태천
내가 뭘 동의했는지 모르겠다.
하루가 멀다 하고 걸려 오는 전화.
'안녕하십니까'로 시작해서
낮고 조용히 파고드는 목소리.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동의서 얘기도 하고
거기에 내가 동의했다고도 하고
그래서 이 좋은 소식을 전하게 되었다고
복음 전하는 목소리.
내가 수줍음을 많이 타는 걸 알고 있는 친구일까.
아니면 일면식 없는 동사무소나 세무서 직원일까.
제대 말년까지 괴롭히던 눈이 찢어진 이 병장이라면,
나는 그만 덜컥 겁이 난다.
이렇게 아무도 만나지 않고
꽁꽁 문을 걸어 잠그고
사람이 무서워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 나를
도대체 저이들은 어떻게 알아낸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몇 날 며칠을 생각해도
곰곰이 또 생각해도
나는 무섭다 무섭기만 하다.
안녕하시냐니?
사람이 죽어도 눈도 끔쩍하지 않는 이 시절에
마음만 먹으면 누가 뭐하는지 훤히 알 수 있는
저이들이 무섭기만 하다.
무서워서 파리만큼 작아져야겠다.
저이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쥐새끼 모양 꼭꼭 숨어야겠다.
아름답고 불길한/여태천
밤이면 감정을 하나둘씩 그러모았다.
낮 동안 사두었던 약봉지들.
불필요한 말을 사그라지게 해줄 노란 물약.
저 알약은 기억을 지워줄 것이다.
캡슐 속에 가득 담긴 하얀색 알갱이들.
젖은 하늘에서 별이 빛났다.
그랬으면,
모래 위에 그림을 그렸던 건 누구였을까?
아침이면 누구도 닮지 않은 얼굴이
빤히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이 밤은 언제 다 지나가는 걸까?
울음이 그치지 않았는데,
손을 그리고 있었다.
연필을 쥔 채 피를 흘리고 있는 손.
왼쪽 가슴이 축축하다.
한 사람의 가슴을 쓸어내리고
깊이도 모르는 마음을
휘젓던 손이다.
네게브 사막을 건너가는
메마른 그의 손이
축축하게 젖어 있다.
그랬으면,
메아리/여태천
나는 8g씩 가벼워져서
며칠 뒤엔 손금이 없어질 것이다.
흔적이 남지 않아야 할 텐데,
나는 닿을 듯 닿지 않는 가지의 끝을
생각한다.
눈, 코, 입, 피부는 먼지처럼 날아가 쌓이다가
진흙으로 뭉개지다가
한 달이 지나면
연기처럼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영원히
가시의 편이다.
어제도 오늘도
머리카락이 점점 자라듯이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들이 뼈가 되고
바람이 될 것이다.
누군가 나를 받아들일 때까지
오늘의 꽃이 내일의 아침을 열 때까지
갈비뼈를 훑고 지나갈 것이다.
말들은 하나씩 부서지며
마른하늘을 갈라놓을 것이다.
가이샤의 것은 가이샤에게
이건 오래된 이야기의 반복이다.
월요시장/여태천
어제와 같이 오늘의 날씨를 생각하며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본다
향료를 싣고 인공의 도시를 찾아다니는
푸른 눈의 낙타
길게 속눈썹을 늘어뜨린 채 걸어오고 있다
도시의 사막에서 발이라도 빠질까
조심조심 걷는다
되새김질을 하며 얇은 모래의 언덕을 오르는
낙타의 가쁜 숨소리 덜 덜 덜
오래 된 아라비아의 음악이 들린다
전국적으로 황사가,
기상 캐스터의 또박또박한 음성이
모래의 귀를 밟고 지나갔다
단단하게 굳은 모래의 집들 사이에
사람들이 떼를 지어 웅성거린다
늙은 낙타의 등에서는 재빨리
지중해의 과일과 고랭지 채소가 내려지고
천막 안에는 남태평양의 비린내를 풍기며 생선 이 쌓인다
풀 한 포기 없는 곳에 장이 선다
오늘은 비를,
며칠째 물과 먹이를 찾고 있는 원시인의 표정으로
창밖을 본다
영 글렀다
황사는 벌써 아파트 단지를 점령한 모양이다
혹시나 비라도 오면, 그래서
이 오랜 사막의 구릉을 내려갈 수 있다면
햇빛이 황사와 부딪혀 나는 소리가
들리다 말다 그랬다
움직일 때마다 바싹 마른 몸이
먼지를 피우며 스르르 흘러내렸다
원 포인트 릴리프/여태천
투수는 조심스럽게 볼을 던졌다.
전대미문의 구질을 구사한다는
진지한 표정으로.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한 저 투수의 볼과
볼의 궤적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핀치히터의 풀스윙.
가운뎃손가락을 높이 들고
오늘 처음 만나 악수를 나눈
당신과 나는 편향적인 사람.
비밀을 알아낸 자의 표정으로
왼손 투수는 다시 볼을 던지고
저 볼은 어디에 가닿을 것인가.
주심은 언제쯤 스트라이크존을 걸치고 지나가는
저 비실비실한 볼을 이해할 것인가.
가장 편향적인 방향으로 생각은 날아간다.
퇴행성 감정/여태천
이것은 정말 오래된 현실입니다
온몸의 반을 잃고 저리 힘겹게 헤엄치고 있는 니그로,
어쩌면 저 열대어는 다량의 눈물을 흘리고 너그러워진
게 틀림없습니다
말브량슈는 저 눈물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지만
눈앞에서 오래 머물다 사라진 사람은 군데군데 구멍
이 뚫린 지루한 표정이었습니다
혼자 찬밥을 물에 말아 늦은 점심을 먹고 있는데
정말이지 하늘은 맑았고 구름은 한 뭉텅이의 털실만
했습니다
무작정 한 사람을 그리워하기로 했습니다
내내 소식만 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밥이나 한번 먹자고 했던 것이 가시처럼 목구멍에 걸
렸다가도
불현듯 몸통의 반이 없어진 열대어 생각에
또 마음은 쌀뜨물처럼 몽롱해지기도 했습니다
더 이상 가져서는 안 되는 1%가 움직인 모양입니다
누구라도 불러 그 품에 안겨 따뜻해져야 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나는 비합리적인 것들에 대해 무력하기 짝
이 없나 봅니다
喜,怒,哀,樂,惡,慾,愛 도무지 정리되지 않는 겨울
이었습니다
대상에 대한 적절한 행동법칙을 잊어버린 지 오랩니다
어항 밑을 기고 있는 거북이처럼 아주 느리게 저녁의
골목을 걸어갑니다
마땅히 도리가 없어 그냥 천천히 잊기로 했습니다
결국엔 이것도 몇 가지로 정리될 것입니다
큰 바위 얼굴/여태천
그분은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얼마나 오랫동안 한쪽만 보고 있었는지
목과 뺨이 빌딩처럼 빛났다.
그분은 선천성 장애라고 했다.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항상 오른쪽만 본다고 했다.
언젠가 그의 출판기념회에서는
부모님의 말씀 때문이라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옳은 일 하기 어렵다는
그분의 우회적인 말은 사람들에게 신념이 되었다.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사람들은 그분을 사랑했다.
그분이 교통사고로 왼쪽을 볼 수 없다고 했을 때
연말모임에 왔던 사람들은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언제부턴가 그분의 목소리가 조금씩 커졌다.
왼편에 앉은 사람들을 위해서라고 g했다.
하고 싶은 말도 곧장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직선처럼 명쾌하다고
그냥 시원해서 좋다고 했다.
그분은 여전히 오른쪽만 보고 있다.
그분이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걸 본 사람은 없다.
가끔 그분도 놀라는 눈치다.
실종에 관한 보고서/여태천
스무 살의 버스에서
서른 살의 극장에서
누구는 없다.
누구도 뉴스를 기다리지 않으며
누구를 명단에서 찾을 수 없다.
마흔 명의 남학생과
쉰 명의 남자 가운데 누구는 없다.
예순 명의 여자들이
일흔 잔의 커피를 마셔도
누구를 기다리고
누구와 만날 것인가를 모른다.
누구도 취향과 결벽에 대해 모르며
누구의 사실과 비밀을 이야기하지 않으며
누구는 눈마저 마주치지 않는다.
누구나 안경을 계속 바꿔 쓸 뿐이다.
여든 개의 안경점에서
아흔 개의 안경을
뿔테안경과 무테안경과 알 없는 안경을
차례로 써 보아도
누구도 세계를 가지지 못한다.
안경은 누구의 발견이 아니다.
누구는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만
누구의 것이 아니므로
누구를 기다리지 말아야 한다.
발자국/여태천
이제 도착했구나
기억나니
오후의 저 벤치
저 멸치국수집
저 기차역의 플랫폼
눈에다 묻고
입에다 묻고
마음에다 묻고
잘 견뎠지
이런 저녁
다시 안 올지 몰라
기도문처럼
흩어지는
골목/여태천
조금 우스워지고 싶을 때
골목을 걷는다.
김씨 아저씨가 구워 내는
붕어빵 냄새는 즐겁다.
달콤한 붕어빵 생각에
나는 조금 가벼워진다.
종일토록 종이만 줍는 이씨 노인과
날씬해지고 싶은 홍씨 아줌마는
황금잉어빵을 먹으며
기억상실증에 걸린 붕어처럼
매일매일 골목을 이야기한다.
아이들은 꼬리가 잘릴까 두려워
꼬리를 물고 골목을 달리지만
골목은 붕어의 것이다.
나는 삼다수 한 병을 들고
목구멍이 간질간질할 때까지
골목을 걷는다.
골목은 사라지기 좋은 곳이다.
대화/여태천
햇살이 내리고 있다.
한 나무가 다른 나무에게
처음 가지를 뻗는다.
간절한 손짓이다.
또 다른 나무의 귀에 대고
바람은 또 무슨 글귀처럼
은밀하게 농담을 한다.
새로 태어나는 단어 앞에서
자꾸만 흔들리는 너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입술에 묻은 빨간 침이
잠깐 빛난다.
번역/여태천
나는 당신과 달라.
나는 당신을 몰라.
인격이 없는
투명한 두 문장을 가슴에 끌어안고
나는 울었다네.
한때 나는
완벽하게 마음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향해
부서지는 모든 기표에 전념했지.
아, 무엇이 그리 짧았던가.
가늘게 떨어지는 소리의 발자국이여.
나는 이제
한 문장에서 한 문장으로 건너가는 죽음처럼
오래 슬프구나.
낱말과 낱말을 건너
비문처럼 자유로웠다면
나는 당신과 다르고
나는 당신을 몰랐을 텐데.
여자의 바깥/여태천
한 여자가 울고 있다
그러니 여기 이 말은
온전히 그 울음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여자의 울음이 어디를 가리키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날렵한 눈과 시원한 이마를 지나
점점 커지는 여자의 둘레
쌓이고 쌓인 여자의 바깥을 천천히
눈물이 덮고 있다
여자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공손하게 쓸어올리는
저 검은 머리카락이 조용히 빛날 때
나는 마지막인 것처럼 어둠 깊숙이 손을 넣어
여자의 차가운 가슴을 만져본다
단 하나의 문장도 완성할 수 없는
납작한 감정
어느새 다 새어버린 여자가 바닥에 누워 있다
더 이상 일어설 수 없을 만큼
평평해진 여자가
젖은 눈을 깜빡인다
떨리는 손가락으로도
파닥거리는 목덜미나 가냘픈 입술로도
재구성할 수 없는 여자
오직 기우뚱한 침묵으로
문장을 만드는 여자
나는 그 여자의 바깥에 서서
열심히
한 여자의 크기를 재고 있는 것이다
출구/여태천
사전을 들고 가기엔 어울리지 않는 곳
자꾸만 빨간 코트에 눈이 가는 날
한 알의 소마*가 필요한 날
구급차가 크게 달려오다
천천히 사라질 때
나는 12월 31일처럼 납작해지고
심장의 소리는 일정하다
커피에서 지난여름의 햇빛을 뽑아낼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한 뼘 정도의 입구가 생기겠지
따뜻하게 잠을 잘 수 있는 곳
아니라면
빠르게 되감기는 자막 없는 영상 속으로
시간은 점점 가늘어져
이제 모든 일은 한꺼번에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이제
가장 가까이 간다
* 『멋진 신세계』에서 사람들은 신경 안정제인 소마로 고민이나 불안을 해결한다.
오래된 선물/여태천
오랜만이야
당신은 차갑게 몸을 감싸고
테이블 위에 하나씩
상자를 내려놓는다
빨간 사과가 데구르르
당신에게로 굴러간다
이 철지난 걸
아직도 가지고 있었다니
깜깜한 우주로 떠나는
우리의 작은 상자
정말 보고 싶었는데
점점 알아보기 힘들구나
마지막 목소리/여태천
자주 해 지는 시간이 찾아와서
나는 무서웠다
어디쯤에서 저 끝은 시작되었을까
안녕 잘 지내니, 라는 말을
썼다가 지우고 다시 쓰는
종이는 종이대로
글씨는 글씨대로
이미 어둠에 하나씩 발을 들여놓고서
나는 자주 해 지는 시간을 기다려
저 어둠의 음질을 기억하기로 했다
그러고 나서야
자주 해 지는 시간이 와도, 그래 이제는
괜찮아, 라는 말을
별 뜻 없이 쓸 수 있게 되고
조금씩 밝아오는 쪽을 바라보기도 하는데
그때쯤에서야
괜찮아 괜찮아
사라지지 않고 반복되는 컴컴한 목소리
시간은 시간대로
감정은 감정대로
글씨는 글씨대로
괜찮은 거다
모두가 괜찮은 거다
피도 눈물도 없이/여태천
여자가 소리를 지른다.
우산도 없이
비가 오는데
죽을 듯이 소리를 지르는 저 여자에게
남자는 영혼을 팔았던 것일까.
남자는 아무 말이 없다.
흙비가 내리는 밤
아스팔트에 머리를 박고
죽어라! 죽어라!
울음을 울음답게 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스테이플러 침처럼
남자의 메마른 피부를 파고든다.
피도 눈물도 없이
한 여자가 죽겠다고 결심한 그날 밤
소리의 한가운데 서서
소리만 남은 길바닥에서
남자는 어처구니없게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고백을 위해서
남자는 우산을 버렸지만
바닥엔 남자의 영혼을 관통하지 못한
울음이 넘쳐나고 있다.
비가 오는 밤 여자는
남자의 귀를 의심한다.
영혼을 판 남자들이 귀를 막고
밤을 걷고 있다.
철학하는 여자/여태천
우리의 바깥은 고요합니다, 라고 말한 건
그녀였습니다
수채화물감 같은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으면 점점 번질 것만 같은 눈빛으로
하얀 손가락이 피어 올리는 저녁의 꽃
나는 그녀의 손을 믿기로 했습니다
언젠가는 달을 가리킬 것처럼 기다란 그녀의 손가락
다음달에는 입가의 꼬리가
조금 더 치솟아 올라갈 것이라고 믿으며
적금을 부었습니다
오래 기다리는 언어
신기하게도 그것은 그녀로부터
내일의 평온과 오늘의 절제를 배우고 난 뒤의 일
모두가 부러워하는 높이에서
잔고를 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기술
점심을 굶는 그녀의 오늘과
수줍어하는 얼굴
난 그녀의 이력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조금씩 손가락으로부터 이별하기로 한 건
혼자 말을 배워 책을 읽게 된
한참 뒤의 일이지만
오늘밤 멀리 있을 그녀에게
가능하다면 내 저녁의 허기를 꼭 돌려주고 싶습니다
10초씩, 나와 그녀 사이에 나타나는 여백
우리는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요의 바깥입니다
풍선의 기적/여태천
나는, 조금씩 멀어지는 시간에 대해 쓰고 있었지.
갑자기 흰 얼굴이 될 수 있을까.
우리가?
질문 같은 거 안 하면
차라리 그것은 지나친 시련
분명한 인식은 질문들의 끝을 통과 하고
그리고 나서야 만들어진다는 것을
어젯밤 근엄하던 그 고양이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생각했지.
어쩐지 중년의 우리라고 써야 될 것 같아.
미안하지만
이름이 뭐더라.
그건 중요하지 않아
그것은 감정이 아니라 분별이므로
그 생각에 의지하면서부터
기억과 함께 두 손을 잃고 말았지.
고양이가 남기고 간 뻗친 수염은
먼 것과 가까운 것 사이를 오고 가던 저 열렬한 기침은
슬프게도
발아래에 있는데
우리의 고민은 좀체 내려올 줄을 모르고
자꾸만 뭔가가 분명한 우리를 채우고
또 채우고 채우리라는 걸
우리가 텅 빈 풍선이었다는 사실을
이미 터져버린
어젯밤의 고양이가 알려주고 있는데도 말이야.
도대체,
연극처럼/여태천
한 번도 간 적이 없는 곳에서 오라고 한 적 없는 곳으로, 그대와 나는 뛰
어간다. 빛나는 여름을 뛰어서, 그늘지는 입가의 오후처럼 그대와 나는 기
어코 도착한다. 도착했는데 그대도 나도 없다. 기별도 없이 찾아온 것들은
그대와 나뿐이 아니다. 별이 있고, 달이 있고, 바람이 있고 ,대낮처럼 투명
한 생각이 있다. 생각의 뜻은 언제나 저 낮달까지 아득하기만 해 그대와
나는 어리둥절하다. 별과 달과 바람의 소식을, 벗어둔 안경을 쓰고도 볼
수 없는 그믐밤에, 얼음은 또 얼음과 함께 그렇게 단단하다. 호박씨 같이,
호박씨 같이,
우정의 세계/여태천
마술을 보여줄게.
눈앞에서 비둘기가 날아가고 장미가 피어나지.
하지만 약간의 진실과 행운이 필요해.
위기란 보는 사람마다 다르므로
세종로 간판에 걸린 문구들을 떠올려봐.
그리고 불편한 것들을
하나씩 지워나가야 해.
동그랗게 오므린 입으로 풍선을 만들고
친구의 눈에 맺힌 불꽃의 눈물을 보고
우린 감상적인 사람이 되는 거지.
이곳에선 누구든지 환영이야.
우리는 되풀이해서 말하기를 좋아해.
너는 뭘 내놓을 거니?
우리가 덧없이 안심이 되었을 때
해야 할 일의 가짓수가 늘어났다.
하지만, 여전히, 조금, 덜
외롭고 싶어 하는 친구들은
길가는 사람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